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과 인간]의 영화평
○ 관람일 : 2012년 1월 20일(금) 오후 8시 20분
○ 영화관 : 이화여대 아트하우스 모모
두 시간 동안 몰입해야 했으나, 평을 써야 한다는 부담감에 그만 분석적인 감상이 되었다. 전공이 전공인지라 무겁고 진지한 신학적 주제들이 많이 다가왔다. 내 눈에 들어온 주제는 크게 다섯 가지였다. 1) 순교인가? 집단 자살인가? 2) 이슬람 국가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3) 갈등과 폭력의 상황에서 목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4) 하느님이 침묵할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뜻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5) 그 상황에서 죽음과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등이었다. 하나하나 영화의 맥락을 예로 들어 나의 감상을 정리해보려 한다.
1. 순교인가? 집단 자살인가?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 ‘자마 이슬라미아’는 탈레반과 같은 노선인 것 같다. 신앙적으로는 근본주의, 정치적으로는 신정(theodicy, 神政)을 추구해 평범한 세속 무슬림과 세속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정부와 대결하는 구도로 이 영화에서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마침 이들은 정부군과 전쟁을 벌이며 영화의 무대인 아틀라스 수도원 인근 지역에도 출몰한다. 이들은 신앙이 다른 외국인과 자국인들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적 신앙관을 설파하거나 이슬람의 전통 관습을 지키지 않는 여성들을 살해한다. 이따금 자신들의 생각과 다른 정치인들이나 집단에 대하여도 테러를 일삼는다. 정부군은 이들이 정권을 잡는 것을 막기 위해 전쟁을 벌인다. 내전 상태이다.
수도원이 소재한 마을 사람들에겐 정부군, 민병대 모두가 위협적인 존재이다. 지난 해 이슬람지역에서 재스민 혁명이 일어났을 때 알게 되었듯이 대부분의 이슬람 국가들의 권력은 부패하고, 동족들에게도 무자비한 폭력을 행사하는 집단이다. 근본주의자들은 신에 대한 사랑과 충성을 빌미로 그들의 교리를 따르지 않는 평범한 신자들에게 폭력을 휘두른다. 마을 주민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놈이 그놈인 상황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직접 폭력을 행사하는 이들은 민병대이다. 이래저래 주민들은 저항도 못하고 그저 이 상황에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다.
이 마을에 민병대가 출몰하면서 수도원에는 흉흉한 소식들이 들려온다. 그들이 외국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는 이야기, 동네 처녀가 히잡을 쓰지 않았다고 버스 안에서 살해당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이들이 머잖아 그들도 노릴 것이라는 이야기 등이 시시각각 들려온다. 신문과 마을에서 보게 된 텔레비전 뉴스들에도 이런 사건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다. 민병대의 테러위협 강도가 높아질수록 수사들은 갈등으로 술렁인다. 우리는 외국인이니 내전 상황에서 특정 편을 들 이유가 없고, 그저 본분인 수도생활이나 하고 최소한의 수준에서 이웃을 돕는 일만 하면 되는 것인데, 여기서 목숨을 바칠 이유가 무엇인가? 공무원 심지어 도지사까지 나서서 군대를 파견하거나 피난을 종용하는 상황에서 이곳에 머물 이유가 무엇인가? 무장 군인을 주둔시키면 마을 주민들이 무서워 오지 않을 것이고, 무엇보다 당장 아픈 환자들이 무료로 치료받을 데가 없다. 혹시라도 이들이 패악질을 부리면 고요한 수도원에 풍파가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일단 군대를 받아들이면 앞으로도 계속 부패한 정부에 기대게 될 것이다. 그럴수록 민병대의 표적이 될 가능성은 높아질 것이다. 그래서 원장인 크리스티앙 수사는 군대파견을 거부하지만 이로 인해 일부 회원들에게 비난을 받는다. 모두의 목숨이 걸린 문제를 자의적으로 원장이 판단했다는 것이다. 이 결정을 두고 수사들끼리 논쟁하는 과정에서 나온 대사가 ‘집단 자살’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어떤 수사는 이곳에 수도생활하러 왔지 순교하러 온 것이 아니라고 힐난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이 두려운 상황을 회피하고픈 수사들의 반응이 제각각이다. 궁극에는 갈등을 거쳐 모두가 크리스티앙에 동의하여 군대를 거부하고, 수도원도 떠나지 않게 되었지만 ‘집단 자살인가, 순교인가?’의 문제는 계속 남는다.
대를 물려 이슬람 신앙을 물려받는 알제리 같은 나라들에서 개종은 자살이나 다름없는 행위이다. 세속 국가체제를 유지하는 나라들은 그래도 위협이 덜하지만 이따금 근본주의자들이 등장하여 개종자들이나 이슬람을 세속화하는 이들을 공격하기도 한다. 따라서 이러한 지역은 언제든 테러가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알제리는 프랑스 식민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내전 상황이니 이미 수사들이 알제리에 있는 상황 자체가 ‘집단 자살’의 시도가 될 수 있다. 게다가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외교마찰을 우려해 퇴거를 종용했다. 최소한의 방어수단인 정부군 주둔도 거부하고, 퇴거도 거부했으니 수사들은 집단자살을 자초한 것이라 볼 수 있는 상황이다.
순교는 죽음의 상황자체가 은폐되어 있으니 판단하기 쉽지 않다. 다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외국인들을 살해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에게 납치되었으니 그들에게 죽음을 맞았다면 순교에 가까운 상황이다. 그러나 종교적 이유로 살해한 것이 아니라 영화 말미에 나왔듯이 단지 프랑스에 포로로 잡힌 민병대원과 교환하기 위해 인질로 잡힌 것이라면 신앙에 대한 박해로 보기 어렵다. 이는 한국인 김선일씨가 아프간에 선교하러 갔다가 탈레반에게 인질로 잡혀 살해당한 것을 순교로 보기 어려운 것과 같다. 그리고 어떻게 하다 정부군이 민병대를 덮쳐 수사들을 구출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가 암시하고 있듯이 수사들이 민병대원을 치료한 사실을 정부군이 확대해석하여 수사들을 민병대의 후원세력으로 간주하고 살해했을 수도 있다. 내전 상황에서 그것도 교전상황에서 어느 쪽이든 합리적 판단을 내리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정부군이 그들을 살해한 것이라면 종교적 이유는 아니다. 이런 상황은 내전 상황에서 일어난 여러 경우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살바도르에서 일어났던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의 미사 중 살해, 그 전에 일어났던 그의 교구 신부들에 대한 살해, 그리고 중남미 국가들이 군부독재로 신음하던 시절 군부와 준군사조직에 의해서 살해된 수많은 사제, 수도자, 가톨릭 신자들의 죽음도 교회에서는 순교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래도 의미를 더 부여하면 후자의 경우는 가톨릭국가에서 일어난 일이고, 이 영화의 경우는 이슬람 지역에서 선교하다 생긴 일이다. 그래서 이들은 성인은 될 수 있을지언정 순교자는 되기 어려울 것 같다.
2) 이슬람 국가에서 그리스도교 선교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서구사회는 근대 이후 종교가 시장 상황이 되었고, 이제 신앙은 개인의 선택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지구상 대부분의 지역 특히 이슬람 지역은 종교는 집단 안에서 문화적으로 전수되는 것이지 선택할 문제가 아니다. 또한 북아프리카 지역 이슬람 국가들은 대부분 서구의 식민지를 경험하였다. 서구와 이슬람 지역 간의 갈등 역사도 천년이 넘는다. 따라서 무슬림에게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은 유감이 많은 종교이다.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였고, 이슬람 신앙이 지배하는 지역으로써 가톨릭과 대립할 수 있는 조건들이 고루 갖춰진 지역이다. 물론 알제리는 수니파여서 온건한 편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에도 주기적으로 근본주의자들이 출몰한다. 근본주의자들은 탈레반과 같이 테러도 불사한다.
개종을 하려면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이슬람 국가에서 식민지 모국인 프랑스 선교사로 알제리 독립전쟁 시기에 진출한 아틀라스 수도원의 수사들은 이미 테러 대상이 될 조건을 갖추었다. 그러나 이들은 프랑스의 정치적 영향력에 힘입기 보다는 청빈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마을 주민들의 인정을 받는다. 수사들은 스스로 노동하여 먹는 문제를 해결하고, 본국에서 지원하는 약품으로 치료비가 없는 주민들을 치료해준다. 마을 주민들의 종교를 인정하고 그들의 축제에도 참여한다. 개종을 기대하지 않고 그들에게 친구가 되어준다. 그래서 그들 가까이에는 호의적인 무슬림들이 많다. 궁극에 이 마을 주민들은 수사들이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존재로까지 믿고 의지한다. 내전 상황에서 정부군도 민병대도 믿을 수 없으니 그 양쪽으로부터 자신들을 지켜줄 사람은 수사들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수사들은 신앙만 있을 뿐 아무런 힘도 없다. 그들 스스로 치외법권을 갖는 외국인의 권리를 포기하였기에 주민들이나 그들이나 마찬가지 처지이다. 오히려 어떤 면에서 근본주의자들에게는 표적이 되기 쉬워 마을 주민보다 상황이 더 안 좋다.
이런 조건에서 수사들은 선교사로서 그 지역과 문화에 현존한다. 개종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단지 수도자로, 선교사로 그들의 문화를 존중하며 함께 공존하는 것이다. 다행히 수사들은 이곳 주민들에게 부족한 것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의료기술이 그것이다. 그리고 문맹인 주민들을 위해 권리를 대변해준다. 그러나 이 역시도 대가를 바라고 하는 행위가 아니다. 마침 알제리는 세속 국가체제이고 이슬람 신앙도 이슬람의 다수를 이루는 온건한 수니파이다. 프랑스 식민지였기에 언어 소통의 어려움도 없다. 그리스도의 육화를 몸소 실천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은 최근에 우리 국민이 이슬람 지역에서 벌이는 선교와 비교할 때 의미가 더 두드러진다. 한국 개신교가 주도하는 선교는 개종을 전제로 치료나 원조를 제공하는 방식인 경우가 흔하다. 그리고 이들은 이슬람을 그리스도교보다 낮은 단계로 본다. 당연히 공격적이다. 이는 가톨릭이 비유럽지역을 강제로 개종시켰던 방식과 거의 같은 접근법이다. 다만 총을 들지 않았을 뿐이다.
무슬림들도 유럽인 또는 우리처럼 종교 선택의 자유를 누리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선교는 필요하고 또 권장할 만한 일이다.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또는 이슬람 지역에서 보이는 여성에 대한 반인권적 행태들은 계몽이 필요한 일이다. 할 수만 있다면 적극적으로 개입해 문제를 해결해주고 싶다. 게다가 천년 이상 서구가 타자화한 종교이니 합리적 판단과 별개로 무조건 개종시켜야 하는 집단이다. 이른바 십자군의 태도이다. 이처럼 이슬람 지역에 선교를 하고 있거나 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시각은 다양하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반대의 경우도 허용되어야 하는 것이고, 실제 종교 전통은 가장 변화시키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보다 쉽지 않은 문제이다.
아마도 아틀라스 수도원은 이러한 문제를 깊이 인식하였을 것이다. ‘산위의 마을’로써, 차광막으로 가려있지만 바늘만한 틈으로도 빛이 새어 나가듯이 언젠가는 그 작은 빛이 어둠 전체를 밝힐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수도 있다. 하느님의 시간은 인간의 시간과 달라 몇 세대가 지나 그 결과가 나타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 아예 그런 기대가 없을 수도 있다. 그저 현존하는 것만으로도 그리스도교가 평화의 종교이고, 착한 이웃의 종교라는 것을 증거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이 영화는 선교가 직접적인 순교의 원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정말 우연히 일어난 내전 때문에 수사들이 갑작스런 죽음을 맞는 것으로 묘사되는 까닭이다. 사하라 사막에서 과격 무슬림에게 목숨을 잃은 샤를르 드 후코도 같은 맥락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과연 이러한 선교방식이 정당하냐는 질문에는 그래도 긍정적인 답을 할 수 있는 예라 하겠다.
3) 갈등과 폭력의 상황에서 목자의 길은 어디에 있는가?
수사들의 죽음이 집단자살이지 않을 수 있는 근거는 목자의 길에 있다. 수사들은 크리스티앙 원장이 군대 파견을 수용하거나, 떠나기로 결심하고 명령하였다면 순명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수사들의 일부가 격렬하게 거부한다 해도 장상이 명령하면 따르는 것이 수도자이다. 그 결정이 궁극에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었다 해도 그 명령의 죄가 장상에게 있을지언정 다른 수사들에게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경우는 김근태 씨를 고문한 이근안이 자신이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것과 아이히만이 그가 저지른 유대인 학살 역시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그의 죄는 아니라고 말하는 상황과 같을 수 있다. 그러니 옳은 명령이 아닐 경우 거부하는 것이 순명에 더 가까울 수 있다. 그러나 영화의 맥락에서 보면 그들은 이렇게 장상이 결정하고 명령을 내린 것을 따른다 해서 문제될 것은 없었다. 실제로 그들이 정부군이나 민병대보다 월등한 무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혹시 프랑스에서 외교적 압력을 행사해 공격을 막을 수도 있을 것이라 주민들은 기대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에게 이런 태도는 금물이다. 이러한 태도야 말로 우리로 치면 ‘황사영 백서(帛書)’와 같은 시도이기 때문이다. 일부러라도 거부해야 하는 상황이다. 설사 이런 시도가 성공했다 해도 그 이후 이들은 가난하고 겸손한 자들이 아니라 제국의 앞잡이로 여겨질 터이다.
그렇다면 같이 죽어준다는 것 외에 달리 줄 것이 없는 셈이다. 그나마 이것이 구세주 콤플렉스와 연결되어 영웅주의적인 죽음이 되면 좋겠건만 상황을 조작하기에 따라 수사들은 ‘반군 협조세력’이 될 수도 있고, ‘정부군과 내통’하는 스파이일 수도 있다. 자칫 개죽음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죽음의 패러다임은 모든 의인들의 죽음과 유사하다. 예수님도 당시의 죄명으로는 왕을 참칭(僭稱)하고 군중을 선동한 정치운동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분의 죽음은 제자와 추종자들에게 새로이 해석되었다. 그리고 그 해석과 믿음이 악을 이겼다. 그 결과 우리 땅에서도 예수를 믿게 되었다.
역사 안에서 전형적으로 발견되는 이러한 의인(義人)의 죽음이 수사들이 맞은 죽음의 구조이다. 실제로 그들은 죽음을 통해 현실에서 아무 것도 바꿀 수 없었지만, 인간에게 가장 소중한 자유정신, 연민을 통한 자기희생을 보여줌으로써 시대를 초월하여 보편적 공감을 얻었다. 십자가의 길이 좁은 길이고, 그 길은 때로 자기 이마에 예수님이 쓰셨던 가시면류관의 길임을, 그러나 그 길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자 부활에 이르는 길임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에서 그들의 갈등을 잠재운 것은 마을 주민과의 대화에서 나온 말이다. 한 수사는 그들이 알제리 그것도 이 작은 마을이라는 가지에 머무는 새일 뿐이니 다시 새로운 가지(안전한 곳, 또는 프랑스 본국)로 옮겨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마을 주민은 수사들이 가지이고 그들이 그 가지에 기대어 사는 새라고 말한다. 여기서 수사들은 첫 번째 회심을 한다. 그들이 우연히 이곳에 둥지를 튼 새가 아니라, 어느 덧 이곳 주민들에게 둥지가 되어 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이제 갈등하던 수사들에게 목자로서 자각이 시작된다. 어린 자식을 두고 떠날 수 없는 부모의 심정이 되는 것이다. 자신이 먼저 죽어 그들의 죽음을 잠시 더 연장하는 것이 얻을 수 있는 최선의 결과라 하더라도(누군가의 눈에는 집단자살로 비칠 수 있다) 그 길을 택하자고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백 마리 양 가운데 한 마리가 길을 잃으면 나머지를 맡겨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는 게 목자의 길이라고 배우지 않았는가? 나 혼자 살자고 무자비한 총칼 앞에 양들을 방치할 수 없는 것이 목자의 길인데 어찌 도망치듯 떠날 수 있는가?
4) 하느님이 침묵할 때 우리는 그분의 뜻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그분의 뜻이라 단정할 수 있는가?
이 영화에서 내게 인상적인 장면은 크리스티앙 원장이 모두가 남아 있기로 결정하고 나서 고뇌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들과 산을 쏘다니며 자신의 결정이 최선이었는지 고뇌한다. 그 장면들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겟세마니에서 땀에 피가 섞여 나올 만큼 처절하게 기도하셨던 예수님의 모습과 겹친다. “이 나머지 형제들이 나와 뜻을 같이 하기로 했지만 이것이 나에게 좋은 결정이었는가? 다들 내 보내고 나 혼자만 있어도 되지 않는가? 아니면 동의하는 몇몇 수사만 남기고 갈등하는 수사들은 안전한 곳으로 보낼 수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자칫 구세주 콤플렉스에 빠져 집단 자살을 하려는 것은 아닌가? 내전 상황에서 안전한 곳으로 빠져나간다 한들 누가 우리를 욕할 것인가? 본원에서도 우리의 결정을 존중한다고 하지 않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참으로 두렵다. 민병대원들은 칼로 목을 따서 죽이지 않는가? 신문에서 내가 산길에서 본 처참한 시체들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그 상황을 상상하기 싫다. 솔직히 두렵고 떠나고 싶다. 그리고 정말 알 수 없는 것은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차라리 우리에게 이곳에서 죽는 것이 나를 위한 길이고, 나의 길이라고 환시나 환청이라도 허락하신다면 마음이라도 가볍고 확신을 갖겠는데......” 크리스티앙 원장의 모습에서 이런 고뇌 섞인 질문들이 절절이 읽힌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그린 벽화에 뤽이 얼굴을 대고 고뇌하는 모습이다. 이는 마치 겟세마니 동산에 있는 바위에서 피를 토하듯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사실 이 영화에서는 다른 모든 경우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느님의 응답은 나타나지 않는다. 다만 수사들의 개인적 확신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고뇌한 결과 얻어진 확신임에도 죽음 앞에서 여전히 흔들리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선택은 하느님의 뜻으로 굳어져 간다. 그리고 궁극에 그들의 죽음은 영화를 통해, 또는 책을 통해 수많은 이들에게 하느님이 뜻하신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드러난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과 부활은 이렇게 종종 자신들 뿐 아니라 다른 이들을 통해 고백되는 것이기도 하다. 십자가 형장에서 형을 집행하던 로마 병정이 했다던 “저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셨나 보다”처럼 말이다.
5) 그 상황에서 죽음과 부활은 어떤 의미를 갖는가?
민병대의 공격을 앞두고 수사들은 다가올 죽음에 대하여 여러 방식을 취한다. 죽음을 각오했다고 믿었지만 한 밤중에 민병대가 들이 닥쳤을 때 두 명의 수사는 침대 밑에 숨어 죽음을 모면한다. 한 수사는 수도원에 온 다음날 그동안 이 수도원에서 벌어졌던 일들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사지로 끌려간다. 떠나지 않기로 결정하기 까지 두려움에 치를 떠는 수사들도 있었고, 그로 인해 신경쇠약에 걸리기도 한다. 의사인 뤽 수사와 크리스티앙 원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갈등했다.
‘선교사는 선교지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당위’는 분명하다. 수도원 뜰에 있는 역대 선교사들의 무덤 십자가가 이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막상 죽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니 이 말이 생각보다 쉽지 않게 다가온다.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도 조선 국경에서 월경을 망설였다지 않은가? 장상의 명령으로 강제해도 듣지 않은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니 죽음은 그토록 힘겨운 상대인 것이다.
최후의 만찬으로 묘사된 저녁식사에는 두 병의 포도주가 준비된다. 포도주는 적포도주이다. 그리스도의 피의 상징이다. 챠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배경으로 깔리고 포도주 잔을 든 수사들의 표정에는 만감이 교차한다. 아마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도 이렇게 비장하였으리라. 내일이면 다가올 죽음, 그 두려운 일 앞에서 형제들이 함께 붉은 포도주 잔을 들고 빵을 뗀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님을 부인했던 제자들처럼 일부 수사들은 죽음의 길을 거부한다. 이 때 드는 생각이 과연 끌려가 죽은 수사는 도리를 다한 것이고, 남은 수사들은 비겁하고 나약한 베드로와 같은 존재인가? 아니 배신자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관점에서 이 사태를 판단하려는 이들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대략 다음과 같이 생각해볼 수 있을 듯하다.
어느 수사는 초지일관 선교사가 선교지에서 뼈를 묻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뜻을 지켰고 실천했다. 이런 수사는 천국행? 다른 수사는 처음엔 망설였으나 서서히 마음을 다잡고 끝에는 그 뜻을 지켰다. 어떤 수사는 영문도 모르고 잡혀가 끝을 보았다. 이 둘은 연옥행! 남은 수사 가운데 한 사람은 처음엔 뜻이 굳었으나 마지막에 두려워 숨어 죽음을 모면했다. 노인 수사는 처음부터 갈등이었는데, 잠시 뜻을 바꿨다가 마지막에 본래 생각대로 행동한다. 그러면 이들은 지옥행! 아홉 명의 수사 안에서 다섯 가지 경우가 존재하는 셈이다. 하느님은 이들 각각을 어떻게 평가하실까?
필자는 하느님이 이 모든 경우에 대하여 용납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선택에 대한 상으로 천국, 연옥, 지옥으로 나누지 않고 각자 자신의 몫을 다했다고 상을 주셨을 것 같다는 말이다. 어느 누구도 신앙을 부인하지 않았기에 말이다. 다만 우연한 사건의 결과로 죽음을 맞은 이들과 모면한 이들만 존재할 뿐이다. 그런데 이들은 각자 자신의 모양대로 신앙을 표현했다. 마지막 순간 그들이 보여준 행동은 그들이 수도자로 살아온 해만큼 쌓아왔던 식별의 결과일 것이기에 모두가 숭고했다.
영화 미션의 마지막 장면은 노예상인 출신의 멘도사 신부와 폭력을 거부하고 오로지 비폭력 저항으로 일관하다 원주민들과 함께 최후를 맞는 가브리엘 신부가 나온다. 어떤 선택을 하든 식민지 군대는 두 신부는 물론 원주민들 모두를 죽일 생각이었다. 폭력 저항이든, 비폭력 저항이든 같은 결과를 낳는다. 물론 어느 방식으로든 몰살을 막을 방법은 없다. 영화를 보고나서 이 두 가지 대응방식을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인 기억이 난다. 어느 쪽만 옳다느니, 둘 다 옳다느니 하면서 말이다. 그 영화가 개봉되던 시기가 86년이어서 묘하게 시대분위기와 맞물렸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사뭇 다른 맥락에서 보게 되니 감흥도 달랐다. 모두들 무겁게 영화를 관람하는 모습을 맨 뒷자리에 앉아서 지켜보았다. 분명 80년대 중반의 비장함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죽음의 상황이 닥칠 때 자신이라면 어떤 행동을 취할까를 더 많이 생각하는 듯 했다. 경우의 수가 더 다양했고, 몰살도 아니었으니 생각거리가 더 많았을 것이다.
필자는 그러면서 두려움이 없는 죽음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명분도 대의도 내세울 수 없는 상황에서 맞는 죽음 앞에서 나는 어떤 태도를 취할지 말이다. 생각보다 쉽지 않으리라는 생각이다. 결국 죽음의 시기, 맥락, 방식이 아니라, 그 상황에 놓여 있는 수사들의 마음이 하느님이 판단하실 근거였을 것이다. 목숨을 내놓고 고통을 당할 양들과 함께 하려는 마음, 그 대(大) 자유는 인간만이 가진 숭고함이 아닌가? 이러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은 이들은 유전자로는 영속하지 못하지만 뜻으로는 많은 동형(同形)의 상황에 놓인 목자와 그리스도인들 안에서 다시 부활할 것이다. 아니 부활하고 있다. 그러니 그 죽음을 헛되다 말할 수 없을 것이다.
2012.1.21 박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