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자료[1463]林椿선생5율-謝見訪
원문=동문선 제9권 / 오언율시(五言律詩)
謝見訪-[林椿] 椿=참죽나무 춘. 신령스러운 나무 이름 춘.
사견방-임춘
長安霖雨後。장안림우후
思我遠相過。사아원상과
寂寞蝸牛舍。적막과우사
徘徊駟馬車。배회사마거
恒飢窮子美。항기궁자미
非病老維摩。비병노유마
莫署吾門去。막서오문거
聲名恐更多。성명공경다
장마비 뒤의 장안에
나를 생각해 멀리 찾아왔네 그려
이 적막한 달팽이집 앞에
머무른 사마 수레
항상 굶주리는 궁한 두자미
참 병 아닌 유마거사(당(唐) 시인 왕유(王維))
문간에 이름을 적지 말고 가소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8
霖雨림우=장마
蝸牛과우=연체동물 복족류 달팽잇과에 속한 종
駟馬사마=하나의 수레를 끄는 네 필의 말
임춘林椿=기지(耆之), 서하(西河)
고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한 사람이다.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기지(耆之), 호는 서하(西河).
고려 건국공신의 자손으로 할아버지 중간(仲幹)은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충경(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버지 광비(光庇)와 큰아버지 종비(宗庇)
모두 한림원의 학사직을 지내 구귀족사회에서 일정한 정치적·경제적 기반을 지니고 있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문헌을 상고하면 의종 무렵에 태어나 30대 후반까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임춘은 일찍부터 유교적 교양과 문학으로 입신할 것을 표방하여 무신란 이전에 이미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러다가 20세 전후에 무신란을 만나 가문 전체가 화를 입었다. 그는 겨우 피신하여 목숨은 부지하였다.
그러나 조상 대대의 공음전(功蔭田 ; 고려 시대에, 공신과 오품 이상의 벼슬아치에게
공을 따져 지급하던 토지)까지 탈취당하였다.
그는 개경에서 5년간 은신하다가 가족을 이끌고 영남지방으로 피신하였다.
약 7년 여의 유락(流落 ; 타향살이)을 겪었다.
그런 생활 중에서도 당시 정권에 참여한 인사들에게 벼슬을 구하는 편지를 쓰는 등의
자천(自薦)을 시도하였다. 다시 개경으로 올라와 과거준비까지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의와 빈곤 속에 방황하다가 일찍 죽고 말았다.
임춘은 끝내 벼슬길에 오르지는 못하였지만 현실인식의 태도에 있어 유자(儒者)로서의 입신행도의
현실관을 견지하였다. 남달리 불우하였던 생애를 군자의 도로 지켜가고자 하였다.
이인로(李仁老)를 비롯한 죽림고회(竹林高會) 벗들과는 시와 술로 서로 즐기며 현실에 대한 불만과
탄식을 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큰 포부를 문학을 통하여 피력하였다.
임춘의 시는 강한 산문성을 띠고 있다. 그리고 거의 그의 생애의 즉물적 기술이라 할 만큼
자신의 현실적 관심을 짙게 드러내고 있다.
가전체소설인 「국순전(麴醇傳)」·「공방전(孔方傳)」은 신하가 취하여야 할 도리에 대한
입언(立言)이면서 당세의 비리를 비유적으로 비판한 의인체 작품이다.
임춘의 서(書)·계(啓)·서(序)·기 등은 안분지기(安分知機)·가일(可逸)의 경지를 그려내고 있다
. 「장검행(杖劒行)」을 비롯한 장편시들은 불우한 그의 인생에 대한 적나라한 묘사와
비분의 토로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이와 같은 강렬한 현실지향성이 그의 문학의 특징이다. 그리고 그의 문학은
투철한 자아인식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문학사상의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임춘은 예천의 옥천정사(玉川精舍)에 제향되었다.
문집인 『서하선생집』은 그가 죽은 뒤 지우(知友) 이인로에 의하여 엮어진
유고집으로 6권으로 편찬되었다.
『동문선』·『삼한시귀감(三韓詩龜鑑)』에 여러 편의 시문이 실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