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 제주에서 병사하다.
광해군 이혼(李琿, 1575-1641)이 8월 7일 사망하였다. 67세이니, 조선 역대 군주들 중에서도 꽤 장수한 편이다. 재위기간은 15년(1608-1641)이다. 즉위하기 이전에도 전쟁과 당쟁으로 조정이 쑥대밭이었으며, 부왕의 사랑과 신임을 받지 못하여 전전긍긍하였다. 왕으로 등극한 이후에도 입지가 늘 불안하였다. 반정이 일어나자 폐주가 되어 강화도, 태안, 교동도, 결국에는 제주도로 귀양보내어졌다.
광해군의 배후에, 김개시라는 상궁의 영향력이 작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흔히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연인관계는 아닌 듯하다. 누나와 같은 역할로, 의지할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멘토가 되어 기민한 판단을 하도록 돕는 존재였다.
권력에 편승하여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자, 부정부패의 함정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적지 않은 반정의 기미를 김개시는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판단력이 무디어진 것인가? 심지어, 반대편에서 그를 매수 혹은 회유하였다는 의혹을 제기하는 주장도 있다.
폐주가 되어 혼군(昏君)이라는 오명 속에서 통한의 말년을 보내어야 했다. 근래에는 그의 명석함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기일은 음력 7월 1일로, 이날에 비가 내리면 제주의 민간에서는 광해군의 눈물이라 해석하였다. 양력으로 세어보면 8월 7일이다. 제주시 중앙로 국민은행 앞에는 광해군이 일시 이곳에서 귀양살이 했음을 알리는 작은 표지석이 있다. 그의 묘지는 남양주 영락교회 묘지에 접하여 있는데, 현재 개방되어 있지는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