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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내 뒤에는 단 한명의 아군 병사도 남아 있지 않다. 9년 동안 우리의 주둔은 끝났다
- 1989년 2월 15일 소련군 제40군 사령관 보리스 그로모프(Boris Gromov) 상장,
아프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의 아무다리야 강 '우정의 다리' 위에서 철군 종료를 선포하면서.
아프간 전쟁이 시작된 지 3년 째인 1982년 11월 10일 소련의 지도자였던 브레즈네프가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는 미국과 전략 무기 감축협정에 조인하는 등 제3차 세계대전을 피하는데 나름대로의 기여를 했다고 하지만 본질적으로는 보수파였다.
브레즈네프는 스탈린과 같은 폭군은 아니었지만 그가 집권하는 동안 국내 정책은 스탈린 시절로 회귀하였다. 오직 미국을 군사적으로 따라잡겠다면서 핵무기와 탱크, 야포, 전투기의 생산에만 열을 올렸고 우주 개발을 위하여 막대한 돈을 쏟아부었다. 덕분에 소련의 군사력은 적어도 양적으로는 서방을 압도할 정도였다. 이것이 그의 자부심을 높였을지 몰라도 대다수 국민들의 삶은 극도로 궁핍해졌다. 또한 중국을 적으로 돌렸고 체코와 헝가리 침공은 서방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그 중에서도 최대의 실수는 아프간 침공이었다. 지도부와 군부조차 반대했지만 브레즈네프는 몇몇 측근들의 말만 듣고 신중한 고민 없이 일방적으로 밀어붙였다. 국제 사회의 비난이 쏟아지고 제3세계는 등을 돌렸다. 미국은 보복 조치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면서 소련은 심각한 기근에 직면하였다. 소련이 얻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장장 18년에 걸친 그의 통치는 소련 체제가 안고 있던 모순과 취약성을 더욱 악화시켰을 뿐이었다.
브레즈네프의 뒤를 이어서 유리 안드로포프와 콘스탄틴 체르넨코가 각각 새로운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지만 두 사람 모두 늙고 병들어 있었고 아무런 의욕도 기력도 없는 인물들이었다. 70살이 넘는 고령임에도 여전히 젊은이 못지 않게 열정적으로 움직이면서 보수파를 설득하여 과감하게 중국을 바꾸어 나가던 덩샤오핑과 같은 모습을 기대하기에는 어림도 없었다. 게다가 취임 이전부터 심한 지병을 앓고 있던 이들은 급사할 때까지 고작 1년에서 1년 반을 집권하였다. 이렇다할 업적을 남긴 것도 없었다. 다른 지도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평균 연령은 70대가 넘었고 관료적인 타성과 무사안일에만 젖은 채 앞에서는 미국과의 대결을 강조하면서 뒤로는 고급 주택에 살면서 사치스러운 미제 물품을 사용하였다. 국민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었다. 이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의 제국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미 영광은 빛이 바랬고 소련은 점점 쇠락하고 있었다.
1985년 3월 15일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서기장에 취임하였다. 취임할 때 이미 언제 죽을지 알 수 없을 만큼 병약한 전임자들과는 달리 겨우 54살에 불과하고 혈기 왕성했던 그는 "대조국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첫번째 지도자였다. 이것은 소련 지도부의 세대 교체를 알리는 것이기도 하였다. 소련이 안고 있던 문제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던 고르바초프는 시늉만 내는 개혁은 아무런 의미가 없으며 체제 전반을 뜯어고쳐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자신의 개혁을 이른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재건)"이라고 불렀다. 물론 아프간 전쟁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부와 보수 지도부의 반발로 당장 아프간에서 모든 병력을 빼낼 수는 없었지만 1986년 2월에 열린 제27회 소련 공산당 전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는 아프간 전쟁을 "피투성이 싸움"이라고 부르면서 "우리는 가능한 빨리 끝내야 한다"라고 하였다.
아프간 전쟁에 대한 분위기도 바뀌기 시작하였다. 그동안 국민들에게 진상을 숨긴 채 "눈부신" 승리만을 앵무새마냥 떠들던 언론들도 비로소 전쟁의 현실을 알리고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아프간 철수를 완강하게 반대하던 지도부 역시 점차 고르바초프에게 동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들로서도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1987년 2월 23일 열린 정치국 회의에서 고르바초프는 "우리가 물러나면 위신이 땅에 떨어질 것을 우려하는 사람들이 있소. 또한 우리가 아프간에서 도망치면 제국주의 국가들이 공세에 나설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국내 문제도 중요하오. 우리는 아프간에 수십만명의 병사를 보냈지만 모든 것이 허사였소."라고 말했다. 아프간 철수를 놓고 그동안의 논쟁에 종지부를 찍겠다는 말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철수 계획을 카르말에게도 전달하였다. "당신들은 스스로 살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당신들을 돕겠지만 그것은 군대가 아닌 무기가 될 것이다. 살아남기를 원한다면 사회주의는 잊어라. 무자헤딘이건 다른 적대적인 지도자이건 가리지 말고 타협하라."
그동안 소련만 굳게 믿고 있었던 카르말은 머리를 크게 한방 맞은 느낌이었다. 그는 그동안 소련이 자신보다 더 아프간을 필요로 할 것이니 앞으로도 아프간을 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태평스레 마음을 놓고 있었다. 또한 그동안 자신의 정권을 강화하는데 급급한 나머지 반대파들을 가차없이 숙청하고 탄압하였다. 아프간의 상황이 이토록 악화된 것도 따지고 보면 카르말이 초래한 결과였다. 그리고 그를 그 자리에 앉힌 브레즈노프의 잘못이기도 했다. 결국 고르바초프는 무능하기 짝이 없는 카르말을 아프간 대통령에서 해임하고 모스크바로 소환하였다. 그를 대신하여 아프간 혁명 평의회 부의장 하지 무함마드 참카니가 새로운 대통령이 되었지만 실권은 KHAD(아프간 비밀경찰)의 수장인 모하마드 나지불라에게 있었다. 1986년 12월 12일 고르바초프는 나지불라를 만나서 2년 안에 모든 소련군을 철수시키고 손을 뗄 것이니 그동안 무슨 수를 써서건 정권의 기반을 다지라고 충고하였다. 발등에 불 떨어진 꼴이 된 나지불라는 저항 세력들에게 내전의 중지와 여러 정치 세력들을 아우르는 연합 정권의 수립을 호소하였다.
하지만 평화도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고르바초프는 적어도 소련군이 아프간에서 쫓겨나는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또한 소련군이 물러나자말자 나지불라 정권이 붕괴되고 카불이 반군의 손에 넘어가거나 내전이 더욱 격화되어 아프간이 "살육장"이 되는 것도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철수는 명예로워야 했다. 아프간에 친소적인 정권을 유지하면서 평화를 회복해야 했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가능할 것인가. 닉슨은 북베트남과의 평화 회담을 반대하는 남베트남을 한번 윽박지르고 제네바에서 사인하는 것으로 간단하게 베트남 전쟁에서 발을 뺄 수 있었지만 소련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베트콩과 달리 아프간의 저항 세력들은 크게 8개의 파벌에 있고 세분하면 수십개에 달하는 분파가 있었다.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기에 아무런 구심점이 없었고 자신들끼리도 복잡한 이해 관계와 내부 갈등이 있었다. 이들은 각지에서 할거하면서 주민들을 쥐어짜는 군벌과 다를 바 없었다. 자신들이 필요할 때에는 손을 잡아 연합전선을 구축했지만 원조 물자의 배분과 주도권 차지에서는 한치의 양보도 없었고 이 때문에 자기들끼리 충돌하여 총질을 하거나 상대편 지도자를 암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였다.
또한 아프간 전쟁은 소련과 아프간 저항세력만의 싸움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양한 국가들이 얽혀 있었다는 점이다. 미국은 소련이 순순히 물러나도록 내버려둘 생각이 없었다. 중국과 파키스탄에게도 아프간 전쟁은 꽤나 짭짤한 장사이기도 했다. 이들로서는 아프간 전쟁이 더 오래 끌면 끌수록 자신들에게는 이익이었다. 소련으로서는 미국과 파키스탄의 협조가 절실했지만 이들은 소련을 도울 생각이 없었다. 1987년 9월 워싱턴을 방문한 셰바르드나제 외무장관은 조지 슐츠 국무장관에게 "우리는 아프간을 떠날 것이다. 5개월에서 1년 쯤 걸릴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렇게 먼 일은 아닐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의 말은 소련이 아프간에서 명예롭게 떠날 수 있도록 미국이 나서달라는 것이었다. 또한 소련이 아프간에서 떠난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과연 누가 아프간의 새로운 주인이 될 것인가. 만약 과격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아프간의 주인이 되었을 때 유혈 사태가 더욱 확산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어디에 있겠는가. 하지만 미국의 관심사는 그저 소련이 아프간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방해를 놓는 것일 뿐, 막상 소련이 떠났을 때 어떻게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아프간의 평화 역시 알 바가 아니었다. 레이건 행정부의 관료들은 소련이 아프간에서 쉽사리 물러나지는 않을 것이며 철군은 적어도 한참 후라고 생각했다. 슐츠 역시 셰바르드나제의 말을 한귀로 흘러버렸을 뿐이었다. "소련이 계속 피를 흘리도록 해야 한다"라고 굳게 믿고 있는 강경파들은 평화를 주장하는 미 국무부 내의 협상파들의 목소리를 눌러버렸다.무책임함의 대가는 10여년 뒤 이른바 "911 테러"로 톡톡하게 치루게 되었다.
아프간 저항 세력의 주요 원조 루트였던 파키스탄 역시 아프간 전쟁이 계속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파키스탄의 독재자 지아가 신경쓰는 것은 카불이나 모스크바가 아니라 인도였다. 인도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미국의 원조가 필요했고 아프간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무기와 자금의 상당부분은 그가 중간에서 떼어먹고 있었다. 최신예 스팅어 미사일만 해도 미국은 수천발을 제공했지만 대부분 파키스탄군의 수중에 넘어가고 무자헤딘에게 넘어가는 것은 1/10도 되지 않았다. 지아는 측근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의 목적은 주전자가 계속 끓도록 하는 것이지 끓어넘치게 하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서방의 달콤한 원조에 젖어 있는 것은 무자헤딘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이 평화를 원할 이유는 없었다. 이것이 소련과 아프간의 딜레마였다.
저항 세력들의 공세는 점차 강화되고 전쟁의 목표도, 승리의 가능성도 없는 전쟁에 지친 소련군의 사기는 갈수록 땅에 떨어졌다. 이들로서는 자신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역만리에서 굳이 제 목숨을 바쳐 가면서 싸울 이유가 없었다. 군의 기강이 땅에 떨어지면서 많은 병사들이 마약에 찌들어 있었고 자살과 탈영도 늘어났다. 소련군은 아프간 정부군을 강화하기 위하여 대량의 무기를 제공했지만 코만도를 비롯한 소수의 특수 부대를 제외하고는 전의라고는 없었다. 주로 강제로 징집되어 끌려온 아프간 병사들 역시 싸울 이유가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부정부패와 사보타주가 만연하였고 소련군의 감독을 받을 때에는 그럭저럭 싸우더라도 감시가 조금만 소홀해도 탈영하여 무자헤딘에 가담하기 일쑤였다.
1987년 12월 8일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사이에 정상 회담이 열렸다. 고르바초프는 정식으로 아프간에서 철수할 것임을 밝혔다. 그리고 미국이 무자헤딘을 더 이상 지원하지 말기를 요구하였다. 레이건은 거절했다. 고르바초프는 부통령 조지 부시에게 "미국이 원조를 계속하는 상황에서 우리가 물러날 경우 아프간의 유혈은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부시는 그저 "우리는 아프간에 친미정권을 세울 생각은 없다"라는 애매한 대답을 했을 뿐이었다. 레이건 행정부는 여전히 소련이 물러날지조차 의심하고 있었다. 하물며 그 뒤까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1987년 11월부터 1988년 1월까지 소련군 지도부는 2개 기계화 사단(제108, 제201사단)과 제103공수사단 등 2만명의 병력과 아프간 5개 사단, 1개 기갑 대대 등 8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동부의 아프간-파키스탄 국경에 대한 대대적인 소탕전을 실시하였다. 이것은 소련군의 마지막 대규모 공세였다. 그러나 별다른 성과는 없었고 오히려 무자헤딘이 고지에서 발사하는 중국제 107mm 로켓포의 공격으로 막대한 손실만 입었다. 소련군은 100여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아프간 정부군은 1천여명을 잃었지만 겨우 300여명의 무자헤딘을 사살했을 뿐이었다.
소련의 철수는 미국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빨리 실현되었다. 1988년 2월 8일 고르바초프는 5월 15일부터 아프간에서 철수를 시작하여 다음해 5월 15일까지 완료하겠다고 선언하였다. 4월 14일에는 제네바에서 소련과 미국, 파키스탄, 아프간 나지불라 정권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무자헤딘은 참여하지 않았다. 수많은 분파로 분열되어 있는 이들로서는 누구를 대표자로 선정할지조차 결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소련군의 철수와 상관없이 내전은 계속 되리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슐츠 국무장관은 CIA의 수장인 로버트 게이츠에게 소련군이 철수한 뒤 아프간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하여 물었다. 게이츠는 나지불라 정권이 그리 오래 가지 못할 것이며 어쩌면 소련군이 철수하기 전에 무너질지도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또한 그 뒤를 이어서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정권을 차지할 가능성이 높지만 이들이 미국이나 서방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할 지는 자신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소련군 철수 후 카불 정권이 이란과 마찬가지로 미국에 적대적일 수 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미국에 우호적인 정권이 들어설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레이건 행정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레이건 행정부에는 원래 별도의 아프간 정책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었고 그동안 아프간에 대한 주무부처 역할을 했던 CIA는 자신들의 역할이 소련의 침략에 맞서는 것이지 아프간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더욱이 냉전의 끝에서 미국의 주된 관심사는 소련과 동유럽에서 벌어지는 거대한 변화였다. 이미 이용 가치가 없어진 아프간 따위에 눈길을 돌릴 여유 따위는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원조는 계속 제공하되 아프간에 대한 관심을 끄기로 하였다. 무자헤딘 최대의 후원자였던 파키스탄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한편, 5월 15일 1만 2천명의 아프간을 떠나면서 소련군의 철수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전투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소련군의 목표는 무자헤딘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몰아내어 자신들의 철수로를 확보하는 것이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카불에서 소련으로 향하는 유일한 통로인 살랑 패스를 반드시 장악해야 했다. 1989년 1월 23일 "태풍 작전(the operation "Typhoon")이 발동되었다. 소련군 전투기들과 야포, 스커드 미사일이 마수드의 거점을 폭격하였다. 이 때문에 마수드는 600여명에 달하는 사상자를 내면서 철수 행렬의 습격을 포기하였다. 통로는 확보되었다.
2월 15일 11시 30분 전사자들의 시체를 실은 소련군의 마지막 장갑차가 아프간-소련 국경을 흐르는 아무다리아강에 놓인 철교를 건넜다. 제40군 사령관 그로모프 상장은 기자들 앞에서 "내 뒤에는 더 이상 단 한명의 소련군 병사도 없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은 연출일 뿐, 실제로는 그 후로도 한동안 소련군의 철수 행렬은 이어졌고 나지불라 정권을 돕는 수천여명의 소련군 고문단 역시 잔류하였다.
같은 시간 카불 공항에서는 소련 지상군 사령관(Commander Land Forces)으로 아프간 주둔 소련 국방부 작전그룹을 지휘하던 바렌니코브(Valentin Varennikov)중장이 귀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10여년 전 소련인은 아프간의 산악지대를 적응할 수 없다면서 아프간 침공을 강력하게 반대했던 그는 전날 기자들 앞에서 철군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우리는 국제주의 임무를 완수하고 떠난다. 우리는 돌아가지만 아프간 인민에 대한 우정은 남겨두고 간다. 미국은 베트남에서 점령과 파괴를 저질렀지만 우리는 아프간의 주권과 영토 수호를 위하여 싸웠다. 우리의 철수는 베트남에서 패주했던 미국과는 다르다."
소련 지도부로서는 어떻게든 미국의 전철로 보이지 않기를 바랬지만 과연 누가 그렇게 생각할 것인가. 9년의 전쟁 동안 소련은 군인, KGB, 스페츠나츠 등 연인원 65만명이 참전했고 그 중에서 1만 3천여명이 죽고 5만 3천여명이 다쳤다. KGB는 570여명의 요원을 잃었다. 또한 100여대의 항공기와 350여대의 헬기, 150대의 전차, 1300여대의 장갑차, 430문의 대포, 1만1천대가 넘는 트럭을 상실하였다. 소련의 전쟁비용은 약 840억 달러에 달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프간 정부군의 손실은 전사 4~6만명, 부상자 10~20만명으로 달했으며 무자헤딘 역시 적어도 10만명 이상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었다.
물론 가장 큰 피해자는 힘없는 일반 주민들이었다. 유엔의 조사에 따르면 아프간 전쟁 동안 100만명이 넘는 민간인이 죽었고 3백만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으며 파키스탄, 이란 등지로 유입된 난민의 숫자는 5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1979년 당시 인구 1300만명 남짓했던 아프간으로서는 전체 인구의 1/3이 죽거나 다친 셈이었다. 또한 4명 중 1명의 여성이 남편을 잃었고 2명 중 1명의 아이가 다섯살이 되기 전에 병과 영양실조 등으로 죽었으며 8명 중 1명이 전투와 지뢰 등으로 불구가 되었다. 온 국토가 초토화되었다. 아프간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소련은 엄청난 고통을 남겨준 채 떠났지만 싸움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나지불라는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하여 발버둥을 쳤다. 전투기를 동원하여 파키스탄 국경지대를 폭격하여 무자헤딘의 공급루트를 차단하려 하였고 파키스탄으로 공작원들을 대거 침투시켜 수도 이슬라마바드에서 테러를 저지르기도 했다. 소련군이 철수한 직후인 1989년 3월 5일에는 1만여명의 무자헤딘 연합군이 카불 동쪽 70km 떨어진 상업도시 잘라라바드(Jalalabad)를 공격하였다. 만약 이곳이 함락될 경우 당장 수도 카불이 위협을 받을 판이었다. 나지불라 정권으로서는 사활이 걸린 셈이었다.
처음에는 무자헤딘이 도시 외곽을 손쉽게 점령하는 등 순조로운 듯 하였다. 그러나 무자헤딘 중에서도 가장 과격하기로 이름난 굴부딘 헤크마티아르가 지휘하는 헤즈브 이슬라미(Hezbi Islami, 아프간 이슬람당) 소속 게릴라들이 포로들을 고문한 다음 토막내어 죽이자 정부군도 투항하는 대신 결사 항전하기로 결심하였다. 또한 이들의 만행은 무자헤딘 내부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고 지휘관들은 서로 대립하면서 협력을 거부하였다.
결국 두달에 걸친 전투에서 무자헤딘은 3700여명의 사상자를 내고 결국 물러났다. 정부군의 손실은 1100여명 정도였다. 이 전투는 미국과 서방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은 것으로, 아프간 정부군이 독자적으로 싸워서 승리한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또한 이 패배로 무자헤딘의 분열과 갈등은 더욱 심화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돌리게 되었다. 나자불라는 민병대를 창설하는 한편, 무자헤딘을 상대로 돈과 무기를 미끼로 매수에 나섰다. 소련군의 철수로 더 이상 싸울 목표가 사라진 많은 무자헤딘 병사들이 정부측으로 넘어갔다. 적어도 나지불라 정권이 쉽게 무너지지는 않을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소련군이 아프간을 떠난 지 9개월 뒤인 11월 9일 "냉전의 상징"이었던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다음달에는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가 국민들의 손에 의해 끌어내려졌다. 자유의 물결이 동유럽 전체로 몰아쳤다. 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 등 소련의 동맹국들이 줄줄이 돌아섰다. 1991년 12월 소련이 붕괴되어 15개 나라로 쪼개졌다. 냉전은 끝났다.
소련의 붕괴는 나즈불라 정권의 마지막을 알리는 것이기도 했다. 소련의 원조에 의존하던 그로서는 원조가 끊어지자 더 이상 정권을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소련군이 아무렇게나 버리고 간 막대한 무기와 탄약은 모두 무자헤딘의 손에 넘어갔고 내전이 시작되었다. 아프간에서 소련을 몰아내려고 그토록 혈안이 되었던 미국은 아프간 내전에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무자헤딘끼리 처절한 싸움이 벌어지는 동안 전 세계 사람들의 관심사는 오직 구소련의 붕괴와 냉전의 종식에 쏠려 있었다.
하지만 아프간의 내전은 결코 그들만의 싸움이 아니었다. 아프간 전쟁에 참여했던 많은 아랍인들은 서구를 상대로 더 큰 "성전"을 꿈꾸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는 빈 라덴도 있었다. 그는 소련군이 한창 철수하던 1988년 9월 알카에다를 결성하였다.
저도 드디어 연재를 완료하였네요..
얼마 되지도 않는 분량을 갖다가 질질 끈 점 죄송합니다 ㅠㅠ 갠적으로 너무 나쁘다보니...
여하튼 그 동안 저의 아프가니스탄 전쟁비사도 사랑해주셨다면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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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베트콩님도 수고하셨습니다^^ ㅎㅎ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베트콩님^^
짧지만 이해하기 쉬운 연재였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