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강해 1
지고(至高)의 신! 예수님
(히 1:1~3)

마치 수십 량의 객차를 달고 힘차게 내달리는 기관차처럼 히브리서의 서언인 오늘 본문은 탁월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선언으로 히브리서를 이끌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신학과 신앙과 진리의 요체가 되시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모든 것이 다 예수 그리스도께 매달려 있다. 당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은 온전히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지 않았다. 곧 파괴될 예루살렘 성전과 유통기한이 지난 의문율(제전적 율법)에 여전히 매달려 가고 있는 그들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확신시키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생명처럼 여기는 그들 신앙의 요체(제전적 율법과 성전 봉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종식시켰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를 달고 질주하는 본문의 탁월한 세 절(節)은 히브리서 전체의 요약으로서 우리를 하늘 궁정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A. 본문 이해
1. 말씀하시는 하나님(1~2a절)
“1 옛적에 선지자들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2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히브리서는 창세기나 요한복음처럼 하나님에 대한 장엄한 선언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 다음에 나오는 모든 진술은 이러한 선언에 매달려 갈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존재하심에 대한 진술은 입증할 수도 없고 반증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오랜 기간 동안 이에 대한 물고 물리는 논쟁과 주장이 있었지만 공은 결국 개인에게 넘겨졌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을 믿어야 한다’(히 11:6)고 전제하고 있다. 오직 믿음!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주요 활동은 무엇인가? 특이하게도 성경 전체를 통하여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주요 사역을 히브리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다. 히브리서에는 말씀하시는(speaking, saying)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총 36번이나 나온다. 사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히브리서만의 독창적 이해가 아니라 성경전체의 이해로서 심지어 하나님은 말씀이시(요 1:1)라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첫째로 이는 하나님의 인격성(人格性)을 전제한다. 하나님은 돌이나 나무 같은 무인격, 비인격이 아니시고, 인간과 같이 생각하시고 말씀하시는 인격적 존재이시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과 우상을 비교할 때, 단순히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분이지만 우상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존재라고 대조한다(계 9:20; 고전 12:2; 합 2:18-20; 시 115:4-8). 둘째로 이는 하나님의 현존성(現存性)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과거에만 존재하셨던 분이 아니라 지금도 살아계셔서 말씀하시고 창조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계 1:4)시다. 셋째로 이는 하나님의 연루성(連累成)을 시사한다.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과 대화하시는 분이시다(렘 33:3; 슥 10:6; 마 7:7~11; 사 1:18).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천지와 사람을 창조하시고 무관심하거나 내팽개치신 분(理神論)이 아니시라, 당신의 형상으로 창조하신 인간과 역사에 끊임없이 연루되신 분이시다. 한마디로 책임지시는 하나님이시다.
교훈과 적용/ 말씀하심은 들으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내 말과 뜻을 주장하는 것이 결코 신앙이 아니다. 듣는다는 것은 순종을 의미한다. 우리가 듣고 순종하면 하나님과의 사귐이 시작된다. 사귐에는 기쁨이 있는 법이다. 왜 신앙이 기쁘지 아니한가? 생의 기쁨을 되찾기 원한다면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죽을 것 같아도 순종하시라(요일 1:6-7).
2. 아들의 위격(2a~3a절)
“2a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3a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1) “아들”이라는 용어는 예수님의 위격(位格, person)의 중요성과 탁월성을 가리키는 유일한 어휘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용어법’은 우리를 오도할 수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시간과 기원에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들의 기원을 그 아버지에게서 찾으며, 아버지는 아들보다 시간적으로 앞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예수님을 아들로 묘사하고 있지만 이 용법의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에 대한 성경의 언어는 공유된 존재, 동등성, 거룩한 본질을 가리킨다. 한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이라는 의미로 아들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아버지가 원숭이면 아들은 원숭이지 사람이 아니듯이, 또한 아버지가 사람이면 그 아들도 사람이듯이, 아버지가 하나님이시면, 그 아들도 하나님이시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아들이라는 말을 그렇게 이해했다.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으로 삼으”신다(요 5:18)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비위가 거슬렸고 예수님을 참람되다하여 죽이려고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사람들이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용어로 선택된 단어가 바로 ‘아들’인데 오히려 가장 오해받는 용어가 되어버렸다.
(2)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아들이신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요 17:5 “창세전에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 딤전 6:16 하나님은 불가시적 존재이시므로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을 봄)시오 그 “본체의 형상”(빌 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이시라 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문자적으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광채와 본체이시지(being) 그렇게 되신(became)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하나님보다 열등한 분이라거나 시간의 어느 경점에서 하나님의 신분으로 격상되었다는 말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는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아들이셨다. 한마디로 처음부터 하나님이셨다.
(3) 예수님은 처음부터 만유의 주이셨으나 “땅은 인생에게 주셨”(시 115:16)다. 그래서 아담은 이 땅의 주인이었으나 범죄한 후 권리를 상실하여 잠시 주권이 사단에게 넘어갔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되찾으셔서 ‘둘째 아담’(고전 15:45, 47-둘째 사람, 마지막 아담)이 되셨다. 다시 말해서 이 땅의 주권을 넘겨받은 후사로 세움을 받았다. 아담이 상실한 이 땅을 예수님께서 상속하심으로 영원한 인류의 대표자가 되신 것이다.
교훈과 적용/ 예수님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는 일은 이미 완료되었다. 성경은 우리가 주님과 연합하면 우리도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롬 8:17; 4:13; 갈 4:7)가 되어 영광을 상속하는 자가 된다고 약속한다. 신앙으로 인하여 잠시 고난도 있겠으나 장차 있을 영광과 비교될 수 없으니(롬 8:18) 인내하시라.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시라. 그는 곧 이런 환영의 말씀을 듣게 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예비 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3. 아들의 사역(2b, 3b절)
“2b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3b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아들의 사역은 그의 위격만큼이나 위대하고 영광스럽다. 하나님으로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역의 세 국면에 대하여 언급하기를 ① 성육신 이전에는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고 지금도 말씀으로 만물을 유지하시고 계시며 ② 성육신 동안에는 모든 참상의 근원인 죄를 십자가로 정결케 하셨으며 ③ 성육신 이후에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좌정하셨다. 다시 말해서 만왕의 왕, 만주의 주로서 우주를 통치하신다.
더불어 예수님의 사역을 구약적 배경 하에서 “삼중사역(선지자, 제사장, 왕으로서의 사역)”으로 약간 달리 해석할 수 있다. ① 선지자로서 아들은 성육신하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전달하셨다. ② 제사장으로서 아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 ③ 왕으로서 아들은 당신께 충성된 자들을 하나님께 되돌리기 위하여 다시 오셔서 죄를 심판하시고 만국을 다스리실 것이다.
교훈과 적용/ 내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이신가? 만약 우리가 그분이 어떤 분이시라는 사실을 정말 알고 있다면 우리가 낙담하고 절망할 이유가 있는가?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히 3:1). 그분에 대하여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분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알라. 그분을 알고 싶다면 말씀을 순종해 보시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보시라.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 34:8).
B. 본문의 결론과 적용
오늘 본문은 한마디로 “예수님이 최고”라 한다. 왜 그분이 최고이신가?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며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고 또한 창조한 만물을 지금도 붙들고 계시며 질서를 유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생명의 시여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있기에 온 우주가 존재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복된 이유는 자신을 희생하셔서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고 그런 분이 우리를 영원히 다스릴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분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지고(至高)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아무리 예수님이 최고요 지고의 신이라 해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그분이 당신에게 진정 최고이신가? 그분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 예수님을 지식으로만 알지 말고 관계로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설교를 들으면서 예수님에 대하여 지식으로만 배우지 말고, 예수님과의 관계가 깊어지시라. 히브리서를 매일 한 번씩 읽고 깊이 묵상하고 말씀을 좇아 살아보시라. 예수님을 체험적으로 알아야 나도 살고 내 가정도, 이 교회도 산다. 그분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