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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5 경주 역사문화탐방 자전거 스탬트 투어
1. 일자 : 20. 08. 15. (토) 날씨 : 맑음, 기온 29 ~ 37도 (폭음주의보 발령)
2. 장소 : 경주 역사문화탐방 스탬프 투어 (자전거 투어)
가. 코스 :
1) 1일째 (20.08.15. 토)
0930 진해 출발 ~
1115 삼릉 공용주차장 도착 ~ 삼릉탐방지원센터 ~
1120 포석정사 ~
1141 오릉 ~
1157 교촌마을(경주향교, 월성교)~
1218 첨성대 ~
1236 대릉원(천마총) ~ 첨성대 경유 ~
1251 동궁과 월지(안압지) ~
1301 분황사 ~ 시내 경유 (점심식사) ~
1350 김유신장군 묘(무열왕릉 공사중) ~
1416 황성공원 ~
1505 보문단지 ~
1626 불국사 ~
1640 동리.목월문학관 ~괘릉을 찾아 길찾기 따라
1705 통일전 앞 (알바 / 박물관 앞에서 만나기로 하고 나홀로 괘릉으로 출발 함) ~
1746 원성왕릉(괘릉) ~
1817 국립박물관 (이회숙 미팅 불가 위치학인 / 보문단지로 이동 중) ~
1840 삼릉 주차장 도착 ~ 차량 이동 ~
1920 경주 월드파크 앞 이회숙 미팅 /
2105 진해도착
1일째 경주역사문화 스탬프 투어 종료 / 85Km / 7.5시간
2) 2일째 ( 20. 08.16. 일)
0830 진해 출발
1026 옥산서원
1100 양동마을
1300 석굴암 ~ 1345 토함산 나홀로 산행 ~
1430 불국사 주변 식당 점심
1513 감은사지
1555 원성왕릉(괘릉) 휴식
1910 진해 도착
2일째 경주역사문화탐방 스탬프 투어 차량으로 드라이브 겸 이동
3. 경주 역사문화탐방 스탬프 투어 소개
역사가 살아 숨쉬는 도시 경주는 예난 지금이나 인기 많은 여행지로 불국사, 석굴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있고 신라시대 역사와 문화의 자취를 간직한 경주는
아이들과 역사문화 탐방을 떠나기 좋은 도시이다. 경주 여행을 좀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는 방법으로 경주 역사문화 탐방 스탬프 투어를 하며 신라 역사의
숨결이 깃든 문화 유적들이 곳곳에 자리해 도시 전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라 불리는
경주의 문화 유적지를 방문하다 보면 경주 역사문화탐방 스탬프 투어 프로그램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경주의 대표적인 역사문화 명소 16곳을 방문하고 스탬프를
찍은 뒤 인증사진을 경주문화관광 사이트에 올리면 추첨을 통해 기념품도 받을
수 있다.
◎ 대릉원 (천마총)
대릉원 안에는 미추왕릉, 천마총, 황남대총 등 거대한 무덤들이 모여 있다.
릉과 총, 묘 등은 모두 무덤 명칭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릉이라고 부르고
그 외의 무덤은 묘라고 부르는데 릉으로 짐작되지만 이름이 확실하지 않을 때는
무덤에서 나온 대표적인 꺼묻거리 이름을 따서 총이라고 부른다고 한단.
금관이 맨 처음 나온 금관총, 천마도가 그려진 말다래가 출토된 천마총이
대표적이다.
◎ 첨성대
신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대이다.
2014년부터 무료로 개방되어 관광객들이 부담없이 찾을 수 있는 관광명소가
되었다.
◎ 오릉 (사적 172호)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 등 초기의 박씨
왕 네 분과 박혁거세왕의 왕후 알영부인의 능으로 알려져 있다고 합니다.
박혁거세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만에 하늘로 올라가고 7일 후 그의 유체가
다섯 부분으로 나뉘어서 땅에 떨어졌으며 시신을 수습해 한곳에 묻으려 하자
갑자기 큰 뱀이 나타나 방해를 하는 바람에 다섯 군데로 나누어 묻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 졌다고도 합니다.
4대 탈해왕릉이 이 곳에 없는 이유는 박씨가 아닌 석씨라서 그렇다고 하네요
◎ 경주향교 (교촌마을)
향교는 훌륭한 유학자의 제사를 모시고 지방민의 유학 교육을 위하여 나라에서
지은 국가교육기관이다. 이 곳에는 향교와 함께 경주 최씨의 고택도 함께 둘러볼
수 있다. 1700년 경에 건립된 조선시대 양반집의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어서 그
가치가 크다고 한다. 여기에서 12대에 걸쳐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고 하니 참 대단한 마을이다.
◎ 동궁과 월지(안압지)
안압지는 동궁에 딸린 연못으로 정확한 명칭은 동궁과 월지이다. 이 곳에서
환상적인 아름다운 야경을 감상할 수 있다.
◎ 무열왕릉(사적 20호)
신라 29대 태종 무열왕(김춘추)의 릉이다. 김춘추는 신라 중대의 첫 진골 출신
왕으로 당과 연합하여 백제를 병합하고 통일대업의 기반을 닦았지만 통일을
완수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왕릉 동쪽에는 비석을 세웠던 돌 거북 받침돌과
머릿돌이 남아있는데 무열왕의 둘째 아들인 김인문이 쓴 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글씨가 돋을새김 되어 있어서 이곳이 무열왕릉이 알 수 있다.
국보 25호인 태종 무열왕릉비의 돌 거북은 목을 높이 쳐들고 발을 기운차게
뻗으며 힘차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으로 신라인의 진취적인 기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 김유신장군 묘
충효동 송화산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구릉 끝에 위치한 김유신 장군묘 15세에
화랑이 되어 무예와 지략이 뛰어나 나라에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앞장서서 지휘한
영웅이다. 태종무열왕 7년에 나당연합군이 결성되었을 때 신라군 총사령관이 되어
백제를 병합했고 문무왕 8년에는 고구려를 병합하였으며 한반도 전체를 복속시키려
는 야심을 가지고 있던 당나라 군사도 물리쳤다. 훗날 흥덕왕 때에는 흥무대왕으로
추봉되었다고 한다.
◎ 불국사(사적 502호)
삼국 통일 이후 신라 문화의 황금기를 맞이하여 나라가 안정되고 신라가 곧 불국토
라는 강한 자부심과 신앙심으로 똘똘 뭉쳤던 시기였던 경덕왕 10년(751년)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현생의 부모를 위해 짓기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년)에
완성한 불국사는 부처님의 영원한 궁전을 만들어 북국토의염원과 이상을 조화와
균형으로 현실화 했으며 건축기술과 불교, 토함산의 수려한 자연경광이 어우러진
통일신라시대 사원 예술의 걸작품이다. 아쉽게도 조선 선조 26년(1593년) 왜의
침입으로 대부분 소실되었지만 1969~ 1973년 까지 건물터를 발굴 조사하여
대대적으로 복원하여 현재 모습을 갖추었으며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불국사 앞에 보이는 이층 계단의 아래쪽이 청운교, 위쪽이 백운교(국보 23호)로
끝에 있는 자하문을 지나서 석가모니 부처님이 계신 대웅전으로 들어서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에서 부처님의 나라로 들어 갈 수 있다고 한다.
청운교는 17단, 백운교 16단으로 총 33단으로 이뤄져 있으며 마지막 세 번째
하늘을 도리천이라고 하는데 세계의 중심에 있는 수미산 정상이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의미한다.
아미타 부처님이 계신 극락전으로 향하는 연화교와 칠보고(국보 22호)는 극락전
으로 향하는 안양문과 연결된 다리로 세솟 사람들이 밟는 다리가 아니라 서방
극락세계의 깨달은 사람만이 오르내리던 다리라고 전해지고 있다.
대웅전 앞 다보탑(국보 20호)과 석가탑(21호)이 서로 나란히 마주하고 있다.
다보탑은 화려한 멋이, 석가탑은 수수함이 아름다움이 느껴진다.
도굴꾼들의 표적이 디어 두 차례나 도굴을 당한 시련도 있었으며 탑 복원 공사 중
귀중한 유물 사리장엄구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인쇄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10원짜리 동전 뒷면에 등장하는 것이 다보탑이다.
대웅전(보물 1744호)은 불국사의 대표 건축물로 국보로 지정된 다보탑과 석가탑이
좌우에 있어서 부처를 모신 영역을 구분하는 역할을 하며, 내부에는 영산회상도 및
사천왕 벽화(보물 1797호)가 있다.
극락전 금동아미타여래좌상(국보 27호)는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750년에
복원 하였으며 튼튼한 어깨, 당당한 가슴, 잘록한 허리를 표현하고 있으며 통일
신라시대 불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불국사 석축 (보물 1745호)은 아래에 큰 돌을 놓고 위에는 작은 돌을 끼워 맞춘
정교한 건축기술로 조형미를 잘 나타낸다.
◎ 석굴암(국보 24호)
신라 경덕왕 10년(751년)에 당시 재상이었던 김대성이 창건을 시작하여 혜공왕
10년(774년)에 완성한 건립 당시에는 석불사라 하였다.
석굴암 걱설의 구조는 입구인 직사각형의 전실과 원형의 주실이 복도 역할을 하는
통로로 연결되어 있으며 360여 개의 넓적한 돌로 원형 주실의 천장을 교묘하게
구축한 건축 기법은 세계에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1995년 불국사와 함께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록되었으며 매표소에서 600여m
걸어가야 석굴암이 있다.
석굴암은 전체적인 설계와 공간 배치에서 학문적으로 수학적인 비례성과 과학적인
자연 통풍, 온도 및 습기 조절, 모든 조각의 예술적 완성도, 불교 사상에 근거한
설계 등 예술, 종교적 안목과 높은 과학, 건축기술의 완성판이라고 불러도 무방
하다. 굴을 뚫어 돌을 쌓아 대칭을 이룬 인공석굴은 뛰어난 대칭성과 신비로움에
감탄사가 절로 나온다( 석굴암 내부는 사진촬영 불가)
◎ 동리.목월문학관
가장 한국적인 작가라는 평가를 받는 소설가 김동리 선생과 국민신인 박목월
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곳이다.
김동리 선생은 한국 근대 격변기에 순수문학을 굳건히 지겨왔고 해방 후 새로운
휴머니즘 문학의 바탕을 이룬 세계적이 작가라고 하며,
박목월 선생은 토착정서와 민요가락을 시와 음악으로 승화하여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전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이 두분의 작가적 생애와 작품세계를 엿보면서
힐링의 시간을 가져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 원성왕릉(괘릉)
38대 원성왕의 릉으로 경주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능으로
가는 길목에는 화표석, 문인석, 무인석과 돌사자들이 마주 보게 세워져 있는데
이중 무인석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서역인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끌고 있다.
능 둘레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으며 능의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받늗다.
◎ 감은사지(사적 31호)
문무대왕이 삼국을 통일한 뒤 왜구의 침략을 막으려고 세우기 시작해 신문왕 2년에
완성된 절로 지금은 절 터만 남아있다. 감은사지 금당 터에는 신문왕이 절을
지을때 죽으면 동해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는 선앙의 유언에 따라 금당
구들장 초석 한쪽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통로를 만들다.
감은사지 동, 서 삼층석탑(국보 112호)의 장대한 모습을 만날 수 있으며. 경주에서
볼 수 있는 3층 석탑으로는 가장 크다고 한다
● 문무대왕릉(사적 제158호)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가 죽은 뒤에 용이
되어 불법을 받들고 나라의 평화를 지킬 터이니 나의 유해를 동해에 장사지내
라.(중간 생략) 내가 숨을 거둔 뒤에는 불로 태워 장사할 것이요, 초상 치르는
절차는 검소와 절약을 좇아라. "문무왕은 죽어서 용이 되어 신라를 지키겠다고
말하며 동해에 자신의 시신을 화장해 뿌려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유언에 따라, 신라 사람들은 동해의 큰 바위섬에 장사를 지냈고 그 바위를
대왕암이라 부르게 되었습니다.
● 주상절리 파도소리길
주상절리 파도소리 길은 읍천항 공원(읍천)부터 하서항(진리)까지 1.72km의
거리로 바다를 보며 네 가지의 주상절리를 만나는데요. 누구나 쉽게 걸어 다닐
수 있습니다. 절대 어렵지 않아요.
■ 주상절리(천연기념물 제536호)
마그마에서 분출한 1000℃ 이상의 뜨거운 용암은 상대적으로 차가운 지표면
과 접촉하는 하부와 차가운 공기와 접촉하는 상부부터 빠르게 냉각됩니다.
용암이 빠르게 냉각하면서 수축되어 용암의 표면에는 가뭄으로 논바닥이
갈라지듯 오각형 혹은 육각형 모양의 틈(절리)이 생기게 됩니다.
이렇게 냉각수축 작용으로 생긴 틈이 수직 한 방향으로 연장되어 발달하면
기둥모양의 틈이 생기게 되는데요. 이것을 주상절리라고 합니다.
■ 부채꼴 주상절리
무려 10m가 넘는 돌기둥이 모여 부채 모양을 이루고 있는데요. 살아있는
지질박물관 같이 신비합니다.
■ 정혜사지 13층석탑(국보 제40호)
경주 정혜사지 13층석탑은 정혜사 터에 세워졌으며 흙으로 쌓은 1단의 기단
위에 13층의 탑신을 올렸습니다.
통일신라시대에서는 그 비슷한 예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모습인데
1층 탑몸돌이 거대한데 반해 2층부터는 몸돌과 지붕돌 모두가 급격히 작아져
서 마치 2층 이상은 마치 1층탑 위에 덧붙여진 머리장식처럼 보입니다.
탑은 보기 드문 13층이며 1층에 비해 2층 이상이 일반적인 체감의 비례를
무시하고 줄어든 점이 눈여겨 볼만합니다.
◎ 분황사
황룡사지와 담장을 공유했던 분황사는 모전석탑(국보 30호)과 신라시대의 우물,
비석받침돌이 전부 이지만 선덕여왕 3년(634년)에 세운 신라 명찰 중 하나이며
여왕의 향기가 물씬 나는 이름으로 향기‘분’에 황제 ‘황’자를 써 분황사라 하였으며
발굴조사 결과 분황사는 황룡사에 버금가는 규묘의 호국사찰이였다.
우리 민족이 낳은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거쳐 간 사찰로 명성이 높으며 역사
가 오랜 분황사는 몽고의 침략과 임진왜란 등으로 모두 유실되었었고 지금의
분황사에 둘러놓은 어른 키만 한 담장 위로 석탑의 위 위부분만 보이는 자그마한
절이 되었다고 한다.
◎ 포석정지
신라의 별궁이 있던 자리로 우리나라 사적 1호이다. 시냇물을 끌어들여 수구에
흐르게 한 뒤 물위에 술잔을 띄워 시를 읊고 노래를 부르며 즐겼다는 유래가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화려했던 궁정생활의 단면을 보여주는 포석정은 현재 건물은
없어지고 전복 모양의 석조 구조물만 남아있다.
◎ 양동마을
경주시 북쪽 설창산에 둘러싸여 있는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 종가가
500여 년 동안 전통을 잇고 있는 집성촌으로 물(勿 )자 모양의 산세와 지세가
명당 중의 명당인 유서 깊은 양반 마을이다.
경주 손씨오 양민군 손소, 우재 손중돈 같은 인물이 있고 관련 중요 건물로
월성(경주) 손씨 종가인 서백당, 우재 손중돈이 분가하여 살던 집인 관가정, 당시
양반집의 전형적인 형태의 낙선당, 우재 손중돈의 증손이 겁립한 정자인 수운정,
강학당과 쌍벽을 이루는 손씨 문중 서당인 안락정 등이 있다.
세가지 파로 나누어진 여강 이씨 중 이곳 양동마을은 이세정이 시조인 경주파가
대를 이어오고 있다. 조선 중기의 성리학자 회재 이언적과 그의 동생 농재 이언괄
이 있고 관련 중요 건물로는 여강 이씨 종택이자 회재 이언적 선생의 부친이 살던
무첨당. 이언적 선생의 모친을 봉양하라고 중종이 지어준 화려한 지붕의 향단,
향단의 맞은편에 자리잡은 정자인 심수정, 이씨 문중 서당인 강학당과 경산 서당
등이 있으며 그 외 에도 두 문중 사람들과 관련된 여러 건물들과 후손딜 거주하던
집이 많은 양동마을은 안동 화회마을과 함께 조선시대 양반마을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2010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며 씨족 마을의
대표적인 구성요소인 종택, 살림집, 정사와 정자, 서원과 서당, 그리고 주변 농경지
와 자연경관이 거의 완전하게 남아 있어서 볼거리가 많은 곳이다. 마을 토담길
사이를 천천히 걸으며 오랜 역사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 옥산서원(사적 154호)
조선 중종때의 문신인 회재 이언적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1674년 선조에게서 옥산서원이라는 이름을 하사 받아 사액서원이 되었는데 고종
5년(1868년)에 흥선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을 내렸을 때에도 헐리지 않고 그대로
살아남은 47개의 서원과 사당 중 하나라고 한다.
특히 옥산서원 현판은 추사 김정희가 직접 쓴 글씨라고 하니 눈여겨 볼만하다.
4. 사진감상
08.15.(일) ~ 08.17.(월) 임시공휴일은 주말 출근하여 근무하기로하였으나
서울, 경기 지역에 급속도로 확산되는 코로나 19로 출근이 취소되어
주말 기본 계획을 부분 수정하여 08.15.(토) 이어 경주 역사문화탐방 스탬프 투어를
차량으로 드라이브를 겸하여 마무리하기로 하고 출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