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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달걀
한금산 시집
한금산
강원도 인제에서 출생
춘천사범학교.
한국방송통신대학.
충남대학교교육대학원
한국문인협회 제도개선위원
한국동시문학회 회원
대전문인협회회원
대전시인협회회원
대전문인총연합회회원
명동문학회회장
시집 : 낙엽속의 호수
내린천 서정
여울물 소리
어머니의 달걀
동시집 : 다람쥐 운동장
하늘도 잠을 자야지
별씨 뿌리기
산문집 : 노을빛을 퍼 올리다
E-mail : keumsan004@hanmail.net
☎ : 010-6405-5923
自序
가지가 잘린 상처도
아픔과 함께 그 흔적까지
세월이 지나면 묻혀버리고
겉으로 보기에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잊혀진다.
그 나무를 켜 판자가 되면
놀랍게도 고스란히 숨어 있었음을 알고
다시 한 번 놀란다.
옹이가 되어 무늬로 되살아나고
그 아름다운 무늬는 더욱 돋보인다.
잊었다고 생각했던 일을
이리도 곱게 다듬을 수 있다는 사실
그 값진 상처의 고마움을
나는 더욱 아끼고 싶다.
더 오래 가고
더 아름다운 삶의 흔적으로
더욱 단단한 나로 키워주는
아름다운 상처로 남기고 싶다.
2012년 겨울
지은이 한 금 산
차례
1부 : 어머니의 달걀
어머니의 달걀 …………………………………7
한(恨) …………………………………………8
황태 ……………………………………………9
목어 ……………………………………………11
호반에 서면 ……………………………………12
견우의 땅 ………………………………………13
그해 겨울 ………………………………………15
고향 ………………………………………………17
사랑니 ……………………………………………18
방태산 ……………………………………………20
산속 마을 …………………………………………21
감자꽃 지면 ………………………………………22
밤길 ………………………………………………23
둑길 ………………………………………………24
탑돌이 ……………………………………………26
골목길 ………………………………………………27
비단개구리 …………………………………………28
별이 뜨면 …………………………………………29
솔바람 소리 ………………………………………30
바위에서 ……………………………………………32
박 ……………………………………………………33
2부 : 귀고리
귀고리 ……………………………………………37
감자꽃 ……………………………………………39
봄에는 ……………………………………………40
곰나루 노을 ……………………………………41
종소리 ……………………………………………42
생각난다 …………………………………………44
그 얼굴 ……………………………………………45
배나무 밭을 지나며 ……………………………46
못 잊어 ……………………………………………47
당신 생각에 ………………………………………49
낮달 ………………………………………………50
그리움은 가슴마다 ………………………………51
조약돌 ………………………………………………52
그냥 두세요 ………………………………………53
지우기 ………………………………………………54
기다리는 나무 ………………………………………55
꽃샘바람 ……………………………………………56
빗소리 ………………………………………………57
나비 …………………………………………………58
그런 말 안 했다 …………………………………59
3부 : 비닐봉지 바람에 날리다
비닐봉지 바람에 날리다 …………………………63
몌별 …………………………………………………65
돌탑 …………………………………………………67
부도 …………………………………………………68
자화상 ………………………………………………69
청설모 ………………………………………………70
타인들 ………………………………………………71
그림자 ………………………………………………73
날개를 달아 ………………………………………74
바위섬 ………………………………………………75
반달 …………………………………………………76
발바닥 ………………………………………………78
간이역 ………………………………………………80
부탁 …………………………………………………82
타인이 되는 날 ……………………………………84
쓸쓸한 날 …………………………………………85
손가락 ………………………………………………86
보문산의 햇살 ………………………………………87
선악과는 왜 따 먹었을까 …………………………89
별이 보이는 하늘을 가진 사람 …………………91
4부 : 바다를 건너간 개미
바다를 건너간 개미 …………………………95
시원하리라 ……………………………………97
거짓말을 팔아요 ………………………………98
바람 ……………………………………………99
여름밤 …………………………………………100
장마 ……………………………………………101
고무나무 ………………………………………102
겨울이오기전에 ………………………………103
잔디밭 …………………………………………105
한낮 ……………………………………………106
조롱박(2) ………………………………………107
한산도 …………………………………………108
해바라기 ………………………………………109
가을소리 ………………………………………110
무엇이 남았나 …………………………………111
봄마다 피는 잎 …………………………………113
댓돌 ………………………………………………114
노을 받은 호숫가 ………………………………116
눈 내리는 밤 ……………………………………117
개 …………………………………………………119
바람과 물 ………………………………………120
가을 ………………………………………………121
평설∥송백헌/향수의 서정과 의미의 재해석………122
제 1 부
어머니의 달걀
어머니의 달걀
이 것 가지고 가서
공책 바꿔 써라
둥지에서 꺼내주신 따뜻한 달걀
지금 나는 어디서
그 따뜻한 달걀을 받아야 하나요?
어머니!
한(恨)
얼어붙어
소리가 나지 않는 울음을
가슴 속에 빙산으로 숨기고
그렇게 살았다
칡잎에 옥수수떡을
쑥 잎 모깃불 가에서
또
눈물 삼키듯 먹었다
돌덩이가
가슴을 밀어 올려도
돼지 똥 볶아
불돌로 지지며 참았다
밤새워 대신 울어주는
소쩍새 소리도
속을 더 뒤집어 놓아 싫었다.
또 어디쯤 다가올
맺힌 숨소리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다.
그렇게 살았다
황태
어느 먼 나라에서 왔기에
이방의 서러움을
혹독하게 치러야 하는가?
얼어 부푼 피부에
얼음 박혀
자지러지게 아픔이 와도
입만 벌리고 소리도 내지 못하는가?
중생을 위해
보시하려
동한거가 익숙해질 때까지
체념의 연습
승화 된 자리마다
얼음꽃으로 피는 오늘도
눈을 감지 못하고
먼 먼 바다가 그립다.
턱이 얼어 뼈가 열리는 아픔을
참아내는 까닭은
사랑하는 이에게
찌그러진 삶이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이승에 심어보고 싶은
가녀린 열망은
잊어야 할 번뇌 속에
잠을 잔다.
목어
짧았던 인연을
긴 사랑으로 새겨두려
세월을 빗장으로 잠금하고
눈뜨고 지샌다.
가슴 베어내는 소리
행여나 흩어질까
서둘러
눈물로 붙여 감추고
지느러미 곧추 세운다.
날마다 줄어드는
달빛 속에서
소리 없이 삭아 내리는 마음
새벽 잠 깨어
가슴만 두드린다.
호반에 서면
호수가 고독해지면
물안개 위에 달이 내린다.
달처럼
언제나 혼자 와
돌아서서 닦아내는
눈물
가슴 뛰는 수면 위에
달빛에 젖은 사랑은
눈물에 더 잘 녹는다.
바람이 씻어 간 자리에
별을 심어도
가로등으로 모여드는
빛줄기 되어
마음은 자리를 잃는다.
깊어갈 수록
무게를 더하는 불안은
안개처럼 수면을 덮고
일렁이는
마음만 남는다.
견우의 땅
발꿈치 찌든 때가 홍수에 벗겨지고
길이 더 열리면
베틀소리 조금 가까워지려나.
흙 묻은 발바닥
말뚝 박힌 가슴
까치는 오늘도 날아오지 않았다.
묵은 냄새도 말라붙은 상처에
맨살 등허리로는 폭염이 쏟아져도
뜨거운 눈물은 아직도 이어진다.
망초 꽃 하얗게 피고 져도
달빛이 깔리면
냇가 조약돌은
물소리에 맞추어 세월만 세고 있다
구름이 바람을 끌어 바다로 가고
깃대 끝에 매단 네가 푸르게 나부끼던 날도
새로 세워진 가로등은 빗줄기만 세고 있었다.
소식 놓친 인연의 고리를
머리카락 엮어
밧줄로 이어 봐도
우수의 그림자가 쌓인 흑백 사진첩에는
느리게 가을이 녹슬어갔다.
토루소로 남은 견우
비어만 가는 땅.
그 해 겨울
바람이 홰를 치는 강 언덕
눈도 바위 뒤에 숨던
겨울
하늘도 부어오르듯
얼어버리면
새 떼가 덤불 속으로 몰렸다.
무릎 세워
삼베를 비벼 잇던
갈자리 방에
삼톱 같이 무딘 감정이
지스레기처럼 엉키면
수숫대 김치우리
동치미 국물이
앙금을 녹여주고
쇠죽 끓이던 사랑 부엌
아궁이 앞에선
참새 잡을 통발 수리하고
조카아이는 벌써
침부터 삼켰다.
긴 겨울이
얼어붙어도
얼지 않는 가슴을
연기처럼 풀어내던
그 해 겨울
쉬어도 끊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솟아오르게 얼어 굳어지는
얼음처럼 단단해 갔다.
고향
갈미봉 아래
내린천 휘돌아가는
솔밭 가로 하늘빛 맑은 물이 흐르는 곳
스무나무 아래 서면
줄렁바위 뱃터에서
퉁소 소리에 가슴 조이던 곳
풋사과 던져가며
물장구치던 그 물속에
모래무치 떼로 몰려다니듯
같이 놀던 친구들은 어디로 갔나?
나룻배는 어디가고
섶다리도 없어지고
콘크리트 다릿발만 높이 섰네
채독소 바위 꼭대기 물새는
어디 가서 안돌아오나
사랑니
홍수 져 강물이 넘치면
아름드리 통나무가 떠내려가고
다시 개면
깨끗한 물밑씻개 가지들이
지난날의 어려움의 높이를 기록했다.
깊은 골 귀틀집에
칼바람이 녹는 날
초승달 눈썹 같은 덕이가
가재 풀 내민 싹을 보고
멍덜바위 밑을 뒤졌다
언제쯤이면 저 아래 넓은 들에
내려가 살 수 있을까
파고드는 생각은 체념으로 굳어 갔다
꽁꽁 여미어도
틈새를 비집는 솔바람 소리
바닥을 울리는 구름 지나는 달
산 그림자 끌어 올려
노을이 드리우면
가슴을 감싸오는 어머니 치마폭
마른 바람 지나는 가슴
모래 바람이 되는데
젖가슴 도드라져 자라는 만큼씩
사랑니 커 갔다.
방태산
방태산에 가면
한 아름 넘는 물박달 나무가
파랗게 이끼를 입고 있다
바위도 물도
이끼 옷을 입었다.
순수가 더께로 짜여진 옷
이끼 빛 물이 흘러
논과 밭으로 들면
들판도 파랗게 물이 들고
그것을 먹고 사는 사람들도
파란 이끼가
닦아지지 않게
절어 붙었다
천둥 치고
번개가 뒤흔들어도
내 세상 내가 만들어
이끼만 키운다.
산속 마을
갈미봉이 내려다 보고
내린천 물이 휘돌아
품어 안은 산골 마을
덜 벗겨진
사람들이
흘러내리다 만 산 비알 돌처럼
덜 다듬어진 모서리 부디치며
거친 사랑을 하고 산다.
뚝지가 진흙 속에
몸 숨겨도
바윗돌 돌아 모래는 쌓이는데
수줍게 벗어 내리는
산 그늘에서 사랑을 하고
안길 것도 없이 다가붙은 앞산이
발등에 올라선다.
일찍 지는 달처럼 해까지 늦게 떠도
비탈진 밭가에는
느린 봄이 손목 잡아
숱 많은 머리 결을
실바람에 안겨주어
복사꽃빛 사랑만은
진한 향을 자아낸다.
감자 꽃 지면
감자 꽃 지고나면
새알 감자 캐어내지요
강낭콩도 여물어
함께 넣고
삶은 감자 터뜨리면
속 깊은 참 맛이어요
함께 같이 들면
감자 같은 정이 배어지고
속까지 구수해 질 거예요
그저
감자처럼
둥글게 살 거예요.
밤 길
달빛 내린 강둑길에
따라 나서는 별빛
거기
내 그림자가
발소리 붙여두고
마음만
먼 날로 되돌아간다.
아무도 없이
홀로여야
밤길 제 맛이 나는데
자꾸만 가지 치며
얼굴들이 매달린다.
둑길
강물이 달려와 돌아 나가
여울을 지나 작은 소를 이루고
늙은 버드나무가 두 그루
허옇게 뿌리를 풀어 헤쳐
피라미 떼
군무를 추듯
얼마 남지 않은 햇살을 되박질 한다.
벌거벗은 유년이 자맥질하며
솟구쳤다 가라앉는 데
긴 여름 하루가
둑길처럼 그림자를 만든다.
어느 세월에 자라려는지
작은 고기들은 내일이 없는 듯하지만
안개 낀 둑길처럼
끝이 가물거리는
지나온 날은 노을 속에 곱기만 하다.
한 줄로 뻗은 이 둑길을
내일도 다시 걷고 싶어
이슬비 속 풀잎에 젖은
아쉬움을 매달아둔다.
걸어와서 걸어가는
둑길에
사랑했던 맑은 물은
조잘대던 소리만 여울에 남겨두고
바다로 갔고
뿌리 파인 버드나무로 서서
노을 속에
물소리에 피어난 안개에 젖어
둑길을 따라 찾아오는
땅거미를 기다린다.
탑돌이
풍경소리 매달려도
달려만 가는 산 그림자
헝클어진 마음을 모아
대웅전 뜰에 펴고
바투 잡는 속마음
염원을 손끝에 달아
꽃잎으로 날린다.
채이는 치마폭이
인연처럼 걸리는데
한 점 눈빛 모이는 곳으로
돌고 돌아
모아지면
가벼워진 마음은
구름이 되어
탑 끝에 매달린다.
골목길
골목길에 서성거리면
이끼 입은 돌담 틈마다
끈처럼 이어지는 어리석은 순수가
돌마다 되살아나는 얼굴들
소나기 내리고 나면
도랑물에 물레방아 만들어
흙 묻은 얼굴로
가슴 뛰게 자랑스럽던 시간이었는데
세월도 주름이 지는가?
가슴 철렁이는 그런 날이었다는 것이
아무에게도 자랑스럽지 않은 지금
달빛 같이
이 자리에 다시 서도
멈춰 설 줄 모르는 골목길에는
전선줄 얽히듯
복잡해지는 어지러움이 온다.
변신 로버트를 든 아이가
이상하다는 듯
아까부터 나를 보고 있다.
비단 개구리
배가 등이 되도록 뒤집고
세상을 뒤집고
죽은 듯
속여
가증을 위선한다.
한겨울의 한기를 느끼는
비단 무늬
음울한 울음소리는
야유였다.
믿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어떻거나 한세상인데
믿거나 말거나
그냥 비단 개구리다.
별이 뜨면
짙푸른 소리가 나도록
소망을 밀어 올려
쓰르라미 애 터지는 소리에
별빛이 부서지리
조약돌이 일렁이는 물속에
떨어진 눈물까지 별이 되어
발밑이 시려오는 밤
갈대 잎 속삭이는
싱그런 바람도
가슴을 조여 오는데
쏟아져 내리는 네 웃음소리
푸른 별이 되어
넘친다.
솔바람 소리
가장 외롭게 만들어 주던 사람은
언제나 달빛처럼
솔바람이 되어
핏줄 속까지 가득하게
백양나무 잎들의 얘기와
별들 보다 더 많이 깜박여주는 소리가 된다.
보아야 보이는 것일까?
소리로 보이는 싱그러운 얼굴이 되어
파고드는 고운 빛은
늘 가슴 바닥에서
빈 둥지의 그늘을 만든다.
가고픈 곳은
언제나 그 때
눈이 덮여도
새순이 돋아도
똑 같은 싱그러움으로 달려들어
흔들어주는 가슴
안개 낀 강 건너에서
아쉽게 손 흔들어
바람에 묻어 건너오는
솔바람 소리
기다리지 않아도 오련만
외로움을 불러오는
달빛 속에는
솔바람 소리 가득하다.
바위에서
바위에 올라서면
구멍 난 가슴에서
바람소리가 들린다.
세월이 미끄러지는 소리
저 아래 동네에는
모두가 깃발을 달고
자랑스레 어깨를 높이는데
나는 왜 꼬리에 매 달
작은 댕기하나 없는가?
스멀스멀 기어 나온 생각은
밑그림마저 흐려
형체가 이어지지 않고
눈 꼬리가 흐려진다.
얼마나 많은 것을 견디어냈을까?
참아온 상처에 이끼가 덮이도록
사랑을 삼켜버린 바위는
또
넘어가는 석양에
입 다물어 비밀을 묻어둔다.
박
달이 뜨면
초가지붕 위에
하얗게 웃고
둥근 배를 내 놓았던 박
그물망을 잡고
막춤이라도 추듯
바람에 흔들리다
허리 잘룩해진 조롱박
제 2 부
귀고리
귀고리
어느 공주의 품위를 증명하다
자리를 잃어
외로운 모습이 되었구나
이 자리에 들어오던 날
긴 숨소리 넘기는
침을 삼켜
사랑의 부절(符節)로 앉은
귀고리
꽂혀 있는
둥근 기다림에서 보내는
울림의 소리가 가슴을 파고든다.
어쩌다 네가
내게 안겨와
노을 속에 흐르는
속살을 보듬을 수 있었기에
통째로 떨어지는 저 까마득한 절벽을
흔들림도 없이 받아드릴 수 있었지
귓부리에 매달리듯
기대어 온
가녀린 듯 단단한 숨소리로
노을 속을 빛내주는
귀고리
감자꽃
하얀 감자 꽃 피면
누렇게 뜬
보릿대궁 얼굴도
새알감자가 된다.
달챙이 숟가락처럼
모질어졌던 가슴팍이
꽃분 나는 감자로 열리고
노란 속살을 내민
꽃술은
어느 새
그이보다 미더워진다.
속울음도
백기를 들고
구겨진 가슴 밭의
일그러졌던 마음을
저울질 해 넣어두고
서럽도록 질박한
감자 꽃으로 피어난다.
토박한 자갈밭에
희디흰 새살
하얀 낮달 쳐다보는
너는 감자 꽃
봄에는
어느 날을 위해
참아왔던가?
하늘 끝을 향한 기다림이
이제
망울 티워
노랗게 사랑을 연다.
거기
네가 있어
하늘을 열어주면
파르르 떨리는
작은 잎을
흔들어 보리
곰나루 노을
젖은 눈빛을
지녀보지 않은 이
곰나루 해질녘
노을 잠긴 강물을 보라
돌아보면
어지럽게 상처 났던 꽃잎들도
눈물처럼 맑아져
별이 되어 네 눈에 드니
그 순수한 사랑이
붉게붉게 가라앉는
곰나루 노을빛
천 년 전 사랑이
여울에 산다.
종소리
바람이 옆구리를 건드리지만 않았어도
벙어리 되어
온기를 뱉어내지 못한 채
가슴만 텅 비어 있었으리라
이슬비 방울이 머리카락에 매달리던 날도
허허로운 벌판을 건너
꽃잎 날리는 햇살을 주워
네 가슴에 한 줌 넣어주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왔지
봇물 따라 물잠자리가 느리게 날아간 곳은
아주 오랜 기억 속의 동굴
질펀한 이끼아래
거기도 방울방울 울림의 소리가
풀린 눈동자처럼 살고 있었다.
굴뚝새가 덤불에서 날아오고
포로롱 소리가 나자
숨을 죽여야 목숨이 산다고 생각하고
와락 당겨 너의 입을 막아버렸다.
종소리에도 꽃가지가 꺾인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듯
무디게 베인 자리의 아픔을 잊어갈 때
더듬적거리는 혀끝에
타액처럼 묻어나는 소리
스무나무 가시처럼 박혀와
의식과 무의식의 사이를 가르는
끊어졌다 이어지고 이어졌다 끊어지는
가슴 속에서만 살고 있는
종소리
생각난다
잠에서 깨어 눈을 뜨기도 전에
구름 속 같은 저 멀리로부터
다가오는 발소리가
생각난다.
문을 열기도 전에
달빛 속에 묻어오던
그 미소 가득한 얼굴이
생각난다.
바람이 불어오기도 전에
흔들리는 가로등 아래
서성이던 뒷모습이
생각난다.
눅눅한 하늘 가에
산비알 기어오르는 새벽 안개로
언제나 따라나서는
생각은
그렇게 꼬리를 잡고 온다.
그 얼굴
강촌 모래같이 깨끝했던
고운 꿈 깨어질까 두렵고
가슴 덜컹 내려앉을 만큼
이지러져 있을까 무섭고
전철역으로 바뀌어진
새로 뻗은 철길처럼
다른 길로 갔는가 겁나서
주저앉아 쥐어뜯으면서
그 때 그 얼굴만 그린다.
배나무 밭을 지나면
향교가 있는
언덕길 넘어
배나무 밭
배꽃 핀 속에
다정하게 앉은 집 한 채
팔짱 끼고
한 번만 다시 걸어봤으면
배꽃 같은 네 얼굴이
내 안까지 환해지게
안개 핀 가슴에
어룽지는
배나무 밭 그 때 그 집
못 잊어
잊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잊혀지지 않는 것은
페르퀸트가 된 내가
솔베지를 그리는 것이다
지우지 말아야지
접고 또 접어 넣어두어
그대로 한 세상 가야지
열면 빛바래 질 것 같아
네게도 안보이고자
그래야 온전한 내 것
변했어도 안 변한
속내 접어 또 둔다.
눈 내리는 강 건너에서
손 흔들어주는 모습으로
점점 희미해져 가는 그림
기억을 다잡아 당겨본다.
반백년쯤 왔어도
갈수 없는 이 마음
용서를 빈대도
받아줄 수 없게 됐다
시간이 그려낸 흔적은
갈수록 깊이 패이고
오래된 벽에 종기가 나듯
튀어나오는 그리움의 병
당신 생각에
바다가 그리우면
소라가 되고
달무리 지는 날 밤이 되면
박꽃으로 피어
가슴 가득 번지는 모습이
엉키고 또 엉켜
피어나고 또 지면
따뜻한 이야기만
안에 모아 쌓으리
따라다니며 치맛자락 잡고 흔들던
실바람의
그 힘 빠진 손을 놓지 않으려
속살 파고드는 아픈 가슴에
오래오래 새겨두리
노을빛이 내려
하구를 곱게 물들이고
땅거미 기어드는 때가되면
강가에 서리.
낮 달
거기
작은 마을이
나무숲에 은빛으로 나앉으면
낮달이 뜬다.
찔레꽃처럼 가느다란 슬픔도
향으로 번지는
생머리 흔드는
솔 향처럼
뺑대 밭 한여름의
뜨거운 입김이 묻는다.
흩어진 가슴 조여
겨울 빛 같은 식은 그리움도
부서지는 기억 속의 너
멍들지 않은 가슴 한쪽을 찾아
탕개 틀어 다가가고픈
작은 마을에
조그맣게
은빛으로 낮달은 떴다
그리움은 가슴마다
육림극장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
영화 제목처럼
가슴에 뿌리박고 살고 있다
수많은 사연이 녹슬고 삭아도
그 그림으로 살게 하려
다시는 보지 않으려고
어금니에서 눈물이 나도록 참았다.
네 가슴에도
그리움이 고여 있는지
그런 것은 몰라도
내 안에는
출렁이는 소리가
잠자는 날이 없다.
조약돌
여울물에 달빛 부서지면
나는 너를 건져내어
알몸을 말렸다.
한낮에 달구어진 바윗등에서
이슬이 흐를 때까지
숨소리 낮아지면
여울물소리 다시 커지고
흘러내리는 별빛 속에
눈물은 이슬처럼 잦아진다.
바람 멎어
물빛 맑아지는 하늘 되면
거칠어진 손잡아
눈 맞추며 주름 셀 때
손 때 묻은 조약돌에
밤새 신열이 올라
식은 땀 속
꿈자리가 어지럽다.
그냥 두세요.
사랑이 오면
받아서 안아주세요.
밀어버리는 일은 없게 해요
가겠다면 그냥 가게 두고요
냇물이 소에 머물다
바다로 다시 가면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니
그리움을 만들지도 마세요.
그리워지면
그냥 그리워하고
바람처럼 자취도 없이 흘러가게
그대로 두세요.
한포기 작은 꽃들이
하늘을 가지고 싶어 하고
구름을 가지고 싶어 하던가요?
그냥 그동안만 함께 해요
미워하지도 말고요.
지우기
‘무척 그리다 잊었노라’
이렇게 말한 그는
잊을 줄 아는
슬기로운 이었는가?
갈수록
가을 강물 속처럼 투명해지고
물 속 조약돌처럼 영글어
옹이로 굳게 박혀
지우지 못하는 너를
그리다 그리다 더 그렸노라
변했다는 것이 무섭고
그 때 그 모습을 간직하고 있고 싶어
다시 찾지 않기로
눌러도 눌러두어도
옆으로 삐져나오는
그 비릿했던 것이 올라오고 말더군
지우기보다 차라리
다치지 않게 감싸
바닥 깊숙하게 새겨두리라
소리까지 살아나는 얼굴이
집을 짓게 하리라
기다리는 나무
자지러지는 향내에
코끝이 부어오르도록
진한 사랑을
가슴에서만 태워버린
그늘진 잿더미다.
발목에 족쇄라도 달았나
무지막스리 동구밖에 서 있는
느티나무는
그 자리에서 늙어버렸다
낯설어진 바람이
담장 아래서 쉬는 계절에
두터워지는 옷의 무게만큼
가늠하기 어려운 마음을
오늘도 기다려본다
느티나무는 행복하다
기다리는 행복한 즐거움
기다리는 샘이다.
꽃샘바람
그렇게 가는 이
너 뿐이랴
때 못 찾은 찬바람에
우수수 날려
낙엽 지듯 꽃잎 떨궈도
속살 떨며
터진 살 아물면
또 다시 흩어지는 내일이 온대도
연두 빛 속잎을
꽃보다 더 많이
다시 만들어
아팟던 만큼
울분 삭이며
눈물 밴 손등 씻고
푸른 종소리 날리면
가슴으로 받아
사랑했던 마음만 모아
전해주리
빗소리
먼 곳으로부터
바람으로 다가와
잔디밭에 내리는 빗소리
간질이며 내려앉아
그림자를 지워내고
출렁이는 마음은 깊이를 모르게 가라앉는다.
눈이 뜨이는 당신의 그림자가 되고
녹아드는 마음이
또 한 삶을 네게 던지고 싶어
가슴으로 소리를 새긴다.
바람이 일어
낙엽 지는 날이면
네가 울기 전에
내가 먼저 울어야 한다.
젖어드는 바닥에
소리를 새겨
그림을 그리는
빗소리
나비
꽃비는 구름과 구름 사이에서 내릴 것을
눈 감아도 알 수 있는
습지 아래 하얀 바위
달빛은 구름 사이로부터 그 바위에 내린다.
냇물 가에 앉으면
바다 끝까지 저 물을 따라가야 할 것 같아
몸이 미리 피곤하다
미워하던 사람과
사랑하던 사람이
한 배를 저어올 것 같은 두려움
물소리가 노 젓는 소리로 바뀌는 것은
공포로 자지러지는 마음인데
혀끝의 단 맛이 어설프게 녹아내린다.
가두어 두었던 나비가
상추 겉절이 진액에서
아픈 추억을 날개로 날린다.
그런 말 안했다
사랑한다고
그런 말 안했다
사랑했다고
그런 말도 안했다
사랑할 것이라고
그런 말 한 적 없다
그런데 왜
한번만 손 잡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나?
제 3 부
비닐봉지 바람에 날리다
비닐봉지 바람에 날리다
별이 마을로 내려와
작은 불을 밝히던 밤에도
나는 별이 되기를 바라며
흔들리는 세상의 현기증을 참았지
비린내에 울컥 토악질이라도 하고픈 날은
바람 부는 언덕에 올라
유년의 질퍽이던 갯벌까지도 말리고 싶었지
하늘 끝이 내 발바닥이어도
뜨거운 햇볕을 가두어
네 뿌리가 부어오르도록
탱탱하게 긴장하며 가을을 꿈꿨지
사랑하는 법도 모르며
부둥켜안은 팔꿈치가 아파와도
저항이라는 말까지 잊은 채
찢겨지는 비닐봉지가 되어
바람을 타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지
허망이 무너지고 꿈이 거기 있는 줄 알고
부풀대로 부풀어
위도 아래도 가늠 할 줄 모르면서
날아 오른 비닐봉지
그것이 나였음을 알았을 때는
천지에 비가 내리고 있었지
찢겨진 상처 아물지 않아도 좋으니
바람 한번 잘 맞나
높이 높이 날아올라 보자
몌별(袂別)
그래
네가 죽어봤자 어디로 가겠니?
결국 내 안에 있을 것을
숨소리까지 새겨진 가슴이
발목부터 무너져
수미산에 갈 수도 없는데
왜 위로 오르나?
무너진다고 지워지지 않는 것을
무게로 가늠하고 나면
밤이슬에 영혼이 젖어
바람타고 돌아와
천년이 옆에 선다.
유품으로 남긴 우울과
지어준 이름을
몇 줄의 시로 싸
들국화 향내 나는 언덕에
흑백사진으로
남으리
항상 주변을 맴도는 바람이
시린 코끝을 못 떠나
풀린 눈동자를 안는다.
밤마다 이슬로 내려
마르지 않고 쌓이는
또 다른 이별
돌 탑
숨겨 둔 마음 태워야 하는 날
큰 돌 한 개 옮겨 눌러두고
다시 가슴 조여 오면 돌 하나 더 올려
돌탑이 되었다
새 잎 돋아날 때
밑돌 놓았는데
한 길 높이 맨 윗 층에 낙엽이 앉아도
그리움의 높이만 진해지고
무게의 크기만 자라났다
차라리
까마득한 먼 날까지
기다려 서서
그리는 속을 삭여내리며
내가 돌탑이 되련다.
부도 (浮屠)
세월이 깊어 갈수록
차가운 바람소리
영글대로 영근 영혼은
사리로 누워
전생을 기리는가?
이승의 인연이
고스란히 자리 잡고
사바중생에
때 묻히지 않으려
이끼로 감싸
또 천년을 살으련다.
저승 저 편을 바라는
삶인 것을
마음 추tm리고 찾아봐도
아슴아슴
내 가슴에 묻어둘
사리하나 없다.
자화상
나를 살게 한 것은
여울물 때문이었다.
소(沼) 한번 만들어보지 못하고
늘 울어대며
조약돌을 굴렸다.
하구에 이른 지금도
바람은 자지 않아
물결 일렁이는
잠 못 드는 밤이다
청설모
전깃줄을 타고
살구나무까지 내닫다가
아, 거꾸로 매달리고 만 청설모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냐
떨어지지 않고 매달려
다시 용쓰고 제자리 찾을 수 있으니
길바닥에 떨어져
질주하는 차바퀴에라도 치는
그 끔찍한 운명이 비켜갔다는
다행한 한숨
한 알 풋살구를 물고
다시 줄타기를 해
세상이 다 알아줄 것 같이
혼자 가슴 뿌듯하리라
줄 타는 내 삶이
청설모 되어
내일은 호두나무까지 도전하리라.
타인(他人)들
가버린 사람의
울음소리가
스멀거리는 풀밭
누군가 남겨둔 눈물에
눈을 돌려버린다.
들먹이는 이름마다
까맣게 덧칠을 하고
소매 잡는 여인의
살집 좋은 촉감은
누구의 놀이터 그네였나?
저기가 산정인데
낙엽은 쓸려가고
솔밭 샘가에
열이 올라 눈빛 벌개지면
관절염 도진다
덜미 잡는 멍개 넝쿨도
살점 후벼내는
타인의 손
내 사랑도 못다 갖는 판에
빠르게 지나는 걸음
풀린 다리
쉴 틈이 있을까
나 말고 모두는
타인인 것을
그림자
항상 발목에 매달리던
그림자가
이제는 나를 밀어낸다.
눈물을 흘리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강한 바람이
흐르기도 전에 말려버린다
눈은 소복하게 내렸는데
어린 시절은 어디로 갔는지
놀이터엔 눈사람이 없다
허리를 감싸주던
따뜻한 팔은
사내의 손목에 끌려
중심을 잃고 비척거린다.
사시로 변한 양심이
그림자 속에 들어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어지러운 군중에게
압사당하지 않을 방책에
다리가 휘청거린다.
날개를 달아
파란 하늘
아스라이 먼 곳 한 점에
눈이 머물면
마음은 깃털이 되어
날개를 단다.
펄럭이던 가슴 속 깃발은
울렁이는 손이 되어
사랑을 배우고
노을빛 얼굴에
젖어든다
파고드는 바람이
아리도록 가슴을 쓸어도
방울지는 눈물의 속에는
언제나
번지는 이가 있어
날개는 가벼워진다.
햇살처럼 퍼져오는
그리움도 녹아
흐르는 하늘로 날개를 단다.
바위섬
쓰다듬어도
달래도
꿈쩍 않고
소리 지르고
이빨로 물어도
정말로 마음변하지 않을까
어쩌자고
힘이 다 빠지도록
바람을 앞세웠나
옆에 두고
그대로 지켜주면
사랑이 되는 것을
그걸 몰랐었구나.
바람과 파도를
같이 사랑 한
죄 많은 바위 섬
반달
까맣게 씨앗으로 매달리는
눈물 얼룩 같은 기다림이
말라붙은 세월에
인연을 질기게 잡고
너무 오래 흘렀나보다
물빛 스커트 자락에
노을이 물들어
희미해지는 기억의 저편으로
아직도 흔들어주는 손을
기다리고 있는가?
마지막을 기다리는 것은
그래도 행복했다
가슴 태우던 이야기는
산안개 되어 쓸어내는 아쉬움
지울수록 선명해지는
음각된 얼굴이다
반이라도 남아
기억 속의 나머지를
되살리고픈
미움으로 변색된 바다는
포효마저 잊었지만
오늘도
달빛은 밤을 새운다.
발바닥
집념의 성이 높을수록
번뇌는
벽을 두텁게 쌓아올린다.
잊으려 해도
무너지는 내일이
뒤돌아보는
무거운 여행이 된다.
발밑을 파고들어
뻗어온 좌절의 돌아옴은
인내를 기록한
지폐뭉치의 계산이다.
잃은 것이 왜 쌓여오는 것인가
남은 것마저 찢기어
펄럭이는 휴지가 되는 보편의 진리
추상의 날개는 펴면 바람만 인다
무너지는 소리를 듣는 나이
성을 쌓고
침잠하면
그것도 무능의 잔해다.
그래서 내 발바닥은
항상 무겁다
간이역
간이역 홈을
먼지바람 남기며
기차는 지나가고
녹 슨 벤치에는
주름진 얼굴이
잿빛 하늘만큼 슬프다.
침목 사이에서
자맥질하던 햇살은
스쳐간 고속열차에 밀려
노파의 이마에 레일만 긋는다
어쩌다 어쩌다
잘못 된 일처럼 한번 서서
서너 사람 내려놓고
한심하다는 듯
고개 내밀었던 사람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따라가던 눈에 그늘을 지게하던
비둘기도 이제는 없다.
버려지듯
빈집 같은 간이역에
가을꽃이 바람에 흔들리고
눈 지물도록 기다리는 그 사람도
내일
이 자리에서
그림자 지는 눈으로 또 기다릴까?
부탁
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인가
남의 덕에 살 수밖에 없는 것인가
작은 멧새가
정원 나뭇가지 사이에
앙징스럽게 집을 짓고 알을 낳았다
그 멧새 알을 대파에 넣어
구워먹지 못한 유년이
워낭 소리처럼 뜬금없이 생각나는 날
바람이 불어 눈을 감고
그 때 네가 옆에 없었던 것이 궁금했다
쌍봉낙타 등에 엎드린 기분으로
심드렁한 꽃잎 같은 얼굴을 보며
찬 물에 내 몸이 오그라드는 것은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자존심이 풀려간 헛손질이었을 게다
네가 나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내가 내어준 선의의 공간이 되어
찌르라기가 구한 먹이처럼
까무라칠 망정
대들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감자밭에 꽃 지면
새알감자 캐 오라고
홀치기 메워줘야 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부탁인지도 모를 일이다
타인이 되는 날
갑자기 내 삶이 낯설어지는 날
가지런했던 치아 사이에서
아랫배 불러오는
오후의 여유
그것이 나라는 것에
소스라쳐 보는 날
푸르렀던 잎에
벌레자국 구멍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소금가마 두었던 자리에
간수가 배어 있듯
부스스한 얼굴이 된
나를 바라본다
오늘이 낯설어지면
내일은 끈적이는 타액으로
분리되어
타인이
모두가 타인이 되는 날이다.
쓸쓸한 날
민들레 풍선처럼
아득한 하늘 너머에
내 자리를 찾아 날고픈 날
봄기운처럼
나른해지는 날개를
보랏빛 감자꽃으로 묻는다
오늘도
쓸쓸한 들길은
욕망을 버리라며
묵은 억새풀이 손사래 치고
물든 감잎 같은 노을빛이
등을 밀어
강 건너 마을 지붕을 칠한다
가을 햇살 같은
떠나간 사람의 뒷모습이
집을 짓는 날
그림자까지
야위고 길기만하여
가라앉을수록 더 쓸쓸한 날이다.
손가락
항상 머리맡에 걸어 둔
손가락
시린 사랑을 만져보며
네가 눈물이었음을
벽지 얼룩이 되살린다
갈대 소리에 베어져
핏자국으로 흐르는
새가슴은
날아오르지 못하는 영혼이 되어
주저앉은 네 뒷모습이 되고
바람소리
공허를 날린다
너와 나의 사이가 메마르면
목에 걸린 손가락이
소리 내며 땀 흘린대도
무릎 시린 흘러간 강물이 되어
강바닥을 파고
안주할 자리를 찾아
안개로 피어오르는
또 다른 방황이다.
보문산의 햇살
대전의 아침은
보문산을 타고 미명에 눈을 뜬다
산이 열리면
그 먼 어디로부터
햇살이 내려오고
졸고 있던 거리에
밀려나는 어둠 속에서
내 문을 연다
살 냄새 풍기는 도시의
숨소리가 언덕을 오르고
가슴이 젖으며
햇살을 맞는다
나부가 된 나무가 되어
벗어버린 알몸을
햇살이 핥고 지나면
거리는 또 다시 웅성거린다.
숨겨둔 말들을
가슴에 받아 세며
햇살을 찾아나서는
이른 아침이다
쏟아지는 속에
고요는 어디에 있던가?
목숨의 뿌리를 내 걸어
이 빛을 받게 하라
뼈마디 쑤시는
하루를 시작하라
선악과는 왜 따 먹었을까
장마가 끝나기도 전 어느 날
햇살 내리쬐는 무더운 날
웃통 훌렁 벗고 선풍기 앞에 앉으니
이리 시원한 것을
가식과 비밀을 벗어던지면
그리 편한 것인데
이브는
왜 선악과를 따 먹어서
힘들게 살게 하나?
허기사 그 덕에
잘사는 놈과 못사는 년을
구별해 놓고 있지만
다 똑 같으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 선악과의 효력이 이제
차츰 약발이 떨어져 가는 모양이다
가슴골이 보이더니
하의가 실종되고
세상은 발전이 아니라
에덴으로 돌아가는가 보다
그 좋은 세상으로
별이 보이는 하늘을 가진 사람
별이 보이는 하늘을 가진 사람이
내 옆에 있으면
부처님보다
더 부처님 같아진다
제 4 부
바다를 건너간 개미
바다를 건너간 개미
하필이면 밭 가운데 터를 잡았던 것이
어느 날 집이 무너지고
식구들이 흩어지는 날벼락이었지
삽날에 의한 천지개벽이었지
피난 짐 쌀 새도 없이 헤매다보니
여동생 하나 데리고 어머니 따라 도랑물을 건넜는데
아버지는 산꼭대기로 갔다는군
그래도 살아야지
이별만도 서러운데
애비 없는 놈이라고 참새까지 놀리는 것은
참을 수 있었지만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솔개를 피하기란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지
떠내려가는 나뭇가지에 올라
무작정 떠나고 보자 했는데
바다를 건너게 됐어
바다를 건너갔어도
잘 살아야 한다.
개미친구야
여기는 솔개는 없어졌지만
아직도 산 넘어 동네에 있는
부모님도 못 만나는 세상이란다
친구야
날개 달고 살아갈 생각 말고
거기서 새 세상 만들려무나
시원하리라
옥수수 밭 가로 뻗은
구봉산 약수터 가는 길
새벽마다 사람들이 오르고
혼자 가는 사람도 있기는 하지만
삼삼오오 무리로 간다
조용히 가는 이는 혼자 가는 이 뿐
모두가 무슨 얘기들이 그리 많은지
셋이 가면 셋이 이야기하고
넷이 가면 넷이 얘기다
듣는 이는 한사람도 없다
듣거나 말거나
그렇게 가슴 속 풀어내고 나면
새벽 공기처럼
사슴 속이 시원하리라.
거짓말을 팔아요
마흔 여덟 개 기둥 큰집에 사는 아저씨
거짓말 좀 팔아주셔요
그까짓 뼈다귀 놓고
으르렁거려봐야
살점 하나 붙어 있지 않다는 것 쯤
어린 아이도 다 알거든요
뺏지는 말아요
이것도 재산권에 들거든요
공짜로 준다고 속이고
나중에 텃밭까지 받쳐야 하는 것
그런 것 말고요
그런 정도에는 이젠 안 속거든요
이건 진짜 비밀인데
정말 진짜 같아서
짝퉁인줄 아무도 몰라요
꼭 사세요
아저씨한테 만 팔게요
바람
바람을 꼭 껴안고
내려앉는 햇살
토끼풀 꽃 위에서
낙하산을 접는다.
깊숙이 품고 내려온 선물
하얗게 펴고
찾아온 꿀벌 손님에게도
골고루 나눠주고
뒤뚱거리며 달려온
아가
속눈섭에 매달린다.
구름위로 치솟는
눈
바람은 거기까지 따라간다
여름 밤
천지가
고요로 둘러싸여가고
먼 산봉우리만
머리에 아직 빛을 이고
안개로 주변이 묻혀가는 저녁
늘어진 마음이 무게를 되찾고
연기처럼 가슴이 열리기 시작하면
긴긴 하루는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장마
무능한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마음이 비로 되어
흙물이 이리 넘쳐나는구나
그리도 많이 울었던 까닭에
눈 감고 언덕을 헤매듯
밭둑까지 허물어 내리며
허방을 밟듯 넘어지며 뛰는구나
집념이 강하면 이성을 잃듯
네 집 내 집 다 무너버리고 싶고
세상을 뒤집어 던지고 싶어지듯
악심에 요동치는
미친 내가 되는구나.
고무나무
고향을 잃어버렸거든
여기 와 앉으라
주전자에 물이 설설 끓는
난로 옆
불이 꺼지고
식어도
온기 그리워하지 말고
하얗게 진액으로 삭여져
가슴 속에 묻어 둔
옛날을 꺼내
사랑했던 이의 눈빛을 새기라
잊을 수 없는
잎이 넓고 두터워
내 그를 배우고 싶은 날
너를 그리워
잊지 않으니
나 또한 출향인인 것을
겨울이 오기 전에
분명히 맑은 소리인데
왜
가슴 바닥이 아려올까?
가을을 미리 가지고 오는
귀뚜라미
고요를 휘저어도
흔들리지 않는 나무 끝
눈물 밴 손수건처럼
우울의 습기가 돌고
멈춰 선 영혼은
숨소리를 빼앗긴다
저승 가면
흰 옷만 입어야 한다
하얀 모시적삼 태우지 말아라
차라리 흰 눈이라도 내려
부서지는 별을
저 눈밭에 뿌리면
거기
내 모습도 얼어 붙으려나
가지 끝마다
저려오는 소리뿐인데
밤은 촉수를 마비시키듯
엄습해오며 스스로를 삼킨다
저만큼
겨울이 다가온다고
잔디밭
마당에 잔디밭을 만들었다
앞뜰과 지붕까지
죽으면 덮게 될 것을
살아서
앞뜰이라도 덮어 보면
먼 훗날 저승길이
보일 듯도 하지 않을까?
때를 맞추지 못하는 미련은
다듬어지지 못해
날마다 호미 들어도
잡초들이 자리를 빼앗으려 한다
순서를 어긴 것은
무슨 죄목인지 몰라도
순리대로 살다
때 되면 어련히
곱게 덮을 잔디밭인 걸
왜 미리 만들어
앞지르려 하느냐
한 낮
익은 것을 다시 삶아내는
뜨거운 바람
호박잎이
옥수수 잎이
매미 소리에 자지러진다.
사랑에 속 태우던
시들어진 죽지가
빨래를 짠 듯 맥이 빠지고
가지에 앉았던
새 한 마리도
날아간다.
온 세상은
널부러진 것뿐이다.
조롱박 (2)
밤에 피운 흰 구름
그리운 얼굴 그려
하얗게 피운 박꽃
구름빛 담아낸
백자 항아리
뒤에서 힘겨웠던 덩굴손
손바닥에 못이 박혀
눈물이 말라 굳어도
잡아 쥔 인연 놓을 줄 모르고
먼 하늘빛에
헹궈 낸 몸매
조롱박
한산도
한산도 창동마을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망곡산 정상에는
아직도 흔적 남은 망보던 성터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보인다지
내려다보면 추원도에서 캐낸 철광석으로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던 하소 포구
왜군이 개미떼처럼 도망갔다는 개미목을 지나
목이 억개나 떨어졌다는 두억리
지금은 그곳에 벼가 익어가고
노루가 내려와
비진도로 헤엄쳐 건너 간다
아는지 모르는지
유람선 타고 휘 둘러보는 사람들의
그 조상이
이곳을 지켰는데
고동산 소나무는 푸르기만 하다.
해바라기
목을 돌려 기다리는
슬픈 눈들이
까맣게 타들어가
내일도 모래도
고독한 해바라기가 된다
내 너를 죽여 사랑을 얻으려 함이
어찌 죄가 되는지 묻지 말라
이글거리는 빛과
뜨거운 몸부림이
그저 모든 것일지니
단순함이 벌 받아야 한다면
그냥 이대로 영원히 목을 돌리며
기다리리
절대 고독의 긴 시간이 모여
쌓이고 쌓인 더미의 편지가
또 불살라진대도
단 한 사람이 읽어줄 것을 위해
해바라기는 오늘도
그 자리에서 돌고 또 돈다.
가을 소리
가을은 소리로 영근다
자작나무 쓰르라미는
하늘을
귀뚜라미는 달빛을
풀여치 소리는
구절초를 영글게 한다.
달빛 받은 구절초에 귀를 대면
가을 소리가 활개치며 나온다.
맑은 소리는
가슴 속을 씻어내는데
내 무슨 소리를 내어
너를 영글게 하나?
무엇이 남았나
산비알 기어 오르는 안개는
밤새
무엇을 하고 놀았기에
그 향기를 아직도 핥고
숨소리 낮추는가?
새벽이 와도 집에 못 들어간 달은
졸리는 눈으로
물소리를 쫓고 있는가?
분주해지는 하늘과
발걸음 소리에
아침 밥맛이 없어
가로등은 눈을 감는다.
귓가에 남은 숨소리가
그림을 지우지 못하는 것은
끈끈한 향내가 말라붙은
신음이었을까?
풀어진 눈에
파고드는 아픔 속
선혈보다 진한
물소리가 조여서
출렁이는 가슴이 잠을 못 잔다
응어리져가는
목숨하나 건지고 나면
고단한 오늘이 남는다.
봄마다 피는 잎
오십 년이 넘도록
가슴에 자물통을 달아
너를 가두어둔 것은
얼어 죽지 않도록 입김을 불어
새의 날개에 매달아
날마다 허공 저편으로 던졌다
말라붙었거나
퉁퉁 부어 퍼질 대로 퍼진
그 뱃살이 혹시라도 보이면 어쩌나 하고
매일 밤 별이 보이는 눈을 감았다.
얼어붙은 참나무 숯 덩어리가
눈 속에서 피어나 자작나무 가지에 매달리도록
가을 단풍나무 잎을 볼 때마다
가슴을 앓다가
손가락 끝 마디마냥 굳어서도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물소리 때문에
귀가 멀어지기를 바라도
그래도 새 잎은 봄마다 피었다.
댓돌
낙숫물 안쪽에서
고무신 두 켤레를
머리에 이고
작은 신 늘어날 때마다
가슴 모서리 조금씩 더 내주고
또 한줌 갈라주며
그렇게 살았는데.
할머니 골무처럼
뒤꿈치 받쳐주다 보니
주름살 늘어난 만큼 다듬어지고
떠나간 인정에
이슬처럼 멍울진 눈물도 많이 삼켰지.
이제
신발은 안으로 들어가고
가슴은 서느렇게 식었어도
그래도 햇살만은 따뜻했는데
어른이 된 손자가
언제 파내고 잔디를 깔지 몰라
문드러진 가슴팍엔 자꾸만
때 같은 구름이 지나간다.
위엔
고무신도 없지만
오늘도 식어 가는 가슴을
햇살에 말려보고 있다.
노을 받은 호숫가
술잔에 풀린 시름은
달빛 같은 눈물인데
텅 빈 골목은
발걸음 소리조차
조심스럽다.
정이 밴 옷소매 잡으며
시름을 삭이던 날
거친 들 돌아
뒤뜰에 서면
거울 속에서 나오는
또 다른 그리움
반짝이는 고운 햇살
흙 묻을까 물에 씻어
노을빛에 널어놓고
마타리 풀 자라는 가슴 속이
노을 빛 속 호수가 되면
그 자리에 눕고 싶다.
눈 내리는 밤
눈물이 밴 손수건을
주머니 속에서 만지작거리는
그 우울의 습기가 돈다.
눈 내리는 밤에
가로등에선
반딧불을 쏟아 내고
잘 못 발효되어
냄새가 고약해진 사랑도
하햫게 덮혀지는 밤에
말 없는 네 말이
눈에서 터져 나와
눈물로 말한다.
바람 때문이라고
시간은 너를 탓했고
흔적은 쌓여 오래된 무늬를 새기는데
튀어나오는 구멍을 막아도
삼가마 틈새마다 김이 나온다.
사그락 사그락 감싸도
잠들지 못하는
먼 날의 그림이
눈발을 타고 온다.
개
개 아버지는 개다
개 자식도 개다
물론 개 조상도 개고
개 후손도 개다
그래서 나는
개가 아니고 싶다.
바람과 물
갈미봉 눈 바람이
발가락을 얼구고
녹은 물이 깊은 골에 흐르면
가는 길에 앞장 서는 바람
나를 가르치는
바람과
물
가 을
지는 잎
발끝에 날려
한 방을 눈물로
시린 가슴을 달래고
햇살은 모르는 척
머리카락을 끄집어낸다.
물결처럼
더미로 밀려와
밟고 일어서려는데
와삭
사그라지듯 조각나는 그 소리
놀라 쳐다본 하늘에
흰 구름 외롭다
향수의 서정과 의미의 재해석
송백헌
문학평론가.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Ⅰ
신비평가들의 처지에서 보자면 시와 시인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겠지만, 때로는 시를 통하여 그 시인이 지닌 성격과 삶의 자취를 엿볼 때가 자주 있다. 그것은 아마도 시가 곧 삶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다른 감성을 지니고 유년기부터 체험하고 살아온 아련한 추억과 고뇌를 시로써 형상한 시인인 경우, 그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게 마련인데, 한금산 시인이 이에 해당한다.
한금산 시인은 이순(耳順)을 넘어서 문단에 등단한 일천(日淺)한 경력의 문인이다. 그러한 그가 등단 이후 불과 수년 동안에 두 권의 동시집과 한권의 수필집에 세권의 시집을 연속 집필함으로써 그의 저력은 세인(世人)을 놀라게 했다.
사실 그와의 인연은 나의 재직 시절인 1990년대 대학원에서였지만, 그 때까지만 해도 그로부터 시적 재능을 읽지 못했다. 다만 그에게서 풍기는 문학적인 소양과 인품, 주고받는 대화, 그리고 소설 「부초」의 작가 한수산의 친형이라는 사실 등을 미루어 보아 시를 쓰면 대성할 인물로 판단되어 ‘당신은 중등학교 교사로 머물지 않고 작품을 썼으면 좋겠다.’ 하는 바람을 피력한 바가 있었을 뿐이었다. 그 뒤 한 참 동안을 서로 내왕이 뜸했는데, 어느 날 문득 나를 찾아와 그 동안 무거운 교장직도 정년으로 벗어버리고 최근 수년 동안은 시작에 정진하여 왔노라고 하면서, 새로 상재(上梓)할 시집의 원고를 보이고서 평설(評說)을 부탁했다.
사실 나는 월말까지 써야할 원고가 산적(山積)해 있을 뿐 아니라, 나이 탓으로 작품을 읽고 평하는 작업이 힘들어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사양을 했으나 막무가내여서 부득이 승낙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막상 그의 시를 읽으면서 나는 그가 그동안 쌓아온 시에 대한 내공이 만만치 않음을 느꼈다. 왜냐하면 시를 읽어가면서 그 시편 하나하나가 주옥같이 빛나며 가슴에 저리게 와 닿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를 ‘타고난 시인’이라 불러도 결코 허황된 언설(言說)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Ⅱ
그는 강원도 인제 땅에서 보냈던 아득히 멀어져 간 유년시절에 대한 추억들을 자기 시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가 유년시절에 보낸 그 고향은 <한 아름 넘는 물박달 나무가/ 파랗게 이끼를 입고 있>는 방태산 이 있는 <갈미봉이 내려다 보고/ 내린천 물이 휘돌아/ 품어 안은 산골 마을// 덜 벗겨진/ 사람들이/ 흘러내리다 만 산 비알 돌처럼/ 덜 다듬어진 모서리 부디치며/ 거친 사랑을 하고 산다>는 고장이자, <솔밭 가로 하늘빛 맑은 물이 흐르는 곳/ 스무나무 아래 서면/ 줄렁바위 배터에서/ 통소소리에 가슴 조이던 곳>이었으며 <홍수 져 강물이 넘치면/ 아름드리 통나무가 떠내려가고/ 다시 개면/ 깨끗한 물밑씻개 가지들이/ 지난날의 어려움의 높이를 기록했>던 곳인가 하면 <깊은 골 귀틀집에/ 칼바람이 녹는 날/ 초승달 눈썹 같은 덕이가/ 가재 풀 내민 싹을 보고/멍덜바위 뒤졌>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숙명처럼 따라다닌 그 가난 때문에 그는 그 유년시절을 <얼어붙어/ 소리가 나지 않는 울음을/ 가슴 속에 빙산으로 숨기고/ 그렇게 살았>고, <칡잎에 옥수수떡을/ 쑥 잎 모깃불 가에서/ 또/ 눈물 삼키듯 먹었>으며 <돌덩이가/ 가슴을 밀어 올려도 / 돼지 똥 볶아/ 불돌로 지지며 참았>고 <밤새워 대신 울어주는/ 소쩍새 소리도/ 속을 더 뒤집어 놓아 싫었>으며, 또 어디쯤 다가올/ 맺힌 숨소리가/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게 했>던 한을 가슴에 품고 <그렇게/ 살았>던 것이다.
한금산 시인만이 아니라 많은 70대 전후 노년층들은 유년시절을 하늘 빛 맑은 물이 흐르는 산골(시골) 마을 낡은 초가집에서 비록 가난하지만 오손도손 추억을 일구며 정겹게 살아오지 않았던가? 그래서 그의 시를 읽다 보면 우리들은 그 어려웠지만 그리운 유년시절을 떠오르게 한다.
그 곳은 공책을 살 돈이 없을 때에는 어머니가
이 것 가지고 가서
공책 바꿔 써라
둥지에서 꺼내주신 따뜻한 달걀
<어머니의 달걀>
이 생각나는 추억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보낸 그해의 겨울을 그는 다음과 같이 그렸다.
바람이 홰를 치는 강 언덕
눈도 바위 뒤에 숨던
겨울
하늘도 부어오르듯
얼어버리면
새 떼가 덤불 속으로 몰렸다.
무릎 세워
삼베를 비벼 잇던
갈자리 방에
삼톱 같이 무딘 감정이
지스레기처럼 엉키면
수숫대 김치우리
동치미 국물이
앙금을 녹여주고
쇠죽 끓이던 사랑 부엌
아궁이 앞에선
참새 잡을 통발 수리하고
조카아이는 벌써
침부터 삼켰다.
긴 겨울이
얼어붙어도
얼지 않은 가슴을
연기처럼 풀어내던
그 해 겨울
쉬어도 끊어지지 않는
이야기가
솟아오르게 얼어 굳어지는
얼음처럼 단단해 갔다.
<그 해 겨울>
그런데 그는 이러한 일련의 유년기 체험들을 단순한 추억으로만 처리하지를 않았다. 그에게는 그러한 사실들을 되새김으로써 거기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있다.
<황태>의 경우를 보자.
어느 먼 나라에서 왔기에
이방의 서러움을
혹독하게 치러야 하는가?
<중략>
턱이 얼어 뼈가 열리는 아픔을
참아내는 까닭은
사랑하는 이에게 찌그러진 삶이 보여주기 싫어서였다.
이승에서 잊어야 할 번뇌 속에
심어보고 싶은
열망이 잠을 잔다.
그가 유년기를 보냈던 인제와 이웃하고 있는 용대리는 황태를 말리는 덕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그곳에서 한겨울을 얼리는 황태는 혹독한 추위 속에 얼고 녹아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그 황태가 겪는 시련을 인간의 아픔으로 환치(換置)시켜 그는 그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가 바라본 감자 밭에 핀 흰 감자 꽃도 그저 감자 꽃이 아니다. 그 <하얀 감자 꽃 피면/ 누렇게 뜬/ 보릿대궁 얼굴도/ 새알감자가 되>며 <속울음도/ 백기를 들고/ 구겨진 가슴 밭의/ 일그러진 마음을/ 저울질 해 넣어두고/ 서럽도록 질박한/ 감자 꽃으로 피어나>는 것이다.
Ⅲ
그에게 있어 살아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물들은 시로 형상화 된다. 거기에는 자신을 사물과의 관계 속에서 융합해 가는 조화와 순응하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그려내고 있는 시의 내용들은 단순한 서정에만 머물러 있지 않고 때로는 소박한 염원으로, 때로는 냉혹한 비판으로, 때로는 준엄한 꾸지람으로 나타나고 있다.
바다가 그리우면
소라가 되고
달무리 지는 날 밤이 되면
박꽃으로 피어
가슴 가득 번지는 모습이
엉키고 또 엉켜
피어나고 또 지면
따뜻한 이야기만
안에 모아 쌓으리
따라다니며 치맛자락 잡고 흔들면
실바람의
그 힘 빠진 손을 놓지 않으려
속살 파고드는 아픈 가슴에
오래도록 새겨두리
노을빛 내려
하구를 곱게 물들이고
땅거미 기어드는 때가 되면
강가에 서리
<당신 생각에>
이 얼마나 당신을 그리며 염원하는 간절한 소망인가? 하지만 사랑이란 심리는 묘한 것이어서 그 간절한 소망을 가슴에 품고 오매불망 이루어지기를 염원하지만, 문득 가슴에서 멀어지는 날 그 사랑마저도 놓아버리고 돌아서는 처지가 되는 것이다.
사랑한다고
그런 말 안했다
사랑했다고
그런 말도 안했다
사랑할 것이라고
그런 말 한 적이 없다
그런데 왜
한번만 손 잡아주고
사랑한다고 말해 달라나?
<그런 말 안했다>
그런가 하면 무더운 여름 날 선풍기 바람을 쐬면서 그는 날로 실종되어 가는 도덕을 다음과 같은 시로 꼬집기도 한다.
장마가 끝나기도 전 어느 날
햇살 내려쬐는 무더운 날
웃퉁 훌렁 벗고 선풍기 앞에 앉으니
이리 시원한 것을
가식과 비밀을 벗어던지면
그리 편한 것인데
이브는
왜 선악과를 따 먹어서
힘들게 살게 하나?
하기사 그 덕에
잘사는 놈과 못사는 년을
구별해 놓고 있지만,
다 똑 같으면
그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 선악과의 효력이 이제
차츰 약발이 떨어져 가는 모양이다
가슴골이 보이더니
하의가 실종되고
세상은 발전이 아니라
에덴으로 돌아가는가 보다
그 좋은 세상으로
<선악과는 왜 따 먹었을까>
사실 오늘날 우리의 삶은 가식과 진솔함, 선과 악, 풍요로움과 가난함, 성공과 실패 등 양 갈래로 대립되어 있다. 따라서 모든 악의 원천이 가식에서 비롯된다고 이를 비판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가식과 풍요로움을 소원하는 삶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 또한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을 인과(因果)에서 찾기도 하고 인연(因緣)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한편으로 마음을 비우고 모든 욕심을 놓아버릴 때 세상은 발전하고 에덴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다시 <개>를 보자.
개 아버지는 개다
개 자식도 개다
물론 개 조상도 개고
개 후손도 개다
그래서 나는
개가 아니고 싶다.
<개>
우리 사회에는 개 같은 놈들이 떵떵거리고 살아가는 세상이지만 그들은 어디까지나 개일 뿐 사람이 될 수 없는 개들이다. 이러한 개판에 시인의 염원은 개가 아니고 싶은 것이다. 이 얼마나 냉혹한 사회 고발인가?
그런가 하면 임진왜란 때의 전승지인 한산도에 유람선을 타고 관광하는 현대인들이 역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함을 절의의 상징인 고동산 푸른 소나무와 대비시켜 다음과 같이 꼬집고 있다.
한산도 창동마을은
임진왜란 때
군량미 창고가 있었다.
망곡산 정상에는
아직도 흔적 남은 망보던 성터
맑은 날에는 대마도가 보인다지
내려다보면 추원도에서 캐낸 철광석으로
대장간에서 무기를 만들던 하소포구
왜군이 개미떼처럼 도망갔다는 개미목을 지나
목이 억 개나 떨어졌다는 두억리
지금도 그곳에 벼가 익어가고
노루가 내려와
비진도로 헤엄쳐 건너 간다
아는지 모르는지
유람선 타고 휘 둘러보는 사람들의
그 조상이
이곳을 지켰는데
고동산 소나무는 푸르기만 하다.
<한산도>
이처럼 그의 시 속에는 지난 날 우리 역사의 발자취를 체험하고 조상의 기개를 찬양하면서도 반면 오늘날의 문명에 대한 비판 의식이 자주 보이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 시들은 생경한 구호성에 머무르지 않고 서정으로 융화된 아름다운 작품으로 승화되어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의 성숙한 인격과 오랜 교단에서 다듬어진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과임에 틀림이 없다.
Ⅳ
한금산 시인의 시를 읽다 보면 첫째, 친숙한 정감을 느끼게 된다. 그 친숙한 정감이란 시가 쉽게 이해된다는 이야기가 되는데, 그 바탕에는 순수함과 겸손함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시가 쉽게 읽혀지기는 하지만, 마지막 행을 읽다보면 읽은 내용과는 또 다른 의미가 담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나를 살게 한 것은
여울물 때문이었다.
소(沼) 한번 만들어보지 못하고
늘 울어대며
조약돌을 굴렸다.
하구에 이른 지금도
바람은 자지 않아
물결 일렁이는
잠 못 드는 밤이다
<자화상>
이 얼마나 진솔한 자기 고백인가? 또한 얼마나 겸손한 자기 표현인가?
누구나 자기 나름의 소(沼)를 만들어보고 싶지만, 결국 그것은 여러 이유로 이루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 아닌가?
이처럼 그의 시 속에는 함축적(含蓄的)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깊이가 있으면서도 그것을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다.
둘째, 한금산 시인의 시 속에는 강한 휴머니즘이 깔려 있다. 따라서 그의 시를 읽다보면 한결같이 정감어린 고향 사람들 즉 나의 어린 시절과 만나게 된다. 그것은 그만큼 문명의 때가 묻지 않은 순박한 시골 사람들과 그곳의 풍경을 통하여 긍정적인 생각을 지닌 자신의 휴머니티를 표현하고자 한 의도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풀이된다. 사실 그가 접하는 대상에 대한 시선은 부정적인 것이 하나도 없다. 일단 대상을 긍정한 뒤에 그것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의 시 속에는 인간의 냄새가 풍길 뿐 아니라, 서정성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셋째, 한금산 시인의 시는 짜임새가 있고 훈훈한 토속어가 많이 쓰이고 있다.
시가 짜임새 있다는 것은 시상이 흐트러져 있지 않고 정제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은 본인의 논리적 사고와 관련되는 것인데, 그러한 경지는 부단한 노력이 없이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그는 오랜 세월을 시를 위하여 구도적인 노력으로 살아왔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시에는 다른 사람의 시에서 맡을 수 없는 고향의 향수가 물씬 풍긴다. 그 향수는 그가 많이 사용하는 토속에서 연유한다. 정감어린 토속어는 된장찌개가 풍기는 냄새처럼 우리의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속어의 사용은 또한 시골의 정경을 그만큼 정확하게 형상화 했을 뿐 아니라 그만큼 주제를 잘 살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비록 소설가의 이야기이지만, 우리는 20세기 프랑스 문단에서 신지방주의 문학가로 이름을 날린 휘르디낭 라뮤의 작품이 독자들로부터 크게 각광을 받았다는 이유의 하나가 포도경작지로 이름이 있는 「보」지방의 농촌의 토속어를 12분 구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한금산 신인의 작품에서도 이러한 용어가 많이 나타난다는 사실은 그가 그만큼 작품에 대한 정확한 기법을 터득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비록 그 시적 출발은 늦었다고 하지만, 그의 앞에는 무한한 희망의 지평이 열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