|
|
사랑이야기
2권 사랑 원론편
제 2장 사랑이란
소목차
1. 사랑의 정의
2. 사랑의 본질
3. 사랑의 실체
4. 사랑의 속성
5. 사랑의 힘
6. 사랑의 위력
7. 사랑을 중심한 조화의 세계
8. 평화와 행복과 완성의 기원
9. 참된 행복의 씨
1. 사랑의 정의
사랑의 기원
참사랑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느냐?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했다. 하나님이 참사랑의 이상상대가 필요해서 이 세상을 지었기 때문에 천지 창조도 참사랑에서 기원 된 것이다. (213-79)
사랑이란 무엇이냐? 사랑이란 말은 상대적 관계에서 성립되는 말이다. 아무리 전능한 하나님이라 하더라도 하나님 혼자서는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반드시 상대적 관계가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은 목적도 사랑이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기 때문에 상대가 필요해서 지었다. 다시 말하면 기뻐하기 위해서 아담 해와를 창조했다. 무엇을 중심으로 기뻐하느냐? 보고서 기뻐하는 것이 아니요, 말하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요, 만져 보고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기뻐하는 것이다. (114-12)
하나님이 피조세계를 창조한 것은 하나님도 혼자서는 행복할 수 없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말은 상대적 관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사랑도 상대적 관계에서 벌어지고, 좋다는 말도 상대적 관계에서 벌어진다. 자기 혼자서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느냐? 혼자 좋다는 사람은 미친 사람이다. 좋다, 사랑한다, 행복하다, 기쁘다 하는 것은 차원 높은 의미의 상대적 관계를 이룬 데서 찾을 수 있다. 거기에서 행복 요건의 등위가 결정된다. (61-331)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 사랑이란 혼자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혼자 하하하 좋다!고 하면서 춤춘다면 미친 하나님이다. (119-91)
사랑이란 말은 혼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희망이란 말도 혼자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생명도 혼자 독단적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연결된 입장에서 나온다. (69-61)
사랑이라는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 하게 되어 있지 않다. 사랑은 나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를 통해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상대 없이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145-215)
사랑은 자기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오는 것이다. 상대가 없을 때에는 사랑이 올 수 없다. 우리 인간을 보면, 인간은 상대적이다. 남자 앞에 여자도 상대적이요, 또 부모 앞에 자식도 상대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상대 없이는 이뤄지지 않는다. (57-120)
참사랑이란 뿌리를 어디에 두고 하는 말이냐? 하나님이 아무리 전지전능한 분이라도 그 뿌리를 하나님에게 두고 있지 않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은 참사랑의 주인공인데도 그 사랑의 뿌리를 하나님에게 두려고 하지 않는다. 사랑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람으로부터 뿌리를 심겠다고 생각한다. (177-269)
사랑의 본질에서 상대적 인연은 절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다. 사랑의 본질로서 찾아 세운 상대적 존재는, 사랑이란 것이 영원한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이상적인 본질이기 때문에 그것이 천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어긋나지 않는 한 언제까지나 남아진다. (57-91)
사랑이란 말은 독자적인 입장에서는 말할 수 없다. 혼자서는 사랑이 필요없다. 사랑은 독자적인 자리에서는 절대 성립되지 않고 상대적 관계에서만 성립된다. (200-200)
사랑은 혼자 이룰 수 없다. 아무리 잘났더라도 혼자서는 이룰 수 없다. 이것은 주체가 있으면 대상과의 관계에서 설정되기 때문에 아무리 전지전능한 하나님이라도 자기 중심으로 사랑을 이룬다면 자극과 충동을 느끼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 여건이 필요하다. (219-15)
오늘날 종교에서는 하나님은 거룩한 분이고 사람은 제일 더러운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연결시키지도 못하면서 하나님의 아들딸이 되겠다고 하는 것은 논리적인 모순이다. 그러면 무엇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직접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느냐? 그것은 사랑이다. 사랑은 상대적인 기준 없이 혼자서는 성립되지 않으므로 하나님의 사랑도 독자적으로는 성립될 수 없기에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다. (22-281)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 사랑이란 혼자서 하는 게 아니다. 반드시 주체와 대상이 있어서 상응하는 과정을 거쳐 성립된다. 주체와 대상의 관계에서 사랑이 찾아지기 때문에 하나님 자신이 사랑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혼자서는 느끼지 못한다. 반드시 대상이 있어야 한다. 그 대상이 바로 인간이다. (161-136)
사랑이란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에서부터 먼저 주고받는 과정을 거친다. 남자와 여자도 상대적 여건을 갖추어서 서로 주고받아야 존재할 수 있다. 만일 남자는 여자가 필요없다고 하고, 여자는 남자가 필요없다고 한다면 1백년도 못 가서 세계는 다 망하고 만다. 사람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즉 주고받기 위해서는 상대가 필요하기 때문에 지금까지 남자와 여자가 서로 사랑하며 가정을 이루어 왔다. 때문에 사랑이란 주고받는 작용을 일으키는 힘을 말한다. 그것은 남자와 여자가 주고받는 작용의 힘이다. (18-324)
사랑이란 뭐냐? 사랑은 돌아갈 수 있는 윤활작용과 궤도작용을 해주는 것이다. 사랑 없이는 윤활작용이 안 된다. 자동차도 움직이게 하려면 기름을 쳐야 한다. 우리가 운동하는 데도 전부 윤활작용이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운동하려면 윤활작용을 해야 한다. 최고의 기쁨의 윤활작용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은 뿌리가 영원한 하나님이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는다. 작용하면 할수록 발전하게 되어 있다. (180-163)
심정의 세계에서 한 시간 사는 것은 천년사에 자랑할 수 있고, 하루 사는 것은 만년 역사에 자랑할 수 있게끔 인생의 고귀한 것을 체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참된 사랑이다. 참된 사랑은 세포가 팽창하는 기운까지 느낄 수 있다. 그런 세계가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세계다. 그 세계는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지만 마치 화창한 봄날에 구름을 타고 날아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황홀한 세계요, 모든 세포가 춤추는 듯한 기분이 나는 세계다. (20-26)
참사랑이란 수직과 수평이 연결된 중심 사랑이다. (195-244)
사랑이란 동서가 합하는 것이요, 남북이 합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 천지가 합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구형을 이루게 된다. (225-46)
참사랑이라는 것은 360도 영점이 있으면 하나에서부터 시작해서 360도를 다 돌아서 딱 닿아야 한다. 그래야 참사랑이다. 닿기 전에는 참사랑이 못 된다. (178-309)
사랑이란 다 좋은 것이다. 사랑이란 결국 좋아지는 것이다. (206-205, 60-81)
남자가 찾고 여자가 찾고 있는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냐? 참사랑이다. 참사랑은 사람도 영원히 좋아하고 하나님도 영원히 좋아하는 것이다. 참사랑은 온 우주가 영원히 제일 좋아하는 것이다. (179-35, 214-189)
참사랑이란 절대적으로 한 길이다. 완전한 플러스 완전한 마이너스는 단 하나다. 두 개가 아니다. (195-290)
참사랑에는 모든 것이 오케이다. (116-244)
참사랑은 작동만 하면 폭발적인 힘이 생긴다. (180-199)
사랑이란 모든 것을 통일할 수 있는 힘이 있다. (127-322)
사랑이란 말은 참 위대하다. 말 한마디에 천냥 빚을 갚는다는 말이 있다. 말 한마디로 탕감할 수 있다는 말이다. 억만 금의 빚이 있다고 해도 사랑의 말 한마디면 탕감하고도 남는다. (227-254)
참사랑이란 내 몸 마음이 자동적으로 하나되는 그 중심 자리의 기둥이다. 개인․가정․종족이 같은 점, 국가․세계․천주․하나님이 같은 중심, 한 기둥에 자리한다. 그 중심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참사랑의 자리는 영원한 정착점이다. (230-135)
사랑은 만우주를 통솔할 수 있는 하나의 중심이다. 주관적(主觀的)인 중심이요, 통솔적(統率的)인 중심이요, 관용적(寬容的)인 중심이다. 이것이 사랑의 이념이다. 이 이념이 역사의 터가 된다. (5-69)
사랑은 둘이 하나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 인간에게 주려는 것이다. 사랑으로 맺은 인연이 없으면 흩어지지만, 사랑을 중심으로 하면 모여든다. (14-80)
참사랑이란 절대적이다. 그 절대 사랑 앞에는 절대 지식, 절대 능력, 절대 권한을 가진 하나님도 절대 복종한다. (123-136, 206-7)
하나님과 아담 해와, 자녀 모두를 절대화시킬 수 있는 모체가 참사랑이다. (194-303)
하나님의 사랑이란, 참사랑이란 영원히 같이 있더라도 좋기만 한 사랑이다. 영원히 같이 있더라도, 같이 살더라도, 같이 보더라도, 같이 말하더라도, 같이 느끼더라도, 같이 듣더라도 좋기만 한 사랑이다. (127-10)
사랑은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이다. 참도, 행복도 영원히 남기고 싶은 것이다. (43-314)
심정의 세계는 한번 사랑하면 끝이 없다. 붙들어도 붙들어도 영원토록 붙들고 싶은 세계다. (10-169)
사랑은 우둔하고 미욱한 것이다. 어떤 상황도 개의치 않는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옆에서 누가 보든지 상관하지 않는다. 누가 볼 것을 의식하는 사랑은 한계권 내의 사랑이다. 누가 보든 의식하지 않는 그러한 경지의 사랑이니 얼마나 우직하고 미욱하냐? (33-113)
참사랑이란 보이지는 않으나 가장 귀한 보물이다. 그것은 불변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황금은 불변의 빛깔, 다이아몬드는 불변의 굳기, 진주는 불변의 조화의 빛깔이 있기 때문에 귀한 것이다. 또한 보물은 영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누구나 다 좋아한다. (201-143)
나라마다 국경이 있고 문화배경이 있고 풍습이 있다. 이것을 모두 넘어설 수 있는 무기가 있다면 그것은 참사랑밖에 없다. (205-250)
사랑이란 상속권, 동참권, 같이 같은 자리에 거할 수 있는 동위권이 있다. (211-267)
참사랑이란 영원히 계속되는 사랑이다. 봄에도 그 사랑, 여름에도 그 사랑, 가을에도 그 사랑, 겨울에도 그 사랑, 소년시대에도 그 사랑, 장년시대에도 그 사랑, 노년시대에도 그 사랑, 영원한 세계인 영계에 가서도 그 사랑이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다. (194-303)
사랑과 절대적인 선은 영원하다. 처음과 끝이 같다. (8-285)
시작과 끝을 연결시킬 수 있는 하나의 길은 돈도 아니요, 지식도 아니요, 힘도 아니다. 사랑만이 연결시킬 수 있다. 땅 끝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의 느끼는 감정을, 거리를 초월해서, 시공을 초월해서 직통하는 것이 사랑이다. (137-342)
사랑은 끝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끝없는 사랑이 어디에 있느냐? 자기만 위하여 사는 사람들의 사랑은 하루도 못 가서 끝난다. 부부가 왜 싸움을 하느냐?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고 하기 때문이다.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패들은 오래 못 간다. 서로가 사랑을 받겠다고 하는 가정은 깨진다. 그러나 서로가 사랑하겠다고 하는 가정은 깨지라고 제사를 지내도 안 깨진다. 서로가 위해주려고 하는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36-76)
사랑이란 변하지 않는 것이다. 오색의 맛이면 오색 가지, 천 가지 맛이면 천 가지 맛이 있어서 변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면에서 변하지 않는다. (228-198)
사랑에는 여러 사랑이 있다. 가짜 사랑이 있고 진짜 사랑이 있다. 진짜 사랑 가운데도 가장자리 진짜 사랑이 있고, 중심 자리 진짜 사랑이 있다. 동쪽 진짜 사랑, 서쪽 진짜 사랑, 남쪽 진짜 사랑, 북쪽 진짜 사랑이 있다. 그렇다면 중앙에 있는 진짜 사랑은 뭐냐? 진짜 사랑이란 무한히 확대할 수 있으면서 무한히 축소할 수 있는 자체력을 가지고 있다. (164-73)
꽃의 빛깔이 얼룩덜룩한 여러 가지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랑도 뿌리는 하나지만 그것이 나타나는 데에 있어서 상대하는 작용이 천태만상의 작용을 할 수 있다. 슬픈 사람을 대해서는 그 사랑의 마음은 슬퍼지는 것이요, 기쁜 사람을 대해서는 그 사랑의 마음은 기뻐지는 것이다. 상대에 맞추어 나타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하는 아내의 표정은 남편의 모든 배후의 어두운 배경을 전부 다 소화할 수 있다. (233-131)
사랑은 우리의 모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잃어버렸다. 하나님의 사랑을 잃어버린 고로 나도 잃어버렸고, 부모, 형제, 사돈의 팔촌까지 잃어버렸고, 대한민국과 세계 인류 할 것 없이 모두 잃어버렸다. 그러니 이제는 다시 찾아야 한다. (35-87)
원래 사랑이란 인간의 사랑이 아니고 영원불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접하여 하나님을 나의 주인으로 모시는 그 순간 그분과 하나된다. 하나님과 내가 주고받을 수 있는 기쁨의 자리에 들어가게 되면 세계를 정복할 수 있다. 내가 하나님과 더불어 즐길 수 있는 장면은 온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소유하여서 기뻐하는 것 이상의 기쁨을 취할 수 있는 장면이다. 만일 인간이 그런 것을 체험했다면 이 몸의 모든 오관을 통해서 느끼는 자극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7-248)
사랑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사랑도 천리의 법도를 어기고는 나올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랑의 법도를 취하지 않고 나온 사람이 있을 수 없다. 어느 한 개인을 중심으로 사랑이 나온 것이 아니다. 사랑의 어머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누나와 동생이 서로 싸우다가도 어머니 아버지만 보면 평화로워진다.
그와 마찬가지로 인간세계에도 사랑의 어머니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세상의 사랑을 보거나 우주간의 사랑을 보아도 사랑의 어머니가 없다. 원래는 있었는데 인간이 잃어버렸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20-22)
사랑이란 무엇이냐? 믿는 것이다. 사랑의 본질은 변함없는 것이다. (20-32)
예수님은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는 멋진 말을 했다. 하나님의 아들 노릇 하는 허울 좋은 사람은 많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라는 말이 쓰이는 곳은 많지만 아버지라고 한다고 해서 다 아버지가 아니다. 진짜 사랑이란 심정의 골수에 어려 있는 사랑을 몽땅 퍼부어서 하는 말이다. 그 사랑을 몽땅 갖고 나올 수 있는 자리가 바로 하나밖에 없는 아들, 독생자의 자리다. 그 아들이 우리와 손발이 다르고 눈이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가슴속에 묻혀 있던 본연의 사랑이 타락함으로써, 하나님의 원한으로 된 것을 타파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몽땅 지녔기 때문에, 비로소 천지간에 처음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라고 한 것이다. (21-144)
사랑은 나돌아다니지 않는다. 사랑이란 반드시 깊은 데 심어진다. 뿌리가 깊다. 서양 여자들처럼 가슴을 내밀고, 겨우 앞가슴만 가리고 돌아다니는 것이 아니다. (207-86)
참사랑이란 주고 잊어버리는 사랑
사랑이란 상대를 위하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59-299)
사랑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입장에서 하게 되면 성립되지 않는다. 상대를 대신하여 상대의 입장을 옹호하고, 상대의 입장을 받들면서, 상대의 입장을 세우는 데서 비로소 사랑이란 말이 성립된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야 이놈아! 너는 내 종이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상대를 누구보다도 높여주고, 누구보다도 위해주고, 상대로 말미암아 있고자 하는 자리에서 사랑이 성립된다. 나를 중심으로 너는 내가 하라는 대로 해라 하면 사랑이 성립되지 않는다. (42-259)
참사랑이란 자기를 위주로 한 것이 아니다. 투입하고, 투입하고, 또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이 참사랑이다. (225-15)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데서부터 참사랑이 시작된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이란 자기 생명보다 더 위대하다. 생명 위에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니 사랑을 위해 생명까지도 투입해야 한다. 거기서부터 참사랑이 시작된다. 타락한 세계의 생명 이상에서부터 참사랑이 시작하지, 그 이하에서는 참사랑을 찾을 수 없다. (225-15)
참사랑은 주고도 받기를 원치 않는 것이요, 주고 잊어버리는 사랑이다. (164-21)
참된 사랑은 무엇이냐? 주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주고 또 주고, 또 주는 것이다. (240-300)
참사랑이란 천 번 하고 만 번 하고도 잊어버리는 것이다. 하나님도 사랑을 하고 잊어버린다. 주고 또 주고도 잊어버리고, 좋은 일을 베풀고도 기억하지 않는다. 그래, 네가 오늘도 찾아왔구나. 그래 하면서 또 사랑해주신다. 그런 것이 참된 사랑이다. (176-38)
사랑에는 오만 가지 사랑이 있다. 이웃 동네 할아버지 사랑 다르고, 우리 동네 할아버지 사랑 다르고, 자기 할아버지 할머니 사랑이 다르다. 오색 가지다. 그러면 하나님이 원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이냐? 참된 선한 사랑, 절대적인 사랑이다. 그런 사랑이 참사랑이다.
많은 사람들은 당신, 나를 진짜 사랑합니까? 하며 참사랑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참사랑이 뭔지 모르고 있다. 참사랑이 뭐야? 하면, 참사랑이 참사랑이지라고 대답한다. 참사랑이 뭐냐? 하나님이 영원히 놓고 못 사는 사랑이 참사랑이다. (211-265)
사랑은 뿌리면 뿌릴수록 확대되는 것이다. 아무리 쳐서 없애려고 해도 그건 확대되고, 배가되는 것이다. (137-342)
참사랑이란 부모의 사랑과 같은 무조건의 사랑이다. 그리고 이웃을 위하여 내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릴 수 있는 희생정신이 곧 참사랑이다. (224-254)
참사랑이 가는 길, 참사랑이 처한 근본 터전은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이다. 자기 생명을 투입하고도 또 남은 생명의 씨가 있다면 그 생명까지도 투입하려고 하는 것이 천리의 근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의 근원적 터전이다. 반면에 악마는 위하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모든 독재자들은 위하라고 했다. (222-138)
참사랑이란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 이상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이다.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사랑을 중심으로 한 왕이요, 사랑을 중심으로 한 성자다. (214-27)
참사랑이란 사랑하지 못할 것까지도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한 것이다. (224-252)
하나님은 희생과 사랑의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희생의 본질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희생했다고 해서 그 희생을 희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희생하면 희생할수록 보람을 느낀다. 사랑이란 그런 소성을 갖고 있다.
사랑이 얼마만큼 크냐? 그것은 반드시 희생의 크기에 따라서 높은 사랑이냐 낮은 사랑이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희생이 크면 클수록 큰 사랑을 드러내고, 희생이 작으면 작을수록 작은 사랑을 드러낸다. (63-25)
사랑이란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것
하나님은 사랑의 실체, 사랑의 중심존재기 때문에 알파와 오메가가 없다. 진정한 사랑은 시작과 끝이 있을 수 없다. (7-334)
사랑의 세계는 주고 주고 주더라도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다. (121-173)
사랑이란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끝이 없다. 부모가 자식에게 있는 정성을 다하여 잘먹이고 잘입히고 안팎으로 걸릴 것 없이 키웠다 하더라도 만약 그 아들이 죽었다면 난 너를 위해서 다했다고 말할 수 있는 부모는 없다. 사랑의 길이란 진정 좋은 것을 주고도 부끄러움을 느낀다. 좋은 것을 주고 그것을 자랑의 조건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숙이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이 사랑의 길이다. (48-297)
부모는 사랑하는 자식에게 아무리 좋은 옷을 해주었더라도 이 땅에 수많은 왕자 왕녀들이 왔다 갔지만, 내 아들이 그 왕자들보다 못하더냐? 내 딸이 그 왕녀들보다 못하더냐? 이러면서 그 이상 사랑하고 싶은 마음을 가진다. 따라서 그런 자리에서 해준 옷을 생각하게 될 때에, 세계의 그 누구보다도, 세계의 어떠한 아들보다도 더 사랑하고 싶은 부모의 마음은 더 좋은 옷을 해주기 위해서 눈물이 앞선 자리에 있기 때문에, 그런 부모에게는 아들이 아무리 파고들어가도 끝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비로소 취하는 사랑이 있게 된다. 끝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다. 한바퀴만 돌아서는 취하지 않는다. 몇 바퀴를 돌아갈 때에 중심을 잃어버리며 취하는 것이다. (59-104)
참된 부모는 어떤 부모냐? 자식을 영원무궁토록 사랑하기에 끝이 없는 부모다. 그러면 참된 자녀는 어떤 자녀냐? 참된 자녀는 참된 부모의 그 사랑 앞에 영원무궁토록 부모를 사랑하고도 또 사랑이 넘칠 수 있는 그런 사랑의 마음을 가진 자녀다. 그런 자리가 참된 효자의 자리다. (127-16)
영원한 사랑은 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 가도가도 끝이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이 끝이 없으려면 직선으로 가서는 안 된다. 돌아야 한다. (90-84)
사랑의 울타리, 사랑이 접선할 수 있는 범위가 어느 정도냐? 유한이냐 무한이냐 할 때에, 유한이라고 한다면 그 사랑은 필요없다. 무한 무한이어야 한다. 그거 무한이면 되지, 왜 무한 무한이냐? 그건 횡적으로 무한한 것이요, 종적으로도 무한한 것을 말한다. (121-196)
우리 인간의 마음은 무한한 것을 품고도 남을 수 있는 보자기다. 그 보자기를 펼치게 되면 끝없이 사랑을 주고도 남을 수 있는 여유가 있다. 무엇을 봐서 알 수 있느냐? 우리의 욕심을 보고 알 수 있다. (233-142)
사랑은 주면 줄수록 생기는 것이요, 끝이 안 나는 것이다. 더 가중적으로 줄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것은 모두 끝이 난다. 돈도 끝이 나는 것이요, 지식도 끝이 나는 것이요, 권력도 끝이 나는 것이다. 세상 만사의 모든 인간 사정, 인정을 통한 것은 다 끝이 나지만, 영원한 참된 사랑은 아무리 주더라도 끝이 안 난다. 더 무한에 가까울 수 있는 내용이 영속적으로 계속되는 놀라운 것이다. (121-242)
봄절기를 품고 남을 수 있을 정도로 여유가 넘쳐 흐르는 사랑, 차고 냉랭한 겨울절기에 있어서는 눈과 얼음을 녹일 수 있는 사랑, 높이로 보나 넓이로 보나 우리가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사랑, 그런 사랑이 나와 관계를 맺어 나에게서 영원히 떠나지 않고 안정된 중심의 자리를 결정해야 한다. 그런 사랑이 무한히 감촉되고 감각될 때 그 사랑이야말로 우주와 겨루고도 남음이 있다. 세상의 그 어떤 가치도 그 사랑을 떠나서는 찾을 수 없다. 시작과 끝이 동일한 절대적인 사랑을 내 심지의 복판에 정한 사람은 비록 개인이로되 우주와 겨룰 수 있다. (33-76)
사랑의 가치
세상에는 다이아몬드나 진주 같은 보석이 있다. 왜 이런 것들이 보석이냐? 다이아몬드는 굳기에 있어서 누가 침범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변하지 않는 특성을 가진 것이 귀하다. 그리고 진주는 우아한 빛깔에 있어서 최고다.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하는, 천년 만년 가더라도 변하지 않는 우아한 색깔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귀하다.
가짜는 어떤 것이냐? 맨 처음에는 좋지만 가면 갈수록 변하는 것을 가짜라고 한다. 사람도 나쁜 사람은 처음에는 좋은 사람같이 나타나지만 시일이 가면 자꾸 변한다. 그러니 빨리 변할수록 나쁜 것이다.
황금이 왜 좋으냐? 황금은 누런 빛에 있어서 변함이 없다. 천년 만년 가더라도 그것을 지배할 수 있는 무엇이 없다. 이런 모든 것이 변하지 않는 소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세계에서 보물로 취급받고 있다.
보물을 주고도 바꿀 수 없는 것이 뭐냐? 보물은 생명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보물을 바꿀 수 있는가? 나는 남편이 없어도 좋다. 손가락 하나하나에 다이아몬드를 열 개씩 1백 개를 낄 수 있으면 나는 남편과 바꾸겠다 하는 아내가 있느냐? 남편이 죽게 되면 병원에 데려가야 할 텐데 황금을 쌓아 놓고도 황금이 아까워서 하루 이틀 더 기다려 보자. 내일이면 낫겠지 이렇게 하는 어리석은 부인이 있다고 하자. 내일 낫겠지, 모래 낫겠지, 한 달 후에, 두 달 후에 낫겠지… 하다가 남편이 죽으면 황금 보따리와 살겠는가? 그렇게 되고 나면 아이고, 큰일났다! 하면서 야단할 것이다. 부모는 자식이 죽을 곳에 가 있으면 그 자식을 구하기 위해서 자기 집에 있는 모든 보물과 그 자식의 생명을 바꾸려 한다. 이런 것을 볼 때, 보물보다 귀한 것이 생명이다.
부부끼리 사는데, 남편이 아내에게 사랑을 가득 담아서 사다 주는 보물은 천년 만년 갖고 싶어하지만, 사랑 없이 갖다 주는 보물은 반갑지 않다. 보물은 환경이 변함에 따라 변할 수 있는 소성, 변할 수 있는 내용을 지니고 있다. 이 우주 가운데서 천년 만년 변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랑을 중심으로 한 부부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보다 귀하다. 그래서 사랑을 위해서 생명을 바친다. 생명 때문에 사랑을 저버리지는 않지만, 사랑을 위해서는 생명을 저버린다. (136-107)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이 사랑
참된 사랑은 뭐냐? 참된 사랑은 겨울도 좋아한다. 여름도 좋아하고, 봄도 좋아하고, 가을도 좋아하고, 전부 좋아한다. 겨울은 물이 어는 때요, 봄은 언 것이 녹기 때문에 씨가 뿌려져 싹이 나오는 때고, 여름은 자라 열매맺는 때며, 가을은 열매를 거두는 때다. 그 중앙에 갖다 놓을 수 있는 모든 존재들의 공통분모가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은 사랑으로부터 나왔다. 그래서 생명보다 사랑이 귀하다.
생명을 찾아 사랑을 희생시키겠다는 사람과, 사랑을 찾아 생명을 희생시키겠다는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보다 중심이냐? 어떤 것이 보다 참에 가까우냐? 사랑을 찾아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보다 중심이요, 참에 가깝다. 생명을 찾아 사랑을 희생시키는 것은 자기 중심이지만, 사랑을 찾아 생명을 바치는 것은 자기 중심이 아니기 때문이다. (174-15)
사랑은 생명을 굴복시킨다. 생명을 좌우로 엇갈리게도 할 수 있는 힘이 사랑에 있다. 그러나 생명은 사랑을 좌우하지 못한다. 그러면 생명의 주체요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은 어떠할 것이냐? 하나님도 사랑 앞에는 약하다. 생명의 절대적인 기준 그 자체라 하더라도 하나님보다 더 강력한 사랑이 있다면 그 사랑 앞에는 굴복한다. 생명의 힘까지도 움직여낼 수 있는 힘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의 힘이다. (48-149)
우리는 죽도록 사랑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한다. 죽도록 사랑받았으면 좋겠다고 하는 그 사랑은 벌써 죽음을 초월하는 말이다. (48-159)
참된 사랑이란 어떤 것이냐? 인간세계에서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모르겠다고 한다.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는 것 이상 진정한 첫사랑에 불타서 생사지경도 망각하고 돌진할 수 있는 힘이 폭발하는 그 이상의 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죽을 자리에 있는 자식을 부모가 자기 생명을 버리고라도 보호하려는 이상의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의 사랑과 통한다. 거기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랑이 출발한다. (121-126)
사랑은 생명력을 연결시킬 수 있다. 대우주의 근본 되는 하나님의이 사랑이 작용하는 날에는 대우주가 움직인다. (121-189)
사랑이란 인륜 도덕 관념을 초월한다. (48-137)
사랑은 모든 존재의 기원
사랑이란 무엇이냐? 하나님이 천지 만물을 지은 원천이다. (12-232)
세포에는 뿌리도 들어가 있고, 줄기도 들어가 있고, 가지도 들어가 있고, 열매도 들어가 있다. 이것은 사랑에서 왔다. 사랑이란 모든 생명의 근원이고, 모든 목적의 근원이다. (221-311)
마음과 몸은 부모에게서 나온다. 원인이 없는 데서는 결과가 나올 수 없다. 몸 마음이 부모에게서 나왔는데, 어머니의 사랑에 의해서 어머니의 생명체가 화합하게 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조화시킨다. 어머니의 내적인 몸과 마음, 아버지의 내적인 몸과 마음이 참사랑을 통해 서로 조화하게 돼 있다. 사랑을 중심으로, 생명력이 하나의 부체(副體)와 같이 되어서 사랑을 중심으로 핏줄이 연결된다. 생명을 중심으로 핏줄이 연결되어 있지 않다.
우리 자체를 두고 볼 때, 내가 생겨나게 된 최초의 동기는 생명이 아니다.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이 아니다. 그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이 사랑에 의해서 연결되어 우리가 태어난다. 어머니의 피와 아버지의 뼈를 받아 연결시켜서 자라 10개월이 지나 어머니 아버지의 생명력을 지니고 태어난다. 태어난 나의 근본은 우리 자신이 아니다. 근본은 어머니의 생명이요 아버지의 생명이다. 그 생명이 하나되게 한 것은 생명에 앞서 사랑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 모든 존재의 기원, 창조된 존재의 기원은 사랑이다. (187-41)
하나님이 아담 해와를 지었을 때, 사랑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겠느냐?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에 맞게끔 태어난 것이 아담 해와다. 볼록과 오목은 창조될 때부터 그렇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진화가 없다. 사랑이란 개념 때문에 수놈 암놈이 생겨났다는 사실은 진화를 초월한 개념이다. (223-7)
왜 남자 여자로 생겨났느냐? 남자가 내가 남자로 태어나겠다 해서 태어나고, 여자가 내가 여자로 태어나겠다 해서 태어나지 않았다. 이렇게 물으면 인류 조상에게까지 가는데, 아담이 아담으로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태어나지 않았고, 해와가 해와로 태어난다고 생각하고 태어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통해서, 사랑에 의해서 태어났다. (228-41)
사랑이라는 개념은 남자 여자라는 개념보다 먼저 있었다. 사랑의 개념이 먼저다. 하나님이 사랑의 개념을 세울 때 진화론은 없었다. (227-215)
하나님도 사랑 때문에 생겨났기 때문에 피조세계는 사랑을 위해 태어났다. 사랑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피조세계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시작은 사랑이다. 여기에서 위하는 철학이 나왔다. 위하는 데에 존재의 기원이 있다. 그러면 왜 위해야 되느냐? 자기보다도 더 낫기를 바라서다. 더 훌륭해지려고 위하는 것이다. (223-128)
사랑의 주인
인간은 왜 태어났느냐? 남자는 여자를 위해서, 여자는 남자를 위해서 태어났다. 그러므로 남자의 중요한 것은 여자가 갖고 있다. 남자의 보물은 여자에게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여자의 보물은 남자에게 보관돼 있다. 엇바꿔 놓았다. 곧 남자와 여자의 기관이 다른 것이 하나 있는데, 남자에게 귀한 것은 여자가 갖고 있고, 여자에게 귀한 것은 남자가 갖고 있다. 남자의 보물을 여자에게 보관해 놨기 때문에 남자는 여자와 떨어질 수 없다. 또한 여자의 보물을 남자에게 보관해 놨기 때문에 여자도 남자와 떨어질 수 없다. 그게 사랑의 줄이다.
그러므로 남자의 사랑의 주인은 여자고, 여자의 사랑의 주인은 남자다. 그런데 남자 여자들이 지금까지 요사스럽게 바람을 피워서 세계가 부패해 가고 있고, 전부 망해 들어가고 있다. 주인 몰래 도적질하고 있다. 오로지 사랑의 불변의 열쇠는 남자의 것은 여자가, 여자의 것은 남자가 갖고 있다. 이것을 속이는 사람은 천리 앞에 벌을 받는다. (142-9)
하나님은 공평한 분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이 세계를 갖고 네 것, 내 것 하며 싸울 줄 알았다. 그래서 서로 네 것, 내 것 하며 싸우면 안 되겠으니까 남자의 것은 여자에게 갖다 심어 놓고, 여자의 것은 남자에게 갖다 심어 놓았다. 그래서 사랑이 흉측한 것 같지만 참 기가 막힌 것이다. (136-9)
우리가 지금까지 사랑이란 말을 속된 것으로 알고 좋지 않게 생각한 것은 타락했기 때문이지, 사실은 신성한 본궁이다. 본연의 사랑의 자리는 거룩한 궁전, 최고의 귀한 곳이다. 그 궁전 문은 마음대로 열 수 없다. 사랑의 왕, 사랑의 왕비가 되어야만 그 궁전문을 열게 되어 있는 것이 인간 본래의 사랑의 전통이다. 참부모를 가진 왕과 왕비는 그 궁전문을 열 수 있다. 그러한 궁전, 그러한 본궁으로부터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딸이 탄생한다. (128-317)
부모의 사랑이 좋고 부부의 사랑이 좋다 할 때, 진짜 사랑은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사랑이 아니다. 사랑이란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에 자기를 중심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위해야 된다. 남편으로부터, 아내로부터 사랑이 생겨난다. 아들로부터, 형제로부터 사랑이 시작된다. 사랑은 자기에게서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상대에서부터 먼저 시작된다. 그러므로 사랑의 주인은 상대다. (34-300)
삶이 곧 사랑이다
사랑은 같이 살자는 것이다. 사랑이란 안팎으로 구비해서 같이 살자는 것이다. 사는 데는 둘이 도망가서 자기들끼리 살자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살자는 것이다. 그것을 심판할 사람은 없다. 사는 데는 어떻게 사느냐? 세계적으로 살아야 한다. 그렇게 산 사람이 있다면 그가 거동만 해도 그 뒤를 모든 국가와 온 인류가 따르면서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할 것이다. (28-182)
사랑이 인연된 곳에는 나의 모든 신경이 충격적인 자극을 일으킨다. 곧 사랑은 나로 하여금 제일 가까운 곳에 있게 한다. 또 사랑이란 제일 가까운 동시에 나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게 한다. 그리고 나에게 기쁨의 자극과 기쁨의 충동을 전달해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보고 싶다 하고, 가고 싶다 하고 살고 싶다고 한다. (112-245)
남자의 마음은 여자의 마음 가운데서 살고 싶어하고, 여자의 마음은 남자의 마음 가운데서 살고 싶어한다. 사랑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남자의 마음은 여자에게, 여자의 마음은 남자에게 가서 살고 싶어한다. (111-70)
사랑이란 함께 뺨을 맞대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천만년 헤어져 있어도 누구보다도 두터운 사랑을 할 수가 있다. 헤어져 봐야만 진정한 가치를 알게 된다. 함께 있으면 부인이 남편을 사랑하고 있는지 어쩐지 잘 모른다. 헤어져 보면 얼마만큼 사랑하고 있는지 알게 된다. (55-9)
인간은 무엇을 중심으로 해서 사느냐? 사랑을 중심으로 산다. 그러므로 언제나 사랑이 문제다. 부모의 사랑이니, 아내의 사랑이니, 남편의 사랑이니, 아들의 사랑이니, 언제나 사랑이 문제다. 공기(지상생활) 가운데 사랑이 왜 문제냐? 생명의 요소는 공기다. 물 속(태내)에서도 공기였고, 나와서도 공기로 호흡한다. 어머니 뱃속에서 세상으로 방향이 달라질 뿐이지, 공기는 마찬가지다. (132-242)
인간이 왜 태어났느냐? 이 문제는 사랑 때문에 태어났다는 말 한마디면 다 끝난다. 그 사랑이 참사랑이다. 참사랑이 무엇인지 선생님이 비로소 해석했다. 참사랑이란 타락한 세계의 사랑을 넘어선 사랑이다. 모든 종교는 참사랑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종교 중의 종교인 기독교가 말하는 사랑은 세상 사랑의 한계선을 넘어설 것을 주장하고 있다. (219-127)
부모와 자녀간의 사랑은 부모로부터 오는데, 부모의 사랑이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사랑을 뜻한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는다. 그리고 부모가 생존해 계시는 한 소년시대․청년시대․장년시대 등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사랑을 받는다. 이렇게 부모의 사랑을 받아 성장하게 되면 횡적인 부부의 사랑이 각자에게 벌어지게 마련이다. 부부의 사랑이 계속되기 위해서는 자녀를 낳아 그 자녀를 사랑해야 한다. (66-119)
부모의 사랑이란 부부의 사랑 가운데서 자식이 태어날 때 나오는 사랑이다. 그 사랑이 부부의 사랑보다 강하다. 부부의 사랑보다 강하게 자식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어디에서 왔느냐? 인간을 뿌리로 해서는 해결 방안이 없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은 보다 근본 된 사랑이요, 주체적인 사랑이다. (48-137)
2. 사랑의 본질
사랑은 반드시 종횡의 내용을 지니고 있다
사랑은 종적인 사랑과 횡적인 사랑이 있는데, 종적인 사랑은 반드시 횡적인 사랑을 창조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도 이런 원칙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종횡으로 집약되어 이루어졌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왜 귀하냐? 이는 종적인 사랑이지만 종적인 사랑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사랑이 깃들게 하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에 귀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가 그릇될까봐 생활을 통해서 자녀의 길잡이가 되려는 내용을 갖추고 있습니다.
이렇듯 종횡의 요소를 책임진 것이 부모의 사랑이기 때문에 자기의 귀한 것을 그냥 그대로 자식에게 주려고 합니다. 그냥 그대로 주어서 횡적으로 넓히려고 합니다. 사랑의 본질은 그렇습니다.
사랑의 본질이 왜 그러하냐? 상대적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과의 관계는 그러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체와 대상간에는 서로 주고받음으로써 원형을 그립니다. 주체는 종적이요 대상은 횡적인 고로 이것이 90각도가 되어 원형을 그리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반드시 종횡의 내용을 지니고 있습니다. 종횡 가운데 무엇이 먼저 출발하느냐? 종이 먼저 출발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모로부터 사랑이 흘러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의 내심을 분석해 보면 종횡의 사랑의 본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종적인 사랑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횡적인 내용을 갖출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횡적인 아들딸 앞에 나타납니다. 그 아들딸이 종적인 기준으로 넓힐 뿐만 아니라 횡적으로도 넓혀 나감으로써, 거기에서 만유의 존재가 종적인 환경을 중심으로 횡적인 환경으로 넓어지게 되고, 세계와 천주까지 넓혀 나갑니다.
그래서 이 사랑의 마음이 동기가 되어서 세계를 지배하겠다, 혹은 무엇을 갖겠다, 무엇을 하면 좋겠다고 하는 생각을 갖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모르는 가운데 종횡의 사랑의 인연이 자신의 본질적인 마음 바탕에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본질적인 욕구에 의해 우리 욕망이 충족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34-215)
사랑이란 순수하고 변치 않는 것
이상이라는 말은 무엇을 근거로 해서 하는 말이냐? 돈이냐, 권력이냐, 세력이냐? 에덴동산에는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있었고, 천사가 있었고, 만물이 있었습니다. 이것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때와 그때 중에 어느 때가 좋으냐? 그때와 지금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지금은 외적으로 모든 것이 좋고 편리합니다. 아담 해와가 음식을 먹을 때 식탁에 앉아서 먹었겠습니까? 요즘에 식사할 때 지켜야 할 규범이 많은데, 그때 무슨 식사 예절이 있었겠습니까? 그런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요즘에 그렇게 한다면 야만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통일교회는 그 옛날의 에덴동산으로 돌아가자고 복귀를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상이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에덴동산에는 돈도, 권력도, 문화도, 무슨 법도 없었습니다. 있다면 하나님과 아담 해와가 만나면 언제나 좋아하는 것만 있었습니다. 하나님도 아담 해와가 필요하고, 아담 해와도 하나님이 필요하고, 서로가 필요했습니다.
그런 그들을 만약 떼어놓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떼어놓게 되면 하나되고 싶은 힘이 솟았을 것입니다. 어떤 힘도 제재할 수 없는 강한 힘이 솟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침범한다면 죽음을 각오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을 포기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이 뭐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변하지 않는 사랑밖에 없습니다.
그때 만약 아담이 해와한테 가서 얼굴에 무엇이 묻고 손에서 무슨 냄새가 나는데도 당신을 사랑한다 한다면 해와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이고! 먼저 세수하고 몸을 닦고 와야 사랑하지 그랬겠습니까, 아니면 그걸 넘어설 수 있는 사랑을 했겠습니까? 또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 앞에 가서 하나님이 좋아요 한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러한 모든 더러운 것을 초월해서 기뻐할 수 있는 사랑이기 때문에 위대합니다.
요즈음 유치원생들이나 초등학교 학생들은 자기 어머니 아버지가 학교에 올 때, 옷을 잘 차려입고 와야 좋아하지, 나이가 많은데다 옷을 남루하게 입고 오면 싫어합니다. 잘 차려입고 온다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크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 아들이 사랑하고 부모가 사랑하는 것이 크다고 볼 수 있느냐? 그건 하나의 조건에 불과합니다. 보기에는 아무리 남루하고 갖추지 못했다 하더라도 행복해서 아들딸과 부둥켜안고 좋아하는 것이 순수한 사랑입니다. (103-294)
사랑의 본질은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
그러면 그 사랑의 본질이 뭐냐? 남편이 진짜 나를 사랑하는지를 물어 보기 좋아하는 것이 여자입니다.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아내가 남편한테 아, 나는 정성껏 당신을 사랑하는데, 당신 진짜 나를 사랑하오? 하고 물을 때, 남편이 아! 사랑하고 말고라고 대답했다고 합시다. 그러면 얼마만큼 사랑하오? 했을 때, 요만큼 사랑한다고 하면서 두 손으로 감싸안을 만큼 나타내면 싫어합니다. 몇천년이라고 하는 것보다 표현할 수 없어 말을 하지 못하고 콱 하고 시늉이라도 하며 사랑한다 하면 좋아합니다. 그게 뭐냐? 품고 품고 품고 품고,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끝없이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사랑까지, 절대권에 연결될 때까지 사랑해 달라는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제일 좋은 형용사는 사랑이라는 말이 다 갖고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적이라는 말도 사랑에만 맞지, 절대적인 생명이라고 해도 실감이 안 납니다. 절대적인 사랑이라고 할 때 실감이 납니다. 영원한 사랑, 무한한 사랑이라고 해야 실감이 납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최고의 이념, 으뜸가는 이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전부를 다 갖다 붙여도 조금도 모순이나 상충이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만이 멋집니다. 그런 사랑이 영원한 사랑입니다. 인간에게 영원한 사랑이 있습니까? 인간은 1백년 정도밖에 못 사는데 어떻게 영원한 사랑이 가능합니까? 남자가 아무리 잘났더라도 1백년 정도밖에 못 살고, 여자가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1백년 정도밖에 못 삽니다. 그런데 어떻게 영원한 사랑입니까? 자기들을 중심으로 영원한 사랑이라고 해야 그것은 영원한 사랑이 아닙니다. 그러면 영원이고 절대적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 거기에 하나님이 개재해야 영원이고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본질은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사랑권 내에서는 몽땅 좋아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더라도 자기를 위해 있다는 주장이 남아 있는 데는 완전한 사랑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나라는 관념, 즉 자기를 생각하는 무엇이 있다 할 때는 아직까지 미급한 사랑입니다. 나는 너만을 위해서 있다. 언제나 너를 위해서 존재한다고 할 때 완전한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한 사랑은 주고 기억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를 위하는 게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은 그를 위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하고 나서 나를 생각하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 하는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나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은 사랑의 원칙에 합격자가 될 수 있지만, 내가 너에게 주었으니까, 너를 사랑했으니까 너도 나를 사랑해야 된다 하는 사람은 이상적인 사랑의 원칙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자식을 사랑할 때, 내가 너에게 아무 날 고무신을 사주었고, 옷을 사주었고, 너를 위해서 피땀을 흘렸는데, 그 가치는 몇억 몇천 몇백 몇십 원이다 하면서 장부에 적어 놓습니까?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는 데는 세상의 어떤 왕궁의 왕자 왕녀 이상 해주고 싶은 마음에서 내가 정성을 다해도 이것밖에 해줄 수 없으니 미안하다 하면서 해줍니다. 그 이상 더 좋은 것을 해주고 싶은 마음을 부모는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사랑을 좋아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주고도 부족함을 느끼고, 사랑하고도 덜 사랑한 것이 있지 않나 하며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 주고 나서 섭섭하고 안된 마음, 이러한 것이 있기 때문에 부모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과 통합니다. 그것이 사랑의 출발의 전통적 동기입니다. (60-82)
참사랑이란 자기 보다 나은 상대를 만드는 것
그러면 참사랑이 뭐냐? 결혼할 때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보다 잘나기를 바랍니다. 이건 진리입니다. 옛날서부터 지금까지, 억천 년이 가도 그건 마찬가지입니다. 그 다음에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잘나기를 바라는 것은 공통적인 진리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닮아서 그러느냐? 하나님 닮아서 그럽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한테 물어 보기를 당신도 당신의 사랑의 상대가 당신보다 잘나기를 바라고, 당신의 아들딸이 당신보다 잘나기를 바랍니까?라고 할 때 너희들과 같다라고 할 것입니다.
1백 퍼센트의 하나님이 1백 퍼센트 하나님 자체를 투입해서 상대를 만들면 자기만한 상대밖에는 안 나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자기 이상 될 수 있는 상대를 만드느냐? 그러기 위해서는 1백 퍼센트를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고 또 투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힘은 입력보다도 출력이 크다는 논리가 나옵니다.
역사적으로 위인이나 성인들이 그 시대에는 핍박받았는데, 왜 후대에 가서는 높아지느냐? 점점점 힘이 강하기 때문에 높아집니다. 투입하고 투입해서 진공상태로 들어가게 되면 다른 쪽은 고기압권이 되어 자동적인 순환운동이 벌어집니다. 영원히 순환합니다. 자꾸 없어지니까 고기압권이 생기고 순환운동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사랑은 자기 생명 이상을 투입하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참된 남편은 자기 아내를 생명을 바쳐서라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참된 아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부모, 참된 자녀, 참된 애국자, 참된 성인, 참된 하나님, 참된 하나님 아들딸도 마찬가지입니다. (210-160)
사랑이란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것
어떤 부부가 살아 있는 동안에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지만, 죽고 난 다음에 눈물을 흘리면서 나는 살아생전에 남편을 사랑하지 못했고, 남편은 하고 싶은 것을 다 못 했다 하며 서러워한다면 그것은 동정이 갑니다. 그렇지만 남편에 대해서 불평한다면 그건 심각한 문제입니다.
내가 생전에 이 이상 더 사랑할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랑했다 하는 것하고, 생전에 내가 좀더 사랑했으면 좋았을 걸 하는 것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좋습니까? 사랑이란 끝이 없습니다. 그러니 사랑을 다했다고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사랑을 다했다는 생각이 들더라도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은 언제나 내가 그를 위할 수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사랑을 다했다고 한다면 끝입니다. 사랑의 길은 상대를 위하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사랑을 다했다 하는 것보다 사랑을 다 못 했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낫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볼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통일교인들이 나는 통일교회에서 할 것 다 했으니까, 나를 사랑해줘야지 하는 사람은 끝입니다. 다했더라도 더 해야 할 텐데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선생님도 그런 사람을 좋아합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위해서 돈을 쓰고서는 아들한테 그 돈을 내라고 합니까? 아들이 아버지를 위해서 돈을 쓰고서는 그걸 갚아 달라고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알아달라고 하기 전에 할 것을 다 하지 못한 것에 대해 머리를 숙여야 합니다. 아무리 다했다 하더라도 내가 해야 할 효의 도리, 충의 도리를 다 못 했으니 이제라도 더 사랑할 수 있는 길이 남아 있다면 고맙겠다고 할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선생님은 세상의 그 누구도 부럽지 않습니다. 또 선생님이 큰소리할 수 있는 때가 점점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런 것을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럴수록 책임이 더 크다는 것을 느낍니다. 좋은 일이 있다고 좋아하고 자랑하기보다는 하늘 앞에 더 자랑할 수 있는 환경을 어떻게 이루어 드릴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하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 사람은 절대 망하지 않습니다. (48-296)
사랑의 본질은 위하는 것
가정은 사랑의 기지입니다. 가정에서 부모는 종과 횡을 연결하는 센터입니다. 하늘과 땅이 연결되는 센터입니다. 그리고 자녀는 평면적인 세계 인류를 대표한 센터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정에서 부모는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고, 아들딸은 인류를 대신한 존재입니다.
그 사랑이 가는 본질적 성격은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닙니다. 전부 위하려고 하는 데서 사랑이 번식됩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한 사랑은 전부 소모되지만 위하는 사랑은 번식됩니다. 그러니까 위해서 사랑하려는 데는 번식이 벌어져 자꾸 확장되지만 자기를 위하려는 사랑에서는 자꾸 축소됩니다. 그러므로 사랑의 본질은 위하려고 할 때는 커지지만 자기를 위하라고 할 때는 점점점 더 작아집니다.
왜 위해야 하느냐? 사랑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사랑의 유대를 확대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친구가 좋은 친구냐? 나를 위해주는 친구가 좋은 친구입니다. 또 좋은 남편은 아내를 위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좋은 아내도 남편을 위하는 사람이 좋은 아내입니다. 여자나 남자나 서로 위하는 사람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중심으로 자꾸 위하라고 하는 사람은 나쁜 사람이요, 남을 위해서 자꾸 하겠다는 사람은 좋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현실 생활에서도 틀림없는 정의입니다. 자기를 주장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요, 위하려고 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환영받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을 위하는 자리가 제일 안전한 존재기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안전한 존재기반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위해야 합니다. 그래서 선생님이 위해서 살라는 원칙을 세웠습니다.
사랑의 본질은 무엇이냐?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자주적인 본질을 중심으로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그 사랑은 어디에서 왔느냐? 하나님에게서 왔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의 주체기 때문에 주려고 하는 것이 사랑의 본질입니다.
이렇게 볼 때, 부모의 사랑이 그 본질에 제일 가까운 자리에 있기 때문에 자식을 대해 항상 주려고 합니다. 그 자식이 받지 않더라도, 아무리 불한당 같은 자식이라 하더라도 부모가 옛날에 사랑했던 것보다 더 큰 사랑을 갖고 나타나서 사랑을 하게 되면 회개하고 돌아설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놈의 자식아, 내가 너를 이만큼 사랑했는데, 과부의 몸으로 늙어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사랑했는데, 그 사랑을 몰라? 이 망할 자식아! 하며 세 번만 한다면 그 자식은 보따리를 쌀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가 눈물을 흘리며 내 사랑이 부족하여서 그렇다. 모든 것은 내가 너를 더 사랑하지 못한 탓이다 하면서, 그 자식의 뼛골이 녹아나도록 눈물을 흘리며 더 큰 사랑을 가지고 자식 앞에 나서게 될 때에 그 자식은 돌아섭니다. 더 큰 사랑은 약한 사랑을 전부 소화 통합시킬 수 있는 주동성이 있습니다. (48-182)
참사랑이란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
참사랑이란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훌륭한 부모는 어떤 부모냐? 투입하고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부모입니다. 내가 대학에 보냈으니까, 내가 늙으면 봉양해야 되고 그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그것을 수첩에 기록해 계산서를 미리 준비하는 부모는 거짓 부모입니다. 그런 부모는 이상적인 효자를 대할 수 없습니다. (239-62)
그러면 참사랑의 성질은 뭐냐? 사랑하고 잊어버리고 또 사랑하려고 하는 곳에, 생명을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또 투입하는 곳에 참사랑이 거합니다. 가치 있는 것을 한꺼번에 전부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왜 잊어버려야 되느냐? 더 주려고 하니까 잊어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사랑은 주고 잊어버리는 사랑입니다. 그것을 전부 노트에다 치부해서 받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젖줄, 생명을 나눠주면서도 좋아합니다. 타락한 어머니의 심정도 그런데 타락하지 않은 본연의 어머니의 사랑은 어떻겠습니까? 그러므로 모든 것을 투입하고도 잊어버리는 사람 가운데는 참사랑이 영원히 존재합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에게 참사랑은 어떤 자리에서부터 시작되느냐? 우리 인간의 사랑은 사탄세계의 사랑으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에 사탄 사랑 아래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 생명 이상의 자리에서부터 참사랑이 시작합니다. 참사랑은 하나님이 가진 사랑입니다. 참사랑을 가진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수천 년 동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섭리를 해나오면서 천대받고 핍박받았지만, 세계를 다 쓸어 버리지 않고 계속해서 구원해 나왔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벌써 세계를 다 쓸어 버렸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핍박받고도 잊어버리고 지금까지 구원섭리를 해나왔습니다. 자기 자식이 살인을 해서 교수대에 나가는 것을 바라는 부모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참사랑은 주고도 잊어버리고 또 주고도 잊어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사탄세계에서 자기 생명까지도 저버릴 수 있는 사람이 되지 않고는 참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런 참사랑 앞에는 사탄도 굴복합니다. (207-56)
참사랑이란 투입하고 또 투입하는 것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 아들딸이 자기보다 못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마음이 어디에서 왔느냐? 하나님한테서 왔습니다. 그런 마음이 하나님한테서 왔기 때문에 하나님도 마찬가지로 자기 사랑의 상대가, 자기 아들딸이 하나님보다 낫기를 바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보다 나을 수 있는 아들딸, 나을 수 있는 사랑의 상대를 지으려면 자기 이상의 것을 투입해야 합니다. 그리고 투입하고 잊어버려야 합니다. 천 배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만 배 투입하고도 잊어버리고 투입할 수 있는 개념이 없게 될 때는 그 이상의 상대는 나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1백이라면 자기보다 낫기를 바라는 상대를 짓게 될 때, 1백 이상을 투입하고 잊어버리고 또 투입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을 하는 사람은 자기 생명을 주고도 또 주고 싶고, 천년을 살았어도 또 주고 싶은 마음의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왜냐? 하나님이 자기 상대를 지을 때, 모든 것을 투입하고도 또 투입하고 싶어하는 논리를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하나님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하나님 이상 투입해야 합니다. 그래서 참사랑은 자기 생명까지도 투입하고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221-305)
참사랑을 위해서는 생명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지식, 돈, 권력을 버리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돈을 버리고, 힘을 버리고, 지식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된 생명을 찾을 수 있고, 이 참된 생명까지도 버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참사랑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을 점령하게 되면 하나님을 점령할 수 있습니다. (207-56)
투입하고 또 투입하는 데서 영생의 논리가 벌어져
그리고 참된 사랑은 자기보다 사랑의 상대가 더 잘나기를 바라는데, 하나님도 그걸 요구한다면 하나님이 갖고 있는 소성 이상을 투입해야 합니다. 1백만큼의 소성 가운데 1백만큼만 투입하게 된다면 자기만한 것밖에는 안 나옵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한 분이기 때문에 자기 이상 천배 만배를 그려 가면서 투입할 수 있는 자주력을 가진 분입니다. 투입하고는 잊어버립니다. 투입한 것을 생각하면 또다시 투입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무한히 투입하기 때문에 무한한 가치가 생겨납니다. 투입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올라갑니다. 순환운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환하는 구형의 범위 내에 있는 것은 내 소유로 할 수 있고, 천상세계 사랑의 소유권을 상속받을 수 있습니다. 사랑은 상속권이 있고 동거권과 동참권이 있기 때문에 그 활동무대는 내 것입니다.
대기가 1백 퍼센트 절대 저기압권이 되면 자동적으로 절대 고기압권이 생겨서 순환운동이 벌어집니다. 그렇게 보면 하나님은 참 지혜의 왕입니다. 왜 투입하고 잊어버리느냐? 그래야 투입하고도 또 투입할 수 있습니다. 자동적 순환원리를 통해서 영원한 회전운동이 시작되기 때문에 영생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투입하고 투입하고 또 투입하는 데서 영생이 벌어집니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내적인 부모, 종적인 아버지를 닮은 것이 양심입니다. 양심은 내적인 나, 종적인 나, 수직적인 나입니다. 몸은 부모의 혈육을 받고 나왔으니 횡적인 나입니다. 종횡의 합덕을 이룬, 창조주와 피조물을 총합한 우주상을 소유하고 있는 내 자신이라는 것을 자각했을 때 그 행복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쌍쌍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냥 그렇게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통해서만 더 큰 것이 나옵니다. 위하는 사랑에서만 수가 불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부가 싸우는 사랑에서는 망국지종이 태어납니다. 그렇지만 위하는 사랑에서는 천지의 모든 정수(精髓)를 뺀 하나님 같은 지혜의 왕자 왕녀가 태어납니다. (204-106)
사랑의 실현은 혼자 못 해
그러면 하나님이 천지를 왜 만들었느냐? 하나님은 무엇이든 다 가질 수 있는 전능한 분인데, 단 한 가지 사랑은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상대권에서 사랑이 생깁니다.
사랑하게 되면 피가 끓습니다. 그리고 떨리는데, 왜 떨리느냐? 섞이기 위해서입니다. 동서남북이 섞어지고 아래 위가 섞어져서 하나되어 모든 것이 사랑의 불꽃 튀는 방향에 초점을 맞춰야 합니다. 그래서 남자를 위해 완전 투입하고, 여자를 위해 완전 투입합니다. 생명과 재산을 다 잊어버리고 투입하고 또 투입하려고 달려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의 길이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히 그치지 않는 길이기 때문에 영원히 좋아하는 것입니다.
영생의 논리를 어디에서 찾느냐? 하나님은 지혜로운 분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사랑이상을 안 세웠으면 하나님은 고독 단신이요, 희로애락을 느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사랑을 잃어버린 하나님은 역사 이래 그 누구도 체험할 수 없는 심각하고도 기막힌 자리에, 절대적 비참한 자리에 있습니다. 누가 위로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본연의 바라던 그냥 그대로의 아들딸을 회생시켜, 꿈꾸던 소원의 이상형태를 재현시켜 그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품고 천리만리 이동하면서 더 빛나게 단장하고 더 아름답게 표시하려고 합니다. 만우주를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이 모든 가지 각색의 대우주는 너를 위해서 단장하는 장식품이다. 네가 사랑의 주체적 입장에서 상대를 대하면 너를 자극시켜 잠재해 있던 본성의 성품을 폭발시킴으로써 행복을 느낄 수 있게끔 하기 위해 만들었다 이런 입장에서 인간을 지었습니다.
이 우주는 얼마나 크냐? 2백20억 광년 정도 됩니다. 빛은 1초 동안에 30만 킬로미터의 속도로 진행하는데, 이것은 1초 동안에 지구를 일곱바퀴 반이나 돌 수 있는 속도입니다. 이런 속도의 빛이 1년 동안에 가는 거리가 1광년입니다. 그런 빛이 가는 데 2백20억 년 걸릴 정도로 큰 우주입니다. 이런 대우주를 하나님이 주관하는데, 사랑의 힘으로 주관합니다. 이 세상에 사랑보다 빠른 것은 없습니다. (204-101)
3. 사랑의 실체
사랑이란
우리는 사랑한다 사랑을 받고 싶다 하는 말을 합니다. 우리가 사랑이라고 할 때, 그 사랑을 봤습니까? 사랑을 그린다면 둥그렇겠느냐, 납작하겠느냐, 길쭉하겠느냐, 뾰쪽하겠느냐? 어떻게 그려지겠습니까? 사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으면 어떻게 대답해야 합니까?
바다라고 할 때, 푸른빛이 있는 것이 바다다, 또는 바람이 불면 출렁거리는 것이 바다다, 깊고 얕은 곳이 있는 곳이 바다다라고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다는 움직이는 것이다, 잔잔한 바다는 조용히 정지하고 있는 것이다, 바다는 물로만 되어 있다, 세밀하게 말하면 수소와 산소로 되어 있다,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이 무엇이냐?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을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어떻더냐 하면,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애지중지했던 물건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멀리 가서 떨어지게 될 때는 기념으로 사랑하는 사람의 체취가 남아 있던 거라고 옷도 안 갈아 입는 사람도 있습니다. (129-122)
그러면 참사랑이 둥글더냐, 납작하더냐, 뾰족하더냐? 봄에 날아다니는 아름다운 호랑나비처럼 날아다니느냐, 혹은 맹꽁이처럼 맹꽁맹꽁 우느냐? 하나님의 참사랑은 어떤 것이냐? 참사랑은 볼 수도 없고, 만져볼 수도 없고, 냄새를 맡을 수도 없습니다. 보지도 못하고, 만지지도 못하고, 냄새도 없고, 느끼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찾느냐? (142-270)
이렇게 볼 때, 사랑이 요물인지 고물인지 괴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이 꼬리치고 다니는구나! 동대문 가는구나! 달아나는 사랑을 찾아가야지 이렇게 사랑이 머무는 곳을 보고 찾아갈 수 있습니까? 사랑은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사랑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 (233-144)
사랑은 전기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전깃불도, 전등도, 갓도, 애자도 눈에 보이지만 정작 전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전기에 사람이 달라붙으면 죽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전기도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또 아무리 움직이고, 생각하며 책을 보아도 알 수 없습니다. 사랑이란 이론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즉 사랑이란 인간 두뇌로써는 생각할 수 없으며, 차원이 다릅니다. 사랑은 관(觀)이니 뭐니 하는 것들을 다 초월합니다. (20-29)
사랑이란 설명해줄 수 없는 것
본래 사랑이란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총각 처녀들한테 사랑이란 이런 것이다고 설명한다고 아는 것이 아닙니다. 고아에게 내가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보니 어떻더라고 아무리 몇천 번 설명해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부모의 사랑이 어떻다는 것은 자식을 낳아 봐야 알 수 있습니다. 그 전에는 모릅니다. 그저 그렇다더라고만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더라와 그렇다는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더라 하는 것은 그렇다와 극과 극도 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사랑이 이렇다는 설명이 필요없습니다. (59-315)
사랑이란 설명해주어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어머니가 야, 이놈아! 하면서 야단을 치더라도 자식이 그 사연을 알게 되면 불평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어머니 손을 붙들고 위로합니다. 자기를 진정으로 알아주면 고마워합니다. 그런 사연을 정확히 알려면 자식을 낳아 봐야 합니다. 자식을 낳아 보면 자기 부모가 자기를 때리면서 야단친 사연에 대해 정확히 압니다. 옛날에 자기를 때리고는 붙들고 울고 그랬던 사연을 알게 됩니다. 그러기 전에는 알 수 없습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변덕도 그런 변덕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기가 아들딸을 낳아서 길러 봐야 부모님이 우리를 사랑하셨구나 하고 압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진정으로 알고 그리면서 부모를 봉양합니다.
그렇게 돼서 그 자식이 부모한테 순응하게 될 때는 눈물이 나올 것이고, 수백 배로 위해드리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결혼해서 아들딸을 낳아서 본 사람 외에는 모릅니다. 아무리 설명해도 모릅니다. 아들딸을 낳아 길러 봐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을 볼 때 사랑의 교육은 필요가 없습니다.
장가가는 아들에게 너 장가가기 위해 20년 동안 교육을 받았느냐?라고 합니까? 나면서부터 야, 네가 색시를 얻으려면 이렇게 해야 하는 거야라고 교육을 받습니까? 사랑의 길은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사랑만 알면 남편이 어떻다는 교육이 필요없습니다. 또 아내가 어떻다는 것도 사랑만 알게 되면 교육이 필요없습니다. 자식이 어떻다는 것도 필요없습니다. 교육을 하면 도리어 방해가 됩니다. 부처끼리 재미있게 사는데 그의 어머니 아버지가 문을 열고 들어와서 야! 너희들 사랑하니? 하면서 교육한다면 기분 좋겠습니까? 그 자리는 평등권이요, 동등권이요, 또한 해방권입니다. 그 누가 간섭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간은 타락했기 때문에 천사장급 사랑에서 출발했습니다. 천사장급 사랑보다 위의 사랑이 아들급 사랑이요, 아들급 사랑보다 위의 사랑이 아버지급 사랑입니다. 그런데 아들급 사랑, 아버지급 사랑도 아닌 천사장급 사랑, 종급 사랑에서 생명을 바치고 나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아들급 사랑과 아버지급 사랑의 꿀단지가 꼭대기에서 한꺼번에 쏟아지게 되면 우리 사지백체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살이 있는지 없는지, 뼈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남편과 떨어져 지내면서 남편을 그리워하다가 몇 해 만에 만나게 되었다고 합시다. 남편을 만나기 위해 마중 나갔다가 남편이 나타나면 말하기 전에 손을 들고 뛰어가서 얼싸안고 빙빙 돌 것입니다. 여기서는 남편 자리나 아내 자리나 같으니 통일입니다. 만나서 얼싸안고 도는 가운데 남아질 수 있는 중심이 무엇이냐? 사랑밖에 없습니다. 빙빙 도는데 남자를 중심으로 도는 것이 아니요, 여자를 중심으로 도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돕니다. 거기에 이상(理想)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정의 이상이라는 것은 아버지만이 중심이 아니고, 어머니만이 중심이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합한 사랑을 중심으로 한 가정이 돼야 합니다. 가족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란 결국 좋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60-80)
사랑은 교육이 필요없다
선생님이 댄버리 교도소에 있을 때 일입니다. 비탈진 고지대를 운동장으로 만들려고 불도저로 정지작업을 해서 거기에 있는 돌을 주워내는 일을 하다가, 우기가 닥쳐서 그 일을 끝마치지 못하고 남겨뒀습니다. 그런데 그 우기에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면, 바다 물새들이 거기에 날아와서 알을 낳고 새끼를 깠습니다. 그 옆에는 교도소 수감자들이 언제나 산보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때는 우기니까 사람이 다니지 않아서 안전할 줄 알고 물새들이 거기에 알을 낳고 새끼를 깠는데, 우기가 끝나니까 그쪽으로 산보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그 산책로가 물새 새끼들이 있는 곳에서 불과 한 2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참 신기합니다.
그 어미 물새는 사람들이 모르고 지나갈 때는 가만히 있다가도 서로 눈만 마주치면 야단합니다. 한발짝만 더 가까이 가려고 하면 덤벼들려고 합니다. 그걸 누가 가르쳐줬습니까? 어떤 학설에 의해, 잘 계획된 교육제도에 따라 그걸 가르쳐줬겠습니까? 사랑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교육이 필요없습니다.
참새에게 수놈 참새야! 너 몇 개월 지나면 봄이 올 텐데 암놈 모실 준비를 하거라 그렇게 누가 가르쳐줍니까? 덮어놓고 짹짹짹 하며 먹이를 잡아먹고 돌아다니다가 봄이 되면 쌍쌍이 되어 암놈은 알을 낳아서 새끼를 깝니다. 그러고 나서는 두 마리가 서로 좋다고 짹짹거리며 새끼들에게 먹이를 먹입니다. 새끼가 어미 입에 물었던 것을 전부 빼앗더라도 아이구, 나 죽는다 하지 않고 빼앗으면 빼앗기고, 또 넣고 한다는 것입니다. 서로 사랑하면 먹다가 줘도 맛있고, 안 줘도 맛있고, 냄새만 맡아도 맛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힘은 사랑에만 있습니다. (139-197)
사랑은 자연적이고 순리적이며 절대적인 것
그러면 국가와 세계를 넘어 모든 환경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은 뭐냐? 그것은 어떤 이론도 아니고 이상도 아닙니다. 이상을 가지고는 초월할 수 없습니다. 이상은 이치 리(理) 자에 생각할 상(想) 자인데, 이게 뭐냐 하면 이론적 사고입니다. 이론적 사고방식 내에 사랑이 들어가겠습니까? 사랑하는 것은 이론에 맞아야 한다 할 때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남자는 왜 여자를 사랑해? 할 때, 이론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것을 놓고 이렇게 됐으니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해서 책임감을 느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은 맹목적인 것 같으면서도 자연적입니다. 자연적이면서 순리적입니다. 또 순리적이면서도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침범하지 못합니다. 순리적이면서 상대적이라면 사방에서 침범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은 순리적이면서 절대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남자와 여자는 모양은 다르지만 순리적인 사랑을 중심으로 절대권에 접했기 때문에 사랑을 중요시한다는 논리적인 근거를 세울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교육이 필요없고, 누구의 간섭이 필요없습니다. 자율적인 내용에 따라서 내가 몸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누구의 설명으로, 머리로, 의식구조를 통해서, 체험을 통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벌써 몸으로 다 압니다. 의식하고 나서 체험을 통해 아는 것이 아니라 체험하기 전에 느끼고 압니다.
이상이라는 개념도 그렇습니다. 사랑을 빼놓으면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리 남자가 여자 앞에 이상이라고 해도 사랑을 빼놓으면 이상일 수 없습니다. 여자가 남자에 대한 이상 개념을 찾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지식이 있는 남자가 이상입니까? 돈이 있다고 이상입니까? 돈은 있다가도 없습니다. 지식과 권력도 잠깐입니다. 사랑만이 영원합니다. 이상의 다리를 놓아줄 수 있는 여자 남자 앞에 하나의 남자를 끌어들이고 여자를 끌어들일 수 있는 길은 사랑 외에는 없습니다. 사랑만이 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사랑이 참사랑, 완전한 사랑입니다. (139-201)
사랑의 맛
벌을 치는 것을 양봉이라고 하는데, 양봉 철이 되면 꿀 뜨는 기계로 꿀을 뜹니다. 벌들이 꿀을 저장하는 곳을 소비라고 하는데, 구멍이 뻥뻥 뚫려 있습니다. 벌들이 겨울을 나기 위해 거기에 저장해 놓은 꿀을 사람이 다 빼내고 봄이 될 때까지 설탕물을 줍니다. 그렇게 설탕물만 먹던 벌들이 꿀맛을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리만큼 미칩니다.
봄에 꽃이 피면 벌들이 꽃을 찾아다니는데, 꽃 속에 들어 있는 벌들을 보면 꿀을 먹느라고 궁둥이를 위로 쳐들고 머리를 처박고 있습니다. 그걸 핀셋으로 잡아당겨서 빼도 안 나옵니다. 세게 잡아당겨서 꽁무니가 쑥 빠져도 안 나옵니다. 그 꿀맛이 얼마나 세서 그러겠습니까? 꿀맛이 그렇다면 사랑의 맛은 어떻겠습니까? 사랑의 맛과 꿀맛 중에서 어떤 게 더 좋겠습니까?
하나님은 무슨 맛을 제일 좋아하겠습니까? 하나님이 냄새를 맡는다면 무슨 냄새를 제일 좋아하겠습니까? 듣는다면 뭘 듣기를 좋아하고, 느낀다면 뭘 느끼기를 좋아하겠습니까? 선생님은 하나님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좋아하는 것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오관을 집중시킬 수 있고 기쁨을 충만시킬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밖에 없습니다. (136-116)
사랑의 빛깔
사랑은 맛도 있지만 빛도 있습니다. 그 사랑의 빛은 어떠한 빛이냐? 사랑의 빛은 오색가지 빛입니다. 오색가지 빛이기 때문에 굉장히 휘황찬란합니다. 무지개 빛이 몇 가지입니까? 일곱 가지입니다. 무지개 빛 일곱 가지를 전부 섞는다면 어떤 색깔이 되겠습니까? 일곱 가지 색을 섞어 놓으면 흰색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빛깔을 섞으면 어떤 빛깔이 되겠습니까?
하나님이 창조할 때 제일 좋아하는 색깔부터 지었겠습니까, 제일 싫어하는 색깔부터 지었겠습니까? 제일 좋아하는 색깔부터 지었습니다. 그래서 이른 봄에 피는 꽃들의 빛깔을 보면 보라색입니다. 보라색에는 빨간 색도 들어가 있고, 분홍색도 들어가 있고, 모든 색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상한 것은 다 보라빛입니다.
영계에 가 보면 제일 좋은 빛깔은 보라색입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할 때 보라색부터 창조했습니다. 그러므로 보라색은 귀한 것입니다. 귀하기 때문에 보라색을 큰 곳에 내놓으면 서로 갖겠다고 싸움이 벌어지겠으니 하나님이 제일 조그마한 것, 제일 작은 곳에 두었습니다. 그래서 균형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꽃 중에서 보라색으로 피는 꽃을 보면 아주 작습니다. 제비꽃은 작지만 보라빛입니다. 제비꽃은 이른 봄에 제일 먼저 피기 때문에 외롭습니다. 그래서 한 줄기에서 꽃이 하나만 피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개의 꽃이 핍니다. 그래서 균형을 취합니다.
모란꽃은 꽃 중에서 크고 탐스럽게 핍니다. 탐스럽게 생겼지만 향기가 없습니다. 왜 향기가 없습니까? 크고 탐스러운데 향기까지 있으면 작은 꽃들이 하나님에게 하나님, 왜 모란꽃은 크게 만들고 나는 작게 만들었소? 하고 불평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란꽃에는 큰 대신에 향기가 나지 않게 했으며, 작은 꽃들에게는 작은 대신에 향기를 주었습니다. 이렇게 균형을 취하고 있습니다. 생물학을 하는 사람들도 그런 원칙을 모르지만, 그렇게 돼 있습니다. (197-49)
사랑은 관념적이지만 실재한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고 절대적인 분입니다. 그런 하나님에게 필요한 게 뭐냐? 하나님에게는 돈도 필요없고, 지식도 필요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가서 나는 지식이 많아서 박물학박사요 할 때, 하나님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훌륭한지고 하겠습니까, 고약한지고 하겠습니까? 자랑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왕이요, 지식의 왕입니다. 또 나는 한 나라의 대통령을 하다가 왔소 하면, 이놈의 자식, 그게 뭐가 대단해!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권력 같은 것은 이미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뭐냐? 하나님이 돈도 지식도 권력도 필요하지 않다면 뭐가 필요하냐? 사랑이 필요합니다.
사랑이란 혼자서는 찾을 수 없습니다. 사랑의 소성은 다 갖고 있지만 혼자서는 사랑을 찾을 수 없습니다. 1백 퍼센트의 순금은 무엇을 통해 나타나느냐? 순금은 전기를 통하면 소모가 전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부하(負荷)가 없습니다. 소모가 없다는 것은 안팎이 균일적으로 연결돼 있다는 말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도 사랑의 요소를 통할 수 있는 본질을 갖고 있습니다. (187-44)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 사랑인데, 그 사랑이 네모더냐, 둥글더냐, 모지더냐? 사랑이 있는데 볼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추상명사입니다. 관념적인 것입니다. 추상명사라는 것은 현실에 있어서 구체적으로 증명할 수 없습니다. 신(神)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도 관념입니다.
사랑은 우리 생활과 역사에서 뺄 수 없는, 실재의 내용을 움직이고 있는 실체입니다. 그리고 사회제도라든가 모든 것을 움직이는 내적 힘의 모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할 때도 국가애를 가르칩니다. 형제애․부모애․부부애, 세계적인 박애, 전부 사랑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인류의 생활권이라든가 역사과정을 거치면서 사랑을 더듬지 않고는 역사를 연결시킬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효자는 부모를 사랑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런데 부모를 사랑하지는 않고 돈을 많이 보내주고 맛있는 것만 대접한다면 그는 효자가 아닙니다. 돈을 보내주지 못하고, 맛있는 것을 대접하지 못하더라도 눈물 어린 심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이 간절해야 효자입니다.
오늘날 서양 사람들에게 가정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돈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사랑이 문제가 되고 있고, 누나 오빠 동생 친척에게도 사랑이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가정도 깨지고, 형제관계도 깨집니다. 사랑이 있어야 가정도 유지되고, 가족관계도 유지됩니다. 얼마나 가정을 사랑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랑할 때는 한몸이 되어서 사랑해야 합니다. 남자와 한몸이 된 여자가 참된 사랑에 하나돼 떨어질 수 없는 관계가 되었으면 그때는 영원히 공존합니다. 통일교회는 그러한 가정을 찾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가정을 찾느냐? 원리형의 가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통일원리에서는 가르치기를 구원섭리는 복귀역사요, 복귀섭리는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것이요, 창조목적을 실현하는 것은 사위기대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가정이 결정됐습니다. 가정 없이는 전통이 형성되지 않습니다. 가정 없이는 전통을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돈은 가정이 없어도 이어받을 수 있고, 권력도 가정이 없어도 이어받을 수 있지만 사랑은 가정이 없으면 이어받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위기대입니다. (187-45)
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한다
사랑이 그리워서 우는 사람에 대한 말을 들으면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왜 뭉클해지느냐? 우리가 다 그런 요소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공통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을 붙안고 인류를 대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고 울고 있다면 인간은 그 하나님을 차 버려야겠습니까, 환영해야겠습니까? 울더라도 사랑이 그리워서 애달파하면 모든 만물이 동정하고 거기에 협조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이치입니다.
그러면 사랑 가운데는 몇 가지 사랑이 있느냐?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있습니다. 부모의 사랑, 부부의 사랑, 자녀의 사랑이 뭐냐? 그것들은 어디에 갖다 맞춰도 맞습니다. 동에도 맞고, 서에도 맞고, 남에도 맞고, 북에도 맞고 다 맞습니다.
12수라는 것은 사랑에서 나옵니다. 7수는 완성수입니다. 왜 완성수냐? 그것은 핵심으로 사랑이 정착할 수 있는 발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7수는 그 많은 수 가운데 동에서도 좋아하고, 서에서도 좋아하고, 남에서도 좋아하고, 북에서도 좋아하고, 전후 상하 전부 다 좋아합니다. 왜 좋아하느냐? 그 기준에 수직적 사랑이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수직은 절대와 연결됩니다.
왜 사랑은 수직에 연결되느냐? 사랑은 제일 가까운 거리를 통합니다. 간단한 말이지만 귀한 말입니다. 사랑을 중심으로 수직이 되려면 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갈 때 이웃동네 찾아가듯이 슬슬 가지 않습니다. 그저 쏜살같이 직행합니다. 밤이든 낮이든 할 것 없이, 춘하추동, 아무리 역사가 길다 해도 사랑은 제일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종적으로 제일 가까운 거리가 수직입니다. 제일 위에 있는 것과 제일 아래에 있는 것이 연결되어 제일 가까운 데 있어야 되니까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작용을 할 수 있는 힘이 도대체 뭐냐? 만유에 있어서 사랑만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에 있는 물건이 아래로 내려오게 될 때 직단거리로 내려오는데 그 자리가 수직입니다. (187-50)
순환작용에 의해서만 전환적 이상이 벌어진다
남자 여자는 뭐냐? 동과 서와 같습니다. 남자 여자는 수직에 대해 수평입니다. 수직이란 말은 언제나 수평을 전제하고 하는 말입니다. 오른쪽이란 말은 벌써 왼쪽을 전제로 하고 하는 말입니다. 왼쪽이 없으면 오른쪽이라는 말을 못 합니다. 앞이 없으면 뒤라는 말을 못 합니다. 뒤라는 말은 벌써 앞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남자가 있다는 것은 여자를 전제로 하고 하는 말이요, 여자가 있다는 말도 남자를 전제로 하고 하는 말입니다. 그 말의 기원이 자체가 아닙니다. 상대로부터 나온 것입니다. 사랑의 세계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여자가 태어났다는 말은, 여자란 말은 벌써 남자를 긍정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여자가 태어난 것은 여자 때문이 아니라 남자 때문입니다. 남자가 태어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왼쪽이 있는 것은 바른쪽 때문에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여자가 있는 것은 남자가 있기 때문이요, 남자가 있는 것은 여자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볼록이고 여자는 오목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할 때 여자가 위로 올라가야 됩니까, 남자가 위로 올라가야 됩니까? 결혼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이상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여자가 올라가야 됩니까, 남자가 올라가야 됩니까? 이것은 누가 가르쳐주어서 아는 게 아닙니다. 원리라는 것은 배워서 아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압니다.
왜 남자가 위로 올라가야 되느냐? 그래야 종(縱)이 되기 때문입니다. 씨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늘로부터 옵니다. 무엇을 통해서 오느냐? 사랑을 통해서 옵니다. 그 하나가 전부 증명합니다. 그리고 씨라는 것은 아버지에서, 종적인 사랑의 볼록을 통해서 옵니다. 볼록이 오목과 맞추게 되면 천지가 진동합니다. 여자가 좋다! 하고, 남자도 좋다! 하면 천지가 다 좋아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구름이 많더라도 번개가 치는 곳은 한 곳입니다. 번개가 친다는 것은 뭐냐? 고기압과 저기압이 최고의 자리에서 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순환작용에 의해서만 전환적 이상이 벌어집니다. 전환작용에서 이상의 힘, 이상의 현상이 전개됩니다.
그러니까 남자가 위입니다. 그러면 사랑이란 것은 뭐냐? 남자는 볼록이고 여자는 오목입니다. 오목과 볼록이 완전히 하나되는 것이 사랑입니다. 완전히 같아집니다. 뿌리와 끝이 하나입니다. 그렇게 순환해서 한바퀴 돌게 되면 원점(영점)으로 돌아갑니다. 영점으로 돌아가려면 순환운동이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하나됩니다. (187-52)
통일은 사랑 아니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우리 인간에게서 사랑의 안테나는 생식기입니다. 그래서 남자는 볼록이고 여자는 오목입니다. 이 둘이 합하게 되면 둥그렇게 되면서 없어집니다. 그것은 음전기와 양전기가 합해서 벼락을 치고 나면 영(零)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처음으로 돌아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원형을 그립니다. 그것이 점점점 작아지는 게 아니라 점점점 커집니다. 사랑은 더 커지기 때문에 개인적 사랑보다는 가정적 사랑을 추구합니다. 그리고 내 가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종족이 필요합니다. 종족이 필요하기 때문에 나선형으로 확대운동을 하면서 발전하는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존재는 사랑에 흡수되려고 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남편과 아내가 서로 사랑하며 살고 있지만, 그보다 더 강한 사랑이 있다면 거기에 달라붙습니다. 더 큰 사랑이 나타나면 그럴 수 있습니다. 부처끼리 사랑하며 사는 사람도 애국심이나 세계를 품을 수 있는 사랑의 세계가 있다는 걸 알면 가정을 버리고 떠납니다. 그게 나쁜 게 아닙니다. 아내가 붙들고 나하고 살자 하고 아무리 울고불고 해도 큰 사랑을 위해서는 아내도 박차고 자식들도 박차고 나섭니다. 그 큰 사랑을 따라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편에 더 가까이 가기 때문에 그걸 선(善)이라고 합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작은 것보다는 큰 것을 원합니다. 또 좋은 것을 원하지 나쁜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나쁜 것을 갖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것은 만민 공통 개념입니다. 그건 평등입니다. 무엇을 중심으로 평준화시킬 것이냐? 그건 사랑만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미국의 어머니들이 아기를 대하는 사랑과 한국의 어머니들이 아기를 대하는 사랑이 다르겠습니까, 같겠습니까? 본질은 같습니다. 그러므로 통일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이룰 수 없습니다. (187-54)
4. 사랑의 속성
참사랑은 우주의 핵심이요 수직과 수평의 합착점이다
참사랑은 직단거리를 통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참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철퇴를 박아 넣는 착지점이 수직의 핵심입니다. 수직선은 가장 짧은 거리, 직단거리입니다. 그 직단거리가 되는 점은 수직점밖에 없습니다. 90.1도도 안 되고 89.9도도 안 되고 정확히 90도가 되어야 합니다.
개인도 그 수직의 참사랑을 중심으로 하여 수직점에 섰다면, 인간은 참마음을 갖게 되어 절대적인 주체 앞에 몸 마음이 자동적으로 하나됩니다.
하나님의 혈통을 받은 경우에도 참사랑은 90각도 외에는 절대 없습니다. 참자녀의 사랑, 참부부의 사랑, 참부모의 사랑도 그 수직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요, 평면적 참사랑도 수직선에 대하여 90각도를 이루고 있으므로 통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짧은 거리, 수직이 되는 최단거리에 맞출 수 있는 그 길은 90각도 이외에는 없습니다. 조금이라도 빗나가면 안 됩니다. 반드시 90각도로 연결되어야 본연의 심정인 하늘과 땅의 결착점이 생깁니다.
인간은 이중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수직과 수평을 결착시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결착시킴으로써 모든 존재의 위치와 모양, 형태를 측정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설계를 할 때에는 90각도로 맞추어서 합니다. 모든 것을 수평과 수직을 중심으로 하여 선을 그으며 맞았다 빗나갔다 하는 것을 결정합니다.
양심적이다 하는 말은 수직에 맞추었다는 의미입니다. 양심은 옳습니다. 옳다는 것은 직단의 위치에 서 있는 일점을 점유하는 수직선이라는 것입니다. 육신은 거기에 자동적으로 수평의 위치를 취하게 되어 있습니다.
인간이 타락하지 않았다면 그 핵심점, 공명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곳에 이르는 결착점은 이 일점밖에 없습니다. 이 일점을 무시하면 상대세계는 붕괴되어 버립니다. 그 일점을 중심으로 보면 구체가 생깁니다. 동물, 광물, 식물, 인간, 우주, 모두가 그런 관계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의 세포를 봐도, 전자 구성을 봐도 다 주체가 있어서 이 주체를 중심으로 돌아갑니다. 왜 그러냐? 천지 창조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근본적 사랑이 우주의 핵심이 되고, 그것이 수직과 수평의 합착점이며 모든 존재의 씨가 됩니다. 이것이 기원입니다.
식물에 있어서도 그 방향을 찾는다면 이런 사랑의 이상권은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느냐? 동서남북 사방이 수직과 수평의 교차점에서 자기 존재를 중심으로 번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種)의 기준을, 종의 권한을, 그 원점을 침해할 수 없습니다. 우주는 그것을 보호하게 되어 있습니다. (213-255)
사랑의 상대권이 성립되면 삼자의 개입을 절대 불허해
이런 원칙적인 이론이 있기 때문에 진화론은 말도 안 됩니다. 아메바에서부터 인간에 이르기까지 진화했다는 것은 수천 단계의 상대권을 통과한 사랑의 탄생이 가능했다는 말입니다. 수컷 암컷의 사랑 관계를 거치지 않으면 그 이상의 것이 태어나지 않게 돼 있는데, 수컷 암컷, 남자 여자의 사랑 관계를 진화론에서는 빼놓고 있습니다. 침팬지와 인간을 결혼시킨다고 해서 인간 아기가 태어나겠습니까? 절대 태어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주에 있는 어떤 존재도 사랑의 상대권이 성립된 곳에는 제삼자가 개입하는 것을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는데, 그 아내 앞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남편은 없습니다. 절대 원하지 않습니다. 그건 여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남편 앞에 자기보다 더 예쁘고 훌륭한 여자가 나타나는 것을 원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이건 절대적입니다.
그리고 시집을 가서 첫날밤에 엄마, 우리 방에 들어와서 같이 자요 하는 여자는 없습니다. 사랑하는 아버지라고 해서 결혼 첫날밤에 아버지, 우리 방에서 같이 있어요 하는 아들도 없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그 아버지도 미친 사람이고, 어머니도 미친 사람이고, 아들딸도 미친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단 둘이 하는 것입니다.
동물세계는 어떠냐? 동물의 세계도 같습니다. 상대관계를 맺기 전에는 수컷과 암컷이 서로 흩어져서 살지만, 일단 상대관계를 맺고 보금자리를 만들었다면 제삼자의 개입을 절대 허용하지 않습니다. 선생님은 새를 잡아먹어 보기도 하고, 관찰해 보기도 하고,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그런 것은 곤충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삼자가 개입하면 목숨을 걸고 싸웁니다.
그런 내용을 생각해 보면 진화론은 거짓말 이론입니다. 진화란 수천 단계의 사랑 관계를 거쳐서 그것을 직선적으로 묶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두 점을 연결한 것이 직선입니다. 직선에서는 증가가 없습니다. 직선 자체는 절대 증가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면 직선상에 또 하나의 점을 누가 충족시켰느냐? 그것은 직선으로 연결된 두 점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다른 존재가 개입하지 않으면 제3점은 생기지 않습니다. 세 점에서부터 증가가 가능합니다. 세모에서 네모로, 네모에서 원체로 변합니다. 그렇게 해서 수천 점이나 증가합니다. 연장 기반의 방향에 있어서 그렇게 됩니다.
그러면 제3점을 누가 개입시켰느냐? 직선 그 자체로는 못 합니다. 직선 그 자체가 제3점을 개입시킬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역학에서는 반드시 입력보다 출력이 작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작용해서 나온 결과체가 더 크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그건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213-256)
참사랑의 관계에서는 입력보다 출력이 크다
참사랑의 관계에서는 입력보다 출력이 큽니다. 그래서 역사상의 성인들이 그 시대에 박해를 받고 사라졌지만, 그들은 입력보다 출력이 커지는 참사랑을 투입하고, 또 투입하고, 또 투입했습니다. 하나님도 그러다보니 우주 창조가 가능했습니다. 투입하면 커집니다. 크고, 크고, 크고, 크고, 더 크게 된다는 것입니다. 투입하는 심정권이 있으면 생명의 존재기대는 영원히 남습니다. 그것은 참사랑을 하나님 자신이 영원히 투입함으로써 이론적으로 영생할 수 있습니다.
참된 절대적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은 자신의 사랑의 상대는 자신보다 훌륭하기를 바라면서 인간을 창조했습니다. 인간도 자신의 자녀가 자신보다 훌륭하게 되기를 원합니다. 이것은 어디에서 유래됐느냐? 하나님에게서 유래됐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원한다면 도대체 그 하나님의 상대는 누가 될 것인가? 하나님은 누구에게 내 상대는 너다! 할 수 있겠는가? 부모의 욕망을 역사를 통해서 한 번도 완성시킨 예가 없습니다.
자기 사랑의 이상상대는 모든 것을 충족시킵니다. 전체를 완성시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욕망은 최고의 존재인 하나님을 점령하기를 원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까지, 하나님이 숨기고 있는 비밀의 보석함까지도 점령하기를 원하고,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기를 원합니다. 그럴 수 있는 것이 참사랑의 상대관계입니다.
이렇게 위대한 존재가 인간이라고 한다면, 그런 하나님의 상대자로 창조된 인간을 인정할 경우 영생의 이론은 자동적인 결론입니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든 너 몇 살까지 살고 싶어? 하고 물으면 영원히 살고 싶어 그럽니다. 눈도 그렇고, 코도 그렇고, 모든 세포가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근본이 그렇게 돼 있기 때문입니다.
근본에 따라서 근본적 결과세계에 도달하기 위해서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 더 좋은 것을 원합니다. 누구나 보다 더 좋은 것을 원합니다. 작년보다 올해가 더 좋아야 하고, 올해보다 내년이 더 좋게 되기를 원합니다. 청년보다 노년이, 이 시대보다 미래가 더욱 좋게 되기를 원합니다. (213-258)
참사랑에는 소모가 없다
참사랑에는 소모가 없습니다.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커집니다. 역학의 원칙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소모되는 것이지만, 참사랑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소모가 안 되고 커 갑니다.
선생님이 세상에서 40년 동안 반대받고 손가락질받으면서 어떻게 커 왔느냐 하면, 사랑의 비밀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참사랑을 뿌리면 그것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환경을 소화할 수 있습니다. 참사랑은 그런 힘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 때문에 지었으므로 참사랑이 가는 곳에는 모든 것이 따라갑니다. 친구들 가운데서도 정이 통하는 사람을 찾아갑니다. 아내는 남편이라는 사랑의 주류 줄기가 있기 때문에 남편을 따라가야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주류에 서는 것입니다. (219-18)
역학에서는 입력이 출력보다 크지만, 사랑의 세계에서는 입력보다 출력이 큽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모든 비준이 핵에서 생깁니다. 핵의 자리에서 상대에게 공급하고 남을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이 참사랑입니다. 공급하고 모자라는 자리가 아닙니다. 참사랑은 상대가 되는 그 전체에게 나눠주고도 남을 수 있는 자리에 서 있기 때문에 운동을 하면 할수록 커 갑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친구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면서 선물을 갖다 줬다면, 그것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1백원짜리라 해도 거기에는 사랑이 들어가 있기 때문에 은혜를 갚을 때에는 그 이상 것을 사줍니다. 1백원짜리를 사 왔기 때문에 나는 90원짜리를 사서 갖다 주겠다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1백에 플러스해서 주고 싶은 것이 우리 본성의 마음입니다. 참사랑의 근원지가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참사랑이 향하는 것에는 마이너스가 되지 않습니다.
성현들이 그 시대에 죽음을 당했지만 어찌하여 역사과정에서 세계 사람들에게 추앙받게 됐느냐? 예수님은 목수의 조수밖에 안 되는 무가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민족의 반역자였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죽은 뒤에 어떻게 세계를 사랑권으로 품을 수 있었느냐? 참사랑의 씨는 소모가 벌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건 역사적 사실입니다. (219-22)
사랑은 모든 것을 화합시킬 수 있는 것
처녀가 사대부 가문에 시집을 간다고 합시다. 시할아버지 시할머니로부터 시어머니 시아버지, 사돈의 팔촌까지 있는 층층시하의 사대부 집 양반의 세도가 얼마나 큽니까? 또 권위의식이 얼마나 큽니까? 그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온 도의적인 생활법도가 얼마나 복잡합니까? 다리 하나도 마음대로 펼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 입장에 있는 처녀로서는 시아버지가 어떻게 보겠나? 시어머니가 어떻게 보겠나? 신랑이 어떻게 보고, 시삼촌이 어떻게 보겠나? 하고 걱정하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여자는 솔직하고 단순합니다. 한 가지밖에 생각을 못 합니다. 남자같이 복잡하게 생각했다가는 결혼을 못 합니다. 그렇지만 신랑이 뭔지 어머니 아버지, 자기 형제를 다 버리고 신랑을 찾아 결혼합니다. 그런 요사스런 힘이 어디에서 나오느냐? 조화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그 원동력이 사랑의 힘입니다.
층층시하의 사대부 가문으로 시집가서 사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피곤하고 힘들더라도 사랑하는 남편의 사랑이면 그만입니다. 시어머니한테 매를 맞고 궁둥이에 시퍼런 혹이 생겨서 아무리 해도 안 낫는데 남편이 혀로 핥아주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것입니다. 천년 사연이 다 녹아납니다. 사랑은 그렇게 위대합니다. 그런 남편을 만나서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여자 눈이 아무리 독사 눈처럼 생겼더라도 사랑하는 남편을 대할 때는 독사 눈이 되지 않습니다. 비둘기 눈이 됩니다. 아무리 입술이 독사 입같이 생겼더라도 남편 앞에서는 어머니 젖꼭지 같은 입술이 됩니다. 빨고 빨고 빨더라도 좋습니다. 무엇이 그런 조화를 일으키느냐? 사랑이 그렇게 만듭니다. 사랑은 없는 것 같지만 미묘한 매력을 갖고 있습니다.
사랑이 꽃을 피우면 꽃이 다 질 때까지 천하가 관심을 갖습니다. 사랑이 어떻게 꽃을 피우느냐? 여자에게만 핍니까, 남자에게만 핍니까, 남자 여자에게 다 핍니까? 사랑의 꽃은 남자에게도 피기 시작하고 여자에게도 피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은 머리가 돈 사람입니다. 꽃이 어쩌면 그렇게 자기가 필요로 하는 그런 배필을 운반해줄 수 있는 벌이나 나비가 좋아하는 향기를 내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게 자연히 그렇게 됩니까? 만일 벌이나 나비가 없다면 그 향기는 아무 필요 없을 것입니다. 그 향기는 무엇에 쓰겠습니까? 남자가 없다면 여자가 아무리 미인이라 해도 아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우주의 옷과 같고, 부처님 상(像) 이마에 박힌 보석과 마찬가지입니다. 꽃과 같은 그런 사랑이 있기 때문에 남자 여자가 거기에 걸려 사는 것입니다.
남자가 태어나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뭐냐? 여자가 태어나서 자랑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 사랑을 점령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로 태어난 것이 남자 여자입니다. 이 말은 밤에 들어도 좋고 낮에 들어도 좋고, 자는 여자한테 주먹을 한 대 질러 놓고도 이 말만 하면 좋아, 좋아 한다는 것입니다.
화합의 화는 화할 화(和) 자입니다. 될 화(化) 자도 있는데, 될 화(化) 자하고 화할 화(和) 자하고 어떻게 다르냐? 될 화(化)는 본질이 변하는 화학적인 것을 말합니다. 화학은 실험실에서 약품을 넣어 본질을 변화시켜서 화합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화할 화(和)는 본질이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화합하는 것은 남자면 남자의 본질이 변하지 않고, 여자면 여자의 본질이 변하지 않습니다. 자기 본래의 모든 소질이 그냥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유전적 소성까지도 변하지 않는 개체 인격 전체를 발굴시켜 나오면서 모든 요소들이 합해져서 화하는 것입니다. 그런 화합을 이룰 수 있는 것은 학문도 아니고 권력도 아닙니다. 사랑만이 모든 것을 화합시킬 수 있습니다. (181-25)
사랑이 가지고 있는 특권
그러면 사랑의 속성 가운데는 무슨 권리가 있느냐? 동위권이 있습니다. 언제든지 사랑의 인연을 맺으면 하나님이 계시는 높은 자리에 가더라도 야, 왜 와? 그러지 않습니다. 남편이 대통령인데, 부인이 아주 못생기고 배우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부인이 남편이 있는 자리에 가면 모든 각료들이 남편을 대하듯이 대하게 되어 있습니다. 언제나 동위권에 설 수 있습니다.
그 다음에 동참권이 있습니다. 하나가 어디에 가든지 거기에 동참할 수 있습니다. 남편이 어디에 갈 때 떼어놓고 다니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다니고 싶은 것이 남자나 여자의 바람입니다. 여자들은 밥을 지어놓고 나가 돌아다니는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려서 같이 먹고 싶어합니다. 자는 것도 같이 자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안 돌아오면 문제가 벌어집니다. 동참권을 치면 절대로 용납하지 못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에는 소유권과 상속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갖고 있는 것은 누구의 것이 되느냐? 사랑 관계를 맺으면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136-118)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아무리 낮은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어떤 높은 자리에 있다 해도 휙 올라갈 수 있습니다.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하루 저녁에 그 자리에 동참합니다. 아무리 여자가 못나고 배운 것이 없어 무식하다 하더라도, 양가집의 잘난 아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붙들고 늘어지면 할 수 없습니다. 그 남자와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남자가 가진 모든 것은 여자 것이 됩니다. 동참할 수 있는 권한을 갖습니다. 그래서 사랑이 위대합니다.
사랑에는 그런 특권이 있습니다. 사랑으로 일체, 즉 통일권이 벌어질 때에는 대등한 가치의 상속권이 개재되어 있습니다. 미국의 대통령이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시골의 못생긴 여자와 사랑을 했으면 자기가 사랑한 그 여자를 무시할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그 여자를 차 버릴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절대적인 하나님이라도 그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아무리 미천한 자리에 있더라도 하나님과 사랑하는 자리에 서면 하나님과 동등한 자리로 비약합니다. 또 그 사랑과 하나된 후에는 모든 상속권을 내가 인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것이자 내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것은 많지만 내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좋아하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없으면 하나님이 아무리 잘났더라도 웁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의 대상으로 지었는데, 하나님의 사랑의 절대 대상으로 지은 인간을 백년쯤 살다가 죽게끔 만들었겠습니까? 절대적 사랑의 주체인 하나님의 대상적 가치로 지은 인간이기 때문에, 사랑을 중심으로 영생한다는 논리가 성립됩니다. 하나님이 영생하니 그 사랑을 영원히 바라는 하나님 앞에서 없어질 수 없는 존재기 때문에 영생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써만 영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이 나왔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사랑은 천지의 어느 방향에나 합격입니다. 만사형통입니다.
영생하려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야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하면 영생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면 하나님이 보호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죽더라도 보호해야 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부모는 그 부모가 죽더라도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천리 대도(大道)의 원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아들딸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참사랑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이면 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접붙임을 받는 자는 하늘나라가 내 나라요, 하늘의 왕궁권을 내 왕궁권으로 행사할 수 있습니다. 영계는 사랑의 공기로 꽉찬 세계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가는 곳에는 나도 언제나 따라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세계는 어디나 내 세계입니다. (142-278)
사랑은 영원히 계속해도 싫지 않다
사랑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감정이나 감성, 느낌은 영원히 계속해도 싫지 않습니다. 또 사랑으로 찾아와서 바라보는 그 시선은 나만 봐라 하는 식입니다. 무엇이든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딸은 어머니가 학교에 올 때는 어머니가 못생겼더라도 잘 입고 오기를 바랍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사랑스럽게 잘생겼다고 인정하는 어머니라 하더라도 학교에 오는데 아무렇게나 하고 오는 것을 싫어합니다. 잘 입고 오기를 바랍니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아름답기를 바랍니다. 그건 인간의 본능입니다.
또 안팎만이 아닙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걷는 모습이 전후 좌우로 흠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볼 때 흠잡을 수 없어야 아들딸이 좋아합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가 모든 것에서 드러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주체와 대상 관계에 있을 때에는 전부 자랑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시집을 잘 갔느냐 못 갔느냐 하는 것은 신랑이 사랑해주느냐 사랑해주지 않느냐 하는 것을 묻는 것입니다. 친구들끼리 만나서 얘기할 때 너 시집 잘 갔어? 하고 묻는 것은 돈 많은 사람에게 시집갔어? 또는 지식 많은 사람에게 시집갔어? 하는 뜻이 아닙니다. 시집 잘 갔느냐 하는 것은 사랑을 중심으로 신랑이 누구보다도 너를 사랑해주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근본입니다. 돈이 많은 사람에게 시집갔다고 시집을 잘 간 것이 아닙니다. 돈이야 있다가도 없어집니다. 권력도 있다가도 없어집니다. 지식이 있다 해도 지식으로 모든 것이 처리되는 것이 아닙니다. 신랑이 너를 지극히 사랑해주느냐? 하는 것을 중심으로 묻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도 사랑으로 보면 피곤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 일할 때에는 밤을 새우더라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 사랑의 길은 지칠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하면 할수록 힘이 감소하는 것이 아니라 하면 할수록 점점 증가하고 빨라집니다. 점점 빨라져서 어떻게 되느냐? 점점 빨라지면 날아갑니다. 축보다 더 빨리 돌면 휘익 납니다. 빨리 도는 것은 날아가고 싶어서입니다. 허공 가운데 날아가고 싶어서 빨리 돕니다. 고착된 축을 중심으로 빨리 돌 때는 한 자리에서만 도는 것이 아니라 올라갔다내려갔다 하면서 돕니다. 빨리 돌면 쑥 올라가고 천천히 돌면 내려옵니다. (198-70)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밥 먹는 것보다 좋고, 노는 것보다 좋고, 잠자는 것보다 더 좋습니다. 그래서 선생님도 통일교인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이들의 생명이 자라는 것을 볼 때 밤에 잠자는 것을 잊어버립니다. 그 이상 충격적인 장면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생 동안 해먹더라도 지치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지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으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디에 가더라도,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더라도 그 생각이 언제나 자기를 끌고 있습니다. 이미 사랑의 줄에 매여 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 말씀을 들은 사람은 언젠가는 찾아오게 마련입니다.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 찾아옵니다. 돌아다니면 다닐수록 잘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그래서 지지리 고생하다가 또 찾아옵니다. (144-260)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혁명도 없다
인간은 어머니 사랑도 필요하고 아버지 사랑도 필요합니다. 그 마음은 아이 때도 그렇고, 늙어서도 그렇습니다. 그건 발전이 없습니다. 엄마가 아이에게 누구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얼굴을 딱 보고 말은 하지 못하면서 자기가 먼저 어머니 품에 안기겠다고 궁둥이를 들이밉니다. 사랑의 힘은 끊임없습니다. 그래서 어렸을 때에도 사랑의 힘에 의해 살려고 그러고, 커서도 사랑의 모체를 따라가려고 합니다. 가까이 가려고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이 때에는 부모를 떠날 수 없습니다. 부모가 없는 고아는 불쌍한 사람입니다. 왜 불쌍하냐? 밥이 없어서 불쌍한 것이 아닙니다. 좋은 고아원은 오히려 넉넉히 사는 집보다 낫습니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도 고아원을 원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잘 입고, 아무리 노래를 매일같이 하고 춤추며 살고, 희희낙락하는 소리가 담을 넘어서 동네의 모든 사람에게 소문났다 하더라도 고아원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아이는 없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품에서, 사랑의 그늘에서 살고 싶어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사랑은 혁명할 수도 없습니다. 역사과정에서 제도가 변하고 어떻다 해도 혁명을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 아버지와 그 사랑 속에서 자란 자녀가 사랑하던 그 방식은 역사가 천년 만년 지나더라도 변함이 없습니다.
동물의 어미가 새끼 사랑하는 것을 혁명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어떤 존재가 새끼를 낳은 한 쌍을 불러다 놓고 너희들끼리 처음 만나 지금까지 좋아해서 새끼를 낳았지만, 새끼를 낳아 놓은 다음에는 그 새끼를 절대 사랑해서는 안 돼! 그러면 죽인다! 한다고 해서 그 어미가 사랑하지 않느냐? 거기에는 혁명이 있을 수 없습니다. 억천만년이라도 순환의 도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러기에 사랑에는 발전도 없고 혁명도 없습니다. (137-215)
존재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은 사랑
변하는 것 중에는 귀한 것이 없습니다. 다이아몬드는 굳기에서 변하지 않기 때문에 보석 취급을 받는 것이요, 황금은 누런 색깔에 변함이 없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진주는 조화된 우아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이 변치 않기 때문에 귀한 것입니다. 왜 인간은 귀하다는 보물들을 변치 않는 특성을 중심하고 책정했느냐? 그것이 우주의 모든 표현의 방법입니다. 존재가치를 비교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우주 측정에서 전체를 측정할 수 있는 가치기준, 제일 첫째 가는 기준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변치 않는 사랑, 깨질 수 없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깨질 것 같은데 깨지지 않습니다. 마음대로 할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도 그 표준을 변경시킬 수 없고, 인간도 변경시킬 수 없습니다. 영원불변이면서 안팎의 보화의 가치를 가지고 땅 끝이나 어디나, 지옥이나 천상세계 어디나, 밤낮을 극복하고 지역을 극복하고 거리를 극복하고, 즉 시공을 초월해서 그 절대적 측정의 기준, 비교의 기준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무엇이 있어야 됩니다.
지구도 위도 경도에 있어서 영점(零點)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이 기준은 아무리 변화시키려 해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게 변하면 세계에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그게 없어도 된다면 질서의 세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인간이 생겨날 때에도, 난자와 정자가 합해 영점 기준에서부터 비례적으로 원소가 화합해 생겨납니다. 그래서 사람을 가르면 절반으로 나눠집니다. 두 쪽으로 나눠지는 금이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우주에서 측정할 수 있는 영원불변의 모든 존재가 비준을 맞춰서 그 등차 위치를 결정하고 싶은 그 본래의 것, 하나님도 따르고 전체가 따르지 않을 수 없는 하나의 기준이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돈도 아니고 황금 덩어리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하나님이 만들 수 있습니다. 하나님 혼자서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사랑도 물론 하나님이 만들 수 있다고 보지만, 하나님 혼자서는 그 사랑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둘이 소유해야 됩니다. 하나님도 혼자서는 사랑을 찾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측정 원기가 뭐냐? 우주만상의 존재세계에 절대적으로 하나밖에 없는 측정 원기가 무엇이겠느냐?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춘하추동 계절의 변화에 영향을 받지 않습니다.
사랑길을 간다면 누구나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랑길을 찾아가고 싶어합니다. 그러면 순정이 뿌리에 달려서 우리 마음 보따리가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랑의 본성이 되어 있느냐? 여자의 마음은 갈대와 같다고 합니다. 왜 갈대와 같다고 하느냐? 갈대는 바람이 불면 흔들거리면서 소리를 냅니다. 갈대는 유난히 소리가 납니다. 갈밭에 가 보면 바람이 약하게 불거나 조금만 움직여도 바삭 바삭 바삭 소란스럽습니다. 그러한 사랑을 찾아간다면 내 자체는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소성을 갖고 있느냐? 그 소성은 내 본성의 깊은 곳에 잠겨 있는 사랑입니다.
인심(人心)은 조석변(朝夕變)이요, 산색(山色)은 고금동(古今同)이라는 옛말도 있지만, 우리는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어머니의 얼굴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랑도 원하지 않습니다. 또 아버지도 아침 저녁으로 변하는 어머니의 사랑의 표정을 원하지 않습니다. 같은 표정이라도 순정이 담긴 변함없는 사랑의 표정을 원합니다. 아무리 잘난 아버지라도 그걸 원하지 변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본래 우주에 절대적으로 설정한 원기의 표준이 그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거기에 평형선을 갖추어야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질서가 생깁니다. (137-23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