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신인문학상 당선작
걱정, 애완동물 같은 외 4편
정해영
뜻밖에 나에게로 와서
내 마음의 방에서 같이
지내게 되었다
비좁고 옹색하여
떠나보낼 양으로
따뜻하게 먹이고 입혀
등을 밀어 보냈지만
할딱이며 되돌아오는
눈 먼 어린 것
집을 떠나 폐교된 초등학교
라일락 그늘에 비켜 앉을 때
가슴 속에서 살금살금 기어오르는
작은 생명 같은 것
무릎에 앉아 빤히 올려다본다
이곳 멀리까지 도망 쳐 온 나를
주인이라 쫒아온
멀리서 넘실거리며
다가오는 연둣빛능선이
낡은 학교를 돌보고 있다
바라 보아야할 어둔한 것
누추하게 살아있는 것이 안아야할
생명, 혹은 애완동물 같은
·깊이 박혀 있다
저 돌 속의 무늬
타인이 누군가의 가슴속으로 던져
살을 차고 들어간
국화무늬의 말
질기고 강하게
좀체 빠져나오지 못하는
덫에 걸린 그 말
몸부림치는 흰 슬픔으로
갇혀 있다
물집
한밤 중 옆집
물건이 떨어지고
비명이 오고
또 가고
현관문이 열리자
쿵쿵거리는 발자국 소리가 나가며
세차게 문을 밀친다
닫기지 않은 문
사이로 그 집의 속살 찢는 여자의 넋두리
오래된 울음이 부풀어 올라
밖으로 터져 나왔다
힘겨운 날들이 밀어 낸 상처
진물이 나는
그날 밤 그 집은
입술 위 돋아난 물집처럼
툭 튀어 나와 있었다
고요한 동네 위로
가족사진
이웃 사람들 자꾸 올려다보던
오래된 기억속의 목련꽃
아버지 읍내에서
사진사 부르시던 날
자욱이 만개한 식구들
가운데 꺼칠한 기둥이신
아버지 곁에
젖다가 마르고 마르다
젖은 어머니도
활짝 고우시다
바라보면
허물어진 한 생애의
빛나던 꼭대기만 남아
아득히 눈부시다
깡통 따기
일이 생겼다
밀봉되어
그 속을 모르는
며칠 밤
눈을 뜨고 밤의 둘레를 걸었다
판단의 날을 세우며
아파트 주위를 몇 바퀴
더 돌았다
지금 중심에서 먼 이곳
가파르고 아득하다
차갑고 미끄러운 길 위에
어둔하게 생각의 이빨을 물리며
둥그렇게 멀리 돌아서 간다
뚜껑이 열릴 때까지
당선 소감
살아가는 일은 치열하고 목이 메도록 팍팍 하여 자꾸 생겨나는 허전한 마음의 빈자리, 그곳이 나의 남새밭이다. 집에 딸린 작은 공터, 나는 차를 마시며 그곳의 큰 돌을 골라내고 부드러운 흙을 들어다 붓고, 산길을 오르며 마음에 들어오는 들꽃의 씨를 받아 뿌리고 별빛 물을 뿌린다. 막대기를 꽂고 비닐 끈을 묶어 경계 아닌 경계를 지은 나만의 영토에도 해가 지고 새벽이 오고 가기 십 수 년. 계절이 수 십 번 헛바퀴를 치며 지나가도 땅은 무심하지 않아 착하고 어린 생명을 보내 주었다. 가슴.속에서 자라나는 푸성귀 같은 시, 아직 매끈하지도 못하고 크기와 길이도 고르지 못하여 한 번도 내다 팔려고 마음먹은 적은 없었다.
이 번에 {애지} 가을호 신인문학상 당선의 문을 열어 주시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발을 들여 놓는다. 아직 서울말도 모르는 나의 시어들은 눈치 없이 지면 위에서 멀뚱거려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느 구석진 자리 쪼그리고 앉을까 두렵다. 나의 시들은 늘씬 늘씬한 미인대회에서 뽑힌 미녀도 아니고, 그리 크지 않은 키에 수수하게 흰 블라우스를 입고 검은 주름치마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시들이 님(詩神) 계신 곳으로 가는 길을 잃지 않도록 더욱 신발을 졸라매어 노력하고 정진할 것이다.
1990년부터 저에게 시의 씨앗을 손에 쥐어 주신 구석본, 강현국 선생님, 2004년부터 길을 잃고 눈물 글썽이는 미아 같은 내 시의 손목을 잡고 좁은 골목길까지 길을 이끌어 주신 ‘물빛동인’의 이진흥 선생님께도 존경의 인사를 올립니다. 대화의 맛있는 시간을 파이 조각처럼 떼어내어 야금야금 혼자 먹어치운 세월들을 이해해 준 남편과 가족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습니다. ‘전투적 비평가’, ‘도도한 철학자’인 반경환 선생님이 주간이신 ‘애지’의 신인으로 뽑혀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심사위원님들께 깊이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