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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건너온 아이들’ 네 번째 글은 몽당연필이 운영하는 서울 마포구 ‘카페 연필1/3’ 매니저 백우영 씨가 쓰셨습니다.
백우영 씨는 몽당연필이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처음 모였을 때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조선학교와 함께하고 있습니다. 이번 네 번째 글에서 이 땅의 평범한 아줌마가 조선학교 아이들을 만난 이야기를 전합니다.
일본정부로부터 인정도 받지 못하고 남쪽 사람들에게 왜곡된 시선을 받으면서도 아이들이 조선학교에 다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평범한 남쪽 아줌마의 시선을 들어보시겠어요? |
2011년 몽당연필이 진행했던 제주 소풍콘서트. 몽당연필은 2011년 4월부터 1년 2개월 간 12회의 토크콘서트와 6회의 대규모 소풍콘서트 순회공연을 했습니다. ⓒ몽당연필
인정 안 해주면 그냥
일본학교 다니면 되잖아
저도 이렇게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일본에 살면서 일본정부가 인정해 주지도 않고 심지어 차별받기까지 하는 그런 <조선학교>에 보내는 동포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던 시간이요.
아들 하나를 키우고 있는 평범한 대한민국의 아줌마였던 제가 처음 조선학교 이야기를 접하고 들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예전의 저와 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이 제법 많다는 걸 요즘 또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일본이 인정도 안하는데 그냥 일본학교 다니면 되잖아’라는 말을 주위 사람들에게서 종종 듣고 있거든요.
그럴 때마다 저는 상대에게 되묻습니다.
“일본이 인정도 안하는데 독도는 우리 땅인 게 맞는 건가? 일본이 인정도 안하는데 위안부할머니들은 자발적으로 따라나선 게 틀림없겠네? 일본이 인정도 안하는데 조선인강제징용 따위는 있지도 않은 일이었던 거지? 일본이 인정도 안하는데 말이지.”
“인정 안 해주면 그냥 일본학교 다니면 되잖아.”
정말 그래야 하는 걸까요?
이제 오십이 다 되가는
이 땅의 평범한 아줌마
어쩌다가 바다 건너 일본 땅에 있는 <조선학교> 아이들에게까지 관심을 갖게 되어서 가끔 뭔 오지랖이냐는 소릴 듣고 있는 그 아줌마가 만난 아이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제 아들과 그리 다르지 않은 ‘우리 아이들’ 이야기를요.
저는 지난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몽당연필>이 매월 진행하던 콘서트의 단골 관객이었습니다.
어느덧 홍대 클럽엔 입장조차도 할 수 없는 나이가 되어버린 제가 오르는 흥을 맘껏 발산할 수 있었던 공연! 락에서 재즈, 클래식과 국악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열정적인 공연! 게다가 평소 제가 좋아하는 뮤지션이 제법 많이 나오던 콘서트였거든요.
그 첫 콘서트 때 보았던 오프닝 영상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곳에 아이들의 이야기를 쓰게 될 정도로 <조선학교>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이요.
2011년 몽당연필 토크콘서트 오프닝 영상. ⓒ몽당연필
호기심 충만하던 저는 이 콘서트가 인연이 되어 2011년 9월, 몽당연필 방문단에 이름을 올리고 처음 그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제 삶이 좀 고달플 땐 이런 생각을 하기도 했었지요. 우리보다 더 잘 사는 일본에서 저보다 조금은 더 나은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재일동포들이 아닐까 하는... 그래요. 사실 그런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던 아줌마였습니다, 저는..
그런데 그 아줌마 눈에 비친 아이들과 부모님들, 그리고 선생님들의 모습 속에서 돌아가신 뒤 한동안 잊고 지내던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떠오르더란 말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고향인 평안도 보다 서울에서 훨씬 더 많은 세월을 보내신 분입니다. 그럼에도 대부분의 실향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늘 갈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평생을 보내셨지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떠나온 고향이기에 그러하셨을 겁니다.
처음 방문하여 학교 운동장에서 불고기모임을 하던 그날, 자신들의 고향에서 온 우리를 바라보며 ‘우리를 잊지 않고 찾아 주셔서 고맙습니다’라고 계속해서 인사하는 동포 어르신들의 모습에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졌습니다.
마음이 먹먹해지더군요. 너무 늦게 알게 되어 미안한 마음까지 보태져서 더 몸 둘 바를 모르겠던 기억이 납니다.
2011년 9월 몽당연필은 도치기에서 열린 새별학원 행사에 방문해 지진피해를 입은 조선학교 성금을 전달하기 위해 처음 일본에 방문했습니다. 당시 몽당연필 공동대표를 맡았던 가수 이지상과 배우 권해효. ⓒ몽당연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여기 앉으세요
운동장에서 만나는 아이들마다 참 예의 바르게 인사를 잘했습니다. 익숙한 우리말로 말이지요. 그 바람에 저는 일본이 아니라 우리나라 경상도나 전라도 어드메쯤에 있는 시골학교 운동장에 와있는 기분이었습니다.
참 신기했습니다. 우리민족 아이들이 우리말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신기하냐고 물으신다면 일반적인 재미동포 3, 4세 아이들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요? 아 물론 우리말을 잊지 않고 잘 하는 아이들도 있겠지만요.
조선학교의 아이들은 저와 의사소통에 아무 문제가 없을 정도로 우리말을 참 잘했습니다.
학교에서는 일본어 시간을 제외하고는 우리말만 쓴다는 이야기도 그때 아이들에게 들었습니다, 그 덕에 당시 일본어라고는 고작 아리가또, 스미마셍 정도밖에 모르던 제가 아무 불편함 없이 방문기간을 보낼 수 있었답니다.
아이들은 아이들다웠고 선생님들은 선생님다웠으며 부모님들은 부모님다웠습니다. 저와 다르지 않은 모습, 그러나 제가 함께 해보지 못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저보다 더 진한 삶의 아픔을 안고 살아온 사람들.
그럼에도 그 옛날 우리네 어르신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서로를 보듬고 위로하며 살아갈 희망을 나누는 이들을 그곳에서 만났습니다.
다시 만난 아이들
2012년, 몽당연필 콘서트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도쿄소풍공연을 할 때 또다시 아이들을 만났습니다.
치마저고리를 입고 무대에서 멋지게 공연을 하던 아이들도 있었습니다. 어찌나 예쁘게 잘 하든지요. 감동이었습니다. 매일 매일 연습하는 소조(동아리 모임)활동 덕분이라고 아이들은 말했습니다.
객석에서 공연을 보며 환호하던 남학생들 모습은 영락없는 여드름투성이 우리 아들이었습니다.
혹여 아이들이게 무슨 일이라도 일어날까 공연 내내 아이들을 둘러보며 챙기시는 선생님들, 학창시절 소풍이나 수학여행 때면 긴장하며 우리를 살피던 선생님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정말 친근한 느낌이었습니다. 공연이 끝나고 함께 어우러져 사진도 찍고 인사도 나누면서 다음에 꼭 다시 만날 것을 약속했지요.
2012년 몽당연필 소풍콘서트 in 도쿄. ⓒ몽당연필
아이들과의 약속은
한동안 지켜지지 못했습니다.
제가 고등학생 운동선수 아들을 둔 대한민국의 엄마였으니까요. 종종거리며 아들 뒤치다꺼리에 지쳐있던 어느 날, 아들 녀석의 시합장에서 조선학교의 학생과 꼭 닮은 아이를 보았습니다.
두툼한 입술과 까맣게 탄 얼굴 때문에 웃을 때면 유독 하얀 이가 두드러져 보이던 아이, 축구를 너무 좋아하던 조선학교의 한 아이와 참 많이 닮은 친구였습니다. 한참을 바라보다가 불쑥 아이들과의 약속이 생각났고 아이들이 보고 싶어 졌습니다.
며칠 후 비행기에 올랐지요. 배낭 하나 달랑 메고 일본어도 제대로 못하면서 홀로 일본 땅으로 아이들을 찾아갔습니다. 평범한 아줌마가 용감하기까지 한 아줌마로 거듭나는 순간이었답니다.
다시 만난 아이들은 마침 운동회 준비가 한창이었어요. 조선학교의 운동회는 일 년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랍니다. 인근의 동포들이 거의 다 모여 한바탕 축제를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하긴 제가 어릴 때 우리 학교에서도 그런 운동회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요즘에는 보기 드문 일이 되어서 아쉬운 그 예전의 운동회를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오랜만에 추억이 깃든 운동회를 다시 할 수 있었지요. 함께 뛰고 당기고, 먹고 웃으며 그렇게요. 이겨서 환호하는 아이들, 졌다고 울먹이는 아이들, 그 모습에 함께 울고 웃으며 응원하고 다독이고..
인근의 동포가 거의 다 모여 한바탕 축제를 치르는 운동회는 조선학교 일 년 행사 중 가장 중요한 행사입니다. ⓒ몽당연필
아이들과 운동회를 준비하는 동안 저는 걱정이 하나 있었는데 다름 아닌 ‘비’였습니다. 매일 수시로 내리는 비 때문에 배수시설이 좋지 못했던 운동장 여기저기에 물웅덩이가 생겨버렸거든요.
운동회 전날 다행히 비는 그치고 날이 개었지만 운동장은 하루 만에 운동회를 할 만큼 그렇게 마를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운동장이 저래가지고 어떻게 운동회를 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던 내 눈앞에 정말 신기한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비가 그치자 선생님들과 중고급부 학생들이 모두 손에 백과사전만 한 스펀지를 하나씩 들고 운동장에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스펀지로 고인 물들을 빨아들여 수레에 짜내면 힘 좋은 남학생들이 물을 내다버리기를 반복하고 있더라고요. 괜히 마음이 짠해져서 손을 보태려고 저도 양말을 벗고 맨발로 운동장에 나갔지요.
아이들이 얼마나 하기 싫을까, 학창시절 체육시간에 신축하는 학교 건물에 쓰일 벽돌을 날랐던 경험이 제게 그다지 썩 좋은 기억이 아니어서 그런 생각을 했었나 봅니다.
그런데 아이들은 의외로 즐겁고 신나게 그 일을 하고 있어서 오히려 제가 놀랐습니다. 뜻밖에도 아이들은 장난치며, 웃으며, 이야기 나누며, 그렇게 물을 빼고 있었습니다.
소리 내어 친구들에게 기운을 북돋아 주기도 하고, 열일곱 여덟 그 또래만의 웃음과 그 또래만의 에너지를 발산하며 그렇게 빗물로 축 늘어진 운동장을 스펀지 하나로 다림질을 해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운동장의 그 많던 물들이 점차 줄어들고 진자리가 마른자리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았지요.
전통이라고 했습니다
열악한 운동장 환경이지만 중고급부 언니오빠들과 선생님들의 이러한 노력과 헌신이 있어서 어린 동생들은 비가 그치면 언제든지 바로 운동장에 나와 뛰어 놀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어린 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만 있다면 이 정도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도 했습니다. ‘함께’ ‘하나’ 이런 말들에 아이들은 익숙해 보였습니다.
아이들이 운동회를 준비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저는 아이들이 학교의 교육을 통해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삶이 우선임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끄럽지만 우리가 이미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만, 그래서 지금은 빛바랜 사진 같은 모습으로만 추억하는 예전 우리네 학교의 모습을 그날 그곳에서 보았습니다.
조선학교 아이들이 학교 교육에서 자기 자신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삶이 우선임을 배워갑니다. ⓒ몽당연필
이름이 뭐였더라?
그런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대견하고 예뻐서 칭찬의 말을 해주고 싶었습니다. 옆에 있는 아이에게 말을 걸려 하는데 이런,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서 한참을 ‘음… 음...’ 하다가 결국 ‘이름이...뭐였더라????’하고 묻고 말았습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이들 이름을 다 외우고 싶었는데 그게 어찌나 어렵든지 돌아서면 잊어버리곤 했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운동회를 준비하며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이름을 불러주고 싶었는데 통 기억이 나야 말이지요. 민망할 정도로 ‘이름이... 뭐였더라????’ 이 말을 참 많이 했었습니다.
그 때 한 아이가 아주 또박또박 자신의 이름을 몇 번이나 말해주며 “잊지 마세요. 제가 또 물어볼 거예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축구를 좋아하는 유독 까만 얼굴의 바로 그 아이가 말입니다. 진짜로 그 아이는 수시로 제게 와서 “제 이름이 뭐예요?” 묻고는 제가 대답을 하면 그 하얀 이를 드러내고 씨익 웃으며 달려갔습니다.
그렇게 하기를 몇 번, 돌아서서 뛰어가는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다가 울컥 혼자 마음이 찡해졌습니다.
잊지 마세요..잊지 마세요..
잊지 마세요..
돌아설 때마다 그 아이가 제게 건넨 그 말이 문득 제 안에 들어와 맘을 휘휘 저어댔거든요. 그리고는 목까지 타고 올라오며 목구멍을 따갑게 하더니 급기야 내 눈을 껌벅이게 만들었습니다.
눈을 껌벅일 때마다 미안함이 범벅이 된 그래서 더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 없는 그런 눈물이 콧등을 타고 흘렀지요.
그 바람에 저는 잠시 허리를 굽히고 바닥만 내려다 본 채로 더 열심히 스펀지로 물을 빨아들이고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운동장이 언제 다 마르냐고...’하며 괜한 혼자 소리를 하면서 말입니다.
몽당연필은 매년 소풍을 통해 조선학교 아이들을 만나고 함께합니다. ⓒ몽당연필
그래요. 제가 너무 잊고 살았습니다. 우리의 역사를요. 그리고 그 역사의 뒤안길에서 힘겹게 온몸으로 비를 맞으며 지내고 있는 그들을요.
잊지 않고 이름을 불러주는 것만으로도 저리 좋아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그때 스스로 약속을 했었지요. 잊지 않겠다고요. 관심 갖겠다고요.
제게 자기이름을 잊지 말라며
그렇게 환한 웃음을
보이던 아이
그 아이도 다른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졸업하기 전 한 시험을 치렀답니다, <고인(高認)>이라고 불리는 고등학교 졸업인정시험입니다.
이 시험과 관련해서 2015년 9월 17일,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6면에 실린 조선학교의 한 아이가 쓴 글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밝은 미래를 믿고 치른 <고인(高認) 시험>’이라는 글입니다.
2015년 9월 17일, 일본 아사히신문(朝日新聞) 16면에 조선학교 아이가 쓴 글이 게재됐습니다. '밝은 미래를 믿고 치른 『고인(高認, 고등학교 졸업인증시험)』 시험'이란 글입니다. ⓒ몽당연필
여름방학 때에 시험을 쳤다. 대학 입학시험이 아니다. 고등학교 졸업인정시험, 소위 <고인(高認)>. 지망하는 전문학교(일종의 전문대학)에 시험을 치기 위해서 필요한 고등학교 졸업 인정 시험이다.
<고인(高認)>의 앙케트에는 “왜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까?”라는 질문이 있었다. 선택지에는 ‘①친구와 어울리지 못했다. ②학업을 따라가지 못했다. ③학교의 환경이 자신과 맞지 않았다’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학교에 잘 다니고 있으며 친구들과도 사이가 좋다.
학업도 잘 따라가고 있다. 학교의 환경에도 불만이 없다. <고인(高認)>시험을 치러야만 하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일본정부가 내가 다니는 조선학교를 ‘고등학교’로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스포츠나 예술 부분에서는 출전 자격이 주어져서 인터하이(전국 고등학교 종합 체육대회)나 각종 콩쿠르 등 여러 방면에서 활약을 펼치고 있다.
내가 속한 성악부도 이전에 전 일본 합창 콩쿠르에서 이바라기현 대표로 무대에 올라 여러 일본 관객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거기에는 어떠한 차별도 편견도 없었다.
정치에 의해서 좌우되는 우리들의 상황이다. 그러나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자. 밝은 미래를 믿는 힘, 그것이야말로 내가 배우는 이유다.
왜 학교에
다니지 않았습니까?
‘조선학교’ 아이들이 이 시험을 치를 때마다 접하게 되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은 현재 일본의 교육현실을 고려해 볼 때 아이들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침략의 역사를 가르치지 않는 곳, 그러하기에 재일조선인의 역사 따위는 전혀 존재하지도 않는 곳에 왜 다니지 않았습니까?”
“21세기인 지금도 ‘마늘냄새 나는 조센징’이라는 놀림과 따돌림이 여전한 곳, 그러하기에 자신의 정체성을 가능하면 숨기고 생활하는 편이 차라리 더 나은 곳에 왜 다지니 않았습니까?”
“인정 안 해주면 그냥 일본학교 다니면 되잖아.”
정말 우리 아이들은 그래야 하는 걸까요?
2014년 몽당연필 소풍콘서트 in 히로시마 마지막 무대. ⓒ몽당연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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