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2월 통일 교육의 하나로 금강산 관광을 다녀왔다.
내가 다녀온 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이 발생했고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어 아직까지 재개되지 않고 있다.
어쩌면 다시 금강산 관광이 재개 되겠지만 기약은 없다. 그래도 운 좋게 다녀올 수 있었다.
ㄷ2008년 당시 나는 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었고, 비록 봄방학 기간이었지만 새학년을 준비해야했기에 전교사들이 정상근무를 하고 있었다.
예전에는 학기 중에 업무상 출장을 갈 경우에는 큰 부담이 없었지만2000년을 지나면서부터는 출장기간의 수업 결손을 출장가기 전에 미리 수업을 하거나 다녀와서 보강을 해서라도 채워야 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가급적 출장을 기피하게 되어 꼭 출장을 가야할 상황이 되면 주로 후임교사들이 가야했다.
그런데 이런 시기의 금강산 통일 연수는 흔히 말하면 수업 부담도 없는 ‘꽃연수’라 부를 만 했다. 중학교에 한명 고등학교에 한명이 배정되어 동해 삼척지역 연수자는 당일 아침 동해 공설운동장에 모여 단체로 고성까지 이동하기로 했다. 아침에 일어나 옷을 단단히 입고중학교에 근무하는 동료 선생님 집에 가서 같이 동해 공설 운동장에 도착하니 벌써 우리가 타고 갈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버스에 승차하고 보니 예전에 같은 학교에 근무하다가 태백 철암으로 전근 가신 선생님과도 반가운 해후를 했다. 인원점검을 하니 모두 제시간에 집결하여 바로 출발해서 고성으로 향했다.
고성읍을 지나 금강산 휴게소로 가는 도로에는 금강산 관광객을 주된 고객으로 삼은 건어물과 젓갈류 등과 생선 매운탕을 판매하는 식당, 상점, 주유소를 겸한 휴게소가최소한 100미터에 한곳 정도는 있어 너무 많아 보였다. 이곳들은 금강산 관광이 중단되고 그 기간이 장기화되자 거의 큰 손해를 보고 빚을 지게 되었다. 남북 간의 적대관계와 냉전이 엉뚱한 사람들에게까지 불똥이 튀게 된 대표적인 사례가 아닌가 생각된다.
현대 금강산휴게소에서 황태 국으로 아침을 먹고 차량탑승 인원이 조정되어 새로운 관광버스가 배정되어 탑승하자 현대 아산 측에서 안내원이 탑승하여 휴대폰 등은 소지가 불가능하다며 미리 수거해갔다.
이때 수거해간 휴대폰은 남북 출입 사무소를 통과해서 돌아 온 후에 돌려받았다. 그리고 고성능 카메라(광학 줌 렌즈가 고성능인 디카) 등도 제한 품목이라고 했지만 실질적인 제한은 없었다.
남북 출입 사무소에서 버스에서 하차하여 남측 통과 수속을 받기 전에 금강산 지역에서 사용이 가능한 달러로 환전을 했다.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측 입경수속을 받기위해 군사 분계선을 지났다.
군사분계선 하면 엄중한 경계를 하는 무시무시한 철조망이 쳐있을 것으로 생각을 했지만 사실은 지름 7센티에 길이 40센티 정도의 시멘트 말뚝이 하나 박혀 있고 그 앞에 군사 분계선이라고 적힌 작은 팻말 하나가 전부로 동승한 안내인이 알려주지 않으면 군사분계선이 어디인지 넘어섰는지도 모를 정도였다. 오히려 남방 한계선과 북방한계선에 엄중한 철책선과 무장을한 군인들이 지키는 초소가 있었다.
통과한 것도 제대로 의식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을 지나 북한 병사들이 지키는 살벌한 분위기의 북방한계선도 통과하여 북측 입경사무소 앞에 내려 입경수속을 받기위해 줄을 서서 대기하다가 우리가 중학교 때 모자 안쪽에 딱딱한 종이나 플라스틱 띠를 넣어 챙을 높인 모자를 쓴 군복 차림의 관리 사무원 앞에 가서 미리 발급받아 패용하고 있던 신분증을 제시하니 한번 가볍게 힐끗 보더니 바로 스탬프를 찍어준다.
사무소를 나와 다시 버스에 올라타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금강산으로 향하는 도로 양옆에는 연두색 철망으로 된 펜스가 쳐져 있었고 길이 교차하여 펜스가 끊어지는 지점에는 초소가 있고 경계병이 있었다. 북한 주민들이 살고 있는 가옥은 거의 낮은 흙벽돌로 지어진 집으로 중국의 농촌 가옥과 규모나 구조가 거의 같았다. 겨울의 추위에 대비하여 폐쇄적인 가옥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탄 버스가 지나갈 때에는 초소의 경계병이 나와 붉은 깃발을 흔들었다. 그러면서 북한주민들의 접근을 제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이러한 제한조치로 북한 주민들을 가까이 대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대체로 체격이 왜소해보였다.2003년 앙코르와트에 갔을 때 보았던 캄보디아 주민과 비슷할 정도의 체격이었고, 마땅히 이용할만한 교통수단이 없는지 거의 걸어서 다녔고 우리나라의 그렇게 흔한 자전저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짐도 가방이나 배낭으로 운반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거의가 괴나리봇짐이나 스님들이 탁발할 때 사용하던 바랑 같은 것을 매고 다녔다.
금강산 특구에 도착하여 숙소를 배정받았다. 강원도 지역의 교사들은 여교사는 관광단지 내에 있는 외금강 호텔이고 남교사들은 관광단지에서3킬로 정도 떨어진 금강산호텔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온정각 부근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온정각에 모여 현대 아산 측으로부터 금강산관광을 실현하기까지의 과정과 현재 그리고 앞으로의 전망과 금강산관광이 남북교류에 기여하는 점 등을 소개받았지만 내용의 대부분이 공치사에 자화자찬이었다.
거의 한시간정도의 지겨운 시간을 보낸 후 다음 순서는 북한 교예단의 서커스 공연이었다.
당시 나는 중국 북경 조양극장에서 북경 서커스를 본지불과 2달도 되지 않았었다.
그래서 서로를 비교할 수 있었다.
내가 본 바로는 공연장의 시설이나 연출 부분은 북경 서커스가 우위에 있지만 기술적인 면에서는 북한교예단이 우위에 있었다.
간단하게 비교를하면 북경이 원기둥을 눞혀놓고 그 위에 판자를 놓고 위에 올라가 균형을 잡는 수준이라면 북한은 공위에 판자를 놓고 올라가 균형잡기였다. 공식적인 일과를 마치고9시를 전후한 시간에 그냥 숙소로 돌아갈 수는 없다해서 몇몇 주당이 한잔을 하기로 하고 포장마차를 찾았다.
우선 현대 측에서 운영하는 실내 포차에서 소주를 몇 병마시고 분위기가 업되어 북측에서 운영하는 실내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런데 그 시간에는 우리 숙소로 가는 버스가 이미 거의 끊어지고 10시40분경의 막차만 남아있었다. 만약 이차를 놓치면 어두운 눈길을 한 시간 정도 걸어가야 한다 문제는 실수로라도 제한 구역을 벗어난다면 그 이후의 상황은 상상하기조차도 싫었다.
<금강산 구룡령에서 북측 아내원이 찍어준 사진>
<금강산 온천 노천 온천탕에서본 금강산의 금강송>
<북경 조양극장에서 본 북경서커스의 한장면 :북한 서커스는 원통이 아니라 공을 놓았다고 생각하면 된다.>
아침에 기상하여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오늘은 정해진 일정은 없이 연수를 마치고 돌아가는 날이다. 아침을 먹고 온정각에 있는 상점에서 기념으로 살만한 물건이 있나하고 둘러 봤지만 별로 살만한 게 눈에 띠지 않아서 몇 바퀴를 돌다가 결국 말린 고사리만 한 상자 사고 말았다. 점심은 옥류관에서 온반으로 해결을 했다.
버스를 타고 거꾸로 북측 사무소에서 출경수속을 하고 군사분계선을 넘고나니
나도 모르게 안심이 되어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뚜렷하게 북측에서 제재를 가하거나 했던 것은 아니지만 뭔지 모르게 가슴 한쪽에는 뭔지모를 불안감이 깊이 자리잡고 있었나보다. 남측사무소에서 입경 수속을마치고 관광버스를타니 현대측 안내원이 수거해갔던 휴대폰을 돌려주었다.휴대폰을 받아 전원을 켜고나니 무사히 다시 돌아왔다는 실감이 난다.
첫댓글 왜 사진은 안 보이고 배꼽만 보이는 겨?
10. 26때 비무장지대에서 금강산앞으로 흘러서 해금강으로 빠지는 GP, 남강가에서 지뢰, 폭파병으로 근무했다.
그 곳에는 가랑잎 소리에도 머리끝이 쭈삣쭈삣 선다.
무열이가 모골이 송연했던 것처럼 금강산 일만이천봉도 머리끝이 쭈삣쭈삣 솟아 있나보다.
다음기회에 좀 더 많은사진 올려주라 빵빵하게 ㅎㅎㅎ
배꼽 자랑 할려고 한건 아닌디,네이버에 개설한 블러그에 올린 사진을 복사해서 붙이기를 했더니 배꼽 콘테스트를 하네.
다시 올렸는데, 아직도 배꼽이냐? 내건 이상없이 나오는디.
지금은 아주 잘 보여서 좋아유~!
원통은 좌우 균형만 잡으면 되지만, 공은 전후좌우로 균형을 잡아야하기에 훨~ 어려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