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상태, 두통, 양성고혈압(2012. 02. 07)의 진단을 받았다.
이 내용을 인천보훈지청에 제출하려고 발급을 받았으나 참았다.
몸 전체에서 아픈 곳이 딱 지정되어 아픈 것이 아니고 전신에 아픔이 오고 있었다.
누가 어떻게 아픈지 물을 때에 내가 나에게 대답을 하여도 견적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나에 무엇이 무엇으로 찾아와도 희망을 말하면 절망의 소리도 같이 들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유급으로 가는 것은 사회에서 직업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기에 다채로운 자원봉사로 길을 정하였다.
(인천성모병원 신부님)
"인생은 70부터이지요. 아직 충치도 하나 없고 몸도 젊어니 개인택시를 뽑았어요."
"축하합니다. 저는 56세에 놀고 먹은 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 되어가고 있어요."
알고 있어요. 젊은 사람이 놀면 안되지요. 6층의 아저씨도 60대에 놀면서 3년에 5000만원을 까먹었다고 하더군요."
가슴에 불을 질르고 나 자신은 참지 못하여 차 오르지만 참았다. 난 젊은 시절에 잇몸 특히 하악 전체가 흔들렸다. 그 중에 심한 증상이 나왔던 4개의 치아를 뽑았다. 의치를 해 넣고 살아왔다. 이런 나의 심정을 알리가 없는 사람으로 돈을 벌면 나를 줄 사람도 아니면서 아궁이에 불을 붙이는 행동을 9층 할아버지가 미워졌다. 어르신이라는 불러야 할 나이인데 하는 행동은 청년이었다. 생수병을 들고 지하 차고를 벗어나는 모습을 보았다.
이렇게 당하면서 남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었다. 지하주차장에서 시동점검을 계속하는 사이에 그 어르신은 다른 곳으로 가버렸다. 자동차의 시동을 끄고 몸과 마음의 공허감이 생기기에 공터 운동장으로 발길을 옮기었다.
다 함께 일한 58년 개띠의 노동력으로 중동시대가 열렸다. 그것이 기본이 되어 앞으로 전진을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 전의 독일 간호사와 광부의 동상을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보라매공원에서 보았다. 돈이 필요하지 않고 순수 애국심에 대한 젊은 사람의 부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그 당시 부자였다면 그런 고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국내에서 밥을 굶을 수가 없어서 간 것으로 아는 사람에게 당연 그렇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동상은 치워져야 할 것으로 예상이 되었다.
"국가유공자"
이것도 그렇다. 현역으로 입대를 하지 않는 방법으로 돈이 있거나 줄이 있는 사람은 그 당시 다 방위로 빠지거나 완전히 면제가 되었다. 돈이 없고 배움이 짧은 사람은 전방으로 또 전방으로 배치를 받았다. 그곳에서 보초만 서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하여야 할 모든 것을 다시 배워야 하였다.
일단 처음으로 배치를 받으면 기본적인 훈련을 받아야 하였다. 약 6주간의 기본교육이 사단별로 하는 경우의 수에 내가 있었다. 불행중 다행으로 105mm 무반동 총을 다루는 것이라 보직은 다른 보병에 비하여 훈련을 덜 받았다. 조교가 급하게 자기 수통에 담겨진 술을 한 잔 주면서 선임하사가 안 보이니 마시라는 정도로 알게 되었다.
"아마도 짚차를 타고 수양소에 2박3일을 보낼 것이에요. 멋진 군인으로 다시 만나요."
조교와 이별이 얼마 안 남았다. 내가 가는 부대는 105mm를 다루는 것이 아님을 직감으로 알게 되었다.
군대에서 갑자기 대우가 좋게 대우가 좋아졌다. 아무도 나에게 말을 하지 않았다. 어떤 곳으로 가는지 아는 사람은 조교와 소대장님이었다. 갈 수가 없다고 하려고 면담 신청을 하려다가 참았다. 세상은 위하여 나를 감추려고 하여도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10km 행군을 한 다음날에 형과 동생, 그리고 엄마를 만났어요?"
어머니 은혜를 부르게 한 후에 그 다음의 감정에서 울지 않아야 한다. 잔인한 고문의 시간이었다. 6주간의 훈련으로 아니 행군으로 구두 뒤꿈치가 다 까져서 도저히 걸을 수가 없었다. 의무대에 가서 약을 가져와 바르고 붙여도 쉽게 떨어졌다. 행군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차에 타라도 하였지만 버틴 결과였다. 질이 나쁜 군화를 원망하면 마음만 아파졌다.
한 쪽에는 활동화를 접어신고 한 쪽은 군화를 신고 만났다. 군 생활이 힘들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림으로 이미 다 보여주었다. 면회를 온 친구들이 옆에 있으면 먹을 것이 적은 전우에게 나누어주었다. 지금 먹지 않으면 버려야 할 것으로 나누다가 결국은 모두 합하여 큰 잔치상으로 변하는 과정에 조교가 말리었다.
"모임은 가족 이상은 하시면 안됩니다."
가지고 온 쓰례기는 부모님에게 담아가도록 하였다. 이런 식사시간이 지나고 다시 연병장에 모였다.
60트럭이 가장 먼저 왔다. 자대로 가기 위한 순서로 다음 관광버스였다. 여기서 조금 먼곳으로 가기 위한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나의 동기 4명로 짚차로 이동하였다. 가장 멋지게 자가용으로 가는 모습을 보고 동기들은 손을 흔들지 않았다.
"강 한 군 인"
짚차의 기관사인 운전병이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에 기가 죽은 것은 관광버스를 탄 사람보다 우리는 기절을 할 것 같았다. 속이 메스꺼워졌다. 휴양소에 도착을 하자 마자 토악질을 동기들과 함께 하였다.
그 만큼 빨리 달리면서 회전이 많이 하면서 도로를 타고 왔기 때문인 모른다.
"오늘부터 여러분은 자유롭게 2박 3일을 즐기세요. 아무도 간섭을 하지 않으며 술도 냉장고 많이 있습니다. 이상"
이상하다. 군대로 간 것이 아니라 임진강에 잠시 놀러온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왜 이런 혜택을 주는지 알 수가 없었다.
취사반에 갈 때 스리퍼를 찍찍 끌고 들어가서 술을 가져와도 기간병은 간섭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닭도리탕이 있다고 하면서 팔팔 끓여서 가져다 주기에 큰 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감사하게 잘먹겠습니다."
자유의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저녁 무렵에 짚차가 왔다. 우리는 다시 본부를 거쳐 다시 본부로 갔다. 두 번의 과정에 몸을 보았다. 영관급들이 나와 키와 운동을 할 수 있는 체격으로 적합한지 관찰당하고 있음을 짐작하였다.
"좋아요. 내일부터 집체 훈련을 시키고, 각 소속을 정하여 그곳으로 보내세요."
각자 군용 따블 빽을 입에 물라고 상병의 지시를 하였다. 선착순으로 저기 보이는 족구장을 돌아서 온다고 하면서 선착순이었다. 4명의 신병이라 꼴찌를 하면 4바퀴를 도는 것으로 일등을 하거나 꼴찌를 하거나 별 의미가 없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빨리 뛰지 않고 적당히 요령으로 뛰었으나 일등으로 들어오고 말았다.
"일등은 열외, 저기 호박돌 위에 머리를 박고 기다려"
죽었다. 나머지 세명은 족구장이 아닌 운동을 돌아서 오라고 하였다. 다음은 관망대로 정하면서 전우애는 완전히 깨지는 소리가 났다.
"여기서 딱딱한 돌에 머리를 박는 얼차례를 많이 받아 혹이 하나 더 생긴 것이지요. 요령이 있다면 호박돌에 머리를 박는 것보다 더 멀리 돌아서 달려서 오는 것이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