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문의 창작적 진화 – ‘시산문’ 연구>
휴대전화
김태형
(시인⋅시산문 작가)
기차 시간이 조금 남아서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자리가 빌세라 누가 옆자리에 앉았다. 이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행색이 초라한 사내였다. 어디냐고 확인하는 전화가 와서 곧 출발한다고 말하고 이내 끊었다. 주머니에서 꺼낸 휴대전화를 그대로 손에 쥐고 있었다.
그때 뭔가 생각이 났다는 듯 옆에 앉은 사내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휴대전화 좀 쓸 수 있을까요?”
“네?”
그가 왜 휴대전화를 빌리려는지 잠시 걱정이 앞섰다. 내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냅다 도망이라도 치려는 것인가. 내가 고함이라도 친다면,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도망치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것이다. 어디 이상한 곳에 전화를 걸어 뭔가 결제라도 하려는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잠시 주저했다. 무엇보다도 구걸하는 듯한 그의 표정 때문이었다.
“어디에 거시려고요?”
“여자 친구요.”
내 입이 순식간에 벌어지면서 급하게 숨이 멈춘 듯한 소리가 목울대에 걸렸다.
“헉!”
나도 모르게 그 소리가 나왔다. 전혀 예상 밖의 대답이라서 그랬던가. 아니면 나는 그를 비웃고 있었던가.
“여자 친구 있어요?”
“네.”
그는 손에 쥐고 있던 쪽지를 펴서 내게 건넸다. 전화번호와 이름만 하나 적혀 있었다. 나로서는 무척이나 낯선 이름이었다. 지난 시절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나 함부로 사용하고 있는 촌스러운 이름이었다. 쪽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다. 통화음이 들렸다. 나는 사내에게 휴대전화를 건넸다.
사내는 고개를 조금 돌려서 여자 친구와 통화를 했다. 무슨 내용인지는 잘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어디에 있느냐, 어디서 만나자는 몇 마디는 알아챌 수 있었다. 나는 자꾸만 그에게로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조금 전에 그를 비웃던 것과는 달리 그 사내가 애처롭기도 하고 그들의 연애가 재밌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여전히 사내의 모습이 우스웠다. 가만히 짧게 통화를 마친 사내가 연신 고맙다며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내가 어딘가로 떠나고 나자 부끄러운 사내 하나만 남았다. 내 비웃음을 그가 못 보았기를 바랐다. 우습다는 식으로 미소까지 지으며 바라보던 한 사내의 눈길을 그가 느끼지 못했기를. 내가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진심으로 나는 그 초라한 사내가 부러웠다. 서울역 어디선가 그녀를 만나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다.
(강정 외 <시인의 사물들>)
|작법공부|
자신의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으면서도 옆자리 낯선 사람에게 휴대폰을 빌려서 여자 친구에게 전화를 건다면 그 두 사람의 관계는 휴대폰에 흔적을 남겨서는 안 되는 관계일 것이다. 아주 오래 된 문학의 주제(소재)다. 최근까지 이름난 작가들의 동일 소재 작품들이 재판을 받고 금서목록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런데도 작가들은 같은 소재를 반복하여 작품화하고 있다. 왜 그럴까? 필자가 이 작품에 대한 |작법공부|를 잠시 생각해 본 이유가 이 영원한? 질문을 다시 해 보기 위해서였다.
문학이란 무엇이냐 하였을 때 그 본질적인 대답은 ‘인간탐구 이야기’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즉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이냐가 문학의 영원한 소재이며 주제인 것이다. 그런데 왜 문학은 도덕적인 점잖은 소재보다 재판까지 받고 금서목록에 오를 수밖에 없는 비도덕적인 이야기에 더 관심을 가지는 것일까? 만약 이 같은 의문에 대한 대답을 ‘독자들이 그런 이야기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한다면 일면 맞는 대답이면서도 틀린 대답이 될 것이다. 독자의 흥미에 영합하여 책을 팔아먹기 위해 쓴 값싼 이야기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문학의 정답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작가들은 분명 ‘사랑해선 안 된 사람을 사랑한 죄’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들에게서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탐구’의 어떤 대답을 듣고 있을 것이다.
성경은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많이 읽히고, 그 이상 신앙의 대상까지 되고 있는 최고의 인간탐구서이다. 그런 인류 최고 고전이 인류의 역사가 시작된 사연이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륜에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이브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한 선악과를 뱀의 유혹에 넘어가 따 먹은 불륜이 지구촌 인류 역사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지구촌 최고의 신앙서인 성경도 펼치자마자 입을 열고 있는 불륜 이야기! 그러니 어찌 작가들이 불륜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그 속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대답이 들어 있을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 정답이 무엇일까? 필자도 그런 문학작품들을 평생 읽어오고 자신의 작품 중에도 그런 소재 작품들이 한 두 편 있지만 이것이 정답이하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읽지도 못했고, 스스로 찾아내지도 못하였다. 혹 작가들은 ‘사랑해선 안 될 사랑’에서 ‘구름에 달 가듯’ 하는 미美의 어떤 ‘찰라’를 훔쳐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칼의 프른 빛은 가장 날카롭게 버려진 칼끝에서만 번득인다. 불륜은 칼끝에서 추는 춤이다.(평설 이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