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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도 파주출신 독립운동가
◈파주출신『이달의 독립운동가』선정◈
광복회 파주시지회
첨부:2015년도 파주출신이달의 독립운동가선정 1부.끝.
2015년도 파주출신 1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음 성 국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2000년), [1889 ~ 1935] -
장단(長湍) 사람이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뜻을 두고 있던 그는 1920년 유돈상(柳敦相) 등과 함께 중국 즙안현에서 독립단을 조직하고 서기로서 이도세자 일대에서 활동하던 중 일경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1926년에는 나라를 위하는 인재양성이 급하다고 여겨 유돈상, 음성진 등과 학교를 설립하여 항일 민족 교육을 실시했다. 그는 만주국 능가선민회장으로 겉으로는 일제의 정책에 호응하는 척하면서 암암리에 조선혁명군의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활동이 일본 밀정에 의해 발각, 체포되어 가혹한 고문을 당한 후 일본 영사관을 경유 무순감옥에 수감되었고 이곳에서 피살,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기 하 선생
-대통령 표창 (1992년), [1898 ~ 1931] -
광탄(廣灘)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광탄면 발랑리에서 조무쇠, 이인옥, 등과 함께 마을주민 수백 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시위, 다음날에도 조리면 봉일천리 장터까지 시위 행진하며, 장터에 모인 군중들과 합세하여 대규모의 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해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 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당하여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2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남 기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2000년), [1898 ~ 1919] -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파주군에서 독립 만세 시위에 참여했다가 순국했다. 하며 독립 만세를 고창했다. 3월26일에는 교하리에서 군중들과 와석면사무소로 시위행진 하였고, 3월27일 청석면 심악산에서 집결한 수백 명의 군중이 보통학교 학생들을 앞장세워 면사무소로 시위행진을 하며 독립 만세를 고창했다. 3월27일 수백 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독립 만세 시위운동 전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조리면 봉일천리 까지 행진 등 의 시위운동이 이루어졌다. 이남기는 이와 같은 파주군의 만세 시위 운동에 참여했다가 일경의 ‘쇠갈쿠리’에 중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였으나 이튿날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문 섭 선생
-[1874 ~ 1939] -
법원(法院) 사람이다. 3.1운동이 서울을 시발로 지방에 파급되자 파주에서도 대대적인 만세 운동이 계획되었다. 책임자의 인솔 하에 주민들이 동원되니 2000여명에 이르는 대군중이었다. 면사무소를 출발하여 장터를 행진하자 이에 가담하는 자가 많아 시위군중은 5000여명으로 늘어났다. 시위대는 선두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조리면 봉일천리로 행진하여 주재소를 포위하고 함께 동참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자 군경이 무차별하게 발포하였고, 이문섭은 이때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묘는 법원읍 대능리에 있다.
2015년도 파주출신 3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병 의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2009년), [1896 ~ 1932] -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11월10일 서울 고형진의 집에서 동지들과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결의단을 조직했다. 부서를 분담하여 단장 이기하, 비서장 방창근, 경찰부장 김형준을 선임하고 이병의는 인쇄부장을 맡아 활동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었으나 증거불충분으로 무죄 석방되었다. 1920년 6월경 동지들과 함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을취하며 독립 운동 자금 모집활동을 했다. 서울청년회에 가입하는 등 조선의 독립과 신 사회 건설을 목적으로 한 사회주의 운동에 투신하며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하듯 여러 활동을 하다가 1928년 4월 신의주경찰서에 검거되어 평양형무소에 수감되어 옥고를 치르던 중 1932년 4월 15일 옥중 순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9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봉 철 선생
- [미상] -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였으며 농업에 종사했다. 이봉철은 3월 29일 밤 11시경 마을주민 100여 명과 같이 독립 만세를 불렀다. 그리고 시위대 선도, 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면장 송원섭을 위협, 독립 만세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체포되어 1919년 5월 17일 보안법 위반으로 경성지방법원 개성지청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공소하여, 1919년 7월 17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언도받고 고등법원에 상고하였으나 9월 25일 기각 당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4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3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성 구 선생
- [미상] -
장단(長湍) 사람이다. 3.1운동 때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도한 애국지사이다. 1919년 3월 26일 진서면 성화학교에 모인 군중 100여명의 선봉에 서서 독립 만세를 부르며 면사무소를 때려 부수는 등 거사를 했다.
◆파주출신 4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영 진 선생
- [1867 ~ 1937] -
법원(法院) 사람이다. 3.1운동 당시 신산리의 심상각의 주도하에 백익수, 이학로 등과 함께 각 면의 대표로 19인의 결사를 조직하여 그 본부를 광탄면 발랑리에 두고 군민의 동원 시기, 운동의 시행방법을 결정하여 각 면에 전달했다. 공릉시장의 장날인 3월 27, 28, 29일을 거사 일로 결정하고 파주군민은 물론 고양군민의 일부까지 동원하여 참가했다. 시위대가 봉일천주재소를 에워싸자 당황한 일본 경찰의 무차별 사격으로 10명의 사상자와 70여명의 부상자를 내고 시위운동은 일단락되었다. 이 사건으로 일경에 체포되어 1년간 옥고를 치렀고, 이로 얻은 신병으로 고생하다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78년 3월 1일에 건립된 ‘파주 3.1운동 기념문’에 파주의 3.1운동을 주도한 19인 중 한사람으로 기록되어있다.
2015년도 파주출신 5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용 현 선생
- [1887 ~ 미상] -
조리(條里) 사람이다. 1908년 당시 22세였던 그는 유충열의 의병 부대에 들어가 마전군, 파주군 등지에서 활동했다. 그 후, 유충렬과 같이 한창열부대와 합동, 동년 음력 2월 하순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후, 체포되어 1908년 9월 22일 경성공소원에서 내란죄로 징역 10년을 언도받고 대심원에 상고하였으나, 원심이 파기되어 다시 경성공소원에서 재판을 받았는데, 오히려 형이 가증되어 징역 15년을 언도받았다. 재차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었다.
◆파주출신 5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윤 성 선생
- [1868 ~ 미상] -
장단(長湍) 사람이다. 1919년 3월 30일 장단군 장도면 중리 신촌동 뒤의 동산에서 마을 주민 10여 명과 함께 봉화를 올리고 독립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했다. 그리고 3월 31일에는 장도면 고읍리의 장도면사무소 부근에서 200여 명의 군중을 이끌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후 체포된 이윤성은 1919년 6월 7일 경 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6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6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인 옥 선생
-대통령 표창 (1995년), [1891 ~ 1948] -
광탄(廣灘) 사람이다. 1919년 3월27일에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 때 이인복은 조무쇠,남동민,정천화,정갑석,이기하 등 7명과 함께 발랑리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광탄면사무소로 행진하여 그 앞에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했다. 다음날 28일에도 계속해서 1000여명의 군중과 같은 장소에 모여 조리면의 봉일천시장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계속했다. 그런데 일경의 무자비한 발포에 따라 시위군중 가운데 4~5인의 사상자를 내었고, 이때 그는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6월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위반으로 징역 8월을 선고받아 공소하였으나 7월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 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6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재 삼 선생
- [미상] -
장단(長湍) 사람이다. 3.1운동 때 대남면 시위를 지도한 인물이다. 시위 첫날 100여 명을 동원하였지만 4월 3일에는 1000명에 달하는 대군중을 이끌고 함정원과 함께 시위대열의 선두에 섰다.
2015년도 파주출신 7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정 선생
-건국포장 (2008년), [1874 ~ 1959] -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자 국내의 독립 운동 열기가 고조되어갔다. 이에 전협,최익환 등이 전민족의 대동단결을 표방하며 김가진을 총재로 추대하고 비밀결사 조직 조선민족대동단을 조직했다. 이정은 1919년 10월경,전협으로부터 조선민족대동단의 설립목적과 취지를 듣고 유림단의 대표자로 가입했다. 이정은 거사 당일 배재학당에서부터 서대문정을 통과하여 종로2정목 보신각 앞까지 시위에 참가하려다가 일경에 의해 체포되었다. 1920년 12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제 7호 정치범죄 처벌령,출판법,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미결구류 200일 통산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7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진 구 선생
-대통령 표창 (1963년), [1888 ~ 미상] -
장단(長湍) 사람이다. 일찍이 기독교인으로 항일 민족의식을 갖고 있던 중 민족 대표 33인 중의 한사람인 원산 남촌동의 남감리교회 목사 정춘수의 지도 아래 서울에서 발송해온 독립 선언서 300여 매를 전달받고, 1919년 3월 1일 원산의 장날을 이용하여 만세 시위운동을 조직적으로 계획했다. 여기에서 다시 가세한 800여명의 시위군중과 함께 일본인 집단 거류지를 지나 원산경찰서를 향해 행진하며 크게 기세를 올렸다. 이때, 시위군중이 이에 굴하지 않고 계속 만세 시위를 전개하자 오후 1시경 공포를 쏘면서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때 체포되어 이 해 5월 26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63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8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주 택 선생
-대통령 표창 (2005년), [1883 ~ 미상] -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31일 파주군 적성면 장성리 파평산에서 전개된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장파리에 거주하는 한은동은 3월 29일 밤 구장인 유병성의 집에서 구장 동생인 유병익과 우춘삼 외 수명에게 우리 마을에서도 만세 운동을 벌이자고 제안하여 일동의 찬동을 얻었다. 이들이 거사한 3월 31일 파평산에서의 독립 만세 운동에서 이주택은 주민들 앞에서 만세를 선창하며 만세 시위를 주도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5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8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중 혁 선생
-대통령 표창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1862 ~ 1943] -
파주(坡州) 사람이다. 일제 치하에서 독립 운동을 하였으며 직업은 변호사이다. 1920년 7월 경성에서 노농회를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 1921년 3월에 임시정부 독립 운동 자금 1만 2200원 모금에 참여하여, 독립 운동 공제를 어대선 으로부터 인수받아 경성의 윤철에게 넘겨주는 역할을 수행했다. 그 후 계속 군자금 모금 활동을 하다가 1921년 4월21일 일경에 체포되어 1921년 12월 19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징역1년, 집행 유예 2년형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9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차 녕 선생
-건국훈장 애족장 (1977년), [1923 ~ 미상] -
파주(坡州) 사람이다. 부양에서 광복군 제3지대에 입대한 후, 북경지구로 파견되어 공작활동을 전개하던 중, 광복을 맞이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77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9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이 택 신 선생
-건국포장 (2008년), [1872 ~ 미상] -
장단(長湍) 사람이다. 1919년 3월28일과 29일 유석회 등과 동민 30여 명을 이끌고 장단군 장도면 중리 태학산에 올라가 모닥불을 태우고, ‘조선 독립 만세’를 외치면서 시위를 전개했다. 시위 후 체포된 이백신은 1919년 6월 7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소요 및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언도받았고, 동년 7월 24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공소기각, 동년 10월 2일 고등법원에서 상고 기각되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08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10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임 명 애 선생
-대통령 표창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1886 ~ 1938] -
파주(坡州) 사람이다. 1919년 3월 10일과 26일 김수덕, 김선명, 염규호 등과 와석면 일대의 독립 만세 시위를 주동했다. 그는 구세군으로 3월 10일 교하리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에서 이 학교 학생 100여 명을 동원하여 독립 만세 시위를 전개하고, 3월 25일 김수덕, 김선명 등과 함께 염규호의 집에서 염규호가 초고한 격문 60여 매를 인쇄했다. 3월 26일 700여 명의 시위 군중들을 선두에서 지휘하며 면사무소에서 주재소로 행진하던 중, 체포되어 이해 9월 29일 보안법, 출판법 위반 혐의로 1년 6개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82년에 대통령 표창,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10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임 재 풍 선생
- [미상] -
파주 출신 독립운동가. 만주지역에서 펼쳐졌던 독립 운동 기록에 나타나는 인물이다. 임재풍은 중국 집안현의 한인 동포 시위를 주도한 인물로 1919년 3월 17일 치화보 납석차에서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 60여 명이 독립 만세를 부르며 민단의 지부를 철폐할 것을 요구했다. 3월 21일에는 두 곳에서 만세 시위 운동이 일어났는데 양자교자와 비채원자가 그곳이다. 양자교자에서는 이 지역에 거주하는 기독교인 이영철, 임임풍 등의 주도 아래 170여명이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시위했다. 비채원자 에서는 이곳에 거주하는 부민단원인 임재풍 등 의 주도로 한인 동포 100여 명이 시위운동을 단행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11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전 순 만 선생
-건국훈장 애족장 (1990년), [1876 ~ 1932] -
장단(長湍) 사람이다. 1907~1908년경 경기도 양주, 적성 등지에서 일군 헌병소를 습격하고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의병 활동을 벌이다가 피체되었다. 1908년 10월 8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내란죄로 유형 5년을 언도받았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1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정 갑 석 선생
-대통령 표창 (1992년), [1894 ~ 1949] -
광탄(廣灘)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파주군 광탄면 발랑리에서 조무쇠, 이인옥, 남동민, 안명환, 이기하 등 과 함께 마을 주민 수백 명을 규합하여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에는 1000여 명의 시위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조리면 봉일천리 장터까지 시위 행진하여 장터에 모인 군중과 합세, 대규모의 시위를 하다가 일경에 피체되었다. 이 해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되어 8개월 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2년에 대통령 표창을 추서했다.
2015년도 파주출신 12월의 독립운동가
◆파주출신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정 두 환 선생
-건국훈장 애국장 (1990년), [1880 ~ 1943] -
파주(坡州) 사람이다. 1907년 1월 종질인 정용대 의진에 들어가 파주, 양주 등지에서 동지를 규합하여 각 의병진과의 연락 임무를 담당했다. 이어 같은 해 11월에는, 13도 창의군에 합세하여 활동하였으며 연기우 의진과 연합하여 일군과 교전했다고 한다. 1910년 7월경에는 정영대 의병진에 속하여 동료 의병 5명과함께 양주, 적성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고, 9월에는 홍원유의 부하가 되어 동료8명과 함께 자금 모금 활동을 벌이다 피체되고 말았다. 1910년 9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에서 강도죄로 징역 5년 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파주출신 12월 이달의 독립운동가 정 봉 화 선생
-건국포장 (1999년), [1891 ~ 1944] -
광탄(廣灘) 사람이다. 1919년 3월 27일 광탄면사무소 앞에서 전개된 독립 만세 운동에 참가했다. 이곳의 독립 만세 운동은 3월 10일 와석면 교하리 에서비롯되어 각 처로 뻗어갔는데 광탄면에서는 3월 27일과 28일에 걸쳐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정봉화는 발랑리 주민 수백 명을 이끌고 광탄면사무소로 행진하여 독립 만세를 고창했다. 다음날 28일에도 계속해서 봉일천시장 까지 대한 독립 만세를 고창하면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그런데 일경의 무자비한 발포에 의해 시위군중 가운데 4~5인의 사상자가 생겼으며 주도자들은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그 해 6월 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8월을 언도받고 공소하였으나 7월 19일 경성복심법원에서 기각,형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1999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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