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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 사랑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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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 문화재단 스크랩 가림토문자와 한글
양백 추천 0 조회 216 10.07.07 11: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림토문자와 한글

 

녹도문문과 가림토문은 전혀 다른 문자입니다. 녹도문은 배달국 초기에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이 거발한 한웅 천황의 명의 받아서 사슴의 발모양을 보고 본따만든 상형문입니다. 하지만 가림토문은 단제가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38자를 만들게 하여 이를 가림토라 하였다고 합니다. 가림토는 표음문자라 전해집니다. 시기는 이집트 상형문자 만든시기와 비슷하였다고 합니다. 가림토의 훈민정음 영향 가능성은 훈민정음의 반포서문에 보면 훈민정음 제정 작업에 참여했던 정인지가 `옛전자를 모방했다 `고 밝혀놓고 있고 세종실록24년 12월에도 같은내용 이있습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가설 이므로 정확한 사실은 알수 없습니다


『환단고기』『단군세기』의 다음 기록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고조선 시대 3세 단군이신 가륵(嘉勒)단군 2년(B.C 2,181년) 때의 일이다. 아직 풍속은 하나 같지 않았다. 지방마다 말이 서로 틀리고, 형상으로 뜻을 전하는 녹도문자(鹿圖文字)가 있어도, 열 집 사는 마을에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고, 100리 되는 땅의 나라에서도 글을 서로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신하인 삼랑(三郞, 삼신상제께 천제 지내는 관직)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셔서 정음 38자(字)를 만들고 이를 가림토(加臨土) 문자라고 하니 그 글자는 다음과 같다.” 라고 하여 그 문자를 기록해 놓았다.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자음과 모음을 합하여 38개를 가지고 운용하였고, 지금부터 4,183년 전(2002년 현재)의 일이었다. 놀랍게도 과거 우리민족의 활동무대였던 만주에는 지금도 가림토 문자 비석이 우뚝 서 있다. 그 비석을 탁본(拓本)한 것이 높이 2m, 폭이 32㎝인 것을 보면, 실제 비석은 이보다 조금 더 클 것이다. 조선 선조때 조여적(趙汝籍)이 지은 『청학집(靑鶴集)』에도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든 을보륵(乙普勒)의 이름이 실려있다.

『단군세기』의 3세 단군 가륵(嘉勒)조와 『태백일사』의 소도경전본훈에서도 같은 내용의 기록과 함께 가림토(加臨土) 문자의 형태를 소개하고 있다. 이것이 개량되기 이전의 한글 작품인 것이다. 이 문자의 모습은 세종 때 창제된 한글의 형태와 매우 흡사하다.

배달국(倍達國) 시대의 녹도문자는 고조선(古朝鮮)시대에 이르러 제3세 단군이신 단군 가륵(嘉勒) 2년(B.C 2,181년)무렵에 가림토 문자로 계승 발전되고, 고조선(古朝鮮) 시대의 가림토(加臨土) 문자는 조선(朝鮮) 시대의 세종대왕에 의해 훈민정음(한글)으로 계승 발전된 것이다. 가림토 문자는 고조선 후기까지 사용되다가 그 사용 빈도가 점점 줄어 들게 되었다.


http://kr.blog.yahoo.com/ataiblog/847.html?p=1&pm=l&tc=14&tt=1164895218

"가림토문자와 단군역사"
우리는 지금 어디쯤에 있는가?


조회수:2864


언문(한글)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非新字也>. 언문(한글)은 前朝鮮(=古朝鮮=高句麗)時代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古篆 - 옛글자)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발음을 쓰는 것)과 합자(글자의 조합)가 전혀 옛것과 반대 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단군(Tangun)의 자손이라는 말을 합니다.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단군(Tangun)의 역사에 대한 지식은 너무나 초라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조선시대까지만 하여도 단군의 역사서는 대단히 많은 종류의 것이 전해지고 있었음이 확실합니다.

따라서 단군의 역사서를 읽지 않았을리가 전혀 없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저자들이 단군의 역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축소하고 애매하게 기록한 그 용기(?)의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두권의 역사서에서 얻어지는 수준이 단군의 역사에 대한 수준일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일찌기 변영만 선생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아 ! 우리나라 서적계에 어찌 이른바 서적이라 할 만한 것이 있겠는가 ? 열을 놓고 말한다면 다섯은 조정의 적을 기린 시(詩)요, 셋은 주자, 정자를 찬미한 노래이며, 나머지 둘은 한유, 소식, 이백, 두보가 배앝은 침 찌꺼기인데, 그나마도 만에 하나도 닮지 않은 것이니, 전체를 싸잡아 말한다면 노예의 학문이라 할 것이다."

변영만 선생의 설명이 아니더라도 과거 우리의 극심한 사대주의적 풍토에 단군Tangun의 역사가 자리잡을 공간이 있을리 만무한 것입니다.

신채호 선생은 또 이렇게 말합니다.

"그 옛날에는 그처럼 강인하고 그처럼 용감하더니 ,북방의 씩씩하고 헌걸처던 호남아여 ,그 옛날의 용감성과 날카로운 기개는 어디가고 오늘날 어찌 이리도 멍청하게 되었는가 ? 아아 ! 용의 씨가 미꾸라지가 되고 범이 강아지를 낳아 ,신성한 종족의 후예가 일제히 지옥에 떨어지고 말았으니 ,과연 어떤 마귀의 장난이며 무슨 액운의 조화인가 ?

신채호 선생의 한탄은 배달Paedal 민족이 정체성을 상실했음을 말합니다.그것도 사대주의자들 스스로 앞장서서 배달Paedal 민족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단군Tangun의 역사를 부정하고 신화적인 존재로 설정하려함은 그 역사도 유구합니다.

단군의 역사가 부정된 배달Paedal 민족은 정체성이 부정된 열등한 민족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주변 강대국의 정치적,군사적,문화적 지도를 받아야 하거나, 상대적으로 우수한 다른 민족의 종교와 사상과 철학적 지도를 받아드려야만 사람구실 할 수 있는 당위성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민족적 정체성도, 독자적인 사상체계도 없는 저급한 야만민족일때 비로서 주변강대국과 그에 기생하는 사대주의자들의 목표는 힘안들이고 쉽게 달성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만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와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해주는 길이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일찌기 평양의 을밀대를 지은 을밀선인은 다물흥방가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전은 '지나간 것은 법이 되고, 새로온 것은 존중한다'는 내용으로 시작합니다.

당시 고구려가 강력할 수 있었던 힘은 이 경전의 내용처럼 단군이래 전해오는 우리의 고유한 정신을 중심으로 하고, 새로 들어 온 유불선 삼교는 존중함으로서 고구려 사회의 정신적인 통합을 이루었기 떄문입니다.

바로 이같은 고구려 사회의 강력한 정신적 통합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민족에게 사대주의자는 있어도 국수주의자는 과거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는 이유입니다.

또한 삼국사기나 삼국유사가 우리 조상들의 활동영역을 한반도안으로 몰아넣었지만 단군의 진정한 역사를 살펴보면 우리 조상의 활동 영역은 유라시아 대륙을 뒤덮는 광활한 영역이었음을 알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단군은 삼성이신 한인, 한웅, 왕검 세분 모두가 단군Tangun이며 ,단군의 역사는 이 세분께서 세우신 한국,배달국,단군조선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헝가리, 몽고,터어키,요,금,청 그리고 일본까지도 포함하는 우랄알타이어족의 역사는 직간접적으로 단군의 문화와 연관이 있습니다.

이른바 서쪽으로는 항가리와 몽고,터어키가 아울렀던 동유럽과 러시아,소아시아,발칸반도등에서부터 고구려,백제,신라가 번갈아가며 아룰렀던 일본과 오끼나와까지의 광대한 유라시아지역이 단군의 문화와 직간접적인 영향권인 것입니다.

1980년대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한민족의 진정한 역사서 한단고기를 보고 많은 사람들이 우리 고대국가의 웅대한 규모와 강력과 지식정보와 문화의 세련됨에 놀랐습니다.

그러나 단군이라는 용어와 개념에서 드러나는 규모는 한단고기가 오히려 왜소하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하물며 일연의 삼국유사와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더이상 단군의 역사에 대해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

그동안 정체성을 잃어버린 우리 배달Paedal 민족은 드높던 자부심은 짓밟히고 뒤틀려서 비생산적이고 자학적인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자존심을 잃은 노예근성은 지역감정이나 이기적인 신비주의와 현실도피적인 풍수지리사상, 인간이 인간을 도구와 수단으로 삼는 수직적인 인간관계등을 형성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 배달Paedal 민족이 가진 엄청난 잠재력을 생산적으로 발산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가 가진 역량으로 우리 스스로를 파괴하는 비생산적이고 자학적인 역사를 꾸려왔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자학적인 역사를 꾸려오는 동안 과거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만주등에서 우리민족과 한솥밥을 먹던 같은 알타이어족인 몽고,터어키,만주족들은 유라시아대륙이 좁다하며 종횡무진하여 그들의 존재를 세계사에 뚜렷하게 과시했음은 과연 무엇을 의미합니까 ?

우리가 단군Tangun의 역사를 제대로 안다는 것은 우리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회복하여 새로운 지식과 정보와 문화의 시대를 개척하는 지름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뿐만아니라 단군Tangun이래 지금까지 단절됨 없이 전하는 천부경,삼일신고,366사(참전계경),단군팔조교등 십수권의 경전은 우리만의 사상이 아니라 전인류의 보편적 진리입니다.

단군Tangun의 역사는 또한 이 경전들의 진리가 현실에서 생활에 그대로 적용되던 진리의 시대였음은 단군Tangun의 역사를 보는 중요한 관점 아닐 수 없습니다.



◆ 훈민정음 이전 한글 '가림토' 발견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서
ㅅ ㅈ ㅠ 자모 뚜렷 학계 관심
부산일보 2003/03/13 038면 11:22:44

훈민정음 창제(1443년) 이전의 고(古) 한글로 추정되는 가림토(加臨土) 문자가 국내 최초로 발견돼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사진#1] : 경북 경산시 와촌면 명마산에서 발견된 가림토문자 바위


[사진#2] : 사진#1을 보다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색상반전시킨 모습

가림토 문자는 고려 공민왕 때인 1363년 이암(李巖)이 저술한 단군세기에 제3세 단군 가륵이 을보륵(乙普勒)에게 명하여 정음 38자를 짓게 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13일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강학리 명마산(鳴馬山) 중턱에 자리한 바위(가로 1.8m,세로 3.4m)에서 가림토로 추정되는 문자 다수가 새겨진 것이 발견됐다. 이 바위에는 상형문자에 가까운 글꼴이나,ㅅ ㅈ ㄴ ㅠ 등 한글 자모가 뚜렷이 각인돼 있다.

재야 사학자인 예대원(62·경북 경산시 사동)씨는 '훈민정음 창제의 모태이자 기반이 된 것으로 알려진 가림토 문자가 확실하다'고 단언했다.

한국정신문화원 박성수(72·역사학) 명예교수는 '바위에 암각된 문자가 가림토와 흡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며 '구체적인 연구검토를 거쳐 가림토 여부를 판명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국사편찬위원회 김광(54·국문학) 박사는 '상당한 문화재적 가치를 지닌 것으로 추정돼 언어 역사 민속학 인문지리학 등 여러 분야 학자들이 공동으로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할 과제'라고 말했다. (경산=정철수기자 csjung@ )


가림토 문자 비석 발견.

▶ 훈민정음 재창제의 증거

(1) 언문(한글)은 모두 옛 글자를 본받아 되었고, 새 글자는 아니다<非新字也>. 언문(한글)은 전조선(고조선) 시대에 있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이다. (세종실록 103권 ; 세종 23년에 발표한 글)

(2) 이 달에 상감께서 친히 스물여덟자를 지으시니, 그 글자는 고전(古篆 - 옛글자)을 모방한 것이다. (세종실록 25년 ;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첫 발표문)

(3) 언문은 모두 옛글자를 근본삼은 것으로 새로운 글자가 아니며 곧 자형(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날의 전문을 모방했더라도 용음(발음을 쓰는 것)과 합자(글자의 조합)가 전혀 옛것과 반대 되는 까닭에 실로 근거할 바가 없는 바입니다. (한글 재창제를 반대하는 최만리와 당대 유학자들의 집단 상소문 중에서)
(4) 단군조선의 문화

① 가림토 문자
단군조선시대에는 선대인 배달국으로부터 계속 사용해온 진서(眞書), 즉 녹도문자(한자의 뿌리)가 있었다. 그러나 배움이 부족한 일반 백성들이 녹도문을 사용하기는 쉽지가 않았다. 또 만물을 형상화한 뜻글자인 녹도문만으로는 완전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지지 않아 아직 불편한 점이 많았다.

이렇게 해서 제3대 갸륵단군 경자2년(기원전 2181년)에 단군조선의 문자인 가림토(加臨多) 문자가 탄생하게 되며, 가림토 문자(38자)를 토대로 더 쉽게 정리하여 4177년 뒤 재창조된 것이 바로 훈민정음(28자)이다.

      

[그림 # 1] '가림토' 문자 - 이집트 상형문자의 출현시기와 비슷

* 동일배열 방식으로 가림토 문자와 16세기 세종한글 28글자 비교도

ㅣ ㅡ ㅏ ㅓ ㅜ ㅗ ㅑ ㅕ ㅛ ㅠ (無) ㅌ
ㅇ ㄱ ㄷ ㅁ ㄴ ㅈ ㅊ (無) (無) ㅅ (無)
(無) ㄹ (ㅏ + ㅣ ?) ㅂ (?) (ㅋ?) (ㅊ?) ㅆ ㅋ (無)ㅍ (無)

.... 위 글자와 비교후 남아도는 세종한글 ㅎ

*참고* 16세기 세종대왕의 한글 기본 28글자 (자음 17글자, 모음 11자)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 ,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 참고* 20세기 ~ 현재의 기본 24글자 (자음 14글자, 모음 10자)
ㄱㄴㄷㄹㅁㅂㅅㅇㅈㅊㅋㅌㅍㅎ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한글은 조합형의 글자다.
누가 감히 가림토 문자를 한글이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그 명맥은 우리들 눈앞에서 현대 한글의 모습으로 아직도 남아 있고 그것은 한국의 국력이 커감에따라 한국학을 연구하려는 사람들의 요구에 의해 외국에서 더욱 더 속도를 더하면서 전파되고 있다.


[그림 #2] : 고대한글이 일본에 건너가 조금 변형된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

② 가림토 문자는 훈민정음의 원형

가림토 문자는 오늘날 사용하고 있는 한글의 원형이다. 그리고 근세조선 시대 세종 때에 이르러 훈민정음(訓民正音) 28자로 재창제 되었으며, 최근에는 주시경 등에 의해 24자로 재정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가림토는 일본에도 전해져 신대문자(神代文字)인 아히루(阿比留)문자가 되었다. 또 가림토 문자는 몽고로 건너가 '파스파'란 고대문자가 되었으며, 인도로 건너가 산스크리스토 알파벳과 구라자트 문자의 원형이 되었다.

▶ 일본의 신대문자(神代文字)

일본에는 한글을 닮은 고문자가 있다. 대마도의 아히루 가문에서 전해져왔기 때문에 아히루 문자라고 하며 신(神)들의 시대에 신(神)들이 쓰던 문자라 해서 [신대문자]라고 한다.

(펀주: 일본이 석기시대일때 한국에서 청동기 철기 문명인들이 건너가고 일본인들은  이 사람들을 신(神)으로 섬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일본인들은 '신들의 시대'라하는 뜻으로 '신대(神代)' 라 한다.)

신대문자는 지금도 일본 대마도 이즈하라 '대마역사 민속자료관'과 일본의 국조신인 천조대신을 모신 '이세신궁' 등에 아직 보관되어 있다.

일본 '이세신궁'에 소장된 '신대문자'의 기록은 서기 708년의 유물이다. 서기 700년 무렵은 대조영이 고구려 멸망 후 발해를 건국했을 무렵이며, 세종대왕은 1446년에야 훈민정음을 창제했다.

▶ 인도의 구자라트 문자

인도의 남방 구자라트 주에서 쓰이는 문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데 자음은 상당수가 같고, 모음은 10자가 꼭 같다.

(ㄴㄷㅌㅇㅁㅈㅂ 그리고 ㅏㅑㅓㅕㅗㅛㅡㅣ등)

이 지역은 배달국 시대 우리 민족이 인도로 이동해 가서 세운 인더스 문명의 주인공 드라비다족의 후예가 사는 지역이다. 그렇기 때문에 구자라트인들이 사용하는 타밀어에 문자뿐 아니라 발음과 뜻이 비슷한 단어들

(나-난/너-니/엄마-엄마/아빠-아빠/보다-봐/날-날/오다-와/나라-나르/너 이리와-니 잉게와 등)이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편 산스크리스트어 알파벳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 배운 한글과 너무나 흡사하고

(찌커거.., 쪄쳐져..., 떠터더..., 뻐퍼버..., 셔허),

우리 한글처럼 'ㄱ'에서 시작해 'ㅎ'으로 끝난다.

▶ 영어와의 관계

가림토 문자에는 X O M P H I 등 알파벳의 자모도 여러 개 보인다. 가림토 문자가 4177년 전에 만들어진 반면, 알파벳의 역사는 겨우 3000년을 넘지 못한다.

제후국의 왕 또는 어떤 지역의 우두머리를 나타내는 말인 한(汗)은 하늘을 뜻하는 글자인 한(桓)에서 나온 이름이다.

(주: 고조선 이전의 우리나라는 한국(桓國) : 고대한국-> 배달한국)

즉 한(桓)에서 한(韓), 한(漢), 한(汗)이 나온 것이다. 또 한(汗 : HAN)이 몽고로 건너가 칸(KAN : 징기스칸)이 되었으며, 징기스칸의 유럽 정복 때 서구로 건너가 킹(KING)이 되었으며, 그후에 전세계로 퍼지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하버드대학에서의 연구결과로도 발표된 바 있다. 이와 같은 식으로 우리말과 우리의 고문자는 한단시대의 영역을 통해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각 지역의 독특한 환경과 조건들에 따라 변화되어 지금에 이르렀다. 그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는 것이다.


※결론 # 1 :

가림토 문자에서 현대 문자인 세종대왕의 한글 재창제 작업 과정에, 최만림을 비롯한 유림의 집단 반발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런 반발을 무릎쓰고 세종대왕이 한글재창제 작업을 결연하게 밀어부친 것으로 보아, 당시 유림에서 한글제창제를 반대한 이유가 글자 사용의 편리성을 몰라서가 아니라 문화적 단절을 염려한 것이 아니었나 유추해 봅니다.

이는 고구려의 찬란한 역사가 어느 시대로부터 단절되기 시작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중요한 시사점이 됩니다.

글자의 단절이 문화의 단절로 이어지고 그 단절은 민족 정신을 말살할 수준으로까지 발전되어 오늘날에는 우리들을 정체성에 빠지도록 하는 사대망국주의를 불러온 원인인 것 같습니다.

글자의 단절 --> 문화의 단절 --> 민족 정신 말살 --> 사대주의 사상(:노예근성) 식으로 요악이 그러니까 되는 셈이군요...

이와 관련하여 연구나 글을 쓴다면 그 양이 엄청나겠습니다...


 







훈민정음 이전에 가림토가 분명 있었다는 증거. 1. 훈민정음 혜례본 제자해를 보면 훈민정음 창제는 분명 세종이 무 에서 창작한 것이다. 그러나 세종실록에 보면 세종은 틀림없이 자방고전(字倣古篆), 즉 옛 글자를 모방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고 또 최만리 상소문을 보면 " 옛 글자를 모방 하셨다 하시지만 그 用音合字, 즉 그 소리내는것이나 조립법이 옛 글자와 다르니 이는 옛 글자가 아니라 새 글자 입니다. 만약 이 사실이 중국에 알려지면 큰일이니 빨리 페기해야 합니다" 라 한다. 이 상소문에서 주의할것은 세종의 입 에서는 단 한마디 언문(諺文)이란 말이 없는데 훈민정음 발표후 불과 50 일 만에 올라오는 상소문에는 상것들이나 쓰는 비천한 글자라는 뜻의 언문 소리가 무려 19 번이나 나온다. 그렇다면 최만리는 자기 임금이 만든 글자를 그렇게 무시 할수가 있는가? 당장 ***감이다. 그 이유는 상소문에 기록된 대로 전 조정에서 부터 상것들 사이에 언문이 있었고 이것을 세종이 그 모양을 모방 했다는것을 최만리가 알았기 때문이다. 또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 서문은 세종이 옛 글자를 모방해서 만들었다 했는데 막상 제자해에 들어가서는 중국의 성리학과 음양오행설로 훈민정음을 만든것으로 되 있어 우리 나라 계절도 4 계절에서 5 계절로 변한다. 즉 해례본은 세종이 중국과 최만리 등을 달래기 위하여 정인지등 신하에게 고육지책으로 쓴 책으로 보인다. 즉 훈민정음을 만든 사람은 세종인데 그렇다면 그 제자 원리도 세종만이 알텐데 아무것도 모를는 정인등에게 간단하게 몇 마디 설명해 주고는 해례본을 쓰라 하신다. 이렇게 모순 덩어리인 해례본은 우리 국보 70 호에서 다시 생각새 볼 문제이고 따라서 세종은 그의 말씀대로 옛 조상이 쓰던 언문을 모방한것이 자명하다. 2. 언문이 가림토 라는 증명은 가림토(加臨土)와 가림다(加臨多) 라는기록이 따로 전해오는데 그 뜻은 같고 모우 文字라는 한자가 들어오기전 순순한 우리 말이다. 3. 원시 가림의 유물은 산동성 환대(山東省 桓臺)시에서 지하 6m 깊이에서 발굴된 녹각에 새겨진 가림토문자는 C14 측정결과 거금 3850년 전의 것으로 확인하였으니, 환단고기의 '가림토 문자가 4000년 전에 있었다'고 하는 내용을 증명하고 있고 일본 신사에 새겨진 신대문자 역시 가림토 인데 이는 원시 가림토가 발전한 것으로 우리 말과 한글을 가지고 해독할수 있다. 이 유물들의 사진과 해독은 필자 카페http://***/chunbuinnet 에 상세기 기록되 있다. 그렇다면 세종전 원시 한글의 존재는 확신한다


가림토 문자 / 가림땅 글, 신지 문자, 법수교 문자 등으로 불린다. 세종이 한글(훈민정음)을 창제할 때 “옛 글자를 본땄다”라고 말한 것과 관련하여 훈민정음 이전, 단군 시대 때부터 존재한 우리 한민족의 고유 문자라고 주장되는 글자. 따라서 훈민정음은 새 문자를 반포한 것이 아니라 음을 바로 잡은 것이라는 말이다. 한글 자모의 기원이 되는 가림토 문자는 이미 단군 3세 부륵 때에 처음 만들어져서 오랫동안 사용되어 왔다는 것이 『환단고기(桓檀古記)』나 『대주신제국사』 등에서 언급된 바 있다. 세종이 한글창제 당시 집현전 학자들을 7번이나 만주에 왕래하게 한 이유도 만주 지역(고조선의 강역)에 분포한 가림토 문자를 조사 연구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가림토 문자의 증거로 제시되는 탁본의 원래 소장자는 이상백 교수로 1930년대 만주에서 탁본했다고 한다. 이상백 교수는 가림토 문자가 우리 나라 ‘한글의 어머니 글’이라고 말했다. 가림토 문자가 특이한 것은 문자가 대단히 반듯하다는 것이다. 갑골문의 유적에 보이는 원시 한자의 모양은 구불구불한데 것이 단군 3세 때 처음 만들어진 우리 민족(주신족)의 가림토 문자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가림토 문자는 모두 38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실제로 훈민정음의 한글 모습과 놀랄 만큼 유사하다. 또한 일본인들이 신성시하고 공개를 꺼리는 신대문자(神代文字) 또한 한글자모와 놀랄 만큼 유사한데 백제유민이 일본에 정착하며 남긴 것으로 보인다. 일본인들은 이것을 ‘신이 내린 문자이며, 따라서 일본은 신의 나라’라고 주장하고 있다. 즉 가림토 문자, 신지문자 등의 기원을 밝혀내는 일은 단지 문자의 역사뿐 아니라,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히는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





이 가림토문이 나타난 연대는 이집트의 상형문자가 나타난 때와 거의 일치한다. <한단고기>가 발표된 지 (1979년) 얼마 안 되어 송호수 교수는 아주 흥미있는 학설을 내놓아 독자들의 흥미를 끈 일이 있다. 그의 학설의 요지는 훈민정음은 세종대왕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바로 위의 가림토문을 본받아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 증거로는 위의 가림토문 38자 중에서 열자만 빼고 나면 훈민정음의 원형 그대로 라는 것이다. 훈민정음 제정 작업에 참여했던 정인지도 훈민정음 반포 서문에서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밝혀 놓고 있다. 또 조선왕조실록에도 이와 동일한 구절이 보인다.(세종실록 24년 12월조)그뿐만 아니라 위당 정인보를 비롯하여 여러 학자들도 단군 이래 우리 고유의 문자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또 <단전요의(檀典要義)>라는 책에도 "태백산에 단군의 전비(篆碑)가 있으니 해독하기 어려워서 고운(孤雲)이 번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또 일본의 구주와 대마도 등지에서 97종이나 발견된 일본의 신대문자(神代文子)라는 소위 아히루문자는 가림토문자와 흡사하며 이 지역이 단군조선의 영역이었으므로 그때 쓰여졌던 것이, 한반도 보다 비교적 정치적 문화적 풍파를 덜 겪었으므로 지금까지 보존되어 올 수 있었다. <삼한비기>를 인용한 <태백일사>의 고구려 본기의 "자고로 구주와 대마도는 삼한이 통치하던 땅이지 왜인이 대대로 살던 땅이 아니다."라는 구절이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훈민정음 제정 작업에 실무적인 역할을 담당하여 요동에 귀양와 있던 황찬이라는 지나인 언어학자를 열세 번이


 

나 찾은 일이 있던 신숙주는 공부벌레로 이름난 사람으로서 그 당시 국내의 전적들은 모조리 섭렵했던 사람이다. 그가 하도 열심히 집현전에서 밤새워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세종대왕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덮어 주었을 정도였다. 그러한 그가 고려조 말엽의 유명한 학자였던 이암이 지은 가림토가 들어 있는 <단군세기>를 읽어 보지 못했을 리가 없다. <단군세기>가 나온 것은 신숙주시대로부터 불과 80년 전의 일인 것이다. 틀림없이 <단군세기>에 나오는 위에 인용한 가림토문을 참고했을 것이다. 더구나 신숙주의 후손인 신경준(1712-1781)도 우리의 고유문자의 존재를 인정했다.가림토문은 당시 단군조선의 영토였던 일본에서만 쓰여졌던 것이 아니다. 인도 대륙 서쪽 해변인 구자라트 지역에는 우리의 한글과 흡사한 문자가 지금도 사용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남미의 볼리비아에서도 그들의 언어를 표현하는 데 쓰이고 있는 글자가 한글과 흡사하다. 일본의 오향(五鄕)이란 학자도 고조선에서 만들어진 원시 한글이 일본에도 보급되어 아히루문자가 되었는데 그 원천이 바로 가림토였다는 결론을 내렸다.가림토는 고구려때까지도 전국적으로 이용되었던 글이었는데 지나에서 한문으로 기록된 불교, 유교, 도교 서적들이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왔고 또 이것을 무분별하게 그대로 수용한 결과 이러한 지나 문물의 급류에 휩쓸려 매몰되었을 뿐만 아니라 삼국시대 이후에는 한자를 국가의 공문서에도 점차 이용하는 바람에 더욱 우리 고유문자는 설 땅을 잃어 버린 것이다. 이처럼 가림토가 본 바닥에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 되었지만 지나문화의 공세를 비교적 덜 받았던 일본 지역이나 인도의 구자라트나 남미의 볼리비아에서는 단군 조선때나 그 뒤에 보급되었던 가림토가 지금까지도 사용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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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단 하나, 훈민정음이 워낙에 뛰어난 문자였기 때문이지요.

수천년전에 사장되어버린 가림토를 변형하여 위대한 훈민정음으로 다시 태어나게 만든 세종의 업적은 가히 창제(創製)라 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훈민정음의 모양이 가림토와 비슷하다 하여 단순한 “표절”로 폄하하려는 사람들은 가림토문자가 단순한 도형으로서가 아니라 훈민정음처럼 뜻을 가진 문장을 완성할 수 있고 또한 읽는 순간 해석없이 우리말로 바로 이해가 가능한 문자로서의 기능이 있었다는 것을 먼저 증명해야 할 것입니다.




예전에는 요순시대, 하나라, 은나라등이 다 신화시대로 분류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던중 "은허"라는 곳에서 은나라의 유적이 발견됨으로써 그동안 신화로만 생각되던 은나라의 실체가 조금이나마 발견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사마천이 쓴 사기를 보면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나라이고, 주나라는 "화족"이라고 분명한 선을 긋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는 강태공이 등장하는 시기입니다. 동이족에는 여러 계열이 있는데 그중 "강족(姜族)"출신이 바로 강태공입니다. 어떻게 보면 민족이 반역자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역사가 이렇게 흘러갔습니다. 은허유적에서 갑골문자가 발견되었는데, 이것이 지금의 한자와 유사하며 한자의 기원을 알 수가 있는 자료가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대륙에서도 은나라는 동이족이 세운 나라라고 부단히 가르치고, 진정한 그들의 독립국가는 주나라에서 시작합니다. 그나마 기틀을 마련한 것은 한나라(漢)여서 그들은 한족(漢族)이라고 그들을 칭합니다.



▶천부경에서의 한글 설명

ㅇ : 바탕이 둥글어 天을 상징하고
ㅡ : 바탕이 명명하여 地를 상징하고
ㅣ : 바탕이 서있어 人을 상징한다.

▶훈민정음 창제의 최고 공로자 신숙주

-신숙주는 희귀한 고금 서적을 모조리 독파
-훈민정음 반포 1년전에 신숙주가 일본에사상관(事狀官)으로 다녀옴
-돌아오는 길에 대마도에 머물렀다.(가림토문자가 많이 남아 있다. 대마도가 옛날에는 우리나라 거였죠!!)
-훈민정음 반포 80년전에 간행된 [한단고기]에 가림토 문자의 자형 38자가 그대로 수록되어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세종실록은
'그 자(字)는 고전에서 모방하였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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