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한 만남 2 / 단편소설. 김시화
"예미가 어디예요?"
미선은 이 지역 사람이 아니고 삼척 출신이었다. 지금 증산에 있는 건설회사 현장 사무실에서 경리로 일하고 있었고 온지 얼마되지않아 이 지역 지리를 잘 모르고 있었다. 이모가 현장직원들 밥을 해주고 있었는데 바로 이모의 소개로 거기서 일하게 된 거였다. 잠은 남자들 숙소에서 잘 수 없어 숙소 옆에 있는 이모집에서 초등학교 다니는 사촌여동생과 같은 방을 쓰고 있었다.
" 예미는 영월에서 한 30분 가량 걸리는데요... 증산가기 바로 전 정거장이예요, 증산이 집이세요?"
"아니요, 집은 아니고 거기 있는 회사에서 일해요"
" 아, 그래서 예미를 모르시는구나 ! 어떤 회사에서 일을 하시나요?"
"회사이름은 말할 수 없고 본사는 춘천에 있고 제가 있는곳은 현장 사무실이예요"
미선은 자세한 얘기는 하지 않았다. 자신에 대해서 어느정도는 숨겨야 한다는 느낌이 들어서였다. 또 미선 자신이 쉽지않은 여자라는걸 남자에게 인식시켜 주기 위해서 이기도했다. 그리고 만약 이 남자가 관심이 있다면 이 정도 힌트면 알아서 연락할 것이라 생각을 했다.
진짜 연락할지 안할지는 미선도 미지수 였지만, 그렇다고 처음보는 남자한테 이것저것 다 얘기하는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저는 강원대학교 학생인데 지금 갓 졸업하고 취업을 대기중에 있습니다"
"어디에 취업하시려 구요?"
"군청입니다. 사실 9급 행정직 시험을 합격했습니다."
미선은 옆의 남자가 대학도 졸업하고 취업했다는 소리에 뭔지 더 호감을 느끼게 되는 기분이었다. 미선의 고향은 강원도 삼척 이었다. 거기서 미선은 여상을 졸업하고 삼척에 있는 작은 건설회사 경리로 들어갔었다. 근데 들어간지 얼마 안되어 회사가 부도가 나버렸다. 그래서 할수없이 한동안 집에서 쉬고 있다가 증산으로 오게 된거였다. 미선은 공부엔 별 취미가 없었다. 학창시절 공부에 대해서 칭찬을 받은 기억은 전혀 없었다. 집안역시 막내인 미선이까지 대학을 보낼 형편은 못되었다. 어부인 아버지의 수입으로는 그날그날 살아가는것도 버거울 정도였다.미선의 두오빠와 언니 중에서 대학을 간 사람은 바로위의 셋째 오빠밖에 없었다. 장녀인 언니는 대학갈 실력은 됐으나 집안형편 때문에 포기해서 공무원이 되었고, 그후 집안을 도왔다. 대부분의 월급을 집에 갔다주고 본인은 절약하며 짜게 생활했다. 정말 장녀 노릇을 톡톡히 하는 언니였다. 둘째 오빠는 워낙 공부를 안하고 노는것만 좋아하다 직업군인인 하사관으로 입대하여 군대에 갔다. 다행히 군대가 그의 적성에 잘맞아서 아예 평생을 직업군인으로 생활하려고 하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 셋째오빠가 대학에 갈수 있었던건 순전히 첫째 언니 덕분이었다. 그녀가 벌어서 준돈으로 미선이 부모님은 강릉에서 국립대학을 다니는 셋째 오빠의 학비를 댈 수 있었다.
"삼척이 집이면 회사 숙소에 계시나요?"
그는 이제 적극적으로 이것저것 묻기 시작 하였다.
"아니요, 거기에 이모집이 있어 전 그집에서 살고 있어요"
"아, 그렇군요. 이모가 거기 계시는군요. 증산은 살기가 어떤 것 같나요?"
"뭐 조용하고 사람들 인심좋고... 근데 저도 확실히 몰라요. 시내는 거의 안나가니까..."
"젊은분이 있기에는 좀 적막하고 쓸쓸하기도 하겠네요."
"처음엔 그랬는데 한달정도 지나니 어느정도 적응이 되더라구요. 지금은 현장 사람들하고도 친해져 일끝나고 가끔 삼겹살 먹을땐 같이 어울려 얘기도 하고 소주도 한잔씩해요. 사람들하고도 어느정도 알게되고 또 이모가 잘해주셔 이젠 괜찮아요."
"아...그러시군요. 다행이네요. 근데 회사이름좀 알 수 없을까요?"
미선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미선은 이 남자가 회사이름을 알려고 한다는것은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증거라 생각했다.
"첫글자가 삼자가 들어가요. 궁금하면 나중에 전화번호부책이나 114에 문의 해보세요."
"하하! 네 그럴께요. 제가 한번 알아 볼께요."
미선은 약간 장난스러운 본인의 멘트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서 이번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살짝 웃었다.
영월서 예미까지의 삼십분은 짧았다. 그들이 이런저런 얘기를 다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아쉬웠다. 그들이 한창 얘기에 열중하고 있을때 버스는 "예미" 시내에 접어들고 있었다.
"어휴, 너무 금방 오네요. 여기가 제가 살고 있는 예미예요."
미선은 차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밤 열시라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앞쪽으로 보이는 표지판만 있는 정류장 뒤에 농협간판이 버스 불빛에 의해 어렴풋이 눈에 들어왔다. 이곳이 증산만큼 시골인것은 분명했다. 미선은 왠지 아쉬웠다. 사실 남자와 좀더 얘기하고가고 싶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때 버스기사가 "예미 다왔습니다. 내리실 분 나오세요" 라고 말하였다.
미선에겐 그 소리가 참 매정하게 들렸다.
남자는 뭔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말하였다
"저 내려야 겠네요. 다음에 뵙게되면 인사드릴께요.
"네, 안녕히 가세요"
미선도 왠지모를 아쉬움을 느끼며 인사를 했다.
그는 내린 후 버스밖에서 또 미선에게 손을 흔들며 인사를 했다. 미선도 역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버스안에서 미선은 그가 어떻게든 자신에게 연락할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근데 미선이 있는 사무실을 찾는것이 쉽지 않을 것이고 사무실 전화 번호는 임시 현장 사무실이라 전화번호부 책에도 등록이 안되어 있어 미선은 사무실 위치라도 얘기해줄걸 하는 후회를 했다. 하지만 그 남자가 찾아올거라는 근거가 불확실한, 알 수 없는 기대를 하며 미선은 버스좌석에 기대어 살며시 미소 지었다.
남자가 내린후 삼십분 정도 후에 버스는 증산에 도착했다. 미선은 그 삼십분동안 남자에 대한 상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성격은 어떨까? 혹시 나하고 어떤 인연 아닐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로 그녀는 마음에 몸살이 날것 같았다. "버스정류장" 이라는 초라한 표지판 밖에 없는 정류장에 내려서 미선은 택시를 찾았다. 마침 증산 기차역까지 손님을 태워주고 빈차로 돌아나오는 택시가 있었다. 미선은 손을 들어 그 택시를 잡아 타고 정류장에서 한 십오분정도 걸리는 현장 사무실 옆 이모네 집으로 향해 갔다. 그곳으로 가는길은 증산 초교 앞에 있는 민둥산 입구를 지나 포장이된 산길로 쭉 가야했다. 얼마전까지 비포장이었는데 미선네 회사가 그길을 포장했고 계속 정선 동면까지의 꽤 험하고 긴구간을 공사중이었다. 곧 택시는 이모집에 도착했고 그녀는 차에서 내려 요금을 치른후 이모집으로 들어갔다.
"이모, 저 왔어요!."
안방에서 텔레비젼을 보던 이모가 방문을 열었다.
"미선이 왔네. 오늘 선 본것 어땠니?"
"그냥 그랬어요."
"다시 만나기로 했니?"
"아니요, 전 별로 생각이 없어요."
이모는 나이가 마흔셋으로 오년전에 남편을 간경화로 먼저 보내고 딸둘을 키우며 혼자 살고 있었다. 큰딸은 정선에서 혼자 자취하며 그곳에서 여고를 다니고 작은 딸이 초등학교 육학년으로 미선과 한방을 쓰고 있었다. 강원도 삼척이 고향인 그녀는 스물다섯살때 조금 먼 이곳 남자를 소개로 만나 결혼을 하여 "한치마을" 이라는 이동네로 시집와 지금까지 살고 있었다. 시아버지는 남편이 어릴적에 돌아갔기 때문에 그녀는 시아버지를 본적도 없었다. 다만 사진으로만 알뿐이었다. 시어머니는 아들이 간경화로 죽은것에 많이 상심했는지, 그후 계속 시름시름 앓다가 이년전에 세상을 떠났다. 남편에겐 여동생이 하나 있는데, 그녀는 일찍부터 서울로가서 직장생활을 하고 또 거기서 결혼을 해서 남편과 어머니가 돌아간 이후론 연락도 거의 없었다. 이모는 이남 삼녀중의 막내였다. 지금 나이가 겨우 마흔 셋 이었다. 남매중 둘째인 미선 어머니와는 나이가 무려 열 두살이나 차이 났다.
"미선이 마음에 별로 안들었던 모양이네... 그쪽 집에서 전화 왔던데 그 사람은 미선이 널 매우 마음에 들어 한다던데... 그 사람이 지금 직장은 없어도 집안이 꽤 부자이고 아마 나중에 아버지 사업을 물려 받을텐데... "
"이모, 그 사람은 그사람이고..."
미선은 말을 흐렸다. 버스에서 봤던 남자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려다가 말을 멈췄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는데 궂이 얘기를 꺼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 사람은 그 사람이고 피곤한데 일단 쉬어라. 그 문제는 천천히 생각해 보고"
"네, 이모 그럼 저 들어가서 쉴께요. 이모도 잘 주무세요"
미선은 자기방의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미선이 선보고온 지난 토요일로 부터 이틀이 지난 월요일 오후였다. 계절은 5월이라 따뜻한 햇살과 온갖 봄꽃들과 야생화가 사무실에 앉아 있는 미선의 마음을 설레이게 했다. 미선이 일하는 현장 사무실은 증산에서 정선 동면까지의 험한 산길을 포장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공사는 이년 일정인데 지금 육개월정도 되었으므로 내년말, 그러니까 1994년 말쯤 끝날 것이다. 현장소장은 정선으로 회사일 때문에 나갔다. 이모도 장을 봐야 한다며 소장차를 타고 같이 나갔다. 이모에게는 아직 차가 없었다. 그래서 소장차가 나갈때 이모가 자주 따라서 볼일보러 가곤 했다. 사실 둘은 일만이 목적이 아니고 다른것도 있었다. 거기서 일도 보고 또 그외의 목적인 둘만의 은밀한 밀회도 즐기고 있을 것이다. 집이 춘천이고 마흔여섯살의 유부남인 현장소장과 마흔세살인 이모는 얼마전부터 부쩍 자주 어울리더니 지금은 남몰래 육체관계를 갖는 애인사이였다. 현장소장은 법적으로 유부남이긴 했지만, 지금은 부인과 실제적으로는 헤어져 있었다. 그것은 그가 전국의 건설현장을 다니면서 일하는 동안 그의 부인이 춤바람이 나서 캬바레와 나이트클럽을 자주 드나들더니 어떤 젊은놈과 눈이 맞아서 가출을 했기 때문이었다. 부인을 찾을 수 없어 법적인 이혼은 못하고, 상심의 세월을 보내고 있다가 미선의 이모를 만난 것이었다. 그에게는 딸이 둘 있었는데, 하나는 대학생 또 하나는 고등학생이었다. 둘은 춘천에 있는 그의 아파트에서 살고 있었다. 둘다 춘천에 있는 학교를 다녔다. 미선의 이모도 소장의 이런 사정을 알고 남자로서 사귀기 시작한 것이었다.
언젠가부터 둘이 자주 같이 나가는것을 보면서 미선도 어느정도는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미선은 거기에 관여하지 않았다. 자기들이 좋아서 그러는거고, 미선보다 한참 나이가 많은 어른들 일에 그녀가 참견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좁은 시골동네이기 때문에 혹시 나쁜 소문이라도 날까봐 그것이 걱정되기는 했다.
미선은 사무실에 혼자 있는일이 많았다. 사무실에는 셋이 있었는데, 소장과 토목기사인 서른 일곱살의 노총각인 최기사 그리고 미선이였다. 미선을 빼고 둘은 낮에 거의 현장에 가있기 때문에 미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았다. 미선은 오후의 한가함을 느끼며 생각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한가하지? 본사에서 전화도 없고 현장에서도 아무런 연락이 없네. 찾아오는 손님도 없고..."
이때였다. 미선의 마음을 알았는지 "따르릉" 하고 전화벨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