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방서예[3271]행서=노포당(老圃堂)유순(柳洵)7절-次遼陽舘壁上韻(차요양관벽상운)
원문=續東文選卷之十 / 七言絶句
次遼陽舘壁上韻(차 요양관 벽상운)
유순(柳洵)
少年豪氣自縱橫。소년호기자종횡
衰鈍那知及老成。쇠둔나지급로성
又見秋風欺客路。우견추풍사객로
土炕端坐筭平生 토갱단좌산평생
縱橫종횡=세로와 가로를 한데 이르는 말
거침없이 마구 오가거나 이리저리 다님
衰鈍쇠둔= 衰弱쇠약하고 鈍둔해져서
衰=쇠할 쇠, 상복 최, 도롱이 사. 蓑(도롱이 사)의 본자이다.
원래 衰 자는 마른 풀을 엮어 만든 우비, 즉 도롱이의 형태를 본떠 만든
상형자이며, '도롱이'라는 뜻을 나타내었다.
그러나 이후 가차되어 '쇠하다', '약하다'라는 뜻을 나타내게 되자
여기에 艸(풀 초)를 더하여 본래의 뜻을 나타내는 蓑(도롱이 사)를 만들었다.
鈍= 둔할 둔. 무딜 둔. 동자(同字)䤜.
那= 어찌 나. 많다. 어조사. 저것. 그것. 저것들.
말하는 당사자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사람·사물을 가리킴.
欺= 속일 기 . ② 거짓 ③ 업신여기다 ④ 보기 흉하다
炕=마를 항, 마를 강, 뻗을 항.
土炕토항= 온돌 . 방구들 .
筭=산가지 산. 샘, 계산.
소년 때 호탕한 기운 제멋에 놀던 것이 / 少年豪氣自縱橫
이다지 쇠퇴하여 노성될 줄 알았으리 / 衰鈍那知及老成
또 가을 바람이 나의 길을 속였으니 / 又見秋風欺客路
구들에 바로 앉아 평생 일을 세누나 / 土炕端坐筭平生
ⓒ 한국고전번역원 | 양주동 (역) | 1969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희명(希明), 호는 노포당(老圃堂).
개국원종공신 유만수(柳曼殊)의 고손으로,
증조는 상의중추원사(商議中椎院事) 유원지(柳原之)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판관 유종(柳淙)이고, 아버지는 세마 유사공(柳思恭)이며,
어머니는 종성절제사 홍상직(洪尙直)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어려서부터 독서를 좋아하고 일찍이 「금릉사(金陵詞)」를 지었는데,
의미가 장중하고 건실해 널리 회자되었다. 1459년(세조 5) 사마시에 장원하고,
이어서 1462년(세조 8) 식년 문과에 정과로 급제해 예문관에 들어갔다.
1466년 문과 중시와 발영시(拔英試)에 각각 3등으로 급제, 이조정랑이 되었다.
1470년(성종 1) 홍문관부제학으로, 경연 시강관(侍講官)으로 활약했는데
특히 시문에 능해 성종의 총애가 돈독하였다. 1484년(성종 15) 공조참판을 거쳐
대사헌이 되어 오랫동안 관기 확립에 힘쓰고, 동지중추부사를 거쳐 형조참판이 되었다.
1487년 천추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지중추부사·형조참판·공조참판·병조참판을
두루 역임하고 다시 대사헌에 임명되었다.
그 뒤 개성부유수를 거쳐 공조판서에 올랐다. 1494년 성종이 죽자
산릉도감제조(山陵都監提調)로서 산역을 다스렸고, 1495년(연산군 1) 형조판서로 옮겨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임하였다.
이어서 이조판서·도총관을 거쳐 1498년(연산군 4) 한성부판윤이 되고,
이 해에 『성종실록』 찬수에 참여하였다. 이듬해 다시 형조판서가 되어,
압록강 연안에 노략질을 일삼는 야인의 정벌 계획이 있자 신수근(愼守勤)과 함께
때가 아님을 적극적으로 논해 중단시켰다.
그 뒤 좌참찬·호조판서를 역임했으며, 1502년에는 시문에 능한 10인에 선발되어
시수상(詩首相)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하였다. 연산군의 폭정이 날로 심해지자 관직에서
물러나고자 하였다. 그러나 허락되지 않은 채, 이듬해 우의정·좌의정을 거쳐
1505년(연산군 11) 65세의 나이로 영의정에 올랐다.
이듬 해 박원종(朴元宗)·성희안(成希顔)·유순정(柳順汀) 등이 중종반정을 단행하자,
수상으로서 정국공신(靖國功臣) 2등에 책록되고, 문성부원군(文城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러나 실제로는 반정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누차 사임을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1509년(중종 4) 도리어 연산조의 총신이었다는 대간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극구 사양해 마침내 은퇴하였다.
1514년(중종 9) 다시 영의정을 제수받아 국정을 총괄하다가 3년 뒤인 1517년(중종 12)에
향년 77세로 사망하였다. 자학(字學)에 매우 정밀하고 의학·지리학에도 조예가 있었다.
시호는 문희(文僖)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