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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경의 관내인 탑들(탑평.중원경)에서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흘러드는 달래강을 건너 동쪽으로 이십 여리 떨어진 곳에 제법 여러 개의 민가가 모여 사는 촌락이 있었다.
동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계명산에서 발원한 안림천(교현천)이 흘러내려 와서는 이 촌락을 한참 지나는 지점에서, 금봉산(남산)과 대림산에서 발원한 사천(충주천)과 비로소 합세하여 서쪽의 달천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 두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안쪽으로 너른 들판이 있고, 동쪽의 들판 뒤쪽으로 야트막한 구릉들이 서로 고만고만한 행색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들판과 구릉의 경계지점에 길게 늘어서서 촌락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안골(현 관아공원 일대. 성내동)이라 불렀다.
장대한 금강송이 군락을 이룬 숲 안쪽으로 비록 지붕은 초가를 얹었으나 크기가 장원이라 불러도 될 성싶은 커다란 대저택이 놓여있었고, 그 집 담벼락 어딘가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연실 울려나왔다.
쉬익. 쉬익.
팍. 파팍.
담벼락 옆에 서서 잡목 숲 안쪽으로 과녁을 설치해 놓고 연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젊은 사내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번뜩이는 눈동자에서는 얼핏 살기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이 영감탱이. 두고 봐라. 내가 이 치욕을 반듯이 몇 갑절로 되갚아주고야 말리라. 기필코 본때를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빠드득.
분함이 극도로 치솟았음 때문인지 이제는 눈자위마저 벌겋게 핏줄이 서고 있었고 이마저 갈고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해 오로지 활쏘기에만 몰두하였음인지 젊은 사내는 바로 등 뒤에까지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난 여인이 헛기침 소리를 내자 비로소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이 받쳐 든 작은 소반위에는 호리병에 담긴 탁배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침개와 술잔이 놓여있었다.
“어 어머님. 아직 바람이 찬데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옆에 놓여있는 넓적한 바위위에 소반을 내려놓고서는 잔을 들어 사내에게 권했다.
“적적하셔서 나오셨습니까? 소자 활쏘기에 전념하다보니 어머님 오시는 것도 몰랐습니다. 어머님께서 먼저 소자의 잔을 한잔 받으시지요.”
사내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표정을 바꾸어보려 하였으나 여전히 어색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초로의 어머니는 묵묵히 그런 아들을 응시하면서 여전히 잔을 들어 건네고 있었다. 마지못해 아들은 어머니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었다. 이내 술잔에 술이 가득 차는 것을 기다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서운하다 못해 분하였더냐?”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아들이 손을 떨어 술을 쏟았다.
“분하다니요? 어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내가 낳은 자식인데 어미가 자식의 속을 어찌 모르겠느냐?”
“아....... 아니옵니다. 어머님. 아무 일도 없사오니 부디 걱정을 놓으세요.”
“네 아버지는 큰 일 일수록 차분하게 주변의 정황을 잘 살피고 최종의 판단을 아주 냉철하게 내리던 분이셨다. 하여 그릇된 결정을 내리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분이셨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방법을 찾아내시곤 하셨지. 하지만 닥친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이라 판단되시면 그 즉시 혼자 가슴속에 꿀꺽 삼켜버리시고 그 일을 다시 꺼내 재론하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하지만 타고난 근골이 허약하여 일찍 돌아가시면서 까지 자식 대에서만은 기필코 강건한 아들이 태어나 유씨(劉氏) 가문을 반듯하게 일으켜 세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으셨다. 그 바람이 헛되지 않았음인지 네가 아들로 태어났고, 어디에 내놓아도 견주어 뒤떨어질 것이 없는 건장한 남자로 자라났으니 네 아버지의 소원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무방하겠으나............ 이 어미가 보기에는 젊은 혈기만 왕성할 뿐 주변의 벌어진 일에 대처하는 분별력이나 냉정한 판단에 있어서는 아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듯 느껴지니 그것이 커다란 걱정이로구나. 부디 무술정진이나 사냥에 열중하는 만큼, 책을 읽고 명상을 하면서 자신의 속을 채워나가는데 더욱 정진하였으면 싶구나.”
“네 어머님. 소자가 노력을 한다 한들 어찌 아버님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단히 노력하여서 적어도 어머님의 기대에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자도 이제 중년에 접어든 어엿한 유씨 문중의 가장이옵니다.”
“오늘 아침에....... 그동안 네가 몹시 공들였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분통이 터졌을 것이야. 암. 그 같은 경우에 분함마저 솟구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느냐? 어찌 보자면 밖의 일이요, 또 사내들의 일이라 하겠으나........... 그분은 어찌되었던 네게는 숙부가 되시는 어른인 것이다. 종국에 남들 이목으로 보자면 유씨 문중의 집안싸움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이다. 네 아버지가 살아계시면서도 그 같이 유사한 경우를 숱하게 겪으셨지만, 어떤 경우에도 집안싸움은 피하고 막으셨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 천기를 살피고, 그에 순응하면서 때를 기다릴 줄도 아는 것이 이 어미가 보기에는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 같구나. 정녕 네가 가슴에 품은 뜻이 있고 그것을 이룰 야망이 있다면 당장 눈앞의 작은 것에 현혹되는 일들은 삼가여야만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님. 소자가 잠시 분을 참지 못하여 어머님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 놓으시옵소서.”
“내 아들 긍달(劉兢達)아, 네가 우리 유씨 문중의 희망이자 기둥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너의 부친이 하늘에서 항상 내려다보고 계신다.”
“네. 어머님.”
비로소 마음이 놓이셨는지 어머니의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담장너머 안채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여왔다.
“누가 찾아왔는가 보구나.”
“권열(劉權說) 아우가 왔을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좀 알아보라고 보냈거든요.”
“그랬구나. 네가 친동생처럼 권열이도 잘 좀 보살피도록 하여라. 권열이의 부친인 작은 당숙께도 우리집안이 신세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니........... 또 듣자니 권열이가 무술이 인근에서 으뜸이라는 소리도 들리더구나. 아무쪼록 너나 권열이나 그 뜨거운 혈기를 잘 추슬러서 부디 유익한 일에 쓰기를 어미는 바란다. 그럼 내가 들어가서 저들을 이리로 보내주마.”
어머니가 황토담장 길을 돌아 안채로 들어가시는 듯싶게,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들 서넛이 활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긍달 형님. 말씀하신대로 탑들에 들러 요모조모 살피고 왔습니다.”
“권열이 네가 고생했다. 자네들도 모두. 그래 오촌당숙은 만나 뵈었느냐?”
“만나 뵙지 못하였습니다. 물어보니 관아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분명 우리인줄 알고 부러 피하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랬겠지. 그렇다 치고......... 우리에게 배당된 선철(銑鐵)이 얼마나 된다 하더냐?”
“그게........ 없었습니다.”
“없다니? 마지못해 개뼈다귀 하나 던져주는 시늉으로라도 어느 정도는 줬을 것이 아니냐?”
“재차 확인을 하였습니다만, 우리에게 배당된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배정될 것이라 여겼던 물건이 모두 응골 노인네 상단으로 배정되어있었습니다.”
“이런 쳐 죽일 놈을. 상단에 점포 하나 내준다고 가져간 것이 얼마며, 철광석을 달라니까 관에 규제가 심해서 정식 절차를 밟아 선철을 배당해 준다고 해서 또 가져간 것이 얼마냐? 말이 좋아 숙부이지 미천한 핏줄을 가진 주제에 감히 유씨라고 거들먹거리는 꼴이라니, 갈기갈기 찢어 들판에 내던져 짐승의 먹이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인간이 아니겠느냐? 이런 작자가 어찌하여 너와 나의 아버지와 한 형제란 말이냐? 남에게도 이렇게 까지는 못할 짓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단 말이냐?”
“형님. 어찌 우리와 같은 핏줄이라 하십니까? 형님과 저는 할아버지에게 난 한 핏줄이 분명하오만, 그 영감탱이는 할아버지께서 노년에 작부 하나를 잘못 건드려서 태어난 한낮 거랑말코가 아니겠습니까? 숙부는 무슨 썩어빠진 숙부? 이참에 아예 정리를 해 버리십시다.”
“당장은 안 된다. 그 영감탱이와 일을 주변에서 다들 알고 있는데, 대놓고 우리가 저질렀네 하고 일을 벌일 수야 없지 않겠느냐? 또 그 영감이 어디 보통내기냐? 우리에게 온갖 못된 짓은 다 하면서도 뒤가 켕겨서 무엇인가 꼼수를 미리 계산하고 있을 것이야.”
“저도 그 생각은 했습니다. 무엇인가 꼭 꼭 감추어 놓은 속내가 무엇인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것이라고.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입니다. 어차피 영감이 죽든 우리 형제가 죽든 반듯이 끝장은 봐야할까 봅니다.”
“그래. 끝장은 봐야 할 것이야.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결론으로 기필코......... 아니 되겠다. 다른 동생들도 모두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이럴 순 없지. 가까운 주막에라도 나가자. 거나하게 한잔 마셔보자. 방금 전에 어머님께서 걱정을 하고 들어가셨는데 이 상황에 집에서 술상을 차리기엔 좀 그렇지 않겠느냐?”
“큰어머니께서 제게도 몇 가지 당부를 하시더군요.”
“그래. 우린 형제니까. 자 다들 함께 나가자.”
긍달과 권열 형제가 분노하고 있는 숙부는 바로 외여갑당(外餘甲幢)의 당주(幢主)를 맡고 있는 유신웅(劉伸雄)이었다.
“그래. 그놈들이 찾아왔더란 말이지? 내 미리 그럴 줄을 알고 있었느니라. 아예 호되게 호통이라도 쳐서 보낼 것이지?”
“아무리 그렇기로 당주님의 조카들인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거드름을 피우는 듯 대하여 심히 모멸감을 좀 느꼈을 것입니다.”
“조카는 무슨 조카?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이만저만해서 내가 좀 살만하다 싶으니까 어떻게든 뜯어먹자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놈들이지. 앞으로도 아예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나타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내쫒아 버리라고. 알겠는가? 핏줄은 무슨 핏줄?”
“알겠습니다. 다음번엔 아예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쳐놓겠습니다. 당주님.”
외여갑당 당주 유신웅.
이름만으로 치자면 제법 그럴듯해 보였으나 기실은 전혀 보잘것없는 미관말직인 셈이었다.
중앙의 행정 군사력이 지방의 속속들이 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게 된 신라 하대에는, 지방의 행정관이 곧 군사지휘권까지를 가지고 통치를 병행하도록 하였으며, 부족 되는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거주지의 농민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까지는 보완을 하고자 하였다. 하여 그저 농사나 짓는 농민들로 몇몇의 별도 부대에 편성하였는데, 외여갑당의 경우도 이에 해당하였다. 해당 거주지의 농민 중에서 돌팔매질에 소질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서 대략 52명 정도를 한 부대로 묶어 농민군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 바로 외여갑당인 것이다. 허울뿐인 명목상의 농민군 편재였던 것이다.
애초 유신웅은 긍달과 권열 형제 할아버지의 삼남 일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남 일녀가 본부인의 소생인 반면, 신웅은 할아버지가 노년에 잠시 데리고 놀던 기녀의 몸에서 뒤늦게 태어났던 것이다.
아버지는 늙었어도 명색이 나름 지방의 이름 있는 토호였으나 기녀의 몸을 통해 어쩌다 세상에 태어난 신웅은 한마디로 천덕꾸러기였다. 기녀와 늦바람이 났다가 저절로 생겨난 신웅을 아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처지이다 보니 아비의 본부인 또한 신웅을 어여삐 볼 리가 만무하였다. 거기에다 생모마저 돌림병으로 일찍 죽고 나니 신웅의 유년시절은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급기야 신웅은 거리의 불량배가 되어있었다. 아비가 죽고 이복큰형이 집안의 가장이 되자 신웅의 신세는 하루아침에 변하게 되었다. 나이차가 제법 나는 막내를 불쌍하게 여긴 큰형은 신웅을 집안에 들이고 같은 형제로서 유씨 가문의 재산과 복을 나눌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저자거리의 이전투구와 노름과 계집질에 빠져본 신웅으로서는 그 같은 형제들의 호의를 이용해 더욱 못된 짓만을 일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속내 한편으로는 그런 자신의 행위가 아비와 유씨 가문에 대한 복수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견디다 못한 형제들은 마침내 신웅과 의절하기로 하고 어느 정도의 살림밑천을 주어 가문 밖으로 내쳤다. 그나마 가지고 나온 밑천마저 바닥이 드러나자, 신웅은 수하 여럿을 거느리고 몰려다니며 온갖 악행을 일삼는 중원경의 골칫거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신라 하대의 혼란을 틈타 각 곳에서 약탈과 방화 등을 일삼는 무리가 생겨났고,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를 느껴 마침내 중원경에도 농민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는데, 평소 남들과 다르게 유독 돌팔매질에 솜씨가 남달랐던 신웅이, 제 스스로가 불량배였음에도 불량배를 소탕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외여갑당에 가입하였고, 거기에 평소 그의 행태를 눈여겨보던 신라의 한 고관대작 집안사람의 천거로 당주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52명에 달하는 허울뿐인 외여갑당의 당주였으나, 오래지않아 대다수의 당원을 자신의 수하로 채우고, 항시 함께 몰려다니며 온갖 작태를 꾸며내는 그에게 대적할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신세가 크게 변한 것이다.
신라 하대의 중원경.
신라는 이미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어 변방의 곳곳을 재대로 다스리기에 역부족해 보였고, 일부 지방의 호족과 신흥 세력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의 한복판처럼 느껴졌다.
허물어져가는 왕조이기는 하지만 중원경은 분명 아직은 신라의 영토이며 통치하에 있었다.
서라벌을 뿌리로 한 통치권을 가진 일부 귀족과 권문세가가 엄연히 존재했다. 그리고 이 혼란한 시국을 틈타 귀족과 권문세가를 제외하고도 실제 중원경을 차지하고 있는 실세들이 분명 존재하였는데, 그중 가장 두드러지게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한 자들을 꼽자면 가장먼저 답들(탑평리)의 상단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상권을 거머쥔 자들이 있었다. 서해로 통하는 한강을 이용하여 수운을 통해 이들이 거둬들이고 있는 대국인 당나라와 교역을 하여 벌어들이는 이권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금권이 권력과 수시로 결탁하니 이들의 세력 또한 그리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이 지역의 토착민으로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유민들을 받아들여 장원을 이루고 있는 토호(토착지주)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하든 탑평리로 진출하여 상권을 획득하거나 신라의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기를 갈망하였다. 유긍달의 유씨 가문이나 어씨 가문, 또 지씨 가문이 그러한 경우였다.
그 다음으로는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세력의 부상이었다.
먼 지방의 관리였거나 군에 나가있던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자들이,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혼란이 일자 주위의 무리들을 모아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시작은 도적떼나 강도무리였다가 어느 정도 규모와 세력을 갖추게 되면 화적패의 옷을 벗어버리고, 어엿하게 고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들어앉아 점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때를 기다리는 부류였다. 이런 부류로 중원경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려내고 세력권을 넓혀가는 자로서는 신훤(申煊)이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훤의 패거리 또한 그 누구도 쉽게 보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런 혼란을 틈 탄 군웅활거의 시대 속에서 저자거리의 불량배에서 시작하여 비록 허울뿐인 외여갑당의 당주라는 지위를 차지하고 서서히 사람을 불러 모아 자신의 세력을 넓혀가고 있는 그로서는 이제 어느 정도 나름의 기틀을 잡았다고 생각한 유신웅이었으니, 그는 지금 탑들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기방에서 술잔을 들으면서 음흉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장. 대장. 어디 계시유? 변고요 변고. 어서 나와 보시유.”
문밖이 왁자지껄 하더니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다. 유신웅은 그것이 자신의 수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들갑을 떨기는. 이놈아. 그래 무슨 변고냐? 춘삼월 매화나무에 감이라도 열렸단 말이더냐?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들어와 목이나 축이어라.”
“대장. 당장 나와 보시라니까유? 불이 타올랐어유. 장미산에 커다란 불꽃이 타올랐어유. 봉수대도 아닌데 불이 타올랐다니까유?”
“뭐라고? 장미산에 산불이 났단 말이냐? 어디, 어디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냐?”
“산불은 아닌 것 같어유. 누군가가 산성에다 불을 피웠나봐유?”
“산성에 불을 피우다니? 방화란 말이냐? 누가?”
유신웅은 서둘다 보니 맨발로 마당을 뛰어나갔다.
너른 탑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북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장미산자락에 우뚝 솟은 장미산성 성곽위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 다음으로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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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상문은 끝자락에 써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