빡쫑히와 정인숙 그리고 워싱톤 한인회장 노진환
년도별/픽션 이야기 911
2017-09-05 11:52:59
▶ ‘이제는 말할수 있다’…안홍균의 ‘코리아 게이트’증언 3
본보는 코리아 게이트에 관한 안홍균 씨의 증언을 기획 시리즈로 연재한다. 안 씨는 이번 증언을 통해 코리아 게이트를 둘러싼 한미 간의 숨막혔던 긴장과 갈등의 역사적 시간들을 재구성할 예정이다. 또 그가 가까이에서 지켜본 박동선, 김형욱, 김한조와 김상근, 손호영 등 코리아 게이트의 주역에 관한 숨은 스토리와 에피소드들도 소개한다.
노진환의 삼선개헌 지지광고
미 당국은 통일교와 한국 중앙정보부의 유착관계에 주목했다. 또 수지 박을 KCIA가 미 의회에 위장 침투시킨 여인으로 의심하고 있었다.
한미관계의 악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번에는 박종규 청와대 경호실장이 주역이었다. 그리고 워싱턴한인회장 출신으로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던 노진환과 닉슨 대통령의 백악관 특별보좌관이던 존 E. 니데커(Nidecker)가 조연을 맡았다.
사건은 노진환(魯璡煥)의 원맨쇼로 시작됐다. 1928년 전남 영광군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성장한 노진환은 1968년부터 ‘워싱톤재류한인회’(현 워싱턴한인연합회) 회장을 지낸 인물이다.
그는 출세욕이 강한 사람이었다. 한인회장을 하게 된 유일한 이유도 그것을 발판으로 한국의 정계에 진출하고자 하는 속셈으로 보였다.
1969년 워싱턴 한인사회는 깜짝 놀랐다. 서울의 한국, 동아, 조선일보 등 여러 신문에 ‘호소문, 박정희 대통령 7.25 성명을 지지하면서’란 광고가 실린 것이다. 광고를 낸 주인공은 바로 ‘재미 워싱톤 교포회장 노진환’이었다.
당시 한인사회는 3선 개헌 반대시위로 뜨거울 때였다. 그런 와중에 느닷없는 노진환의 3선 개헌 지지 광고에 한인들은 격분했다.
노진환이 한국의 신문에 낸 호소문.
노진환의 샌프란시스코 1인 시위
노진환의 친정부 행보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69년 8월 박정희 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닉슨 미 대통령과 회담을 할 때다. 박 대통령이 머물던 호텔 앞에 노가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팻말을 들고 개헌 지지 1인 시위를 벌였다. 교포사회를 대표한 것처럼 워싱턴 한인회장이 친정부 시위를 한 것이다.
그 장면을 박종규 경호실장이 목격하고 노진환을 불렀다.
“당신 뭐하는 사람인데 혼자 시위를 하느냐?”
“저는 워싱턴 교포회장으로 홀리데이 인 호텔 미국 총 지배인을 하고 있으며~.”
물론 노진환이 워싱턴 지역에서 홀리데이 인 호텔 매니저를 한 것은 맞지만 한 호텔이었지 전국 지배인은 아니었다.
65년 내가 워싱턴 유학생회 회장을 할 때다. 8.15 광복절 경축행사를 노진환이 매니저로 있던 홀리데이 인 호텔에서 한 적이 있다. 이 행사에는 김현철 주미대사는 물론 6.25전쟁을 겪은 무초 전 주한 초대 미 대사, 그리고 미국인들과 유학생, 교포들이 참석했었다. 그런 인연으로 그를 알고 있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워싱턴에 머물다 귀국해 살해당한 정인숙.
그의 과장된 자기 선전을 박종규는 귀가 솔깃해 들었다. 박종규에게 노는 미국에서 크게 성공한 대단한 인물로 비쳐졌을 것이다. 더군다나 재미교포들이 반정부 시위를 벌이는 가운데 워싱턴의 한인회장이 샌프란시스코 호텔 앞에 나타나 지지 시위를 벌이니 대견스러웠을 것이다.
박종규는 경호실 자금을 그에게 주며 대미 로비 역할을 비밀스럽게 맡겼다. 그렇게 노진환은 박 정권의 권력 실세이던 박종규와 줄이 닿았다.
그러나 한인들은 노진환을 용서하지 않았다. 8월30일 한인회 임시총회가 소집돼 호소문 게재 경위를 조사하고 노에 대한 불신임안을 결의했다. 노는 한인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었다.
그 무렵 우연히 DC의 어느 백화점에서 노를 만났다. 저 멀리서 노진환이 어떤 여자와 함께 있는 게 보였다. 노에 대한 평판이 워낙 나빠 인사를 하기 싫어 못 본 체 했다. 그런데 그 옆의 여인이 눈길을 끌었다. 대단한 미인이었다.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다 있나” 할 정도도 발군의 미녀였다. 난 속으로 생각했다.
“노진환이처럼 별로인 위인이 어떻게 저처럼 예쁜 여자를 데리고 다니지?”
얼마 뒤 신문에서 그녀의 사진을 봤다. 마포 강변에서 죽은 정인숙이었다. 세상을 놀라게 한 그 여인이 백화점의 그 여자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정인숙은 노진환이 69년 10월경 워싱턴에서 잠시 데리고 있었다. 정인숙은 뉴욕으로 간 후 한국에 들어갔다 변을 당했다.
백악관 조찬기도회와 니데커 특보
얼마 후 노진환은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대하던 권력의 세계로 다가간 것이다. 노는 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 민주공화당 전국구 29번으로 출마했으나 당선권 밖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72년 1월 황종률 의원이 사망하면서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했다.
73년에는 유신정우회(유정회) 국회의원으로 발탁됐고 76년 다시 유정회 의원이 되면서 출세가도를 달렸다. 그의 든든한 배경은 박종규 실장이었다.
당시로서는 드문 워싱턴 출신인데다 영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은 국회의원 노진환의 또 다른 힘이 되었다. 기독교도 그는 정치적으로 이용했다.
백악관 조찬기도회가 열렸다. 노와 여러 한국 국회의원들이 워싱턴을 방문해 이 기도회에 참석했다. 노진환은 이 행사에서 닉슨 대통령의 특별보좌관이던 니데커를 만났다. 그는 69년 5월부터 백악관에서 의회 연락과 학생들이나 종교단체와 관련된 연락 및 재정지원을 담당했으며 조찬기도회도 맡고 있던 인물이었다.
노는 이 백악관 참모를 만나 천부적인 사교술을 발휘했다. 니데커의 환심을 산 그는 한국에서 열리는 조찬기도회에 그를 초청했다.
박종규가 준 봉투
1974년 4월 29일 니데커와 백악관 고문 목사인 클립턴 로빈슨 목사 등은 한국을 찾았다. 백악관 특보를 맞은 한국은 대통령 급에 준하는 예우를 하며 그를 환대했다. 호화스런 호텔이 제공되고 박종규의 경호실 요원들이 그를 모시고 다녔다.
박종규의 주선으로 박 대통령도 면담했다. 박 실장은 자신의 사무실에서 니데커에게 감사패를 증정했다. 거기에는 ‘대통령 경호실 고문’이라 적혀 있었다. 백악관 참모가 졸지에 한국 대통령 경호실 고문이 된 것이다.
안내는 노의 몫이었다. 그는 니데커가 머문 호텔 스위트룸 바로 옆에 묵었다.
니데커가 귀국할 때였다. 노진환이 그를 청와대로 데려 갔다. 박 대통령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가자는 것이었다. 청와대에 박 대통령은 없었다. 박종규와 골프를 치러 나간 것이었다.
공항으로 가려는 그에게 박종규의 부하가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는 박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그는 김포공항으로 가는 차 안에서 뭔가 싶어 봉투를 살짝 뜯어보았다.
현금이 보이자 그는 깜짝 놀라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주한 미 대사관 직원에게 봉투를 전해주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봉투 안에는 1만 달러의 현금이 들어 있었다.
백악관 참모를 한국에 데려오면서 노진환의 주가는 올라갔다.
노진환의 은밀한 제안
한참 후 노진환은 다시 워싱턴을 찾았다. 백악관을 방문해 니데커를 만난 그는 은밀하면서도 특별한 제안을 했다.
“당신들 연방의원 선거 치르는데 한국에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하원의원 출마자에게는 3천-5천 달러, 상원의원에는 1만-3만 달러를 제공하겠습니다. 그러니 어떤 사람에게 주면 좋을지 추천을 해주세요.”
노진환의 은밀한 제안에 니데커는 귀를 의심했다.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에서 온 국회의원이 미국 선거에 돈을 대겠다는 것이었다. 그것도 백악관에 와서 말이다.
“아닙니다. 필요 없습니다. 그것은 불법입니다.”
요즘과 달리 당시에는 외국인도 선거자금을 제공할 수 있었다. 다만 외국 정부의 자금은 불법이었다. 나중에 박동선도 미 의원들에 준 자금을 한국 정부가 아닌 개인 자격으로 제공한 것이라고 말해 빠져나갈 수 있었다.
니데커는 단박에 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 노진환을 밖으로 쫓아냈다.
내 후임이던 박종규와의 인연
몇 년 후 미국 신문에 폭로기사가 실렸다. 한국 정부가 미 의원 선거에까지 개입하려 했다는 사실에 미국민은 다시 큰 충격을 받았다. 한국의 불법적 행태에 대한 보도들이 연일 미 신문을 장식했다. 한국의 이미지는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박종규는 워싱턴 포스트에 반박문을 기고했다.
“니데커가 나를 만나자고 해서 잠깐 만난 것 밖에는 없다. 돈을 준 적도 없다.”
박은 니데커와의 만남이 별 것 아니었다는 식으로 자신의 관련설을 부인했다.
니데커는 78년 6월1일 프레이저 청문회에 출석해 당시 상황을 증언했다.
박종규는 사실 나의 군 동료였다. 유재흥 장군이 육군참모차장으로 있을 때 내가 부관을 3년간 지낸 적이 있다. 당시 박종규 소령은 유 장군 집무실을 자주 드나들었다. 게다가 내 후임으로 박종규가 부임했다. 그는 괄괄하고 단순한 성격이었지만 나와 친하게 지냈다. 그는 내가 미국으로 유학 올 때 유일하게 송별연을 열어주기도 했다.
5.16 당시 박종규(왼쪽)와 박정희.
육영수 여사 저격사건으로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후 박종규가 워싱턴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워싱턴 근교인 알링턴의 한 호텔로 그를 만나러 갔다. 그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옆에 낯익은 인물이 서 있었다. 바로 권력을 향해 불나방처럼 달려들었던 노진환이었다. 국회의원이었던 그는 마치 박종규의 부관처럼 앉지도 못하고 옆에 시립해 있었다.
나는 그를 무시했다. 그가 워싱턴을 다녀간 후 코리아 게이트가 연일 미 신문을 장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