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필 > 성거산과 십자가
仲安 조상진
충청도는 백제시대에서 허리가 아니었나 싶다. 그 뿐만 아니라 백제의 최초 도읍지이었다는 설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그 근거로서 위례산성이 있고 지금도 그 성곽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산성을 끼고 이어 있는 산이 성거산이기 때문에 풍수적 산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은 또다시 발동이 걸린다.
성거산은 한자음으로 성(聖)이 거(居)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성스러운 존재는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가. 나는 간단한 등산장구를 챙기고 자동차에 몸을 실어 네비게이션이 안내하는 대로 달려갔다. 종착지에 다다르자 자그마한 저수지가 나타나는데 팻말을 읽어보니 천흥지이다. 물 위에 반사되는 햇살을 반갑게 맞이하면서 등산로 안내도에 성거산에 대한 구절을 본다. 나는 이미 태조산을 답사하면서 고려 태조 왕건에 대하여 머릿속에 입력되어 있었고 또한 어렴풋이 이 산의 성스러움의 주인공도 왕건일 것이라는 추측이 있었으므로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도로변 한쪽에는 깊지는 않지만 계곡이 보이고 나에게도 관심을 가져 주세요 라고 속삭이듯 흐르는 물소리가 정겹게 들린다. 천안시내에서 그리 멀지 않는 지점에 이러한 계곡도 있다는 정보 역시도 내 머릿속에 새롭게 입력된다. 한참을 오르고 보니 산허리에서 사찰 건물이 눈에 들어 온다. 만일사 라는 표지도 있다. 저 사찰 안에는 부처님으로 모시는 불상이 있을 것은 들어가 보지 않고서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산에는 부처님의 흔적도 있다는 말인가.
종교적 의미로만 본다면 왕건의 자취보다는 부처님의 기운이 더 성스럽다고 보아도 될 것이다. 사찰 건물로 들어서기전 다람쥐 한 마리가 반갑다는 듯이 앞다리를 비비면서 인사를 한다. 저를 따라 오세요 이 곳에 얼마나 많이 성스러움이 머물고 있는지를 알려 드릴게요.
하지만 나는 한시라도 빨리 오늘의 목표지 정상에 올라야 하기 때문에 옆으로 발 길을 돌리고 다시 오르기를 반복한다. 능선에 따라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이제는 시야가 넓어지고 눈요기거리도 많아졌다. 자동차로 들어 올 때만 해도 보이지 않았던 들판과 큰 도로변에 세워진 공장들의 규모가 이 지역 생존권과 연결될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다. 높이 오르는 새가 먹이를 더 차지한다고 했던가. 더 올라갈수록 더 많은 풍광들이 새로운 얘깃거리를 축적해주고 있다고 자족하는 사이에 드디어 정상에 도달했다.
백제의 도읍지로서 산성의 의미심장한 모습을 보려했던 나의 기대는 어긋났다. 작년 가을에 말라 서 있던 억새들이 서로 엉켜서 산바람을 타고 흔들거리며 반겨줄 뿐 뚜렷한 역사적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성스러운 기운이시여 어디에 계시나이까. 소리내어 물어 보아도 대답이 없다. 혹시라도 나의 감각이 무딘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도 해보면서 어딘가에서 애타는 나의 모습을 보고 계실 줄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을 모았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본 후, 교신이 되었다는 나 스스로의 신호에 따라 하산을 시작한다.
올라 올 때에는 눈여겨 보지 않았던, 얼굴을 알 수 없는 주인공의 묘지들이 한가롭게 나타난다. 높은 지역이고 전망이 넓은 묘지일수록 그 가문의 무게도 다르리라. 능선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 보니 비교적 큰 규모의 묘지가 하나 발견되고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으며 비석과 상석으로 잘 갖추어져 있다. 묘지 앞을 바라보니 탁 트인 조망은 물론이고 산 아래 지점에 저수지도 흩어지는 지기를 막아주고 있는 형국이니 그야말로 풍수적 사상(四像)이 잘 조화를 이루는 명당중 명당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이 명당에 성스러움이 숨어 있다는 뜻인가. 여러 가지 상념들이 교차하는 사이에 하산이 마무리되어 갈 때, 오를 때에는 미쳐 보지 못했던 십자가 하나가 우뚝 서 있다. 그리고 그 조금 위에 교회 건물이 외딴집처럼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기독교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많아지고 있었는데 문득 이 교회가 궁금해진다. 왜 하필이면 산속 입구까지 들어왔는가. 어떤 신도가 여기까지 교회를 찾아오겠는가 하는 긍금증도 발동한다.
나도 모르게 교회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교회문을 열고 들어갔다. 인기척을 들었는지 중년으로 보이는 여성 한 분이 나와서 나를 반기며 인사를 하는 것이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하나님 뵈러 오셨지요? 저는 이 교회 목사입니다. 저는 성거산에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고 계시기 때문에 이곳에서 복음을 전도하는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또박또박한 말씨와 차분한 자세로 나를 대하는 모습에서 나는 순간 하늘에서 막 내려온 천사를 대하는 느낌을 받았다.
“아 지나다가 한번 들려보았습니다. 저는 남자 목사님이 나오실 줄 알았는데 놀랍습니다. 더구나 이러한 산속에서 여성 목사님을 만나니까 하나님의 성령이 여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나도 모르게 아부를 했는가 싶지만 그냥 튀어 나온 말이니 어쩔 수도 없다. 목사실로 안내를 받아 들어가니 커피와 간단한 다과도 내놓는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느냐는 질문을 하는데 나는 커피잔이 미끄러져 커피를 바닥에 쏟아버리고 말았다. 신성한 교회의 목사실에서. 왜 하필이면 이럴 때 나는 실수를 할까. 교회에 와서 헌금은 못할 망정 민망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평소에 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별다른 관심은 없었지만 이 마당에 빈말이라도 듣기 좋은 대답을 해야겠다고 순간적으로 입을 열었다. “하나님은 다른 어떠한 신들보다 최고 권위의 절대적 신으로 추앙하고 또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내가 번쩍이는 머리를 짜내어 목사님을 위한 즉흥시를 만들어 낭송해도 되느냐고 제안을 했다. 흥미로운 표정으로 동의를 한다. 나는 휴대폰을 열어 메모하며 간단하게 시를 만들었다. 그리고 읽었다.
“성거산 아래, 먼 거리도 아닌 산, 멀리 오르지 않아도 되는 산, 그 입구에 십자가 서 있네,
하나님의 성(聖)이 거(居)하나니, 예배소리도 조용하구나, 산 아래 지나는 사람들아, 갈 길 멈추고 예배당에 모이라, 그리고 천사가 간곡히 전하는, 기쁜 복음을 들을지어다.”
성거산의 성스러운 기운이 머물러 있다는 곳의 핵심이 산의 정상이라 생각하고 그 현장을 찾아가 보았으나 그 흔적도 없었고 불교사찰에서 혹시라도 그 존재를 찾아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부처님은 신(神)이 아니고 해탈자로 추앙을 받고 있으므로 번지수가 아닌 것 같았다. 깊은 산속에 아무리 명당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한들 결국 한 인간의 유골에 지나지 않으니 당연히 성스런 기운과는 거리가 있다.
오늘 산행의 끝자락에 만난 교회는 기독교의 성전이 만들어져 있고 실제 매주 예배와 경배, 찬송의 노래가 울리고 있을 것이니 하나님의 성령은 성거산의 먼 곳에 있지 않고 그 입구의 십자가가 서 있는 조용한 교회에 서려 있다고 보아야 할 것 같다. 현실과 신앙은 분명히 구별된다고 믿고 있는 나의 굳은 에고(ego)가 있기는 하지만, 믿음이란 개념도 각자의 신념에서 출발하고 또한 형이상학적 접근도 경우에 따라서는 인간에게 위안으로 승화될 수 있다면 그리고 그것의 확장으로 구원과 영생으로까지 보장된다는 또 하나의 굳은 믿음이 있다면 그것을 말려야 할 이유와 논거도 없어진다.
나의 즉흥시에 대하여 감동하는 듯 감사의 표시로 성경책 한 권을 덤으로 선물 받고 교회문을 나섰다. 나는 오늘 성거산 천사를 목격하고 마주 앉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