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에 북위와 교전을 벌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482년, 488년, 490년 총 3차례 충돌 기록이 있는데 놀라운 점은 북위는 명군이었던 효문제였던 반면, 백제는 불과 10여 년 전에 장수왕의 침입으로 왕이 죽고 수도가 불타버린 경험이 있었던 상황에서 중원의 맹주였던 북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는 점이다. 북위의 백제 침공은 한국사에서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 중 하나인데, 당시 백제와 북위는 전투가 펼쳐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장 큰 이유는 북위와 백제 사이의 거리 때문이다. 북위와 백제 사이에는 육상으로는 고구려가, 해상으로는 황해가 있었다. 따라서 직접적인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북위가 만약 백제를 공격하려고 육로를 선택했다면, 고구려가 북위의 군대가 자국 땅을 지나는 것을 허용했다는 것인데 그것이 가능했는가? 라는 의문점이 있다. 물론 절대라는 것은 없고 당시 북위와의 훈훈한 관계를 유지하던 고구려가 허용해줄 수도 있으나, 육로로 통해서 고구려를 지난다면 북위군이 평양성 인근을 지나간다는 소리인데, 아무리 동맹국이라도 다수의 병력이 수도 인근을 지나가게 해줬다는 기록은 한국은 물론 중국사에서도 나오지 않는다.[16] 그렇다면 황해를 건너왔을 확률이 높은데, 유목민인 북위는 물에 익숙하지 않아 황해를 건너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에 근거해 북위군이 쳐들어온 곳은 만주와 화북의 사이에 위치한 요서 지방의 백제 식민지라며 이 사건을 백제의 '요서 경영설'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한다.[17]
또한 북위가 왜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18]을 보내 백제와 교전을 펼쳤는가? 라는 의문점도 있으나 기록이 부족해 알 수 없다. 다만 북위의 병력이 상당히 강력했고 백제에서도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동성왕이 남진에 보낸 표문에 기록된 백제군 지휘부들의 면면에서 사법명, 해례곤, 목간나 등 백제의 대성8족의 일원들이 참여한 것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들 귀족이 직접 참가해서 군대를 지휘했다고 본다면 백제도 상당한 정예병을 투입한 것으로 보이며,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였다는 내용으로 보아 대승을 거둔 것으로 보인다.
어쨌거나 자료가 저 위의 내용들이 전부다보니, 학계의 해석도 제각각인데 크게 보면 5가지로 분류된다.
2) 요서경략설
북위군이 아니라 고구려군이 쳐들어왔다는 설: 공격자를 북위군으로 보는 것은 남조 측에 전쟁에 대한 소식을 전하면서 공격자를 '위로'로 지칭했기 때문인데, 이 말이 '위나라의 오랑캐'라는 말이 아니라 '위나라에 붙은 오랑캐', 즉 고구려를 의미할 수도 있다는 주장. 요서 경략설 부정론을 포함해서 이 시기 백제의 대외 관계를 주로 다루는 공주대 유원재 교수의 주장이다. 하지만 근거가 미약한데, 백제가 고구려를 부르는 비칭은 맥(貊)이지 험윤, 흉리 등이 아니다. 남조에서는 일관되게 북조에 대해서만 저런 표현을 쓰고 있다.[19] 당시 《삼국사기》는 고구려와 백제의 싸움을 빠뜨리지 않고 꼬박꼬박 적고 있는데 이것만 누락할 리 없다.
그런거 없다: 전투 자체가 없었으며 남제에게 인정받기 위해 꾸며낸 기록이라는 주장. 일제 강점기 시절 동경제국대학의 교수 이케우치 히로시(池內宏)가 주장한 것으로, 근거가 미약한 데다가 존재하는 기록들을 그냥 부정해버리는 것이라 사실상 학계에서는 인정하지 않는다.
북위의 해로 공격설: 북위와 백제가 전쟁을 했다는 것은 기정 사실로 보고, 그렇다면 북위의 공격 루트가 해로인가 육로인가 기준에서 해로로 본 것이다. 특히 490년 전투 중 동성왕이 남조에 직접 보낸 표찰에서 목간나의 공적 부분이 가장 큰 근거로 꼽힌다.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인데, 舫는 말할 것도 없이 선박이고, 臺는 성문 혹은 누각으로 볼 수도 있으나 공격자인 북위군에게 성문이나 누각이 존재할 리가 없다고 보면 臺舫은 각 단어의 의미가 서로 통하는 단어인 누선(樓船)[20]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
백제의 용병 참가설: 최근 학계에서 논의되고 있는 가설로, 이도학 교수의 주장이다. 백제가 왜에 선진 기술을 전수해주고, 왜는 백제에 용병을 파견해 군사적 지원을 해주었듯이[21] 남제가 백제에게 용병을 요청했고, 백제가 이를 받아들여 바다 건너 주둔해 있다가 북위와 전쟁을 했다는 것이다. 다만, 각종 기록의 주체는 북위가 백제(영토)를 침입했다는 기록과 결정적으로 '臺舫’이라는 북위의 배를 불태웠다는 기록 때문에 전반적 지지를 얻지는 못하고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남조 송에게 마필을 배로 팔았다는 점에서... 북위가 고구려 수군의 도움으로 백제로 상륙하여 전투를 벌였다는 것은 가능하다. 그러긴 하지만 북위가 1)수군도 미약한데 바다 건너편을 2)직접적인 위협이나 이해 관계도 없는 상태에서 3)인접 우방국이 있음에도... 무슨 이유로 전쟁을 개시했는지부터 규명되어야 할 것이다.
3) 죽음의 의문 동성왕은 통치 말년에 접어들면서 의도적으로 신진 세력들을 중용했는데 이는 웅진 천도이후 문주왕 - 삼근왕을 거치면서 약화된 왕권을 강화하려는 의도였다고 볼 수 있다. 한성에서 함께 내려온 구 귀족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웅진 출신의 신진 세력을 중용한 것이다.
문제는 동성왕을 암살한 백가는 구 귀족 세력이 아니라 신진 세력이었다는 점이다. 백제의 대성팔족중 하나인 백씨 가문의 백가는 웅진 출신이었고 동성왕에 의해 위사좌평에 임명된 인물이었다. 위사좌평은 오늘날의 경호실장에 해당되는 위치였기 때문에 사실상 백가는 동성왕의 최측근이라고 봐도 좋을 인물이었다.[22]
그런데 《삼국사기》에 의하면, 동성왕은 백가를 새로 신축한 가림성[23]의 성주로 임명했다. 백가는 이에 불만이 있었는지 병을 핑계대고 가림성으로 부임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동성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자 불만을 품고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암살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백가는 가림성으로 도망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무령왕이 보낸 토벌대에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더니 그대로 처형되고 말았다.(...)
동성왕의 죽음과 백가의 황당한 반란에는 석연치 않은 부분이 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왕의 최측근이던 백가가 왕을 암살하고 저항도 하지 않고 항복했다가 처형되었다는 점은 백가가 뭔가 뒤에 믿는 구석이 있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백가 혼자서 동성왕을 암살했다기보다는 백가의 뒤에 배후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 그러나 누가 배후였을지는 불확실하다.
4.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동성왕 본기 一年冬十一月 동성왕이 즉위하다 四年春一月 진로를 병관 좌평으로 임명하여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四年秋九月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다 四年冬十月 큰 눈이 내리다 五年 한산성으로 행차하여 군사와 백성을 위무하다 五年夏四月 웅진 북쪽에서 사냥하다 五年春二月 남제에 사절을 파견하다 六年秋七月 남제에 파견하는 사절의 통행을 고구려가 차단하다 七年夏五月 신라에 사신을 보내 예방하다 八年春二月 백가를 위사 좌평에 임명하다 八年春三月 사절을 남제에 보내 조공하다 八年秋七月 궁실을 중수하고 우두성을 쌓다 八年冬十月 대궐 남쪽에서 군대를 사열하다 十年 위가 침입하다 十一年 두 이삭이 합쳐진 벼를 바치다 十一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十一年冬十一月 남당에서 군신들과 잔치를 벌이다 十二年秋七月 사현성과 이산성을 쌓다 十二年秋九月 연돌을 달솔에 임명하다 十二年冬十一月 겨울에 물이 얼지 않다 十三年夏六月 웅천의 물이 불어 민가가 피해를 입다 十三年秋七月 백성이 굶주려 신라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十四年春三月 3월에 눈이 내리다 十四年夏四月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다 十四年冬十月 우명곡에서 사냥하다 十五年春三月 신라와 혼인 관계를 맺다 十六年秋七月 군사를 보내 신라를 구원하다 十七年夏五月一日 일식이 일어나다 十七年秋八月 신라군이 구원하여 고구려가 물러나다 十九年夏五月 연돌을 병관좌평으로 임명하다 十九年夏六月 큰 비가 내려 백성들의 가옥이 유실되다 二十年 웅진교를 가설하다 二十年秋七月 사정성을 축조하고 한솔 비타를 보내 지키게 하다 二十年秋八月 왕이 무진주로 행차하여 탐라의 사죄를 받다 二十一年 백성이 굶주려 고구려로 도망한 무리가 일어나다 二十一年冬十月 전염병이 크게 돌다 二十二年 대궐 동쪽에 임류각을 세우다 二十二年夏四月 우두성에서 사냥하다 二十二年夏五月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다 二十三年春一月 서울에서 노파가 여우로 둔갑하여 사라지다 二十三年春三月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치다 二十三年夏五月 여름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다 二十三年秋七月 탄현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을 대비하다 二十三年秋八月 가림성을 축조하여 백가로 하여금 지키게 하다 二十三年冬十月 사비 동쪽 벌판에서 사냥하다 二十三年冬十一月 백가가 자객을 보내 동성왕을 죽이다
기록이 상당히 많다. 재위 기간으로 비교하면 의자왕보다도 많을 정도, 백제에서 온조왕, 무왕 다음으로 기록이 많이 남아있는 왕이다.
5. 매체[편집] 일대기를 다룬 소설로, '백제
[1] 모도라는 이름은 문주왕의 이름이지만 이병도는 동성왕의 이름이고 모대의 다른 표기라고 주장한다. [2] 《일본서기》의 기록. [3] 여기에서 여(餘)는 성이고 이름이 대(大)이다. 백제 왕가의 성씨는 부여씨인데, 외국 기록에는 종종 부가 탈락한 여만 나오는 경우가 많다. [4] 둘째 아들, 삼국사기 기록. [5] 신라 이벌찬 김비지의 딸. [6] 일본서기 479년 4월조에 따르면 삼근왕이 사망할 당시 동성왕은 '유년(幼年)'의 나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일찍 잡아도 465년 이후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廿三年夏四月 百濟文斤王薨 天王 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勅喚內裏 親撫頭面 誡勅慇懃 使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7] 선화공주처럼 공주까지는 아니더라도, 비지는 진골 이상 신분이므로 왕족일 가능성이 높다. [8] 다만 호남 동부 섬진강 유역은 백제의 혼란기를 틈타 대가야가 장악했다. 동성왕 이전의 백제는 너무 정신없는 혼란기여서 이때까지는 가야의 백제 변방 침범을 크게 문제삼지 않았던 듯하고 가야와의 우호관계도 계속 이어진다. 이 지역을 백제가 되찾으려는 시도는 이후 무령왕대부터 본격화된다. [9] 애초에 문주왕 때에도 한강에서 완전히 물러난 것은 아니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동성왕 이전 백제 사정을 고려하면 물러났느냐를 떠나서 관리할 여력 자체가 부족하였다. [10] 이 과정에서 2000여 명의 백성들이 고구려로 달아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고도 한다. [11] 2 그 외에는 개로왕의 아내가 곤지와 함께 왜에 가다가 낳은 아들이 사마이고, 이로 인해서 오해가 생긴 나머지 사마가 곤지의 아들이 되어버렸다는 설도 있다. [12] 서력기원으로 482년. [13] 서력기원으로 488년. [14] 서력 기원으로 490년. [15] 서력 기원으로 490년. [16] 세계사로 보면 아예 없지는 않다. 대표적으로 이탈리아 1차 전쟁 당시에 프랑스의 샤를 8세가 나폴리 왕국을 친다는 이유로 교황령을 지나갔기 때문. 하지만 당시 교황은 국제연합의 수장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고, 함부로 대할 시에는 다른 카톨릭 세력에 역풍을 받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 [17] 백제의 요서경략설은 대륙 백제라는 상한 떡밥과는 다르게 여러모로 논쟁이 되고 있다. [18] 다만 병력의 수의 경우에는 고대의 기록이 으레 그렇듯 부풀렸을 확률이 높다. [19] 남북조는 각각 서로의 기록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서로 비난을 하곤 했다. 남제나 북위에 대해서만 위로나 흉리 같은 표현을 쓴 것은 당시 북위가 남조 국가들을 도이(섬나라 오랑캐)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20] 누선은 춘추 전국 시대에 처음 등장한 군사용 선박으로 배에 높은 누각을 세운 형태이기 때문에 대규모 병사의 수송이 가능하다. 배의 특성상 해전을 벌이기는 적합하지 않지만, 한 무제가 고조선 공격에 동원하거나 후에 수나라가 고구려 평양을 직접 공격하는데 사용하는 등 원거리 항해가 불가능한 선박은 아니었고, 남북조 시대에는 주력 전투선으로 활용되었다. [21] 왜가 대한 해협을 건너 백제에 군사적 지원을 한 사례로 관산성 전투, 백강 전투가 있다. [22] 당연한 이야기지만, 가장 믿을만한 사람을 경호실장에 앉히지 않겠는가? [23] 오늘날의 충남 부여군 성흥 산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