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교의 오후』
『그리스도교의 오후』를 지은 토마시 할리크는
공산정권 치하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심리치료사로 일하면서 비밀리에 사제서품을 받고
지하교회에서 활동했던 특이한 이력을 갖고 있다.
사목자로서 활동했던 풍부한 경험은
심리학과 사회학, 철학 및 신학에 두루 밝은 저자의 깊은 안목과 어우러져
현대 사회 문화와 그리스도교에 대해 독특하면서도 보편성 있는 해석을 보여 준다.
저자는 인생의 흐름을 하루의 흐름에 비유한 카를 융의 표현을 빌려서 책 제목에 ‘오후’라는 단어를 넣었다.
그리스도교 역사의 시작부터 근대의 문턱까지,
곧 제도적·교의적 구조를 세워 온 기나긴 시기를 ‘오전’으로 이해하고,
이어서 이런 구조를 뒤흔든 ‘정오의 위기’가 찾아왔다고 상정하며,
오늘날 우리는 그리스도교의 ‘오후’로 넘어가는 문턱에 서 있다는 확신에서 이야기를 전개한다.
이 과정에서 저자가 토로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있었던 교회와
신학에 대한 진단 및 뼈아픈 성찰과 통렬한 비판은 많은 경우 한국교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저자에 따르면, “무르익은 시기, 성숙한 나이인 인생의 오후에는 인생의 오전과는 다른 더 중요한 과제가 있다.
바로 영혼의 여로, 깊은 곳으로 내려가는 길이다.
인생의 오후는 카이로스, 즉 정신적·영성적 삶이 펼쳐져 나갈 적기이며,
평생에 걸친 성숙의 과정을 완성할 기회이다.”라고 전한다.
오후에 성숙하고 깊어지는 삶처럼 교회도 그럴 수 있는 채비를 갖추어야 하고,
전통 형이상학과 전통적 의미의 선교가 종말을 맞은 이 시기에는 자기 비움의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역사에서도 ‘잘못된 노화’가 이뤄질 위험이 있으니,
개혁의 시기를 놓치거나 심지어 정오의 위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려고 한다면,
불임의 닳아빠진 그리스도교의 형태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한다.
『그리스도교의 오후』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인은 물론 무신론자나 비종교인이나 성소수자에게도
말을 걸 수 있는 보편적 그리스도에 대한 탐색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탐색에서 저자는 종교, 문화 및 사회 변화에 대한 신학적·사회학적 해석학인 ‘카이롤로지’ 를
중요한 방법론으로 사용했다.
보편적 그리스도 (교)를 지향하는 저자의 해석학은,
좁은 의미의 그리스도교적 관점을 넘어서 ‘인류’의 관점에서 그리스도 (교)의 미래를 그리고 있다.
저자는 묻는다.
“오후의 사명은 무엇인가?
인간 개인 삶의 오후, 인류 역사의 오후, 그리스도교의 오후, 신앙의 역사에서 오후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 시대의 수많은 위기 속에서 확연히 뒤흔들리고 있는 그 오랜 역사적 확실성의 위기,
정오의 위기에서 무엇이 사멸해야 할까?
그 오후에서 우리는 무엇으로 성숙해야 하고, 성취하여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자기초월적 그리스도교 안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으리라는 바람을 내비치면서
저자는 종말론적 희망 속에서 글을 마무리한다.
“새로운 하루는 저녁에 시작된다.
저녁 하늘에 첫 별이 뜨는 순간을 놓치지 말자.”
꼭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어쩌면 무신론자나 비 종교인에게도,
성숙한 삶을 찾고 삶의 의미를 묻는다면, 『그리스도교의 오후』가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연중 제11주일 주보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