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회 김동명 문학상 수상작]
밤의 눈 외 4편
박주택
몰려가는 것들에게는 깃털이 있다
편두통을 앓는 저녁 속에 모두는 구원을 기다린다
금방 부화한 알처럼 따뜻한 구원을
독 잔을 들고 밤의 눈을 바라본다
아주 가느다란 잠의 눈을
과묵하게 우리로부터 멀어져가는 전선
흔적이 지워져가는 처음과도 같이
코드가 뽑힌 채 뿔을 세우고 있다
우리는 갈라진다 너와 내가 갈라지고 남과 북이 갈라지고
흑과 백이 갈라진다 낮과 밤이 갈라진다
코드가 뽑힌 전선은 바닥에 팽개쳐 있고
전선 속에 강은 은신처를 찾는다
말과 말이 섞여 바벨탑이 된 채 미친 듯이 날뛰는 동안
눈에는 파멸로 덮히는 깃털들
바로 저기 서로 서로 고삐를 틀어쥐 채 적의에 가득 차 있는데
끝도 시작도 없이 밤의 유골은 쌓여가는데
오롯이 수풀은 초록으로 두 눈을 비춘다
그때 알의 자취를 필사하는 새들
우리가 살던 세기에도 잠에도 꽃이 피고
꽃의 목청은 들에 울려 퍼지기 위해
스스로를 죽여 줄기차게 찬바람 속에 들어 있다
아주 가느다란 잠의 눈을
무엇을 일으키기 위해
곳곳마다 땅에 묻히는 자들을 위해
쉰 목청으로 숲은 초록으로
강은 흐르는 물결로
우리들 노래를 비춘다
수상소감
나의 것이 되도록 가지를 뻗는 밤
―박주택
김동명 문학상 4회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김동명 시인을 생각했습니다. 시인은 근대문학사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겼습니다. 신석정·김상용과 함께 전원시인이라는 칭호를 얻은 것은 장소의 기억을 통해 정체성의 뿌리를 들여다보는 본유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특히 그의 6권의 시집 중 파초(1938)는 감각과 정신이 대상에 집중하는 조응의 구체성을 보이며 형식의 완결미와 존재를 인식하는 집중적 태도를 보이고 있는 시집입니다. 이 시집에 실려 있는 「파초」·「수선화」·「내 마음은」은 우리들 모두가 애송하고 있는 시일뿐더러 자연적 소재를 통해 구조의 완결성을 확보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문학적 성과를 이룬 김동명 시인의 문학상을 수상하는 일은 그 어느 상보다도 뜻 깊은 일입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생각하는 요즈음 김동명 시인이 남북 분단의 비극과 전쟁의 상처를 끌어안으며 자유와 인권에 천착한 것 또한 시를 통해 현실과 존재의 문제를 각인시키고자 하는 문학적 충동에서 비롯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가 전부였던 시절, 청춘의 패덕과 음울이 시에 들어앉던 시절, 차라리 그때는 행복했습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때 나 스스로가 장소가 되고 내가 여기에 있다고 했을 때 여기는 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히로시마에 있습니다. 검은 구름이 솟아오르고 비척거리는 개 곁에 아우성만 들리고 있습니다. 이곳에서 기억이 되는 것은 이번 생을 향해 있는 뿔을 바라보는 일입니다.
편두통을 앓는 저녁 속에 우리는 구원을 기다리며 밤의 눈을 바라봅니다. 너와 나, 남과 북, 흑과 백, 낮과 밤이 갈라진 검은 빛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잠은 깜박이고 뿌리부터 핏줄인 몸은 나의 것이 되도록 가지를 뻗습니다.
다시 한 번 김동명 시인을 생각해 봅니다. 강릉과 함흥, 원산과 서울에서 올곧게 현실을 바라보며 진주만(1954), 목격자(1957) 등의 시집을 펴내며 고통 속에 이룬 웅숭 깊은 성취를 되새겨 봅니다.
부족한 시를 살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남아가는 것도 없이 단지 그림자뿐일 때 만질 수 없는 것만 남는 젖은 빛을 내려주셨습니다. 김동명 문학상을 제정하신 김동명선양사업회에도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리며 잠의 끝을 받아내겠습니다.
시인 약력
박주택
현재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
. 1986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
. 2000년 편운문학상
· 2004년 제5회 현대시 작품상
· 2004년 경희문학상
· 2005년 소월시문학상 대상
· 2010년 이형기문학상
· 2015년 한국시인협회상
. 시집 : 꿈의 이동건축(문학과지성사, 1991), 방랑은 얼마나 아픈 휴식인가(문학동네, 1996), 사막의 별 아래에서(세계사, 1999), 카프카와 만나는 잠의 노래(문학과지성사, 2004), 시간의 동공(문학과지성사, 2009), 또 하나의 지구가 필요할 때(문학과지성사, 2013), 일본 ‘思潮社’에서 ‘한국 현대 시인 시리즈 1’ 『時間の瞳孔』(원저; 박주택, 시간의 동공, 문학과지성사, 2009) 출간
· 연구·비평서 : 낙원회복의 꿈과 민족정서의 복원(시와시학사, 1999), 반성과 성찰(하늘연못, 2004), 현대시의 사유구조(민음사, 2012)
· 시선집 : 감촉(뿔,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