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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m.cpbc.co.kr/vod/vod-detail.php?cid=264587&path=200809
제17회 루카를 중심으로 한 공관복음 5
오늘 기도는 루카 2,29-32절까지 함께 읽으면서 기도하시겠습니다.
시작기도 루카 2,29-32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강의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에 강의를 세 묶음으로 구성을 하셨습니다.
첫 번째 묶음은,
도대체 루카복음이라는 것이 신약성경내지는 성경전체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가? 루카복음이 어떤 특징들을 갖고 있는가? 그다음에 루카의 맨 처음에 나오는 1,1-4절까지의 어떤 서문들이 루카복음 전체에 어떤 신학적인 출발을, 아니면 신학적인 밑그림을 보여주고 있는가? 가 첫 묶음이었습니다.
두 번째 묶음은,
루카복음 5절부터 시작해서 루카복음이 갖고 있는 일종의 산문적인 구조, 루카복음이 자기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고 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데에, 그가 그런 방식을 사용하는 데에 특별한 신학적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닌가? 를 가지고 주로 두 번째 묶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오늘은 그 세 번째 묶음입니다.
지난 시간까지 저 희기 루카복음의 산문에 관해서 봤다면 오늘 세 번째 묶음에서는 루카복음의 시문학적인, 루카복음의 시, 루카의 노래에 관해서 같이 얘기해 보고자 합니다.
전체적으로 루카가 전하는, 1장과 2장에 있는 예수의 탄생이야기가 완결이 되게 된다고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오늘 루카 1,39-56절에 나오는 성모님의 노래, 5월에 각 본당에서 성모의 날 행사 때 빠짐없이 읽는 그 노래입니다.
신부님과 수녀님들은 매일 이 기도를 바치십니다.
루카 1,39-56
º 마리아와 엘리사벳
ㅡ 인간적 기쁨 → 신학적 환희
ㅡ 예수와 요한
º 성모송
º Magnificat
ㅡ 찬미가: 누가 누구에게?
그 성모님의 노래는 요한을 임신한 엘리사벳과 예수를 임신한 마리아가 만나는 장면을 뒷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아기를 가진 여인이 기쁨에 넘쳐서 만나는, 둘 다 기구한 운명으로 아기를 가질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한 사람은 아직 남자를 모르고 한 사람은 결혼해서 나이가 많이 되었는데 임신을 하였습니다.
서로 만나서 첫 부분은 인간적인 기쁨을 나누지만 그것이 뒷부분에서 가서는 신학적 환희로 이어지는 즉 두 사람이 만나서 아이를 가졌다는 것을 인간적으로 기뻐하고 나중에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모습으로 굉장히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요한이 만나게 됩니다. 앞선 시간에 말씀해 주셨듯이 예수와 요한은 다른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에는 예수가 요한에 의해서 세례를 받는데 루카복음에는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대목이 빠져있습니다.
단지 그래서 예수도 세례를 받았다.라고 나옵니다. 따라서 예수와 요한이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알 수가 없는데, 루카복음의 이 부분에서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조우하는 장면을 통해서 태중에 있을 때 그들이 만나는 모습을 설정합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환영하는 그 엘리사벳에 환영의 노래 가운데에는 우리 성모송의 중요한 부분이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앞서서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를 만나는 대목과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나는 대목에서 성모송의 중요한 부분들이 발췌가 되게 됩니다.
그 마리아를 환영하는 엘리사벳에 하나의 응답이라고 할 수 있게 마리아가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를 우리는 성모의 노래, 마리아의 노래, 마니피캇(라틴어)이라고 부릅니다.
마니피캇을 직역하자면,
위대하다. 대단하다. 이런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동사로, 성모님의 노래가 시작할 때 라탄말 성서로 번역할 때의 첫 단어가 마니피캇입니다.
'마니피캇 아니마메아'로 시작합니다. 나의 어머니 주님의 위대함을 노래하리라.
루카 1,46
그러자 마라아가 말하였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
우리말에서는 나의 어머니라고 시작하는데 라틴말에서는 동사가 먼저 나와서 '마니피캇'이라고 부르게 되고 그것은 하나의 찬미가입니다.
마니피캇의 찬미는 마리아가 하느님을 찬미하는 찬미가이다.
엘리사벳의 입장에서는 조금 섭섭하겠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가 왔을 때 주님의 어머니, 당신은 복되십니다.!라고 하면서 좋은 얘기를 많이 해주었는데 마리아도 같은 답례를 하지 않고, 마니피캇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합니다.
지거 쾨더 신부님이 주로 성서에 나오는 장면들을 그리셨는데, 그리고 지거 쾨더 신부님의 14처가 굉장히 유명한 그림입니다. 아래 그림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모습
예수님과 요한의 모습도 보입니다. 그림을 가지고 좋은 묵상을 하실 수 있습니다.
이 부분을 조금 더 자세히,
1,39-56
º 39-40 : "길을 떠난다"- 신적의지
ㅡ 빠른 진행
º "인사하였다"
ㅡ 구원= 만남
º 41-42 : 태중의 아기
ㅡ 창세 25장의 레베카(에사오와 야곱)
º "성령"
º "복되다" : 축복받다 ㅡ 신적 주체
ㅡ 루카의 시작과 끝 : 축복(고난?)
39- 40절에는 길을 떠난다.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마리아가 길을 떠나 엘리사벳에게 가게 됩니다.
성서에서 '떠남'이라는 단어는 굉장히 신학적인 단어입니다. 즉, 구약성경에서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시자 아브라함이 길을 떠납니다. 하란에서부터 그다음에, 하느님께서 이집트에 이스라엘을 부르시자, 그 이스라엘이 길을 떠나 광야로 나가게 됩니다.
길을 떠난다는 것은 신학적인 단어입니다.
즉 하느님은 부르시고, 그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길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렉시오 디비나(영적독서) 쪽으로 넘어간다면,
다음과 같은 묵상도 가능하겠습니다.
누군가에게 불림을 받았을 때, 내가 쉽게 떠나기 위해서는 내 옷차림이 가벼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내가 가진 것이 많았을 때는 잘 떠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 신앙인들이 가난해야 할 이유입니다.
가난하지 않은 사람은, 하느님의 부르심을 내가 느꼈을 때 쉽게 떠나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이 불렀을 때, 주식도 정리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인사도 해야 하고... 이렇듯 가진 것이 많은 경우에는 마음을 쉽게 비우고 떠나기가 어렵습니다.
반대로 성서에서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인물들, 아브라함, 모세, 예언자들, 혹은 오늘 만나고 있는 마리아, 혹은 사도들 역시 자신들의 아버지와 함께 고기를 잡다가 예수님이 부르시자 즉시 따라갑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아이들에게 "아무나 따라가지 말아라." 하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복음은 그들이 즉시 따라나섰다고 얘기합니다. 신학적인 얘기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 얼마나 가벼운 몸놀림으로 응답하는가? 얼마나 경쾌한 몸놀림으로 응답하는가? 구약에서 부르심을 받은 예언자들은 하나 같이 주저합니다.
'주님, 저는 나이가 어려서', '주님 저는 말을 못 하니까'...'저는 아는 게 없어서'..
그래서 하느님께서 항상 그들에게 어떤 징표를 보여주시면서 설득하십니다. 어느 때는 하느님의 말씀을 두루마리 같은 것으로 입에 넣어주시기도 하고 뜨거운 인두로 입을 지지기도 하고, 그렇게 그들을 설득하십니다.
요나는 바다 괴물의 뱃속에 집어넣습니다. 도망가니까,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그들이 결국은 하느님이 부르시는 곳으로 떠납니다. 신약의 사람들은 구약의 예언자들보다 더 가볍고 경쾌한 움직임으로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 인사합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너무나 당연한 부분이지만 굉장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여기서도 신학적인 의도를 간파해야 합니다.
즉 하느님의 부르심은 그 부르심을 받은 인간과 인간을 서로 만나게 한다는 것입니다. 만남의 차원입니다.
모두가 개별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구원이 또 구원을 전하는 구원의 실현의 단계에 있어서 그것이 개인 개인에 문제가 아니라 하나의 만남, 공동체 안에서 이뤄진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전하는 가장 중요한 미사는 개인개인이 하는 기도의 행위입니까? 그것은 하나의 공동체의 기도입니다.
공동체가 함께 모여서 기도한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현대의 사목 신학은 이러한 공동체라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 여깁니다. 요즘에 새로 지은 서양의 성당들은 우리 성당보다 폭이 넓습니다.
그리고 길이가 짧습니다. 제대를 중심으로 공동체가 둥글게 서있는 성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제 입장에는 불편하셔서, 강론하실 때 어디를 봤야 하는지 모를 정도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구원사건은?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우리는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는 마리아와 엘리사벳뿐만 아니라 태중의 아기 요한과 아기 예수가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서로 기뻐 뜁니다.
반대로 창세기 25장의 레베카(에사오와 야곱)의 이야기를 보면 야곱과 에사오가 뱃속에서부터 싸웁니다.
º 41-42 : 태중의 아기
ㅡ 창세 25장의 레베카(에사오와 야곱)
º "성령"
º "복되다" : 축복받다 ㅡ 신적 주체
ㅡ 루카의 시작과 끝 : 축복(고난?)
떡잎부터 알아본다, 전조가 안 좋은 것 닮았다고 합니다. 그 야곱이라는 이름 자체가 누구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왔다는, 누군가의 수고로운 일에 편승하는 듯하고 약은 느낌의 이름입니다.
이 부분은 창세 25장의 이야기와 평행하고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태중의 아기들의 이야기는 구약에서도 등장합니다.
그러자, 엘리사벳이 마리 아을 환영 하는데 자신이 한 환영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마리아를 환영하게 됩니다.
"성령' 대단히 중요한 단어입니다. 특히 루카복음에서 중요한 단어입니다.
루카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더 나아가 사도행전에 이르기까지 성령이라는 단어를 굉장히 중요하게 사용합니다.
마태오 마르코 요한도 성령이 중요합니다만, 거기와는 조금 더 다른 뉘앙스입니다.
루카복음에서 성령이라는 것은, 시대를 구분하는 구분선의 역할을 하게 됩니다.
나중에 보시게 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40일 있다가 승천하십니다. 그러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내가 가르쳐준 것을 세상에 나가서 전파해야 하는데, 지금 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기다리라고 합니다. 이 부분이 루카와 마르코와 마태오와 차이가 나는 부분입니다.
마르코복음에서는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합니다. 마르코복음이나 마태오복음에서는 장소적으로 봐서 신학적 대칭을 이룹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을 환영하고 받아들이는 좋은 곳,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배척하고 고발하는 나쁜 곳입니다. 예수님의 반대자가 있는 곳이 예루살렘입니다.
반면에 루카복음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루카복음에서는 이제 앞으로 시작될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해서 시작될 그 모든 사건이 시작되는 곳이 바로 예루살렘이고 그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은 성령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본래 제1독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읽게 되었는데, 성령강림대축일에 제1독서를 신약성경 중에서 읽었습니다. 사도행전 2장입니다.
어느 날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성령이 불혀모양으로 그들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이제부터 성령을 받은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고 사도들이 예수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맡기신 복음을 선포하는 시대 즉, 교회의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루고 있는 교회의 출발은 성령강림부터입니다. 그전에는 예수님의 시대가 있었고 그전에는 성부께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함께 하시던 시기가 있었고, 즉 성부의 시대 성자의 시대 성령의 시대로 적어도 루카에 의해서는 구분이 되어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전에는 성령이 없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도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날 때 이미 성령은 계십니다.
단지 그 시간을 주관하는 존재가 이제부터는 성자 예수가 주관하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는 의미입니다.
그 마리아를 엘리사벳은 복되다.라고 얘기합니다. 우리식으로 얘기하면 '축복받았다'라는 것입니다.
그 축복의 주체는? 항상 신적 주체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에게 복을 주셨고 당신은 복을 받았다. 루카복음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단어가 역시 "축복"입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축복하십니다. 인간적인 면으로 보면 축복을 받으면 좋은 일이 생겨야 합니다. 하지만 마리아의 삶이 그렇게 복 받은 삶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습니다. 인간적인 눈으로 봤을 때,
마리아가 예수님 때문에 호강하신 적도 없었고, 요즈음 세태에서 보자면 불효자식들도 많이 있는데 예수만 한 불효자식도 없었습니다. 형제들과 예수를 찾아간 마리아에게 "누가 내 어머니이고, 누가 내 형제냐?" 어머니한테 할 소리가 아닙니다.
물론 신학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습니다.
아니면은 자신의 아들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을 보는 여인의 심정은 어떻겠습니까? 결코, 정말 복 받은 삶인가?라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하게 됩니다. 제자들 또한 예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성령을 받아 세상 방방곡곡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데 그들의 삶이 호강하고 복 받은 모습으로 보였습니까?
아닙니다. 하나같이 순교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축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축복과 다를 수 있습니다. 본당신부님에게 가서 '신부님 축복해 주세요.'라고 할 때?? 그들은 하느님을 위해서 자신의 삶을 봉헌하겠다는 그런 의지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전체적인 이야기의 구조는,
루카 1,39-56
º 42 : 하느님의 축복
º 43-44 : 만남의 기쁨
º 45 : 마리아의 믿음
마리아를 환영하는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나눠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성모님의 노래가 시작합니다.
Magnificat
º 엘리사벳의 환영에 대한 답가?
º 1 사무 2,1 이하 ; 시편 34,2-4
엘리사벳에 대한 답가처럼 느껴지지만 실제로 그 내용에서 엘리사벳은 언급되지 않습니다. 전체적으로 하느님에 찬미가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을 1 사무 2,1이하 ; 시편 34,2-4에서 보게 됩니다.
1 사무 2,1에서는 사무엘을 낳는 한나의 노래입니다.
성모님의 노래와 아주 흡사합니다.
시편 34
2 나 언제나 주님을 찬미하리라.
내 입에 늘 그분에 대한 찬양이 있으리라.
3 내 영혼이 주님을 자랑하리니
가난한 이들은 듣고서 기뻐하리라
4 너희는 나화 함께 주님을 칭송하여라
우리 다 함께 그분 이름을 높이 기리자
그 외에도 유다에는 굉장히 많은 찬미가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관련된 시문학 중에 반이상이 찬미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1/3 넘는 가량이 시문학 중에서 하느님을 원망하는 시문학입니다.
우리가 흔히 탄원의 시라고도 하지만 "주님, 왜 우리에게 이런 고통을 주십니까?"라는 일종의 탄원의 시입니다.
1/2 이상은 물론 하느님 찬미합니다.라는 찬미의 시입니다.
유다의 다른 찬미가 전통에서도 역시 우리가 대하는 이런 마니피캇과 비슷한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시편과 솔로몬 시편....
Magnificat
º 유다의 다른 찬미가 전통
ㅡ 쿰란 시편 ; 솔로몬 시편.....
º 탈출 15 : 바다의 노래 + 미리얌의 노래
ㅡ Magnificat과 즈카르야의 노래?
º Magnificat은 마리아의 노래인가?
ㅡ 찬미가는 과거의 회상
그리고 더 나아가 마니피캇은 마리아의 노래인가???
무언가를 찬미하는 찬미가들은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한 찬미입니다.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홍해를 건너오게 그들을 이끌어 내셨다. 혹은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주셨다. 이러한 것들에 대한 찬미가 찬미의 노래입니다.
마리아의 찬미가는 과거의 회상이 아니라,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서 찬미하는 것입니다.
엄격하게 얘기하자면 구약성경에서 나오는 찬미가의 단어들, 신학들, 어떤 문장의 구조들, 그런 것들을 그대로 따왔지만은 내용적으로 보면 틀이 맞지 않습니다.
미래에 있을 일에 관해서 미리 찬미하는 것! 그것은 조금은 이상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신부님께서 성경에서 나오는 구절들과는 조금은 다르게 번역을 하셨습니다. 성경의 구절들은 신자들이 쉽게 이해하기 위해서 의역을 하셨고 신부님은 신자들이 이해하기 어렵게 직역을 하셨습니다.^^
조금 어렵지만 원문에 가까운 직역입니다.
Magnificat
º 46 : " 내 영혼" ㅡ psyche (정신 :지적 활동)
º "내 마음" ㅡ pneuma (영혼 :영적 활동)
º "주님" ㅡ 야훼 ; "하느님" ㅡ 엘로힘
º "찬송하다" ㅡ 위대함을 기리다; Magnificat
º 46 // 47
º 47 : "기뻐하다" ㅡ 종말론적 기쁨
ㅡ 하바 3,18: '나는 주님 안에서 즐거워하고 내 구원의 하느님 안에서 기뻐하리라.'
ㅡ 정신 / 현재 / 인식( 앎) → 영혼/ 종말/ 기쁨(깨달음)
영혼에 쓰인 말은 희랍어로 푸쉬케, 심리학용어 싸이칼러지(psychology)가 이 말에서 나왔습니다. 이 psychology의 어원인 psyche는 인간이 뭔가를 인지하고 사고하는 능력입니다.
희랍의 인간학에서는 인간을 크게 세 부분으로 구분합니다.
인간은 육신을 가진 존재, 영혼을 가진 존재, 정신을 가진 존재입니다.
영혼은 영적 능력이고, 정신이라는 것은 사고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약간 다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인간의 영혼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수학을 계산한다던지 아니면 영화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인간의 정신활동으로 희랍사람들은 이해를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쓰인 단어는 정신입니다. psyche
루카 1,46
그 정신이, 나의 정신이 주님을 찬양합니다.
조금 더 직역하자면, 주님의 위대하다 찬양합니다.
1,47
나의 영혼이 프뉴마(pneuma), 하느님 나의 구원자에 대해 기뻐합니다.라고 얘기합니다.
즉 46절, 내가 주님의 위대함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깨달아서 주님을 찬미하게 되는 것, 정신 / 현재 / 인식( 앎)
47절은, 나의 영혼이 나의 주님을 나의 구원자여서 기뻐하는 것. 영혼/ 종말/ 기쁨(깨달음) 루카의 기쁨은 종말론적인 기쁨으로 미래의 사건입니다.
더욱이 46절과 47절은 우리말 번역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헬라어(그리스말)로 읽어보면 내가 그것을 보고 지금 하느님의 찬미하는 것에서 두 번째는 굉장히 증폭이 됩니다.
첫 번째는 나의 정신이
두 번째는 나의 영혼이
이제 내가 보고 있는 이사실이 미래의 어떤 일을 이루게 될 것인가를 미리 깨닫고 기뻐합니다.라는 뜻입니다.
첫 번째는 우리가 눈앞에 보이는 구체적인 그 무엇이라면, 두 번째는 그것이 폭발해서 나중에 어떤 결과를 이루게 될지에 관해서 미리 예상하고 있는 시간적으로나 인간적인 의미에서나 내용적인 의미에서도 조금 다른 차원으로 증폭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그 이유가 나옵니다.
루카 1,48
그가 그 여종이 비참함에 주목했기 때문입니다.
주목했다, 굽어본다...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누군가의 일을 내려다보는 듯한 하나의 그림입니다.
그런데 그냥 보는 것이 아니라 집중해서 보는 것입니다.
그 하느님의 내려봄에 관해서는 좀 전에 함께 읽은 1 사무 1,11 똑같은 표현이 나오게 됩니다.
성모님의 노래에서도 한나의 노래에서도 가련한, 내지는 비참함이라는 단어가 등장합니다. 그런데 왜 마리아가 스스로를 비참하다고 했을까요?
1) 마리아가 가난해서
2) 하나의 전례적인 틀로서( 미사 때 '내 탓이오, 내 탓이오.'처럼)
뭔가 알 것 같은데 정확하게 바로 이것입니다. 이 텍스트 안에서 증명해 내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보라, 그리고 이제는 모든 세대들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니, 복됨과 비참함 두 가지가 양극단에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내가 비참했지만 이제부터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복되다. 할 것이다. 나를 부러워할 것이다.라는 것에 대한 대칭점을 설정을 하는 것입니다.
일정한 미래 시점에 대한 약속이고 하나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미완료입니다.
반면에 거기에 대해서 내가 확신에 찰 때는 완료시점을 합니다.
창세 30,13 레아는 "여인들이 나를 행복하다 할 것이니( 미완료), 나는 행복하구나!"( 완료) 하면서, 그 이름을 아세르라 하였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나를 행복하다 할 것이니, 이미 나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완료가 쓰인 것은 그 일이 이미 일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자신의 확신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그 일은 이미 일어난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라고 얘기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루카복음 전체의 신학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시메온의 노래에서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실제적으로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것이 이미 일어난 일과 다름이 없어.라고 하는 나의 심리적 확신을 이 구절에서 보입니다.
루카 1,49
주님께서 큰 일을 하셨다.
Magnificat
º 49 : 신명 10,21
º "큰일" : 구출 / 승리 → 이집트 탈출
º "전능하신 분" ; "힘센 이"; 왕 / 영웅/ 신
º 49b 이하 : "그"에 대한 서술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 나를 왜 복되다고 하는지가 나옵니다.
1, 49왜냐하면 힘센 이 가 나를 크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º 50 : "두려움" - 51 : "교만함"
그리고 그 이후 부분부터는 이 성모님의 노래 2번째 파트가 시작돼서 53절까지 두 번째 파트가 계속됩니다.
Magnificat
º 52-53 : 대조 1 - 전지적 권력 ; 대조 2- 경제적 재력
º Chiasm(교차대조) :
ㅡ지배자ㅡ (낮은이 들- 굶주린 이들)- 부유한이 들
º 대조의 목적 : 루카의 종말론
ㅡ 세상과 하느님 나라의 대조
ㅡ 세상과 그리스도교의 공동체의 대조
ㅡ 예수의 탄생이 갖는 종말론적 의미
그 두 번째 파트는 모두 하느님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이라는 말은 등장하지 않고, “그”라고 나옵니다. 그에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는, 그의 팔은, 그는 지배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고, 그는 낮은 이들을 끌어올리고 그는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채우고, 그는 부유한 이들을 빈 채로 보내는 ‘그’에 대한 설명입니다.
나를 크게 만든 그 힘센 이 가 과연 누구인가?라는 것을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에 관해서 설명하면서, 하느님에 관해 설명하면서, 그가 하는 일을 둘로 대조시켜서 얘기합니다. 즉,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의 자비를 허락하시고 교만한 이들을 내치시는,
두 번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배자들은 끌어내리고 낮은 이들은 들어 올리는, 굶주린 이들은 좋은 것으로 채우고 부유한 이들은 빈 채로 보내는, 이것이 바로 나에게 나를 위대하게 만드신 그분의 속성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한 마디로, 그날이 오면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의 신학에 대단히 도전적인 내용입니다.
루카시대의 신학은 상선벌악의 신학이었습니다. 즉 지상에서 잘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도 잘 있게 될 것이고 지상에서 잘 못 있는 사람들은 천국에 가서도 잘 못 있게 될 것이다.라는 신학입니다 왜냐면 하느님께서는 착한 사람에게 복을 주시니까 여기서 착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복 받을 것이고 그렇지 않고 어떤 사람이 나병에 걸렸다면은, 아니면 장님이 됐거나 아니면 어떤 사람이 사고가 났다면, 그것은 무언가 좀 잘못한 게 있어서 벌 받은 것이다.라고 보는 것입니다
루카의 신학은 그것을 정면으로 뒤엎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나라와 이 세상에 대조성에 관해서 루카는 얘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이 세상과 결코 같지 않을 것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라는 것에 대해서 얘기하는 것입니다.
신학적으로 봐서는 엄청나게 큰 충돌입니다. 앞서 말씀해 주신 대로 하느님으로 봐서는 축복이 인간의 눈으로 봐서는 고통인 것입니다.
루카가 얘기하는 종말의 사건은?
우리가 생각하는 세상의 관점이, 세상이 역전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과 대조되는 곳이라는 겁니다. 즉 더 나아가, 루카는 이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공동체 얘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나와 여러분이 이루고 있는 이 공동체에서는 세상과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단적으로,
본당신부가 단체장이나 사목위원을 임명하려 합니다. 한분이 사회적으로 지명도가 있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은 일반적입니다. 성당에 나오는 거로 평가하는 건 아니지만 한 달에 두 번 정도 나오십니다. 그분의 신앙은 그렇게 특별하지 않는 분이세요, 또 다른 한분은 신앙적으로 굉장히 성숙한 분이세요.
하지만 사회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때 본당신부는 어떤 판단을 해야 하겠습니까? 만약 그 본당신부가 루카의 신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면, 우리는 세상과 달라야 합니다.
세상과 다른 관점에서 사람을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하고 사태를 보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세상의 질서를 가지고서 공동체를 살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의 많은 교회 공동체가 세상의 논리에 쫓아가는 것 같습니다. 세상의 순리가 그러니, 우리도 그렇게 쫓아가는 거다. 하지만 루카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우리가 따라야 할 질서 공동체 안에서 우리를 이끄는 논리는 바로 어떤 관점이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의 관점이어야 합니다.
Magnificat
54- 55절은,
전체에 대한 영광송입니다.
º 54 - 55 : 영광송
º 54 : “이스라엘”
º “ 기억함” : 계약
º “자비” : 50절과 54절 ㅡ 미사 / 주님의 기도
ㅡ 하느님의 자비를 청함
그는 그의 아이 이스라엘을 돕습니다. 자비를 기억함으로써,
그가 우리들의 아버지들을 향해 말씀하신 것처럼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에게 영원히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는 노래입니다.
그 중심에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과 맺은 계약, 구약의 계약입니다. 하느님께서 그 계약을 잊지 않는다.라는 그 사실이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와 영광의 중심에 있다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영광송 부분만 보면은, 자신이 맺은 계약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 영광송의 중심에 있고,
그리고 잊지 않고 하느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계속해서 자비를 베풀 것이다.라는 믿음이 이스라엘의 신앙이고 마리아의 신앙입니다.
그리고 마니피캇이 세 부분으로 나눠봅니다
Magnificat
º 46- 49a : “나” 와 “그” (비참한 나를 들어 높여 주신 그)
º 49b- 53 : “그” (그의 속성)
º 54- 55: “그” 와 “이스라엘”
마지막 영광송 부분을 통해서, 첫 부분인 나와 그에 관한 이야기라면, 이 부분에서는 그와 이스라엘에 관한 이야기로 확대
즉, 성모님의 눈에는 나에게 일어난 사건이 앞으로 이스라엘 안에서 어떤 열매를 맺을 것인가로 그 이야기 전체를 확장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일어난 일이, 나를 들어 올린 일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속한 공동체 안에 어떤 일이 있을까? 에 관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