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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
4장 우리의 무대가 세계인 이유
목숨을 내놓더라도 갈 길은 간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나오자마자 곧장 충청도 갑사로 내려갔습니다. 고문으로 망가진 몸도 추스르면서 교회가 나아갈 길에 대해 깊이 고민하기 위해 기도하기 좋은 숲을 찾아간 것입니다. 그때가 한국 전쟁이 끝난 직후라 먹고 살기가 무척이나 힘들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먹고 사는 일이 힘들더라도 훗날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함께 모여 예배드릴 교회도 없는 처지지만 더 먼 앞으로의 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세계정세를 놓고 봤을 때 일본을 무조건 원수로만 여기고 배척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일본 선교활동 계획을 모두 준비한 뒤 갑사 뒷산으로 최봉춘을 불렀습니다.
"너는 지금 당장 현해탄을 건너가야 한다. 죽기 전에는 돌아오지 못한다." 느닷없는 이야기에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런데도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예!" 하고 답하고는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어디든지 가오리다...'란 성가를 부르며 호기롭게 산을 내려갔습니다. 일본에 가서 생활은 어떻게 하고, 선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느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최봉춘은 그렇게 담대한 사나이였습니다.
당시만 해도 일본과 국교가 열리기 전이라 밀항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밀항은 나라 법을 어기는 일이었지만, 반드시 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모든 것을 감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최봉춘은 목숨을 내놓다시피 하고 밀항선에 올랐습니다. 그가 바다를 무사히 건넜다는 소식을 보내오기까지 다른 일은 일체 접어두고 골방에 들어앉아 기도 정성을 들였습니다. 먹지도 않고 자지도 않았습니다. 그를 일본으로 보내는 데 필요한 돈 150만 원은 빚을 내어 충당했습니다. 밥을 굶는 식구들이 즐비한데도 큰 빚을 낼 정도로 일본 선교는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최봉춘은 일본에 닿자마자 체포되어 한국으로 되돌아왔습니다. 나는 그를 다시 일본으로 보냈습니다. 이번에도 일본 경찰에 잡혀 되돌아왔습니다. 겁에 질려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을 보니 그동안 그가 겪었을 온갖 고초가 모두 짐작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지독한 고문으로 부풀어 오른 이마에는 보라색 피멍이 얼룩얼룩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머리카락이 한 움큼 뽑혀나가 머리통 속살이 허옇게 드러난 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습니다. 억지로 울음을 참느라 그의 얼굴은 심하게 씰룩거렸습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살아온 거야 시시콜콜 말해 뭐하겠느냐. 어서 밥이나 먹어라"하며 그의 앞으로 뜨거운 김이 나는 국밥을 옮겨 놓아주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해 허기졌을 텐데도 최봉춘은 얼른 숟가락을 들지 못했습니다. 하는 수 없이 내가 숟가락을 들어 국에 밥을 말아주었습니다. "어서 먹어라. 내가 너한테 해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니 정말 마음이 아프구나" 하며 수저에 밥을 떠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최봉춘이 국밥 한 그릇을 다 먹을 때까지 나는 그의 앞을 지키고 앉아 있었습니다. 그를 껴안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일본 경찰의 매를 맞고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그가 겨우 밥을 넘기는 모습을 지켜보는 마음은 지옥이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그가 이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맛보는 따뜻한 밥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를 또다시 일본으로 보내야 했기 때문입니다.
밥을 먹고 난 뒤, 최봉춘을 데리고 다시 갑사 뒤편에 올랐습니다. 소나무 숲에 이르자 말없이 굳어지는 내 얼굴을 보고 최봉춘은 겁에 질렸습니다.
"너에게 뭐라 말할 수 없이 미안하다만 오늘 밤에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배를 타라. 네가 일본 경찰한테 열 번을 잡히더라도 어쩔 수 없다. 죽음이 코앞에 닥쳐와도 주어진 길은 갈 수밖에 없는 거야. 하루라도 헛되이 낭비할 수 없으니 오늘밤 기차로 내려가라."
"선생님,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는 못 갑니다. 무서워서 다시는 못 가요."
최봉춘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겁에 질린 그의 울음소리가 메아리로 번져 내 가슴을 파고들었습니다.
"울지 마라, 울음은 너를 약하게 만들 뿐이야. 너는 본래 무서움을 모르던 용감한 사내가 아니었느냐? 겁낼 거 없다. 밀선을 타는 건 너 혼자지만 그렇다고 너는 절대로 혼자가 아니다. 네 곁에는 내가 있고, 또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아라." 그러나 주저앉은 그는 도무지 일어설 줄 몰랐습니다.
내가 그를 억지로 일으켜 세우자 이미 힘이 풀려버린 그의 다리가 사정없이 휘청거렸습니다.
"이 자식! 이게 무슨 바보 같은 짓이야? 정신을 똑바로 차려!"
어깨를 마구 흔들자 비로소 그의 눈에 빛이 돌아오는 듯했습니다.
"얼른 가라! 이건 피할 수 없는 하늘의 명령이야."
"못 갑니다, 선생님.절대로 못 갑니다."
"가야 한다, 어서 가!"
"선생님, 이번에는 죽으면 죽었지 다시는 못 가겠습니다. 일본 경찰에게 또다시 잡히면 저는 그 자리에서 죽습니다. 다시는 보내지 말아주십시오."
죽어도 세 번은 갈 수 없다는 그의 마음을 알고도 남았지만 나는 그를 사정없이 닦아세웠습니다. 목숨을 내걸고 가야 하는 것이 그의 몫이듯 두려움에 떠는 그를 어떻게든 보내야 하는 것은 나의 몫이었습니다. 나는 보내지 말아달라며 호소하는 그의 뺨을 사정없이 때렸습니다. "이놈의 자식, 사나이가 한번 맹세했으면 실천을 해야지. 죽더라도 일본에 가서 죽도록 해라!" 하며 소리를 냅다 질렀습니다. 그렇게 무섭게 몰아부쳐야 하는 내 마음이 더 아팠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를 보내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어두운 밤에 몰래 배를 타고 현해탄의 거센 파도를 건너는 일을 세 번씩이나 시켜야 하는 내 마음도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는 일본으로 선교를 반드시 가야 하는 때였습니다. 하늘의 때는 사람이 마음대로 미뤘다 당겼다 할 수 없습니다. 그 엄중한 사실을 나도 알고 그도 알고 있었습니다.
최봉춘은 또다시 부산에서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그렇지만 세 번재 밀항도 실패였습니다. 그는 오무라大村 수용소에 갇혀 다시금 한국으로 송환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밀입국자는 일주일 이내에 송환하는 것이 당시 일본의 법이었습니다. 한국행 배를 타기 위해 시모노세키로 가는 기차에 오른 최봉춘은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금식을 했습니다. 곡기를 끊자 몸에서 열이 났습니다. 일본경찰은 치료를 위해 본국송환을 미루고 그를 병원에 입원시켰고 그는 그 틈을 타서 병원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생사를 건 3년의 각고 끝에 최봉춘이 일본에 정착한 것은 1958년,우리나라와 일본은 정식 국교를 맺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압제 정치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에 일본과의 수교를 모두 거세게 반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원수의 나라 일본에 밀항을 보낸 것은 대한민국의 미래를 열기 위해서였습니다. 일본을 거부하고 관계를 끊기보다는 일본을 교화시킨 뒤 주체적으로 그들을 끌어 안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나라로서는 일본의 위정자들과 통하는 길을 뚫어 일본을 업어야 하고, 또 어떻게든 미국과 연결 되어야 미래에 한국이 살 수 있는 길이 열린다고 내다보았습니다. 최봉춘의 희생 덕분에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하는 데 성공한 후 일본교회는 구보끼 오사미久保木修己라는 뛰어난 청년지도자와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에 의해 확고히 자리를 잡아갔습니다.
이듬해에는 미국으로 선교사를 보냈습니다. 이번에는 밀항이 아니라 당당히 여권과 비자를 받아 보냈습니다. 서대문 형무소를 나온 후 나를 잡아가두는 데 일조한 자유당 장관들에게 접촉해서 여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나를 반대하던 자유당을 거꾸로 이용한 것입니다. 당시 미국은 너무도 먼 나라였습니다.
내가 그 먼 미국으로 선교사를 보낸다고 하니, 우선 한국에서 교회를 더 키운 후에 해도 늦지 않는다며 다들 반대했습니다. 그러나 거대한 나라 미국의 위기를 빨리 수습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이 망한다며 식구들을 설득했습니다. 1959년 1월 이화여대에서 쫓겨난 김영운 교수가 처음 미국에 파송되었고, 그해 9월 김상철 선교사가 미국에 도착하여 전세계를 향한 선교 역사의 첫발을 시작하였습니다.
귀하게 벌어 귀하게 쓰라
장사를 해서 모은 돈은 거룩한 돈입니다. 그러나 장사한 돈이 거룩한 돈이 되려면 거짓말을 해서도 안 되고 폭리를 취해서도 안 됩니다. 장사할 때는 항상 정직해야 하며 언제든지 이익을 3할 이상 남겨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귀하게 벌어들인 돈은 마땅히 귀한 일에 쓰여야 합니다. 목표가 분명하고 뜻이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는 평생 그런 마음으로 사업을 했습니다. 나의 사업 목적은 단순히 돈을 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교 활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사업을 통해 선교자금을 번 이유 중 하나는 식구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선교활동비로 충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아무리 큰 뜻을 가지고 하는 일이라도 해외에 선교사를 파견하는 일은 마음만 가지고는 될 일이 아니었습니다. 선교비용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선교비는 마땅히 교회 이름으로 벌어들인 돈이라야 했습니다. 떳떳하게 장사를 해서 벌어들인 돈을 선교비로 써야 무슨 활동을 해도 당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무언가 돈이 될 만한 일을 찾아 고심하던 중에 우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당시 나는 식구들에게 한 달에 적어도 세 번은 서로 편지를 나누라고 권했습니다. 편지를 부치려면 40원어치 우표를 붙여야 하는데 우표를 한 장으로 붙이지 말고 1원짜리 40장을 모아 붙이게 했습니다. 그렇게 한 달에 세 번씩 보낸 편지에 붙인 우표를 떼어 팔았더니 첫 해에만 1백만 원 가량을 벌었습니다. 별것 아닌 우표가 큰돈이 되는 것을 경험한 우리 식구들은 그 일을 7년 동안이나 계속했습니다. 또 명승지나 배우들의 흑백사진에 물감을 칠한 브로마이드 사진 판매도 교회 운영에 적지 않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교세가 확장되면서 우표 수집과 사진 판매만으로는 충분한 선교비를 마련하기 어려웠습니다. 세계 곳곳에 선교사를 내보내려면 그보다 더 규모 있는 사업을 해야 했습니다. 나는 일본 사람들이 쓰다가 버리고 간 선반기계를 1962년 화폐개혁 전에 72만 원을 주고 샀습니다. 화폐개혁을 한 후의 가치로는 7만2천 원짜리 기계였습니다. 그것을 교회로 쓰던 적산가옥의 구석진 연탄광에 들여놓고 '통일산업'이라고 이름지었습니다.
"여러분의 눈에는 이 선반기계가 보잘것 없어 보일 수도 있습니다. 고작 낡은 기계 한 대를 들여놓고 도대체 무슨 사업을 벌인다는 것인가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 앞에 놓인 이 기계가 머지않아 7천 대 아니 7만 대의 선반기계가 되어 대한민국의 군수산업과 자동차 공업까지 꼬리를 물고 발전할 겁니다. 오늘 들여놓은 이 기계는 분명히 우리나라의 자동차 공업을 이끌어갈 초석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믿으십시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확신을 가지십시오."
나는 연탄광 앞에 식구들을 모아두고 당당히 말했습니다. 비록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목표는 높고 원대했습니다. 식구들은 내 뜻을 따라 헌신적으로 일을 도왔습니다. 덕분에 1963년에는 조금 더 규모있는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천승호'라는 배를 건조建造해서 인천시 만석동 부둣가에서 진수식을 가졌습니다. 우리 식구들 2백여 명이 참석한 자리에서 고기잡이배를 바다로 내보낸 것입니다.
물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특별한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탄생합니다. 어머니의 배 속은 바로 물입니다. 즉 우리는 모두 물에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가 물에서 생명을 얻었듯이 물 속의 시련을 거쳐야 육지에서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다는 염원을 담아 바다로 배를 내보냈습니다.
우리가 만든 천승호는 아주 좋은 배였습니다. 서해를 빠르게 누비며 고기를 많이 잡아주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때까지도 우리 식구들은 땅에서도 할 일이 많은데 굳이 바다에까지 나가 고기 잡는 사업을 벌일 것이 뭐냐는 반응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곧 해양시대가 열릴 것을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천승호를 띄운 것은 해양시대를 열기 위한 작지만 소중한 첫발이었습니다. 나는 그때 이미 더 넓은 바다, 더 크고 빠른 배를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습니다.
세계를 감동시킨 얌전한 춤사위의 힘
우리 교회는 부자 교회가 아닙니다. 밥을 굶는 사람들이 모여 시작한 가난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남들처럼 번듯한 교회 건물도 없었지만 남들이 쌀밥을 먹을 때 보리밥을 먹으며 한 푼 두 푼 절약해서 모은 돈을 우리보다 더 가난한 이웃들과 나누었습니다. 전도사들은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난 냉방에 불도 때지 않은 채 담요를 깔고 살았습니다. 끼니때가 되면 감자 몇 개를 구워 먹으며 허기를 달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우리를 위해서는 한 푼도 쓰지 않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1963년에는 17명의 어린이를 뽑아 리틀엔젤스라고 불리는 선화어린이무용단을 창단했습니다. 당시 한국의 문화적 토양은 처참하고 척박했습니다. 우리가 보고 즐길 것은 고사하고 남들에게 보여줄 것도 없었습니다. 우리의 춤이 무엇인지, 우리에게 5천 년을 이어온 문화란 것이 있는지도 모두 잊고 그저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했습니다.
나의 계획은 17명의 어린이들에게 우리의 춤을 가르쳐 세계로 내보내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이라고 하면 전쟁과 가난만 떠올리는 외국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여주고 한민족은 문화민족이라는 것을 일깨울 생각이었습니다. 우리 스스로 반만년의 역사를 가진 문화민족이라고 주장해본들 그들 앞에 내보일 것이 없으면 믿어줄 리 만무했습니다.
아름다운 한복을 입고 살며시 휘감아 돌아가는 우리 춤은 다리를 내놓고 껑충거리며 뛰는 춤에 익숙한 서양사람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입니다. 우리 춤에는 한민족의 슬픈 역사가 고스란히 스며있습니다. 억눌린 듯 머리를 다소곳이 숙이고 눈에 띄지 않게 가만가만 움직이는 춤사위는 한 많은 5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우리 민족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몸짓입니다.
하얀 버선발을 들어 한 발자국 떼어놓으면서 얼굴을 살포시 돌리고는 하얀 손을 들어올리는 것을 보면 애간장이 녹아내립니다. 우렁찬 목소리로 말을 많이 해서 상대를 감동시키는 게 아닙니다. 그 보일 듯 말 듯한 춤사위 하나가 사람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게 바로 예술의 힘입니다. 말을 하지 않아도 말이 통하고 그들이 살아온 역사를 몰라도 저절로 그 마음을 알게 하는 힘이 바로 예술에 있습니다.
더구나 어린이들의 때 묻지 않은 표정과 환한 웃음은 전쟁을 겪은 나라의 어두운 이미지를 단번에 씻어내릴 것입니다. 나는 20세기 최고의 문명국인 미국에 가서 5천 년 역사의 우리 춤을 선보일 생각으로 무용단을 만들었지만 세상은 또다시 우리를 향해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리틀엔젤스가 어떤 춤을 추는지 보기도 전에 욕부터 했습니다.
'통일교 여편네들이 밤낮없이 춤을 추더니 결국 춤추는 자식들을 낳았구나' 하는 어처구니 없는 욕설이 쏟아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떠한 소문에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리틀엔젤스를 통해 어떤 것이 우리의 춤인지 보여줄 자신이 있었습니다. 우리를 향해 벌거벗고 춤을 춘다고 비난하는 세상 사람들에게 버선발로 사뿐사뿐 내딛는 아름다운 춤사위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몸을 비비 트는 엉터리 춤이 아니라 온 몸을 우리 옷으로 감싸고 얌전히 추는 진짜 우리 춤 말입니다.
깊은 산중에 작은 오솔길을 만든 평화의 천사들
우리가 죽기 전에 자손들에게 반드시 남겨주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전통이고 또 하나는 교육입니다. 전통이 없는 민족은 망하고 맙니다. 전통이란 민족을 이어주는 혼이며, 혼이 없는 그 민족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이 교육입니다. 자손에게 교육을 시키지 않으면 그 민족 또한 망합니다. 교육은 새로운 문물을 통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얻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교육을 통해 살아갈 지혜를 배웁니다. 글을 모를 때에는 누구나 어리석을 수밖에 없지만 교육을 받고 나면 세상의 지혜를 이용할 줄 알게 됩니다.
교육은 세상의 문리를 이해하는 영특함을 가져다줍니다. 자손들에게 우리가 수천 년간 이어온 전통을 전해주는 한편 새로운 문물을 교육시키는 것은 민족의 앞날을 열어가는 일입니다. 물려받은 전통과 새로운 문물은 생활 속에서 적절히 융합되어 독창적인 문화로 재탄생합니다. 전통과 교육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두 가지를 적절히 융합시키는 지혜도 교육에서 얻어집니다.
나는 무용단을 만들면서 리틀엔젤스 예술학교 (이후 선화예술학교로 교명 변경)도 함께 세웠습니다. 학교를 만든 이유는 우리의 이상을 예술을 통해 세계로 널리 연결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학교를 운영할 힘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두 번째 문제였습니다. 나는 우선 실행에 들어갔습니다. 뜻이 분명하고 좋은 일이면 마땅히 시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하늘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며 사람을 사랑하는 교육을 하고 싶었습니다.
나는 선화예술학교를 만들면서 '애천愛天, 애인愛人,애국愛國'이란휘호를 아주 크게 썼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한국의 고유문화를 세계에 자랑한다고 하면서 어떻게 나라 사랑을 맨 꼴찌로 만들었소?" 하고 물었습니다. 나는 "어떤 사람이 하늘을 사랑하고 인류를 사랑하는 일을 했다면 그 사람은 이미 그것으로 애국을 한 것입니다. 애국은 저절로 완성된 겁니다" 하고 대답해주었습니다.
전 세계의 우러름을 받는 사람은 벌써 한국을 세계만방에 드러낸 것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에 나가 우리 문화의 우수성을 보여주면서도 리틀엔젤스는 한번도 '코리아'를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리틀엔젤스의 춤을 보고 박수를 보내는 사람들 마음 속에는 '문화와 전통의 나라, 한국'이란 이미지가 확실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리틀엔젤스는 다른 누구보다 한국을 세계에 널리 알리며 애국을 한 셈입니다. 선화예술학교 출신으로 세계적인 성악가가 된 조수미와 신영옥, 그리고 세계 최고의 발레리나가 된 문훈숙과 강수진의 공연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해집니다.
리틀엔젤스는 1965년 미국 공연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세계를 누비며 한국의 아름다운 전통을 선보이고 있습니다. 영국 왕실에 초대되어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공연을 했고 미국 독립 2백 주년 행사에 초대되어 워싱턴 캐네디 센터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미국 닉슨 대통령 앞에서 특별 공연도 하고 서울올림픽 문화예술 축전에도 참여했습니다. 리틀엔젤스는 이미 세계적으로 이름난 평화의 문화사절입니다.
1990년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회담하고 떠나기 전날 밤, 리틀엔젤스의 공연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의 최전선인 모스크바 한복판에 한국의 어린 소녀들이 선 것입니다. 한복을 입은 천사들은 우리 춤을 끝내고 난 뒤 그 고운 목소리로 러시아 민요를 불렀습니다. 객석에서 '앙코르'가 연발되어 도통 무대를 내려올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미리 준비한 합창곡을 다 부르고서야 내려왔습니다.
객석에는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부인인 라이사 여사가 앉아있었습니다. 당시 한국과 러시아는 정식 수교를 맺지 않은 상태였는데, 그런 나라의 문화 공연에 대통령의 부인이 참석한 것은 무척 이례적인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라이사 여사는 객석 앞자리에 앉아 공연 내내 뜨거운 박수를 보내주었습니다.
라이사 여사는 공연이 끝나자 무대 뒤로 찾아와 리틀엔젤스 단원들에게 직접 꽃다발을 안겨주며 "리틀엔젤스야말로 평화의 천사들입니다. 한국에 이토록 아름다운 전통문화가 있는 줄 몰랐습니다. 공연을 보는 동안 내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꿈을 꾸는 듯했습니다" 하고 한국 문화의 우수함에 거듭 찬사를 보냈습니다. 여사는 리틀엔젤스 단원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끌어안고 "My Little Angels!"라고 말하며 빰에 입을 맞춰주었습니다.
1998년에는 순수 민간 예술단체로는 처음으로 평양을 방문해 3차례나 공연을 했습니다. 귀여운 신랑각시춤도 추고 화려한 부채춤도 추었숩니다. 공연을 보는 동안 북한 사람들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한 여성의 사진이 신문기자의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지요. 북한의 김용순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장은 리틀엔젤스의 공연을 보고난 뒤, '깊은 산중에 작은 오솔길을 냈다고' 칭찬했습니다.
리틀엔젤스가 한 일이 바로 그렇습니다. 그동안 등 돌렸던 남북한이 한자리에 모여 서로의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명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정치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문화이고 예술입니다. 사람들의 마음 가장 깊은 곳을 울리는 것은 이성이 아닌 감성입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바뀌면 사상이 변하고 제도가 변합니다. 리틀엔젤스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세상에 알리는 역할을 했을 뿐 아니라 서로 다른 세상 사이에 오솔길을 만드는 역할을 톡톡히 했습니다.
나는 리틀엔젤스를 만날 때마다 '마음이 고와야 춤이 곱다. 마음이 고와야 노래가 곱다. 마음이 고와야 얼굴이 곱다'라고 말합니다. 참된 아름다움은 내 안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리틀엔젤스가 그토록 전 세계 사람들의 마음에 감동을 준 것은 우리 춤 속에 녹아있는 우리의 전통, 우리의 정신문화가 아름답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리틀엔젤스가 받은 박수갈채도 결국은 우리의 전통문화가 받은 박수갈채입니다.
바다에 미래가 있다
어려서부터 내 마음은 늘 먼 곳을 향해 있었습니다. 고향에서는 산에 올라 바다를 그리워했고 서울에 와서는 일본으로 건너가고 싶어했습니다. 언제나 지금보다 더 넓은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1965년, 처음으로 세계순방에 나섰습니다. 트렁크 속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져간 흙과 돌이 잔뜩 들어있었습니다. 세계를 돌며 곳곳에 한국의 흙과 돌을 심을 작정이었습니다. 열 달 동안 일본과 미국,그리고 유럽의 40개 나라를 돌았습니다. 서울을 떠나던 날, 수십 대의 버스에 나눠 타고 온 우리 식구들로 김포공항이 꽉 찼습니다. 당시 외국으로 나가는 것은 상당히 큰일이었습니다. 북서풍이 매섭게 불어오는 1월의 비행장에 사람들이 새까맣게 모여들었습니다.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하는 일입니다. 나는 식구들의 마음을 고맙게 받았습니다.
당시 우리의 선교국은 열 개 나라가 겨우 넘었지만 나는 2년 안에 40개 나라로 늘릴 생각이었습니다. 40개 나라를 돌아본 것은 바로 그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첫 번째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밀항을 해가며 선교를 시작한 일본에서 나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국법을 어기고 목숨을 내건 위험한 출발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당시 우리의 선택은 매우 적절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일본 식구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일본적입니까? 아니면 일본적인 것을 넘어섰습니까?"
나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일본적인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본적인 것을 필요로 하시지 않습니다. 일본을 넘어서는 것, 일본을 넘어선 사람을 필요로 하십니다. 일본의 한계를 넘어서 세계를 지향하는 일본인이라야 하나님께 쓰일 수 있습니다."
서운하고 냉정하게 들렸겠지만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두 번째 기착지는 미국이었습니다. 샌프란시스코 공항에 내린 나는 미국 선교사와 함께 두 달 동안 미국 전역을 돌았습니다. 미국을 돌아보는 동안 '전 세계를 호령하는 중심 본부는 미국이다. 앞으로 창건할 새로운 문화는 반드시 미국을 밟고 올라서야 한다'라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나는 미국 땅에 5백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수련소를 지을 계획을 세웠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1백 개 이상의 나라에서 모인 사람들을 받아들일 국제적인 수련소를 짓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그 소원은 오래지 않아 이루어졌습니다. 그 후 해마다 1백 개 나라에서 4명씩 보내온 사람들이 수련소에 모여 6개월 동안 세계평화를 연구하고 토론하는 일이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인종이나 국경, 종교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나는 인종과 국경, 종교를 넘어 다양한 생각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세계평화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의논하는 일이 인류를 성장시키고 세계를 보다 발전된 사회로 만드는 일이라고 믿습니다.
미국을 순방하는 동안 하와이와 알래스카를 제외한 48개 주를 모두 돌아보았습니다. 뒷좌석에 짐을 실을 수 있는 왜건을 빌려 타고는 밤낮 없이 달렸습니다. 행여 운전수가 졸기라도 하면 "이보게, 피곤한 것 다 알고 있네. 하지만 내가 미국 유람을 하러 온 것이 아니고 큰일을 해야 하니 바삐 가게" 하며 잠을 깨웠습니다. 어디 편안히 앉아 밥을 먹은 적도 없습니다. 차 안에서 식빵 두 쪽에 소지지 하나를 넣고 오이 피클이나 더 얹어 먹으면 훌륭한 한 끼 식사가 됩니다. 아침이건 점심이건 저녁이건 늘 그렇게 먹었습니다. 잠도 차 안에서 잤습니다. 차가 숙소이고 차가 침대며 차가 식당이었습니다. 좁은 차 안에서 먹고 자고 기도했습니다. 그 무엇도 못할 게 없었습니다. 당시 내게는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었기 때문에 몸이 조금 불편한 것은 충분히 견딜 수 있었습니다.
미국과 캐나다를 거쳐 중남미를 돌아본 다음에 유럽으로 건너 갔습니다. 내 눈으로 직접 본 유럽은 완전히 바티칸 문화권이었습니다. 바티칸을 넘어서지 않고는 유럽을 넘을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그 험하다는 알프스도 바티칸의 위세 앞에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유럽사람들이 모여 기도하는 바티칸에서 나도 땀을 뚝뚝 흘리며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수많은 교파와 교단으로 분열된 종교가 하루빨리 하나로 통일되기를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하나의 세상을 사람들이 저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대로 이리저리 나누어놓은 것을 기필코 하나로 통일해야 한다는 생각이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 후 이집트와 중동을 거쳐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둘러보는 것으로 열 달간의 긴 순방을 마쳤습니다.
서울로 돌아온 내 트렁크에는 40개 나라 120개 지역에서 가져온 흙과 돌이 가득 들어있었습니다.우리나라에서 가져간 흙과 돌을 새로운 땅에 심고 그곳의 흙과 돌을 거두어온 것입니다. 흙과 돌로 세계 40개 나라와 한국을 연결한 것은 한반도를 중심으로 평화세계가 실현되는 미래를 대비한 것이었습니다. 나는 40개 나라에 모두 선교사를 내보낼 채비를 시작했습니다. 넓은 지구촌을 돌아보면서 나는 아무도 모르게 세계를 무대로 펼칠 사업을 구상했습니다. 교회가 커지고 선교지가 하나둘 늘어날수록 선교비 지출도 부쩍 늘었기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한 더 큰 사업이 필요했습니다. 나는 미국 48개 주를 다니면서 과연 어떤 일이 우리 교회를 뒷받침해줄 수 있는 사업이 될지를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미국사람들은 고기를 매일같이 먹는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선 소 한 마리 값이 얼마인지를 알아보았습니다. 마이애미에서 25달러 하는 소가 뉴욕에 가면 4백 달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또 참치 한 마리는 얼마나 하는지 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참치 한 마리는 4천 달러가 넘었습니다. 게다가 참치는 한꺼번에 150만개가 넘는 알을 낳지만 소는 한 마리밖에 낳지 못합니다. 그러면 소를 키워야겠습니까, 참치를 잡아야겠습니까? 답은 분명했습니다.
문제는 미국사람들이 바다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사람들은 참치라면 맥을 못 추었지요. 미국에도 일본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고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고급레스토랑은 참치회를 아주 비싸게 팔고 있었습니다. 일단 회에 맛을 들인 미국인들도 참치를 즐겨 먹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는 육지보다 바다가 더 넓습니다. 미국은 넓은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물고기가 풍부합니다. 또 2백 해리만 나가면 내 바다, 네 바다가 없어 누구라도 그곳에 나가 물고기를 마음껏 잡을 수 있습니다. 농사를 짓거나 소를 키우려면 땅을 사야 하는데 바다는 그럴 필요가 없고 배 한 척만 있으면 어디까지라도 나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습니다. 바다 속에는 먹을 것들이 가득하고 바다 위로는 세계를 하나로 묶는 해운사업이 활발합니다. 전세계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물건이 상선에 실려 바다를 누빕니다. 바다는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무한한 보물창고였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배를 여러 척 샀습니다. 사진첩에서나 볼 수 있는 대형선박을 구입한 것이 아니라 34피트에서 38피트 정도 되는 배를 샀습니다. 엔진을 끈 채로 참치를 쫓아다닐 수도 있고 큰 사고도 없는 요트 크기의 고기잡이배였습니다. 워싱턴, 샌프란시스코, 탬파, 알래스카에 배를 띄우고 배를 고치는 수선소도 세웠습니다.
공부도 많이 했습니다. 한 지역에 배 한 척씩을 띄워 바닷물의 온도를 재고 날마다 참치가 얼마나 잡히는지를 조사해 도표로 만들어 통계를 냈습니다. 전문가들이 만들어놓은 통계를 얻어다 쓴 것이 아니라 우리 식구들이 직접 물 속에 들어가 잠수를 하면서 만들었습니다. 그 지역의 유명한 대학교수가 연구한 결과는 참조만 할 뿐 내가 직접 그곳에 들어가 살면서 일일이 확인을 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만든 자료만큼 정확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렇게 힘들여 만든 자료였지만 독점하지 않고 모든 정보를 수산업계에 다 공개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 다른 바다를 개척했습니다. 한 바다에서 너무 많이 고기를 잡으면 어족이 말라버립니다. 서둘러 다른 바다로 진출해야 합니다. 수산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우리는 미국 수산업계를 발칵 뒤집어놓았습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또 일을 벌였지요. 바로 아주 먼 바다로 나가는 원양어선 사업에 뛰어든 것입니다. 배 한 척이 바다에 나가면 적어도 반 년 동안은 집에 돌아오지 않고 고기잡이만 하는 것입니다. 배에 고기가 꽉 차면 먹을 것과 석유를 잔뜩 실은 운반선이 나가 고기와 바꿔옵니다. 배에는 아주 커다란 냉장실이 있어 잡은 고기를 한참동안 저장할 수 있었습니다.
뉴 호프라는 이름의 우리 배는 참치를 많이 잡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 배를 내가 직접 타고 나가서 참치를 잡았습니다. 사람들은 배타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젊은이들한테 배를 타라고 하면 겁부터 먹고 모두들 도망갔습니다. "선생님, 저는 배멀미가 심해서 안 됩니다. 배만 타면 울렁거려서 죽을 것 같아요" 하며 사정을 했습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탔습니다. 그때부터 하루도 거르지 않고 배를 탄 것만 7년이 넘고 그 후로도 아흔 살이 되는 지금까지 시간만 나면 배를 탑니다. 그러자 이제는 "나도 선생님처럼 캡틴이 되고 싶으니 배를 타게 해주십시오" 하며 나서는 청년들이 늘어났습니다. 배를 타겠다는 여자들도 많아졌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리더가 먼저 하면 따라하게 되어있습니다. 덕분에 나는 소문난 참치잡이꾼이 다 됐습니다.
그런데 참치를 많이 잡기만 하면 뭐 합니까? 제때에 제값을 받고 팔지 못하면 헛고생입니다. 나는 참치 가공공장을 만들고 직접 판매까지 했습니다. 냉장 시설이 되어있는 대형 트럭에 참치를 싣고 다니며 팔았습니다. 판매가 막히면 아예 씨푸드 레스토랑 Seafood-Restaurant을 만들어 참치를 직접 소비시켰습니다. 그렇게 하자 다들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했습니다.
미국은 세계적인 어장 4개 가운데 무려 3개를 갖고 있는 나라입니다. 그 말은 전 세계 고기의 4분의 3이 미국을 둘러싼 바다에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도 미국은 고기를 잡을 사람이 없어 수산업이 형편없이 뒤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라에서는 수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별의별 진흥책을 내놓았지만 큰 효과가 없었습니다. 누구든지 2년 반 동안 배를 타기만 하면 10퍼센트의 값에 배를 준다고 하는데도 지원자가 없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우리가 수산업을 일으키자 항구도시들마다 난리가 났습니다. 우리만 들어가면 도시가 번성하니 안 그랬겠습니까? 우리가 하는 일은 결국 새로운 세계를 개척하는 일이었습니다. 단순한 고기잡이가 아닙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것입니다. 남이 가지 않은 길을 개척한다는 게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바다는 참 잘도 변합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변석개朝變夕改한다고 하지만 바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합니다. 그래서 바다는 더 신비롭고 더 아름답습니다. 바다는 천하를 품고 삽니다. 한 곳에 모여 구름이 되기도 하고 비가 되어 다시 내리기도 합니다. 나는 자연이 속임수가 없어서 참 좋습니다. 높으면 낮아지고 낮으면 높아집니다. 어떤 경우라도 평평하게 그 높이를 맞춥니다. 낚싯대를 드리우고 앉아있으면 한가롭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바다 위에서 무엇이 우리를 방해할 수 있을까요? 누가 우리를 다그칠 수 있을까요? 당연히 여유 시간이 많습니다. 그저 바다를 보며 바다와 이야기를 나누면 됩니다. 바다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영적인 세계가 넓어집니다. 그러나 바다는 금세 평온하던 얼굴을 바꾸어 거센 파도를 몰아칩니다. 사람 키의 몇 배나 되는 파도가 집어삼킬 듯이 뱃전으로 솟구칩니다. 사나운 바람이 돛을 찢고 무서운 소리로 울어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렇게 파도가 거세고 바람이 사납게 부는 중에도 물고기들은 물 속에서 잠을 잘도 잡니다. 파도에 몸을 맡기고 잡니다. 그래서 나도 물고기들한테 배웠습니다. 아무리 거센 파도가 밀려와도 무서워하지 않기로 말입니다. 파도에 몸을 맡긴 채 나도 배와 한 몸이 되어 물결을 타기로 했습니다. 그랬더니 어떤 파도를 만나도 내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바다는 내 인생의 훌륭한 스승입니다.
미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
1971년 말, 나는 미국으로 향했습니다. 미국에 가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인데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았습니다. 미국 비자를 처음 받는 것도 아닌데 도무지 비자가 나오지 않자 식구들 중에는 출국 날짜를 미루는 것이 어떻겠냐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식구들에게 무어라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정해진 날짜에 한국을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선 일본으로 가서 미국 비자를 해결하기로 하고 일단 출국을 서둘렀습니다.
내가 떠나려던 날은 몹시 추웠지만 여전히 나를 배웅하려고 식구들이 공항 밖까지 몰려들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국하려고 보니 여권에 외무부 여권 과장의 출국인증 날인이 빠져있었습니다. 결국 나는 예약했던 비행기를 타지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일단 댁으로 돌아가 계시면 도장을 받아오겠습니다" 하며 출국준비를 담당했던 식구들이 어쩔줄 몰라했습니다.
"아니야,공항에서 기다릴 테니 어서 빨리 도장을 받아오게나."
나는 마음이 급했습니다. 마침 일요일이라 여권과장이 출근도 안 했을 테지만 그런 사정을 봐줄 여유가 없었습니다. 우리 식구들이 여권과장의 집까지 찾아가 도장을 받아온 덕분에 그날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 한국을 떠났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다음날, 국가 비상사태가 선포되고 이튿날부터 해외출국이 금지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가는 마지막 비행기를 탔던 것입니다.
그런데 일본에 가서 또다시 미국 비자를 신청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광복되기 직전에 공산주의자 혐의를 받고 일본경찰에게 잡혀갔던 기록이 남아서였습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맹위를 떨치던 시기였습니다. 우리는 127개국에 선교사를 내보냈는데 그중 공산국가 4곳에서 추방을 당할 정도였습니다. 당시 공산국가에서 선교를 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일이었으나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소련을 비롯한 공산주의 국가들에 선교사를 파송했습니다.
우리는 동유럽의 공산국가에서 벌이는 선교활동을 나비작전이라고 불렀습니다. 애벌레가 오랜 고통의 시간을 보낸 뒤에 날개를 달고 나비가 되는 모습이 공산국가에서 모진 고난을 참아야 하는 지하 선교활동과 닮았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나비가 애벌레에서 탈피하는 것은 힘들고 외로운 과정이지만 날개를 얻은 나비는 어디든지 힘차게 날아갈 수 있습니다. 그처럼 지하 선교도 공산주의만 무너지면 날개를 달고 훨훨 날아갈 것이었습니다.
1959년 초에 미국으로 건너간 김영운 선교사는 미대륙의 모든 대학을 돌며 하나님 말씀을 전했는데 그중 버클리대학에 유학을 왔던 독일인 피터 코흐는 새로운 진리에 전도되어 학업을 중단하고 네덜란드의 로테르담으로 가서 유럽전도를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도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공산국가에 선교사를 내보내는 일을 했습니다. 제대로 된 파송예배 한번 하지 못한 채로 죽음의 땅으로 선교사를 내보내는 내 마음은 갑사 뒤편의 소나무 숲에서 최봉춘에게 일본으로 가는 밀항선을 타라고 내쫓던 때와 별반 다를 게 없었습니다.
자식이 매를 맞는 것을 보기란 차라리 내가 매를 맞는 것보다 더 참혹합니다. 차라리 내가 선교사가 되어 가면 좋을 것을, 식구들을 감시와 처형의 땅으로 내보내면서 내 마음은 줄곧 울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들을 내보낸 후 나는 거의 모든 시간을 기도에 매달렸습니다. 그들의 목숨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간절한 기도였습니다. 공산권 선교는 금세라도 공산당한테 뒷목을 낚아채일 듯 위태롭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공산권 선교를 나가는 사람들은 부모에게 목적지조차 알리지 못한 채 떠났습니다. 공산주의가 얼마나 무서운지를 잘 아는 부모들이 사랑하는 자식이 죽음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할 리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련에 파송되었던 군터 부어르쩌는 소련의 KGB에게 발각되어 강제추방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차우세스쿠의 독재정치가 극에 달했던 루마니아에서는 비밀경찰 세큐리타트에 미행을 당하고 전화를 도청당하는 일이 예사였습니다.
한마디로 사자굴에 들어산 것이나 마찬가지인 삶이었습니다만 공산국가로 들어가는 선교사들의 숫자는 나날이 늘어났습니다. 그러던 1973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선교사를 비롯한 우리 식구들 30여 명이 한꺼번에 검거되는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때 24살의 마리 지브나는 차디찬 감방에서 꽃다운 나이에 목숨을 잃어 공산국가에서 선교하다 숨진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고 이듬해에 또 다른 한 사람이 감옥에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교회 식구들이 감옥에서 숨졌다는 소식을 들은 나는 온 몸이 굳어졌습니다. 말하는 것,먹는 것은 물론 기도조차 하지 못하고 돌덩어리가 된 것처럼 앉아만 있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듣지 않았다면, 그토록 춥고 외로운 감옥에 갈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곳에서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 그들은 나를 대신해서 고통을 당하고 죽은 것입니다.
'그들의 생명과 맞바꾼 내 목숨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그들이 나를 대신해서 지고 간 공산권 선교의 짐을 나는 어떻게 갚아야 할까?' 나는 점점 더 말을 잃어갔습니다. 깊은 물 속에 잠긴 듯 한없는 슬픔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내 눈 앞에 마리 지브나가 노란 나비가 되어 나타났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차디찬 감옥을 벗어난 노란 나비는 힘을 잃고 주저앉은 나에게 힘을 내고 일어서라며 날개를 팔랑거렸습니다. 그녀는 목숨을 건 선교를 통해 정말 애벌레를 깨고 나온 나비가 되어있었습니다.
그처럼 극한 상황에서 선교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꿈이나 환상을 통한 계시가 많았습니다. 사방이 막힌 곳이라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는 곳이니 하나님이 계시를 통해 갈 길을 일러주셨던 것입니다. 잠깐 잠이 든 새에 '얼른 일어나 자리를 옮기라'는 꿈을 꾸고는 급히 몸을 피하자마자 비밀경찰이 들이닥쳐 목숨을 구하는 일이 비일비재했습니다. 또 한번도 직접 본 적 없는 내가 꿈에 나타나 선교 방법을 일러주기도 했다면서 나를 만나자마자 "아, 그때 꿈에서 뵈었던 선생님이 맞으시네요" 하며 반가워했습니다.
이렇게 공산주의를 무너뜨리고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나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하고 미국 비자를 내주지 않아, 하는 수 없이 그동안 캐나다에서 반공을 위해 일했던 자료들을 제출하고서야 겨우 비자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복잡한 과정을 거쳐가며 미국에 간 것은 그들을 타락시킨 검은 세력과 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생명을 걸고 악의 세력과 전쟁을 벌이려 떠난 겁니다. 당시 미국은 공산주의와 마약, 퇴폐, 음란 등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문제가 아수라장처럼 뒤섞여 펄펄 끓고 있었습니다. 나는 '소방수이자 의사로서 미국에 왔노라'고 외쳤습니다. 집에 불이 나면 소방수가 달려오고, 몸에 병이 나면 의사가 찾아오듯 나는 타락의 불에 타고 있는 미국에 불을 끄러 달려간 소방수이자 하나님을 잃어버리고 퇴폐의 늪에 빠진 미국의 병을 고치러 간 의사였습니다.
1970년대 초 미국은 월남전을 둘러싼 갈등과 물질문명에 대한 회의로 사회가 심하게 분열되어 있었습니다.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한 젊은이들은 거리를 떠돌며 술과 마약, 프리섹스에 인생을 허비하고 소중한 영혼을 방치했습니다. 그들이 방황을 끝내고 올바른 삶으로 돌아오도록 이끌어줘야 할 종교는 제 역할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러니 저속한 음란물이 거리에서 버젓이 팔려나가고 마약을 먹고 환각에 빠져 휘청거리는 젊은이들이 넘쳐났으며 이혼한 가정의 아이들은 마음 둘 곳을 잃고 거리를 헤맸습니다. 하나님은 온갖 범죄가 판을 치는 미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려 나를 그곳에 보내셨습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기독교의 새로운 장래'와 '하나님의 뜻과 미국'이라는 주제로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활동을 펼쳤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무도 지적하지 않은 미국의 약점을 아프게 꼬집었습니다.
"미국은 본래 청교도 정신으로 세운 나라입니다. 불과 2백 년 사이에 세계 최대 강대국이 될 만큼 눈부신 발전을 한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무한한 사랑의 축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의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미국은 하나님을 버렸습니다. 지금 미국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든 영성을 다시 회복하지 않으면 미국의 미래는 없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영성을 깨워 망해가는 미국을 구하려 이곳에 왔습니다. 회개하십시오!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가야 합니다!"
레버런 문, 미국 정신혁명의 씨앗
미국인들이 처음 내게 보인 반응은 차갑기 그지없었습니다. 이제 겨우 전쟁의 굶주림 속에서 살아난 한국이라는 보잘것 없는 나라에서 온 종교지도자가 어디서 감히 미국인을 상대로 회개하라는 소리를 하느냐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미국인들만 나를 반대한 것이 아닙니다. 국제 공산주의자들과 연계된 일본 적군파들의 반발은 특히 심해서, 내가 자주 머물던 보스턴 수련원에 침입했다가 FBI의 불심검문에 적발되기도 했습니다. 나를 해치려는 움직임이 얼마나 많았는지 우리 아이들이 경호원 없이 학교를 다니기 어려울 지경이었습니다. 살해 위협이 계속되자 나도 한동안은 방탄유리 안에서 강연을 했습니다.
그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동양에서 온 작은 눈의 남자가 벌이는 순회강연은 날이 갈수록 화제를 모았습니다. 사람들은 지금까지 듣던 것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가르침에 귀를 귀울였습니다. 우주와 인생에 관한 근본원리를 비롯하여 미국의 건국정신을 일깨우는 강연 내용이 퇴폐와 나태의 나락으로 빠져들던 미국인들에게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미국인들은 내 강연을 통해 의식혁명을 이루었습니다. 젊은이들은 파더 문 Father Moon 혹은 레버런 문 Reverend Moon이라고 부르며 나를 따랐고, 어깨까지 길게 길렀던 머리카락과 덥수룩한 수염을 깎았습니다. 차림새가 바뀌면 마음도 바뀌기 마련이라 술과 마약에 찌들었던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의 사랑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강연에는 종파를 초월한 다양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설교 중에 "여기 장로교인 있는가?" 하고 물으면 "여기요, 여기!" 하며 손을 드는 청년들이 아주 많았습니다. 또 "가톨릭도 있나?" 하고 물어도 여기저기서 손을 번쩍번쩍 들었습니다. "남침례교는?" 하고 물으면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저요, 저요!" 하는지 모릅니다. 내가 "자기 종교 놔두고 왜 나에게 설교를 들으러 오는 거요? 어서들 돌아가요. 돌아가서 자기 교회에 가서 말씀 들어" 하면 "와! 와! 하고 탄성을 질러댔습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젊은이들뿐만 아니라 장로교며 침례교의 지도자들이 교회 청년들을 이끌고 찾아왔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레버런 문'은 미국사회의 정신혁명을 뜻하는 하나의 아이콘이 되어갔습니다.
나는 미국의 젊은이들에게 참고 인내할 것을 가르쳤습니다. 무릇 자기를 지킬 줄 알아야지만 우주를 지킬 수 있다는 사실을 절절히 외쳤습니다. "여러분은 고통의 십자가를 지고 싶습니까? 아무도 십자가의 길을 가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마음으로는 지고 싶어도 몸이 먼저 '노!' 해버립니다. 눈에 보기 좋다고 마음에도 좋은 것은 아닙니다. 보기에는 그럴싸해도 속을 들여다보면 추악하고 나쁜 것이 많습니다. 그런데도 눈이 제 보기에 좋은 것만 찾아 그 길로만 가려고 하면 얼른 '이놈아!' 하고 소리쳐 막아야 합니다. 또 입이 좋은 것만 먹으려고 해도 '이놈아!' 하고 야단쳐서 막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은 자꾸만 이성에 끌리지 않나요? 그럴 때도 '이놈아!' 하고 자신을 막아 세워야 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면 이 세상의 어떤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내가 깨지면 우주가 깨지는 겁니다."
'우주 주관 바라기 전에 자아 주관 완성하라'는 내 청년 시절의 좌우명을 그들에게 외쳐댄 것입니다. 미국사회는 물질사회입니다. 나는 물질문명의 한가운데에 가서 마음의 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우리는 마음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마음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 마음에 사랑을 더한 참사랑을 이야기했습니다. 참사랑을 바탕으로 분명한 자아의식을 갖고 자신을 스스로 조절할 줄 알아야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또 노동의 소중함을 일깨웠습니다.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창조입니다. 일생동안 일을 하며 살아도 즐거운 것은 노동이 하나님의 세계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는 노동이란 실상 하나님이 창조해 놓은 것을 갖고 이리 빚고 저리 빚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취미삼아 하나님의 기념품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실상 노동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물질문명이 가져다준 풍요로운 생활에 길들여져 일하는 즐거움을 잃어버린 미국 젊은이들에게 '즐겁게 일을 하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자연을 사랑하는 즐거움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도시의 퇴폐한 문화에 사로잡혀 이기적인 삶의 노예가 된 청년들에게 자연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이야기했습니다. 자연은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한순간의 쾌락과 몇 푼의 돈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죄악입니다. 우리가 파괴한 자연은 결국 독이 되어 우리에게 돌아오고, 우리 자손을 힘들게 만들 것입니다. 우리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이 말하는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마음의 문을 열고 자연의 소리에 귀를 귀울일 때, 자연 속에서 전해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미국 젊은이들에게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꿈에도 잊지 못할 1976년, 워싱턴 모뉴먼트
1975년 12월에 뉴욕 맨해튼의 북쪽에 있는 배리타운에 통일신학대학원을 설립했습니다. 그리고 유대교와 기독교, 천주교, 불교 등 모든 종교를 초월해서 각계의 교수들을 초빙했습니다. 그들이 교단에서 자신의 종교를 가르치면 우리 학생들이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 묻습니다. 수업시간은 매번 격렬한 토론장이 되었습니다. 모든 종교가 한 덩어리가 되어 토론을 하며 잘못된 편견을 깨고 서로를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유능한 젊은이들이 우리 학교에서 석사 공부를 마친 뒤에 하버드나 예일대학의 박사과정에 입학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세계 종교계를 이끌어가는 인재들이 되었습니다.
미국 국회는 1974년과 1975년에 나를 초청했습니다. 나는 하원 의원들 앞에서 'One Nation Under God'이란 주제로 강연을 했습니다. "미국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탄생한 나라입니다. 그러나 그 축복은 단순히 미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축북은 미국을 통해 내려진 세계를 위한 축복입니다. 미국은 축복의 원리를 깨닫고 전 세계의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자신을 희생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미국은 건국정신으로 되돌아가는 일대 각성운동을 벌여야 합니다. 수십 개로 나누어진 기독교를 통합하고 모든 종교를 규합해서 세계문명의 역사를 새로 써야 합니다" 하고 거리의 젊은이들을 향해 외쳤던 그대로 미국 국회의원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때까지 미국 의회에 초청을 받아 강연을 한 외국의 종교 지도자는 나밖에 없었습니다. 연달아 두 번이나 국회의 초청을 받자 한국에서 온 문 총재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이들이 부쩍 늘어났습니다.
그 이듬해 6월 1일, 뉴욕의 양키스타디움에서 미국의 건국 2백주년을 축하하는 축전이 열렸습니다. 당시 미국은 건국 2백 주년을 자축할 만큼 편안하지 못했습니다. 공산당의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고, 미국의 청소년들은 마약과 낙태 등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나는 미국, 그것도 뉴욕이 큰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병들어 누운 뉴욕의 심장에 칼을 대는 심정으로 축전에 임했습니다.
축전 당일은 비가 엄청나게 쏟아졌습니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아무도 비를 피하려 들지 않았습니다. 밴드가 'You Are My Sunshine'을 연주하자 양키 스타디움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그 노래를 따라 불렀습니다. 비를 철철 맞아가며 햇빛의 노래를 부르니, 입으로는 노래를 하지만 눈에서는 눈물이 났습니다. 빗물과 눈물이 범벅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복싱을 했었습니다. 복싱을 할 때 잽을 아무리 여러 번 넣어도 맷집 좋은 선수들은 끄떡도 안 합니다. 하지만 어퍼컷을 한 방 크게 날리면 아무리 힘 좋은 선수도 휘청합니다. 나는 미국이란 나라에 어퍼컷을 한 방 크게 날릴 셈이었습니다. 지금까지 거둔 성공보다 훨씬 큰 규모의 집회를 가져서 미국사회에 문선명의 이름을 확고하게 박아둘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워싱턴은 미국의 수도입니다. 국회의사당과 직선으로 이어지는 자리에 모뉴먼트라고 하는 탑이 있습니다. 마치 뾰족하게 깎은 연필을 세워놓은 것과 같은 모양입니다. 그 모뉴먼트 아래로 링컨기념관까지 이어지는 드넓은 잔디밭이 있습니다. 그곳은 말 그대로 미국의 심장입니다. 나는 그 곳에서 대규모 집회를 열 계획을 세웠습니다.
워싱턴 모뉴먼트에서 행사를 가지려니 미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하고 미국 파크경찰한테도 허가를 얻어야 했습니다. 미국 정부는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위기에 몰린 닉슨 대통령을 용서하라고 신문광고를 내고 카터 대통령의 자유주의 정책을 심하게 반대한 사람이니 반가워할 리가 없었습니다. 미국 정부가 여러번 퇴짜를 놓는 바람에 대회 날짜를 40일 앞두고서야 겨우 허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식구들도 너무 큰 모험이라며 다들 말렸습니다. 워싱턴 모뉴먼트는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사방이 뻥 뚤린 공원입니다. 그것도 나무가 울창하게 담장을 친 곳이 아니라 그저 푸른 잔디밭입니다. 그러니 행여 사람이 적게 모이면 천지사방에 그 썰렁함이 다 드러날 판입니다. 그 넓은 잔디밭을 가득 채우려면 수십만의 인파가 몰려와야 하는데 과연 그 일이 가능하겠는가 말입니다. 그때까지 워싱턴 모뉴먼트에서 큰 행사를 가진 사람은 두 사람 뿐이었습니다. 워싱턴 모뉴먼트는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인권 행진을 벌였던 곳이며 또 빌리 그래이엄 목사가 대규모 집회를 가졌던 상징적인 곳입니다. 그런 장소에 내가 도전장을 냈습니다.
나는 그날의 집회를 위해 쉴 새 없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원고를 네 번이나 고쳐 썼습니다. 집회가 일주일 앞으로 다가 왔는데도 그날 무슨 설교를 해야 할지 마음이 복잡했습니다. 그러다 원고 쓰기를 마친 날이 겨우 대회 사흘 전이었습니다. 본래 나는 설교 전에 원고를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쓰였습니다. 뭔지 확실치는 않지만 대단히 중요한 집회가 될 게 분명했습니다.
마침내 1976년 9월 18일, 꿈에도 잊지 못할 일이 그날 벌어졌습니다. 이른 아침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워싱턴 모뉴먼트로 몰려들었습니다. 무려 30만 명이라는 수많은 사람이 몰려들었습니다. 어디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찾아온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 사람들의 머리카락 색깔이며 얼굴색은 모두 제각각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 내려보내신 모든 인종이 다 모인 것 같았습니다.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정말 세계적인 집회였습니다.
나는 30만 명의 인파 앞에서 "퇴폐적인 미국 청년들을 위기에서 구해내어 희망의 젊은이로 만들려 미국에 왔다"고 당당히 선포했습니다. 내가 한 마디 한 마디 할 때마다 관중들 속에서 환호성이 일었습니다. 동양에서 온 레버런 문이 전하는 가르침은 혼돈의 시대를 살던 당시 미국 청년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들은 내가 전하는 순결과 참가정의 메시지에 환호했습니다. 사람들의 열광적인 반응에 내 안에서도 진땀이 흘렀습니다.
그해 연말,「뉴스위크」는 나를 1976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그렇지만 또 한 편에서는 나를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습니다. 그들에게 나는 동양에서 온 이상한 마술사일 뿐 그들이 믿고 따를 수 있는 백인이 아니었습니다. 또 자기들이 흔히 듣던 기성교회의 가르침과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한다는 게 그들을 몹시 불안하게 만들었습니다. 더군다나 백인 청년들이 '눈이 생선처럼 가늘고 긴 아시아인'한테 존경심을 표하고 따르는 것을 절대로 용납할 수 없없습니다. 그들은 내가 순진한 백인 젊은이들을 세뇌시킨다고 악소문을 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환호를 보내는 무리들 뒤에서 나를 반대하는 세력을 모았습니다. 내게 또 다른 위기가 닥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지만 겁내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분명히 옳은 일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미국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이 심한 나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인종들이 모여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는 자유와 평등의 나라로 알려져있지만 사실은 인종차별과 종교차별로 심한 갈등을 빚고 있는 곳입니다. 그것은 퇴폐와 타락, 물질주의처럼 1970년대의 풍요 속에 나타난 사회 병폐보다도 훨씬 더 미국 역사에 깊이 아로새겨져 쉽게 치유되기 어려운 고질병이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종교 간의 화합을 이끌고자 흑인들 교회를 자주 찾아갔습니다. 흑인 리더들 중에는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인종차별을 없애고 하나님의 평화세계를 이룩하려 애쓰는 숨은 일꾼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법적으로 인종차별이 금지되기 전, 수백 년 동안 벌어졌던 흑인 노예 시장의 사진을 교회 지하실에 전시해놓곤 했습니다. 살아있는 흑인을 나무에 매달아 불에 태우는 장면, 노예로 팔려온 흑인들을 닭처럼 늘어놓고 입을 벌려보는 장면, 남녀흑인을 벌거벗겨놓고 노예를 고르는 장면, 울부짖는 아이를 엄마 품에서 떼놓는 장면 등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지르는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었습니다.
"두고 보십시오. 앞으로 30년 안에 흑백 혼혈가정에서 태어난 아이가 미국의 대통령이 될 겁니다."
1975년 10월 24일, 시카고 집회에서 나는 그렇게 말했고 그날의 예언은 지금 미국에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시카고 태생의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었으니까요. 그러나 내 예언이 저절로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종교와 교파 간의 갈등을 없애기 위해 흘린 많은 사람의 피와 땀이 이제야 한 송이 꽃이 되어 피어난 것입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세계를 위해 울라
워싱턴 모뉴먼트 집회에는 놀랍게도 미국 기성교회의 목사들도 신도들을 대규모로 이끌고 왔습니다. 내가 전하는 메시지가 종교나 종파를 초월해서 젊은이에게 감동을 주고 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내가 그렇게나 목이 터지게 외치던 초종파, 초종교가 이루어진 순간이었습니다. 워싱턴 모뉴먼트의 집회는 기적이었습니다. 그날 모인 30만 명의 인파 기록은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일에는 반드시 나쁜 일도 함께 따라 오는 법입니다. 미국의 유대인들은 내 얼굴이 그려진 포스터에 팔자로 콧수염을 그려넣어 히틀러를 만들어놓았습니다. 그들은 나를 가리켜 반유대주의를 뜻하는 '안티 세미틱anti-semitic'이라 부르며 '유대인을 학대하는 사람'으로 몰아세웠습니다. 유대인들만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따르는 젊은이들이 급속히 늘어나고 원리를 배우려는 기성교회 목사들의 숫자가 눈에 띄게 늘어나자 미국의 기성교회들도 나를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의 전통적인 기독교가 집중적으로 나를 압박했고,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 것이 미국의 책임이라는 내 주장에 반발한 미국의 진보좌파 세력들도 나를 견제하고 나섰습니다.
인기가 높아질수록 나를 둘러싸고 갖가지 의혹이 제기되었습니다. 전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던 것들이 갑자기 심각한 문제가 되어 나를 압박했습니다. 보수사회는 내가 지나치게 진보적이라며 내가 가르치는 교리가 전통적인 가치관을 파괴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나를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것 중의 하나는 십자가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었습니다.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신 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뜻이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처형함으로 말미암아 인류를 평화세계에서 살게 하려던 하나님의 계획은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만일 그때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였다면 동서양의 문화와 종교가 하나가 되는 평화세계를 이루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돌아가셨고 하나님의 구원사업은 결국 예수님의 재림 이후로 미뤄지게 되었다는 십자가에 대한 나의 새로운 해석이 많은 반대를 불러왔습니다. 기성교회는 물론 유대인들도 모두 나를 적으로 몰아세웠습니다. 그들은 나를 미국에서 추방하기 위해 여러가지 일을 꾸며댔습니다.
결국 나는 또다시 감옥에 갇혔습니다. 나락으로 떨어진 미국의 도덕성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의 뜻에 맞는 나라로 회복시키는 일밖에 한 것이 없는데 세금을 사취했다는 죄를 뒤집어씌웠습니다. 내 나이 예순이 훨씬 넘었을 때입니다.
나는 미국에 정착하던 첫 해에 세계 각국에서 보내온 선교헌금을 뉴욕의 은행에 예금했습니다. 미국에서는 종교활동기금을 종교 지도자의 이름으로 은행계좌에 넣는 게 전통적인 관습입니다. 그렇게 넣어둔 예금에서 3년 동안 이자 소득이 생겼는데 그 이자 소득에 대한 세금을 신고하지 않아 탈세혐의가 있다며 뉴욕검찰청이 기소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나는 1984년 7월 20일, 코네티컷 주의 댄버리 연방 교도소에 수감되었습니다.
댄버리에 수감되기 전날, 벨베디아에서 마지막 집회를 가졌습니다. 벨베디아를 가득 메운 식구들이 눈물을 흘리며 나를 위해 기도했습니다. 나를 따르던 제자들 수천 명이 벨베디아로 몰려들었습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나는 결백합니다. 나는 아무 잘못도 저지르지 않았지만 댄버리 저 너머에서 떠오르는 찬란한 희망의 불빛을 보며 갑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울어주십시오. 미국을 사랑하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슬픔에 잠긴 젊은이들에게 나는 희망의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습니다.
교도소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남긴 성명서는 종교인들 사이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결백운동Innocent Movement이 벌어지고 나를 위한 기도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감옥에 가는 건 겁날 게 없었습니다. 나는 감옥살이에 익숙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위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 내 목숨을 없애기 위해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며 겁을 냈습니다. 하지만 나는 당당하게 감옥으로 향했습니다.
왜 우리 아버지가 감옥에 가야 합니까?
댄버리교도소에서도 남을 위해 살려고 하는 내 원칙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더러운 곳을 깨끗이 치웠습니다. 식당에 가서도 남들은 탁자에 코를 박고 졸거나 수다를 떠는데 나는 허리를 반듯이 펴고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주어진 일은 남보다 훨씬 많이 했으며, 주위 사람들을 살폈습니다. 남는 시간에는 성경책을 읽었습니다. 밤이고 낮이고 성경책을 보고 있으니 어떤 죄수가 "그게 당신의 성경책이야? 내 성경책은 이건데 한번 보겠어?" 하며 잡지를 던져주었습니다. 「허슬러」라는 도색잡지였습니다.
댄버리교도소에서 나는 말없이 일하는 사람, 책 읽는 사람, 명상하는 사람으로 불렸습니다. 그렇게 석 달을 지내고 나니 감옥 안의 죄수며 간수들과도 친해졌습니다. 마약을 하는 사람과도 친해졌고, 도색잡지를 자기의 성경책이라고 했던 죄수와도 친해졌습니다. 그러자 한두 달이 지나면서 댄버리에 수감되어있던 죄수들이 모두 자기가 받은 차입품들을 내게도 나누어주었습니다. 사람들과 정을 나누자 감옥 속에 봄날이 찾아온 듯했습니다.
사실 미국은 나를 굳이 감옥에 보내고 싶어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독일에 나가 있던 틈을 타서 기소결정을 내렸으니 내가 미국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그뿐인 상황이었습니다. 미국은 나를 감옥에 넣으려 했던 게 아니라 추방하려 한 것입니다. 내가 '레버런 문'으로 명성을 얻고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걷잡을 수 없이 늘어나자 나의 길을 방해한 것입니다. 한국에서처럼 나는 기성교회들에게 눈엣가시처럼 거슬리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을 알고 있던 나로서는 미국에 입국해서 스스로 감옥에 갔습니다. 그때까지도 미국에서 해야 할 일들이 남아있었으니까요.
나는 감옥에 가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합니다. 눈물 골짜기에서 우는 사람을 회개시키기 위해서는 내가 먼저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내가 그렇게 처참한 마음이 되지 않으면 상대를 굴복시킬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늘의 섭리는 참으로 오묘합니다. 내가 감옥에 갇히자 뜻밖에도 미국 정부가 종교의 자유를 침해했다며 분노한 성직자들 7천여 명이 나를 구명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그중에는 미국 보수기독교단을 대표하는 남침례교의 제리 포웰 목사와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 때 축복기도를 한 진보계열의 조셉 라우리 목사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명시위에 앞장섰습니다. 딸 인진이도 그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 행진했습니다. 7천여 명의 성직자들 앞에서 눈물로 쓴 편지를 읽기도 했습니다.
"여러분,안녕하십니까? 저는 문선명 목사의 둘째 딸 문인진입니다. 1984년 7월 20일은 세계의 종말이 우리 가족에게 찾아온 것 같았습니다. 이날은 바로 아버님께서 교도소에 들어가신 날입니다. 이런 일이 아버님께 일어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이 축복한 자유의 땅이며, 아버님이 몹시도 사랑하고 봉사해온 미국 땅에서 말입니다. 아버님은 미국에 오셔서 매우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저는 아버님이 주무시는 것을 거의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새벽에 일어나셔서 기도하시고 일하십니다. 저는 미국의 장래와 하나님을 위해 아버님만큼 헌신적으로 일하시는 분을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미국은 아버님을 댄버리 교도소에 수감시키고 말았습니다.
아버님이 왜 댄버리 교도소에 가야 합니까? 그분은 자신의 고통에는 개의치 않는 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해온 아버님의 삶은 눈물과 고난으로 점철돼 있습니다. 지금 아버님의 연세는 예순넷이십니다. 아버님에게는 미국을 사랑한 죄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교도소 식당에서 접시를 씻으시거나 바닥을 닦고 계십니다. 지난 주에 저는 죄수복을 입고 계신 아버님을 처음 면회했습니다. 저는 울고 또 울었습니다.
아버님은 '나 때문에 울지 말고 미국을 위해 기도하렴'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버님은 전 세계 수백만 교인에게 말씀하신 이야기를 저에게도 그대로 전하셨습니다. '네 분노와 슬픔을 돌이켜 이 나라를 진정 자유로운 나라로 만들 수 있는 강력한 힘으로 바꿔라.' 아버님은 감옥 안에서 어떤 힘든 일도 하실 것이며, 어떤 억울함도 다 참을 것이며, 어떤 십자가도 능히 지실 거라 하셨습니다. 종교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기초입니다. 종교의 자유를 위해 지지해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나는 모범수로 인정을 받아 6개월 감형을 받고 13개월 만에 출감했습니다. 교도소 문을 나서던 날 저녁에 워싱턴에서 출감 환영 만찬회가 열렸습니다. 유대교의 랍비들과 기독교의 목사들이 1천7백 명이나 모여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 곳에서 또 한번 '초종교 초종파'를 주장했습니다. 누구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큰 소리로 세상을 향해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종파나 교파주의자가 아닙니다. 지엽적인 교리 이론에 얽매이실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부모심정, 그리고 크신 사랑의 마음에는 민족과 인종의 구분이 없습니다. 국가나 문화전통의 벽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만민을 같은 자녀로 품기 위하여 애쓰고 계십니다. 지금 미국은 인종문제, 가치관의 혼란과 사회·윤리·도덕의 퇴폐문제, 영적 고갈과 기독교 신앙의 몰락 문제, 무신론에 입각한 공산주의 문제 등 심각한 병폐를 안고 있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이 나라를 찾아온 이유는 여기에 있습니다. 오늘의 기독교는 크게 각성하고 하나로 뭉쳐야 합니다. 목회자들 또한 지금까지 해온 역할을 재점검하고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회개하라고 외치시던 그때의 정경이 2천년이 지난 지금이 땅 위에 반복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미국에 분부하신 중대한 사명을 다해야 합니다. 지금 이대로는 절대 안 됩니다. 새로운 종교개혁이 일어나야 합니다."
옥살이를 하고 나오자 더 이상 나를 얽매는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이전보다 더 강한 목소리로 타락한 미국에 대해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도덕성을 되찾는 것만이 미국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힘이라는 것을 강력하게 알리고 또 알렸습니다.
아무 죄도 없이 감옥생활을 했지만 하나님의 뜻은 거기에도 있었습니다. 내가 출감한 뒤, 나를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던 사람들은 번갈아가며 부산 범냇골과 서울을 찾아왔습니다. 도대체 레버런 문의 어떤 정신이 미국의 젊은이들을 그토록 매료시킨 것인지를 알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그들은 짧은 방문기간 중에도 일부러 틈을 내어 우리 교리를 배우고 돌아갔습니다. 나는 그들을 중심으로 '미국성직자연합회 ACLC'를 조직해서 지금까지 초교파적인 신앙운동과 평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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