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샨시성(山西省) 중국 북부에 있는 성으로 동쪽은 허베이성(河北省),남쪽과 남동쪽은 허난성(河南省), 서쪽으로는 산시성(陝西省), 북쪽으로는 네이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성의 대부분이 평균고도가 해발 300∼900m에 달하는 고원이며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 황허강(黃河)이 산골자기를 지나면서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고, 서쪽의 산시성(陝西省)과 경계를 이룬다. 산서성은 중국의 두 개 문명이 만나는 지역에 놓여 있는데 북쪽은 기마 민족인 몽고족의 영향을 받았고, 남쪽으로는 황하문명의 접경지로 진나라 이후 남방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자 이 지역은 변방이 되었다. 지금의 산서성은 석탄 등의 지하자원이 풍부해 공업지역으로 탈바꿈했다. 주요 볼거리로는 중국 불교 4대 명산의 하나로 수려한 고산 자연풍경과 찬란한 불교 문화예술로 유명한 오태산(五台山)과 중국 고대 3대 석굴 예술 보고의 하나인 운강석굴이 볼 만 하다.
중국 동부에 있는 성. 면적 15만 7000 km2. 인구 약 2,900만(1992). 성도(省都)는 타이위안[太原]. 동쪽은 타이항산맥[太行山脈]과 우타이[五臺]산맥, 서쪽과 남쪽은 황허강[黃河] 중류의 협곡, 북쪽은 만리장성으로 둘러싸여 있어 각각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시[陝西]의 각 성 및 네이멍구 자치구[內蒙古自治區]와 접한다. 황투 고원[黃土高原]의 일부이며, 평균 해발고도는 600 ~3,000 m이다. 지형적으로는 다음의 세 가지 지형으로 분류된다.
동부고원:이는 협의의 북부고원과 동부고원으로 나뉘는 경우도 있다. 즉 북쪽의 헝산산[恒山], 동쪽의 타이항[太行]·우타이[五臺] 산맥을 주체로 한 1,500 m급의 고원이다. 중부 펀허강[汾河] 하곡의 지구대(地溝帶):비옥한 땅으로 되어 있다.
서부고원:뤼량[呂梁]·윈중[雲中] 산맥으로 이루어지는 평균 2,000 m의 고원지대이다.
대륙성 기후를 나타내지만, 타이항산맥 때문에 여름에는 남동 산기슭에 비가 내리고 고원 내부나 북부에는 강수량이 적다. 경지는 약 25 %로 적으며, 가뭄에 견디는 옥수수·수수를 재배하고 관개용수가 완비된 곳의 경우 밀이 주산이다. 최근에 이르러서는 수리시설의 건설, 황토 유실방지가 진척되어 황투고원 특유의 계단상(階段狀) 지층을 교묘하게 계단밭으로 이용하여 경지를 넓혀가고 있고, 경작기술의 개량을 꾀하고 있다. 특히 시양현[昔陽縣] 다자이[大寨]는 성공한 예로서 전국의 모범이 되어 있다. 그 밖에 목화·땅콩 등 경제작물도 재배되고 있다.
또한 지하자원이 풍부하여, 석탄은 다퉁[大同]·시산[西山]·타이위안[太原] 등이 중국 제일의 매장량을 자랑한다. 철도 양취안[陽泉]·진청[晉城] 등지에서 개발되고 있다. 이들을 기반으로 하여 철강·기계·합성화학 등의 중화학공업이 발달하고, 타이위안을 중심으로 지역생산 콤비나트가 형성되고 있다.
교통은 퉁포[同浦:大同~風陵渡]·시타이[石太:石家莊~太原]·징바오[京包:北京~包頭] 철도를 그 동맥으로 하여 타이위안·펀양[汾陽], 그 밖의성내 각지로 공로(公路)가 통하고 있다.
산서성은 중국의 두 개 문명이 만나는 지역에 놓여 있는데 북쪽은 기마 민족인 몽고족의 영향을 받았고, 남쪽으로는 황하문명의 접경지로 진나라 이후 남방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나라가 장안으로 도읍을 옮기자 이 지역은 변방이 되었다.
주요 볼거리로는 중국 불교 4대 명산의 하나로 수려한 고산 자연풍경과 찬란한 불교 문화예술로 유명한 오대산(五台山)과 중국 고대 3대 석굴 예술 보고의 하나인 운강석굴이 볼 만 하다.그 밖에 펀양을 중심으로 펀주[汾酒]라는 술이 유명하며, 신장[新絳]의 종이·먹·붓 등 전통적·역사적인 공예품이 있다.
중국 산서성선 뚱뚱할수록 일등 신부감
요즘 아가씨들은 몸매를 날씬하게 하려고 다이어트에 결사적이다. 하루에 한끼만 먹고 버티는 아가씨, 그런가하면 야채만 먹으려는 아가씨, 개중에는 과일만 먹어도 살찐다는 소리에 겁먹고 좋아하는 과일도 입에 안대는 아가씨, 미처 꽃도 피워보지 못하고 영양실조로 저세상사람니 돼버린 아가씨 들, 잘먹고 건강하자 대신 안먹고 야위자는 이들이 많다. 그런가하면 남자친구와의 데이트에서 먹고 싶은 것 다 얻어먹고도 날씬한 아가씨, 게걸스럽게 억고도 통 살이 안찌는 무용수 아가씨도 있다.
그런데 시집갈 신부감이 살이쪄야 대접 받는 곳이 있다. 중국 산서성의 북부 농촌 지역에서는 처녀가 살이 찔수록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다. 무슨 장난 같은 소리냐 하겠지만, 이 지방에서는 우리나라와 달리 신랑이 신부를 맞기 위해서는 신부댁에 결납급을 내야하는데 체중이 무거울수록 그 금액이 높은 것이다. 1982년 당시 체중 1근(6백g)당 중국돈으로 8위안(元)이었다. 즉 50kg의 신부감은 6백67위안이 되는 것이다.
1981년 당시 중국의 연 개인소득 평균이 2백23위안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액수가 높다는 것을 알수 있다. 때문에 이 지역의 처녀들은 가급적 뚱뚱하고 건강해지려고 음식을 가리지 않고 마구 먹어치운다. 그리고 뚱뚱해지려고 애쓴다. 그러나 물살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몸이 단단해댜 한다. 그렇다면 왜 신부감으로 뚱뚱한 여성을 선호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간단하다. 뚱뚱한 여성일수록 건강하고 일 잘하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처녀때 날씬한 데만 신경쓰다가 결혼해서 아이를 낳을때 그 허약한 몸으로 어떻게 낳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그 지방 사람들이 미련한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체력은 국력이라는에 아가씨들 분발해 보는게 어떤지요.
대동
북경에서 북서쪽으로 382km, 내몽골로 들어가는 입구에 있는 대동은 예부터 군사상의 요소로서, 또한 몽골 각지의 물자 집산지로 번영했다. 이 도시를 찾는 여행자의 대다수는 운강석굴을 보러 가지만 시내에도 볼 만한 곳이 많고 성 안의 구시가지도 잘 보존되어 있다. 대동의 역사는 周 왕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398년에 탁발씨(拓跋氏)가 세운 北魏가 이곳에 도읍(平城)을 정했을 때부터 대동의 황금시대가 시작된다. 그때 沙門統 (승려의 우두머리)의 지휘로 운강석굴을 파기 시작했다.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000m의 황토고원에 있는 산서성 제2의 대도시로 만리장성의 남쪽 50km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거대한 석굴과 절등 많은 문화유적이 있으며 석탄의 산지로 중국 근대화에 큰 몫을 하고 있다. 현재는 석탄의 도시로서 중국의 근대화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탄광은 무주하(武周河)를 끼고 시의 건너편에 있으며 운강석굴로 가는 버스의 차창으로 그 일부가 보인다. 대동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000m의 황토고원에 있는 산서성 제 2의 대도시로 만리장성의 남쪽 50㎞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거대한 석굴과 절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있으며 석탄의 산지로 중국 근대화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대동은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인 해발 1,000m의 황토고원에 있는 산서성 제 2의 대도시로 만리장성의 남쪽 50㎞에 위치하여 예로부터 군사적 요충지였다. 거대한 석굴과 절 등 많은 문화유적이 있으며 석탄의 산지로 중국 근대화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운강석굴(雲崗石窟)
대동에서 서쪽으로 16㎞ 떨어진 곳에 있는 운강석굴은 약 1㎞에 걸쳐 53개의 동굴에 17m에서 수 ㎝ 크기의 불상 5만 1,000여 채가 돌에 새겨 있다. 낙양 용문석굴, 돈황 막고굴과 함께 중국 3대 석굴의 하나로 꼽히고 있으며 3대 석굴 중에서 가장 예술적 가치가 높으며 섬세하고 아름다운 채색불상도 볼 수 있는 곳이다. 석굴 안에는 당시의 건축양식이나 의상, 액세서리, 음악, 무용 등 여러 가지 재료들을 볼 수 있다.
굴마다 번호가 있는데 이것은 만들어진 순서가 아니라 발굴된 순서로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대표적인 것은 제 20호 굴 안의 거대하고 섬세한 불상으로 한국 역사 교과서에도 소개된 불상이다. 전체 53개 동굴 중에서 제 5굴은 중앙에 운강석굴 최대의 높이인 17m의 좌상이 있으며, 사방 벽에 조각된 크고 작은 불상에 둘러싸여 있다. 제 6굴은 중앙에 15m 방형의 탑 기둥이 우뚝 서 있으며, 벽면에는 빽빽이 불상이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제 7∼19동굴까지 제각기 불상이 조각되어 있는데 중국 전통적 조소에 인도, 아프가니스탄, 페르시아의 예술이 합쳐져 실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현공사(懸空 )
대동에서 운강석굴 다음으로 볼 만한 곳으로 대동에서 남쪽으로 약 75㎞ 떨어진 중국 오악(五岳)의 하나인 항산(恒山)의 산기슭에 세워진 사찰이다. 깎아지른 듯한 암면을 등에 지고 앞에는 깊은 계곡이 아른거리는 절경의 장소에 워졌으며, 예로부터 명소로 인기가 높다. 대들보는 구멍을 파 산 벼랑에 반쯤 꽂고 대들보와 기둥을 교묘하게 이용해 40동의 전당을 다리로 연결하여 지었다. 제일 높은 곳에 세워진 삼교전(三敎殿) 내에는 불교, 도교, 유교의 소상(塑像)이 한데 섞여 모셔져 있다.
구룡벽(九龍壁)
중국에 현존하는 구룡벽은 세 곳이 있는데 그 중 두 곳은 북경(고공박물관과 북해공원)에 있고 남은 하나는 이곳 대동에 있는 것이다. 원래 이곳은 명태조의 13번째 아들인 주계의 살던 집터 고 벽의 길이는 45.5m, 높이 약 8m, 두께가 약 2m인 것으로 보아서 상당히 큰집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파란색과 녹색을 바탕으로 황색, 흰색, 보라색의 5가지 색의 자색청기와로 만들어져 9필의 용이 부조되어 있다.
상,하 화엄사(上,下 華嚴寺)
시 중심에 있는 상,하 화엄사는 요(遼)대(1038년)에 세워졌는데 상사의 대웅전은 1122년 금(金)의 공격을 받아 거의 소실되었다가 금(金)대에 재건된 것인데, 불전으로는 중국 최대의 것이다. 내부는 용이 가득 그려져 있는 천정화(天井畵)와 거대한 벽화의 색채로 매우 산뜻하다. 하사의 천궁루각(天宮樓閣)은 드물게 현존하는 요나라의 목조건물로서 역사적 가치가 높으며, 요대의 31개의 불상은 운강석굴과 함께 대동의 자랑거리이다.
선화사(善化寺)
당나라 시대에 창건되어 금나라 시대인 1128년에 재건된 고찰이다. 경내에는 대웅보전(大雄寶殿), 삼성전(三聖殿), 천왕전(天王殿), 보현각(普賢閣) 등이 있으며 특히 보현각은 구조가 정교하여 매우 아름답다.
목탑사(木塔寺)
대동시에서 남쪽으로 73km 떨어진 응현(應縣)에 있으며 중국에서는 최고의 목조탑인 8각형 9층 (외관은 5층)의 탑이 있다. 높이는 67.13m, 지름은 30m이고 4m의 돌기단 위에 세워져 있으며 대들보나 아치, 트러스 등으로만 짜졌고 정이나 못 등은 전혀 사용되지 않았다. 탑 외면의 편액, 입구 정면의 벽화, 각층 마다 있는 보살과 석가상은 역사적으로나 예술적으로나 그 가치는 높이 평가된다.
태원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로서 북경에서 514km 떨어져 있지만 고속도로가 있어 버스로 약5시간 정도 소요된다. 인구는 244만명이고 면적은 6,988 평방km이며 2,400여년의 역사를 가진 옛도시이다. 황하문명 발원지의 주요한 현장이며 또한 불교의 주요한 명승지이다.
산지가 총면적의 70%를 차지하는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로 비옥한 토지가 많은 태원분지에 위치한다. 晋이 이곳에 도읍을 정한 이래 3,000년간 북방에 대한 군사의 요충지로서 황폐와 재건을 무수히 반복해온 역사깊은 도시이다. 예로부터 흉노족, 몽고족, 여진족 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19세기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어 지금은 인구 1백 96만명의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으며 현재 석탄산업이 발전한 화북지방의 주요 중공업공업기지로 꼽히고 있다. 현지 태원은 마운틴 오토바이를 타는 젊은이와 세련된 여성들로 활기에 차 있으며 일요일이 되면 청소년 고적대가 누비고 다닌다. 이렇게 밝은 분위기의 시가지로부터 옛날 전쟁의 모습은 쉽게 연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박물관을 비롯하여 지금도 도시 곳곳에 남아 있는 사원과 사적이 태원의 역사를 여실히 말해주고 있다. 또 골목 뒤로 한걸음 들어서면 트롤리 버스가 달리고 있는 좁은 길에서 옛날 그대로의 광경을 볼 수 있다. 관광명소로는 높이 54.7m의 쌍탑이 있는 쌍탑사(雙塔寺)와 당나라 때 세워졌던 옛 백마사 유적이 명나라 초기에 재건된 숭선사(崇善寺),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인 숙우[진나라의 개국 제후]를 기념하고자 세운 진사(晋祠) 중국에서 가장 유서 깊은 淨土宗의 사원인 현중사(玄中寺)등은 들려볼 만한 곳이다.
음식 1> 태원두뇌(太原頭腦) 겨울철에만 먹을 수 있는 한방약으로 양고기를 찐 것이다. 교두가(橋頭街)에서 종루가(鐘樓街)쪽으로 가다가 오른쪽 골목길로 들어가면 태원두뇌로 유명한 가게가 있다. 2> 태원에서 남서쪽으로 약 90km 분양현(汾陽縣) 행화촌(杏花)에 있는 분주(汾酒)는 고량(高梁)을 원료로 한 증류주로 이 마을의 특산품이다. 공장 견학을 할 수 있으며 오래된 술의 맛을 볼 수도 있다.
태원은 산서성의 성도로, 예로부터 흉노족, 몽고족, 여진족 등의 침입이 잦았던 곳이다. 19세기부터 공업화가 시작되어 지금은 인구 1백 96만명의 거대한 도시로 성장했으며 현재 석탄산업이 발전한 화북지방의 주요 중공업공업기지로 꼽히고 있다. 관광명소로는 높이 54.7m의 쌍탑이 있는 쌍탑사(雙塔寺)와 당나라 때 세워졌던 옛백마사 유적이 명나라 초기에 재건된 숭선사(崇善寺), 주나라 무왕의 둘째 아들인 숙우[진나라의 개국 제후]를 기념하고자 세운 진사(晋祠) 등은 들려볼 만한 곳이다.
중국 산시성[山西省]의 성도(省都). 인구 약 175만(1991)이다. 펀허강[汾河] 상류의 동쪽과 서쪽이 타이항[太行]산맥·뤼량[呂梁]산맥에 둘러싸인 분지에 위치한다. 도시의 발달은 펀허강 서쪽 연안에서부터 시작하였으며 춘추시대(春秋時代)의 진양(晉陽)에 해당한다. 진(秦)나라 때에는 현(縣)으로서 태원군(太原郡)을 두었고 전·후한(前後漢) 때까지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 후 북위(北魏) 말에는 이주영(爾朱榮)이 이곳을 본거지로 독립하였고, 북제(北齊)가 업()으로 도읍을 옮긴 뒤에는 배도(陪都:國都 외에 설치한 도시)가 되었다. 당(唐)나라 때에는 태원부(太原府)를 설치, 하동절도사(河東節度使)를 주재시켜 돌궐(突厥)의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오대(五代) 때에는 후당(後唐)·후진(後晉)·후한(後漢) 등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현재의 타이위안시 중심부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982년 송(宋)나라의 태종(太宗)이 양곡현(陽曲縣)을 이곳으로 옮겨 병주(幷州)라고 한 뒤 하동로전운사(河東路轉運使)의 치소(治所)를 둔 데서 비롯한다. 또한 명(明)나라 때는 다시 태원부로 고쳤으며, 지금까지 남아 있는 주위 12 km의 성벽은 이 때 축조된 것이다. 명·청 시대 이후 산시성의 성도가 되었고, 1927년 시제(市制)가 실시되었다. 중화민국 성립 후에는 옌시산[閻錫山]이 산시 먼로주의를 제창하고 여기에 반독립정권을 세웠으며, 이와 함께 전성(全省)의 산업·경제가 급속도로 개발되었다.
스타이[石太] 철도로 허베이성[河北省]과, 퉁푸[同蒲] 철도로 네이멍구[內蒙古] 및 허난성[河南省] 방면과 연결된다. 곡물·목화·잎담배 등을 집산하고 구리그릇·제지 등의 전통공업 외에 제철·기계·화학·방적 등의 근대공업도 발달하였다.
관광명소로는 높이 54.7m의 쌍탑이 있는 쌍탑사(雙塔寺)와 당나라 때 세워졌던 옛백마사 유적이 명나라 초기에 재건된 숭선사(崇善寺), 주나라 무의 둘째 아들이며 진나라의 개국 제후인 숙우를 기념하고자 세운 진사(晋祠) 등은 들려볼 만한 곳이다.
오대산
중국 불교 굴지의 성지로서 산서성 북동부에 망해봉, 계월봉, 금수봉, 염두봉, 취암봉 등 다섯 봉이 연봉이어서 오대산이라 불린다. 최성기 당대에는 360여 개의 절이 세워졌으며 현재는 태회진을 중심으로 47개의 절이 있으며 중국 각지로부터 신도들이 참배하려 몰려든다.
볼거리로는 절밖에 없는데, 태원에서 태회진으로 가는 도중에 있으며 목조 건축으로서는 중국 최고의 정전이 있는 남선사(南禪寺)와 당의 건축이 지금도 남아있으며 망상, 벽화, 묵적 등이 있는 불광사(佛光寺), 석가모니의 사리탑, 문수보살 등 네 보살과 석가상이 안치되어 있는 탑원사(塔阮寺), 문수보살이 살았다는 보살정(菩薩頂) 등 불교와 관련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본래 신선도(神仙道)의 신도에 의해서 개발되어 5세기 무렵부터 화엄경에 나오는 문수보살(文殊菩薩)의 거주지인 청량산(淸凉山)에 해당한다고 믿어 어메이산[峨嵋山:普賢의 靈地]·푸퉈산[普陀山:觀音의 靈地]과 함께 중국 불교의 3대 영산(靈山)으로 숭상되어 중국 외에 인도나 그 밖의 지역에서도 불교도가 순례하는 영지가 되었다. 원대(元代)에는 라마교가 들어왔으나 청대(淸代)에 이르자 몽골족과 티베트족에 대한 대책으로 특히 라마교를 중시하여 이곳을 중심지로 삼았다. 우타이산의 불교는 선종(禪宗)·라마교 외에 19세기 말부터 일어난 선제(善濟)화상 등의 불교회(佛敎會)의 세력도 크다. 현재 산중에는 100여 개의 사묘(寺廟)가 있으며, 그 중 특히 유명한 것은 라마계의 전하이사[鎭海寺]와 포광사[佛光寺]이다. 포광사의 본전(本殿)은 857년 건립된 것으로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특히 신라의 혜초(慧超)가 이 산의 건원보리사(乾元菩提寺)에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은 중국 목화재배의 북한(北限)에 해당하며, 밀·수수·조·채소 등을 생산하고, 석탄·규석·연석(硯石) 등을 산출한다. 그 밖에 양모직물과 도자기공업이 활기를 띠고 있다.
관작루( 雀樓)
산서성 평양(平陽)부 포주(浦州)의 성북에 있는 3층 루각. 동남으로 중조산, 눈 아래 황하가 굽어 보이는 명승지.
규수( 水)
산서성 영제(永濟)현 남방. 순 임금이 태어난 곳이라 한다. 순은 야생코끼리를 길들여 밭을 갈았다고 하는데 규( )지에 위(爲)변이 있는 것도 그가 코끼리를 훈련시켰다는 전설과 관계가 있다고 한다.
대(代)
산서성 북부 호다( 다)강 연안에 있는 소도시. 오대산의 서북서 50킬로에 있으며 부근은 농산물 시장이 선다. 전국시대 이래 조(趙)나라의 영토이었던 곳이다. 안문관월(雁門關越)의 소도시로 대원, 대동(大同)의 사이에서 번영하였다.
대동(大同)
산서성의 북부. 옛 이름은 운주(雲州), 평성(平城). 북위의 옛 서울. 군사, 경제, 교통의 요지이며 상건(桑乾)분지의 농축산물의 집산지이다. 사적(事蹟)이 많고 서남쪽에는 탄전지대이며 서쪽 15킬로에 있는 운강석굴(雲崗石窟)의 불상이 유명하다.
벽제천( 泉)
산서성 대동부의 염주에 있는 샘. 여기서 호인(胡人)들이 말에 물을 먹였다고 한다.
분수(汾水)
산서성을 남쪽으로 가로질러 황하로 들어가는 강. 분하(汾河)라고도 한다. 황하지류중 최대의 것으로 산서성의 북부, 관잠산(管 山)에서 발원하여 정락(靜樂), 태원등을 지나 황하에 합류한다. 수정(水程)은 길지만, 뱃길은 강주(絳州)까지 통한다.
분양(汾陽)
산서성의 서북, 태원분지 서단의 도시. 교통의 중심지이며 부근은 토지가 기름지고 농산물이 풍부하다. 섬서성의 북부, 산서성의 남부에서 산출되는 물자의 집산지이며 분주(汾酒)를 특산한다.
불궁사(佛宮寺)
산서성 웅현에 있고 요나라때 건조된 절. 8각 9층 목탑이 있고, 첫층에 상계(裳階)가 있어 그 1변은 1,239센티이다. 높이는 약 115미터에 이른다. 중국의 목조건물중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다. (응(應)현에 있다.)
석불사(石佛寺)
산서성 대동의 서쪽 교외에서 약 11킬로 떨어진 운강(雲崗)의 암벽에 있는 석굴. 석굴사라고도 한다. 수백의 석굴이 있는데 제 1, 제 2, 제 3의 3구로 나뉘며, 큰 것은 제 1구에 4굴, 제 2구에 9굴, 제 3구에 7굴이 있어서 이들의 상하 죄우에는 무수한 소감(小龕)이 이루어졌고, 그 내부에는 무수한 석불이 조각되었는데 그 길이는 약 450미터에 달한다. 북위 문제때 사문(沙門) 운요(雲曜)가 만들기 시작한 것으로서 수나라 말기에서 당나라 초기까지 계속하여 판 것이라 한다.
부강(釜岡)
산서성 태원현에 있다. 전설에 의하면 태양신 염제는 약초에 관심이 많아 그 자신이 각종 약초의 맛을 보았다고 한다. 그 때문에 그는 하루에도 70번씩 중독이 되었다고 한다. 부강에는 그 당시 그가 약을 맛보았다고 하는 솥이 있다.
성양산(成陽山)
산서성 태원현에 있다. 염제(신농씨:神農氏)가 자편( 鞭)이라고 하는 일종의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종의 약초를 채찍질하였다고 한다. 이들 약초는 채찍질을 가하게 되면 독성의 여부나 약효등이 자연히 나타나게 되었다. 성양산에는 그가 약초를 채찍질했다고 하는 곳이 있다. 그래서 이 산을 신농원약초산(神農原藥草山)이라고도 부른다.
수양산(首陽山)
산서성의 남부에 있는 산. 수산(首山), 뇌수산(雷首山), 중조산(中條山), 포산(蒲山), 역산(曆山)등의 이명이 있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가 수양산밑에서 굶어 죽었다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산신은 길신(吉神) 태봉(泰逢)이다.
안문(雁門)
관소의 이름. 산서성 북부, 대(代)현의 서북인 안문산 위에 있다.
안읍(安邑)
산서성 남부의 성. 운성(雲城)이라고도 한다. 부근에는 유명한 하동염(河東鹽) 산지가 있어서 그 소금의 집산지이다. 우의 도읍지였던 안읍과 위(魏)의 도읍지였던 안읍은 모두 이 근처이다.
망향대(望鄕臺)
안읍의 성남 문밖에 있는 누각. 우임금의 부인인 도산(塗山)의 여교(女嬌)가 안읍에서 고국을 그리워하여 우가 누각을 지어주고는 적적하거나 무료할 때 이곳에 올라 고향을 그리워 하게 했다고 한다.
명조(鳴條)
산서성 안읍현. 하의 걸(桀)왕이 탕왕에 쫓겨 총희 말희( 喜)와 함께 피신한 곳.
살호구(殺虎口)
산서성 삭평(朔平)의 북방 20리 지점에 있는 도시. 만리장성의 한 관문으로 험요(險要)하다.
안탑사(雁塔寺)
산서성 의씨(依氏)현에 있다. 쌍탑이 유명하다.
오대산(五臺山)
산서성 북동부에 있는 불교의 명산. 최고봉은 북대(北臺)의 두봉(斗峯)으로 삼천사십척이라 한다. 문수보살이 수도하던 청량산(淸凉山)에 해당한다고 여겨지며 아미산, 보타산(普陀洛伽:보타락가)와 구화산과 함께 불교 4대영산으로 꼽힌다. 오대란 중대의 취암봉(翠岩峯), 동대의 망해봉(望海峯), 남대의 천수봉(천繡峯), 서대의 괘월봉(掛月峯), 북대의 두봉을 말하며 대회진(臺懷鎭)의 현통사(顯通寺)가 유명하다.
운강석굴(雲崗石窟)
산서성 대동의 서방 약 20킬로 지점에 있는 북위의 석굴. 대동의 석불로서 유명하다. 무주강(武周江)의 남쪽에 있는 단애에 새긴 것으로 대소 40수 개의 석굴이 동서 1킬로에 걸쳐 산재하여 있다. 제 1기는 대굴, 제 2기는 중굴. 제 1기 초기의 석불은 풍부한 육체로 얼굴 표현도 야성적이다. 소박한 생활력의 표현, 건축적 구조, 장식적 의장은 서방적이다. 석질은 백사암(白砂巖)이다.
용문산(龍門山)
산서성과 섬서성의 경계에 있는 산. 예로부터 등용문, 신가백배(身價百培)라는 말로 유명하거니와 용문산이라고 불려진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옛날 강이나 바다에서 노닐던 고기떼는 매년 일정한 시간만 되면 이곳 용문산의 절벽 밑에까지 모여들어 높이뛰기 시합을 벌이는 것이다. 그런데 그 절벽을 넘으면 승천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하면 여전히 물고기로 남을 수밖에 없다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는 용문의 근처에 이어동(魚里魚洞)이라고 하는 계곡이 있는데 이곳에는 잉어가 많이 살았다고 한다. 이들은 동굴에서 빠져나와 3개월 동안이나 역류를 거슬러 용문의 상류로 가게 되는데 용문을 넘으면 용이 될 수 있지만 넘지 못하면 그냥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고 한다. 신화에 의하면 용문산은 여량산(呂梁山)의 산맥과 접하였는데 이 산이 마침 황하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에 우임금이 용문산을 두조각으로 동강내고 말았다. 그러자 이 산은 마치 대문을 연 듯 강의 양쪽에 위치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황하는 절벽사이를 급류를 형성하면서 흐르게 되었다고 한다.
장치(長治)
산서성 동남부의 도시. 로안(潞安), 상당(上黨)이라고도 한다. 당삼(黨參:上黨産의 약용인삼), 못(못)은 옛부터 특산이다.
천룡산(天龍山)
산서성 태원의 서남 17킬로 지점에 있는 동위에서 북제, 수, 당, 대를 걸쳐 조영된 석굴. 진사진(晉祠鎭) 서쪽의 산중에 있다. 동위의 건조에 대하여서는 불명하나, 북위가 동서로 분열하여 용문의 석굴이 일시는 쇠퇴되었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한다. 제 2동, 제 3동이 가장 고식으로 동위식인데 북제의 굴은 제 10동과 제 16동이고 3벽에 아취모양의 공감(公龕)을 부조하고 5존상이 들어 있다.
태원(太原)
산서성의 성도. 분하(汾河)상류에 있는 천연적 요새지로 양곡, 태원, 문수, 교성등 인근 십현을 관할하는 관청소재지이며, 하북, 산서지방 일대의 요충지이다. 시가는 14킬로의 성벽으로 둘러 싸였으며 그 안에 내성도 있다. 춘추시대로부터 진양(晉陽)으로 알려졌고 성내에 진사(晉祠), 낭자관(娘子關)등의 명승지가 있다. 거리는 산지사방에서 모여드는 객상, 유람객들 그리고 온갖 사람과 수레와 기마로 붐비고 길 양옆은 주루, 찻집, 형형색색의 점포등 번잡하고 호화롭기 그지 없었다. 특히 성의 남쪽에 있는 취선루는 유명한 객점이다.
태행산(太行山)
산서성 진성(晉城)현 남방의 태행산을 주봉으로 하여 서는 분수(汾水), 동은 갈석(碣石)에 이르는 산맥. 거의 남북으로 달리고, 산서성과 하남, 하북 두 성의 경계를 이루고, 만리장성 근방에서 대흥안령의 남단으로 연결된다. 회남자(淮南子)에서 오행지산(五行之山)이라 불리며, 열자(列子)에서 대형(大形)이라 불리운 천하의 허리라고 일컬어지는 수 천리의 대산맥이다. 태행산은 전설에 의하면 왕옥산(王屋山)과 맞붙어 있었는데 통행이 불편하여 과아씨( 娥氏)의 두 아들이 태행산은 삭동(朔東)으로, 왕옥산은 옹남(雍南)으로 갈라놓았다는 우공이산(愚公離山)의 신화가 있다. 태행산 일천리(太行山一千里)라 할만큼 거대하다.
평양(平陽)
산서성 남부에 있는 도시. 웅대한 성곽이 있으나 성내는 논밭이 많다. 이곳은 옛날 요임금이 도읍한 곳이라고 전해지며 지금도 그 사묘(社廟)가 있다.
평정(平定)
산서성 동부의 도시. 상, 하의 2성이 있으며 성 경계의 요지였다. 도자기가 성하며 정요(定窯)는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풍릉도(風陵渡)
산서성 남서 경계의 도시. 황하를 사이에 두고 동관(潼關)과 대립한다. 황하에 주교(舟橋)가 있어 왕래가 손쉽다.
항산(恒山)
오악중의 북악. 내장성(內長城) 혼원(渾源)현에 있으며 높이는 이천이백십구척. 최고봉은 천봉령(天峯嶺). 태상노군(太上老君), 옥황대제(玉皇大帝), 원시천존(元始天尊)을 모시는 도관이 많고 현공사(縣空寺)가 유명하다. 산기슭에 북악묘(北岳廟)가 있고 일명 상산(常山)이라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이곳에 거대한 새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새매) 네 마리의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 그들은 고향이 광야와 하늘임을 어미가 알고 있어 더 이상 그들을 곁에 둘 수도 없어 슬피 울기만 할 뿐이었다. 이때 그의 울음소리는 천지를 진동시켰다고 한다.
해현(解縣)
산서성이 있는 현. 황제가 치우를 쫓아가 죽인 곳이라 한다.
[투자 환경]
산지가 많고 사회간접시설이 미약한 실정이기 때문에 물류비용의 많이 드는 高重量상품의 생산투자는 다소 부적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반시민의 소득수준이 낮아서 내수시장을 겨냥한 진출에도 다소 어려울 것이라 전망된다. 다만, 석탄과 보오크사이트 등의 천연자원이 풍부한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고, 제련기술도 발달하여 천연자원을 이용한 자원개발산업으로의 진출은 비교적 사업성이 있는 것으로 전망된다.
1. 자연환경
- 위치: 화북평원의 서쪽에 펼쳐진 황토고원상에 위치하며, 太行山 서쪽에 위치하여 山西로 불리우고 있음. 省都는 太原市.
- 기후: 대륙성 계절풍 기후(연평균 기온: 5-10℃, 연간 강우량 400-600mm로 연강우량의 60%이상이 7, 8, 9월에 집중되어 있고, 연강우량의 현격한 격차로 인해 농업생산에는 불리한 조건임)
- 지형: 동북에서 서남을 향하여 경사되어 있고, 고저의 차이가 심함. 전체적으로 黃土로 덮여 있어 山西高原이라 통침됨.
- 인구: 3080만명(95년 통계로 중국 전체인구의 2.5%)
2. 경제개황
- 총생산: 1,093억元(95년 기준으로 중국전체의 1.9%)
- 분석: 중국 최고의 석탄 매장량을 바탕으로 석탄 채굴, 가공업과 이를 활용한 에너지 공업이 크게 발전되어 전력을 北京, 天津 등에 공급하고 있다. 그러나 수자원이 크게 부족하여 경제발전에 커다란 장애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3. 교통
- 철도: 太原, 大同, 候馬 등의 주요도시는 省내 간선철도로 연결되어 있음. 京太線(北京-太原), 太焦線(太原-河南省 焦作), 太秦線(太原-河北省 秦皇島)을 통해 인근 省과 연결되어 있음
- 도로: 大同-運城간 도로를 중심으로 省내 각 지역을 잇는 간선도로망이 형성되어 있음.
- 항공: 太原공항은 현대적인 공항의 면모를 갖추어 省정부는 국제공항으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으나, 중앙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지 못한 상태임. 현재 철도, 도로, 항공을 이용한 종합운송망이 형성되어 있으나, 상태는 전반적으로 양호한 상태는 아니어서 省정부는 이를 省경제발전의 장애로 생각하고, 도로정비와 확대를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산업구조]
산서성은 중국의 에너지 및 화공기지로 중국의 경제발전에 막대한 기여를 한 지역이다.산서성은 "3개기초 4개중점" 즉 농업기초,기초시설,기초공업,석탄채굴,전기수송,용수,도로 등 중점건설을 진행하여 경제성장을 이끄는데 노력하였다.
太舊고속도로는 총길이가 144km로 산서성 성도 태원으로부터 하북성과 인접된 舊關까지이며 동쪽은 청도와 연결되고 북쪽은 북경과 연결되였으며 서쪽은 영하회족자치구의 은천까지 연결되어 있다.
引黃入晉공정을 통해 황하의 물을 산서성경내로 끌어옴으로써 산서성의 물부족문제를 해결하였을뿐만아니라 전력공급문제도 해결하여 산서성뿐만아니라 전국의 경제발전에도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였다.
산서성은 중국에서 석탄매장량이 가장 많은 성으로서 煤都로 불리우고 있다.운송능력의 제한으로 인해 석탄운송량이 생산량을 따라가지 못하고 또한 운송과정의 소모량과 환경오염문제를 고려하여 산서성 정부는 경내에서 전기에너지로 전환한다는 계획하에 양성(陽城)발전소(열발전소)를 건설하였다. 매년 강소성으로 100여억㎾의 전기를 공급하고 있으며 산동,하북,북경,천진,당산등 성시로 매년 1400여만톤의 석탄을 경내에서 전기에너지로 전환하여 공급함으로써 석탄공급의 소모를 감소시켰다.
대형 기업들로는 중국 최대 특종 강철생산기지인 태원강철집단공사,"아시아복합비료의 왕"으로 불리우는 산서탠지(天脊)석탄화공집단공사등이 있다.
산서성은 또한 유구한 역사로 말미암아 명승고적이 매우 많이 남아있다. 불교성지 오대산,황하후커우(壺口)폭포,대동운강석굴,헝산(恒山)풍경구,평요고성(平遙古城),운성관제묘(運城關帝廟),진사(晉祠),영제보구사(永濟普救寺),기현민속박물관(祈縣民俗博物館)을 비롯한 30여개의 명승고적이 있다.이로써 연간 12만이상의 국외관광객을 유인, 3820억元의 외화수입을 기록하였다.
[시장규모 및 특성]
시장규모
1998년 산서성의 사회소비품소매총액은 547.1억元을 기록하여 8.57%증가하였다.하지만 전국적으로 볼 때 주요 성시 31개중 21위로 시장규모가 상대적으로 작다.
특성
산서성 도시주민의 연평균 일인당 생활비 수입은 4098元으로 31개 주요 성시중 30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소비지출은 3267元이다. 소비구조를 보면 식품구매에 1413元, 의류구매에 470元,가전구입에 236元,의료보건에 195元,교통과 통신비용에 137元,문화오락지출로 365元을 소비하였다.
[경제동향 및 전망]
경제동향
농업의 경우 생산과잉으로 돼지고기,계란,기름 등의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농민수입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업의 경우 중공업의 발전이 경공업보다 빠르고 지방기업의 발전이 중앙직속기업의 발전보다 빠르며 주식제,주식합작게기업의 발전이 국유기업보다 빠른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공업제품생산판매율은 96%에 이르며 공업경기상황도 98년이후 개선되고 있다.99년 1~8월까지의 소비품소매총액은 369.7억元으로 전년동기대비7.8% 증가하였다.소비품 물가지수는 년초부터 계속 하락세를 보이다가 6월에 급등하여 물가인상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고정자산투자는 98년 동기대비 18% 증가하였는데 이중 부동산투자가 가장 많이 증가하였고 지방별 투자가 급속히 성장하는 추세를 보였다. 산서성 23개 중점프로젝트도 고정자산투자의 증가로 인해 비교적빠른 진전을 가져왔으며 99년 1~8월까지 수출입총액은 8.4억달러로 전년동기대비 19.8%증가하였고 이중 수출이 5.5억달러로 전년동기대비 4.6%, 수입은 2.9억달러로 전년동기대비 128.2% 증가하였다.
경제전망
에너지공업과 중공업을 위주로 하는 산서성은 국유기업의 구조조정과 산업다원화를 목표로 개혁을 가속화하고 있으며 국유기업상장,기술개조, 채권의 주식전환,외자이용 확대를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하고 있다.수출확대를 위해 수출상품구조를 조정하고 기술함유량이 높은 수출제품으로 전통적인 제품을 대체시키며 수출기업을 위한 지원을 강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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