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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중가요사에서 ‘7080 문화’를 이해하려면 아무래도 1960년대를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비틀스라는 전대미문의 스타가 등장하면서 대중음악을 찬란하게 꽃피운 게 60년대이고, 이 땅에 대중음악의 무대였던 음악감상실이 문을 연 것 또한 60년대이기 때문이다.
‘초원다방’을 기억하는가?
이 땅의 음악감상실은 1950년대 말에 충무로에 문을 연 ‘쎄시봉’이 시발이었다. 음악다방 형태로 출발한 쎄시봉의 초대 마담은 기독교방송의 성우였던 천선녀였다. 이어 명동에 ‘돌체’, ‘무아’,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5층에 ‘동화음악궁전’, 충무로에 ‘카네기’, 인사동에 ‘르네상스’ 등이 속속 문을 열었다.
1960년대의 광화문과 그 일대는 가히 문화 1번지였다. 지금도 크게 변한 게 없지만 태평로를 사이에 두고 광화문 사거리에 동아일보사가 있었고, 건너편 시청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다 보면 조선일보사(지금의 코리아나호텔)가 있었다.
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은 일제시대 부민관으로 명성을 날렸으며 한때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 건너편에 서울신문사가 있었고, 바로 옆 동양다방 건물에 라디오서울(RSB)이 있었으며, 시청 앞 서소문로 입구에 대한일보사가 있었다. 종로 수송동에는 한국일보사가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지은 목조건물 3층이었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새로 지은 게 지금의 건물이다. 그런가 하면 종로2가 고려당 제과점 옆에는 기독교방송(CBS)이 있었다. 이처럼 광화문 일대에는 방송사와 신문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무교동과 종로2가는 장안에서 가장 번잡한 곳이었다. 이미 1950년대 기독교방송 건물 지하에 있던 ‘영보다방’은 명동의 ‘은하수다방’과 함께 우리나라 음악다방의 본산지로 꼽히는 곳이다. 그후 음악다방의 틀을 갖춘 곳이 조선일보사 옆 2층짜리 공연윤리위원회 건물 건너편에 문을 연 ‘초원다방’이었다. 이곳은 기자나 문인들이 문지방 닳듯 드나들었다. 특히 초원다방에서는 최초로 희망곡을 적어내는 리퀘스트 용지가 등장하여 음악을 틀어 주었다. 동아방송(DBS)의 디스크자키(DJ) 최동욱이 낮에 한두 시간 나와 당시 유행하던 팝 음악을 소개해 주었는데, 초원다방이 명소가 되자 전국에 다방마다 초원다방이란 상호가 쏟아져 나왔다.
지금의 무교동 SK 건물 자리에는 스타다스트호텔과 충무로에서 이전한 그 유명한 ‘쎄시봉’이 있었다. 쎄시봉 골목에서 뒤쪽으로 나와 광교 방향으로 좌회전하면 ‘약속’레스토랑이 있었는데, ‘약속’이란 상호는 ‘뚜아 에 무아’의 이필원이 자신의 노래 제목에서 딴 것이었다. 약속레스토랑에서는 통기타 가수들의 무대가 펼쳐졌으며 이때 진행자(MC)로 활동한 무명의 전유성은 유난히 큰 키에 남 말하듯 툭 던지는 한 마디가 전매특허였다. 여기서 광교 사거리 쪽으로 가다가 우회전 하면 ‘쉘부르’가 있었다. 쉘부르의 상호는 프랑스 영화 <쉘부르의 우산>에서 따온 것으로 원래 주인이 미국에 이민을 가면서 MBC DJ 이종환이 인수하여 운영하다가 1970년대에 명동으로 이전했다.
그런가 하면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쎄시봉 길 건너 청진동 쪽에 ‘르네상스’가 있었고, 그 옆 건물에 화신백화점에서 이전한 ‘필하모니’가 있었으며, 종로2가 사거리에서 광교 쪽 조흥은행 본점 못 미쳐 ‘아폴로’와 ‘메트로’가 나란히 있었다. 당시 음악감상실의 구조는 대동소이했으나 클래식 음악만을 틀어 주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격조가 있었다. 그래서 음악감상실은 남녀가 데이트하기 안성맞춤인 장소였다.
르네상스가 있던 구미타자학원 건물에서 서울FM이 방송을 했다. 서울FM은 우리나라 최초의 FM 방송이었지만 1년도 채 안 돼 라디오서울(RSB)로 바뀌었고, 그후 TBC-FM으로 변신했다. 르네상스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가다보면 MBC DJ 박원웅이 운영하던 ‘무아다방’이 있었는데, 실내 벽면에 외국 가수들의 사인이 들어간 레코드 재킷을 전시해 눈길을 끌었다.
당시 음악감상실은 대학생 이상만 입장을 시켰다. 건장한 체구의 기도가 입구에서 나이가 어려 보이는 사람은 신분증을 확인하거나 빡빡머리를 감추려고 모자를 눌러쓴 고교생들의 모자까지 벗겨보기 일쑤였다. 음악감상실은 극장처럼 입구에서 30원짜리 입장권(1965년 통계청 자료에 의하면, 당시 자장면 한 그릇이 65원, 커피 한 잔이 35원, 곰탕 한 그릇이 60원, 목욕료가 30원, 이발료가 110원, 쇠고기 600g 한 근이 150원, 쌀 한 가마가 4만 원이었다)을 끊으면 음료권과 음악을 신청하는 리퀘스트권이 함께 나왔다. 입장권을 내고 홀 안에 들어가 음악 감상을 했고, 희망곡을 적어 DJ 룸에 들이밀면 DJ가 선별해 음악을 틀어 줬다. 음료권은 여종업원들이 커피나 홍차로 바꾸어 주었는데 숭늉을 태운 듯한 아주 쓴 국산 커피(당시는 외국산 커피를 수입할 수 없었기에 일부 다방들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밀수 커피를 몰래 줬다)가 나왔다. 개중에는 강의를 빼먹고 오전부터 곧장 등교(?)한 일부 대학생들이 한쪽 구석에서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고 하루종일 죽치며 음악 감상을 하다가 영업마감 시간인 밤 10시에 돌아가는 열성파도 있었다.
2층의 무대에서 노래하고 있는 여성. 사람들이 빼곡히 들어찬 쎄시봉 내부를 볼 수 있다.
한국 포크의 발상지, 무교동 ‘쎄시봉’
오늘날 우리가 ‘포크의 발상지’를 거론할 때 자주 등장하는 곳이 ‘쎄시봉’이다. 쎄시봉(C'est Si Bon)은 ‘그것은 멋지다’라는 뜻의 곡명을 가진 프랑스 샹송으로 샹송 가수 샤를르 트레네가 처음 불렀고 재즈 뮤지션 루이 암스트롱이 미국으로 가져가 다시 불러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이 노래는 우리나라에서도 1950년대에 크게 유행했다.
쎄시봉에 이어 종로2가 YMCA 뒷골목에 ‘디쉐네’, 명동 미도파백화점 옆 시대백화점(이후 미우만백화점으로 바뀌었다가 미도파백화점으로 흡수됨) 자리에 ‘라 스칼라’, 종로 화신백화점 3층에 ‘메트로’, 충무로의 ‘카네기’, 종로2가 태극당 뒤 ‘뉴월드’, 조선일보사 옆 아카데미극장 건물에 ‘아카데미’, 명동극장 옆 골목에 ‘시보네’가 등장했고, 클래식 음악감상실로 청진동에 ‘르네상스’, 광교의 ‘아폴로’, 을지로의 ‘필하모니’ 등이 문을 열어 1966년까지 전성기를 이뤘다.
1960년대 음악감상실은 많은 대중문화인을 배출했다. 당시에는 방송사 아나운서나 DJ들이 음성적으로 음악감상실 DJ로 활동했는데, 그 인기가 대단히 높아 ‘디쉐네’의 DJ 최동욱의 인기는 영화배우 신성일이 부럽지 않았다.
종로가 젊은이의 거리로 부상하면서 ‘쎄시봉’이 충무로에서 종로2가 YMCA 뒤로 이전했다. 그리고 1963년 주인이 바뀌면서 무교동 스타다스트호텔 옆으로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때 주인은 60세가량의 마음좋게 생긴 ‘이씨 아저씨’란 분이었는데, 단골 중에 더러는 주인 아들한테 부탁해서 공짜로 입장했다가 들켜 혼쭐이 나기도 했다. 그 주인 아들이 나중에 KBS에서 음악 프로듀서(PD)가 된 이선권이다. 쎄시봉 DJ로는 나중에 TBC-TV의 <쇼쇼쇼> PD를 맡았던 조용호와 동아방송 아나운서를 지내고 KBS라디오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PD였던 박광희가 있었다.
음악감상실 간에 경쟁이 치열해지자 누가 DJ로 출연하며 어디가 최신 유행곡을 얼마만큼 빨리 확보하느냐가 관건이었다. 그런데 쎄시봉이 다른 음악감상실을 따라갈 수 없게 되자 자구책으로 마련한 대안이 라이브 무대였다. 쎄시봉의 라이브 무대 변신에는 이백천과 정홍택의 역할이 컸다.
이백천은 당시 TBC라디오 PD로 대학가의 숨은 인재를 발굴하자는 취지에서 ‘대학생의 밤’이란 프로그램을 기획하여 쎄시봉에 올렸다. 처음에는 이렇다 할 인물을 찾지 못하다가 차츰 입소문이 나 ‘대학생의 밤’이 열리는 날이면 홀 안에 젊은이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여기서 배출된 가수가 조영남과 송창식, 윤형주의 트윈 폴리오, 이장희, 그리고 최영희다. 특히 최영희는 이곳에서 발탁되어 음반도 내고 기독교방송의 <세븐틴>이란 프로그램 DJ도 할 만큼 유명인이 됐다. 그녀는 반반한 외모로 영화에까지 출연하며 단숨에 신데렐라가 됐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결혼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한편, 쎄시봉에서는 『주간한국』과 제휴해 매주 ‘신곡합평회’와 ‘성점감상실’도 열었다. 당시 『주간한국』 기자 정홍택의 아이디어로 매주 가요신보가 나오면 그 가수를 쎄시봉 무대에 세워 당일 관객 중 희망자를 뽑아 현장에서 직접 인기투표로 가수의 점수를 매겼는데, 별 5개는 최우수, 4개는 우수, 3개는 보통, 2개는 보통 이하, 1개는 낙제점을 주는 방식이었다.
이밖에도 쎄시봉 라이브 무대에는 애드 훠, 키 보이스 등 미8군 무대 출신은 물론이고, 대학가에 숨은 재간둥이를 소개하는 ‘신인가수 만세’를 통해 트윈 폴리오, 이장희 등 훗날 통기타 문화를 주도할 가수들을 배출했다. 쎄시봉은 우리나라에서 라이브 공연이 대중문화의 중심으로 자리 잡는 데 크게 기여한 공간이었다.
'쎄시봉'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대학생들이 좋아할 만한 성격의 프로그램을 고루 갖추고젊은이 문화를 선도해 나갔기 때문이다. 사진은 주간한국에서 실시했던 '성점감상실' 시간에 김상희가 길옥윤의 반주로 노래하고 있는 장면이다.
최신 음향시설 종로 ‘뉴월드’ 뮤직홀
1960년대 종로2, 3가에는 YMCA학원, EMI학원, 파고다학원 등 유명 학원이 많아 대학생이나 재수생들로 붐볐다. 그러다 보니 종로 일대는 음악감상실이 많이 포진해 있었다. 종로2가 뮤직홀(음악감상실을 지칭하는 다른 용어) ‘디쉐네’는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음악감상실로 기록될 텐데, 줄잡아 300평 정도로 웬만한 극장보다 컸다. 그 시절 뮤직홀은 앞쪽에 무대가 자리하고 무대를 향해 1인용 소파가 놓여 있어 마치 극장 분위기와 흡사해 극장식 음악감상실로 불렸으며, 뒤쪽에 안이 훤히 보이는 유리벽으로 만든 DJ 부스가 있었다. 이곳의 스타는 지금도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DJ 이종환이다. 그의 인기는 최고였으며, 그 명성으로 MBC에 특채됐다. 그리고 이곳 출신의 DJ 지명길은 나중에 작사가로 이름을 날린다.
그즈음 디쉐네에서는 주말이면 트위스트 파티를 열어 장안에서 춤 꽤나 춘다는 춤꾼들이 모여 춤 솜씨를 뽐내곤 했는데 우승자에게 금반지 1돈을 줬다. 그리고 디쉐네에서 처음으로 미8군 쇼 가수들의 무대를 마련하면서 다른 음악감상실도 앞다퉈 라이브 무대를 열었다. 디쉐네 무대를 통해 데뷔한 ‘현 시스터스’란 여성 3중창단 멤버 중 한 명이 나중에 <밤안개>를 부른 현미다.
YMCA에서 인사동 방향으로 약 300m 내려가다 보면 인사동 입구 사거리 못 미쳐 길 건너 태극당제과점 옆 골목에 ‘뉴월드’ 뮤직홀이 있었다. 규모는 디쉐네보다 작았지만 당시 음악감상실 DJ들한테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왜냐하면 최신 팝 음악의 보고(寶庫)로 소위 빌보드 차트에 오른 최신 곡들을 비치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방송국 DJ들이 음반을 빌리기 위해 자청하여 뉴월드에서 DJ를 해줘야 했다. 당시는 MBC나 동아방송 등 방송국 사정이 음반을 수입할 수 없던 형편이었고, 심지어 『빌보드』지도 구독을 못해 뉴월드에서 빌려다가 방송했던 시절이었다.
뉴월드의 사장 김태관(현재 세계적인 스피커 메이커인 탄노이사 한국대리점을 운영하고 있다)은 충무로에서 외제 음향기기 판매사업을 하고 있던 관계로 뉴월드에 최신 음향기자재를 갖춰 놓았다. 뉴월드 홀 안 48개의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은 다른 음악감상실들은 도저히 따라올 수 없는 음질이었고, 미국에서 직접 공수해 온 원판들은 경쟁업소의 부러움을 샀다.
1965년 1월, 뉴월드에서 DJ 모집 광고를 신문에 내자 지원자가 자그마치 97명이나 몰렸다. 지원자가 너무 많아 하루 20명씩 4일에 걸쳐 시험을 치르는 진풍경을 낳았다. MBC라디오의 정봉화 부장, 아나운서 임국희, 동아방송 PD 최동욱, 이해성, 아나운서 김인권 등 당대 최고 명성을 지닌 인사들이 심사위원으로 동원된 가운데 시험도 웬만한 방송국처럼 까다로워 영어, 신문 읽기, 시사상식, 그리고 음악이론 등을 테스트했다. 그렇게 1차로 7명을 뽑고 수습 DJ로 3개월을 보낸 후 3명을 최종 합격시켰는데, 그 3명이 대전MBC 제작위원을 지낸 김희곤과 ‘의정부 예술의 전당’ 이사장을 역임한 구자흥, 그리고 필자였다.
뉴월드에는 명물 두 사람이 있었다. ‘미스터 후라이’라고 알려진 DJ 이호범은 모든 멘트를 영어로 진행했다. 정확한 문법과 언어를 구사해 용산 미군 장병들한테까지 인기를 끌었는데, 이처럼 완벽한 영어를 구사할 수 있었던 것은 미국인 양부모 밑에서 자랐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일부 손님들이 그가 영어로 말하는 게 엉터리라고 하여 붙여진 별명이 ‘미스터 후라이’다. 나중에는 음반기획자로 성공을 거두는데, 천재적인 기억력으로 노래의 발표년도와 연주자, 가수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어 방송국에서도 문의가 올 정도였다.
또 한 사람은 뉴월드 지배인 송종근이었다. 실제 뉴월드의 운영을 맡았던 그는 마당발로 모르는 방송국 간부가 없었다. 송종근은 직접 DJ 부스에 앉아 진행도 했는데, 가끔 TV에도 출연하여 해박한 음악 지식을 풀어 놨다. 그런가 하면 유도 4단의 유단자로 손님들 사이에 왕왕 시비가 붙으면 단숨에 상대를 제압해 버렸다. 다른 업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와도 꿈적도 않던 그는 뉴월드가 문을 닫게 되자 홀연히 인사동의 골동품 업계로 진출했다. 최고 전성기를 구가하던 뉴월드였지만 라디오 시대가 열리고 음악다방이 새롭게 부상하자 소장하던 음반 모두를 동아방송으로 넘기고 과감히 문을 닫았다.
이밖에도 종로3가 사거리 단성사와 피카디리극장이 나란히 마주보고 있던 종로 쪽 코너에 ‘청궁다방’이 있었다. 음향장비는 신통치 않았으나 극장 근처라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고, 피카디리 옆 건물에는 1980년대에 들어와 국내 최초로 멀티큐브 시스템을 도입한 ‘SM’이란 초대형 뮤직 카페가 등장했다. 이곳에서는 마이클 잭슨을 위시해 마돈나, 신디 로퍼, 아하 등 해외 팝 아티스트들의 뮤직 비디오를 소개하여 팝 마니아들을 불러 모았다. SM이란 가수 이수만의 이름을 딴 것으로 이수만이 동업자와 공동으로 운영했다.
한편, 종로3가에서 창덕궁 방향으로 가다 보면 1970년대 초 ‘아틀란티스’라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아틀란티스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화산에 묻혀 버린 도시’로 그즈음 포크 싱어 도노반이 부른 노래 제목에서 따온 것이었다. 아틀란티스는 <고아>를 부른 오세은이 주인으로 아마 우리나라 카페의 효시일 것이다.
70년대 명동은 음악다방 천국
명동은 일제시대 때부터 장안의 멋쟁이들이 모이던 곳으로 지금까지 문화와 유행의 1번지로 각인되어 있다. 해방 후 음악다방 1호로 기록되는 명동의 ‘은하수다방’에 대해 원로음악인 황문평은 책에서 “은하수다방에는 바바리코트 차림에 타임지나 라이프지를 든 인텔리들이 드나들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배경 탓에 1970년대에 명동에는 음악다방이 유독 많았다. 다방은, 일제시대 때는 간헐적이지만 유성기나 축음기로 음악을 트는 분위기였고, 그후 마담과 차를 나르는 레이지(Lady의 일본식 표기)가 등장하며 음악적인 분위기보다 대화의 장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음악 마니아들을 위한 음악감상실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다가 1965년경 차츰 음악감상실이 라디오방송 앞에서 자취를 감추면서 기존의 다방 형태에서 음악을 앞세운 음악다방이 본격 등장했다. 음악다방은 음악감상실처럼 DJ가 멘트를 하다가 음악만 틀어 주는 형식으로 바뀌어 갔는데, 그 발단이 된 게 광화문 ‘초원다방’이고 명동에서는 ‘심지다방’이 원조다.
명동에서는 1966년부터 1969년 사이에 음악감상실 ‘시보네’가 있었다. 뮤직홀 시보네는 명동극장(지금의 하나은행 자리) 옆 막다른 골목에 있었다. 이렇다 할 특징 없이 문을 열었다가 얼마 안 가 음악다방에 밀려났다. 시보네는 음악감상실의 종착역으로 임희숙이 가수의 꿈을 키웠던 곳이다.
명동은 크게 나눠 미도파백화점 뒤쪽 소공동 일대에 음악살롱이 많았고, 길 건너 명동 입구에서 명동성당까지는 음악다방이 많았다. 그 가운데서 음악다방의 1번지는 유네스코회관 골목으로 들어서 약 500m가량 올라가다 보면 코스모스빌딩(OB's 캐빈) 2층에 위치한 ‘심지다방’이었다. 당시 이곳에는 유명 방송 DJ의 시간을 따로 둬 최동욱, 박원웅, 백형두, 김진성(전 CBS PD), 필자가 출연했다.
명동 미즈백화점(지금의 조흥은행 자리)은 음악가 집안 정경화, 정명화, 정명훈 남매의 부모가 차린 백화점으로 그 옆 건물에 ‘청자다방’이 있었다. 심지다방이 매머드 음악다방이었다면, 청자다방은 음악감상실 분위기를 못 잊는 손님들을 겨냥해 저녁시간에 외부 전문 DJ를 초빙했다.
청자다방 다음 골목에 ‘꽃다방’이 있었고, 여기서 을지로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우리나라 최초의 음악다방 ‘은하수다방’이 예전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조촐하게 클래식만을 틀어댔다. 여기서 을지로로 거의 다 내려오면 구 내무부(지금의 외환은행 자리)가 있었고, 골목 끝에 있던 오양빌딩(지금의 밀러타임 건물) 내의 ‘오양다방’과 로얄호텔 ‘로얄커피숍’에도 많은 젊은이들이 드나들었다.
그런가 하면 사보이호텔 근처 충무로에 ‘본전다방’도 유명했는데, 이곳은 국내 최초로 오페라극장식의 2층 홀을 만들어 인기를 모았다. 본전다방 옆에 뒤늦게 문을 연 음악감상실 ‘르 시랑스’와 ‘내시빌’이 나란히 있었다. 내시빌이 팝 전문 뮤직홀이었던 데 반해 ‘르 시랑스’는 특이하게 실내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 홀 중앙에 의자나 소파 대신 깔아 놓은 카펫에 안방처럼 앉거나 팔베개를 하고 드러눕도록 해놓았다.
르 시랑스에는 서유석, 투 코리안스의 김도향, 윤형주, 송창식, 김민기, 양희은 등 초호화 가수들이 출연했으나, 나중에 대마초꾼들이 모여 들면서 모두 떠나 버렸다. 여기에 매일 나와 눈을 지그시 감고 노래하던 무명의 가수가 나중에 <하얀 나비>의 주인공 김정호다. 르 시랑스는 대마초 사건에 휘말린 주인 이백천이 구속되어 문을 닫아야 했다.
광교에서 명동으로 이전한 ‘쉘부르’는 제일백화점(지금의 유투백화점)과 상업은행(지금의 우리은행) 사이 비제바노제화 건물 지하에 있었다. 쉘부르를 인수한 이종환은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여 아마추어 가수 경연대회를 열었고, 그의 소문을 듣고 가수지망생들이 줄을 이으면서 여기서 남궁옥분, 김승덕, 권태수, 임지훈, 유익종, 강은철, 강승모, 이문세 등을 발굴해 냈다. 한편, 당시만 해도 명동의 상징은 미도파백화점(지금의 롯데영프라자백화점)이었다. 미도파백화점은 동화백화점(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 화신백화점(지금의 종로2가 국세청 자리)과 함께 일제시대 때부터 문을 연 백화점이었다. 당시 백화점 1층에서는 쇼핑 고객들의 사진을 찍어주는 스냅 사진이 유행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백화점 옥상에 한결같이 카바레가 있어 백화점에 쇼핑하러 온 주부들을 유혹했다.
미도파에서 소공동 쪽으로 100m가량 올라가다 보면 경향신문사 옆에 재즈 전문 클럽 ‘훠시즌스’가 아주 색깔 있는 업소로 인기를 끌었다. 재즈 가수 박성연, 정성조와 매신저스, 윤시내, 신병하와 사계절, 그리고 세부엉이라는 밴드가 출연했다. 여기서 골목으로 들어서자마자 ‘라스베가스’가 있었는데, 낮에는 포크 가수들의 무대를 마련하고 밤에는 트리퍼스, 딕 훼밀리 등 록 밴드가 쉬지 않고 돌아가며 출연했다. 여기서 시청 쪽으로 가다 보면 일제시대 때 지은 조선호텔이 나온다. 1960년대 말, 건물을 헐고 새로 지어 지금의 이름인 ‘웨스틴조선호텔’로 바꾸고 지하실에 국내 최초의 외국인 전용 고고클럽인 ‘투모로우’를 열어 필리핀 밴드를 출연시켰다.
국내 최초 멀티 공연장 ‘OB's 캐빈’
1950년대에 카바레 문화를 거쳐 1960년대로 넘어오면서 살롱(Salon) 시대가 열린다. 생음악으로 연주를 한다는 것은 기존의 카바레와 다를 바 없었지만 카바레가 춤을 추기 위한 음악을 연주한 데 반해 살롱은 듣기 위한 음악을 다뤘다. 이것은 그 무렵 일어난 일렉트릭 캄보 사운드에 기인한 것으로 이른바 캄보 음악이 붐을 이루고 여기에 비틀스가 등장하면서 음악의 판도가 바뀌었다. ‘미도파카바레’가 ‘미도파살롱’으로 간판을 바꿔 단 게 시초였고, 이어 미우만백화점 옆 골목 ‘은성살롱’, 퇴계로 오리엔탈호텔에 ‘닐바나살롱’, 청계천4가 세운상가 4층에 ‘아마존살롱’이 문을 열었다.
이밖에도 오리엔탈호텔 6층에 자리한 나이트클럽에 ‘민들레악단’이 출연했는데 이백천이 이 악단에서 알토 색소폰을 불었다. 그런가 하면 스타다스트호텔 나이트클럽에서도 낮 시간에 뮤직살롱을 열어 당대 드럼 연주 1인자인 조상국을 비롯하여 국내 1세대 재즈 뮤지션들과 박성연 등의 재즈 무대가 펼쳐졌다.
그러나 무엇보다 ‘미도파살롱’은 캄보 밴드의 요람으로 수많은 밴드들이 한 번쯤은 거쳐 간 곳이었는데, 비틀스 선풍이 불면서 소위 일레키(일렉트릭의 일본식 표기) 밴드의 집합지였다. 이곳에서는 낮 12시에 기독교방송 라디오의 오픈 스튜디오로 <정오의 휴게실>의 공개방송이 매일 실시됐고, 오후 1시부터 캄보 아워로 편성하여 5시까지 ‘이길봉 악단’과 미도파스, 비스 등이 돌아가며 연주했다. 그러고 나면 저녁 8시까지 조용한 카페 음악으로 분위기를 가라앉혔다가 자정까지 고고 사운드로 살롱문화를 선도해 나갔다.
‘미도파살롱’의 대표적인 그룹이 ‘미도파스’였다. 나중에 ‘뚜아 에 무아’를 결성한 이필원과 <눈동자>를 부른 이승재가 바로 이 팀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필원은 연주를 하다가 흥에 겨우면 무대 바닥에 무릎을 꿇거나 드러누운 채로 신들린 연주를 선보였다. 미도파살롱에 이례적으로 대학 재학생 박인희가 자청해서 MC를 봤는데, 여기서 이필원을 만나 ‘뚜아 에 무아’가 탄생한다.
그렇지만 명동의 명소는 뭐니 뭐니 해도 ‘OB's 캐빈’(또는 코스모스살롱)이었다. 코스모스빌딩(지금의 폴라리스 쇼핑센터 건물)은 건물 전체가 커피숍에서 카페, 레스토랑, 라이브 홀에 이르기까지 음악과 연관된 공간으로 꾸며졌다. 건물 2층에 ‘심지다방’을 개조한 곳이 ‘OB's 캐빈’이었고, 3층은 ‘코스모스 홀’로 아마도 국내 최초의 복합 멀티 공연장으로 기록될 것이다.
주인은 요식업에만 30년 이상 종사한 이지재(자유당 시절의 정치깡패로 알려진 이정재의 사촌 형제이다)로 한국전쟁 시절 다른 물건은 다 팽개치고 원판 음반 300장만 갖고 피난을 간 지독한 음악광이자 다방업계의 큰손이었다. 반도조선 아케이드 골목에 있는 ‘대호다방’과 ‘명동장’이 그의 소유였고, 명동장을 개조한 건물이 바로 ‘코스모스빌딩’이었다.
코스모스빌딩 지하 1층의 ‘마음과 마음’이란 카페는 피아노와 기타 위주의 음악으로 꾸며 무명 가수 이성애가 출연해 미국의 남매 듀엣가수 카펜터스의 노래를 즐겨 불렀다. 이성애는 나중에 일본으로 건너가 남진의 <가슴 아프게>를 리메이크시켜 ‘엔카’ 붐을 일으킨 장본인이다. 그녀를 발굴한 사람은 당시 MBC PD이자 작곡가 김정호로 그 자신도 매일 직접 무대에 나와 피아노 반주를 했다. 당시 신출내기 가수였던 양희은도 이 무대를 통해 데뷔했다.
그리고 지상 1층 ‘무겐’(퍼시픽호텔 나이트클럽 ‘무겐’과는 다르다)이란 고급 레스토랑에는 박인수, 이창림, 장현 등 발라드 가수들이 출연했으며, 입구에 ‘파라다이스 룸’이라 하여 와인만을 파는 라운지가 따로 있었다. 2층 ‘OB's 캐빈’은 그즈음 막 나온 생맥주 시음장이었는데, 여기서 은희, 이연실, 이용복, 쉐그린, 라나 에 로스포 등 포크 가수들의 무대가 펼쳐졌다. 3층의 ‘코스모스살롱’은 그룹사운드 경연장으로 김홍탁이 이끈 히 식스가 이 무대를 통해 슈퍼스타 반열에 올랐고, 영 에이스, 비스 등 유명한 그룹은 거의 다 거쳐 가며 록 음악의 메카로 자리매김해 나갔다.
한편, 경향신문사 옆 골목에 ‘라스베가스 뮤직살롱’도 인기가 좋았다. 이곳은 ‘코스모스살롱’을 겨냥해 ‘김훈과 트리퍼스’를 간판으로 내세웠다. 여기서 김훈은 <Mr. Moonlight>를 즐겨 불렀고, 차중락과 윤항기가 빠진 2기 키 보이스도 출연했다. 특히 이곳에서 처음으로 디스코 경연대회를 열어 뽑힌 팀이 국내 최초의 전문 댄스팀 ‘와일드 캣츠’였다. 이밖에도 사보이호텔 뒷골목 2층에 있던 ‘마이하우스’, OB's 캐빈 건너편에 ‘OB 뚜우르’, 그리고 뮤직홀 ‘시보네’가 이름을 바꾼 뮤직살롱 ‘실버타운’에 ‘라스트 찬스’가 출연했으며, 그 아래층 ‘멕시코’에 출연했던 한민과 은희는 ‘라나 에 로스포’를 만들어 <사랑해>로 인기를 얻었다.
광화문 시민회관과 그룹사운드 경연대회
한국 록 음악의 황금기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를 일컫는다. 당시는 록 밴드들이 설 무대가 많았다. 즉, 미8군 무대에서 비롯된 밴드의 유행이 일반 무대로까지 확산되면서 음악감상실과 음악살롱에서 불붙기 시작해 고고클럽으로 번졌다.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이긴 했으나 대개의 유흥업소들이 생음악을 다뤘기에 아무리 작은 업소라도 한두 팀의 밴드가 무대에 올라 연주하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고고클럽에서도 춤 음악을 생음악으로 연주했다.
그즈음 장안의 최고 무대는 광화문 시민회관이었다. 시민회관의 역사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5년 세종로에 다목적 용도의 ‘부림극장’으로 세운 부민관 건물이 해방 후 1950년 1월 ‘국립극장’이 됐다. 하지만 곧바로 한국전쟁이 터져 1952년 국립극장은 대구의 문화극장이 된다. 휴전이 되고 정부 환도 후 구 부민관 건물을 국립극장으로 다시 사용하지 않았고, 대신 국회의사당으로 사용되다가 국회가 태평로(지금의 서울시의회 건물)로 옮기면서 1961년부터 시민회관으로 복원됐다. 시민회관은 이때 대대적인 보수를 통해 비로소 극장의 면모를 갖췄다.
시민회관은 1966년 패티 김이 귀국 무대를 가졌고, 1967년에는 윤복희가 미니스커트를 입고 공연을 펼쳤을 뿐 아니라 남진,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김추자, 김상희, 송창식, 신중현 등 당대 내로라는 가수들이 앞다퉈 공연을 했던 곳이다. 그러나 1972년 12월2일 MBC 개국 11주년 기념 ‘10대 가수 청백전’ 행사 중 화재가 발생해 소실됐고, 1976년 그 자리에 다시 세워진 것이 지금의 ‘세종문화회관’이다.
아무튼 시민회관 시절에는 연례행사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가 펼쳐졌다. 우리나라 최초로 그룹사운드 경연대회가 개최된 곳은 1968년 ‘동대문 실내 스케이트장’이다. 팝 칼럼니스트 서병후가 창간한 대중음악지 『팝스코리아나』 주최로 시작됐으나 잡지가 갑자기 폐간되는 바람에 흐지부지됐고, 이듬해인 1969년 ‘전국 보컬그룹 경연대회’가 『선데이서울』 후원으로 열렸다. 이때 최고상을 받은 그룹이 키 보이스였고, 우수상은 히 화이브, 구성상은 가이 앤 돌스, 가수상은 타이거스의 이필원, 연주상은 키 보이스의 조영조, 선데이서울 가족상은 체리 시스터스와 타이거스가 차지했다. 이 대회는 1971년 시민회관으로 옮기면서 명칭을 ‘플레이보이컵 그룹사운드 대회’로 바뀌었고, 1973년에는 월간팝송사 주최 ‘MPS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로 다시 바뀌었으며, 1974년에는 다시 『선데이서울』 주최의 ‘선데이서울컵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로 또 한번 바뀌었다.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는 전국에 유명무명의 그룹들이 총출연하는 국내 최고의 록 밴드 제전으로 발전하여 당시 시민회관에서 하루 네 차례씩 공연이 있었는데, 하루에 약 1만 2,000명이 관람할 정도였으니 인기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연은 짧게는 사나흘에서 길게는 일주일이 넘어가는 장기 레이스로 진행되어 1968년, 1969년, 1970년은 ‘신중현의 그룹’이 3연패를 했고, 1971년에는 ‘키 보이스’가, 1972년에는 ‘히 식스’가, 1973년에는 ‘템페스트’가 대상을 탔다. 하지만 대마초 사건 이후 많은 록 밴드들이 사라졌다. 이어 1980년대에 디스코 붐이 일어나 생음악을 레코드가 대체하고 여기에 가라오케까지 가세하면서 록 밴드의 운신의 폭은 더욱 줄어들었다.
참고로 그룹사운드(Group Sounds)란 용어는 1960년대 초반, ‘벤처스’가 지펴 놓은 캄보의 붐에 이어 1964년 ‘비틀스’의 선풍과 함께 록 밴드의 연주가 유행하면서 일본의 영향(일본에서는 그루프사운드로 불렀다)을 받은 것이다. 마침 1970년대 초반 통기타 음악이 각광을 받으며 통기타 그룹과 록 밴드의 구분을 짓기 위해 처음에는 일레키 그룹이라고 부르다가 언젠가부터 그룹사운드로 부르게 된 것인데, 엄밀한 의미에서는 록 밴드 또는 록 그룹이 바른 표현이다. 아무튼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는 한국 록 음악사에 한 획을 긋는 이벤트로 기록된다. 당시 고고클럽에서 록 밴드의 라이브 연주가 붐을 이루기 시작하자 심지어 막걸리를 파는 대폿집에서도 록 밴드가 나와 연주를 했다. 그때 이런 업소를 ‘막걸리 고고장’이라고 불렀다.
정화냐? 퇴폐냐? 유신시절 고고클럽 백태
1970년대는 통기타 음악으로 상징되는 ‘청년문화’뿐 아니라 다른 한편에서는 고고클럽의 춤 문화가 성행했다. 통기타 음악은 포크 뮤직에서 유래한 것이지만, 고고클럽은 싸이키델릭 뮤직에서 기인한 것으로 원래의 고고 사운드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고고(Go-Go)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위스키 아-고-고’라는 클럽에 출연 중이던 가수 ‘자니 리버스’에 의해 만들어진 느릿한 분위기의 춤을 말한다. 이와는 별도로 싸이키델릭은 히피문화와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대마초나 마약을 피우고 몽롱한 환청 상태에서 느끼는 시각적인 음악이다. 그런데 이게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싸이키델릭 음악이 엉뚱하게 고고 춤으로 와전된 것이다. 그 이면에는 당시 군사정권의 눈치를 보느라 싸이키델릭이란 표현 대신 고고로 둔갑(?)시킨 일부 매스컴 종사자들의 편법이 있었다. 왜냐하면 마약에 민감한 정부당국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아무튼 이런 와중에 최초의 고고클럽으로 조선호텔의 ‘투모로우’가 외국인 전용이란 조건으로 오픈한 데 이어 내국인을 고객으로 한 퇴계로 오리엔탈호텔 2층 ‘닐바나’가 문을 열었다. 닐바나는 당시 『주간경향』 기자 서병후가 올바른 춤을 보급하겠다는 취지로 전문 댄스팀 ‘와일드 캣츠’를 출연시켜 화제를 모았다. 그런가 하면 소공동 국제호텔에 ‘블루룸’이라는 고급 나이트클럽과 디스코텍 ‘레인보우’가 생겨 권력층과 재계 2세 그룹인 8공자(당시 내로라는 재계 2세 8명이 주축이 된 사교 모임)들이 자주 드나들었고, ‘정글바’라는 양주 집은 밤샘 족들의 아지트였다. 그리고 청계천3가 센추리호텔의 클럽과 무교동의 맥주홀 ‘코파카바나’는 키 보이스 출신 차중락이 <낙엽 따라 가버린 사랑>을 부르며 마지막으로 출연하던 무대다.
또 세운상가 ‘풍전나이트클럽’과 을지로6가 ‘천지나이트클럽’, 청량리 ‘대왕코너나이트클럽’도 문을 열었다. 당시는 통금이 있던 시절로 고고클럽들은 밤 12시까지 손님을 입장시키고 통금이 풀리는 새벽 4시까지 밖에서 문을 잠가 놓고 영업하는 편법을 썼다. 그러다 보니 싫든 좋든 꼼짝없이 안에 갇혀 있어야 했기에 불상사도 일어났다. 1974년 11월3일 대왕코너 화재는 클럽 안에서 춤추던 72명과 호텔 투숙객 등 모두 88명이 죽고 31명이 중경상을 입는 대형 참사였다.
이런 분위기의 고고클럽을 통칭해 ‘닭장’으로 불렀다. 이 닭장 속에서 빠른 비트와 환각적인 조명의 싸이키델릭 음악이 흐르고 나면 각종 퇴폐적인 일들도 벌어졌다. 일명 ‘블루스 타임’이라 하여 싸이키 음악에 몽롱해진 분위기에서 느릿한 발라드 풍의 춤곡이 흐르면 남녀가 부둥켜안고 비벼댔다. 그런가 하면 고고클럽에서 한바탕 놀다가 통금 위반으로 뚝섬에 끌려가 즉결재판을 받는 모습이 연출되곤 했다.
‘한국판 우드스탁’ 남이섬과 ‘강변가요제’
최근 남이섬이 관광지로 다시 각광을 받고 있다. ‘욘사마’(TV 탤런트 배용준의 일본식 애칭)가 출연한 드라마 <겨울연가>의 촬영지로 남이섬이 알려져 일본 관광객들을 몰고 오면서 한류열풍 특수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남이섬이 세간의 관심을 끌기 시작한 것은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971년 포크 가수들의 청평 페스티벌이 있었고, 78년에 음악평론가 이백천과 가수 서유석이 ‘청평 안전유원지’에 ‘한국의 우드스탁’을 표방하며 신인가수 등용문을 자처하고 나섰던 것. 그런데 비슷한 시기 TBC가 연포해수욕장에서 개최한 ‘해변가요제’의 위세에 눌려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MBC-FM의 DJ 박원웅이 기획하여 그 이듬해인 1980년 청평에서 MBC-TV와 FM이 공동 주관으로 제1회 ’강변가요제’를 개최한다. 이때 대상을 탄 노래가 홍삼 트리오의 <기도>다. 그후 청평유원지가 너무 협소하고 자칫 익사사고의 위험도 있어 장소를 남이섬으로 옮겼던 것.
MBC ‘강변가요제’는 처음에는 ‘대학가요제’가 워낙 막강해 그저 그런 행사로 명맥을 유지했다. 단, 대학가요제가 겨울에 실내체육관에서 열리는 데 반해 강변가요제는 여름에 탁 트인 물가에서 열려 젊음을 만끽할 수 있다는 매력 때문에 관심을 끌 수 있었다.
강변가요제의 힌트가 된 ‘우드스탁 록 페스티벌’은 1969년 8월 뉴욕 주 우드스탁에서 3일간 치러진 매머드 야외 콘서트였다. ‘사랑, 평화, 꽃’을 캐치프레이즈로 무려 50만 명의 젊은이들이 모여 축제를 즐겼으며, 이 집단을 가리켜 ‘우드스탁 네이션(Woodstock Nation)’이란 용어도 등장했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가운데 출연 팀만 자그마치 30여 팀에 달했고, 운집한 젊은이들은 나체로 공연을 즐겼다. 이런 공연 실황이 그대로 수록된 영화는 그 이듬해 아카데미 기록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드스탁의 영향을 받아 1970년대에는 전 세계적으로 야외 콘서트가 붐을 이뤘는데, 이를 흉내 낸 게 ‘강변가요제’였다. 강변가요제는 회를 거듭할수록 인기가 높아졌고, 남이섬이란 특수한 입지조건 때문에 섬에 가기 위해 배를 타는 것 또한 가요제를 보러 가는 이들의 낭만이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배를 타는 게 도리어 부담이 되어 관람객이 점차 줄어들자 다시 춘천호반으로 옮겨 치러지다가 2002년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강변가요제의 피크는 1980년대일 것이다. 이선희가 속했던 ‘4막5장’의 <J에게>와 유미리의 <젊음의 노트>, 그리고 이상은의 <담다디>가 모두 이때 나온 곡으로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빅 히트를 쳤다.
80년대 신촌, ‘레드 제플린’과 ‘야누스’
신촌 일대가 젊은이의 명소로 부각된 것은 1970년대 후반부터다. 일세를 풍미했던 명동의 음악다방이나 음악살롱이 차츰 사라지게 된 데는 대학가를 중심으로 새로운 문화타운이 형성됐기 때문이다. 특히 신촌 일대는 대학이 많아 젊은이들의 새로운 집결지로 부상했으며, 이후 소위 ‘신촌문화’가 형성된다. 신촌을 주무대로 1980년대에 자칭 타칭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으로 불리던 사람들이 활동하면서 1970년대 청년문화의 중심지였던 명동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차츰 쇠퇴의 길을 걸었다.
초창기 신촌은 이대 앞이 붐볐으나 여자대학이란 특성으로 양장점이 즐비하게 늘어서면서 연대 앞 일대가 바통을 이어 받았고, 지금은 홍대 앞이 메카로 젊음의 해방구 역할을 하고 있다. 이대 앞 사거리 코너 오른쪽에는 ‘맥스캐빈’(지금도 영업 중)이, 왼쪽에는 ‘도원’이 있었다. 여기서 이대 정문 방향으로 100m가량 들어가면 왼쪽에 ‘애플'이, 다시 100m가량 더 들어가면 왼쪽에 ‘맥심'이 있었고, 반대로 우회전해 골목으로 들어가면 ‘코스모스'가 있었다. 그리고 튀김 골목 반대편 오른쪽에 ‘아메리카', 골목으로 더 들어가면 ‘하이드파크'가 유명했다.
여기서 신촌역 방향으로 틀어 내려가면 시장 입구에 1978년 재즈 가수 박성연이 문을 연 재즈클럽 ‘야누스'가 있었다. ‘야누스’란 고대 로마 신화에 나오는 두 개의 얼굴 모습을 가진 문(門)의 수호신으로 재즈가 일반인들에게 소외당하자 다른 대중음악을 다뤄야만 했던 재즈 뮤지션들의 비애를 빗대 붙여진 것이었다.
1980년부터 재즈 전문인들은 ‘야누스’에서 정기적인 모임을 갖고 ‘재즈 발표회’를 여는데, 모임은 박성연을 비롯해 한국 재즈계의 대부 격인 이판근, ‘한국의 루이 암스트롱’이라는 강대관, 지금은 KBS 관현악단장이자 최고의 엘리트 뮤지션으로 평가되는 정성조, 테너 색소폰 주자 이동기, 드러머 조상국, 테너 색소폰의 김수열, 알토 색소폰의 강태환, 피아니스트 신광웅 등이 뭉친 일종의 잼세션 그룹이었다. 이들은 1995년까지 180여 회의 정기공연을 열며 재즈 보급에 앞장섰다.
박성연은 평소 음악을 좋아하던 아버지를 통해 재즈를 접하면서 음악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미8군 무대에 올라 새라 본의 노래를 즐겨 불렀고, 동남아와 일본 공연을 다녀왔다. 1974년 첫 재즈 발표회를 가지면서 일부 팬들에게 알려졌고, 워커힐호텔과 ‘포시즌스’ 등에서 재즈만을 불렀다.
‘야누스’는 경영난으로 신촌역 앞에서 이화동으로, ‘연세대 100주년 기념관’ 건너편으로 신촌 주변을 맴돌다가 강남 서초동으로 이전했고, 다시 강북 이화동 등으로 몇 차례 옮겨 다녔다. 재즈의 대중화를 위해 무던히 노력했던 ‘한국 재즈의 대모’ 박성연은 지난 2003년 11월 ‘야누스 탄생 25주년 콘서트’를 열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연세대 정문 앞 철길 건너에는 ‘독수리다방’이 있었다. 독수리다방은 1971년 2월 문을 열어 신촌의 상징적 공간이 돼 오다가 33년 만인 2004년 6월 문을 닫았다. 독수리다방은 음반이 가장 많기로 소문난 곳이었으나 차츰 대학 미팅 장소로 유명해지면서 1990년대 초까지 신촌 대학가를 대표하는 ‘만남의 장소’로 통했다. 이문열의 장편소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에서 두 주인공이 만나는 장소로 등장하는 등 각종 문학 작품과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한다.
독수리다방 건너편에는 음악카페 ‘레드 제플린’이 있었다. 레드 제플린에서는 매주 목요일 밤이면 ‘해바라기’의 오리지널 멤버 이정선, 이광조, 한영애와 이정선의 또 다른 그룹 ‘풍선들’의 기타리스트 엄인호 등이 블루스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트로트 음악에서 사용하던 일본식 블루스에 대한 편견을 바로잡기 위해 미국 본고장의 블루스 보급에 주력했다. 회를 거듭할수록 차츰 관객들의 반응이 좋자 김현식, 박인수, 윤명윤이 가세했으며, 나중에는 영국에서 블루스를 익히고 온 김목경도 끼어들었고, 원로가수 최희준까지 합세했다.
그런데 원래 정통 블루스를 제일 먼저 시도한 인물은 오세은이었다. 이정선이 그의 영향을 받았는데, 오세은이 프로듀스와 기획을 한 음반으로 1986년 블루스 유행에 결정적 역할을 한 노래가 바로 이정선이 작곡하고 한영애가 노래한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이 노래가 히트하면서 그때까지 들었던 블루스와는 현격한 차이가 있음을 사람들이 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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