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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6:1-13(9)) 목자의 목자, 목자의 백합화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우리 오늘의 번제 하나님말씀 함께 봅니다. 아가서 6장 말씀 1-13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1-9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나머지는 여러분이 각자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 여자들 가운데에서 어여쁜 자야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네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아갔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2.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3.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
4.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구나
5.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6.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으니 쌍태를 가졌으며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구나
7.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8.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9.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하고 왕비와 후궁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오늘 읽은 말씀 중심으로 <목자의 목자, 목자의 백합화>라는 제목으로 하나님말씀 증거 합니다.
5장에서 본 것처럼 술람미 여인의 마음속에 그토록 뜨겁던 사랑의 갈등이 생겼던 것을 우리가 기억합니다. 이제 그 갈등이 생겼던 상태를 자기가 밤중에 바깥을 돌아다니다가 봉변을 당한 것으로 후회를 하게 됩니다. 이런 상태에서 오늘 6장은 그 갈등을 극복하고 다시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이 그 처음의 사랑을 회복하고 마른 땅에 비가 내린 후에 더욱 땅이 굳어지는 것처럼, 그렇게 더 견고한 사랑으로 한 단계 더 고양되는 것을 본문이 우리들에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 번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의 이 사랑이 나 자신과 하나님, 나 자신과 우리 주님과의 관계를 예표하는 뜻 깊은 것으로 생각을 해서 우리가 함께 살펴봅니다.
먼저 6장 1절에 나오는 말씀은 예루살렘 여자들의 합창입니다. 아직도 재회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그런 사랑의 갈등구조를 얘기하고 있고, 그 다음 2, 3절은 신랑을 찾아 나선 신부가 신랑을 찾고 나서 부르는 노래입니다. 바로 이 구절에서부터 이 신부의 마음에 큰 변화를 볼 수가 있습니다.
결혼생활에 임하는 이 술람미 여인의 마음의 변화를 우리가 2, 3절을 통해서 강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의 제목이 ’목자의 목자, 목자의 백합화’입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술람미 여인의 자기 자신의 기분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감정상태가 있습니다. 그 기분과 감정상태에서 비롯된 생각이 있고 바람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람을 그대로 신랑인 솔로몬에게 적용을 하고 솔로몬으로부터 얻기를 원합니다. 일단은 내가 굳건하게 나의 감정과 기분과 내 생각과 내 소원과 내 계획을 공고하게 붙잡고 말뚝을 박아 버리고 그것에 솔로몬이 맞춰주기를 바랐는데 이것이 바로 갈등의 이유였습니다. 그대로 안 되니까 삐쳐서 솔로몬이 와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는데도 다시 나와서 문을 열면서 발에 흙을 묻히는 것이 옳지 않다고 삐친 상태로 있다가 후회하는 단계로 들어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오늘 2, 3절을 보면 “내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라는 말을 합니다.
처음에 ‘자기 동산’이라고 할 때에 동산은 단수고, 두 번째 나오는 ‘동산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에서는 동산이 복수입니다. 처음 동산은 자기 자신을 가리키고, 그 다음에 동산들이라고 하는 복수는 궁궐의 환경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양 떼를 먹인다.’고 하는 이 말이 이제 우리가 이 여인의 심경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말입니다. 물론 이 양 떼를 먹인다고 하는 이 말이 2:16절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때와 지금의 차이가 뭐냐? 여러분, 이런 거예요. 일단 이 양 떼를 먹인다는 말이 뜻하는 바는, 우리가 마음속에 기억해야할 내용은 남편이 왕으로서 나라를 다스립니다. 문무백관이 있고 또 궁궐 안에는 갖가지 시중을 드는 자들과, 또 700명의 후비와 300명의 빈비가 있지 않습니까? 빈장들이 있어요. 이렇게 수많은 사람들 이스라엘백성들까지 다스려야 하는 왕의 신분을 목자로 봅니다. 그리고 백성들과 문무백관들 천 명의 왕궁의 여인들을 다 양 떼로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신부로서는 보통 결단을 통해서 나온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양은 호랑이나 표범 심지어 사슴처럼 연약한 것 같을 지라도 스스로들 사는데 양떼는 스스로 있지를 못합니다. 어린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처럼 한시도 양떼를 떠날 수가 없어요. 그래서 때때로 목자들이 팀을 이루어서 함께 할 때가 있어요. 왜냐하면 화장실 갈 때나 잠깐 자리를 비울 때에 양떼들을 돌보아줄 사람이 있기 때문에, 팀을 이루어서 양떼를 돌보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양떼에서 마음을 뗄 수가 없는 것을 이 여자가 인정을 하는 겁니다. 양떼에서 눈을 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신부의 입장에서는 쉬운 일은 아니에요.
보통 우리가 결혼해서 신혼생활에 들어가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뭡니까? 여러분도 경험하셨고 영화 같은 데서도 나오지 않습니까? 신랑들이 일찍, 일찍 들어옵니다. 마음은 다 신부와 새로 꾸민 가정에 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혼을 했는데 한 달이 되고 두 달이 되도록 신랑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출장을 갑니다. 워낙 회사일이 바쁩니다. 이때 신부가 ‘도대체 나는 왜 결혼을 했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냥 저 사람이 가끔 들어와서 잠자고 있는 이 집을 지키는 문지기라도 되는 것이냐? 이 집의 식모라도 되는 것이냐? 여관방에서 일하는 하녀냐?’라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신혼 초에 신부가 신랑이 하는 일을 충분히 인정하면서 나 자신을 향하여 어떠한 시간과 배려와 관심을 표명하지 못하는 상태를 견딜 수 있는 신부는 실제로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양떼를 치는 목자라고 노래하는 것은 보통 의미가 들어가 있는 단어가 아닙니다. 양떼를 치는 것은 솔로몬의 일입니다. 왕으로서의 일이에요.
그런데 그 일은 신부에게 있어서 결정적이고 치명적인 라이벌입니다. 자기 신랑의 마음을 자기에게서 빼앗아 가는 결정적인 라이벌인데 이 여인이 그것을 인정 합니다.
그러면 2:16절에서의 똑같은 언급은 어떻게 차이가 날까요? 2:16절에도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 떼를 먹이는 구나”라고 하는 이때는 흔히들 결혼하기 전 아가씨들에게 물어보면 이런 말들 종종 합니다. 자기 일에 몰두하는 모습을 볼 때 나는 그런 남자가 멋있어 보인다. 이것이 다 결혼하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결혼했는데 자기 일에 몰두합니다. 자기 일에만 몰두할 때 좋아할 신부가 없어요.
그러므로 결혼하기 전에 양떼를 먹이는 솔로몬을 좋아합니다. 멋있습니다. 지혜로 나라를 다스립니다. 나라가 평강합니다. 태평성대를 이룹니다. 짱 입니다. 기가 막히게 멋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결혼을 했어요. 여인의 감정과 기분이 있습니다. 바람이 있습니다. 그 바람을 따라 신랑을 보는데 신랑이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삐쳤습니다. 그래서 갈등이 생긴 겁니다. 이 상태를 다시금 또 다른 의미에서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는구나.'라고 노래하면서 조금 바뀌었어요.
'백합화를 꺾는다'고 말합니다. 동산에서 내려 왔습니다. 자기가 결혼했다는 것이에요. 그렇지만 수많은 동산이 있습니다. 궁정 안에 수많은 여자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무백관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늘에 별처럼 많이 있습니다. 내 신랑은 이 모든 사람들을 다 양떼로 여기고 이끌어 가야할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 기분에만 맞추어 줄 수는 없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만 해 줄 수는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결혼하기 이전에 자기 일에 몰두하는 신랑이 멋있게 보였다가, 결혼하고 나서는 왜 나에게 시간을 내 주지 않는가? 배려하지 않는가로 봤다가 이제 신랑을 일과 함께 묶어서 마음에 받아 드립니다.
여러분, 그런 것 많잖아요? 남자들이 성공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 보다 좀 더 일찍 일어나고 좀 더 늦게 퇴근하고 열심히 영어공부도 하고 자기 분야에 대해 연구도 하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집에 들어오지를 않아요. 가끔 명절 같은 때 휴일 같은 때 보면 여자 분들끼리 옆집 뒷집 할 것 없이 엄마들끼리만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오는 경우를 봅니다. 그 마음이 좀 안됐어요.
‘휴일인데 신랑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여자분들 끼리 두 세집 모여서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오나?’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여러분, 이 상황이 신앙에 그대로 적용이 됩니다. 진짜 이 세상에서 사는 부부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오늘 이 아침에 다 얘기할 수는 없어요. 모든 신부들이 신랑을 이렇게 봐야 하느냐? 신랑을 신랑의 일에 내 줘야 되느냐? 이렇게 결정해서 이 땅위에서 사는 부부관계를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이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나야 됩니다. 하나님과 결혼하고 세례 받고 주님과 맺어지기 전에는, 우리 인생의 급한 문제와 내 마음의 기분과 내 마음의 소원을 따라서 하나님께 나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비하신 분이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고 간절히 이 세상일을 원하면 들어주시기도 하시고 그래서 하나님께 나왔습니다. 이제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며 살기로 결정했습니다. 결단했습니다. 이제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내 기분을 굳건히 잡고 내 감정상태를 먼저 절대화하고 그리고 나의 바람을 말뚝 박아 놓은 다음에 하나님께로 나오는 전형적인 갈등구조 안에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 지금 마음이 평안하지 않습니까? 왜 지금 마음이 괴롭고 고통스럽습니까? 바로 이 갈등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나는 이제 한 송이의 백합화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먼저 자기 기분을 굳게 붙잡고 자기감정을 붙잡고 자기 바람을 절대화하고 하나님께 나올 때는 목자의 목자가 됩니다. 목자를 움직이는 또 다른 목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술람미 여인의 마음이 어떻습니까? 그 들판에 피어있는 백합화 여러 송이 중에 하나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냥 그 목자가 양을 치다가 그 백합화가 예뻐서 꺾었습니다. 다른 백합화면 어떻습니까? 다른 곳에 있었으면 다른 백합화도 꺾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이렇게 하신다거나 솔로몬이 이렇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술람미 여인의 자아의식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솔로몬 앞에서 더 이상 자기의 존재를 특별한 존재로 내밀지 않기로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나만을 봐줘야 되고 나만을 위한 시간을 내 줘야 되고 나만을 위한 배려가 있어야 되고 나와 함께 놀아줘야 되고 나와 함께 외식을 해야 되고 나를 위한 내 몫을 신랑으로부터 챙기려는 마음을 끝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 옆에 널려져 있는 한 송이 백합화로 남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생각할 때 이렇게 생각해야 진정한 평화가 우리 마음에 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대하러, 하나님을 찾으러,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하나님을 만나려고 기도하는 시간에 나옵니다. 말씀시간에 나옵니다. 그런데 내 마음에 내 감정과 내 기분에 현실상태에 대한 나의 판단과 극복하고자 하는 나의 욕구를 굳건히 말뚝 박고 나오게 되면 하나님의 목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이끌고 하나님께서 움직이셔야 하고 활동하시고 역사하셔야 될 방향을 제시하는 목자로서 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마음을 가져야 됩니까? 술람미 여인의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겁니다. 하나님은 나도 섭리하시고 다스리시지만, 오늘 살인죄로 감옥에 들어가는 죄수도 그 사람의 목숨도 붙잡고 계십니다. 내 필요를 채워주셔야 되지만 이웃의 필요도 있습니다. 이웃의 필요와 내 필요가 상충할 때는 하나님의 섭리와 뜻에 의해서 하나님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길을 따라서 그 필요들을 다 조정하실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내 필요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내 소원의 하나님이 아니시고 내가 느끼는 감정욕구의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빌라도를 보실 때 주님이 어떻게 보십니까? 네가 지금 부당하게 나를 재판하고 있지만, 나의 본래 하나님 된 신분으로 너를 멸할 수도 있지만, 인간으로 태어난 입장에서 빌라도 너에게도 하나님이 역사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너의 생명도 주관하고 계시고 너의 일생도 섭리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냥 믿는다고 말씀하시고 그 빌라도에게 당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맙니다. 이런 자세가 하나님을 맞이하는 태도라는 것이에요.
술람미 여인이 이제는 신랑의 목자가 되지 않겠다. 내 입장을 먼저 정리하고 신랑에게 찾아와서 입장을 들이밀고 받아주고 그대로 행해 달라는 갈등구조를 벗어나겠다는 겁니다. 단지 양떼를 먹이는 목자인 신랑 옆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가 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결혼을 했다는 것이 무엇이냐?
그 목자가 백합화인 나를 수많은 송이 중에 별것 아닌 흔해빠진 나 같은 여자를 꺾어서 결혼상대로 삼지 않았느냐?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면서 신랑을 보는 겁니다. 이제 자기의 욕구를 떠나서 자기의 욕구로 끌어당기려는 입장을 벗어나서, 목자로서 양떼를 먹이고 있는 신랑을 관망하며 기뻐하며 그 신랑을 찬양합니다. 평생 목자의 백합화로 남겠다는 겁니다. 목자의 목자로서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술람미 여인의 자아의식입니다. 솔로몬과의 관계에서 갖는 자아의식.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진 이 술람미 여인에 대해서 솔로몬은 무엇이라고 노래합니까?
여러분, 기가 막혀요. 4절에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구나”라고 하는데 이게 무슨 말이에요.
지금 들판에 동산에 널려있는 백합화 중에 하나로 자기를 자처하는데 솔로몬이 지금 '깃발을 세운 군대같이 당당하다'고 말합니다. 풀 섶에 섞여 피어있는 백합화 하나, 그 또 하나의 풀이 어떻게 깃발을 내세우고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오고 있는 승전소식을 담고 보무도 당당하게 들어오고 있는 군대와 같겠습니까? 너무도 차이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바로 솔로몬이 스스로 솔로몬 옆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에 불과하다고 자처하는 술람미 여인이 깃발을 들고 승전보를 갖고 돌아오는 정복군대로 보는 겁니다. 그리고 디르사가 뭐예요?
‘디르사 같이 어여쁘다’
솔로몬 왕 이후에 르호보암 왕 이후에 유대나라가 나눠지지 않습니까? 북 왕국 이스라엘의 수도가 디르사입니다. 왜 디르사를 수도로 삼았느냐 하면 교통뿐만 아니라 도시의 주변경관이 기가 막히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그렇게 아름답게 보고 아직 일어나지 않고 있지만 나중에 북 왕국과 남 왕국으로 갈라졌을 때 수도가 디르사와 예루살렘입니다. 그러니까 어느 지역의 나라든지 간에 최고의 도시라는 겁니다. 특히 그 옛날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이 갖는 의미는 '평화의 기초'라는 뜻 아닙니까? 이 예루살렘은 이 지구 위에서 볼 때 우주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볼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지구를 볼 때도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것은 점 중의 점이요. 티끌 중의 티끌입니다.
여러분, 티끌 중에 티티티끌끌끌이(아주 작다는 것이지요.) 되게 할 만큼 우주를 지으신 하나님이 유일하게 그 큰 망망한 우주 안에서 마음을 붙이는 곳이 예루살렘이었습니다.
황하유역에 화려한 중국 문명이 꽃피우던 곳도 아닙니다. 갠지스 강 주변도 아닙니다. 메소포타미아 강 주변도 아닙니다. 화려한 고대이집트 문명이 꽃피우던 곳이 아닙니다. 그리스의 알렉산드리아도 아닙니다. 그러면 어디입니까? 예루살렘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 당신의 말씀의 법궤가 있었고 그 법궤 앞에 나올 때 그 법궤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인격 되심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기 위해 내가 주인 노릇했던 죄악들을 번제로 드리면서 뉘우치고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오는 당신들의 백성들이 있던 예루살렘에 온 지구상에 유일하게 마음을 두셨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바로 그곳에 계셨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마음을 붙이십니까? 이웃과 싸웠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앞 집 아줌마를 때려 주세요.’라고 하나님과 갈등구조에 있습니다. 평화의 기초위에 서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평화를 세울 수 있는 예루살렘 평화를 세우실 수 있는 기초가 되는 마음가짐이 어떤 마음가짐입니까? '하나님! 저 아줌마도 머리끝서부터 발끝까지 지으시고 저 아줌마의 생애도 주관하시고 섭리하고 계시니 하나님 나의 감정과 나의 욕구를 그대로 간구하기에는 너무나 뿌리 깊은 죄인이고 추악한 죄인이니 저 여인에게도 목자 되시고 나에게도 목자 되시는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이 마음. 하나님을 나만을 위한 하나님, 내 감정과 내 욕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이 지구위의 모든 생물체의 목자로서 보는 이 마음가짐.
그 중에 나는 한 송이 피어있는 백합화, 백합화는 능동적일 수가 없어요. 그냥 하나님이 눈길을 주시고 손을 내밀어 나를 꺾어 주실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매일 주시는 대로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매일, 매일을 백합화로 사는 것입니다. 매일 하나님이 나를 꺾으셔서 당신의 손에 쥐시고 당신의 가슴에 꽂으시고 살아가는 겁니다. 이것이 날마다 죽는다는 바울의 고백이 아닙니까?
날마다 하나님을 목자로서 이 지구와 온 우주를 운행하시는 목자로서 보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아무것도 아니야, 난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보는 이 마음을 하나님은 모든 적을 섬멸한 승리한 군대로 보신다는 겁니다. 너무 보잘 것 없고 유약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에게 가장 멋지고 강한 인간이 누굽니까? 자기 자신을 들판에 핀 한 송이 백합화로 보는 거예요.
‘하나님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됩니까? 왜 나만 고통스럽습니까? 왜 내 일을 실패하게 만드십니까? 정말 당신이 살아 계십니까?’라고 하는 마음가짐은 하나님께 티끌입니다. 갈등구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이 마음가짐은 티끌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9절에 '내 비둘기'라고 하고 솔로몬이 여인을 향한 노래가 나오잖아요?
“그는 그의 어머니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가 귀중하게 여기는 자로구나”
아니 여자들 치고 외딸은 아니라도, 외딸도 있고 귀중하지 않은 딸이 누가 있습니까? 다 그렇지요. 그러나 목자인 솔로몬 앞에서 그 목자의 목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그냥 들판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로 자처해서, ‘내가 무슨 별난 것이 있느냐? 내가 별난 것이 아무것도 없어.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아? 나보다 잘난 사람이 세상에 많아.’라고 하나님만 바라보고 있는 사람, 내 주장을 하지 않고 백합화가 피어있듯이 그냥 하나님 옆에 있기를 소원하는 사람의 기도가 어떤 기도입니까?
간구하라고 합니다. 부르짖으라고 하는데 어떤 기도? 무조건 하나님으로 만족하기를 원하는 사람. 하나님이 내게 어떻게 해 줘서가 아니라 하나님 자체로서 만족하기로 기도하는 사람. 그러기 위해서 부르짖는 사람으로 기도내용이 바뀌는 겁니다.
하나님 한 분 계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는 그 하나님으로서 내 앞에 계시면 됩니다. '하나님으로 기쁘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할 수 있는 사람, 이 사람을 하나님은 그 어머니가 딸을 보는 마음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술람미 여인은 지금 내 옆에서 한 송이 백합화로 자처하는데, 나는 너를 너의 어머니가 보는 마음으로 보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나를 향해 가지실 마음을 나의 자아의식으로 곧바로 가져와 버리면 안 돼요.
‘나는 예루살렘 같은 자다. 나는 디르사 같은 자다. 나는 깃발을 든 군대 같은 자다.’라는 말은 내가 가져야할 자아의식이 아니에요.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그렇게 보시면 은혜이고 축복이고 감당할 수 없는 감동적인 역사지요. 그러나 내가 내 자신을 그렇게 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네가 나를 사랑하면 네가 짓지 아니한 집을 주고 성을 주고 포도원을 주고 우물을 주겠다.”
우물을 바라보는 것은 하나님이 바라보시면 되는 겁니다. 내가 바라볼 필요 없어요. 나는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 바라보면 되는 겁니다.
목자의 목자가 되지 마세요. 꿈과 비전이 내가 목자의 목자가 되는 비결입니다. 내 인생의 꿈과 비전은 하나님이 갖고 계시면 됩니다. 그 분이 섭리하시고 그 분이 이끌어 가십니다. 목자의 백합화가 되세요. 그냥 그곳에 붙어서 피어있을 뿐입니다. 목자를 바라보고 피어있어요. 그리고 목자의 눈길과 목자의 손길이 주어지는 대로 목자의 품에 안길 것이에요. 주어지는 대로 받고 사는 겁니다.
그 이상의 내 욕구를 가지고 벌었으면, 늘렸으면, 많아졌으면 하는 마음을 버리시고 그냥 백합화로 사세요. 내 소원이 생기고 움직이자마자 나는 하나님의 목자가 되고, 하나님은 나의 양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이 해괴한 갈등의 구조 속에서는 평화의 기초 예루살렘이 내 마음에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아버지!
감사합니다. 오늘도 목자이신 하나님위에 올라타는 목자가 되려는 나의 이 죄적성향들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다 못 박혀 죽게 하시고, 목자 옆에 피어있는 한 송이 백합화로서 나만의 소원을 위한 나만의 욕구를 위한 하나님이 아니라, 천지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인 것을 인정하여 하나님의 일과 함께 하나님을 받아들임으로 내 마음에 진정한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복된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