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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부곡(思父哭)
정경숙
“경숙아! 저녁 먹고 가라.”
“아버지 저 바빠서 지금 가야 해요. 죄송해요. 고기는 엄마랑 두 분께서 드세요.”
그것이 아버지와의 마지막 식사라는 것을 그땐 왜 느끼지 못했을까? 지금 와서 생각하면 아버지가 담고 있는 의미 있는 저녁 식사 자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지금 그 시간으로 돌아간다면 배가 불러 소화제를 먹는다 해도 아버지와의 함께 저녁 식사를 할 텐데...
지난 시간 강사님의 강의를 수강하며 강사님이 아버지에 대해 말씀하시고 강의하는 것을 들으며 내 가슴속에 항상 아버지께 못다 한 죄송함이 뇌리를 스치며 지나갔다.
가난한 5남매의 둘째로 태어난 나는 위로는 오빠 밑으로는 여동생 한 명과 남동생 둘, 지금은 덜하지만 나의 어린 시절은 장남이 잘되어야 그 집안이 잘 된다고 아들에게 기대가 크던 시절이었다. 그 기대에 부응하듯 오빠는 고향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알 정도로 공부도 잘하고 무엇이든 본인이 하고자 하면 하는 성격이었다. 아무리 내가 공부를 잘한다 한들 그런 오빠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오빠는 엄마의 기대치가 되었고 나는 동생들을 돌봐야만 했다.
오빠는 대학교 나는 고등학교에 가야 하는 시기가 겹치며 나는 울며 고등학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을 때 아버지는 술을 드시고 와서 나를 계속해서 부르셨다. 처음에는 “네”라고 대답하고 가면 “아니다, 가서 공부해라” 항상 술만 드시면 하시는 말씀 “공부해라, 나의 것이 아닌 남의 것은 아무것도 손대지 마라” 반복적으로 말씀하시는 말씀을 하며 손을 저어 보이시다가도 다시 반복적으로 부르면 내 대답도 “네” 에서 “왜~유”로 바꿔가며 짜증을 내었다. 그런데 그날은 아버지의 목소리가 달랐다.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아버지 본인 자신을 자책하시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안쓰러워서 그런지 자꾸만 내 이름과 얼굴도 모르는 할아버지를 찾으시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아버지가 3살 때 돌아가셨다-
나는 그런 아버지의 인생에 비하면 복 받은 인생이라 생각하면서도 왜 우리 집은 다른 집에 비해 어려울까?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들 남들보다 더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시는데도 가난에 굴레에서는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렇게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었고 1년 동안 열심히 일해 오빠 등록금과 가정에 생활비로 모두 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교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내 가슴 한쪽에 있는 나의 꿈을 버릴 수가 없어 매일매일 고민과 번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께 학교 이야기를 하고 가고 싶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나의 의지를 막지 못했고 중학교 때 성적으로 고등학교 입학 당시 3년 장학생으로 당당하게 고등학교를 입학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학비는 장학금으로 해결이 되었지만 우리 집은 오빠의 대학 학비와 4남매의 학비로 매일매일 열심히 일하시는 부모님의 노력에도 돈에 노예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매일 힘든 일로 지치신 부모님을 바라보는 나로서는 가슴이 더욱 아려왔다. 그냥 취업전선에서 일해 가족에 도움이 되어줄 걸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 꿈을 포기하지 못하고 대학 입시 시험을 보려고 할 때 엄마는 반대하시며 입시 시험에 치를 돈을 주지 않아 등교하지 않고 울고 있는 나에게 아버지는 다가와 얼마면 되는지 물어보고 아버지 주머니에서 몇 번을 접어 넣어 꼬깃꼬깃해진 돈을 펼쳐 주시며 빨리 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그 돈을 받아 들고 버스 정류장까지 가면 얼마나 울었는지 친구들 앞에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렇게 대입 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대학은 정말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생하시는 부모님 그리고 동생들 더 이상 내 꿈을 내 세우며 부모님을 힘들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내 꿈을 접고 사회생활을 하며 받은 돈은 부모님께 다 보내야만 했고 지금을 동반자를 만나 결혼을 하게 될 때 아버지는 예식장에서 신부를 보내야 할 타임에 내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으셨고 결혼식을 끝내고 한없이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전화하면 “여보~슈. 응 경숙이냐” 하시던 아버지.
나는 아버지의 품을 떠나 그렇게 한 사람의 아내로 두 아이의 엄마로 살아오며 부모님과 같은 인생을 살아가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동반자를 만나 생활고에 걱정하면서도 내 꿈을 버리지 못하고 아이들이 본인 스스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기에 공부를 시작했고 지금에 어린이집을 인수받았을 때 너무나 기뻐하시던 부모님! 술을 드시지 않으면 표현을 하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고생했다 하며 웃으시던 모습이 아련히 떠오른다.
그렇게 자식들이 하나둘 자리를 잡아 오빠는 교직에 장으로 동생들은 공직자 외 도장을 운영하고 개인에 능력을 살려 각자 자리에서 자리를 잡아갈 즈음 아버지의 인생에 가장 어렵고 힘든 역경의 시기가 왔다.
그것은 대장암 3기에서 4기로 넘어가는 시기로 진단을 받았다. 진단을 받을 시기 길어야 6개월로 의사 선생님은 말씀하셨고 가족들은 수술하지 않으시겠다는 아버지를 설득해 천안에 있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다. 수술을 받고 나오신 아버지의 모습은 내가 그동안 알았던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었고 항암 치료를 받으실 때는 환각 증상으로 엄마와 주변에 사람들을 힘들게 하는 모습을 보며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시지 않고 깔끔하게 -본인에 옷은 항상 손수 빨아서 입었다- 살아오시던 아버지의 일상생활을 모두 망가지게 하였다.
항암 치료를 받기 위해서 매번 내가 모시고 가야 했고 보통 시골에서 올라오시면 1주일씩 집에 계셔야 하는 날이 많았다. 그때마다 식사 준비가 어려워 외식을 하게 되는 날이 있었는데 고기를 좋아하시는 아버지는 곤드레 정식을 드시고 하시는 말씀이 “고기가 없어 맛이 없네.”라고 말씀하시며 나오시는 모습을 보며 한참을 웃었다. 80살까지만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시던 아버지, 약을 드실 시간은 1분도 어긋남 없이 드시던 아버지가 마지막 돌아가시기 전 소파에 앉아 약이 줄어든 것을 보시고 손바닥 위에 약을 한참을 세고 또 수량을 확인하는 모습이었다.
다음날 시골집에 모셔다 드리는 중간에 마트를 들려 시장을 보려 할 때 차 안에서 항상 기다리시던 아버지가 같이 내리셔 고기를 파는 앞에 서 “경숙아, 삼겹살 좀 사라.” 말씀하셔 “아버지, 삼겹살 드시고 싶어요?”라고 말을 한 후 삼겹살과 다양한 식품을 구매해 시골집에 도착했다.
부모님을 내려 드리고 올라오려는 순간 저녁을 먹고 가라고 하시는 아버지의 말씀을 나는 대수롭지 않게 일상 대화로 알고 그냥 올라왔다. 그로부터 4일 정도 지나고 아버지는 식사를 제대로 못 해 병원에 입원 더 이상 우리와 함께 식사를 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나셨다. 나는 2년 동안 아버지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아버지 맘을 헤아리지를 못한 체 무엇을 했는지 아버지를 보내며 많은 후회와 가슴앓이를 해야만 했다.
나는 아버지 집에 가면 음식을 차려 드리고 사진을 아버지만 찍어 드리고 아버지가 음식을 드신 후에는 하나라도 먹고 오는 습관이 있는데 얼마 전에는 아버지와 둘이서 사진을 촬영하는 모습을 보고 딸아이가 “엄마 할아버지랑 같이 찍어 드릴게요.” 하며 찍어 주었다. 아버지 집을 떠나 돌아오는 길에 “경숙아 저녁 먹고 가라~~”라는 목소리가 듣고 싶은데 아버지는 아무런 말 없이 바라만 보고 계셨다. 그런 아버지를 두고 돌아오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아도 아버지는 묵묵히 바라만 보고 계셨다.
아버지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경숙아! 경숙아~~” 수십 번 부르면 이제는 ”왜~유“라는 대답은 빼고 처음부터 끝까지 “네”라고 대답할 텐데...
돌아오는 차 안에서 딸이 찍어 준 사진을 보던 순간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 살아생전에 여행을 모시고 다니면서도 부모님 두 분만 사진을 찍어 드리거나 온 가족이 함께 찍은 사진은 있었지만, 아버지와 단둘이서 찍은 사진은 한 장도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슴이 멍해 왔다. 그러면서 옆에 신랑하고 딸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10년이 되어서야 아버지와 단둘이서 찍은 사진은 처음 보네.”라고 이야기를 건네며 씁쓸함과 아버지가 얼마나 외로웠을까를 다시 한번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다음날 출근을 해 선생님들과 나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버지와 둘이서 찍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보니 선생님들 모두 없다고 말씀해서 이번 명절에 혹시 부모님을 뵙게 되면 부모님과 많은 추억을 만들고 아버지와 사진을 찍으시라고 말했더니 선생님들이 좋은 말이라며 감사를 표현하며 실행에 옮겨보겠다고 말했다.
지금도 많은 아버지들이 우리 아버지처럼 자식들을 보고 있어도 혼자 외롭고, 쓸쓸함에 계실지도 모르겠다. 그런 아버지들이 없기를 바라며 다시 아버지를 생각해 본다.
보고 싶은 아버지! 사람의 일생을 소풍으로 표현한다고 하는데 우리 아버지는 소풍을 재미있게 잘 다녀가셨는지 지금도 궁금하다. 그리고 묻고 싶다.
잘 계신지, 보고 싶지 않은지, 나는 사무치게 아버지가 보고 싶은데...
2. 그럼에도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정경숙
“당장 원장 나와! 당장!”
“내 아들이 어린이집에서 이마가 시퍼렇게 멍들었는데”
“당장 CCTV 보자구.”
요즘 가끔 나오는 아동학대 뉴스를 볼 때마다 난 몇 년 전 일이 떠올라 가슴 한 곳이 답답하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화병이라면 화병일까. 순간순간 무엇인가 올라와 답답함을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서슬 퍼런 아이의 부모가 아이의 외삼촌과 함께 어린이집에 들어와 어린이집을 발칵 뒤집었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내 매형여, 이 어린이집 그냥 안 놔둘 겨, CCTV 당장 봐”
아이를 맡긴 지 한 달쯤 된 아이의 부모와 외삼촌은 험악한 말들로 삿대질과 함께 따지고 들며 교사 책장을 치면서 분위기를 공포스럽게 만들었고, 그 분위기에 놀라 원에 남아있던 영아들은 울음을 터트렸다.
상처가 난 아이는 평소에도 활발하고 많이 움직이는 아이로 혼자서 비틀거리다 넘어져 이마에 멍이 들었지만 부모는 아동학대라며 구청에 민원 문의를 하고, 원에 이곳저곳을 사진을 찍어 증거자료를 만드는 모습이었고, CCTV를 열람하기 전에 경찰서에 전화를 걸어 아동학대로 의심된다는 신고를 하는 모습이었다.
난 아이의 부모에게 CCTV를 열람 후 신고를 해도 되지 않겠냐고 사정을 한 후 사고 당시의 모습을 CCTV 확인한 결과 아동학대가 아닌 것을 인지하고 여러 가지의 말씀을 하신 후 아이의 부모와 외삼촌은 귀가를 하셨다. 그렇게 마무리된 줄 알았는데 그다음 날에는 또다시 아이의 부모는 사고 당일 전체의 CCTV 열람을 요구하셨고, 사고 당일 하루 종일 분량의 CCTV를 확인하고 나서야 아동학대가 아님을 인정하셨지만, 아이 상처에 대한 사후 관리로 성형수술과 레이저 치료 등을 거론하셨다. 난 어린이집은 안전공제를 가입되어 있어 모든 치료비는 부모님이 마무리가 되었다고 말씀하실 때까지 치료해 드린다고 안내하고 모든 치료를 해 드리기로 했다.(차후에 알아본 결과 병원비는 몇천 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됨.)
그렇게 아이 부모는 온갖 험악한 말과 함께 부모가 마지막 남긴 말은 복지부와 구청에 민원을 제기하겠다는 말과 함께 “10년 넘게 했댔죠? 원장님이 고인 물이네요.”라는 충격적인 말이었다. 심지어는 아이의 외숙모라는 사람이 CCTV를 확인하기도 전에 맘 카페에 우리 원의 비방 글까지 올려 우리 원은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게 됐다. 그것을 보니 어이가 없었고 당장 전화해서 정정하라고 하고 싶었고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하여 조사하려 하였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정당한 결과가 나와도 득보다 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그동안 타 원들에 상황을 보고 터득한 현실이라(추후 소송할 서류만 수집을 한 후 그냥 마무리함) 아이 부모가 돌아가신 후 원에 들어와 소리 내어 한없이 엉엉 울었다. 너무나 속상하고 자괴감이 들어 자신을 어떻게 해야 할지 표현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맘 카페의 악플 때문에 자살을 했던 교사와 아동학대 오해로 스스로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보육교사 생각이 저절로 났다. “오죽하며 하나뿐이 소중한 목숨을 버릴까?”
나는 학창 시절 유치원 교사가 꿈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넉넉지 않은 시골 농부의 5남매의 둘째로서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어려운 가정 살림을 도와야 했고 늦은 나이에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해 어린이집에 취업 잠깐의 교사생활을 경험한 후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되었고 벌써 원 운영 17년의 세월이 다가오고 있다. 나는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나와의 딱 한 가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그건 바로 아이들이 행복한 어린이집을 만들기 위한 약속이었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새벽 6시부터 아이를 받아 씻기고 아침을 먹였고, 저녁에는 21시~22시까지, 토요일 일요일에도 부모님께서 부탁하시면 무 보육료로 아이를 돌봐 주는 일을 나는 당연한 일로 여기며 부모들의 육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성심을 다했다. 한 번은 재혼하여 신혼여행을 떠나는 원아 어머니가 아이를 맡길 곳이 없어 난처해할 때 1주일간 아이를 집에서 돌보며 무사히 신혼여행을 다녀올 수 있도록 하였다.
뿐만 아니라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더 나은 원으로 발전해 나가기 위해(아이의 부모가 말한 고인 물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나 자신과 함께 성장 발전시키기 위해 매진해왔다. 보육 교직원 교육 외 다른 자격증 교육을 열심히 받고 정부에서 추진하는 평가인증 5번, 공공형 어린이집 재재 선정 3번, 우수보육 교재교구 작품전시회 장려상. 시장상, 국회의원 상등을 수상하고 그리고 수많은 서류작업에 개인적으로는 정말 매일 밤잠을 줄이고 주말을 반납한 채 열심히 원을 위해 최선을 다해 왔다. 가정일로 보내는 시간보다 어린이집 일로 보낸 시간이 더 많은 17년이라는 열정적인 시간이었다. 교직원과 수시로 교사 회의를 진행하고 운영위원회 회의를 통해 우리 아이와 부모가 서로를 사랑하며 함께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상하고 같이 진행하면서 원에서의 행복이 가정으로까지 뻗어갈 수 있도록 원의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활동 예로 요즘은 코로나-19로 부모참여가 어렵지만 예전에는 부모와 함께하는 프로그램이 많았다. 프로그램 중 종이 박스를 이용한 부모와 함께 만든 자동차극장(종이박스로 자동차를 만들고 아이는 자동차 안에서 간식을 먹으며 영화를 봄, 자동차 모양도 각양각색이고 부모님의 정성으로 예쁘게 꾸며 아이들이 영화가 끝난 후에도 나오기를 싫어할 정도로 좋아함.)을 꾸며 아이와 부모의 교감을 높여 오래도록 행복감을 머물게 했다. 또한 원에서 영화를 본 경험을 토대로 영화관을 대관해 부모와 아이들이 함께하는 영화관람도 하였다. 그 외 부모와 함께하는 다양한 체험과 활동으로 오감을 놀이 활동을 통해 “온몸으로 체험하며 자라는 원”이라는 문구 하에 원 개방으로 가정과 원이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으며, 가장 중요한 아이들의 영양 관리를 위해 생협(유기농 식자재)을 이용해 건강한 식단을 제공하려고 무엇보다 노력해 왔다.
이렇듯 나나 원이 조금 힘들더라도 아이들과 부모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며 생활해 왔기에 아이들을 너무 사랑하고 부모들에게도 신뢰를 쌓으며 지내온 믿음의 세월이었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아이의 부모로부터 아동학대 소리를 들었을 때 그동안의 나의 세월은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리고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형언할 수 없이 슬프고 자괴감에 시달렸고 모든 게 다 부질없게 느껴졌다. 한동안 잠도 못 자고 먹는 것도 먹을 수가 없었다. 특히 부모들이 겁났고 아이들이 버겁게 느껴졌다. 과연 내가 이런 마음으로 원을 계속 이끌어 갈 수 있을까? 하는 자포자기의 심정이 들어 괴로움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영아가 가정에서 여기저기 멍이 들고 찢어지고 다쳐 원에 등원할 때 여쭤보면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부모들이 원에서의 조그마한 상처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서운함과 함께 그냥 모든 게 다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한편으로는 맘 카페의 악플과 동네에서 수군거리고 다니는 아이의 어머니와 외숙모로 인해 우리 원을 잘 유지해 나갈 수 있을까 하는 걱정도 들었다. 또한 아이 부모가 한 행동 (교직원에 대한 인권침해, 공갈 협박, 명예훼손, 원 운영방해, 정보유출) 이런 문제들과 요즘 부모님들 무슨 문제가 있으면 아동학대를 먼저 의심하고 CCTV 열람부터 요구하는 신뢰가 깨진 보육현장과 어지러운 나의 마음을 어디에다 호소할 데도 없어 더욱 마음만 착잡하기만 했다.
그런데 정말 감사한 일이 일어났다. 맘 카페의 악플과 아이 부모의 해코지에도 불구하고 원아 부모들은 나의 편을 들어주었다. 부모들은 그동안 나의 정성과 노력, 그리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나를 믿어주는 것을 넘어 그 아이 부모의 언행을 해명해 주며 더욱 우리 원을 사랑해주기 시작했다. 원아의 손에 카네이션과 함께 “원장님 사랑해요”라고 말해주는 우리 아이의 사랑과 “원장님을 만나 우리 가족이 너무나 행복합니다!”라고 허리를 굽혀 몇 번을 인사하시는 부모의 모습을 뵙는 순간 눈물이 나고 용기가 생겼다. 이것이 부모와의 믿음과 신뢰이며 내가 아이들을 사랑하는 만큼의 선물이 아닌가 하는 감사함이 다시나를 살 수 있게 만드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동안 맘 카페에는 우리 원을 헐뜯는 그 아이와 관계되는 사람의 글이 아직 삭제가 되지 않고 (맘 카페에 삭제 요청도 했지만 해결이 안 됨) 떠돌고 있다. 그리고 출산율 감소로 인해 원아 부족으로 주변에 폐원하는 원들이 날로 늘어나고 있는 불안함 속에, 바뀌는 보육정책과 원아 감소로 우리 원도 내년 운영이 불확실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아이들을 사랑하고 있으며, 또 나를 믿어주고 사랑해주는 아이들과 많은 분들이 있기에 흔들림 없이 아이들이 행복해질 수 있는 원을 운영해 가고자 예전에도 그랬지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더욱 최선을 다해 노력해 나갈 것이다. 덧붙여 지난번에 발생한 사건으로 느낀 점은 불미스러운 일이 다른 사람 일이 아니고 열심히 달려온 선량한 사람에게도 올 수 있으며, 이 상태로의 보육현장이라면 모두에게 닥칠 수 있는 불행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정말 열심히 일하는 보육 교직원들이 부모들로부터 아동학대 범죄자라는 억울하게 지탄을 받고 민원에 시달릴 때 어딘가 마음 편히 상담받고 이 억울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기관이나 상담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소박하지만 작지 않은 것을 몇 년 전부터 건의를 해 왔지만 국가에서 새로 신설된 것은 지금껏 변함이 없다. 그러면서 정부는 CCTV 점검을 지속적으로 나온다고 하며 현장에 있는 보육 교직원들을 예비 범죄자로 보고만 있다는 현실에 현장에 있는 보육교사로서 안타깝고 가슴 아픈 일이다. 부모와 원이 신뢰하는 사회가 된다면 무슨 CCTV가 필요할까? CCTV가 없던 시절이 더 부모와 애틋하고 신뢰했던 것 같다. 오히려 CCTV로 인해 부모와 원에 신뢰를 깨지고 불신에 씨앗을 심어준 격이 된 것 같아 안타깝기만 하다. 종종 TV에 나오는 잘못된 교사들도 있지만 그것은 일부에 교사고 나머지 교사들은 정말 헌신과 사랑으로 우리 아이들을 보육하는 교사들이 이 세상이 더욱더 많은 아름다운 세상이라는 알아주었으며 하는 바람이다.
유치원이나 학교에는 학대가 일어날 경우 중재 역할을 해주는 기관이 있다고 하는데 보육 계통은 아직도 보육기관에 중재 역할을 할 전담기관이 없다 보니 개인적으로 민사소송을 하고 해결하는데 6개 ~ 1년여 시간이 걸리고 비용 역시 많이 든다고 한다. 비용도 비용이지만 그 시간 동안 소문에 꼬리를 물고 물어 원의 존폐가 결정되고도 남는 시간이며, 원이 운영된다고 해도 소문으로 인해 다시 원상태로 유지하기에는 어렵다고 생각된다. 또한 원장을 비롯해 보육 교직원은 그 시간 동안 지옥 같은 시간이 되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몰릴 수도 있다. 이렇듯 보육현장에 무슨 문제가 발생하였을 때 중재 역할을 할 수 있는 기관과 교직원이 편한 맘으로 상담을 할 수 있는 상담소가 생긴다면, 아이는 물론 모두가 행복한 우리의 보육현장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조속히 생기길 간절히 기대해 본다.
끝으로 우리나라의 발전과 미래를 책임질 아이들을 성심성의껏 키워가는 우리 보육 교직원들! “교사가 행복해야 아이들이 행복하다는 말이 있듯이” 정말 열악한 조건에도 항상 미소를 머금은 보육 교직원들이 이 웃음을 잃지 않는 보육현장이 되었으면 하는 큰 희망을 품으며 “내일 종말이 와도 난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이 있듯이 앞으로 원에 미래가 불투명해 낼 폐원을 한다 하더라도 우리 아이들에게 좀 더 행복하고 즐거운 일이 있다면 난 원 없이 후회 없이 아이들과 즐기며 마지막 열정을 모두 쏟을 것이다. 그것이 나의 인생이고 나의 천직인 보육인이기 때문이다.
띵동 띵동 7시 30분
“어서 와 00야 잘 자고 왔어요? 안녕하세요?”
난 매일 아침 나의 비타민들과 인사를 할 것이다.
그리고 비타민들과 함께 웃고 울고 우리의 잔치인 재롱잔치를 할 것이다.
그것이 ‘나’이고, 지금까지 ‘나’였으며 앞으로도 ‘나’일 것이다.
그런 모습의 내가 좋다.
<정경숙 수필가 등단 심사평> - 그녀의 통곡과 인간사랑 - 가을이 오면! 작가가 덕향문학회 카페에 입장할 때 사용한 닉네임이다. 심사위원은 한참 동안 ‘가을이 오면’을 읊조렸다.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또 그렇게 울었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면서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아름다운 여인을 떠오르게 하는 한 편의 詩와 작가의 이름이 오버랩되었다. 그렇게 가을이 성큼 우리에게 다가왔다. 충남신문사와 충청창의인성교육원에서 시민문화기자 강의를 시작할 때 작가는 성인이 된 아들과 함께 강의실에 들어왔다. 수강생들 대부분이 나이가 지긋한 어른들이었다. 단연 이십 대 아들과 함께 강의를 듣는 작가를 주목했다. 강의시간마다 수강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배포한 강의록에 일일이 컬러 테이프를 붙여 구분한 모습을 보고 작가의 열성을 짐작했다. 시민문화기자 강의 14차 시에 ‘여제 소서노와 백제’라는 주제로 강의를 마친 교수가 수강생들에게 숙제를 냈다. 교수는 시와 수필 외에 어떤 장르의 글도 좋으니 한 편씩 제출하라고 당부했다. 심사위원이 놀란 이유는 교수가 요구한 숙제를 제출한 유일한 수강생이 작가였고 글의 수준이 등단작가를 능가했다는 것이다. 작가의 작품을 해부하고자 성스러운 메스를 든다. 1. 사부곡<思父哭> 사부곡<思父哭>은 아버지를 향한 그리움의 통곡이다. 작가는 넉넉지 않은 가정의 오 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서 공부할 시기에 취업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던 핸디캡을 잔잔하게 고백한다. 그 시절 부모님들은 장남 우선주의 사상을 DNA로 간직하고 있었다. 작가는 오빠와 아래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가정의 희생제물이 되어 고등학생의 나이에 취업전선에서 일해서 번 돈을 오빠와 동생들 학비로 보탰다. 그러면서 교복을 입고 등하교를 하는 학생들을 볼 때마다 작가의 가슴 한쪽에 있는 꿈을 버릴 수가 없어 매일매일 고민과 번뇌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고 처절하게 고백한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는지... 작가는 고생하시는 부모님과 동생들을 보고 자신의 꿈을 접고 직장생활을 하며 받은 돈을 부모님께 보내야만 했다.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할 때 작가의 아버지는 예식장에서 신부를 보내야 할 시간에 딸의 손을 꼭 잡고 놓지를 않으셨고 결혼식을 끝내고 한없이 대성통곡을 하셨다고 한다. 한 편이 수필에서 우리나라 역사 속에 등장하는 굴곡진 가정사를 볼 수 있다. 가난한 가정을 짊어진 우리 시대의 아름다운 딸을 만났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있던가. 세월의 뒤안길에 그 아픈 손가락을 감싸 쥐고 울부짖는 우리의 부모를 만났다. 가슴이 먹먹하여 글을 계속 읽지 못하고 고개를 들어 상념에 잠겨야만 했다. 그 아버지가 대장암 판정을 받고 아파할 때 작가는 아버지를 간호하고 지켜드렸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아버지 산소를 다녀오면서 산소에서 딸이 찍어 준 사진을 보면서 아버지와 단 둘이 찍은 사진을 갖게 되었다고 자랑한다. 그 자랑을 어찌 눈물 없이 들을 수 있으랴! 다음날 출근해서 작가는 지인들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아버지와 둘이서 찍은 사진이 있는지 물어본다. 그들을 향하여 부모님과 많은 추억을 만들고 아버지와 사진을 찍으시라고 말한다. 작가 자신의 맺힌 한(恨)이 다른 이들에게 되풀이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몸부림이다. 세상을 향한 절규다. 2. <그럼에도 나는 아이들을 사랑한다> 수필의 전개는 이미 절정으로 치닫고 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고 읽어 내려갔다. 작가는 힘든 시절을 견디면서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공부를 계속하여 어린이집 원장이 되었다. 매체 뉴스로 접했던 어린이집 아동학대 사건 운운하고 CCTV 공개하라고 요구하면서 경찰서에 신고하겠다는 부모의 등장은 작가의 가슴에 상처로 남는다. 아이의 부모가 무심코 뱉은 한마디는 작가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작가는 당장 전화해서 정정하라고 하고 싶었고 사이버 수사대에 신고하여 조사하려 하였지만 그렇게 하다 보면 정당한 결과가 나와도 득보다 실이 많이 발생한다는 것을 타산지석으로 알고 있었기에 주저했다. 작가는 보육교사가 아동학대 오해에 시달리다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놓아버린 것을 떠올리면서 오열한다. 작가는 학창 시절 유치원 교사를 꿈꾸었다. 학창 시절 넉넉지 않은 시골 농부의 5남매의 둘째는 대학에 진학할 수 없었고 취업전선에 뛰어들어 어려운 가정 살림을 도와야 했다. 늦은 나이에 꿈을 이루기 위해 다시 공부를 시작했고 어린이집을 운영하게 되었다. 17년의 세월을 어린이집을 운영하면서 작가 스스로 아이들이 행복한 어린이집을 만들겠다는 한 가지 계명을 세우고 약속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 왔다. 맞벌이하는 부모님의 어려움을 덜어주기 위해 새벽부터 어린이집을 열었고 주말에도 부모가 부탁하면 보육료 없이 아이들을 돌봐 주었다. 재혼하여 신혼여행을 떠나는 아이 부모를 위해 1주일간 어린이를 맡아 돌보기도 했다. 어린이집에 기습 방문하여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던 부모는 작가의 그런 순백의 백지 위에 구정물을 끼얹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작가는 위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이들을 사랑한다고 역설한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수상 이력과 더 나은 어린이집을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거침없이 뻗어갈 수 있도록 진행하는 프로그램을 통해 작가의 꺼지지 않는 열정을 과시한다. 코로나-19도 작가에게는 시련이 될 수 없다. 오히려 작가의 잠재력을 깨우는 전화위복의 도구가 될 뿐이었다. 많은 부모가 작가를 응원하고 믿어주고 있고 사랑하게 되었다. 작가의 어린이집이 항상 행복한 어린이들의 웃음꽃이 만발하기를 바란다. 작가의 수필가 등단이라는 거룩한 월계관이 어린이집을 업그레이드하는 축제가 되기를 바란다. 심사를 마치고 정경숙 님을 수필가로 천하면서 심사평에서 거리낌 없이 작가라고 칭했다. 참으로 가슴이 따뜻한 사람을 만난 기쁨이 벅차다. 말과 글은 사람의 됨됨이를 나타낸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영원한 진리다. 어린 시절 작가의 힘든 시기는 오늘 작가로 우뚝 설 수 있는 자양분이 되었으며 시련을 겪어낸 작가는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별이 되기에 충분하고도 넘친다. 심사위원의 사랑 어린 권면을 헤아리기를 청한다. 덕향문학 문학강좌 수강을 통하여 작가의 글에 날개를 달기를 권한다. 작가 혼자서 써 온 글에 화룡점정(畵龍點睛)하는 놀라운 변화를 통하여 내노라 하는 수필가로 위풍당당 전진하기를 기원하는 충정을 사랑의 고백으로 받아들이기를 간청한다. 정경숙 작가의 정진을 기원하며 심사위원은 흡족하다! 심사위원 (김구부, 최기복, 최태호記) |
<정경숙 수필가 등단 소감문>
아버지, 엄마 안녕!
나는 매일 같이 이른 아침 어린이집에 출근하면 컴퓨터 켜고 컴 화면 속에서 항상 환하게 웃으시는 부모님께 아침 문안 인사를 드린다.
컴퓨터 화면 속에 우리 부모님은 15년 전 크리스마스에 찍은 젊은 날의 부모님의 모습 그대로.....
화면 속에 아버지, 엄마 얼굴을 쓰담 쓰담하며 “아버지, 엄마 안녕! 오늘도 이 딸 우리 꼬맹이들과 오늘 하루도 잘 즐겨 볼게요.”라고 인사를 한 후 컴퓨터를 끄고 그렇게 그날도 평상시와 같이 변함없이 하루 일과를 시작했다.
꼬맹이들과 하루 일과를 분주하게 활동하는 오전에 한 통에 기적과 같은 문자를 받게 되었다. 그것은 “김인희 교수님의 문자, 내가 과제로 제출한 글이 최기복 회장님께서 편집 후 충남 신문사로 보내서 신문에 탑재되었다.”라는 축하에 메시지였다. 처음에는 이게 무슨 소리인가 내가 잘못 보았나 싶어 다시 읽어보고 그것도 긴가민가해 활동 중인 선생님께 확인하고서야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원장님과 교수님 두 분과 통화를 한 후 왜 눈물이 나는지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려 조용히 뒤 베란다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며 아버지께 감사 인사를 하였다. “아버지! 덕분에 이 딸 이런 영광을 얻게 되었다고” 그렇게 하루하루 행복한 날을 지내고 있을 때 저에게 더 큰 행운과 행복한 소식이 전해왔다. “혹시 수필가로 천거하고 싶은데 의향이 어떤지 궁금하다고.” 그 말씀을 듣는 순간 가슴에 심장이 뛰기 시작하면서 제 스스로 나대는 심장을 잡을 수가 없었다.
충남 태안군 작은 섬 안면도에 가난한 집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나 하고 싶었던 학업을 가난이라는 커다란 장벽 앞에 중도 포기해야만 했고, 그 시대 시절에 가난한 집안에서 겪어야만 했던 모든 어려움을 온몸과 맘으로 겪어 내야만 했던 나의 유년시절. 그러다 보니 “꿈 많고 낭만적이어야 할 사춘기 소녀”는 어디에도 없고 인생을 고민하고 생활고로 인해 꿈을 포기하고 내가 생각했던 나의 인생과는 다른 삶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가난이라는 굴레 속에서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 고달프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온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내 꿈을 이루고 큰 행운과 행복을 안고 설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려움 속에서도 행복했고 내 꿈을 포기하지 않고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원동력이 되어준 “우리 부모님의 성실 근면한 생활이 나의 몸에 배었고”,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 소나무 오솔길을 걷으며 흥얼거리던 노래와 시 그리고 풍경에 취해 중얼중얼 식물들과 나누던 이야기들, 비 오는 날 우산 없이 온몸으로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웃고 즐기며 걷던 친구들, 차비가 없어 2시간이 넘는 거리를 걸어 집에 가는 길에 바닷가 길을 택해 큰 소리로 울분을 토해 파도에 실려 보내며 걷던 길...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소나무와 바다의 풍경이 나를 위로하고 여유롭게 만들었고 무엇이든 선하고 긍정적인 마인드로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준 것 같아 고맙고 감사하기만 하다.
또한, 어릴 적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이 있듯이 그때의 어려움이 지금에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되어 이렇게 큰 선물로 다가왔으니 그 얼마나 나의 지나온 인생이 아름다운가!
사람의 인연이란? 좀 묘한 것 같다. 내가 충청창의인성교육원 최기복 회장님과 인연을 맺은 것도 처음 내 뜻이 아닌 동생의 뜻이었다. 동생이 문화시민기자 양성과정에 아들과 같이 등록하길 원했고 난 아들을 위해 여름 방학을 마친 후 바로 등록을 한 후 인연을 맺게 되었다.
누구나 처음 낯선 곳에 문을 두드릴 때 두려움과 설렘이 함께하리라 생각된다. 나 역시 아들과 함께 처음 교육장에 들어갈 때에는 내가 나이가 가장 많을까 걱정을 했는데 나의 상상과 달리 연세들이 좀 드신 것 같아 맘이 조금은 놓였다. 매주 토요일 교육을 들으며 처음에 내 생각과 달라 많은 고민도 하고 표현도 하며 몇 주를 보내고 최기복 회장님의 확실한 답변을 들은 후 난 열심히 내가 듣고 싶었던 강의를 지속적으로 꾸준히 들으며 중도 포기 없이 이 자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이 자리를 비롯해 덕향문학회와 인연을 맺은 것에 감사하고 마음속 깊이 고개 숙여 인사하고 싶은 분
“우리 최기복 원장님과 김인희 교수님 정말 두 분의 만남에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갈 수 있는 길을 찾아주시고 닦아주고, 인도해 이끌어 주신 점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그 맘을 다 표현할 수 있을지... 감사하다는 말만 입에서 나옵니다. 다시 한번 감사 인사 올리며 나의 기쁨을 함께 해 주신 덕향 문학회 많은 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미숙하고 부족한 글솜씨인 줄 알면서도 더 열심히 좋은 글 쓰며 살라고 주시는 하나의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지금의 맘 잊지 않고 나의 글을 읽는 이들에게 “격려와 희망을 주고 함께 공감하며 글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맘에 위로와 휴식을 주는 맘으로 쓰는 글로 표현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나의 좌우명처럼 오늘 걷지 않으면 내일은 뛰어야 한다는 문구처럼 열심히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많은 조언과 인도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끝으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도록 하늘나라에서 항상 나를 지켜봐 주고 계신 우리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고, 딸이 아버지 이야기만 해서 속상할까 봐 아무 이야기를 하지 않고 있다가 마지막에 알게 된 우리 엄마 장하다, 괜찮다, 속상한 것 하나도 없다, 내가 못 해줘서 미안할 뿐이라며 울음을 보이시던 우리 엄마에게도 더욱더 감사하고 미안하고 죄송하기만 하다.
앞으로 아버지께 못다 한 효도까지 더해서 엄마가 아버지 곁으로 갈 때는 후회 없이 잘 보내드리자고 맘을 먹어도 이렇게 엄마가 우는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프고 무엇을 잘못했구나 하는 맘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이것이 부모의 맘이고 자식의 맘이라 생각된다.
이런 나의 마음을 가장 잘 알아주는 또 한 사람과 사랑스러운 나의 분신들 처음 글이 충남신문에 등재되었다고 문자를 보냈을 때 기뻐해 주고 우리 엄마 멋있다고 해 주던 우리 가족들 ~~~
어린이집 일과 학과수업으로 가정에 등한시한 지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묵묵히 지켜봐 준 우리 가족들에게 다시 한번 고맙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이제부터 한 사람의 아내로 나의 분신들의 엄마로 잘하겠다고 약속하고 싶지만, 학업을 마치고 어린이집을 손에서 놓지 않은 한 이 약속이 이루어질지 의문을 갖는다. 그래도 노력을 해 보겠다고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나의 지금에 모습에 박수를 보내며 격려해 주는 어릴 적 친구들과, 동료들, 나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옆에 있어 줘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올립니다
모두 모두 감사합니다.
정경숙 수필가 프로필 -나주전문대 졸업 (현 학점 운행제 아동학 학사 재학 중) -어린이집 원장 -천안 우수보육교사 원장 시장상 수상 -충남 가정분과 우수보육교사 원장 국회의원상 수상 -전국 가정분과 보육수기 공모전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 -사회복지사 -노인상담사 -심리분석사 -웃음치료사 -덕향문학 회원 -충남신문 문화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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