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을 얻은 사람들 6 /무불 ♧
- 대혜스님 -
대혜 스님
대혜 스님(1089-1163) 속성은 해씨(奚氏)이다. 송나라 고종원우(哲宗元祐)
4년 11월 10일에 태어났다. 그 어머니는 꿈속에서 신이(神異)한 모습을
보았다고 하였다.
13세 때에 향교에서 친구와 함께 장난을 치다가 스승의 사모(帽)를
망가뜨려 변상해주고 집에 돌아와서,
"대장부가 세간의 책을 읽는 것보다는 출세간의 법을 연구하는 것이 더
낫겠다."
라고 생각하고 그때부터 출가를 결심하였다.
16세에 어머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출가하였다. 동산(東山)의 혜운원(慧雲
院)에 가서 혜제(慧濟)에게 삭발하고 17세에 구족계를 받아 비구승의 자격
을 갖추었다.
그로부터 편역(遍歷)하면서 제가(諸家)의 어록을 열람하였다. 특히 운문(雲
門)과 목주(睦州)의 어록을 애독하였는데, 선종 5가의 분파가 있다는 것에
는 승복하지 않고 '5가의 종파도 모두 하나의 달마(達磨)에서 비롯된 바 왜
그리 많은 구분을 짓는가'라고 생각하였다.
대혜는 설매(雪賣)의 송고염고(頌古拈古)를 비롯하여 널리 고로(古老)의 공
안을 탐구하였다. 그리고 대양산(大陽山)의 원수좌(元首坐), 동산(洞山)의
미화상(微和尙). 견시자(堅侍者) 등에게서 조동(曹洞)의 종지를 배웠다.
조동종(曹洞宗)은 면밀한 종지로서 전하고 계승하는 것(傳承)을 중요히 여
겼는데 여기에 대하여 무엇인가 대혜의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
래서 '선(禪)이 전하고 받음으로서 (傳受) 가능하다면 어찌 자증자오(自證
自悟)의 법이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비난하였다.
21세 때 담당문준화상(湛堂文準和尙 : 直淨克文의 법제자)을 찾아갔다. 담
당스님을 찾아가 자기가 아는 바를 남김없이 토로하자, 담당준 선사가 대혜
스님에게 말하였다.
"고상좌(고上座)여, 나의 선법을 그대가 일시에 이해하여 설법하라 하여도
즉시 설법을 잘하고, 뿐만 아니라, 염고송고(拈古頌古)나 소삼보설(小參普
說)할 것 없이 잘한다. 그러나 한가지 사실에 있어서 실오(實悟)가 아니다.
그대가 성성(惺惺)히 사량(思量)할 때는 문득 선(禪)이 있으나 겨우 잠들었
을 때에는 문득 없어진다. 만약 이러할진대 어찌 생사를 당적하겠느냐?
대혜 스님이 대답하되,
"참으로 이것이 저의 의심하는 바입니다."
라고 하였다.
담당스님을 모시며 바른 불법을 공부한지 7년이 지나서 27세 때에 그의 스
승 담당문준 스님이 천화(遷化)하였는데, 유언으로 원오극근(圓悟克勤) 선
사에게 찾아갈 것을 권하였다.
문준이 남긴 이 말은 대혜의 생애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계기를 가져다 주는
말이 되었다. 대혜 스님은 문준과 같이 극문(克文) 문하에 있던 덕홍각범(
德洪覺範)을 만나고, 다시 장상영(張商英)을 만나 묘희(妙喜)라는 법호와
담회(曇晦)라는 자(字)를 받았다.
34세 문준 스님의 유언을 생각하고 원오 스님을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원오
스님이 있는 장산(蔣山)이 너무 멀어 중간에 있는 태평사(太平寺) 평보융회
하(平普融會下)에서 지냈다.
36세 원오 스님은 경사천령사(京師千寧寺)를 관리할 것을 임명(任命)받게
되었다.
37세 4월 드디어 천령사 회상을 찾아가 원오 스님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원오 스님은 오조 법연(法演)의 제자로서 법연은 양기방회(楊岐方會)의 법
을 잇고 있었기 때문에 원오 스님은 바로 임제종 양기파의 적손이었다.
대혜 스님이 원오 스님에게 물었다.
"제가 생각하니 이 몸이 아직 깨어있을 때는 주재하여도 자못 수면할 때는
캄캄하여 주재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수화풍이 분산(임종시)하여 중고
(衆苦)가 치연(熾然)히 일어날 때 어찌 회환전도(回換顚倒)되지 않겠습니
까?"
원오 스님은 다만 손을 내 젖으며
"그만하고 그만 하라. 다만 망상을 쉬어라. 그대가 지금 말하는 허다한 망
상이 단절 될 때에 그대 스스로 오매항일처(寤寐恒一處)에 도달하리라"
하였다. 처음 듣는 바라 역시 믿어지지 않아서 매일 스스로 발원하되
'내가 깰 때(寤)와 잠잘 때(寐)가 분명 둘이거늘 어찌 감히 입을 열어 선(
禪)을 말하리오. 다만 오매항일이라는 부처님 말씀이 망령된 말이라면 내
병을 제거할 것이 없지만, 부처님 말씀이 과연 중생을 기만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내가 아직 미달한 것이다.'
라고 반성하였다. 원오 스님을 모신 지 42일이 경과한 5월 13일 (37세),
스승의 승좌설법(陞坐說法)을 듣게 되었다. 원오 스님은 그 설법에서
"어떤 스님이 운문 스님에게 물었다. '어느 곳이 모든 부처님의 나온 곳입
니까?' 운문 스님이 말하길 '동산이 물 위로 가느니라 (東山水上行)' 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나라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겠다. '어느 곳이 제불(諸佛
)의 출신처입니까?'하고 물으면 '훈풍이 스스로 남쪽에서 불어오니 전각이
서늘하다 (薰風自南來 展閣微凉生)' 라고 대답하겠다."
그때 대혜 스님은 이 말을 듣고 홀연히 앞뒤가 (前後際)가 끊어졌다.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를 예리한 칼로 한번 내리침에 모두 끊어진 것과 같았다.
원오 스님은 대혜 스님에게 택목당(擇木堂)에서 일상사를 전폐하고 오직 정
진에만 힘을 쏟게 하였다.
이 때 바야흐로 꿈꿀 때(夢時)가 곧 깰 때(寤時)와 같고, 깰 때(寤時)가 곧
꿈꿀 때(夢時)와 같음을 알게 되어 오매항일(寤寐恒一)이라고 한 부처님의
말씀에 대한 뜻을 알게 되었다. 나중에 이때 심경을
"이 도리는 타인에게 내보일(拈出) 수도 없고, 비슷하게라도 들어낼(呈似)
수도 없으니 마치 몽중 경계와 같아 취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었다."
라고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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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매일여는 마음이 쉬었을 때 저절로 찾아오는 현상이지 그것을 얻으
려고 애를 쓰면 오히려 오지 않는다. 대혜 스님은 원오 스님의 설법을
듣고 일순간 깨달은 바가 있어서 일시에 모든 것이 놓아졌다. 그리하
여 마침내 오매 항일을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오매항일은 깨달음 전이나 후에 오는 한 현상인데 한번 체험하
였다 하여 평생 그러한 것은 아니다. 깨달음 이후에도 수행은 계속 되어
야 한다. 이것을 보림이라고 한다.
대혜 스님은 원오 스님의 이 선정삼매를 보고 여기에서 깨어나게
하였는데, 그것은 일상 생활을 하려면 마음을 한 곳에만 붙들어두고
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서장의 다음 말을 보면 이때의 오매항일은 깨달음 직전에 나타났던 한
현상이었던 것이 보다 확실해진다.
즉, 대혜 스님은 서장 이참정장에서 이참정이 깨달음을 얻은 것을 칭
찬하고 인정 하면서 이참정이 질문한 내용에 대하여 답하는 말미에
'이즉돈오 승오병소 사비돈제 인차제진(理卽頓悟 乘悟幷銷 事非頓除 因
次第 盡)'
이라는 말을 좌우명으로 삼으라고 하였다. 즉, 이치는 단박에 깨닫는
지라, 잘못된 견해는 깨달음과 동시에 녹아없어지지만, 일상사에서
나오는 습관은 단박 제해지는 것이 아니다. 순차를 밟아 다해진다.
라고 하여 이치는 금방 깨달아 다른 견해에 끌려가지 않지만, 일을 당
함에 있어서 구습(舊 習)은 금방 제해지는 것이 아니니 깨달음 후에도
계속 진로(塵勞)를 제거해 갈 것을 권하였던 것이다.
또, 대혜 스님은 누추밀(樓樞密)에게 답서하는 내용에서 일용사 갖가지
에 마음을 뺏기지 않고 있는지 묻고, 현재사(現在事 )에 '집착하지 않
아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상태' 로 인연 따라 나아가고 머무른다면 자
연히 도리에 합하리라.
이렇게 노력하지 않고 무명업식을 간직한 채 세간에 있으면서 막연히 벗
어나길 바란다면 증상만(오만함)만 자라날 것이라고 경고하고, 증상만
(增上慢)을 버렸다는 생각도 일어나지 않아야 가히 역량이 있는 자라 하
면서
'[이상 설한 바는 모두 본인이 평소에 경험한 바이며 지금 일상사에 또
한 이와 같이 수행하노라.(已上所說 都是妙喜 平昔經歷過底 卽今日用
亦如此修行 )'
라고 말하였다. 대혜 스님 행장(行狀)을 보면 대혜 스님은 37세에 원오
스님 아래에서 薰風自男來...라는 말에 앞뒤 생각이 끊어졌고, 그때
오매항일을 경험하였으며, 더 정진하다가 6개월 후에 다시 相隨來
也...하는 말에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고, 그후 화엄경을 보다가 담
당스님이 보인 화두까지 밝히게(洞明)되었다.
대혜 스님은 모두 세 차례에 걸쳐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의 나이는 40
세 전후였다. 그런데 누추밀에게 편지쓸 때는 유배 생활이 끝난 후 묵
조선 일인자 굉지선사의 장례식을 집행할 무렵인 69세였으므로 이때
까지도 수행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만약 오매일여가 한번 얻어서 평생 가는 것이라면 또 닦는다는 말은 하
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서 조심해야 하는 것은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는 꼭 오매항일에 도달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실제 깨달음을 얻었던 많은 선사들은 오
매항일과 상관없이 깨달음을 얻었던 사례가 더 많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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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혜 스님은 움직이는 마음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不生) 티 하나 없고
고요한 마음 그 자체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원오 스님은 이것을 인가
하지 않고 이것이 오히려 무기(無記)에 빠진 것임을 알고,
"애석하다. 죽기는 하였으나 다시 살아나지는 못했구나. 이때라도 언구
(言句)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큰 병이다. 죽은 후에 다시 살아나야 모
든 사람을 속이지 않느니라.(死中得活)"
라고 가르침을 주었다.
그리하여 매번 원오 스님 방에 입실하여 점검을 받았는데 원오 스님은 다
만'유구(有句) 무구(無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 (有
句無句如藤倚樹)' 라고 했는데 그 뜻이 무엇인고? 라고 물을 뿐이었다. 대
혜 스님이 입을 열어 대답하면 아니라고만 말하였다.
대혜 스님이 비유를 들어 말하되
"이 도리는 흡사 개(狗子)가 뜨거운 기름 가마(熱油 )를 보는 것과 같
아서핥으려 하나 핥을 수 없고, 버리려고 하여도 버려지지도 않습니다"
하니
"비유가 좋기는 하구나."
하였다.
그렇게 반년이 지나서 하루는 원오 스님 방에서 또 '유구(有句) 무구(無
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한 것과 같다 (有句無句如藤倚樹)는 화
두를 물음에 대혜 스님이 드디어 원오 스님에게 묻기를
"스님께서 오조 회상에 계실 때에 이 화두를 물었다 하셨는데 오조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원오 스님이 웃고는 답을 하지 않으시자
"스님께서 당시에 대중이 있는데서 물으셨는데 지금 설명한들 무엇이 방해
롭겠습니까?"
하니, 원오 스님이 부득이 말하기를
"내가 오조께 '유구(有句) 무구(無句)가 마치 등나무가 나무를 의지한 것
과 같다 (有句無句如藤倚樹) 라고 했는데 그 뜻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
었다. 오조께서는 '본뜰래야 본뜰 수 없고 그릴래야 그릴 수 없다' 고 말
씀하셨느니라. 내가 또 묻기를 '나무가 넘어지고 등나무가 마를 때는 어
떠합니까?' 하니 오조께서 '서로 따라오느니라(相隨來也)' 라고 하였느니
라."
대혜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확연이 알게(理會) 되어 이르되
"제가 이제 알았습니다!"
라고 하였다. 원오 스님이
"네가 공안을 통과하지 못할까 두렵구나."
라며 곧 여러 가지 선문(禪門)의 어려운 공안을 연이어 물었다. 세 번 구
르고 두 번 구르면서(三轉兩轉) 묻는 것을 모두 다 절단하고 대답하니 마
치 일없이 태평한 때에 대로를 만나 문득 가는 것과 같아서 걸림이 없었
다. 원오 스님이 비로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너를 속일 수 없구나(吾不欺汝也)"
하고 인가하였다. 원오 스님은 임제정종기(臨濟正宗記)를 지어주고 대혜스
님에게 기실(記室)을 맡게 하니 원오 스님의 제자가 되었다.
얼마 후 촉(蜀)나라로 들어가 토굴을 짓고 은거하고 살다가 후에 호구사(
虎丘寺)에 이르러 화엄경(華嚴經)을 보았다. 화엄경 제7 지장보살이 무생
법인처(無生法忍處)를 얻은 곳에 이르러서 홀연히 담담준 선사가 내려준
앙굴마라지발구산부(央掘摩羅持鉢救産婦)의 인연(因緣)을 밝히게 되었다.
앙굴마라지발구산부(央掘摩羅持鉢救産婦)는 앙굴마라가 바루를 들고 가서
산부를 구했다는 말인데, 부처님 당시 앙굴마라가 산부를 구한 사건에서
따온 말이다.
앙굴마라는 스스승의 말을 잘못 이해하여 희대의 살인자가 된 사람이다.
그의 스승은 앙굴마라에게 사람의 손가락 100개를 가지고 목걸이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니면 저절로 깨달음을 얻는다는 말을 하였다. 사람의 손가락
100개를 목에 걸어도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야말로 무념무심을 철증한 사
람이라는 예시를 들은 것이었다.
그러나 앙굴마라는 정말 그러해야하는 줄 알고 사람 손가락을 모으기 시작
하였다. 그러나 쉽사리 사람 손가락을 구할 수 없었다. 급기야 조용한 산
속에 숨어 있다가 사람이 지나가면 손가락이 아니면 목숨을 내놓으라고 칼
을 들고 위협을 가했다.
사람들이 무서워서 손가락을 잘라 바치면 목숨은 살려주었으나 저항하면
싸워서 죽이고 손가락을 목에 걸었다. 이렇게 99개의 손가락이 모아졌을
때 앙굴마라는 유명한 살인자로 명성이 높았다. 그러다 마지막 백 번째에
부처님을 만나 자신의 어리석음을 뉘우치고 부처님의 제자가 되었다.
하루는 탁발하러 나갔는데 마침 산부가 해산하는 집 앞에 서있었다. 그러
자 어떤 사람이 지나가면서 희대의 살인자 앙굴마라가 왔다고 소리치고 도
망쳤다. 이 소리를 듣고 해산하던 산부가 겁에 질려서 그만 해산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게 되었다.
이것을 본 앙굴마라는 울면서 부처님께 찾아가 어떻게 하면 산부를 살릴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부처님은 다시 그 집을 찾아가 '살인자 앙굴마라가 아
니고 석가모니 부처님의 제자 사문 앙굴마라가 왔다' 고 소리치라 하였다.
앙굴마라가 그렇게 하자 임산부는 편안하게 해산을 하여 산부와 아기를 다
구할 수 있었다.
이것을 놓고 선문(禪門)에서는 무엇 때문에 산부가 해산할 수 있었느냐고 질
문을 던지기도 한다. 이 화두의 뜻을 담당준 선사가 대혜 스님에게 물었던
당시에는 전혀 대답을 못했는데, 뒤에 모든 화두를 풀고 난 뒤 어느 날 화엄
경을 보면서 문득 이 화두에 대한 뜻이 드러났던 것이다. 이때 나이가 40세
전후이다.
이 무렵 송나라는 북쪽의 금(金)나라의 침략으로 결국 수도인 번경이 적의
수중에 떨어지고 왕실은 남하하여 임안(臨安)에 도웁을 정하였으나 국론은
싸워야 한다는 주전파(主戰派)와 화친을 하여야 한다는 강화파(講和派)로 분
리되어 격한 논쟁에 휩싸였다.
한편 대혜 스님은 사대부(士大夫)를 상대로 선(禪)을 보급시키고 있었다.
42세(紹興2年)에 전란이 멈추면서 운문암(雲門庵)에 기거하였다.
대혜 스님은 운문암(雲門庵)에서 다음과 같은 서원(誓願)을 세웠다.
"차라리 이 몸으로써 일체 중생을 대신해서 지옥고를 받을지언정 마침내 이
입으로써 사람의 인정(人情을) 위한답시고 불법을 헛되이 말해서 일체인(一
切人)의 눈을 멀게 하지 아니하리라."
대혜 스님은 수행자의 서원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는데, 나중에 사대부들을 가
르칠 때에도 원(願)을 세워 공부할 것을 강조하였다. 서장 증시랑 답2(曾侍
郞 答2) 에 보면
"다만 모든 부처님 앞에서 대서원을 발하되 '원컨대 이 마음이 견고해서 영
원히 퇴전(退轉)치 아니하고 모든 부처님의 가피를 의지해서 선지식(善知識)
을 만나 일언지하(一言之下)에 몰록 생사(生死)를 잊고 무상정등보리(無上
正等菩提)를 깨달아 증득(證得)해서 부처님의 혜명(慧命)을 잇고 부처님의
막대한 은혜에 보답하여지이다' 라고 하라. 이와 같은 서원을 세워서 오래
오래하면 깨닫지 못할 이유가 없다"
라고 하였다.
그 뒤 복극의 장락양서에 띠집을 짓고 살았는데 대혜 스님을 따라 도를 배우
는 사람들이 53인이나 되었다. 그런 후 50여 일이 못되어서 이 들 중 13인이
도를 얻었다.
46세(紹興4年) 묵조선(默照禪)을 공부하는 사람들에게 묵조사배(默照邪輩)라
며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 자못 도인이라 하여도 남의 가르침을 함부로 비방해서는 안 된다. 대혜 스
님은 불법이 일상사 어디에나 있음을 간과하여 지나치게 간화선(看話禪)만
을 주장하고 묵조선(默照禪)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사도의 무리(輩)라고
까지 몰아붙이다가 결국 나중에 묵조선을 수행하는 같은 불자에 의하여 13
년간 귀향생활을 하게 된다.
48세(紹興6年) 부름을 받고 경산(徑山) 쌍경사(雙徑寺)에 주했는데 어느날 스
승 원오 스님이 1년 전에 천화(遷化)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늦게 나마 스스로 제문을 짓고, 만소참(晩小 ) 법문에 나아가서 설법하되
"학승이 장사(長沙) 스님에게 묻되 남전(南泉) 스님이 천화하여 어디로 갔습
니까? 하니, 장사 스님이 말하길 동촌(東村)에서 나귀를 짓고, 서촌(西村)에
서 말을 짓느니라. 승이 그 뜻이 어떠합니까? 하니 올라타기를 바라고(要騎騎)
아래로 내려가기를 바라느니라(要下便下) 하였다.
그런데 만약 이 경산(徑山:대혜)이라면 남전 스님에 대하여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떤 승이 나에게 원오 선사가 천화하여 어디로 갑니까? 하
고 물으면 곧 그에게 이르되 대아비지옥에 가느니라 라고 말하리라.
그 뜻이 어떠합니까? 하면 배고프면 구리쇠(洋銅)를 먹고 목마르면 쇠물을
마시느니라 하리라. 여기 누가 그 뜻을 아는 자가 있는가 없는가? 이 뜻을
아는 자 없으리니 어찌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가? 이것이 이 노장(원오)의
평상시 찾는 차와 음식(尋常茶飯)이니라."
하였다.
49세(紹興7年) 쌍경사 능인선원(能仁禪院)에서 한번 법석을 열면 일시에 승
속 2천 여명이 참여하였다. 그 법좌에는 우상 탕사(右相 湯思), 참정 이병(
參政 李炳), 예부시랑 장구성(禮部侍郞 張九成), 내한 왕조(內翰 汪藻) 등 한
시대의 사대부들이 상당수 모여있었다.
54세(紹興12年) 법난을 맞게 되었다. 묵조선(默照禪) 제1 후원자 승상(承相)
진회(秦檜)를 수령으로 한 강화론자들의 활동이 두드러져 금나라와 화의가
성립되자, 승상 진회는 반대하는 주전론자들을 대탄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소흥 12년 4월 10일 예전부터 대혜에게 귀의하여 법을 배우던 무구거사(無垢
居士) 시랑 장구성(侍郞張九成)의 아버지 재를 경산사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대혜 스님은 다음과 같은 법문을 하게 되었다.
신비궁일발 神臂弓一發
사파천중갑 射破千重甲
자세염래간 仔細拈來看
당심취피말 當甚臭皮襪
신비한 팔로 잡은 화살 하나
천 겹의 갑옷을 뚫나니
영가여, 자세히 살피소서.
다만 냄새나는 버선 같음을.
소흥 12년 5월, 시랑 장구성이 부친의 재를 지낸다는 핑계로 반역을 모의했
다는 담대방(詹大方)의 탄핵으로 장구성은 즉시 남안군(南安軍 : 江西)으로
유배를 가게 되었고, 그 부하 전원을 퇴면 추방 수감하고, 대혜 스님도 그 모
의에 참여하였다 하여 체탈도첩(遞奪度牒)하고 형주(衡州)로 귀양을 가게 되
었다.
귀향터에서 복역 중에서도 대혜 스님의 도력을 사모하여 사대부들이 서신으로
도를 물으므로 진회는 꼴보기 싫어하여 10년 만에 형주로부터 서신왕래가 불
편한 매양(梅楊)으로 귀양터를 옮겨 버렸다.
대혜 스님이 두 곳에서 고생하고 있는 사이에 제자 장구성이 승상이 되어
13년 만에 석방되니, 대혜 스님도 유배가 풀리게 되었으므로 이 기간을 흰옷
을 입고 머리를 기른 상태(白衣長髮冠中)에서 설법한 시기(說法期)라고 부른다.
소흥 25년 67세 사면으로 유배가 풀릴 때까지 13년 중 10년 간은 유배생활
중에서도 선덕기연(先德機緣)의 어(語)를 모으고 염제(拈提)해서 정법안장
(正法眼藏)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소흥 26년 68세 조정의 뜻에 의하여 아육왕산(阿育王山) 광이선사(廣利禪寺)
에 주하면서 천동산(天童山)에 있던 묵조선 최고선사 굉지선사(宏智正覺)을
방문하여 비로소 道로써 사귐을 가졌다.
소흥 27년 69세에 조동선의 제 일인자 굉지정각 선사가 입적하자 굉지선사의
유언에 따라 그 장례를 집행하였다.
소흥 28년 70세 나라의 칙명으로 徑山에 돌아와 주석하고 효종제(孝宗帝)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이때 묘희암(妙喜庵)이라는 친서를 하사 받으면서
호를 대혜(大慧)라 하였다.
소흥 31년 73세 명월당(明月堂)으로 퇴거하였다.
융흥 원년(1163) 75세 조금 앓다가 8월 9일 대중을 모아놓고
"나는 오늘 가리라."
하고 다음과 같이 마지막 법문을 하였다.
생야지임마 生也只任麻
사야지임마 死也只任麻
유게여무게 有偈與無偈
이심마숙대 是甚麻熟大
生이란 다만 이와 같다.
死란 다만 이와 같다.
말 있음과 말 없음이여.
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
문도들은 명월당을 묘희암(妙喜庵)으로 고치고, 보각선사(普覺禪師)라 시호
하고 탑을 보광(寶光)이라고 명명하였다.
자료 : 무불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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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15일간 꼬박 여기에 매달렸어요. 도서관 가서 자료찾고 한문본 해석하고 책 5권을 펼쳐가며 연대 찾아가면서 했어요. 대혜스님은 선문에서 중요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누가 일목요연하게 해놓은 것이 없어서 할수 없이 제가 해보았습니다. 중요한 자료이오니 잘 읽으시고 다른 곳에다가도 전파하세요. 아이고~ 좀 쉴라요...
스님..! 고생이 많으셨습니다.이 무더운 날씨에요..대혜스님의 자료를 어렵게 구입하셔서 올려주신 글 감사드립니다.生이란 다만 이와 같다.死란 다만 이와 같다.말 있음과 말 없음이여,무엇이 그리 중요하단 말인가.마지막 법문 마음에 새깁니다.녜~스님 홍보하러 갈랍니다..푹 쉬셔요...()
스님 ! 수고하셔서 실어주신 법문 잘읽었읍니다 ()
스님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대해스님과 고봉스님은 우리나라 선종에 참으로 지대한 영향을 미친분들이지요. 서장과 선요는 참선을 하는 분들이라면 아마 한권씩은 가지고 있을겁니다.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참으로 보배로운 광명이니 무불의 홍복입니다.()()()
에고... 스님~! 15일간 그리 책하고 싸우셨다니 참 부러워요. 전 언제나 그리 공부해보나...후.../대혜스님의 깨달음에 대해서 무척 궁금해했었어요.상세히 설명된 책들이 없더군요. 이렇게 알게되니 무척 반갑네요.. 근데 깨달음이 그렇게 점차로 오는 건가요? 단번에 깨달아지는게 아닌건가봐요? 스님께서 올려주시는 자
료마다 많은 걸 배웁니다... 감사합니다.. 이곳을 벗어나려 해도 이렇게 공부되는 게 많아서 못가게 되네요..ㅎㅎ .. 스님 수고 많이 하셨구요... 저도 점차로 열심히 공부하겠습니다.... 푹 쉬셔요.....()
아이고~ 스님 이. 더운 날씨에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스님의 수고가 헛 되지 않도록 대혜스님 의 선문 공부 까진 못 가드라도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건강하십시요...()...
수고하셨습니다.... 나중에 다시한번 읽도록 할께요 ................()
스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귀한 글 아주 잘 읽어보고, 가슴에 깊히 새기고 갑니다....()
스님 수고하셨습니다. 공부 열심히 하겠습니다.믿도록 하겠습니다.
보는 법문에 감사 드립니다. 저도 공부를 해야 하는데... 넘 몰라서 걱정이 됩니다... 천천히 다가오는것으로 하렵니다....()
스님! 감사히,잘 보고 갑니다,,,
저는 읽어 내려가는데도 시간이 이렇게 걸리는데 ...15일간 자료수집하여서 이렇게 올려주시기까지 많은 노고에 감사 드립니다..깨달음을 얻은 훌륭한 선사들의 가르침을 무불선원에서 석우스님으로부터 차곡차곡 가르침을 주시니 감개무량 합니다..한번읽고 이해를 못하지만 마음이 고요한날을 택해서 읽으보면 선사들의
일생을 짐작 할수 있답니다..역경속에 삶과 깨달음을 위해서 목숨도 아끼지않는 그런 가르침을요..승현이가 방학이다보니 글 읽기 하다가도 컴을 빼앗기면 기회를 노쳐버리는수가 있습니다..양보해주고 여가 나는대로 하겠습니다..더운 여름날씨에 건강 하세요..스님~!...()()()
자주 새기겠습니다..()
많은 것을 배우고 갑니다. 스님 성불하세요.
서장을 지으신 대혜스님의 일대사를 접하니 너무나 감개무로소 입니다. 스님 수고하셨습니다. 마음을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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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게나마 좋은 글을 보게해주셔서 감사합니다,,,,,보고 아무의미와 뜻을 모른다면 고생하신 보람이 없겠죠......제가 다혜스님이되어직접 스승님과 선문답 하는것 처럼생생하게 느꼈읍니다.......마지막 법문 가슴에 새기며 .....합장.
좋은 자료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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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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