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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마태복음 3장 11-12절
물세례와 성령세례
지난 시간까지의 내용을 좀 정리하면 세례 요한의 경우 이미 구약에서부터 예언된 인물로서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 말씀하신 것처럼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또 자녀의 마음을 아버지께로 돌이키도록 하는 것이(말4:6) 세례 요한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어 외쳤던 말이 무엇인가 하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상관없이 그리고 하나님과 반대방향으로 달려가던 마음을 돌이켜 이제는 하나님을 향하여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가 세례라는 의식 가운데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 앞에 어떤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죄를 자복하면서 세례를 받았습니다.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를 했다는 것이고, 또한 세례를 받음으로 죄에 대하여는 죽고 이제 의에 대하여 살겠다는 고백을 의식을 통해 나타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해야 될 바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첫째는 자기 자신의 죄를 자복했다는 것이 고해성사를 지지하는 그런 구절은 아니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히려 이 말씀은 세례라는 의식에 참여하기 위해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둘째로 자신의 죄인 됨을 인정해야지만 세례를 받는다는 것이 유아 세례는 줄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고도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언약은 성인만이 아니라 성인의 자녀들까지도 다 포함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회개의 세례를 줄 때 세례 요한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자신에게로 다가옴을 보고서 그들을 크게 책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그들은 종교지도자이며 유대인들의 대표격이면서도 본이 될 만한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그리고 거기 있던 모든 무리들을 교훈하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 뭐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할 것으로 열매가 구원의 조건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해 이 모든 내용의 주체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얼핏 보면 회개하라고 하니까 회개의 주체가 나인 것 같고, 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니까 그런 열매를 맺어야 하는 것이 나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너희 스스로 회개할 수 있다, 너희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제가 종종 말씀드리는 구절로 하자면 나의 나 됨도 하나님의 은혜요, 그 은혜 속에서 더 많은 수고를 한 것도 결국에는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을 읽어드리면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일반적으로는 예수를 처음 믿을 때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임을 인정합니다. 그것도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이해 속에서는 보편적으로 구원의 시작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이후 수고가 들어가는 일에는 하나님의 도우심 가운데 우리도 수고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고, 그렇게 수고한 것이 마치 나의 공로가 되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물론 수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수고가 있어야 하고, 열매를 위하여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고백한 것이 뭐냐? 수고했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전적인 부정입니다. 부분 부정이 아니라 전적인 부정입니다.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왜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 나의 수고가 분명 있었지만, 그 수고를 이끌어 내신 분이 누구냐? 하나님인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나의 수고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앞선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장 7절 말씀으로 하자면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만한 모든 것, 그래서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모든 것은 다 누구로부터 오느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1:17)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참된 회개라면, 그래서 그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성령의 열매라면 그 모든 것은 우리의 수고보다 앞선 하나님의 은혜가 있는 것이고, 또한 본래 우리 안에 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내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 15장 5절인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오늘 우리가 살피려고 하는 부분은 소위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관한 부분입니다. 11절을 보시면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 누가복음에 보면 이 내용에 앞서 백성들의 생각 가운데 이런 것이 있었다고 전해줍니다. 누가복음 3장 15절입니다. “백성들이 바라고 기다리므로 모든 사람들이 요한을 혹 그리스도신가 심중에 생각하니” 그러니까 요한이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하니까 백성들 마음에 어떤 생각을 가지게 되었느냐 하면 “혹시 이 사람이 그리스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던 겁니다. 바로 그런 분위기 가운데 있을 때 오늘 본문의 내용을 말했던 것입니다.
우선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역을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말 자체로만 보면 세례 요한이 마치 회개를 시키는 주체인 것처럼 표현 되어 있습니다. 또 회개보다는 세례가 앞서는 것처럼 표현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핀 바에 따르면 그런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희로 회개케 하는 자다” 혹은 “내가 너희에게 세례를 주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회개케 하기 위해서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너희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함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물로서 세례를 주는 사람이다” 달리 말하면 그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는 자이지 그 주체가 아닌 겁니다. 이미 살핀 것처럼 사람으로 하여금 회개케 하시는 주체는 하나님이신 것이고, 물로 세례를 준다는 것은 회개의 표, 구원의 표로서 주는 의식이요, 형식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하는 것이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성경은 분명 세례 요한에 대해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사역을 하는 자로서 언급을 합니다(눅1:17). 그런 그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다”고 말합니다. “능력이 많되, 나는 그분의 신발을 들고 다니기에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이다.” 마치 그분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 앞에서 나는 아무 것도 아닌 존재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특히 그는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있었기 때문에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이 아무런 상관이 없다거나 반대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세례 요한이 외쳤던 말과 이후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외쳤던 말이 동일하기 때문에, 다시 말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마3:2, 4:17)는 동일한 말씀으로 그 사역을 알리고 있기 때문에 세례 요한과 예수님의 사역이 동일한 내용을 가진다고 보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후에 알리고 있는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다”는 말씀은 물세례와 다른 내용으로서의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가 아닌 겁니다. 비록 그분에 비해 능력은 적지만, 그래서 신발을 들기에도 감당하지 못할 자로 있지만, 주의 길을 준비하는 자로서 “회개하라” 외쳤던 것이고, 또한 동일한 의미로서 세례를 베풀었던 것입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요한의 세례는 회개의 표 혹은 구원의 표로서 세례를 주고 있기 때문에 의식 혹은 형식이라는 의미가 거기에 있다면, 그리스도의 세례는 본질이라는 의미에서 차이가 있을 뿐입니다.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은 형식이지만, 그 형식의 본질은 뭔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는 것, 혹은 불로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세례 요한은 물세례와 다른 의미로서의 성령세례 혹은 불세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물로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다. 즉 물세례의 진정한 본질은 성령세례라고 알리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지난 시간에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물세례는 구원의 표이지 구원 자체는 아닙니다(벧전3:21). 참된 구원의 본질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나는 데 있습니다. 요한복음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는 것입니다(요3:3). 그럼 거듭난다는 것, 달리 번역하면 위로부터 난다는 의미인데, 위로부터 난다는 것은 뭐냐? 요한복음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물과 성령으로 나야지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요3:5). 따라서 거듭나야지만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데, 성경은 이 거듭남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되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풀 것이라는 말씀은 이런 의미에서 “나는 의식과 형식으로 세례를 베풀 뿐이지만, 내 뒤에 오시는 이는 그 형식이 담고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다”는 것을 알리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는 어떤 능력 차원에서 말씀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듭남(중생) 이것과 맞물려서 말씀되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물론 요한복음에서는 물이라는 말이 성령과 함께 사용되고 있지만, 이때 물은 세례 자체라기보다는 성령이 언급될 때 그의 능력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물을 세례로 보기도 하지만 칼빈은 이것을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세례가 거듭남의 본질이라면 세례를 받지 않는 모든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가톨릭의 오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물에 대해 어떻게 이해했느냐 하면 성령과 같다는 뜻으로 이해했습니다. 다시 말해 성령이 언급될 때, 그의 능력을 표현하기 위해 물이나 불이라는 말을 부언하는 것이 성경에 나타나는 흔한 화법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우리를 새롭게 씻어주는 것처럼 성령도 그와 같은 능력을 우리에게 행하신다는 그런 의미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세례 따로, 불세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세례가 곧 불세례인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세례와 관련하여 불세례라고 표현한 것은 불로서 금을 정련하듯이 우리의 더러움을 말끔히 씻어 없앤다는 의미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결국 오늘 본문이 물세례와 성령세례를 말한다고 할 때 다른 내용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내용을 하나는 구원의 표로서 다른 하나는 구원 자체로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교회 역사를 보면 오늘 본문에 나오는 성령세례를 구원의 또 다른 단계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령세례를 거듭나는 것, 즉 중생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중생과는 별도의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어떤 이들은 이 성령세례를 통해서 어떤 확신을 가지게 된다고 말하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성령세례를 통해서 어떤 능력을 받게 된다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이 일은 분명한 인식과 감각적인 사건으로서 말하기도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의 경우 거듭남에 대해 말할 때 이렇게 말씀하시는 바가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요3:8) 성령의 자유로우신 역사, 그러면서도 인간이 감지할 수 없는 그런 신비로운 역사가 거듭남인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세례를 중생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인간이 분명 감지할 수 있는 역사로서 이해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지금 물로 세례를 주는 것과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그 내용에 있어 다른 것이 아니란 것을 분명히 기억하셔야 합니다. 요한이 그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는 말씀과 예수님께서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외친 말씀과 다르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물세례나 성령세례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요한은 물이요, 예수님은 성령인 것입니다. 물의 경우 의식과 형식으로서 구원의 표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성령의 경우 본질로서 구원 자체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 차이인 것이지 내용이 다른 것은 아닌 겁니다.
뿐만 아니라 시제에 있어서도 요한의 경우 ‘세례를 베풀거니와’라고 하면서 현재형으로 쓰고 있고 예수님의 경우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라고 하면서 미래형으로 쓰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요한의 물세례 이후 물세례를 받은 자만이 성령세례를 받는다는 그런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본문에서 사용되고 있는 시제는 세례 요한이 예수님 앞서 준비하는 자로서 사역을 하고 있다면, 예수님의 경우 그 후에 사역하실 것을 알리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종종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이전에는 그리스도 이후보다 뭔가 부족한 것으로 여길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코케이우스와 같은 신학자는 구약 백성의 죄 용서와 신약 백성의 죄 용서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특히 로마서 3장 25절을 해석하면서 그는 “구약시대의 성도들에게 있어서 죄 용서는 죄들을 못 본 체 간과하는 정도라면,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죄 용서는 죄를 제거하는 용서”라고 말했다고 합니다(정지수, 성경과 하나님 지식08).
성령세례를 어떤 확신이나 능력으로 이해하는 사람들도 어떤 면에서는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을 비교하여 어떤 차이가 있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들은 중생이 첫 단계와 중생 이후 뭔가 특별한 역사로서 두 번째 단계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생이 복이라면, 제2의 복이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웨슬리와 같은 사람은 이 땅에서 완전성화까지도 주장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구약 백성과 신약 백성의 죄 용서의 차이가 있을 수 없듯이 중생 이후 구원의 서정에 있어서도 어떤 특별한 역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미 중생 이후가 우리에게는 특별한 역사로 있는 겁니다. 물론 어떤 사람의 경우는 하나님의 기뻐하시고 자유로우신 뜻을 따라 좀 더 성화되는 경우가 있기는 하겠지만, 중생이 아닌 중생 이후 성령세례를 통해 완전성화가 되거나 혹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성령을 체험하면서 어떤 확신을 가지게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 중생한 것이 1단계고 더 깊은 단계로서 2단계가 있다, 첫 번째 복이 중생이고 두 번째 복으로서 뭔가 특별한 역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11절을 이해할 때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 지금 세례 요한은 자신이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이가 그리스도요, 자신이 베풀고 있는 물세례의 진정한 본질은 성령세례에 있다고 알리고 있는 내용인 겁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 때문에 일반적으로는 물로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에 의해 거듭나게 되는 성령세례가 순서상 앞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회개가 있다는 것은 성령으로 이미 세례를 받은 자, 즉 성령으로서 거듭난 자의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교회는 성령에 의해 거듭났다는 증거와 관련해 물세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다만 때로는 참된 회개가 아닌데도 세례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입으로는 고백을 하지만 입으로만 고백할 뿐 마음으로부터 믿음에 이르지 않는 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교회는 알 수 없지만 물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것은 아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교회가 세례를 베푼다고 할 때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 오늘 본문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령세례를 받은 자, 그래서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그리스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자,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이제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겠다고 다짐하는 자, 바로 그에게 물세례를 베푸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2절을 보시면 성령으로서 세례를 베푸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한마디로 예수님의 사역은 이중적인 사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시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것.
그럼 알곡은 누구고, 쭉정이는 누군가? 오늘 본문 앞에 있는 8절을 보시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절도 보시면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말씀에 근거하자면 열매가 있으면 알곡이고, 열매가 없으면 쭉정이인 겁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있다면 알곡으로서 곳간에 들이는 것이고, 좋은 열매를 맺지 않는다면 쭉정이로서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는 겁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씀하신다고 해서 열매로서 구원을 받고, 받지 못하고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셔야 합니다. 표현 자체는 열매가 있느냐, 혹은 없느냐에 따라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것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말씀드리고 있는 것처럼 이것을 행위구원의 논리로 푸시면 안 됩니다. 열매로 설명한다고 해서 구원을 믿음+선행 이렇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면에서 가톨릭의 가장 큰 실수 중 하나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열매가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살핀 마태복음 3장 안에서만 보자면 그렇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8절에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는 겁니다. 그럼 회개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합니까? 회개하라는 말이 증거가 되어야 합니다. 소위 율법으로서 자신의 죄인 됨을 알려주어야 하고, 그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회개하지 않으면 심판 외에는 없다는 것도 알려주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어떤 면에서는 회개하라는 말 속에 다 포함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럼 모든 것의 주체는 회개하라고 전한 자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 본문 11절에서 회개와 관련하여 세례를 베풀 때 자신은 물세례를 줄 뿐, 물세례의 진정한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푸시는 성령세례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물세례는 의식과 형식이요, 그것이 담고 있는 진정한 본질은 성령세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성령세례를 주시는 분이 누구시냐? 예수 그리스도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언어적으로만 보고서 물세례의 주체는 세례 요한, 성령세례의 주체는 예수 그리스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물세례의 본질이 성령세례라고 할 때는 물세례를 베푸는 자도 본질로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물세례가 의식이요, 형식이라면 물세례를 주는 자도 진정한 주체는 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어떤 말을 하느냐? “그는 그리스도가 성령 세례의 주(主)이시며, 자기는 단지 형식적 집례자일 뿐이라고 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모든 세례의 진정한 주체는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사람은 형식적 집례자이지, 그가 진정한 주체는 아닌 겁니다. 좀 더 정확하게 하자면 목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이지(마28:19), 자기 이름으로 세례를 주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따라서 열매의 진정한 주체도 누구시냐? 그리스도이신 겁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령세례를 주셔야 하고, 성령세례를 통해 중생된 자만이 회개하라는 말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을 돌아보면서 회개하는 자만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겁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참된 회개의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은 이렇게도 설명이 됩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겠습니다. 31절 이하의 내용을 보시면 오늘 본문 12절과 다르지 않는 내용으로서 소개를 하는데, 여기서는 양과 염소로서 구분을 합니다. 33절을 보시면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 그럼 어떤 자가 양인가? 또 어떤 자가 염소인가? 양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35절과 36절입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반면 염소에 대해서는 42절과 43절에서 이와는 정반대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내용을 이웃 사랑의 정신과 맞물려서 말씀하십니다. 40절에 보시면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여기까지만 보면 정확하게 오늘 본문 12절 말씀과 같습니다. 열매 있는 자가 양이요, 열매 없는 자가 염소인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이 말씀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34절입니다. “그 때에 임금이 그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양에 대해 복 받을 자들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복이 언제부터 예비 된 것으로 있었느냐?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되었다고 말합니다.
혹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시비를 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예비하셨지만, 그 복은 선택된 자가 아니라 나중에 결과를 보고 결과에 따라 주고자 하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열매가 있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것이 창세로부터 있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작정과 예정의 내용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 역시 그런 말씀과 동떨어진 것으로 불 수 없습니다. 때문에 열매를 맺는 자가 복을 받게 되지만, 그 대상이 언제부터 정해졌는가? 창세로부터 이미 정해져 있었던 겁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열매가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열매를 맺으라고 한다고 해서 그 주체가 열매를 맺는 자가 아닌 것입니다. 오히려 열매를 맺으라고 명령하신 그 명령자가 열매의 주체로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레위기 20장 7절과 8절입니다. “너희는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할지어다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너희는 내 규례를 지켜 행하라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이니라” 명령은 너희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거룩하라는 것입니다. 그 거룩을 위해서 여호와께서 명하신 규례를 지켜 행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무엇을 말씀하시느냐? 나는 너희를 거룩하게 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십니다.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하시는 분이 바로 주체이신 겁니다.
그럼 이런 사실이 분명히 있으면서도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말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12절 말씀처럼 열매가 있으면 알곡처럼 곳간에 들어가게 되지만 열매가 없으면 쭉정이처럼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일하시는 방식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런 방식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다 하시지만, 그래서 서두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할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은 그 일을 어떤 방식으로 하시는가? 마치 우리가 그 말씀을 듣고 마음에 감동이 되어 선한 열심을 품음으로 열매를 맺는 방식으로서 일하십니다. 하나님이 하시지만 우리가 한 것처럼 여겨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주시는 것으로 있는 겁니다. 마태복음에 있는 표현으로 하자면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게 하는 방식입니다(마6:3). 생각해 보십시오. 어떻게 오른 손이 하는 것을 왼 손이 모르겠습니까? 하나님은 분명 하나님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하시지만, 마치 하나님 스스로가 모르는 것처럼 여겨주셔서 그렇게 일하시는 겁니다. 그것이 지금 명령의 방식이요, 권면과 요구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회개로부터 열매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물세례를 베푸는 요한이 주체가 아니라, 또 목사가 주체가 아니라, 그리고 성도 개개인이 주체가 아니라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그리스도가 주체요, 그리스도와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이신 겁니다. 하나님의 것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주신다고 해서 그것을 마치 내 것인 양 그렇게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셨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스스로는 그분의 은혜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회개도 선물이요,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혹 내가 하나님 앞에서 죄에 대한 깨달음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선물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혹 우리에게 이웃 사랑의 열매가 있다면 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특별히 하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알리시기 위해서 이 땅에서는 완전성화를 주시지 않는다는 것도 기억하셔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를 다 깨닫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성경이 말하고 있는 모든 열매들을 다 맺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죄의 일부만 회개할 뿐입니다. 그 일부도 회개하지 못하는 것에 비해서는 매우 작은 부분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가 무엇이 죄인지도 다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저 좀 드러난 것만 파악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럼 드러난 것은 다 회개하느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깨닫게 하시는 것만 회개하고 있을 뿐입니다.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그렇게 하시는가? 전도서 표현으로 하자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만을 경외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전3:14).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어떤 것도 내어 놓을 수 없는 자인 줄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요15:5 참고).
그러므로 여러분, 뭔가를 했다는 것으로 하나님께 요구할 수 있다는 생각을 일체 버리셔야 합니다. 열매가 있으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열매를 통해 천국 내 놓으라는 식의 그런 자세는 바람직한 자세는 아니라는 겁니다. 회개했기 때문에,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기도를 했기 때문에, 금식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내가 열심히 봉사를 했기 때문에 이것저것을 내놓으라는 식이라면 그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처사요, 하나님의 일하심을 모르는 처사인 것입니다. 비록 성경이 “너희가 무엇 무엇을 하면 내가 너희에게 이것을 주겠다”는 표현이 있지만, 그때도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너희에게 이것을 주기 위해서 너희에게 명령하는 것까지 내가 주는 자로 있다”는 그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실제로 어거스틴이 그의 고백록을 통해 했던 유명한 말이 그것입니다. “당신이 명하는 것을 주시고, 당신이 원하는 것을 명령하소서.”(Da quod iubes et iube quod vis)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지만, 그 명령은 우리가 할 수 있어서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명령하십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당신이 명하는 것을 달라고 기도했던 겁니다. 우리의 기도가 이것이어야 합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물세례와 성령세례에 대해 살폈지만, 내용과 의미가 다른 것이 아니라 의식과 형식 그리고 본질의 차이라 말씀을 드렸습니다. 한편으로는 물세례가 사람을 통해 베풀도록 되어 있지만, 물세례 자체가 의식이요 형식이라면 세례를 베푸는 사람 또한 ‘형식적 집례자’일 뿐이라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다시 말해 진정한 주체는 성령세례를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인 겁니다. 그리고 성자와 분리할 수 없는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원리상으로 물세례보다 앞서 성령세례를 베푸신다는 것은 이후 회개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도 다 그분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 됩니다. 비록 성경이 회개하라,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말할지라도,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쭉정이로서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신다고 말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런 방식으로서 회개와 열매를 우리에게 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이것이 택자에게만 주어지는 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씀 앞에 우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또 열매와 상관없이 산다면, 그것도 끝까지 그렇게 한다면 알곡이 아닌 쭉정이로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에 던져진다는 것 또한 사실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때 양과 염소를 나누시듯 그렇게 나누실 것입니다. 그렇게 나눌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하시느냐? 심판과 형벌은 열매인 것입니다. 열매가 없기 때문에 쭉정이요, 열매가 없기 때문에 염소인 것입니다. 반면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의 열매는 무엇인가? 우리 자신의 열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공로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와 그 공로로 말미암은 열매들, 그리고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말미암은 열매들, 그것이 우리의 것인 겁니다.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그 열매를 위하여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그런 열매를 맺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택자이기 때문에 열매 없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욕보이는 것밖에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난주 말씀드린 것처럼 우리를 택하시고 부르신 목적이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입니다(엡1:4).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는데 있기 때문에(엡1:6), 이런 열매와 상관없이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시면 안 되는 것입니다.
부디 이런 열매를 위하여 더욱 힘써 기도하시되 어거스틴의 기도처럼 “당신이 명하는 것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주의 은혜가 여러분을 통해 더욱 나타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