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리장 '시장생선집' 이씨(여, 1941년생)
*2010년 8월 21일 인터뷰
서정리장 이씨는 생선장수 노점을 하다가 1970년부터 서정리장에서 생선가게를 얻어 시장생선집이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이름 밝히기를 한사코 거부하여 사정상 싣지 못했다. 서정리장에서는 가장 오랫동안 장사를 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필자)할머니는 고향이 어디세요?
이)충청도 논산인디 어려서 평택으로 이사왔지.
필자)계속 평택에서만 살았어요?
이)아녀. 혼인허구 안성갔다가 삼십 다 되어서 일루 왔어.
필자)30년 전에는 서정리장 사정이 어땠어요?
이)그 때는 규모가 작았지. 시장이랄 것두 없고, 이 골목(중심골목)이서 저~기 골목 꺽어지는 것이 다였어. 저기 축협 있는디 거기에 싸전이 둥그렇게 있어고. 외골목장이여. 채소전 쪼끔, 생선전 너 댓집, 저 위쪽으루다 옷전, 개전두 있었네. 돼지는 팔았는디 소전은 없었어. 장꾼들두 없어서 오전 장(場) 보구 나면 다 끝났지. 그 때는 장날만 수원 가서 생선 서너 짝 가져다 팔았는디두 다 못팔아서 송탄장(중앙시장)가서 팔았어. 송북장은 아침장이라 아침 9시면 끝났거든.
필자)수원까지 가서 물건을 떼 오셨어요. 아산만 생선들은 안 들어왔구요?
이)열차타고 다녔으니께. 나중에 수원 사람이 평택장(통복시장)으루 오면서는 평택으로 다녔지. 아산만서는 잽히는 생선이래야 숭어, 망둥이 뿐였어. 그거 가지고는 장사 안 되지.
필자)처음부터 가게 얻어놓고 장사하셨어요?
이)아녀. 처음에는 오일장을 봤지.
필자)어디, 어디요?
이)1일, 6일은 안중장 보고, 2일, 7일은 서정리장, 3일, 8일은 오산장, 4일, 9일은 온양장, 5일, 10일은 평택장(통복시장)을 봤지. 무쇠날(평일)에 서정리장이 서기 시작한 것은 을메 안 되야.
필자)오일장 할 때는 어떤 장이 가장 컸어요?
이)평택장허구 온양장이 젤 컸지. 무쇠날도 장이 서고.
필자)장돌뱅이 할 때 물건은 어디다 싣고 다녔어요?
이)좌판 같은 건 맡겨두고, 물건은 첨(40년 전)에는 상회에서(도매점) 구루마로 실어다줬어. 그러다가 30년 전쯤에는, 거 있잖어 바퀴 세 개로 다니는 거.
필자)아, 삼륜차요?
이) 응, 그거다가 실어다 줬지. 돌아올 때는 남은 물건 버스다 실어오고. 오산장 서는 기차타고 오고. 갈 때도 기차타고.
필자)노점은 어떤 식으로 했어요?
이)장터마자 자기 자리가 있어. 먼저 왔다고 자리 잡았다가는 난리났지. 거기다 생선궤짝 엎어놓고 비료푸대 찢어서 덮고 팔았고. 나중에 스치로풀허구 비닐 나오면서 좋아졌지.
필자)옛날 장터에는 장세가 있었던 것 같은데?
이)장세, 있었지. 처음에는 잘날마다 5원씩 냈다가 나중에는 한 달에 30원씩 받아갔어. 장세 안내면 쫒겨나기도 허고.
필자)장사를 하다보면 장터마다 특성이 있지요?
이)그럼, 사람들이 다르니께. 안중장은 숭어, 밴댕이같이 그 지역에서 잡은 것 많이 먹고, 온양장은 갈치절임 같은 거 잘 먹고, 오산장은 무슨 물건이든 가져다 놓기만 하면 잘 먹었지. 그 때는 새벽 5시면 물건 들어오고, 대 여섯 시면 장으루 갔지.
필자)서정리장은 언제부터 상설시장이 되었어요?
이)여기, 얼마 안 되야. 무쇠날 장 선 게 한 25년쯤 됐을 거여. 그 때부터 장이 쬐끔씩 커졌지. 무쇠날도 장이 서면서 점포 두고 눌러 앉은 거지.
필자)장터가 지금처럼 정비된 것은 언제쯤이죠. 장터가 정비되면서 장사가 더 잘 되는 편인가요?
이)이렇게 고친 건 얼마 안 됐지. 그렇다고 크게 바뀌었다고 볼 수는 없어. 깨끗하게 지붕 씌우고 한 것 밖에 없으니께. 사람은 많이 줄었지만 우리집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차이가 많이 안 나. 돈버는 거야 많이 줄었지. 젊은 사람들은 여기 오는감. 그려도 장사는 신용이 있고 성실혀야 허는 겨. 좋은 물건 뗘다 놓고 제 값을 받으려고 애쓰고. 물건가지고 속이면 못써. 손님 다 떨어져. 우리집은 한 번 단골 맺으면 십년이고 이십년이고 평생 가.
필자)시장골목 말고 서정리보신탕집 있는 골목은 옛날에 어떠했어요?
이)거기, 옛날에 좁은 골목였어. 집두 별루 없었구. 보신탕집 그 집은 참 오래된 집이여. 세심탕도 오래되었고.
필자) 고맙습니다. 다음에 또 찾아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