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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정 시인의 사모곡 (특집)`
통권 6호를 통하여 혜성 같이 등장한 예손 / 진은정 시인의 특집 코너다. 누군들 어머니의 사랑에 목말라 하지 않는 사람 있으랴 만은 15주년의 기일을 맞아 기억의 노마드가 되어 몽중 에서나 현실에서나 드리워진 살아 있는 영상 세계 속의 실루엣이 되어 있는 어머니다.
유년에서 성년에 이르기 까지 삶의 지표 가 되었던 것들 . 사모곡 은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는 어머니 사랑의 촛불을 점화 해준다. 시인의 감성에 살아있는 시심의 활화산이 되어 지길 기원 한다.
종합 문예지 덕향문학의 편집 원칙은 인성의 함양과 효행의 장려다. 패륜과 패역이 세상을 어지럽게 한다. 원고를 주신 진은정 시인에게 감사를 드린다. (편집자.주)
思母曲
예손/진은정
금년 2월 13일은 (고 최은순) 친정 어머니의 15주기 기일이다.
기일이라고 해도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바로 떠 오르지도 않는다.
그래도 실루엣이 되어 떠 오르는 어머니의 모습에 아득하게 지난일들을 생각해본다.
오빠는 부모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런데 88년도에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나시자 우리 6남매는 어머니가 먼길을 출입 하다가 행여나 병이 날까 봐 보고 싶으면 직접 찾아 뵙기로 약속을 정해 놓고 금요일 오후에는 오빠 집에 가서 함께 지내다가 각자 집으로 돌아 갔다.
2004년도에 큰딸이 결혼하고 연이어 둘째가 5년도에 결혼하고 아들마저 같은 해에 유학을 간 상황이라 조금은 마음의 여유가 있어 8남매 맏며느리와 3남매의 엄마로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 친정 부모님께 너무 무심하게 살아온 것 같아 오빠에게 간청하여 겨우 허락을 받고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 왔다.
나는 오랫만에 당신이 살아온 이야기도 듣고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며 어머니와 함께 지내는 동안은 모든 순간 순간이 감동이었다. 모녀간의 사랑을 확인해 보기도 했지만 내 유년과 소녀시절을 다시한번 돌아 보는 계기도 되었다.
아침 햇살처럼 반짝이는 내 눈빛과 어머니의 눈빛이 하나가 되어 마주 치며 지난 얘기를 하는 두 사람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다. 3남매가 모두 집을 비운 사이 텅비어 있던 마음과 집안이 행복감으로 가득했다.
어머니가 우리집에 2개월쯤 함께 있다가 1월의 쌀쌀한 날씨에 감기로 병원에 입원 하여 20여일 동안 치료 받고 몸이 회복 되어 금요일 날 회진한 주치의 는 다음 월요일에는 퇴원해도 좋다고 말을 했다. 나와 가족들은 안심을 하고 다시 우리 집으로 모셔 올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토요일은 기대감에 벅찬 마음으로 하루를 보냈다.
일요일은 6남매가 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리는데 나는 어머니와 함께 있었기 때문에 병실에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잦아 들었고 찬송가를 부를 때도 가끔 헛기침을 하며 혼신의 힘을 다해 겨우 기도를 드리고 예배를 마칠수 있었다. 예배를 드리고 난 후에 힘 없이 침상에 누워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가슴은 저리고 마음은 슬픔으로 가득찼다.
평소에도 항상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려 일어나실 때마다 벽을 붙잡고 일어나시며 낙타 무릎이 되도록 쉬지않고 기도 하는 어머니는 병원에서도 힘이 없어 링겔을 맞으면서 두 손을 모으고 나라와 민족, 교회와 선교사 그리고 당신의 자녀들의 장래를 위해 기도 드리고 나와 형제들에게 살아가면서 지키야 할 일들을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고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살아오면서 격랑의 역사가 소용돌이 칠때 격어야 했던 아픈 기억과 그 중심에 서서 일생 일대의 중요한 결단이 필요 했던 이야기도 들려 주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하여 36년동안 백성들을 압박하고 당원들은 마을에 들어와 사람을 죽이고 잡아가고 우리집에서 지은 볏알까지 세어서 착취해 가고 마을의 유지들과 부유한 사람들을 죽이려고 하자 아버지와 가족의 안위를 위하여 일꾼(머슴)으로 하여금 장작불을 피우게 하여 집안에 모아 놓았던 전 재산과 문서들이 들어있던 돈 괘 짝을 태우고 지폐로 벽지를 대신해서 도배를 하고 베겟잇속에 넣어 두었던 돈도 사용해 보지 못하고 휴지로 버리면서 오직 가족들의 평안을 위해 고통스럽게 살아온 이야기들을 들려주었다.
그리고 광복이 되어 겨우 안정을 찾고 살아가는데 1950년6월 25일 북한이 남침을 해서 큰아버지 두명이 행방불명이 되어 돌아오지않자 가슴앓이를 하며 몸져 누우신 친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며 6남매를 키우면서 가금들려주시던 지난일들이 주마등처럼 생각이 떠오르셧는지 소설책을 읽는것처럼 또렸하게 들려 주었다. 친할아버지 할머니는 두 아들을 잃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아들이 행여나 문전걸식하고 다닐까 봐 길가는 나그네 와 동냥아치들을 집으로 들여 반듯한 밥상을 차려 먹이고 입히고 쌀을 들려 보냈다고한다.
내가 어렸때 동생들하고 연초록 종이와 불그스럼한 종이에 에쁜 문양이 그려진 종이 돈 같은 것들 이 집안에 있었는데 내가 사용하는 돈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딱지를 접어서 두 동생하고 재미있게 놀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나이가 어려서
뭐가뭔지 잘 몰랐지만 지금까지 보관해 두고 인사동에 내놓았으면 화페 가치로 값이 꽤 나가는 귀한 보물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밤이나 낮이나 시시 때때로 녹음기 처럼 이어지는 어머니의 기도 제목은 나라에 충성. 부모에게 효도. 형제간에 우애. 그리고 이웃 사랑이었다. 아들 형선이는 외 할머니 기도는 녹음기를 틀어 놓은것 같다고 했다. 나도 어릴 때 부터 돌아가시기 전까지 들었고 .우리 3남매가 어릴 때부터 시작한 기도는 청년이 될 때 까지 들어서 익숙해서 하는 말이 라고 생각한다.
틈이 날때마다 집에 와서 아이들을 정성 껏 돌 봐 주시고 기도로 키워주셔서 할머니의 말씀에 순종하고 신앙생활을 본 받아서 잘 성장해 준 아이들 때문에 마음 상하는 일 없이 나도 잘지내고 있다.
당신이 가고 난 지금도 우리 가족 모두의 가슴에 살아 숨쉬고 있는 할머니의 부드러운 음성과 찬양소리가 귓전을 울린다.
나라없는 설움과 6.25동란을 격으면서 풍전등화 같은 나라에서 자식들을 키우고 살아온 어머니로서는 당연히 나라를 위한 기도가 첫번째 였을거라는 생각을 해 본다.
다정한 딸이 되어주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버지는 1988년 8월 28일 76세에 어머니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8남매의 맏며느리와 3남매를 기른다는 핑계로 친정 부모님 살아 생전에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명절에도 대 가족인 시댁 식구들과 지내다 보면 어느덧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친정 부모님을 찾아 뵐 수 없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후 다하지 못한 효의 무게는 나를 더 힘들게 하고 그리움은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또렸해 진다. .
살아계실때 따뜻한 옷 한벌 죽 한그릇 이라도 들고 가서 자주 찾아 뵈었어야 되는데 돌아 가신 후에 후회 해도 아무 소용이 없고 이제는 모두 지나가 버린 옛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나를 울린 편지한장-
둘째딸 수현이가 초등학교 2학년때 아침에 학교 가기전에 책가방에서 어버이날이라고 학교에서 써온 편지 한장을 나의 손에 쥐어 줘서 읽다가 대성통곡을 했다. 왜 외할머니는 우리집에 자주 오는데 외할아버지는 한번도 안오시냐고 씌여 있었다. 할머니는 손자 손주 들을 돌 봐 주려고 자주 왔고 외할아버지는 한번도 오지 않아서 이상하게 생각 했던 것 같다.
나는 그만 그만한 아이들 셋을 키우면서 분주해 아버지를 집에 모셔올 생각조차 할수 없던 시기였는데 어린 수현이가 그이유를 알수 있는 나이가 아니라 자기 생각과 마음을 솔직하게 쓴 편지였다. 아버지도 작은 딸을 보고 싶은 마음이 오죽 했었겠는가?.
나이가 들어도 돌아가신 부모님께 다하지 못한 불효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마음이 편하지 않았고 효를 공부하고 싶다는 마음은항상 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이들이 방학을 하면 효를 가르치는 교육시설에 데리고 가서 우리나라의 옛 풍습,예절 , 교육을 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내 자식들을 돌보아 주며 했던 일련의 삶과 언.행이 나를 서울에 머물게 하지 못했다.
직장 때문에 아산에 살고 있는 두 딸과 5명의 손자.손녀들의 건강도 염려가 되고 먹거리에도 마음이 쓰여 음식이라도 손수 해 먹이고 반듯하게 키워야 하겠다는 생각으로 서울에서 천안으로 이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적응하기가 매우 힘들었는데 몇년이 지난 지금은 조금씩 적응이 되어가고 있다.
그런데 2020년 5월 우연히 집을 나서다 충청 효.인성 교육원 플래카드를 보고 눈이 번쩍 뜨여 문을 두드리게 되었고 최기복 원장님을 만나 효.인성교육을 받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나를 두고 하는 것 같다.
최기복 교수님의 명강의 와 해박한 지식 교수님들의 강의 옛 효와 현대의 효를 비교하며 배우면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게되어 내 마음의 갈증은 조금 이나마 해소 되었다.
그리고 조금씩 멀어졌던 배움의 싹이 자라게 되어 무엇보다 기쁘게 생각한다. 배움의 나이를 초월한 효우들과 문우들을
만나 친교하며 서로 격려하는 가운데 아직도 부족하고 까마득하지만 조금씩 성장해 가는 내가 자랑스럽다.
우리나라가 살아나갈 희망은 오직 하나다.
동방 예의지국으로 다시 회귀 시켜 놓으려면 국가에서 교과 과목에 반드시 효와 인성교육을 기본교육으로 적시해 놓고 바로 가르쳐야 가정도 사회도 국가도 존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성장위주로 달려가던 국가의 질서는 인간성을 도외시했다.그러나 이제는 직장에서도 인성을 우선순위로 보고 사람을 채용하는 추세로 가는것 같아서 매우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추억
아버지가 살아 계실때 평소에는 말씀이 없고 과묵 하였지만 항상 나에게 가르쳐 준 것은 어머니에게 효도 하라고 하였다.
그 시절에는 부부간에 칭찬하는 것이 일반화 되지 않았지만 아버지는 정이 많은 분이었다.
어머니 같은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사람도 없다고 하면서 어머니 공경에 대한 또 하나의 사랑을 적시해 주었고 효도를 강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같이 착한 분이 없다고 말을 해 주었다. 지금은 고인이 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대단한 효자였다고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떠난 후에 아버지의 빈자리를 메워 주었고 홀로 6남매의 자녀들의 상담자요. 보금자리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하늘과 같이 우리들을 넓은 마음으로 품어 주셨으며 기둥이 되어 주었다.
어릴때 가정 교육도 엄하게 시켰다.
내가 어렸을때 한번은 화장실에 다녀오다가 무서워서 급히들어가다가 자고있는 큰오빠 머리 위로 넘어 갔다가 심하게 야단을 맞고 놀란일이 오랫동안 잊혀지질 않았다.
모태 신앙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와 신앙관도 분명했다. 일요일 날 교회에 입고 가서 예배드릴 옷은 당신의 옷부터 내옷 까지 토요일 날 오후가 되면 따로 구별해 주었고 예배 드릴 헌금 도 정성스럽게 다려 주던 어머니였다.
신앙인으로써 지켜야할 교육도 잊지 않았다.
십일조를 생활화 해라. 성미(聖米) 는 꼭 챙겨야 한다.
목사님 섬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라. 목사님은 아무리 나이가 연소해도 부모님처럼 섬기고 말씀에 순종해라.
부부란 무엇인가 ?
어머니가 병원에 있을때 아버지에 대한 꿈울 꾼 이야기도 했다. 소천 하기 며칠 전 너희 아버지가 천국 문앞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빨리 오라고 했다고 한다. 어머니는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된 것 같다고 하며 웃으셨다.
어머니를 일생을 조용히 생각해본다. 부모 곁을 떠나 결혼해서 자식을 낳아 기르고 온갖 고생을 하다가 사별이라는 아픔을 겪고 아버지의 빈자리를 외롭게 지키다가 다시 당신의 죽음 을 눈 앞에 두고 꿈을 꾼 얘기를 담담하게 이어가고 또다시 아버지 곁으로 가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당당하게 맞이하는 그 의연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당신이 섬기던 창조주에 대한 확실한 믿음과 가족에 대한 배려. 신앙의 힘이 아니면 나올 수 없는 어머니만의 굳은 신념이라고 생각한다. 평소에도 자식들 앞에서 자세 한번 흐트러지지 않고 책임을 다한 성실하고 강하고 담대한 때로는 고집스런 여전사와 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우리들의 본이되었던 훌륭한 어머니였다.
그리움을 푸념 하고 있는 나는 그녀에게 무엇인가?
그리움이 가득해서 전신으로 오열 하는 어설픈 이 딸은 퇴원을 하면 평생 저지른 불효를 청산해야 되겠다고 생각 하고 어머니와 함께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병실에서 보내며 돌아가신 후에 더 이상 후회하지 않도록 잘 해드려야 되겠다는 다짐도 여러번 반복 했었는데...
나도 더 늦기 전에 어머니를 잠간 동안 이라도 모시고 싶다고 오빠에게 겨우 허락을 받고 우리 집에 모셔왔는데
어머니가 감기로 아파서 힘들어 하자 오빠는 여러 번 우리 집에 찾아 와 어머니를 모셔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거절을 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보내 드릴 수가 없어 가족이 합의 하고 집 가까운 병원으로 입원을 시켜 드렸다.
준비되지 않은 이별
퇴원을 하루 앞에 두고 주일날 오후에 작은 오빠 부부하고 큰딸 수정이가 예배를 마치고 병원에 와서 함께 찬양도 부르고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갑자기 나를 부르더니 손을 좀 씻고 싶다고 했다 아무 영문을 모르던 우리는 병원 발코니로 함께 나가 의자에 앉게 한 후 대야에 물을 떠드렸다. 그런데 아파서 힘이 없던 어머니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가 나도록 정갈하게 손을 씻었다.
나는 어머니의 발도 씻겨 주고 싶어서 깨끗하게 닦아드렸다.
잠간앉아서 쉬다가 병실로 들어오는 도중에 간호사를 만났다. 어머니는 한 손에는 링겔를 맞고 있었는데 한손으로 힘없이 고맙다는 손 인사를 했다. 평소에는 볼수 없었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젊은날 그 당당했던 모습은 사라지고 어머니의 작아진 모습이 내눈에는 처연하게만 느껴졌다.
우리는 병실로 들어와 병상에 걸터 앉아 어머니의 손을 잡고 앉아서 안마도 해드리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간호사 에게 연락을 취하자 .
임종이었다 . 어머니는 숨이 멎어 들어 가는 그 순간에도 오빠에게 그동안 해 왔던 유언을 반복 하고 있었다.
진료하던 담당 주치의 의 갑작스런 임종 선언은 우리 모두에게 청천벽력이었다.
한 순간에 내 품에 안겨 있던 어머니는 무너져 내렸다 .
2005.2.13.일 일요일 오후 20시 30분 당신이 사모하던 천국 하나님의 품으로 불리워져 돌아간 것이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우리는 망연자실 할 수 밖에 없었다.
월요일 날 퇴원해도 된다는 기대는 한 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짧은 순간에 우리는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상황에서 손쓸 틈조차 없이 평소 잠이 드는 모습으로 그렇게 보내드려야 했다.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오빠는 여러번 모시고 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몸이 아픈 어머니를 보내 드릴수가 없어서 보내드리지 않았는데 내가 잘못 모신것은 아닌가?
슬픔 외에 아무 준비도 없이 우리는 어머니와 헤어져야 했고 모두를 기억의 회로 속에 칭칭 감아 놓은체 편안한 표정으로 아버지 곁으로 떠났다.
조용히 생을 마무리 한 어머니
나는 삶도 죽음도 어머니답다는 생각에 사로 잡힌다 . 삶은 현실이다 . 어머니의 삶을 조망 하면서 나는 어머니처럼 살아낼 자신이 없다 . 나의 남은 삶이 점점 두려워 진다.
평소에 자식들이 어머니를 찾아 뵙고 귀가 하는 시간이면 언제나 마당 끝 귀퉁이에 두 손을 모으고 서서 자동차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기도 드리던 어머니, 우리가 뒤를 돌아 보면 어서 가라고 손사래를 흔드시던 어머니 마음과 마음이 나뉘어지고 삶이 나뉘어져 그냥 남겨 두고 내 집으로 돌아 와야 했던 나 지금도 오빠네 집에 가면 어머니가 서서 손을 흔들어 주던 그 자리에 내가 서서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우리의 가슴과 시야에는 아직 도 어머니가 실루엣이 되어 사라지지 않고 있다.
젊은 날 의 어머니는 훤칠한 키에 타고난 미모가 대단했다. 솜씨도 아주 좋아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척척해내는 어머니였다.
대가 집 막내딸로 태어났고 세련미와 여자로서의 겸양도 모두 갖춘 재원이었다. 83세가 되도록 화장기 없이 살아도 아주 우아하고 예쁜 어머니였다.
어머니가 손수 준비한 옷감을 가위질하여 재봉틀로 만들어 준 쟈켓 을 입으면 천하가 다 나를 부러워 한다는 착각을 갖게 했고 예쁜 꽃무늬 원피스를 만들어 줘서 입고 나가면 나는 하늘을 나는 선녀가 된 기분 이었다.
아버지를 먼저 보내고 혼자 외로웠을 때도 내 자식들 키우기가 분주해서 그 마음을 다 헤아려 주지 못했다. 살아계실 때 잘 섬기지 못한 것이 이렇게 아쉽고 가슴 아프고 괴로울 줄 몰랐다. 돌이켜 생각해 보니 받을 줄만 알았던 사랑이 되돌려 지지 못하고 핑계의 무덤을 높여온 내가 너무 부끄럽고 죄송 한 마음 뿐이다.
벌써 헤어진 세월이 15년이 되었다.
성년이 되어 결혼하고 8남매의 맏며느리가 되어 집안 일로 힘겨워 할때 우리 집에 오면 노심초사 딸의 일거리를 찾아 밤잠을 설치던 어머니. 때로 촌철살인 하는 재담과 방담으로 자식들을 웃게 하던 어머니. 가난한 이웃들에게 마음 상하지 않도록 표정을 살피고 옷과 쌀을 나누어 주던 이야기. 젊었을 때 화장품을 샀는데 큰언니가 친할머니 방에 갖다 줘서 당황했던 얘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밤새워 가며 나누던 그 얘기들 ...
당신께서 그토록 애지중지 하면서 사랑으로 키워준 3남매
수정. 수현. 형선이가 잘 자라서 성가를 해 손자 손녀 6명을 내 품에 안겨 주었고 그 아이 들이 자라서 금년에 성진. 예영 경진이 민영이가 중3,중2,중1 .초등학교3학년이 되었고 찬진이와 다온이는 유치원에 입학을 했어요.
어머니!
당신이 가신 후 시간은 화살처럼 빨리 지났어도 그리움은 산처럼 커지고 외로움은 바다처럼 넘실거려요.
어느덧 당신의 딸 은정이도 당신을 닮아서 하얀 머리가 났어요
계절이 바뀌고 명절이 돌아오면 정성들여 맛있는 음식을 준비해 한상 차려놓고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먹으면 그 모습을 보고
행복해 하던 당신의 모습 웃으시던 그 얼굴이 몹시도 그립습니다.
설빔을 준비해 손수 입혀 주며 환하게 웃던 당신의 따스했던 미소와 손길이 못 견디게 그립습니다. 엊그제 설날에는 자식들과 손자 손녀들의 세배를 받으며 저는 세배 드릴 당신이 없다는 생각에 먼 산을 바라보고 울컥 하였습니다.
신록은 시간이 갈수록 연초록에서 진초록으로 옷을 갈아 입고 당신의 딸 은정이는 머리가 하얗게 되어갑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당신 생각에 몸살을 더 앓아야 되겠네요.
.
당신이 나를 대신 해서 돌봐 주던 3남매가 결혼해서 또 자식을 6명을 낳아 제품에 안겨주었어요. 저는 손주 손녀6명을둔 할머니가 되어서 그들이 자라서 제 손을 잡고 할머니! 할머니 하면서 쫑알 대고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당신의 새끼들이기도 합니다.
어느새 저도 의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답니다. 당신이 나에게 한것 처럼 저도 당신의 그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답니다 .
어머니!
세상과의 인연이 두렵고 고단한 여정의 일상이 어렵고 사람 노릇하며 살기가 어렵고 힘이 들수록 또렸하게 보이는 당신의 모습 포근했던 하얀 젖무덤의 향수와 그리고 부드럽고 포근하게 감싸주며 등 두들겨 주던 부드러운 손길과 그 몸 냄새가 너무 그립습니다.
나는 당신에게 무엇이며 당신에게 나는 무엇인가요?
나이 70을 눈 앞에 두고 당신의 그 깊고 넓은 사랑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아요.
당신은 떠났어도 그 사랑과 가르침은 그리고 함께 있던 추억은 저와 영원히 함께 하며 저의 삶을 인도하고 길을 비춰주고 있어요.
당신은 당신을 위해 그 무엇하나 남기지 않고 온전히 나와 자식들을 위해 베풀어 주셨어요. 큰 사랑 앞에 사랑한다는 말은 감히 드릴 수 없고 다만 엎드려 용서 를 구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 다음에 천국에 가서 다시 뵙겠습니다.
20212.2.13.일
어머니 15주기를 신의 둘째 딸 은정이가 글을 올립니다.
1. 빈 소라 껍데기
예손/진은정
어머니는 빈 소라 껍데기
나는 작은 새끼 게
속 살은 나 에게
모두 내어 주고
속은 텅 비어 있다
밀물이 속을 채워 주면
그 품에 들어가 산다.
소라 껍데기 는
거센 바람 에는 풍 벽이 되고
달빛 밝은 날 에는 유람 선이 된다.
물색 모르는
새끼 게
파도가 밀려 오면
춤을 추고
.
바람 이 불면
노래 를 부른다.
썰물이 오면
탈출을 시도 해 본다.
사랑은 희생이 아니란다.
함께 하며 지켜 주는 것이란다.
해풍에 실려 오는
어머니의 노래
소라 껍데기가
활짝 웃고 있다.
1990.년 8월 어느 날 부안 변산 반도 가족 휴가 중에
2. 그리운 어머니
예손 /진은정
초췌한 그림자 하나
주변을 떠나지 않는다.
하늘색 변하고
땅이 진동하는 기도소리
틀을 벗어날 수 없는 별 하나
칠흑의 어둠을 밝히고
생애의 길을 밝힌다.
당신의 길
걸어가야 할 내길
그리움은 그리워 할 수 록
그리워지고
기쁨은 나누어 줄수록
더 커진다.
인연의 벽에
사라진 그림자
당신은 하늘에
나는 땅위에
어눌한 손짓에
하얗게 웃는 모습
결코 나를 떠나지 못하는
여윈 세월의 천륜
아! 어머니
3. 동장군
예손/진은정
한파 가 계급장 을 단다
계급장 에는 별이 달려 있다
별이 나타 나면 오그라 드는 삭신
별이 달고 싶어 하늘 만
바라 보는 사람 도 있는데
봄 햇살이 창에 비취면
소리 없이 사라질 줄 아는 장군
밤 하늘에 길을 밝혀 주는 별도
나라 잃은 설움에 눈물 닦아 주는 별도
손자 녀석 크리스마스 트리에 달려 있는
반짝 이는 별도 별 인데
계급장이 없이 불리 우는 얼굴 없는 장군
겨울 이면 어김 없이 온다
소리 없이 오고
조용히 가는 장군이다.
4.아침 이슬
예손/진은정
꽃잎 위에
앉은 작은 생명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난
나를 보고 웃는
너의 눈빛이 영롱하다.
동녘에
해가 뜨면
사라지고
해가 지면
꽃잎 위에 앉아
새벽을 기다리는 너
돌아갈 고향도
집도 모르고
하늘 위에
구름 되어
떠 다니는 너
해가 뜨면 사라지고
해가 지면 나타나는
아침 이슬
너의 작은 생명 이
나의 또 하루를
꿈꾸게 한다.
5. 갈대의 사랑
예손/진은정
하늘 거리는
바람의 노래에
나는 꺾이지 않는다.
이루지 못한 사랑
상처 난 갈대
뿌리는 깊어지고
잎은 하늘을 향해
춤을 춘다
바람은 멈추지 않아도
갈대는 꺾이지 않는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하여
바람의 유혹은 끝이 없어도
부러지지 않는 갈대
늪지의 숨결이
턱에 닿아도
하늘을 보고
그 자리에 서 있다
나의 사랑은
해가 질 때 까지
바람이 멈출 때 까지
사랑은 함께 있는 거란다.
6.용광로
예손 /진은정
이별은 필연이고
사랑은 절연이다
타오르는 목 마름
불 꽃은 잦아 들고
열기 는 폭발 한다.
불 꽃 속에 던져 진
녹 슬은 쇠 막대기
너의 삶의 한계
무너 진 전설이다
만날 때 저린 가슴
이별의 아픈 가슴
용광로 불꽃 속에
타고 있는 거짓과 위선
재물도 명예도 타고
오직 사랑 만 남는다.
타고 남은 재
그 마져도 부질 없는
시간 속의 채무
삶의 여정 속에
언젠가는 찾아오는 이별
이것이
너와 나의 인생이다
활활 타 오르다
저 하늘에서 불리우는 날
홀연히 떠나리라.
용광로 속의 타오르는
불빛이 처연 하다.
어머니의 배려
예손/진은정
사립문 꼭 닫지 마라.
길 가는 나그네
목이라도 축여야지
샘물 없는 동네란다.
바람이 휘 젖는 동네 어귀에 서서
추위에 떨고 있는 문 앞 손님
바람 막아 주시던
어머니 !
문전 박대 받아
다시 갈 곳 없어 지면
언제든지 다시 오라고
남은 밥 비닐 봉지에 담아 주시던
님은 가고 없어도
사립문 문살 위에
햇살 처럼
어른 대는 어머니 얼굴
8. 에필로그 (믿음의 발자취)
주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 하면서
할렐~ 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험악하여도
나 주님 만 따라 가리
나도 그 길 따라 가리....
덕향 문학회 발행인 최기복 대표님과 덕향문학회 문우님들께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저의 개인적인 일상을 마음속에 담아 놓았는데 덕향 문학8호를 통하여
저의 못다 한 한을 너스레 처럼 풀어 보았습니다. 생전의 불효가 사후에 까지 한으로 남는 일이 없도록 주변과 독자에게 울림이 되라는 취지 가 아니겠습니까. 짭은 생애 생명윤리가 도덕적 승화를 통한 조명이 되어야 겠지요. 그렇치 못한 저변의 이야기들이 우리의 이맛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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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노고가 크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