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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의 멘토 경계인으로 살아온 문화게릴라 이윤택
------ 네이버캐스트; 임아영 경향신문 기자 인터뷰
시인으로 등단했지만 혼자 시 쓰는 일은 외로워서
함께 할 수 있는 연극을 한다는 이윤택 연출가.
그에게 연극은 함께 꿈꾸는 일이다.
처음부터 연극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유년기와 청년기는 가난했고 한때 그의 꿈은 유예됐다.
그러나 신문기자로 일하면서 사회적으로 안정됐던 시기에도
다시 연극을 선택했기에 현재의 이윤택이 있을 수 있었다.
고(故) 기형도 시인은 그에게 ‘문화 무정부주의자’라는 별칭을 달아줬다.
다양한 실험을 하며 늘 경계를 뛰어넘으려고 했던 그는
2008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2009년 동아연극상 대상을 받았다.
<오구, 죽음의 형식>, <시민 K>, <문제적 인간 연산> 등
많은 작품과 함께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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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을 하며 살아온 삶은 결코 후회스럽지 않습니다
혼자가 아니라, 이웃과 함께 하기 때문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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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일까 하는 물음 앞에
정열만 가지고 살 수가 없구나
현실이라는 무기가 필요하구나
그래서 연극을 잠시 그만두고 10년 후를 기약했죠
질문 1; 선생님의 유년시절이 궁금합니다. 어떠한 환경에서 자라셨나요?
제가 3대 외동아들이에요.
누님이 한 분 계셨는데 저하고 열다섯 살 차이가 났고요.
누님은 스무 살에 결혼을 하셨기 때문에 거의 혼자서 지냈어요.
아버님은 집에 잘 계시지 못하는 성격이셨고
강원도부터 동해안을 따라서 해안선을 따라서 이동하시는 어장중개인으로 일하셨어요.
스스로를 ‘장돌뱅이’라고 하셨죠.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아버님이 집안에 경제적 도움을 안 주셨기 때문에
어머님이 보따리 장사를 하셨어요.
옷을 많이 해서 고향 마을에 가서 파셨는데
그쪽에 가시면 4일, 5일 집에 못 오셨어요.
그래서 저는 주로 혼자서 집을 지키는 고독한 유년기를 보냈죠.
네 살 때 자전거를 처음 타던 날(좌), 여섯 살 때 모습(우).
어린 시절 이윤택 연출가는 외로웠다.
어장중개인으로 일하던 아버지는 집을 떠나있는 날이 대부분이었고
어머니는 보따리장사를 하느라 주로 혼자서 집을 지키는 고독한 유년기를 보냈다.
그는 어머니의 일생이 곧 연극이었고,
아버지의 유랑성이 곧 자기의 경계인의 모습이었다고 회고한다.
질문2; 연극을 하시면서 부모님에게 어떤 영향을 받으셨다고 생각하세요
연극을 할 때는 몰랐어요.
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았죠.
그런데 어느 순간 ‘어머님의 일생 자체가 연극이구나’를 깨닫게 되었어요.
<오구>나 <어머니> 같은 작품이 탄생하게 된 것은 어머님 덕분이고요.
제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유랑광대처럼 떠돌 수 있었던 것은
아버님의 유랑성을 닮은 거고요.
아버님은 ‘길에서 죽을 팔자다’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그렇게 자유로운 아나키스트였던 아버님의 특성이 저한테 전이된 게 아닌가 싶어요.
결과적으로 연극을 하는 데 ‘부모님의 영향이 아주 결정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죠.
질문3; 초등학교 때 한글을 시를 통해 배우셨다고요
제가 어릴 때에도 부잣집 아이들은 유치원을 다녔어요.
서민의 아이들은 그냥 방목됐거든요.
초등학교 들어가면 공부는 당연히 가르쳐주겠지 생각했죠.
그런데 초등학교에 가니까 3분의 2가 한글을 다 깨치고 오더라고요.
유치원을 다니거나 부모님께 교육을 받은 거죠.
그런데 저는 어머님이 문맹자였고 아버님은 집에 안 계시니
한글을 전혀 깨우치지 못한 상태에서 학교에 간 거예요.
1년이 지나고 2학년이 되어도 한글을 몰랐어요.
학교에서 친절하게 가르쳐 주지도 않았고.
그렇게 지진아가 되었죠.
그러다가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아이들을 모아놓고 별도로 공부를 시켰어요.
그 공부가 동시를 쓰게 하는 거였어요.
7·5조 동시를 썼는데 그때 제가 시를 지으면서 한글을 깨우쳤어요.
제가 예술가가 된 건 그 덕인지도 몰라요.
언어를 논리적으로 배운 게 아니고 감각적으로 익힌 거죠.
그래서 저는 시를 쓰면서 한글을 깨우친 그때가
제 창조적인 언어 감각을 키운 출발이었다고 생각해요.
경남고등학교 시절 흥사단 활동을 했다. 앞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이윤택 연출가다.
질문4; 연극에는 언제부터 관심을 가지셨나요.
제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중학교 2학년 때까지는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동네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같이 연극을 만들고 그랬어요.
방 두 개짜리 일자형 집이 있었는데 중간에 방문이 있었어요.
그 방문을 열면 이쪽은 무대, 반대쪽은 객석이라고 정해놓고 연극을 만들었죠.
교과서에 나오는 연극을 흉내낸 거예요.
고등학교 다닐 때는 경남고에 ‘토요회’라는 문예반이 있었어요.
단순히 글짓기만 하는 반이 아니고 연극을 본다든지,
음악, 미술, 예술 장르를 폭넓게 스터디했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연극이라는 게 동경의 대상이 됐죠
.
질문5; 서울연극학교 시절은 어떠셨어요
정말 새로운 세계였어요.
제가 서울연극학교 72학번 A반인데 기적의 반이라고 봐요.
지금도 72학번 A반이 전설적이에요.
담임선생님이 오태석 선생님이셨고요,
동기들 중에 지금도 활동하는 탤런트가 있어요.
배우 독고성을 부친으로 둔 독재영재란 탤런트가 있었고,
또 영화배우 하다가 죽은 김일우 씨가 우리 반 반장이었어요.
하재영이라는 영화배우도 있었고
연출하는 이병헌 씨도 있고
희곡 쓰는 오태영 씨도 있죠.
스무 명이었는데 거의 열 명 정도가 연극이나 TV, 영화 쪽에서 활동을 했어요.
그때 커리큘럼이 참 좋았어요.
학장님이 유덕형이라는 연출가였고
학교 주인이 유치진 선생이었어요.
유덕형 학장님이 유치진 선생님 아들이죠.
발성법과 연기론을 가르쳐준 분이 할리우드 배우 오순택이었고요.
심지어 ‘미학’이라는 과목도 배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최고의 학교였죠.
예술가들이 모든 걸 가르쳐준 학교였으니까요.
1995년 <문제적 인간, 연산>을 연출했을 때 연습하던 모습.
질문6; 연극학교 시절 부산에서 연극을 올리기도 하셨지요
유치진 선생님이 수업할 때 들어오셔서 말씀하셨어요.
“지방에서 온 학생들은 여름방학이 되면 자기 고향에 가서 연극을 해라.”
그러면서 러시아 장터의 연극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모스크바의 대학생들은 방학이 되면 자기 고향에 가서 연극을 하는데
쉽게 말하면 ‘브나로드 운동’을 설명하신 거예요.
그게 저한테 굉장히 감명 깊게 다가왔어요.
저도 방학이 되면 고향 부산에 가서 연극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대본으로 선정했던 게 루퍼트 브루크의 <리투아니아>예요.
카뮈의 <오해>를 좀더 쉽게 만든 거죠.
그 <리투아니아>라는 단막극을 제가 제작, 주연, 연출을 다 했어요.
<하늘 아래 땅 위에>라는 단막 희곡도 제작, 주연, 연출을 했는데요.
그렇게 올린 단막극 두 편이 다 망해서 학교를 못 다니게 됐어요.
등록금을 다 까먹어서요.
그래서 서울에 못 올라오고 ‘딜레탕트 아티스트’라는 동호회를 만들었어요.
제가 부산에서 문예반 출신이었으니까
부산의 젊은 글 쓰는 친구들, 그림 그리는 친구들, 음악 하는 친구들하고
다같이 YMCA에서 예술 동호회를 만든 거예요.
그렇게 동호회에서 몰리에르의 <스가나르레>라는 작품을 만들었는데
또 제가 제작, 주연, 연출을 했거든요?
다 망했어요. (웃음)
질문7; 이후 친구들에게 10년 후를 기약하며 그만두신건가요
‘딜레탕트 아티스트’가 왜 망했느냐 하면 데모가 일어났어요.
1973년 12월 초에 공연을 했는데 데모가 일어나서 연극 티켓이 팔릴 수가 없었죠.
그때는 거의 대부분이 개인 예매로 연극을 봤어요.
주로 대학생들 대상으로 표를 팔았는데
데모가 일어나서 학교가 휴업을 해버리니까 표값을 받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완전히 망했죠.
제가 대관료를 줄 돈이 없어서 분장도 안 지우고 수건으로 머리를 싸고
시민회관 뒷문으로 도망을 쳤어요. (웃음)
이후 군대로 도망갔는데
내가 없는 사이에 시민회관 직원이 우리 집에 와서 어머님한테 돈을 다 받아갔더라고요.
그때 가면서 친구들에게 말했어요.
“이제 10년 후에 만나자.”
20대의 붙 같은 정열, 연극과 글쓰기에 대한 정열만 가지고 사람이 살아갈 수 없구나,
결국은 현실이라는 무기가 필요하구나라는 생각을 했고
같이 연극 했던 친구들에게
“10년 후에 우리가 현실에 제대로 발을 딛고 설 수 있을 때
다시 만나서 연극을 하자” 그렇게 약속을 하고 헤어졌죠.
‘우리극 연구소’ 1기 제자들과 함께.
이윤택 연출가는 우리말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 1994년 ‘우리극 연구소’를 세웠다.
질문8; 그 이후는 무엇을 하셨나요. 여러 가지 일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망하고 나니까 학교도 못 가게 됐고 빚을 많이 졌으니까
제가 갈 수 있는 곳이 ‘오아시스’라는 곳뿐이었어요.
한국전쟁 이후 만들어진 부산의 유명한 클래식 다방인데
거기 가면 하루종일 클래식을 들을 수 있었어요.
진짜 도시의 오아시스 같은 곳이었죠.
커피 한 잔 값이 80원이었는데
80원만 주면 하루 종일 있어도 아무 말 안 하는 곳이에요.
그렇게 백수로 지내다가 군에 다녀왔고요.
사실 3대 외동이라서 군에 안 가도 되는데 도피처럼 군에 갔어요.
그런데 또 잘못 걸려서 하사관학교에 가서 하사 훈련을 받았죠.
고생을 진탕 하고 의가사제대를 했어요.
부모님을 모셔야 하니까 빨리 제대를 했는데 생활이 너무 궁핍하더라고요.
그래서 ‘아, 내가 글을 쓰고 연극하겠다는 이상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는 도저히 이뤄지지 않는구나’ 생각했어요.
그때부터 어떻게 현실을 살아갈 것인가 생각했죠.
제가 살았던 방법은 정당하게 시험을 쳐서 직장에 다니는 거예요.
직장 생활을 어느 정도 하다가 여유가 생기면 관두고, 또 돈이 떨어지면 다녔죠.
제가 그렇게 열세 가지 직업을 전전했어요.
제일 처음에는 현암사 도서 외판원을 하다가
5급 공무원, 지금의 9급 공무원 시험을 쳐서 부산 우체국에도 있었고요.
한일합섬이라는 공장에서 염색기사도 했어요.
한국전력 직원으로도 일하면서 밀양, 충무에도 있었죠.
그렇게 자유롭게 직장 생활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했어요.
그 20대 유랑 생활이 저한테 많은 것을 축적하게 해준 시기였죠.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변방을 떠돌면서 책을 읽고 연극을 꿈꾼, 그런 청년 시절을 보냈죠.
굉장히 외로웠어요.
친구도 없이 어머님 한 분 모시고 충무, 마산, 밀양 등지를 떠돌았죠.
1994년 <허재비 놀이> 공연 연습 때.
질문9; <시민>이라는 시집도 내셨습니다
아까 초등학교 2학년 때 한글을 몰라서 동시를 쓰면서 한글을 배웠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 동시들로 상을 받았어요.
논리적인 언어 교육을 받지 않고 감성적인 언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제가 초등학교 때 글을 쓰면 백일장 상을 타고 그랬어요.
글을 잘 쓰는 소년이었죠.
중학교, 고등학교에서도 문예반을 했고요.
그런데 저는 글을 쓴다는 행위가 굉장히 외로운 행위이기 때문에
글을 쓰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노래를 부른다든지, 연극을 한다든지, 사람들하고 같이 노는 걸 좋아했죠.
시는 억지로 썼어요.
연극을 하다 망했으니까 1973년 이후 한 5~6년 동안 룸펜 생활을 했는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클래식 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백수로 지내는 것이었죠.
그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어요.
그때 제가 할 수 있는 것이 책을 읽는 것, 음악을 듣는 것,
그리고 뭔가 끄적거리는 것. 그렇게 끄적거리는 게 시였어요.
그렇게 시인이 된 거예요. 자연스럽게.
질문10; 그러다가 갑자기 기자가 되셨지요
제가 부산의 감천 화력발전소에서 사무원을 할 때예요.
그때 신문사 시험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가 글도 쓰고 하니까 신문기자 하는 게 낫지 않겠나 해서 시험을 쳤어요.
근데 면접에서 아주 난데없는 장벽에 부딪혔죠.
제가 방송통신대학을 나왔어요.
그때 방송통신대학이 2년제였는데 사장님이 “2년제 대학을 나오지 않았느냐,
4년제 대학을 나와야 자격이 되는데 왜 기자 시험을 쳤느냐?”고 반문하신 거예요.
그때 신문 기자 공고에 ‘4년제 대학 졸업자 및 동등 학력 소지자’라고 했는데
학력의 ‘력’ 자가 ‘이력’할 때 쓰는 ‘지날 력’(歷)자가 아니고 ‘힘 력’(力)자였어요.
오자였던 거죠.
그래서 제가 “동등 학력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죠.
사실 자격도 안되는데 시험을 친 거예요.
그런데 기자가 됐어요.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 않은 기자로서 부산일보 기자 생활을 6년 6개월 했죠.
질문11; 6년 6개월이면 긴 시간입니다. 그 시기가 어떤 의미가 있으셨는지요
신문 기자로 지낸 6년 6개월이 저한텐 의미가 있어요.
일반 정규대를 졸업하지 않았던 저에게
신문사에서의 6년 6개월은 굉장한 수업기였다고 생각해요.
주로 편집부에 있었는데 신문사에 조사부라는 곳 있잖아요?
신문사 조사부라는 곳이 도서관이더라고요.
거기서 마이크로필름화되어 있는 많은 자료들을 취했어요.
글을 쓰기 위해서요.
또 신문사에서 매일 쓰는 기사들을 종이에 편집하는 과정도 중요했죠.
인문학적인 사유도 필요하지만 현실을 읽어나가는 굉장히 좋은 공부였어요.
한 번은 기형도 시인하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는데
기형도 시인도 중앙일보 기자였어요.
그 친구도 편집부에 있었는데 문화부에 있다가 편집부로 온 거였어요.
그런데 편집부가 따분하다며 상당히 불운하다는 식으로 얘기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문화부야말로 허영심 가득하고 소득이 없는 곳 아니냐.
편집부에 있으면 모든 기사들이 다 자기 지면 속에 녹아 들어가기 때문에
현실을 파악하고 배우는 데 도움이 된다.
편집부에 있는 게 시인으로서 훨씬 더 공부가 될 거다”라고 말했었죠.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퇴임 후 밀양 연극촌에 방문했다.
이윤택 씨는 “노 전 대통령이 부산에서 변호사로 일하던 시절 연극표를 팔아주곤 했다”고 회고한다.
제가 신문사 편집부 기자를 6년 6개월 동안 한 이유는
한 5년째 되니까 친구들과 약속한 10년이 되더라고요.
그때 저는 시인이었고 평론도 했고 결혼도 했고 어머니도 모셔야 했죠.
또 신문기자란 말이죠.
모든 걸 다 관두고 다시 연극을 한다하니 사람들이 미쳤다고 했어요.
현실적으로 보면 사회에 성공적으로 진입한 것인데
그것을 다 박차고 연극을 한다는 것은 갑자기 거지가 되겠다는 거였죠.
그러니 신문사에서 근 3년 동안 만류를 했죠.
사표를 쓰면 ‘왜 사표를 쓰느냐’고 했고
‘연극을 하기 위해서’라고 하면 ‘미친 소리 하지 말라’고 했죠.
그렇게 3년이 지나갔어요.
그때가 1979년에서 1980년 초였어요.
근대사에 치명적인 사건들이 많았잖아요?
5·18 광주민주화운동, 부마항쟁 등 격동기였어요.
그 엄청난 격동기에 지금과 다른 긴장감이 있었어요.
당시에는 신문사가 시대정신을 책임져야 하는 인문학적이면서도 지성적인 조직이었죠.
단순한 직장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1980년대에는 계엄사 보도처라는 게 있었어요.
보도처에 가면 신문 기사에 빨간 줄이 그어지고 그랬어요.
검열을 받아야 했던 거죠.
또 대학생들은 신문사가 진실을 알리지 않는다고 돌도 던지고 화염병도 던지고 그랬어요.
밤에는 대학생들에게 화염병 얻어맞고
아침에는 또 계엄사 보도처 가서 줄 그어지고.
이렇게 양쪽에서 억압을 받으면서도
그때 신문기자라는 것은
‘우리가 이 현실에 대해서 뭔가를 알린다’는 지식인이라는 느낌이 있었어요.
기자 근성이 있었죠.
그래서 그 시절을 굉장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고요.
‘그런 시대에 내가 신문사에 있었던 것이 나를 크게 깨우치게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도 단순한 연극인이 아니고
연극을 만들 때 현실을 생각하는 것이 그때의 영향이에요.
<공무도하>를 만들면서도 품위를 이야기한다든지,
샐러리맨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끊임없이 현실을 반영하는 연극을 할 수 있는 것은
신문 기자 시절에 직접 겪었던 현실,
그리고 역사가 저한테 깊이 각인된 덕이죠.
그래서 저는 신문기자 생활을 ‘굉장히 좋은 공부였다, 학교였다’라고 생각합니다
.
우리는 세상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
우리 초상집은 굉장히 유쾌해요
한국 사람들 특유의 해학적 정서죠
그에 대해 하룻밤 만에 쓴 희곡이 <오구>예요
질문12; 신문사를 그만두고 다시 연극을 시작하셨습니다
1986년 1월 4일 시무식날 제가 마음을 먹고 사표를 냈어요.
사표가 신문사 차장, 부장, 부국장, 국장, 상무, 사장까지 올라갔어요.
“더 있어라. 신문사가 얼마나 좋은 곳이냐. 신문사는 나가버리면 끝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끊임없이 제가 나가겠다고 했어요.
그렇게 나가겠다고 한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보기에 그때는 민주화가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야합의 시기’예요.
1990년 3당합당이 있기 전 이미 그때부터
노태우 전 대통령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여야에서 물밑으로 통합하고 야합했던 시기죠.
그런 시대적인 움직임이 별로 정당하지 않아 보이더라고요.
민주화라는 미명 하에 굉장히 불운한 시대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아, 신문기자로서 글을 쓰고 시를 쓰고 비평을 하고 펜대를 놀린다는 것 자체가
지식인의 허위의식이구나’ 생각했습니다.
‘지식이라는 게 말만 세지 아무 힘이 없구나’라는 자괴감도 들었고
무엇보다도 말에 대한 신뢰가 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문사를 관두고 유랑 광대를 꿈꿨죠.
‘돌아다니면서 내가 진짜 하고 싶은 것을 해야겠다.’
그래서 서른다섯 살에 신문사를 관두고 나와서 연극을 시작했습니다.
영화 <오구>를 연출하는 이윤택 연출가. 연극으로 수차례 공연된 <오구>는
2003년 영화로도 개봉됐다.
“<오구>가 영화적 기법으로 텍스트화 됐다는 것은 의미 있는 일”이라고 말한다.
질문 13; 연극을 시작하고 처음 올리신 극은 굿이었지요
제가 1986년 신문사를 그만두고 제일 처음 했던 게 극단을 만드는 게 아니었어요.
굿을 무대에 올렸죠.
1월에 그만두고 4월에 동해안별신굿을 공연으로 올렸는데 무당들을 다 동원했어요.
6월에는 제 담임선생님이셨던 오태석 선생님이 공연하셨던 <춘풍의 처>를 초청하고,
그다음에는 임진택 씨가 연출한 마당극 <밥>을 초청했죠.
그렇게 스터디를 한 거예요.
극단을 만드는 게 능사가 아니고 어떤 연극을 할 것인가 조사를 한 거죠.
그 과정에서 제가 탐색한 것이 우리 연극, 서양 연극과 다른 우리 연극 찾기였어요.
그 결실이 <산씻김>이에요.
이게 굿이었는데 그 작품은 공연하고 찬반이 굉장히 엇갈렸어요.
1990년에 일본 공연을 갔는데 타이니알리스 페스티발에서
‘타이니알리스 페스티발 10년 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뽑히기도 했습니다.
질문14; 공연 반응이 어땠나요.
엄청났죠.
공연 때 관객들이 비명을 지르고 울고 난리가 났어요. 하도 무서워서요.
내용이 한 여자가 고속도로에서 타이어 펑크가 나서
어느 집에 도움을 청하러 들어갔다가 붙들리는 이야기예요.
정체불명의 존재에 붙들려서 완전히 굿을 당하는, 굿의 희생물이 되는 이야기죠.
이야기 자체가 굉장히 괴기스러워요. 그
것을 제가 굉장히 미스터리한 굿으로 풀어냈기 때문에
다이내믹하면서도 무서운 연극이었어요.
관객들이 까무러치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서울에서 공연할 때 바탕골소극장에서 했는데 그때도 객석에서 비명이 튀고 그랬죠.
실제 칼을 다루다가 한 배우가 머리에 자기 칼을 그어서 피가 철철 흐르고 그랬어요.
그 <산씻김>이라는 작품이 지금도 잔혹극으로 꼽히죠.
사람들은 이윤택이 아르토의 잔혹극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는데
<산씻김>이 잔혹한 연극으로서의 굿판이었어요.
질문14; 일본에서 좋은 평가는 받은 이유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세요
굿이죠.
저는 지금도 ‘우리 연극은 굿으로부터 출발했다’고 확신해요.
일본이나 중국과도 다르죠.
제 생각에 우리에겐 북방 기마민족이 남하한 그 문화가 가장 세다고 보여요.
바다에서 살던 해인족,
중국에서 건너온 농경족도 있지만
가장 우세한 민족이 기마족이라는 뜻이죠.
그 기마족들의 가장 큰 특징이 샤먼이에요.
저는 시베리아 샤먼이 우리의 인류학적인 고향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굿이 우리 문화의 원류’라고 믿어왔고 그 굿을 연극화시킨 거죠.
굿을 연극화시킨 게 <산씻김>이었고 또 <오구>였잖아요?
지금 <공무도하>라는 작품을 하는데 여기에도 황해도 굿이 나옵니다. (웃음)
질문 15; 어릴 때부터 굿을 많이 보셨나요
제가 3살, 4살 때 집 근처에서 항상 징소리가 들렸어요.
사설, 북소리도 들렸죠.
우리 외할머님이 약사 무당이에요.
약사 무당은 굿은 하지 않지만
마을에서 어린애들이 홍역에 걸리거나 아프면 진맥을 해주고 침을 놔주고
염소똥 같이 생긴 한약을 만들어 주는 사람이에요.
사람들의 길흉화복을 점쳐주는 사람 있잖아요?
동네 샤먼이죠.
또 우리 어머님은 신주단지라는 것을 모셨는데 저는 그게 뭔지 몰랐어요.
그게 신단이에요.
그러니까 우리 외갓집은 외할머님과 어머님으로 이어지는 신을 모시는 가계였던 거죠.
우리 어머님은 신을 모시지 않았지만 대신에 신주단지는 평생을 모셔놓으신 거예요.
그래서 어릴 때부터 그 소리를 무의식적으로 기억하고 있는 거죠.
지금 황해도 철모리굿을 하는데 이상하게 낯설지 않은 거예요.
어디서 이런 소리를 들었지? 알고 보니까 그게 다 굿으로 흘려 들었던 거예요.
언젠가 가막골소극장이라는 극장을 다시 세우고
우동집과 북카페를 열어서 ‘씨어터 천국’을 만들겠다는 이윤택 연출가.
‘씨어터 천국’에서 동네 할아버지로 늙어가는 것이 그의 꿈이다.
질문 16; 그래도 가장 대중적인 호응을 얻은 작품은 <시민 K>였지요
<시민K>가 바로 신문 기자 이야기예요.
1989년 연극을 다시 시작하고 3년 후에 올린 작품이죠.
그때 국제신문이 폐간되고 부산일보하고 합쳐졌어요.
계엄사 보도처에 매일 검열받으러 다녔던 때죠.
그때 신문사 분위기가 아주 살벌했어요.
선배들이 기사 잘못 쓰다가 이가 왕창 날아간 사람도 있고 논
설위원 한 분은 얻어맞아서 척추가 굳은 분도 계셨고.
그때 신문 기자들이 많이 희생당했어요.
80년대 초에 한 대학에 시인의 입장에서 강연을 한 적이 있었어요.
한 학생이 “언론이 왜 자기 발언을 못 하느냐,
언론인의 사명이 있지 않느냐”고 비난하는데 제가 그때 한 말이 있어요.
“지금 이 시대에 가장 많이 직장을 잃고 가장 많이 얻어맞고
가장 많이 피해를 받으면서도 사회적 지원 세력이 전혀 없는 직장인이 기자다.”
학생들은 데모해서 붙들려 가도 금방 나왔어요. 세력이 있기 때문이죠.
신문 기자들은 붙들려 가면 직장도 잃고 완전히 폐인이 되어서 나온단 말이에요.
<시민K>는 동아일보 해직 기자 이야기였어요.
80년대 초에 동아일보에 광고 없이 백판이 나오던 그 시절 이야기죠.
한 마디로 신문기자가 정부에 붙들려서 무지하게 얻어맞고 훼절하는 이야기예요.
훼절하다가 ‘아,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하고 정신을 차리는 순간 살해당하죠.
이 작품은 카프카의 <심판>이라는 원작이 있어요.
1980년대 우리의 언론 사태를 반영해서 새로 쓴 작품입니다.
대단히 큰 반향을 일으켰죠. 소위 ‘이윤택의 출세작’이라고 할 수 있고요.
대단히 정치적이면서도 기성적인 연극, 브레히트적인 연극이라고 평가를 받았습니다.
질문17; 지금은 이윤택하면 <오구>를 떠올리게 됩니다.
1990년 동경국제연극제, 1991년 독일세계연극제에
한국대표연극으로 참가하기도 하였고요
제가 원래 시를 쓰는 시인이었고 비평가였고 신문기자였기 때문에
작품의 한 가지 경향은
<시민K>처럼 줄기차게 현실을 분석하고 비판하는 연극을 했고
또 한편으로 우리 전통을 계속 파는 연극을 했습니다.
<시민K>가 끝나고 그다음에 만든 게 <오구>였죠.
<오구>는 초상집 이야기입니다.
제가 초상집 풍경을 보고 힌트를 얻었어요.
초상집 풍경과 1986년에 동해안별신굿을 무대에 올리면서
떠올렸던 굿판에 대한 기억을 뭉쳐서 하룻밤 만에 쓴 희곡이에요.
밥도 먹지 않고 잠도 자지 않고 신들린 듯 썼죠.
보통 초상집은 엄숙하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 초상집은 엄숙하지 않아요.
엄숙한 건 일본이죠.
우리는 밥 먹으라고 권하고 서로 농담도 하고 싸움도 하고 화투도 치고 그러죠.
우리 초상집은 왜 이렇게 유쾌할까.
죽은 자보다도 산 자들, 상주들을 슬픔과 비탄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런 거죠.
계속 떠들고 시끄럽게 해서 상주들 정신 없게 만들어서
슬픔에 젖지 않게 하기 위한 한국 사람들 특유의 해학적인 정서인 거죠.
그때 공연을 올렸을 때 초상집에서 화투를 치고 난장판을 치고
급기야 저승사자가 등장해요.
그런데 저승사자가 큰 페니스를 달고 나오죠.
연극인들이 너무 놀랐어요.
연극을 보러온 국립극단 배우들이 퇴장하기도 했죠.
그런데 관객들은 물밀듯이 밀려왔어요.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관객들이 와서 대박이 터졌지만 욕은 실컷 얻어먹었죠. (웃음)
그런 와중에 일본의 한 프로듀서와 독일의 예술 감독이 우연히 한국에 와서
<오구>를 본 거예요.
왜 <오구>를 봤냐고 하니까
독일 사람이 한국 연극을 독일로 초청하고 싶어서 “한국 연극을 보여달라”고 했는데
어떤 연극을 보여주니까 그 사람이 “이건 한국 연극이 아니다.
서양 연극 아니면 일본 연극이다. 한국 연극을 보고 싶다”고 한 거예요.
그때 김정옥 선생님이 “그러면 <오구>를 한 번 보시죠” 해서 왔어요.
독일 예술 감독이 <오구>를 보고서야 “이건 한국 연극이다.
일본 연극과 다른 분명한 한국 연극이다”라고 한 거죠.
그렇게 독일에 초청받았습니다.
또 일본의 연출가 오타 쇼고도 <오구>를 초청했죠.
욕을 엄청 얻어먹던 연극이 졸지에 한국을 대표하는 연극으로 일본과 독일에서 공연을 했습니다.
<오구>는 지금도 공연되고 있어요.
영화로도 만들어졌죠.
많은 사람들이 “오구가 영화로는 실패하지 않았느냐” 말하기도 하는데
저는 ‘의미 있는 실패’라고 생각해요.
연극과 영화의 특성이 다르고
또 한국 영화는 유명 배우 위주로 가는 게 사실이죠.
<오구>가 개봉관에서 일주일 붙었는데요. 잘 버틴 것 같아요.
<오구>라는 영화가 영화적 기법으로 텍스트화 됐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에요.
영원한 20세기인으로 남겠다는 이윤택 연출가.
20세기가 지켜왔던 인문학적 사유, 가치 지향적인 태도를 계속 지키고 싶다고 말한다.
질문18; 20세기 끝 한 컬럼에서
‘나는 영원한 20세기인으로 남겠다’고 하고 서울을 떠나셨습니다.
저는 21세기라는 상황에 대해 회의적으로 봤어요.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요.
20세기는 중심이 있지만 21세기는 탈중심성의 시대죠.
권위주의가 없어지고 인터넷의 시대가 열리면서 개별화되는 것은 좋은 현상이에요.
그런데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가치 중심이 없잖아요.
옳고 그름이 없어져 버렸어요.
정치인, 학자보다 방송 진행자들이 더 영향력이 있는 시대인데
오락과 놀이, 연예 이런 것들이 판을 치는 시대는 대단히 불우한 시대라고 봐요.
셰익스피어가 런던을 떠나서 고향으로 간 이유는
당시 꽃미남 소년들의 극단이 나와 매음도 하고 타락한 징조를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저는 21세기를 로마 말기처럼 말세적인 상황으로 봐요.
시대를 이끌어가는 컨트롤타워가 없고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또 누구도 믿을 수 있는 신념 체계가 사라져버렸다는 것 등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에요.
그래서 저는 차라리 ‘20세기인으로 남겠다’고 한 거예요.
20세기에 여러 문제가 많았지만
20세기가 지켜왔던 인문학적 사유, 삶에 대한 태도, 미덕을
소중하게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그렇게 1999년 12월에 내려갔어요.
내려간 지 14년이 지났어요.
경남 밀양에 극장과 교육시설을 지었고
김해시 도요마을에는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지었죠.
그런데 계속 서울에서 절 부르더라고요.
제가 하고 있는 작업들은 다 20세기 작업인데도
21세기에도 통용된다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죠.
그러나 저는 여전히 20세기적 사고로 살고 있어요.
곧 부산으로 내려갈 생각이에요.
원래 가막골 소극장이라고 있었는데
극장을 다시 세우고 우동집하고 북카페를 하려고 해요.
시네마 천국처럼 ‘씨어터 천국’을 만들어서 동네 할아버지로 늙어갈 생각이에요.
질문19; 21세기에는 어떤 작업을 하고 계신가요
제가 밀양에 내려가서 가장 먼저 한 게 역사극 작업이에요.
2001년에 <시골 선비 조남명>을 만들었는데
서울공연예술제에서 상을 타고 북경 공연도 갔어요.
<화성에서 꿈꾸다>라는 정조를 테마로 한 창작 뮤지컬도 만들었고
<이순신>도 공연했죠.
2012년에는 세종과 장영실에 대한 이야기를 <궁리>라는 제목으로 만들었어요.
세종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장영실을 억울하게 희생당한 사람으로 보는 관점이었죠.
장영실은 지금으로 비유하면 다문화가정 출신이었죠.
원나라 사람이었으니까요.
장영실은 부산 동래성의 노비의 아들이었고 세종은 서울 중심의 최고 군주였고요.
그 이야기를 다루면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지역성, 변방성에 대한 문제제기를 했는데 반응이 괜찮았어요.
그래서 이어서 <혜경궁 홍씨>를 하게 됐고
올해는 국립국악원이 국악원을 대표할 수 있는 브랜드 공연을 하나 만들어보자고 했어요.
원래는 국악원에서 조선의 실학자 홍대용 이야기를 제안했는데
저는 “만일 <공무도하>를 가지고 연극을 만들 수 있게 해준다면 하겠다”고 했어요.
저는 지금도 <공무도하>가 우리 공연예술의 원류라고 봐요.
‘강을 건너지 마라’고 하는 여옥의 입장과 강을 건너는 백수광부,
그리고 공후인이라는 악기 연주까지 구조를 봤을 때 이건 연극이에요.
그래서 <공무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정시가 아니고
우리나라 최초로 기록된 공연 예술이라고 봅니다.
이것을 사람들이 문학으로만 알고 있으니까
공연으로 만드는 게 내 평생 숙원 사업이었죠.
그래서 이렇게 공연을 하게 됐습니다.
삶에서 우리를 지켜주는 가치는 무엇일까
인생에서 결국 남는 자산이 무엇일까
돈, 명예, 그런 것보다 ‘기억’이더라고요
좋은 기억이 많으면 부자예요
질문 20; 선생님에게 연극은 무었입니까?
연극은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에요.
혼자 사는 게 아니죠.
요즘 젊은이들은 개인주의적이에요.
스스로 고립돼 있고 분산돼 있어 서로 만나지 않아요.
굉장히 정직하고 사리분별이 있고 총명하지만 ‘연대’하지는 않아요.
그런 점에서 저는 성공한 인생을 살고 있다고,
그리고 연극이 희망이라고 생각해요.
연극은 절대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예전에 누군가가 ‘당신은 왜 시를 쓰지 않느냐’고 물었어요.
그래서 제가 ‘시는 외로울 때 쓰는 건데
나는 연극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외롭지 않다’고 대답했어요.
시는 혼자서 쓰는 것이지만 연극은 만나야 하는 것이니까요.
많은 젊은이들에게 말해요.
“연극을 해라.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연극을 하면 이웃이 생기기 때문이다.”
연극은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이라고 말하는 이윤택 연출가.
그는 연극을 하며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자신이 ‘성공한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21세기 가장 큰 문제는 고립이죠.
소통 부재와 고립. 이제는 가족으로도 고립을 모면하지 못하고
할아버지 할머님들이 독거노인이 돼서 죽고
직장을 잃어버린 개인들은 혼자서 싸늘하게 죽어갑니다.
고립분산적인 세대의 비극이에요.
이 비극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 공동체이지 않을까.
우리는 다시 모여야 한다,
가족만 가지고는 안 된다,
뜻을 같이하고 생활 감각을 같이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옛날 전통이 말하는 ‘두레’,
이웃이 더불어 함께 사는 이상주의적 공동체를 꿈꿔야 한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21세기의 엄청난 분산과 고립의 시대를 통과하지 못할 겁니다.
서로가 같이 살 수 있는,
또 연대할 수 있는 공동체로서 가장 적절한 것이 연극이에요.
그래서 저는 연극을 하고 산다는 것이 참 다행스러워요.
(웃음)
성공한 인생이라고 생각합니다.
젊은이들이 혼자 살겠다고 생각하지 말고
서로가 서로에게 손을 뻗치고 소통하려는 의지를 가졌으면 좋겠어요.
질문21; 이 시대의 어떤 인물로 기억되고 싶으신가요
경계인? 방외인(方外人)? 이런 말이 낯설 거예요.
옛날에는 성안에 사는 사람과 성 밖에 사는 사람이 나뉘어져 있었어요.
성안에 사는 사람들은 제도권에 있는 사람들,
지금으로 말하면 수도권, 서울 중앙에 있는 사람들을 말하죠.
성 밖에 사는 사람들은 지금으로 보면 지방에 사는 사람들로 볼 수 있을 거예요.
저는 지방과 서울의 경계를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러니까 경계인이예요.
중앙과 지방을 잇는, 둘을 왔다 갔다 하는 경계인.
장르도 그래요.
연극이면 연극, 국악이면 국악, 무용이면 무용, 이렇게 서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
장르를 넘나드는 경계인이죠.
제가 하는 연극은 현실과 꿈을 왔다 갔다 합니다.
그러니까 현실과 꿈의 경계인이기도 하죠.
이러한 경계인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질문22; 삶의 원칙이 있으시디면 말씀해 주세요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행하지 않는다.”
제가 크게 깨달은 거예요.
젊을 때 저는 실수를 많이 했어요.
거짓말을 많이 했죠.
‘자신이 없는데 자신이 있다’고 해서 잘못한 경우도 있었고
‘그래, 내가 그걸 해줄게’라고 해놓고서 못 해주는 경우가 있잖아요?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을 계속 행하려고 하니까
실수가 생기고 실없는 인간이 되고 거짓말쟁이가 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서른다섯 살부터
이치에 닿지 않는다 생각할 때는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제가 나이가 60이 넘었는데 뒤돌아보니까 남는 게 뭘까 생각이 들어요.
결국 남는 건 돈, 명예 이런 게 아니고 ‘기억’이에요.
좋은 기억이 많으면 부자고 나쁜 기억이 많으면 그게 부채입니다.
그런데 저는 되돌아봤을 때 좋은 기억이 많아요.
이유를 생각해보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것은 안 하려고 했으니까
다행스럽게 좋은 기억으로 남는 게 아닐까 싶어요.
그래서 성공한 인생이라고 보거든요. 어때요?
인터뷰이 소개 이윤택
195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경남고를 졸업하고 서울연극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하고 군대에 갔다.
부산 우체국, 한일합섬, 한국전력 등 열세 가지 직업을 거친 후
1979년 한국방송통신대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일보 편집부 기자로 일했다.
연극에 대한 오랜 꿈을 실현하기 위해 다시 연극판에 뛰어든 것이 서른다섯 살이었다.
<오구, 죽음의 형식>, <시민 K>, <문제적 인간 연산>, <느낌 극락 같은> 다양한 작품을 공연하면서 사회 현실을 고발하고 한국 연극의 원류를 탐색하는 작업을 해왔다.
2005년에는 국립극장 예술감독을 맡았고
2008년에는 석·박사 학위 없이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돼 화제가 됐다.
1991년 서울연극제 대상, 2008년 대한민국연극대상 작품상 등 많은 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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