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1384년(우왕 10) 최담(崔霮, 1346~1434) 선생 넷째 아들로 전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물론 큰형 최광지(崔匡之)와 둘째형 최직지(崔直之)도 모두 고려문과(1)에 급제한 신진사대부 가문 막내아들이다.
선생은 1405년(태종 5) 22세 젊은 나이로 김종서(金宗瑞, 1383~1453), 송을개(宋乙開) 등과 함께 식년문과에 급제(2)했으나 이듬해(1406) 모친상(3)을 당해 출사(出仕)하지 못하고 상제(喪制)로서 삼년상을 치렀다.
1409년(태종 9) 삼년상을 마치고 출사하여 내직으로는 교서관정자(4), 사헌부감찰(5) 등을 역임하고,
외직으로는 장수현감(6), 익산현감(7), 함양군수(8), 청도군수(9), 김제군수(10) 등을 역임했다.
선생이 청도군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세종이 세제개혁(稅制改革, 1430)을 위해 여러 사람 의견을 들었는데 왕명에 답변해 올린 상소문 <논공법담험편부소>(11) 전문(全文)이『연촌유사』(12)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선생 이력에서 특징이라면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淸要職)을 거친 엘리트지만 지방 수령으로 근무한 기간이 매우 길었다는 것이다.
1446년(세종 28) 남원부사에서 물러나 당시 풍습대로 나주목의 속현(屬縣) 안로(安老)에 있는 처가로 낙향(13)했다.
안로현은 지금의 나주시 세지면과 영암군 신북면 일대로 지금도 그 곳에 선생 부인 평양조씨와 후손들 선산이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18세 무렵 처음 혼인했으나 상처(喪妻)한 것으로 추정된다.
모친상을 당하여 재혼하지 못하고 있다가 출사할 무렵(1409~10) 영암군수를 지낸 외삼촌 박진(朴晉)의 중매로 안로에 사는 조안정(趙安鼎)의 딸과 재혼(14)했다.
조안정의 아내 김씨부인은 안로현 토성(15)인데『동국신속삼강행실도』<열녀편>에 수록(16)된 효열부(孝烈婦)다.
『동국신속삼강행실도』에 의하면 김씨부인 나이 18세 때 조안정이 사망했다고 하므로 평양조씨 부인은 유복녀(遺腹女)로 태어났음을 알 수 있다.
임진왜란 이후까지 김씨부인 열녀문(烈女門)이 영원고개 아래(17)에 전해오고 있었는데 영원고개는 영암 읍성(邑城) 동쪽 10리(18) 거리에 있다.
선생은 처가마을에서 남쪽으로 20여리 떨어진 바닷가에 영보촌을 개척하여 존양루를 짓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명제 존심양성(存心養性)을 실천하는 성리학자로서 길을 걸었는데 존양루 현판 글씨는 안평대군(安平大君) 친필(19)이었다고 한다.
영보촌은 바닷가에 있는 역참마을(20)로 가까운 덕진포(德津浦)에 중국과 일본을 오가는 상선이 드나드는 번잡한 곳(21)이었기 때문에 양반들이 살기 꺼려하여 대개 천민들이 살았다.
더욱이 영암은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오지(奧地)로 왜구의 침략이 잦아서 주로 무관을 수령으로 파견해 왔었기 때문에 학문의 기반이 갖추어지지 못했었는데 선생이 낙향하여 학문을 펼치므로 인하여 비로소 학문의 기반이 만들어지게 되었다.(22)
1450년(문종 즉위) 다시 출사하여 예문관직제학(23), 공원참시관(24), 춘추관기주관(25)을 역임하고 1451년(문종 1) 10월 29일 은퇴상소를 올려 임금 승인을 받았다.
11월 8일 한강변에서 성대한 송별연(26)이 열렸는데 송별연 자리에서 많은 저명인사가 지어 준 글이『연촌유사』에 수록되어 전해오고 있다.
선생은 11월 10일 무렵 서울을 출발하여 영암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선생 은퇴는 수기치인을 요체(要諦)로 하는 것으로 성리학자의 전범(典範)이 되었기 때문에 선생을 대표하는 캐릭터(27)로 자리매김하였다.
선생 이력을 요약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년도 | 벼슬 |
1405년 | 태종 5년 | 식년 문과 급제. |
1406년 | 태종 6년 | 모친상(母親喪) |
1409년 | 태종 9년 | 삼년상을 끝내고 출사. |
1410년 | 태종 10년 | 교서관 정자. |
1417년 | 태종 17년 | 사헌부 감찰. |
미상 | 미상 | 장수현감, 익산군수. |
1425년 | 세종 7년 | 함양군수. |
1430년 | 세종 12년 | 청도군수. |
1436년 | 세종 18년 | 김제군수. |
1446년 | 세종 28년 | 남원부사에서 영보촌으로 은퇴. |
1450년 | 문종 즉위년 | 예문관직제학으로 다시 출사. |
1451년 | 문종 1년 | 영구 은퇴. |
*** 각주 -----------------
(1)『고려열조등과록』<우왕 3년(1377) 정사방>{R01}
『고려열조등과록』<창왕 1년(1389) 기사방>{R02}
(2)『국조문과방목』<태종 5년(1405) 을유 식년시>{R03}
(3) 歲丙戌丁[亥]母憂終制.『연촌유사』<소윤공묘갈>{R04}
(4) 役朔校書正字崔德之.『태종실록』<태종 10년(1410) 6월 25일>{R05}
(5) 司憲監察崔德之.『태종실록』<태종 17년(1417) 12월 9일>{R06}
(6) 幷淸簡爲治.『신증동국여지승람』<장수현 명환>{R07}
(7) 行已儉約處事詳明.『신증동국여지승람』<익산군 명환>{R08}
(8) 知咸陽郡事崔德之.『세종실록』<세종 7년(1425) 12월 10일>{R09}
(9) 以臣之所守淸道一邑觀之則.『연촌유사』<논공법답험편부소>{R10}
(10) 金堤郡事崔德之.『세종실록』<세종 18년(1436) 11월 25일>{R11}
(11) <論貢法踏驗便否䟽> 공법과 담험법의 장단점을 비교 논술한 상소문.
(12) 『烟村遺事』전남유형문화재 제183호 녹동서원소장목판및고문서류 핵심 내용이다.
(13) 以南原府使歸臥靈巖之別墅.『연촌유사』<난후문고수록지>{R12①}
歲在柔兆攝提格仲秋後一日.『연촌유사』<존양루기>{R13④}
(14) 後配平壤趙氏中郞將安鼎之女.『강희보』<자손록 최덕지행장>{R14}
(15) 安老姓四金徐車全.『세종실록』<지리지 나주목 성씨>{R15}
(16) 金氏靈巖郡人中郞將趙安鼎妻也年十七父卒十八夫歿十九母歿皆廬墓三年哀毁不輟不事生業旌閭.『동국신속삼강행실도』<열녀 김씨여묘>{R16}
(17) 旌門今在嶺院下.『동원집』<존양사기>{R17①}
(18) 嶺院峴在郡東十里.『신증동국여지승람』<영암군 산천>{R18}
(19) 先生有樓扁曰存養卽安平大君手書也筆本模入於海東名迹者是也.『동원집』<존양사기> {R17②}
(20) 驛院永保驛在郡北城底.『신증동국여지승람』<영암군 역원>{R19}
(21) 白虹蜿蜒估舶漁船隨潮往來者德津也周道如砥冠盖相望由羅而之靈之大道也牛馬載路行旅競集者由南而之北之逆旅也.『연촌유사』<존양루기> {R13②}
(22) 始焉此郡距京師甚遠倭寇不已常以武臣爲守故文敎不宣文風不振自先生退居郡之人乃服文化至於今日文士輩出彬彬焉郁郁焉朝廷亦繼以文望治之豈非先生存養之所嘉惠歟『동원집』<존양사기>{R17④}
(23) 藝文館直提學.『연촌유사』<연촌최선생가전시문록후서> {R20①}
(24) 貢院參試官.『연촌유사』<공원창화시서>{R21}
(25) 春秋館記注官.『고려사』<수사관>{R22}
(26) 景泰二年十一月初八日.『연촌유사』<퇴휴시송별시발>{R23②}
(27) 以南原府使退居靈巖永保村扁其樓曰存養.『해동명신록』<본조 최덕지>{R24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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