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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딘 디엠이 피살된 후 3주 만에 케네디 대통령도 저격당하여 이제 공은 대통령을 승계한 존슨(Lindon B. Johnson)에게 넘어갔다. 존슨은 취임 후 특별한 변화 없이 케네디의 개입확대 정책을 그대로 시행하여 1963년 말에 남베트남 내 미군 병력은 고문단, 군수지원부대, 그린베레 등 16,000명이 되었다.
린든 존슨
1967년 남베트남 1군단 지역에 배치된 그린베레 요원들
미국은 조금씩 조금씩 베트남 전쟁에 깊이 빠져들고 있었으나 아시아에서의 제한전쟁에 지상군의 개입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 하에서의 미국의 제한전쟁 논리는 적국을 완전히 굴복시키기보다는 적국의 의지에 영향력을 미쳐 적국으로 하여금 계속 대항하는 것보다는 강요된 조건을 수용하는 것이 오히려 이익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전면전쟁으로까지 확전되지 않고도 특정 목표를 달성한다는 것이어서, 이미 한국전쟁에서 승리도 패배도 아닌 수준에서 휴전으로 마무리한 적이 있었고 전쟁의 결정적인 승리 직전에 개입한 중국군에 대한 망령이 미국을 내내 짓누르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결과를 바꾼 중국의 개입
미국은 이미 10년간 남베트남을 지원하여 왔다. 미국의 지원목표는 “남베트남 정부 및 남베트남군을 지원하여 외부의 지령과 지원을 받아 수행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의 전복활동 및 침략을 격퇴하여 남베트남 정부를 안정시키는 것”이다. 환언하면 내부위협과 외부침략에 대항할 수 있는 남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군을 육성하여 공산주의의 팽창을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나 1964년도에 들어와서 남베트남 정국이 혼란의 와중에 휩싸이고 북베트남의 군사적 압력도 계속 증가하여 지금까지의 “경제원조 및 군사고문 지원정책으로는 남베트남 정부를 지탱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다고 현 시점에서 남베트남을 포기할 수도 없었다.
따라서 미국은 미국의 확고한 지원의지를 북베트남에 주지시키는 압력을 서서히 증가시키면 북베트남은 세계의 최강국 미국과의 대결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인식을 갖게 되어 협상에 응할 것이라는 점진적 확전압력 전략이 나오게 되었다. 그러한 시점이 언제 올 것인가? 밀고 당기는 의지의 대결이 1964년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 후 실시되었던 남베트남인으로 구성된 특수요원들에 의한 북베트남, 라오스 지역에서의 비밀작전은 그 효과가 미미하였다. 존슨 대통령은 1964년 2월 1일부터 이 비밀작전을 획기적으로 확대하도록 인가하였다.
베트남전에서 그린베레의 주요 임무중 하나는 주민들을 무장, 훈련 시켜 베트남 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과 싸우게 하는 것이었다.
이 비밀작전은 “작전계획 34-A"라고 명명되어 북베트남지역 공중정찰, 특수요원 침투, 북베트남인 납치 및 순화교육, 중요시설 파괴 팀 투입, 철도, 교량 파괴를 위한 남베트남 특수부대 요원의 해상 기습상륙 공격, 해상정찰 활동 및 소형 고속정에 의한 북베트남 연안시설 포격 등 과감한 작전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이 작전에 참가한 병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증가하여 1965년에는 미국인 2,500여 명, 남베트남인 7,000여 명이었다. 미국인은 지원자로 충당하였다.
작전계획 34-A에 참여했던 남베트남 해군장교 트란 도 캄(왼쪽 끝)과 동료들
트란 도 캄(Tran Do Cam)
이 작전의 의도는 미국의 확고한 남베트남 지원결의를 북베트남 지도자에게 인식시켜 남베트남과 라오스에서의 혁명전쟁을 단념시키는데 있었다. 또한 북베트남은 이 작전에 대응하기 위하여 일부 병력을 주요시설 방호에 전환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부수적인 효과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이제 미국과 북베트남의 대결은 서서히 그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하였다.
이 비밀작전에 대한 북베트남의 응징도 단호하였다. 미국인에 대한 공격을 시작한 것이다. 1964년 2월 3일 중부고원지대에 있는 콘툼(Kontum) 시 미 고문단 막사를 폭파하여 건물 1동이 소실되고 미군 1명이 부상하였다. 며칠 후 사이공 시내 바에 폭발물이 터져 미군 5명이 사망하였고 미국인들의 휴양시설 내에 있는 야구장에 폭발물로 인하여 미국인 1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하였다. 극장에서도 미군 헌병, 해병대위 등 2명이 죽고 월남인 부녀자와 어린아이를 포함하여 50여명이 부상하였다.
폭파된 미군 출입 바
북베트남은 집중적인 테러 공격을 일시 중지하였다. 이 같은 북베트남의 미국인 공격에 대해 미국은 미국인이나 미군에 대한 공격은 베트콩들이 하노이의 지시를 받지 않고 독단으로 실시했다가 하노이의 지시로 중지한 것이 아닌가 하고 관측하기도 하였다. 아직 북베트남이 미국과 대결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하노이가 이를 중지시켰다는 것이다. 이미 1963년 연말에 북베트남이 미국과의 대결도 불사한다는 결의를 했다는 것을 미국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아전인수격인 판단이었다. 5월에 들어서자 미국인들에 대한 공격은 재개되었다. 사이공 부두에 2차 세계대전에 취역했던 소형 항공모함 카드(Card) 호를 침수시켜 이를 비행장이나 헬기장으로 운용하려는 작업을 참관하던 중에 베트콩들이 폭발물 테러를 감행하여 미국인 8명과 다수의 남베트남인들이 부상당하였다. 주베트남 미 대사 로지(Lodge)가 그 장소를 떠난 지 몇 분 안 되어 발생한 것이다. 사이공의 탄 손 누트(Tan Son Nhut)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교량에 장치된 폭발물을 맥나마라(McNamara) 미 국방장관이 공항에 도착한 후 그 교량을 통과하기 직전에 제거한 사건도 있었다.
북베트남이 2월 달에 미국인들을 집중적으로 공격한 후에 이를 중단했던 것은 미국이 남베트남에 개입하면 어떤 결과가 있는가를 보여 주고 이에 대한 미국의 반응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비밀작전 34-A가 계속해서 실시되기 때문에 5월부터 공격을 재개한 것이다.
4월에 들어서 미 합참에서는 북베트남의 미국인 공격에 대한 대응으로 존슨 대통령에게 북베트남에 대한 폭격을 최초로 건의하였으나, 존슨 대통령은 북폭은 반대하였고 대신 북베트남의 차후 도발에 대하여 이를 응징하는 3단계 우발계획 OPLAN 37을 승인하였다. 제1단계는 라오스나 캄보디아 영내의 침투로에 대한 공중공격, 제2단계는 적의 공격 시 즉각 응징하는 공중공격, 습격, 기뢰부설, 제3단계는 북베트남에 대한 북폭을 점진적으로 강렬하게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공중작전은 어디까지나 미군의 지원 하에 남베트남군이 수행한다는 조건이었다.
라오스 회랑에 대한 미 항공기의 정찰활동은 1964년 5월에 북베트남이 라오스의 영토를 공격하자 라오스 공군지원 명목으로 공군과 함재기에 의하여 최초로 실시되었고 이는 워싱턴에서 엄격히 통제되어 주당 5회 그리고 적의 공격이 있을 경우에만 응사하도록 하였다. 탐지되는 군사목표에 대한 공격은 1965년 1월에 가서야 인가되었다. 이와 같이 최초에는 위협으로 시위하다가 조금씩 조금씩 확전해가면서 북베트남의 반응을 보려고 협상신호를 보내고 거부하면 또 확전하는 것이 미국이 1968년까지 수행한 점진적 확전압력 전략의 수행 방식인 것이다.
이와 같은 수법은 겁이 많은 어린아이라면 효과적인 방법으로 볼 수도 있다. 세계 최강국인 미국으로서는 북베트남이라는 작은 나라는 어린아이에 불과하다고 여겼을지도 모르나 북베트남은 겁 많은 어린아이는 아닌 것이다. 이미 프랑스를 꺾은 경험이 있었고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고서라도 끝까지 싸워보겠다는 의지가 상대를 겁나게 하는 악한인 것이다.
여기에다 뒤에는 중국과 소련이 버티고 있었다. 힘이 있다고 세게 때리면 금방 중국이 개입할 것 같고 소련이 대량원조를 해줄 것 같았다. 확전 배치를 할 때마다 한국전쟁에서의 중국의 망령이 엄습하였다. 오히려 미국이 겁 많은 덩치 큰 어른인 것이다. 이래도 안 듣고 저래도 안 듣고 악착같이 덤벼들자 제풀에 스스로 물러나 버리고 마는 바보 어른이 되고 마는 것이다.
북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최초 협상 신호는 1964년 6월에 보내졌다. 중재는 제네바 협정 국제 감시위원회 캐나다 대표 시본(Seaborn)을 통하여 북베트남 외무장관 팜 반 동(Pham Van Dong)에게 전달되었다. 미국의 요구 사항은 제네바 협정이 준수되도록 하는 것으로 북베트남의 영토와 독립은 보장할 것이며 대신 남베트남에 대한 전복 기도를 중지하라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이 이를 수락한다면 미국은 북베트남과 교역을 실시하고 원조 용의가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였으나 혁명전쟁의 3단계에 돌입하였다고 판단하는 북베트남으로서는 받아들일 필요가 없었다. 군사적인 압력이 없는 휴전 협상은 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미국이 한국전쟁 이후 다시 인식하게 되는 시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팜 반 동
비밀 작전계획 34-A의 일환으로 미군 함정들은 통킹 만 일대에서 정찰활동(암호명 DESOTO)을 실시하고 있었다. 1964년 7월 31일 북베트남은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북베트남의 2개의 섬에 기습 상륙작전을 감행했다고 비난하였고 미국과 남베트남은 이는 조작이라고 응수하였다.
8월 2일 북베트남은 12마일 영해밖에 있는 미 구축함 매독스(Maddox) 호에 대하여 3척의 어뢰정으로 공격을 시도하였다. 매독스 호는 고속으로 접근하는 어뢰정에 즉각 응사, 1척을 격침시키고 1척에 피해를 입혔다. 나머지 1척이 어뢰 2발을 발사하였으나 미군의 피해는 없었다. 존슨 대통령은 즉각 정찰활동을 강화하도록 지시하고 구축함 터너 조이(Tuner Joy) 호를 추가로 파견하였다. 3일 밤 남베트남 해군의 어뢰정이 연안에 있는 북베트남 레이다 시설을 공격하였다. 8월 4일 5척의 북베트남 어뢰정이 터너 조이 호에 재공격을 시도하였다. 67㎞ 거리에서 이를 발견한 미 해군은 즉각 함재기를 출동시키기고 응사하여 2척을 격침시키고 2척에 피해를 주었다.(이 사건은 미 국방성 기밀문서 Pentagon Papers 에 의하면 매독스 호 레이다 조작병의 미숙으로 잘못 판독했다는 설도 있다.)
1964년 8월 통킹만의 북베트남 어뢰정
미 구축함 매독스 호
미국 구축함 터너 조이 호
8월 5일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 해군 기지에 즉각 보복폭격을 하도록 지시하고, 의회에 통킹만 결의안을 제출하였다. 항공모함 타이콘데로가(Ticonderoga)와 콘스털레이션(Constellation) 호에서 발진한 함재기들이 4개의 북베트남 해군기지와 빈(Vinh) 항의 유류 저장고를 폭격하여 어뢰정 25척을 파괴하고, 빈 항의 유류저장고 90%를 화염에 휩싸이게 만들었다. 북베트남 공군의 응전은 없었고 대공화기에 의해서 미군기 2대가 격추되고 2대가 피해를 입었다.
불타는 북베트남 빈의 어뢰정 기지
중, 소를 의식하는 존슨은 이 공격은 북베트남의 도발을 응징하는 것에 불과하고 더 이상 확전 의사는 없다고 발표하였다. 미국의 보복공격이 있은 직후 미 국민들은 존슨 대통령의 조치를 적극 지지하였고 미 의회는 “북베트남의 무력 공격을 격퇴시키고 그 이상의 침략행위를 하지 못하도록 하는데 필요한 모든 대책을 취할 수 있는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동남아시아 결의안(통킹 만 결의안으로 더 잘 알려졌음)을 상원은 88:2, 하원은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후일, 이때 미국이 북베트남에 선전포고를 했다면 의회가 이를 받아들였을 분위기였고, 미 국민들의 전의를 동원할 수 있었다고 비판이 가해지고 있었으나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선전포고까지는 필요 없다고 보았다.
미국이 통킹 만 사건 당시 선전포고를 안 한 이유는,
1) 미국 같은 최강국이 북베트남 같은 조그만 나라에 선전포고를 하는 것이 우스꽝스러웠고, 과거 한국전쟁에서도 선전포고는 하지 않았다.
2) 미국의 선전포고는 중, 소를 자극하여 군사개입을 자초할 위험성이 있으며 특히 중국의 개입이 우려되었다.
3) 미 의회가 만일 승인해주지 않는다면 베트남에서 미국의 행동은 즉각 중지되어야 한다. 현재의 제한된 개입을 조금만 더 확대하면 북베트남이 곧 협상에 응할 것이다.
4) 공산주의자들의 인민 혁명전쟁에서는 싸울 상대국이 명확하지 못하고 국민들이 납득하는 데 어려움이 있다. 북베트남이 공식적으로 17도선을 넘어 공격하지도 않았고 현재 내전으로 위장되어 있다.
통킹 만에서 북베트남의 공격은 미국의 비밀작전에 대한 그들의 응징이었으며, 몇 달 남지않은 미 대통령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비록 더 많은 피해를 입더라도 적의 도발에는 어떠한 희생을 무릅쓰더라도 꼭 응징을 한다는 북베트남의 악착스러운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1964년 9월 18일 야간에 미 해군 구축함 파슨스(Parsons) 호와 모턴(Morton) 호가 북베트남 어뢰정으로 추정되는 물체가 레이다에 나타나 이를 격침시켰으나 레이다병의 실수로 여겼던지, 아니면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서인지 이번에는 보복공격을 가하지 않았다.
통킹 만 사건 이후 정찰활동을 일시 중지하였다가 다시 재개하자 이런 사건이 있었다. 미국은 정찰활동을 다시 중지하였고 10월 초부터 다시 재개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미지근한 방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북베트남이 자기네들의 응징공격 때문에 미군이 두려움에 작전을 중지하였다고 판단하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었다.
미 해군 항모전단의 활동영역이었던 통킹만의 양키스테이션(붉은 원) 위치... 작전에 따라서 북상하기도 하지만, 대략 저 위치다.
점점 긴박해지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남베트남 정국은 계속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통킹 만 사건의 와중에서 칸(Khan) 장군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대학생과 불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8월 23일 사이공 방송국을 점령하였고, 25일에도 사이공에서 수만 명의 대시위가 있었다. 칸 장군은 양보하여 민정 이양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카톨릭, 극우파 장교들이 이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안정을 요망하는 미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후옹(Huong)을 수상으로 하는 민정이 들어섰으나, 한 달 반 만인 1965년 2월 19일 다시 극우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다음 날 역 쿠데타가 있었다.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이었으며 임시 혁명정부(PRG)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하다가 남베트남 패망 후 보트 피플로 남베트남을 탈출한 트룽 누 탕(Truong Nhu Tang)의 수기 <베트콩 해방전선>과 베트남에 5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이대용 주베트남 한국 대사의 <사이공 억류기>에 의하면, 이와 같은 연속적인 쿠데타에 여러 번 앞장섰던 남베트남 육군대령 팜 곡 타오(Pham Ngoc Tao)가 북베트남첩자였다는 것이었다.
트룽 누 탕
타오 대령은 과거 베트민군의 소좌로 대프랑스 항전에 참전하다가 남베트남으로 전향하여, 아버지가 디엠의 형인 뚝(Thuc) 신부와 친구인 관계로 디엠과 누의 신임을 받다가 1963년 11월 1일 디엠 정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도 참가하였고, 칸이 정권을 장악하자 칸의 공보실장이 되었다. 1965년 2월 19일 타오 대령은 1964년 9월 13일 쿠데타에 실패했던 람 반 팟(Lam Van Phat) 소장을 지도자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2월 20일 역 쿠데타가 일어나 1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도주한 타오 대령은 다시 쿠데타 기도를 모의하다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다. 많은 카톨릭 교도들과 남베트남인들은 유능한 반공장교를 잃었다고 타오의 죽음을 아쉬워했으나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타오는 소련의 거물간첩 조르게와 맞먹는 천재 간첩임이 드러났다.
람 반 팟 소장
팜 곡 타오(군복을 입은 사람)
혼미를 거듭하던 남베트남 정국은 1965년 6울 19일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 공군사령관이 주도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서, 명목상 국가원수격인 국가 지도위원회 의장에 티우 중장을 세우고 키가 수상으로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계속되는 데모와 압력으로 1967년 9월 3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키와 권력투쟁에서 성공한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정권은 안정되었으나 이를 반대하는 데모와 혼란은 끊이지 않았다.)
구엔 반 티우
부하들과 작전을 검토하는 구엔 카오 키
이와 같은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은 미 정책 수립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1964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남베트남 정국에 실망한 미국은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심각하게 논의하였으나, 일단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내릴 장소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일지라도 일단 개입한 이상 손을 떼면 패배라는 의식을 떨칠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 전에나 후에도 존슨은 전쟁에서 최초로 패배하는 대통령이 되기 싫었으며 통킹 만 사건 후 보복폭격 결과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지상군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북폭만으로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또한 미국이 손을 뗀다면 동남아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있고 우방의 신뢰가 상실되기 때문에 철수계획은 보류됨으로써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손을 뗄 마지막 기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1964년 11월 1일 베트콩들은 사이공 북방 비엔 호아(Bien Hoa) 미 공군기지를 공격하여 미군 2명과 남베트남군 4명을 전사시키고 B-57 5대와 기타 다수의 항공기와 헬기를 파손하였다. 베트콩들의 미군기지에 대한 최초의 직접 공격이었다. 적의 도발에 대해서는 즉각 보복폭격을 하다는 우발계획 OPLAN 37이 4월에 승인되어 통킹 만 사건 시에는 즉각 보복을 하였으나 지난 9월에는 보복공격을 하지 않았었고, 이번에도 바로 2일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보복 폭격을 하지 않았다.
비엔 호아 기지와 F-5C 전투기
베트콩들은 11월 3일 탄 손 누트 공항의 스낵바를 폭파하여 미국인 18명이 부상당하였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이공 시내 미군 숙소인 브링크(Brink) 호텔을 폭파하여 미국인 2명이 사망하고 미국인 66명을 포함하여 10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번에도 미국은 보복을 하지 않았다. 차후 노획된 문서에 의하면 밥 호프(Bob Hope,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를 단장으로 하는 위문단 일행이 그날 밤 브링크 호텔에 투숙하기로 되어 있어 이를 노린 폭파였으나 위문단 일행은 탄 손 누트 공항 사정에 의해 도착이 지연되었다.
폭파된 브링크 호텔
밥 호프
밥 호프의 위문공연
1964년 말부터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베트남에 투입되고 있다는 정보가 확인되기 시작하여 미국과 남베트남 당국을 긴장시켰다. 처음에는 개인, 소부대로부터 나중에는 연대까지 확인되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지도층이나 국민들도 아시아 지역에서 미 지상군의 개입은 하고 싶지 않은데도 상황이 점점 긴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베트남은 정말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다. 미국의 딜레마는 1950년대부터 계속되었다. 디엠 대통령이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디엠 대통령을 지원하여 승리할 수도 없었고, 그나마 디엠 대통령이 없으면 정치적 안정은 깨지므로 디엠 대통령이 없어서는 승리할 수도 없었다.
디엠 대통령 이후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 1964년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전면지원 없이는 남베트남은 지탱할 수 없게 되고, 미국의 지금까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시도는 성공적이므로 이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게 되었고 미국이 지원해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남베트남의 정국이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빠지고 1964년 8월 2일에는 통킹만 사건이 일어나 미국의 보복폭격도 받았다. 북베트남도 전쟁수행에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할 시점에 온 것이다.
1964년 8월 2일에 미국에 의해서 촬영된 통킹 만 사건
1964년 8월 북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 회의가 호치민 주재로 열렸다. 현 정세가 혁명전재의 전개과정에서 볼 때 2단계 게릴라전 단계에서 제3단계인 군사적 총 공세 단계로 전환할 수 있는 시점인가 아닌가에 논쟁의 초점이 있었다. 찬, 반이 엇갈렸다. 또한 미 지상군이 개입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이것이 또한 문제였다. 이것도 찬, 반이 엇갈렸다.
모든 것은 호치민의 결심에 달려있다. 마지막으로 지압에게 확인하였다.
“우리 군이 이 과업을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하는가?”
“예”
디엔 비엔 푸의 영웅 지압이 자신 있게 대답하였다.
“그렇다면 남부의 해방전쟁에 우리 정규군을 투입하기로 결정한다.”
호치민과 보 구엔 지압
이제 베트남 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내란이라고 위장할 필요가 없어졌다. 게릴라전 단계를 벗어나 정규군을 투입하여 군사력 균형을 결정적으로 전환시켜 혁명전쟁의 마지막 단계인 군사적 총 공세 단계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1965년도에 현재 비틀거리는 남베트남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하여 붕괴시키겠다는 것이다. 전쟁에 영향을 미치는 제반여건에 대하여 호치민은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1) 북베트남 내부정세 및 중, 소의 지원
현재 북베트남은 자신의 강력한 통치 아래 일치단결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남부 해방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전의에 불타고 있고 특히 미국을 상대로 하는 인민 혁명전쟁에서 어떤 방안을 취하여도 중국, 소련을 포함하는 다른 공산국가의 지원은 변함이 없을 것이다.
2) 베트콩
남부출신자들이 베트콩 활동을 리드할 때는 여러 가지 이점이 많아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이제 북부 출신자들이 주도권을 잡게 되자 어딘가 모르게 침체되는 면이 있다. 남부 인민의 군대라는 그들의 대의명분이 사라지고 암살, 납치, 테러, 세금징수 등의 활동이 이제 벽에 부딪히고 있다. 따라서 남베트남 정부군이 결정적으로 취약한 시기에도 이들은 승기를 포착하지 못할 수도 있다. 이 같은 여건 하에서는 베트콩들의 게릴라전으로는 미흡하고 북베트남의 요원이 전쟁을 주도해야 하는 것이 명확한 현 시점에서는 정규군을 투입해서 결정적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3) 미국의 대응 배치와 우방국가의 지원
미국의 대베트남 군사 및 경제원조는 점점 확대되고 있으며, 특히 통킹만 사건시에 단호한 미국의 보복조치는 지금까지 유약하고 미지근한 미국의 대베트남 정책과 다른 면을 보여 주었고, 미 의회는 전권을 존슨(Johnson) 대통령에게 부여하였다.
또한 설상가상으로 미국과 남베트남의 지원 호소로 한국, 태국, 오스트레일리아 등 여러 국가가 남베트남을 지원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미국과 다른 우방 국가들이 남베트남을 지원한다면 이제 다 된 죽을 먹기 일보 전에 못 먹는 격이 된다. 따라서 지원이 확대되기 이전에 강력한 조치를 하여야 할 시점에 와 있다는 것이다.
4) 남베트남 정부와 군대
계속되는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은 말단 행정조직과 전투부대까지 영향을 미쳐 현 시점에서는 취약점이 노출되고 있으나 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안정되어 갈 것이다. 남베트남군도 탈영병이 많으나 장교들의 탈영은 거의 없다. 미국의 지원과 계속되는 훈련, 전투경험으로 남베트남군의 전력도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증대되어 가기 때문에 결단을 빨리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5) 남베트남 국민
전에는 물고기가 활동하도록 좋은 여건을 제공해주던 물이 점점 메말라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베트콩들의 투쟁방식이 점점 명분을 잃어가고 공포의 대상이 되어, 베트콩 통제지역에서 벗어나 정부 통제지역으로 피난가는 숫자가 증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주민들이 베트콩들에 대한 정보도 정확하게 제공하기 시작하여 작전활동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었다. 이는 대중의 지지가 떨어지고 있는 증거로서 결단을 서둘러야 할 시점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제반 요인이 호치민의 결단을 촉구하였고 보 구엔 지압도 지난날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의 결정적 승리가 프랑스의 전의를 붕괴시켰듯이 북베트남 정규군을 투입하여 수도를 점령하거나 남베트남을 중부 고원지대로부터 양분하여 버리면 남베트남 전역에 패배주의가 만연하여 미국도 경악하여 손 쓸 사이도 없이 남베트남은 공황에 휩싸여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가장 큰 난점은 북베트남의 이와 같은 시도에 대하여 미국이 지상군을 투입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지금까지의 미국의 태도, 미 국내 여론, 프랑스의 패배 등을 고려할 때 미 지상군은 개입하지 않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더욱이 최근 존슨 대통령이 “북폭(北爆)은 고려하지 않으며 아시아 지역에서 미 지상군을 개입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공언한 바 있었다. 1950년 1월 미국의 애치슨(Acheson) 선언과 비슷한 효과를 유발한 것이다.
1950년 미국 국무장관 딘 G. 애치슨
북베트남이 1965년도에 결정적 승리가 가능하다는 근거는 다음과 같은 4가지 가정에 입각한 것이었다.
1) 미국은 아시아에서의 지상전에는 개입하지 않을 것이다.
2) 남베트남 정부군은 대 게릴라전에 대비하여 신장배치 되어 있어 북베트남 정규군에 대응할 능력이 없을 것이다.
3) 디엔 비엔 푸에서의 승리와 같이 북베트남 정규군의 결정적 승리는 전 남베트남의 저항을 붕괴시킬 수 있을 것이다.
4) 미국은 중국의 개입을 우려하여 공군의 지원도 17도선 이남으로 제한할 것이다.
이 가정이 옳았든 틀렸든 북베트남은 주사위를 이미 던졌다. 중국과 소련의 지원도 든든한 것이었다.
한국전쟁에서 미국은 UN의 기치 아래 자유세계의 일원으로서 참전하는 대의명분이 있었으나 남베트남에서는 미국 혼자서만 모든 짐을 떠맡고 있었다. 더구나 북베트남은 미 제국주의의 침략에 항전하는 정의의 전쟁이라고 선전하고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북베트남의 비난에 대응하고 미국만이 아니라 자유 민주주의 국가가 공동으로 수행하는 정의의 전쟁이라는 명분을 위하여 1961년부터 베트남전에 우방 국가를 참전시켜야 한다는 구상을 하고 있었으나 아직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유보하고 있었다. 1964년 5월 9일 미국은 한국을 포함한 25개 우방 국가에게 비 전투부대를 파견하여 남베트남을 지원하여 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는 군사적인 측면보다 정치적인 측면을 고려한 것이었다.
미국의 요청을 받은 한국은 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견할 것을 결정하고 준비를 하던 중 7월 15일 당시 남베트남 혁명위원회 의장 겸 수상 칸(Khan) 장군 명의의 지원요청 서한을 접수하였다. 9월 22일 제1이동외과 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이 붕 타우(Vung Tau)에 도착하였다. 1964년 12월에 주한 미 대사의 요청과 1965년 1월 2일 남베트남 외무장관의 추가 파견 요청 서한을 접수하고, 공병대대, 경비대대로 구성되는 건설공병단(비둘기 부대)이 1965년 3월 16일부터 남베트남에 파견되었다.
베트남전 참전 한국군 부대의 마크들
비둘기 부대 정문
1964년도에 한국군 외에 오스트레일리아 200명, 뉴질랜드 39명, 대만 20명, 필리핀 17명 등의 군사원조단도 남베트남에 파견되었다.
1962년 베트남에 파병되는 오스트레일리아군
뉴질랜드 M60 기관총 사수
탄손누트 공항에 도착하는 오스트레일리아군
미국도 베트남전쟁에 본격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웨스트모얼랜드(Westmoreland) 장군을 1964년 1월에 MACV 부사령관으로 임명하여 상황을 파악하게 한 후 6월에 MACV 사령관으로 취임토록 하였고 베트남전쟁을 총 지휘할 주베트남 미 대사에 테일러 장군을 임명하였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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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항상 좋은 자료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킹 만 사건은 언제봐도 역사상 가장 크고 더러운 거짓말입니다.
이라크가 대량살상무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 버금가는 개소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