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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수(蔡壽)는 인천채씨로, 자는 기지(耆之), 호는 난재(1), 호는 양정(襄靖)이다.
채영(蔡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필선 채윤(蔡綸)이고, 아버지는 남양 부사 채신보(蔡申保)이며 어머니는 유승순(柳承順)의 딸이다.
1449년(세종 31) 태어나 김종직(金宗直) 문하에서 공부하였고, 1468년(세조 14) 사마시에 합격하고, 1469년(예종 1) 문과에서 초시, 복시, 전시를 모두 장원 급제하여, 이석형(李石亨)과 함께 조선 개국 이래 이른바 삼장장원(三場壯元)이라는 명성을 얻은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다.
1470년(성종 1) 예문관 수찬, 홍문관 교리, 지평, 이조 정랑 등을 역임하면서 <세조실록>과 <예종실록> 편찬에 관여하였다.
1477년(성종 8) 응교로서 임사홍(任士洪)의 비행을 탄핵했으며, 승지를 거쳐 대사헌으로 있을 때, 폐비윤씨(廢妃尹氏)를 받들어 보살펴 줄 것을 청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벼슬에서 물러났다.
1485년(성종 16)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가 하정사, 성절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성균관 대사성 등을 거쳐 호조 참판이 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이후 줄곧 외직으로 나가 있어서 무오사화를 피할 수 있었다.
1499년(연산 5) 이후 예조 참판, 형조 참판, 평안도 관찰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나아가지 않았다.
갑자사화(1504) 때 앞서 정희대비가 한글(諺書)로 적은 폐비윤씨의 죄상을 사관(史官)에게 넘겨준 것이 죄가 되어 경상도 단성(산청)으로 장배(杖配)되었다가 얼마 후에 풀려났다.
1506년 중종반정 때 분의정국공신(반정공신)에 녹훈되고, 인천군(仁川君)에 봉군되었으나, 후배들과 함께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1510년(중종 5) 벼슬을 버리고 경상도 함창(상주)에 쾌재정(快哉亭)을 짓고 은거하며 책 읽기와 풍류를 일삼으며 여생을 보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박람강기하여 천하의 서적과 패관소설에 이르기까지 지식이 해박하였다.
음악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시문에는 특히 뛰어나 어려서부터 문예로 이름을 얻은 당대의 재사였으나 성격이 경망되고 행동이 거칠며 경솔하여 이른바 수기(修己)를 한 유학자라는 평가는 받지 못하였다.
사신으로 북경을 내왕하는 길에 요동의 명사이던 소규(邵圭)와도 친교를 맺었으나 당시 새로이 등장하던 사류(士類)와는 잘 화합하지 못하였다.
1703년(숙종 29) 함창의 사림에 의하여 임호서원(臨湖書院)이 건립되고 표연말(表沿沫), 홍귀달(洪貴達) 등과 함께 배향되었다.
저서로 <난재집>이 있으며 경북 상주시 공검면 율곡리 산71번지에 있는 신도비가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306호로 지정되었다.
정종로(鄭宗魯)의 문집 <입재집(立齋集)>에 수록된 채수의 행장(行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병인년(1506) 중종반정 거사 하루 전에 박원종 등이 상의하여 말하기를
이 일에 채 아무개(채수)가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무사를 시켜서 데려오되, 만약 오지 않으려 한다면 목이라도 베어 오라.
라고 하였다.
선생의 사위 김감이 사태가 급박함을 알고 또 그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그의 부인으로 하여금 다른 일을 빙자하여 모셔와 술을 권하여 크게 취하자 곧바로 부축하여 대궐 문에 당도하였다.
선생이 채 술이 깨기도 전에 살펴보니, 대궐 뜰에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군대의 구령 소리가 크게 진동하고 있었다.
이에 비로소 일이 잘못된 것을 알아채고 크게 놀라 손으로 땅을 치며
이 어찌 감히 할 짓인가!
이 어찌 감히 할 짓인가!
하기를 거듭하였다.
마침내 반정공신에 녹훈되고 인천군에 봉해졌다.
丙寅中廟反正當擧義前一日朴元宗等相議曰此間不可無蔡某使武士邀之如其不來取其頭來先生女婿金勘知事急而意其必不從令其夫人托他事迎致進酒至昏醉因扶擁直到闕門酒猶未醒先生見庭火煌煌而軍聲大振始知爲所誤大驚以手擊地曰此豈敢爲者乎此豈敢爲者乎如是者再及錄靖國勳封仁川君.
채수가 중종반정에서 반정공신이 된 것은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타의에 의하여 억지로 된 것이고, 채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반정에 반대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채수는 자신이 원하지 않은 반정공신이라는 이름으로 후배들과 함께 조정에서 벼슬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서 벼슬을 버리고 함창에 쾌재정을 짓고 은거하면서 책 읽기와 풍류로 여생을 보냈는데 이 때 <설공찬전>을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종반정이 부당한 것임을 주장하기 위하여 <설공찬전>을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 <가정보>에 수록된 채신보 가문 -
<가정보>는 외손도 구별 없이 모두 기록하여, 설충란은 설봉(유돈의 사위)의 6세손으로 한 번 수록되고, 이위(채신보의 사위)의 사위로서 다시 한 번 수록되어 있는데 이런 경우가 매우 많다.
채수의 아버지 채신보는 3남 4녀를 두었다.
<가정보>에 의하면 채수에게는 누님이 세 명 있는데, 가장 큰 누님은 태종의 증손이며 효령대군의 손자인 평성군(枰城君) 이위(李偉)와 혼인하였고, 둘째 누님은 이정(李靖)과 혼인하였으며, 셋째 누님은 양면(楊沔)과 혼인하였다.
이위는 아들 3형제와 딸 4자매를 낳았는데 그 중 둘째 딸이 설충란과 혼인하여 도사공배와 설공찬을 낳았으므로 채수는 설공찬의 어머니 설충란배의 외삼촌이다.
채수는 생질 가문에서 일어난 불행한 사건을 모티브(motive)로 <설공찬전>을 지었으므로 <중종실록>에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 사람이니, 채수가 반드시 믿어 현혹되어 저술하였을 것입니다”라고 기록하게 된 것이다.
전주최씨, 순창설씨, 전주이씨, 인천채씨 네 가문 전체를 연결하여 세계표로 그려보면 다음과 같다.
채수와 설충란 사이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가 하는 것은 <설공찬전>의 저술 배경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서 중요한 파라미터가 될 수 있다.
특히 도사공배가 최완(崔琬)을 낳고 죽은 사실을 채수가 알 수 있었는가?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빼 놓을 수 없는 중요한 파라미터이다.
우리 속담에 “처외삼촌 벌초하듯 한다.”라는 말이 있다.
어떤 일을 할 때 정성을 들이지 않고 무성의하게 건성으로 하는 체만 하는 것을 빗대어 하는 말이다.
이 속담이 말해주는 것은 처외삼촌이란 존재는 말로는 친척(親戚)이고, 촌수(寸數)는 비록 삼촌지간(三寸之間) 이지만 사실은 사돈네 팔촌과 그다지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이다.
채수가 바로 설충란의 처외삼촌이므로 아들 설공찬 입장에서 채수는 촌수로 보자면 사촌으로 매우 가깝지만 위 속담에 비추어 본다면 사돈네 팔촌도 아니고, 그냥 길가다가 우연히 마주치는 사람과 다름없게 되어버리고 만다.
만약 채수와 설충란 사이가 조선후기나 그 이후처럼 이른바 “처외삼촌 벌초하듯”하는 데면데면한 사이에 불과했다면 경상도 함창에서 사는 채수가 전라도 순창으로 시집간 생질녀가 낳은 딸이 혼인하고 얼마 안 되어 죽은 사실도 알기 어려웠을 것이고, 죽기 전에 아들을 낳았다는 사실은 도저히 알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의 전통이 온전히 살아 있어서 모든 사대부가 혼인하면 당연히 처가살이를 해야만 했었던, 조선전기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불교가 다스리던 고려를 무너트리고 일어선 조선이 성리학이 다스리는 나라로 자리매김한 시점이 바로 채수와 설충란이 살았던 당시이지만 혼인제도 만큼은 중국 풍습인 친영례(親迎禮)가 자리 잡지 못하고 고구려에서 전해오는 고유한 전통의 서류부가혼 풍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최윤조(崔潤祖)는 장인 설충란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하다가 죽었고, 최완(崔琬) 또한 외가인 설충란의 집에서 유복자(遺腹子)로 태어났으며, 최완보다 두 살 적은 퇴계(退溪) 이황(李滉)도 안동에 있는 처가에 들어가서 살면서 안동에서 행세하는 진성이씨 가문을 일으켰고, 38세 나이 적은 율곡(栗谷) 이이(李珥) 또한 외가인 강릉 오죽헌(烏竹軒)에서 태어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름난 집성촌 중 많은 곳이 입향조(入鄕祖)의 처가 마을인데, 대개 그 가문에 전해오는 비석에는 “그곳의 경치를 사랑하여(愛其山水)”입향 하였다고 적혀 있지만 사실은 처가살이 때문에 그 마을에 들어가 산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처가살이를 하다가 아이들이 자란 후에 본가 마을로 돌아오기도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가마을에 정착하여 살거나, 벼슬을 마친 후 처가마을로 들어가서 살아 집성촌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전주최씨 중랑장공파의 경우를 살펴보면, 5세 최덕지(崔德之)가 남원 부사에서 벼슬을 버리고 영암의 처가 마을로 낙향하여 영암종회가 만들어졌으며, 6세 최생명(崔生明)이 부안김씨와 혼인하여 처가마을 부안군 부안읍 연곡리로 입향하여 부안종회가 만들어졌고, 최자목(崔自睦)이 고부이씨와 혼인하여 처가마을 고부(정읍) 정우면 장순리로 입향하여 고부종회가 만들어졌다.
남원종회도 성본(姓本)을 알 수는 없지만 6세 최주(崔淍)가 임실군 지사면 부근 토성(土姓)과 혼인하여 처가살이를 했기 때문에 아버지를 따라 영암으로 가지 않아 남원종회가 만들어졌다.
7세 최대(崔岱)의 처가 양성이씨나 8세 최연손(崔連孫)의 처가 문충공계전주최씨는 같은 지사면에서 살았으므로 남원종회가 유지될 수 있었고, 9세 최엄조(崔渰祖)는 함양에 사는 남원양씨와 혼인하여 함양으로 입향 하였으므로 함양에 감찰공파 집성촌이 전해오고 있는 것이다.
그 흔적이 1686년(숙종 12) 발행된 전주최씨 최초의 대동보 <강희보(康熙譜)>에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주자(朱子)가 만든 족보에는 딸과 사위를 수록하지 않았는데, 우리 동방의 선배님들이 만드신 족보에는 비록 딸과 사위를 수록하기는 하였으나 외손까지는 수록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2)
그 이유는 우리 동방의 풍속이 중국과는 다르기 때문으로, 비록 성(姓)이 다른 무복지친이라고 할지라도 진실로 같은 가족으로 여기고 의리를 다하면서, 서로 간에 형이라고 부르고, 동생이라고 부르고, 아재비라 부르고, 조카라고 부르면서 살아가고 있으니, 이것은 실로 혼인을 맺은 처가와 화목하게 지내는 두터운 풍속으로 인하여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삼가 전해오는 풍속의 예(例)를 따라서 외증손이나 외현손이라고 할지라도 모두 후손으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朱夫子家譜不書女壻我東先儒或只書女壻而不及外孫然我東風俗異於中朝雖異姓無服之親苟知有族義則呼兄弟稱叔姪者此比有之此實由於婣睦之厚風而然也故謹從俗例或曾或玄隨宜書之.
성리학적 위계질서에 의하면 천하(天下)에는 천자(天子)가 있어 하늘을 대신하고, 그 아래에 제후(諸侯)가 있어서 천자를 대신하며, 그 아래에 사대부(士大夫)가 있고, 사대부 아래에 백성이 있어서, 천자가 책봉한 제후(왕)의 명을 받은 사대부가 백성을 다스리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만주 들판에서 산짐승 사냥이나 하면서 들짐승과 다를 바 없이 살던 야만인 여진족이 일어나더니 지금까지 중화(中華)라고 받들어 모시던 명나라를 무너트리고 천자 자리를 꿰어 차고 앉아버렸다.
사대주의를 천하의 위계질서라고 생각하여 대국(大國) 명나라를 부모처럼 섬기면서 살아오던 조선의 사대부들 입장에서는 하늘이 뒤집어져 땅이 되고, 야만이 문명을 대신하는, 도저히 꿈에서도 상상할 수 없었던 엄청난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진 것이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중원(中原)에서 꺼져버린 중화문명을 그대로 방치해 둔다면 세상에서 문명은 영영 사라져버리고 야만이 지배하는 세상이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중화문명을 대신할 새로운 주체가 되기 위하여, 스스로 일어나 이른바 소중화(小中華)가 되고자 하였다.
언제나 아류(亞流)가 본류(本流)를 대신하기 위해서는 원래 본류보다 훨씬 더 철저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조선 사회는 명나라를 대신하여 소중화로 새로 태어나기 위하여 성리학 이론에 맞추어 학문은 물론 사회제도와 풍습을 재정비하였는데 그러한 노력으로 수천 년간 면면히 이어오던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 서류부가혼은 중국 전통 친영례로 바뀌게 되었으며 처외삼촌은 벌초도 하는 둥 마는 둥 할 수밖에 없는 사돈네 팔촌처럼 데면데면한 사이로 바뀌어버리고 만 것이다.
수천 년을 이어오는 처가살이 풍습을 근절하기 위해서는 그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론적 바탕이 필요하였으므로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용어가 만들어졌으며, “걷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는 안 한다.”와 같은 속담도 만들어졌는데 모두 서류부가혼을 근절하고 친영례 풍습이 하루빨리 자리 잡도록 만들기 위한 노력에 의한 것들이다.
또 아들딸 구분 없이 돌아가며 조상의 제사를 모셔온 이른바 윤제(輪祭)의 풍습을 바꾸면 모든 제사를 책임져야하는 종손(宗孫)이 경제적 부담 때문에 저항하게 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가문마다 후손들이 돈을 추렴하여 제각(祭閣)을 짓고 제사 비용으로 사용할 위토(位土)를 마련하는 풍속이 생겨나게 되었다.
서류부가혼 풍습을 따라서 이위는 채신보의 집에서, 설충란은 이위의 집에서, 최윤조는 설충란의 집에서 처가살이를 했으므로, 도사공배가 최완을 낳다가 죽은 사실을 채수가 모를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 증거로서 <중종실록>에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 사람”이라고 적은 것을 들 수 있다.
“설공찬은 채수의 일가 사람”이라는 말은 처외삼촌보다 촌수(寸數)가 한 마디(寸)를 더 내려간 생질녀의 아들 설공찬이 벌초도 대충대충 해도 되고, 길에서 오다가다 만나는 사람처럼 무관한 사람이 아니고, 촌수가 겨우 사촌에 불과한 아주 가까운 친척이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 각주.
(1) 懶齋. “懶”자는 보통 “라”로 읽어 “나재”로 표기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인천채씨 가문에서는 본음인 “란”으로 읽어 “난재”로 표기하므로 그를 따르기로 한다.
(2) <성화보>나 <가정보>는 외손은 물론 외손의 외손까지 모두 수록하여, 동일 인물이 여러 번 수록된 경우도 많다. 특히 <가정보>는 7대 유공권(柳公權)에서 시작하여 22대 까지 약 15세대를 수록하고 있는데, 사람의 이름과 벼슬 이름만 적은 책의 규모가 자그마치 10권 10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