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입문 그리고 선수생활
어릴 때부터 내성적이고 몸이 약했던 나는 1969년3월5일 아버지의 권유로 무덕관에 입문하였다. 당시 제천에는 한무관과 무덕관이 있었는데 한무관은 정익진 사범이 1958년 3월에 개관하였고 무덕관은 조원제 관장, 김원동 사범(개그맨 우비소녀 김다래양 부친)을 중심으로 개관한 도장이었다.
입관하면서 누구보다도 강하게 지도 해 달라는 아버지의 주문 덕분에 나는 또래의 다른 수련생보다 더욱 고된 수련을 해야 했다. 어떤 동작이든 기본이 삼 일이었다.
주먹 쥐는 것 만 삼일, 기마서기(현재 주춤서기)만 삼 일, 전굴자세(앞굽이)만 삼 일, 앞차기만 삼 일……. 나는 사범님께서 왜 이렇게 지겹게 힘들게 가르치시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무엇보다도 악몽인 것은 낙법이었다. 당시 우리 도장은 남당초등학교 앞 다리건너 지하였는데 바닥이 진흙이 섞인 흙바닥이었다. 그 흙바닥을 매일 빗자루로 쓸고 걸레로 닦는 바람에 반질반질한 상태였으나 땀을 흘리면 미끄러웠다. 그러면 가마니를 자른 다음 펴서 깔고 수련하였다. 그 흙바닥에서 전방낙법, 후방낙법, 측방낙법을 하고 나면 온 몸이 쑤시고 결려 참으로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아버지의 꾸중이 무서워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눈물을 쏟으며 꾹 참고 하는 수밖에 없었다.
1970년 5월 초단으로 승단 후 처음 시합에 출전한 것은 남당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하지만 관이 다른 코치는 5명이 출전하는 단체전 멤버에 넣어 주지 않아 경기를 뛰지 못하고 제천중학교에 진학하였다.
중학교에 진학하자 초등학교 때 친했던 익경이와 한반이 되었었고 운동을 해서인지 싸움깨나 한다는 아이들이 맞짱을 뛰자고 시비를 많이 걸어 왔었지만 우리를 이길만큼 강한 아이들은 없었었다. 그런 탓에 다음 날, 아침 등교하면 담임선생님께서 나와 익경이를 불러내어 야단을 치셔서 혼이 나곤 하던 어느 날! 하키를 담당하던 체육선생이 갑자기 교실로 들어왔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바라보는데 큰 소리로 말하였다.
- 박승동이 누구야 앞으로 나와!
교단으로 나가니 선생님이 구령을 붙인다.
- 기마서기
- 중단지르기! 하나, 둘 셋
구령을 붙이며 주먹의 스피드와 명치를 제대로 지르는지 살펴보신 선생님께서는 말했다.
- 정통이구나. 됐다. 너 시합에 나가라.
나는 그렇게 얼떨결에 발탁이 되어 태권도경기에 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태권도장에도 나가지 않고 시합에 출전하기 이틀 전에 학교 체육실에서 몸만 풀다 알이 밴 채나가는 시합에 좋은 성적이 나올리는 없었다. 하지만 워낙 실전(제천의 특성상 싸움을 많이 했었다)에서 다져진 탓인지 1등은 못했어도 늘 입상권에는 들었다. 하지만 우승을 하기 위해서는 체계적으로 훈련 할 필요성을 느끼고 친구의 형이 운영(제천여고근처)하는 태권도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친구의 형이 태권도장을 반으로 막고 반은 황보 정남이라는 합기도인에게 도장을 임대하여 주었다. 그 바람에 나는 자연스럽게 합기도를 접할 수 있었다.
1975년 제천고등학교에 진학하여 학업과 태권도를 병행하고자 하였으나 학교에서는 연습할 장소가 없었는데, 당시 교감으로 계시는 정철진 선생님의 형이 운영하는 제천체육관(한무관)에서 수련생들이 수련하기 전에 2시간 동안 빌려서 훈련하기로 협의하여 선수 훈련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코치 없이 훈련하다보니 (태권도부 선수들이 하나 둘씩 잘못되어 모두 퇴학이 된 후 나 홀로 졸업함)홀로 남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학교에서는 대회참가신청서며 선수등록 등 행정에 관해 아무런 조치 없어 할 수없이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직접 선수 등록 신청서와 대회 참가신청서를 가지고 청주로, 서울로 헤매며 다녀야했다. 그런 나를 충북협회임원들께서는 대견스럽게 보아 주셨는데 충북협회 임원들은 청주에 들러 다시 서울로 가는 나에게 용기를 잃지 말라시며 격려를 해 주시곤 하였다.
이 시기(1975~7년 사이)에 나는 기술적으로 발전을 이룬 중요한 계기 있었다. 그것은 충주에서 태권도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택견을 배운 수련생들이 태권도대회에 참가한 것이다. 하지만 호구를 차고 하는 시합이어서인지 태권도선수가 거의 다 우승을 하였다.(아마도 내 생각에 신한승씨는 승패에 상관없이 택견의 실전성을 연구하셨던 것 같다.) 그 대회에서 나는 택견 수련생들이 구사하는 특이한 기술을 발견했다. 그것은 발로 공격하는 상대의 발을 막는 기술이었다. 이 기술을 신한승씨에게 질문하니 미소를 지으며 말하길 “태권도에 자네처럼 연구하는 학생이 있어 희망적이라”며 막음다리라고 설명을 해주시고 덧붙여 태권도 시합에도 쓸 수 있는 것 중에 정강이차기라는 것도 있는데 태권도 선수들은 발을 많이 쓰니 이 기술로 상대의 발을 막으면 효과적일 것 같다는 설명도 하여 주었다.
이 두 가지 기술과 또 하나는 이소룡의 격투기술 중에 하나를 나의 것으로 만든 일이다. 나는 77년 봄에 이소룡과 만났다. 물론 영화를 통해서....
영화제목이 정무문으로 기억하는데 이소룡의 격투신에서 나는 그가 오른발을 앞에 놓고 앞에 있는 발로 상대를 가격하는 (복싱에서 잽과 같은) 것을 보고 상당히 효과적인 기술이 될 것 같아 연구하였다. 그리고 나는 그 때부터 앞에 있는 발로 공격하는 상대를 택견의 막음다리와 정강이 차기를 변형시켜 공격과 방어로 연결하는 기술들을 연습하였고 실제로 시합에서 앞발을 사용하고 또 발로 상대의 무릎이나 허벅지를 밟고 상대의 얼굴을 공격하는 기술을 구사하니 상대에게 잘 먹혀들어 각종 대회에서 우승을 많이 하였다.
자신이 붙은 나는 태권도장 외에 타 무술 도장으로 다니며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고 배우고 싶다며 타 무술의 유단자와 대련을 많이 가졌으나 나는 한 번도 진 적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