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다.
방곡령(防穀令. 1889)
1) 일본의 경제적 침투 강화
일본은 개항 이후 1880년대 초까지 조선에서의 무역을 독점함 → 갑신정변(1884)후 일본의 정치적 영향력 약화 → 수출 감소로 인한 일본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 → 갑신정변 후, 경제적 침투에 주력함 → 수입품(쌀, 콩 등), 수출품(영국산 면제품, 일본산 일용품). 일본은 조선을 식량, 원료 공급지와 상품시장으로 만들려고 함 → 쌀 유출(流出)과 흉년으로 쌀 값 폭등 → 농촌의 피폐(농민 생활의 곤궁) → 방곡령 선포(미곡수출금지령.1889.함경도) → 일본의 반발(조․일통상 장정에 따르면 방곡령을 내릴 때는 1개월 전에 관찰사가 일본영사관에 알려야 한다고 되어 있다고 하며) →조선 정부는 해제 후 배상금을 일본에 지급함 → 일본의 경제적 침략과 정부의 무능, 관리의 부정(탐관오리 수탈)에 대한 농민의 불만 폭발 → 동학 농민 운동 전개(내정개혁, 외세배격 요구)
2) 청의 경제적 침투
정치적 우세를 이용하여 경제적으로 침투함(임오군란 이후 상민수륙장정 체결) → 수입품(주단, 석유, 약재, 면화), 수출품(인삼, 쇠가죽, 콩) → 1892년 무렵 일본 수준 육박(조선과의 무역에서 일본의 독점적 지위가 흔들림) → 일본 공업 발전 위협 →청의 세력 구축(몰아냄) 도모 → 청 ․ 일 전쟁 일으킴
◆ 동학 농민 운동의 전개 과정과 그 의의는?
(1) 동학의 보급
1) 성장 및 탄압
세도 정치로 인한 사회 혼란과 외세의 침략적 접근으로 인한 위기의식의 고조로 백성들은 민생의 안정을 갈망 → 동학 창시(1860), 교세 확장(인내천의 평등사상) → 정부의 탄압(혹세무민의 죄명으로 최제우 처형. 1864) → 2대 교주 최시형의 노력으로 교단조직을 정비하며 충청도 보은을 중심으로 교세 확장(삼남 지방으로 확산) → 교조(敎祖)신원(伸寃, 억울하게 뒤집어 쓴 죄를 씻음)요구 → 삼례 집회(1892.11),서울 복합 상소, 보은 집회(1893.4) → 보은 집회에서 교조신원, 탐관오리 숙청, 외세 배척 요구.(종교운동에서 정치·사회운동으로 발전)
보은 집회 : 교조 신원 운동. 동학에 대한 박해 중지 요구 → 종교 운동.
보은 집회 : 탐관오리의 처벌과 외세 배척 등 정치적 주장 → 정치`사회운동으로 발전
(2) 고부 농민 봉기(1894) = 동학 농민 운동
1) 원인: 고부 군수 조병갑의 부정과 학정
94년 1월,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은 1결당 12말씩 내게 되어 있는 대동미를 16말씩 받아 남는 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무고한 사람들에게 불효죄, 음란죄, 혹은 이웃 간에 화목하지 못하다는 죄 등 갖가지 죄목을 씌워 2만 냥의 거금을 우려냈다. 또한 그는 태인 군수로 있던 자기 아버지의 덕을 찬양하는 비석을 세운다는 핑계로 1,000여 냥을 강제로 거두고, 만석보라는 저수지 밑에 필요도 없는 새로운 보를 농민들을 동원해 만들고는 물세를 거두는 등 온갖 나쁜 짓을 저질렀다. 조병갑 뿐만 아니라 전라 감사 김문현 등도 기회만 되면 농민들을 수탈하였다.
2) 경과
시정 요구 → 시정 요구자(전창혁 등) 처벌 → 전봉준 등 농민군 고부 관아 습격, 점령 → 아전 처단, 양곡 몰수, 배분 → 안핵사의 사태 수습 실패(난의 주동자 처벌) → 전봉준 등은 사발통문을 돌려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위해 궐기(蹶起)하라고 농민들에게 촉구함 → 고부 점령 후, 고부 북쪽의 백산 집결(8,000여명. 대오 정비. 앉으면 白山 서면 竹山) 1차 봉기 → 전봉준, 손화중, 김개남, 오지영 등의 동학 지도자들과 농민군은 곤봉과 죽창(竹槍)으로 무장하고 황토 고개(황토 峴)에서 관군 격퇴 → 정읍, 고창, 무장, 영광을 차례로 점령하고 함평, 무안, 나주를 거쳐 北上 → 정성에서 관군 격퇴 → 전주성 점령 → 전라도 일대가 동학 농민군의 수중(手中)에 들어감 → 정부의 청군 파병 요청(민비) → 청군 파병(1894.5월 5일. 3000여 명 아산만 상륙) → 일본군 파병(거류민 보호 구실로. 1894.5월 9일. 7000여명. 텐진조약에 따라) → 정부와 동학 농민군은 외세의 개입 문제 해결을 위해 휴전 교섭 → 휴전(休戰) = 폐정(弊政, 폐단이 많은 정치) 개혁안 12조에 합의하는 조건으로 전주 화약(和約) 체결(1894. 6) → 농민군 자진 해산 → 집강소 설치(동학 농민군의 자치적 개혁 기구로 전라도 지역의 행정과 치안 담당. 폐정 개혁안 실천 및 추진) → 정부의 약속 불이행, 일본군의 침략적 행동 강화(경복궁 점령하고 고종과 민비를 감금함, 청`일 전쟁. 1894. 7) → 척왜 斥倭(일본군 타도)를 외치며 2차 봉기(1894. 10) → 전봉준 지휘하의 10여만 명 동학군이 1주일간, 공주 우금치(峙)에서 관군 및 일본군을 상대로 싸웠으나, 무기의 열세(劣勢)로 패배 → 상당수의 농민군이 전사 또는 흩어짐 → 태인(또는 금구)에서의 최후 결사전 역시 패배 → 패배 후 피신해 있던 전봉준은 배신자(김경천)의 밀고(密告)로 순창에서 체포, 처형됨(1895.4) → 손화중· 김개남도 처형됨 → 우금치 전투는 동학 농민군이 벌인 전투 가운데 최대 규모였으나, 이 전투에서의 농민군의 대패는 동학 농민 운동이 실패한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 우금치 = 우금티. 티 = 고개라는 뜻
우금치는 충남 공주시에서 부여군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있는 고개이다. 원래 이름은 ‘우금티’였으나, ‘티’라는 말이 한자에 없어서 치(峙)로 사용하였다 한다. ‘우금치’라는 표현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지명의 역사성과 고유성을 살려서 ‘우금티’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있다. 우금치(牛禁峙)는 옛날에 이곳에 도둑이 많이 있었으므로 해가 저물었을 때, 소를 끌고 이 고개를 넘다 보면 도둑들에게 소를 빼앗긴다고 해서 '해가 저물면 소를 끌고 이 고개를 못 넘게 했다'는 유래로 우금치(牛禁峙)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동학 농민군이 우금치를 공격한 이유는, 전봉준이 중심이 된 동학의 남접군(전라도)과 손병희가 중심이 된 동학의 북접군(충청도)이 논산에서 합류하여 공주· 수원을 거쳐서 서울을 공격하여, 일본군과 친일정권을 몰아낼 목적으로 충청도 감영(도청)이 있었던 공주로 들어가기 위해 우금치를 공격하게 된 것이다.
전주(전봉준) → 논산(손병희와 합류) → 우금치 고개 → 공주(충청감영) → 천안 → 안성 → 수원 → 한양(서울) → 일본군과 친일 정권 축출 → 반봉건, 반외세
♥ 사발통문(沙鉢通文)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참가자의 이름을 사발모양으로 빙 둘러가며 적은 통문. 통문이란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고지문’을 말하는데, 조선후기, 특히 고종조에 들어와서 민중저항이나 임오군란과 같은 대관항쟁(對官抗爭)에 이와 같은 형식의 선전 격문이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예로 동학군의 통문 제 1 호라 할 수 있는 사발통문을 들 수 있다. 그 내용은 전봉준(全琫準)을 비롯한 동학 간부 20여 명이 정읍군(井邑郡;지금의 정읍시) 서부면(西部面) 송두호(宋斗浩)의 집에 모여 <고부성(古阜城)을 격파하고 군수 이하 악리(惡吏)들을 제거하며, 이어 전주감영을 함락시키고 서울로 직향할 것>을 결의한 것이다. 즉, 전봉준이 동학 집강들에게 돌린 서신(편지)으로 집강들의 이름을 사발 모양으로 적어서 주모자가 드러나지 않도록 하였다.
동학 농민군의 봉기를 호소한 글로서, 거사(擧事)의 명분과 참여한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다.
♥ 폐정개혁안 (弊政改革案)
1894년(고종 31) 전주화약(全州和約) 때 동학농민군이 초토사(招討使) 홍계훈(洪啓薰)에게 화약의 조건으로 제시하였던, 폐정개혁에 대한 조목. 동학농민군의 고부봉기로부터 전주화약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의 폐정개혁을 위한 농민적 요구가 있었는데, 초기에는 요구 조건이 간단한 표방에 그쳤으나 점차 그 내용이 광범위하고 구체화되었다. 전주화약 때 폐정개혁에 대한 요구조항은 처음에 14개 조항, 다시 이를 보충하여 24개 조항으로 바뀌어 양호순변사 이원회(李元會)에게 전달되었다. 이들 원정서(原情書)는 서로 중복되는 것도 있으나 탐관오리 숙청․매관매직 등 정치기강 문란에 대한 시정, 삼정(三政)의 문란에 대한 시정, 개항 뒤 일어난 독점상인․외국상인의 횡포 금단 등을 요구하고 있다. 또한 전주화약 때 전봉준 등은 전라도 53주에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고 12개조의 폐정개혁을 시도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동학교도와 정부는 서정(庶政)에 협력할 것 ② 탐관오리 숙청 ③ 횡포한 부호 처벌 ④ 불량한 유림(儒林)과 양반 처벌 ⑤ 노비문서 소각 ⑥ 천인에 대한 대우개선 ⑦ 과부 재가(再嫁) 허락 ⑧ 무명잡세(無名雜稅) 폐지 ⑨ 인재등용과 문벌타파 (신분제 폐지) ⑩ 일본과 간통하는 자 엄벌 ⑪ 공사채(公私債) 면제 ⑫ 토지의 평균 분작(分作) 등이었다.
이는 그 즈음 봉건적인 유교 신분체제에 대한 과감한 도전이었으며, 갑오개혁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동학의 발생지는 경주였지만, 동학농민운동의 발발지는 전라도)
♥ 전봉준
몸이 왜소하였기 때문에 흔히 녹두(綠豆)라 불렸고, 뒷날 녹두장군의 별명이 생겼다. 출생지에 대하여는 여러 설이 있으나, 고부군 궁동면 양교리(宮洞面陽橋里:지금의 정읍시 이평면 장내리)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고부군 향교의 장의(掌議)를 지낸 창혁(彰爀 혹은 承)의 아들이다.
아버지 창혁은 고부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탐학에 저항하다가 모진 곤장을 맞고 한 달 만에 죽음을 당하였다. 뒷날 그가 사회개혁의 큰 뜻을 품게 된 것은 아버지의 영향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처음 집안이 가난하여 안정된 생업이 없이 약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였고 방술(方術)을 배웠으며, 항상 말하기를 크게 되지 않으면 차라리 멸족(滅族)되는 것만 못하다 고 하였다고 한다.
태인 산외리 동곡(山外里東谷)마을에 옮겨 자리잡았을 때에는 다섯명의 가솔을 거느린 가장으로서 스스로 선비로 자처하면서 세마지기〔三斗落〕의 전답을 경작하는 소농(小農)이었으며, 이 무렵 농사일 외에 동네 어린이들에게 글을 가르쳐 주는 훈장일로 생계를 보태기도 하였다.
▶ 동학에 입교하다
1890년(고종 27) 경인 35세 전후에 동학에 입교, 그뒤 얼마 안되어 동학의 제2세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고부지방의 동학접주(接主)로 임명되었다.
동학에 입교하게 된 동기는 스스로가 말하고 있듯이, 동학은 경천수심(敬天守心)의 도(道)로, 충효를 근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보국안민(輔國安民)하기 위하여서였다고 한다. 동학을 사회개혁의 지도원리로 인식하고 농민의 입장에서 동학교도와 농민을 결합시킴으로써 농민운동을 지도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 탐관오리 조병갑
농민봉기의 불씨가 된 것은 고부군수 조병갑의 탐학에서 비롯되었다. 조병갑은 영의정 조두순(趙斗淳)의 서질(庶姪)로서 여러 주․군을 돌아다니며 가렴주구를 일삼아 농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었다.
1892년 고부군수로 부임한 이래 농민들로부터 여러 가지 명목으로 과중한 세금과 재물을 빼앗는 등 탐학과 비행을 자행하였는데, 한재(旱災)가 들어도 면세해주지 않고 도리어 국세의 3배나 징수하였고, 부농을 잡아다가 불효․음행․잡기․불목(不睦) 등의 죄명을 씌워 재물을 약탈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만석보(萬石洑)의 개수에 따른 탐학으로 큰 물의를 일으켰다.
▶고부민란
1893년 12월 농민들은 동학접주 전봉준을 장두(狀頭)로 삼아 관아에 가서 조병갑에게 진정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고 쫓겨나고 말았다. 이에 그는 동지 20명을 규합하여 사발통문(沙鉢通文)을 작성하고 거사할 것을 맹약, 드디어 이듬해인 1894년 정월 10일 1천명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봉기하였다. 이것이 고부민란이다.
농민군이 고부관아를 습격하자 조병갑은 전주로 도망, 고부읍을 점령한 농민군은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불법으로 빼앗겼던 세곡(稅穀)을 창고에서 꺼내 농민들에게 돌려주었다.
이 보고에 접한 정부는 조병갑 등 부패 무능한 관리를 처벌하고 새로 장흥부사 이용태(李容泰)를 안핵사로 삼고, 용안현감 박원명(朴源明)을 고부군수로 임명하여 사태를 조사, 수습하도록 하였다.
▶ 동학농민항쟁
이 동안 자연발생적으로 고부민란에 참여하였던 농민들은 대개 집으로 돌아가고 전봉준의 주력부대는 백산(白山)으로 이동, 주둔하고 있었다.
그러나 안핵사로 내려온 이용태가 사태의 모든 책임을 동학교도들에게 돌려 체포와 분탕, 그리고 살해를 일삼는 등 악랄한 행동을 자행하자 이에 격분, 1894년 3월 하순 드디어 인근 각지의 동학접주에게 통문을 보내 보국안민을 위하여 봉기할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따라 백산에 집결한 동학농민군의 수는 1만명이 넘었으며, 여기에서 그는 동도대장(東徒大將)으로 추대되고 손화중(孫和中)․ 김개남(金開南)을 총관령(總管領)으로 삼아 보좌하게 하였다. 그는 4개항의 행동강령을 내걸고 창의(倡義)의 뜻을 밝혔으며 또한 격문을 작성, 통문으로 각처에 보내어 농민들의 적극적인 호응을 요청하였다. 이로써, 민란은 전반적인 동학농민전쟁으로 전환되었다. 1894년 4월 4일 그가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부안을 점령하고, 전주를 향하여 진격중 황토현(黃土峴)에서 영군(營軍)을 대파하고, 이어서 정읍․흥덕․고창을 석권하고 파죽지세로 무장에 진입, 이곳을 완전히 장악하였다. 여기에서 전봉준은 창의문을 발표하여 동학농민이 봉기하게 된 뜻을 재천명하였고, 4월 12일에서 4월 17일 사이에는 영광․ 함평․ 무안일대에 진격하고, 4월 24일에는 드디어 장성을 출발, 4월 27일에는 전주성을 점령하였다.
▶ 외세의 간섭
한편, 이보다 앞서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 홍계훈(洪啓薰)은 정부에 외병차입(外兵借入)을 요청하였고, 결국 정부의 원병요청으로 청국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일본군도 천진조약을 빙자하여 조선에 진출해왔다.
국가운명이 위태로워지자 홍계훈의 선무(宣撫)에 일단 응하기로 하고, 폐정개혁안(弊政改革案)을 내놓았는데 이를 홍계훈이 받아들임으로써 양자 사이에는 5월 7일 이른바 전주화약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전라도 각 지방에는 집강소(執綱所)를 두어 폐정의 개혁을 위한 행정관청의 구실을 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청일전쟁이 일어나 사태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마침내 9월 중순을 전후하여 동학농민군은 항일구국의 기치아래 다시 봉기하였다. 여기에 그의 휘하의 10만여명의 남접농민군과 최시형을 받들고 있던 손병희(孫秉熙)휘하의 10만명의 북접농민군이 합세하여 논산에 집결하였다. 자신의 주력부대 1만여명을 이끌고 공주를 공격하였으나 몇 차례의 전투를 거쳐 11월초 우금치(牛金峙)싸움에서 대패하였고, 나머지 농민군도 금구(金溝)싸움을 마지막으로 일본군과 정부군에게 진압되고 말았다.
그 뒤 전라도 순천 및 황해․강원도에서 일부 동학농민군이 봉기하였으나 모두 진압되자 후퇴하여 금구․ 원평(院坪)을 거쳐 정읍에 피신하였다가 순창에서 지난날의 부하였던 김경천(金敬天)의 밀고로 12월 2일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겨져 서울로 압송되고, 재판을 받은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
♣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외세를(청나라) 끌어들였던 명성황후나, 그러한 외세에 온몸으로 맞섰던 전봉준, 서로 날카로운 대립의 각(角)을 세우고 다투었지만, 두 사람은(명성황후와 전봉준은) 같은 해에(1895) 사망했다.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주체는 모두 일본이었다. 그들은 자신이 제국주의의 희생자였음을 알고나 갔을까?
♥ ‘서울로 가는 전봉준’ (시인 안도현)
눈 내리는 만경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 속으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 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 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 민요 / 새야 새야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민요는 전봉준의 비운을 안타까워하며 농민들이 부른 노래로 녹두는 전봉준 장군을, 녹두로 만든 묵을 청포라고 하는 데, 청포장수는 농민들을 의미한다.)
♥ 집강소 (執綱所)
동학농민운동 때 농민군이 전라도 각 고을의 관아에 설치했던 지방자치 기구(자치적 개혁 기구). 동학교도들이 각 고을의 접주(接主)를 집강이라 불렀던 데서 유래하였다. 1894년(고종 31) 동학군이 전라도 일대를 장악하자 치안과 지방행정이 마비되었는데, 같은 해 6월 전라도 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이 전봉준(全琫準)과 함께 이를 타개하고자 집강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였다. 전주화약 이후 전라도 53개 고을에 설치하였다.
3) 의의
근대 사회로 발전하는 계기를 만든 대규모 민중 ․ 민족 운동이다. 그러나 자주 국가를 세워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던 농민의 꿈은 좌절되고 말았다. → 반봉건, 반외세의 민족운동이고, 농민군의 요구 중 일부가 갑오개혁에 반영됨(신분제도 폐지, 과부 재가 허용 등).
4) 결과
① 대내적 : 갑오개혁 추진
② 대외적 : 청․일 전쟁 초래
♣ 개화와 자주 운동의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