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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주의 목사인 그Charles R. Swindol는 “삶에 있어서 객관적 사실은 인생을 통틀어 겨우 10%에 불과하고, 나머지 90%는 그 일들에 대한 우리의 (주관적) 반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철학자인 그John Homer Mills는 “삶이란, 우리의 인생 앞에 어떤 일이 생기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태도(곧 반응)를 취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라고 말했습니다. 고해와 같은 힘겨운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온간 종류의 상황들 속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내용이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달라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특히, 정신과 의사로서 아우슈비츠Auschwitz 수용소에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왔던 그Victor Frankl는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인간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는 있지만, 한 가지 자유는 빼앗아 갈 수 없다. 바로 어떤 상황에 놓이게 된다 할지라도 삶에 대한 태도(곧 반응)만큼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상황에 따른 반응 곧 태도만큼은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실제로 그렇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상황은 전혀 예기치 않은 순간 일방적으로 주어집니다. 맞닥뜨린 사람을 당황스럽게 만듭니다.
그렇다고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어떤 식으로든 반응해야합니다. 그 반응 곧 태도에 따라서 인생은 전혀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편, “감사”는 은혜를 받은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희생하기까지 사랑해 주신 하나님께 보여드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반응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자기 행실을 바르게 하는 자에게 내가 구원의 길을 보이리라.”(시50:23)라는 증거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가져야할 지극히 바른 태도입니다. 지극히 바른 자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릴 수 있습니다.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온갖 부정적인 상황으로부터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감사는 더 큰 감사를 낳습니다. 삶을 아름답고, 기름지고, 윤택하고, 풍요롭게 합니다. 믿음의 선진들이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시118:1),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살전5:18)라고 외쳤던 이유입니다. 이 감사와 관련하여 그朴勞解는 “감사한 죄”라는 제목의 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젊어서 홀몸이 되어 온갖 노동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낸 장하신 어머니
눈도 귀도 어두워져 홀로 사는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신다
그의 어머니는 젊어서 혼자되셨습니다. 온갖 노동일을 하며 다섯 자녀를 키워내셨습니다. 그동안 어머니는 눈도 어두워지고, 귀도 어두워지셨습니다. 그렇게 장한 어머니가 새벽기도 중에 나직이 흐느끼십니다.
나는 한평생 기도로 살아 왔느니라
어머니는 힘든 노동일을 하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거친 세파에 부딪쳐 깨어지고 넘어지면서도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한평생 기도로 살아오셨습니다.
낯선 서울 땅에 올라와 노점상으로 쫒기고
여자 몸으로 공사판을 뛰어다니면서도
남보다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음에
늘 감사하며 기도했느니라
아비도 없이 가난 속에 연좌제에 묶인 내 새끼들
환경에 좌절하지 않고 경우 바르게 자라나서
큰아들과 막내는 성직자로 하나님께 바치고
너희 내외는 민주 운동가로 나라에 바치고
나는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 왔느니라
어머니는 연좌제에 묶여 있던 새끼들이 환경 때문에 좌절하지 않도록 키우기 위해서, 경우 바르게 키우기 위해서 노점상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공사판 일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파출부를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는 온갖 노동을 마다하지 않으셨습니다. 불철주야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부으셨습니다. 그 과정에서 도와주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감사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그렇게 키운 큰 아들과 막내는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시인내외는 노동자를 위해 일하는 운동가가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감사 기도를 잊지 않으셨습니다.
내 나이 팔십이 넘으니 오늘에야
내 숨은 죄가 보이기 시작하는 구나
이제 팔십이 넘은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평생 죽을 만큼 힘들게 일하면서도, 거친 세파에 부딪쳐 깨어지고 넘어지면서도 한평생 감사기도를 바치며 살아오신 팔순의 어머니가 말씀하십니다. 그동안 보지 못했던, 숨겨져 있었던 죄가 보이기 시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거리에서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내 처지를 아는 단속반들이 나를 많이 봐주고
공사판 십장들이 몸 약한 나를 많이 배려해주고
파출부 일자리도 나는 끊이지 않았느니라
나는 어리석게도 그것에 감사만하면서
긴 세월을 다 보내고 말았구나
단속 반원들은 리어카 노점상을 하다 잡혀온 어머니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주었습니다. 공사판 십장들은 몸 약한 어머니를 많이 배려해주었습니다. 파출부 자리는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감사 기도를 쉬지 않으셨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지 않을 도리가 없으셨습니다. 팔십이 넘어 뒤를 돌아보니 감사 기도가 밟힙니다. 감사 기도만 하다 세월을 다 허비하고 말았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고
일거리를 못 얻어 힘없이 돌아설 때도,
민주화 운동 하던 다른 어머니 아들딸들은
정권 교체가 돼서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어도
사형을 받고도 몸 성히 살아서 돌아온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내 새끼 하면서
나는 바보처럼 감사기도만 바치고 살아왔구나
나는 감사한 죄를 짓고 살아왔구나
다른 사람들은 단속반에 끌려가 벌금을 물었습니다. 일거리를 얻지 못해서 힘들어했습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정권이 바뀌었지만 그들의 아들딸들은 여전히 살아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사형선고를 받았던 어머니 아들은 살아 돌아왔습니다. 어머니는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 불쌍하고 장한 내 새끼”라고 외치며 기뻐하셨습니다. 감사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팔십이 넘으니 그 기쁨과 감사 기도가 눈에 밟힙니다. 어머니는 여전히 아파하고 있는 이웃을 돌아보지 못하고, 함께 연대하여 힘이 되어주지 못한 채 바보처럼 감사 기도만 바치는 죄를 지으며 살아왔다며 흐느끼셨습니다.
새벽녘 팔순 어머니가 흐느끼신다
묵주를 손에 쥐고 흐느끼신다
감사한 죄
감사한 죄
아아 감사한 죄
어머니의 흐느낌은 멈추지 않고 계속 이어졌습니다. 이웃들이야 어찌되든 말든 나만, 내 자식들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마음으로 감사만 하며 살아왔던 죄를 고백하셨습니다. 저와 여러분에게서도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부끄러운 모습입니다. 20세기 최고의 변증가로 알려진 그C. S. Lewis는 자신의 책The Four Loves을 통해서 “하나님은 일부러(의도적으로) 기생물들을 창조하셨다. 그 기생물은 바로 우리들이다. (하나님은) 기생물인 우리가 하나님 자신을 ‘이용해 먹을 수 있게’ 하시는 ‘숙주’이시다. 여기에 사랑이 있다. 이는 모든 사랑의 발명자이자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아담 이후, 인류는 허물과 죄로 이미 죽었습니다. 살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무엇인가에 빌붙어 살 수밖에 없는 기생충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인류 구원을 위해서 당신을 숙주로 내놓으셨습니다. 당신께 빌붙을 수 있는 은혜를 허락해 주셨습니다. 영적으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물론 영원히 살 수 있는 은혜까지 허락해 주셨습니다. 지금 성도라는 이름을 가진 이들만 누릴 수 있는 은혜가 아닙니다. 성령께서 값없이 선물로 주시는 믿음을 받아들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누구도 예외 없이 모두 다 누릴 수 있는 풍성한 은혜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아프시던 날 곧 육신으로는 도무지 견디기 힘든 모진 핍박과 조롱과 멸시를 다 당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날 태어났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 구원을 위해서 자원하여 당하셨던 고통에 함께 동참하고 함께 아파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를 누리게 되었다는 엄청난 사실 앞에서 감사 기도만 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합니다. 혹 풍성하게 누리고 있는 축복에 감사 기도만 드리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회개해야합니다.
흐느껴 울고 또 울어야합니다. 특히, 어떤 경우에도 게토Ghetto화 되지는 말아야합니다.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지 말아야합니다. 고립을 자초하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세상과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세상이 당하고 있는 아픔과 고통과 눈물에 기꺼이 동참해야합니다. 세상이 어떤 모습을 보여 주든지 상관없이, 교회를 비웃고 조롱하며 핍박하든지 상관없이, 입에 담기 부끄럽지만 개독교 취급을 하더라도 상관없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빌붙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야합니다. 힘에 지나도록, 무제한적으로 제공해 주어야합니다.
세상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하는 거룩한 통로가 되기를 마다하지 말아야합니다. 거룩한 숙주가 되기를 마다하지 말아야합니다. 엄청난 희생이 요구된다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2021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신 은혜를 돌아보며 추수 감사 주일 예배로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풍성하게 받아 누린 온갖 은혜를 생각하며 감사 기도만 드리고 있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세상을 영원한 구원과 생명과 하나님 나라로 안내하는 거룩한 통로 곧 거룩한 숙주로서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본문은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욘2:1)라고 시작됩니다. “기도하여ויתפלל(이트팔렐)”는 미 완료형입니다. 지속적이면서도 강한 재귀再歸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찾으셨습니다. 그가 먼저 여호와를 찾지 않았습니다. 천지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말씀 한마디로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당신이 창조한 피조물 가운데 하나에 불과한 그를 찾으셨습니다. 당신이 아니라면 지극히 보잘것없고 하찮은 인생을 찾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이 지옥의 땔감 정도로 여기던 이방인에 대한 광대한 관심과 사랑을 드러내셨습니다.
성민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이방인의 하나님도 된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드러내셨습니다. 선지자를 향해서는 조금도 머뭇거리거나 지체하지 말고 당장 일어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앗수르 수도 니느웨로 한걸음에 달려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무수히 많은 죄악들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회개를 재촉하고 요구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서지 않으면 남녀노소 불문 모두 다 죽을 것이라고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방인 구원을 위한 거룩한 숙주宿主가 되어 외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한편, 여호와는 공의로우십니다. 지극히 작은 죄 하나까지도 절대로 참지 못하십니다. 끊임없이 분노하십니다. 오래 참아주시지만, 당신의 때가 이르게 되면 반드시 심판하십니다. 정확하게 심판하십니다. 죄에 합당한 벌을 내리십니다. 동시에 여호와는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의 깊이와 높이와 넓이와 길이는 누구도 감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심판을 받아야 마땅한 죄인들을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구원하시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흘러넘칠 정도로 충분합니다. 한 영혼도 버릴 수 없을 정도로 뜨겁습니다. 차라리 당신 자신을 버릴 정도로 간절합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신 것을 통해서 충분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랑으로 하늘에 사무치는 죄에 빠진 채 심판을 자초하던 이방인을 구원하려고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달랐습니다. 그의 마음 한편에는 “내 편은 한 명도 죽으면 안 되지만, 반대편은 아무리 많이 죽어도 전혀 상관없다. 나에게 중요한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고통만 받아도 가슴이 찢어 질듯 아프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큰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그다지 대수롭지 않다.”라는 생각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특히, 선지자는 니느웨가 죽을 만큼이나 싫었습니다.
사실 앗수르는 무수히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죽였습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포로로 끌고 갔습니다. 정신적, 물질적 타격이 이만저만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망해 버리기를 바랐습니다. 지금 이대로 버려둔다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굳이 제 발로 찾아가서 회개하라고 외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하필이면 자신이 싫어하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외치라는 여호와까지도 싫어졌습니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주신 기회를 외면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여호와의 낯을 피해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선지자답지 않은 어리석은 발상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당신 앞을 떠나서 어디로 도망칠 수 있겠습니까? 하늘에 올라가도 거기 계시고, 지하로 내려가서 자리 깔고 누워도 거기 계시며, 새벽 날개 붙잡고 동녘으로 가도, 바다 끝 서쪽으로 가서 자리를 잡아도 거기서도 당신의 손은 나를 인도하시고 그 오른손으로 나를 꼭 붙드십니다.”(시139:7b-10)라는 시인의 고백대로, 이 세상 그 누구도 천하만국과 삼라만상을 친히 다스리시는 여호와의 낯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지자라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발상을 할 수 있었을까요?
저와 여러분이었다면 여호와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었을까요? 설교의 황태자라고 불렸던 그C. H. Spurgeon는 “피할 수 있을 때까지 피해 보라. 피할 수 있다면 그것은 소명이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선지자는 피할 수 없었습니다. 소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 사실을 알 수 없었던 선지자는 피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당연히 착각이었습니다. 서둘러서 항구로 내려갔습니다. 마침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목적지로 가는 배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몇 달을 기다려도 오지 않을 때가 많은 배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예비해 놓으신 배였습니다.
사실 선지자는 주어진 소명을 완전히 거스르는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배를 보고 눈치 챘어야 했습니다. 도망치기에 바빴었던 선지자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배를 보고 환호성을 질렀습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비싼 배 삯을 떡 하니 지불했습니다. 배위로 냉큼 올라탔습니다. 곧장 배 밑으로 들어갔습니다. 곧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70인 역의 번역에 따르면, 코를 심하게 골면서 잤습니다. 죽음 같이 깊은 잠을 잤습니다. 여호와의 뜻을 거스르고 있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습니다.
불순종에 대한 겸연쩍음 때문이었습니다. 선지자도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돌아서면 될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돌아서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돌아서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극히 의도적이었습니다. 의지적이었습니다. 자신이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과 목숨을 다하여 섬기고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았습니다.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결정했습니다.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그런 그를 여호와께서 추적하셨습니다. 배가 항구를 떠나자 기다렸다는 듯 바람을 일으키셨습니다. 파도를 일으키셨습니다.
순식간에 거대한 태풍으로 키우셨습니다. 배를 위협하셨습니다. 겁에 질린 선원들이 배를 돌리려고 최선을 다해 보았지만 무효로 돌리셨습니다. 선지자는 그때까지도 죽음 같은 잠에 취해 있었습니다. 자신의 불순종으로 인해 벌어진 일 때문에 애매한 사람들의 목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깨닫지 못한 채 잠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을 본 선장은 답답했습니다. “이렇게 모두 힘겨운 판국에 잠자고 있다니! 너도 일어나서 네가 섬기는 신에게 부르짖어 보아라. 너의 신이 우리를 생각해서 행여나 살려주실지 혹 아느냐?”(욘1:6)라고 꾸짖었습니다.
누군가는 이를 “세상의 음성을 들어보았느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보았느냐?”라고 일갈一喝했습니다. 충분히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여호와는 당신이 지은 모든 것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전할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여호와께서는 나귀의 입을 여셨습니다. 탐심을 채우기 위해서 당신의 뜻을 거역하고 성민 이스라엘을 저주하려고 작정한 거짓 선지자 발람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발람을 꾸짖으셨습니다. 어려운 일이 생기면 여호와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도움을 구해야합니다. 그런데 하지 않습니다. 여호와께서 믿지 않는 사람을 동원하십니다.
꾸짖으십니다. 선지자로서는 너무나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또 선원들의 미신을 사용하셨습니다. 피눈물 나는 수고와 함께 엄청난 손해를 감수했음에도 불구하고 해결되지 않는 일은 누군가가 저지른 엄청난 죄 때문이라는 생각에 사로잡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당신이 즐겨 사용하는 방법인 제비뽑기를 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선지자가 뽑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는 상황의 원인이 선지자 자신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자신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라는 사실을 알 수 있도록 역사하셨습니다.
순간, 선지자는 “이 배에 있는 사람들, 나를 모르는 사람들, 매일 술이나 퍼마시고 못된 짓만 골라서 하는 이 뱃사람들을 나는 사랑한다. 너 혼자 살려고 발버둥 칠래, 아니면 너 하나 바다에 빠져서 이 많은 사람들을 모두 다 살릴래?”라고 속삭이시는 여호와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당신에 대해서 무지한 이방인들을, 오히려 당신이 가증스럽게 여기는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 있는 이방인들을 성민 이스라엘만큼이나 사랑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 죽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히브리 사람입니다.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제가) 지금은 (당신들과 같은 이방인들을 살리라는) 여호와의 뜻을 거역하고 도망가는 중입니다.”(욘1:9-10a)라고 고백했습니다. 자신을 거대한 폭풍이 휘몰아치고 있는 바다 한가운데로 던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그래도 망설이는 선원들을 향해서 그들이 죽을 고비를 만나 고생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탓이라고 외쳤습니다. 선원들은 어쩔 수 없이 선지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동시에 바다는 언제 그랬었냐는 듯 잔잔해졌습니다.
순식간에 놀라운 반전이 벌어졌습니다.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지켜본 이방인들은 그동안 외면하고 있었던 여호와를 크게 두려워하였습니다. 여호와를 인정했습니다. 받아들였습니다. 제물을 드렸습니다. 서원하였습니다. 선지자 한 사람의 솔직한 죄 고백과 함께 자기희생이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자기만족이 아니라 자기희생이 나라와 민족을 살릴 수 있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을 살릴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비로소 당신의 마음을 깨달은 선지자를 위해, 그토록 싫어했던 이방인의 구원을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내놓은 선지자를 위해 거대한 물고기를 준비하셨습니다.
삼키게 하셨습니다. 선지자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선지자를 책임져 주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깊은 잠에 빠져 깨어나지 못했던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집어넣으신 물고기 뱃속에서 혼신의 노력을 기울여 기도했습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유일한 대안이자 탈출구인 여호와께 나아갔습니다. 사실 선지자가 도망칠 수 있는 구석이나 공간은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가 당신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도록 의도적으로 몰아넣으셨습니다. 선지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기도밖에 없도록 하셨습니다.
선지자 자신에게 향하던 지극히 이기적인 시선을 당신에게 돌리셨습니다. 철두철미하게 선지자를 위한 당신의 의지를 정확하게, 분명하게 관철시키셨습니다. 본문은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욘2:2)라고 이어집니다. 선지자는 또 고난 한 복판에서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여호와를 불렀습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로 하여금 오직 당신 한 분만 바라보며 부르짖어 기도하게 역사하셨습니다.
본문은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욘2:3-4)라고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깊은 바다 속으로 던져 버리셨습니다. 거대한 물과 큰 파도로 덮어 버리셨습니다. 당신으로부터 쫓아 버리셨습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선지자가 자초한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지자는 절망하지 않습니다. 포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여호와의 성전을 바라보겠다고 외칩니다.
여호와의 살아계심과 은혜로우심을 의지하겠다고 외칩니다.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혹독한 고난과 고통의 배후에 여호와가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위해서 꼭 필요한 고난과 고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혹, 또 다시 여호와께서 실망의 고배苦杯를 마실 수밖에 없도록 하였을지라도, 여호와의 가슴에 분노의 화살을 마구 쏘아댔을지라도, 그 결과 견디기 힘든 고난에 던져졌을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더욱 힘써 여호와를 바라보아야합니다. 고난을 참아낼 수 있는 힘과 함께 구원을 위해서 부르짖어 기도해야합니다.
본문은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여호와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욘2:5-7)라고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선지자를 인간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건져주셨습니다. 당신 도움 없이는 결코 살아날 수 없는 죽음의 문턱에서 건져주셨습니다.
육체는 물론 영혼까지도 완전히 탈진해 버린 절망적인 상태로부터 구원해 주셨습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겨운 상황 속에 던져진다 할지라도, 도무지 회복될 것 같지 않는 문제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할지라도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오히려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여호와를 생각해야합니다. 여호와께 부르짖어 기도해야합니다. 본문은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욘2:8-10)라고 마무리됩니다.
격렬하게 휘몰아쳤던 폭풍우는 자신의 뜻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도망치기에 바빴던 선지자를 쫓으시는 여호와의 거룩한 도구였습니다. 지극히 이기적인 선지자의 자기 의와 교만과 자신도 모르게 섬기고 있었던 가증스러운 우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여호와의 거룩한 도구였습니다. 반드시 지켜야할 사명의 자리로 되돌리려는 여호와의 거룩한 도구였습니다. 고난을 통해 이러한 사실을 깨달은 선지자의 입에서 원망과 불평대신 감사 기도가 튀어나왔습니다. 선지자는 여전히 소망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죽은 것이나 다를 바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여호와께 감사 기도를 드리겠다고 외쳤습니다. 세상에서 의지할 수 있는 소망이 모두 사라진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살아 있는 성도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해야만 하고 또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감사 기도입니다. 모든 일들이 잘 될 때 드리는 감사 기도와는 차원이 완전히 다릅니다. 누구나 다 드릴 수 없습니다. 모든 상황을 통해서 당신의 선한 뜻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의지할 때만 드릴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놀라운 변화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선지자는 또 구원은 오직 여호와께 속한 일이라고 외쳤습니다.
이전에는 지극히 이기적인 자신에게 집중했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하려고 몸부림쳤지만 이제부터는 여호와의 뜻에 온전히 순종하겠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믿음의 결단입니다. 철저한 자기 죽음을 경험한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는 얼마든지 발견할 수 있는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동시에 선지자를 산 채로 삼킨 상태에서 삼일동안 쉬지 않고 내달렸던 물고기가 멈췄습니다. 불순종하던 자에서 순종하는 자로 거듭난 선지자를 토했습니다. 이후, 선지자는 거룩한 숙주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통로가 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고 하신 곳에서 회개의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그의 희생을 통해 어린아이만 12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성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길은 사람에게로 향한다.”라는 책의 저자인 그는 “돈이 주인인 세상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부름을 받은 까닭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어쩌면 강고한 자본주의의 세상에 균열을 내라는 것은 아닐까? 딱딱한 얼음을 깨는 데는 망치보다 바늘이 더 유용하듯 자본주의 질서에 균열을 일으키는 것은 맘몬으로부터 독립한 인격적 그리스도인 한 사람이면 충분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의인 한 사람이 있으면 유다를 심판하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는 오늘도 여전히 타락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거룩한 숙주가 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한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코로나19로 모두가 힘들었던 2021년 한 해 동안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삶의 필요까지 넘치도록 채워주신 여호와께 전심으로 감사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받은 축복에 감사만 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여전히 어려운 이웃을 돌아볼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들의 영혼육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거룩한 통로 곧 거룩한 숙주가 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 여호와를 영화롭게 할 뿐 아니라 더할 나위 없이 풍요로운 감사 절기를 보내는 복된 저와 여러분 되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