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동시 이야기]
16년 오랜 기다림의 힘, 장승리 이야기
현경미
연두야, 부르면 연두는 초록까지 데리고 내게로 달려와 줄 것만 같습니다. 이 계절만큼이나 싱그럽고 설레는
일이 몇 달 전, 저에게 일어났답니다. 오랜 기다림이었습니다. 첫 동시집 『언니는 따뜻해』가 씩씩한 걸음으로
나에게 와주었습니다.
행복한 동시 이야기를 하려고 보니 행복한 시절 이야기가 먼저 떠오릅니다. 그 시절이 내 안에 녹아들어 씨앗이 되어 동시로 자라났을 테니까요. 나는 무엇을 써야할까, 왜 써야하나, 누구나 한번쯤 하게 되는 고민을 저 또한
하게 되었습니다. 동시를 쓰기 시작한 지 1년쯤 지났을 그때도 지금 이 순간도 떠오르는 이름 하나가 바로 ‘장승리’입니다.
십리를 걸어야 역이 나오고 한 시간을 걸어야 초등학교가 보이는 시골, 소박한 사람들이 모여 정을 나누었던 곳, 내가 나고 자란 동네였습니다. 그곳엔 제법 큰 저수지, 대정지도 있었습니다.
방문을 열면 담 너머로/훤히 대정지가 보이는 우리 집/뒷문, 텃밭 아래까지 찰랑찰랑/못물이 들어오곤 한다/나와 눈 맞추며 반짝반짝/말 건네는 물빛/오래 보고 있어도 좋다 「방문을 열면」 일부
할아버지가 심은 감나무 옆엔 작은 은행나무가, 마당으로 들어서자마자 꽤 큰 오동나무 한 그루도 있었습니다.
우리 집 앞마당 담벼락 곁/우뚝 서 있는 오동나무/학교에서 돌아와/동생과 나무에 올라 앉아/보랏빛 오동 꽃/입에 대고 불어봅니다 「오동 꽃 피리 불며」 일부
뒷문으로 난 텃밭도 있었습니다. 봄철 채소들이 뾰족뾰족 올라오기 시작하면 옆에 쪼그리고 오래 앉아 있기도 했습니다. 시시때때로 표정이 달랐던 흙 마당과 나무와 꽃 그리고 물빛에게서 배우고 함께 자랐습니다. 모든 게 배움터였고 좋은 놀이터였습니다. 봄이 가고 아버지의 등을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놓는 한여름이 오면
약속도 않았는데/하나, 둘/샛 도랑으로 나와//약속이라도 한 듯/훌렁훌렁/멱을 감는다//중략//해는 뉘엿뉘엿/입술이 새파래져서야/달달달달/집으로 간다 「여름방학」 일부
마당에 멍석 깔아/온 가족 모여 앉아//호박잎, 깻잎, 우엉 잎/부글부글 맛난 된장/푹 떠서 한 입 불룩/쌈 싸먹으면//지나던 날벌레들/입맛을 다신다 「여름저녁」 전문
보내기 아쉬운 여름이 가고 씨를 뿌리지도 애써 가꾸지 않아도 우리 집 긴 담벼락 가득 희고 붉은 코스모스 피고 지고, 욕심 없는 우리 가족에게 선물하고는 느릿느릿 가을이 마당을 빠져 나가고 나면 길고 긴 장승리의 겨울이 찾아 왔습니다.
잠이 오지 않는 밤/엄마는 장독을 열어 살얼음 진/동치미를 한 사발 들여와/잘 익은 무를 건져 준다/샤륵 샤륵 샤르륵//이불을 뒤집어쓰고도/입김이 풀풀 날리는 방안/살얼음 진 동치미 국물/마시고 나면 덜 덜 덜/쏴 쏴 몸에선 바람이 분다 「동치미 먹는 밤」 전문
어느 것 하나 향기로운 기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장승리 이야기’시리즈에는 행복했던 한 시절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일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나의 이야기지만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할 테니까요.
등단을 하고 첫 책이 나오기까지 16년이 걸렸습니다. 느긋하고 느린 성정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도 긴 시간이었습니다. 장승리가 베풀어준 것들이 내안에서 잡아주지 않았다면 견뎌내지 못했을 외로운 나날이기도 하였습니다.
『언니는 따뜻해』 동시집을 읽은 학생, 지인 누구 할 것 없이 공통되는 소감은 ‘참 따뜻하다!’ 라는 말이었습니다. 참외와 수박만큼 다른 언니 동생처럼 달라도 너무 다른 가족들입니다. 티격태격 짜증을 부리다가도 꼭 껴안고 한겨울 보일러가 고장 난 밤을 보내야 하는 것처럼 힘겹고도 아픈 현실들을 함께 이겨내야 하는 것 또한 가족 공동체일 테지요. 온 동네가 가족이 되어 나를 채워주던 장승리의 온기를 기억합니다. 동시집 전체에 깔려있는 따뜻한 정서 또한 그곳에서 흘러왔을 것입니다.
지금은 어느 때보다 연결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마음만 먹으면 날아갈 수도 있으니까요.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혼자 고립된 때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인공지능과 더불어 최첨단을 자랑하는 이 시대에 따뜻함이라니. 진부해, 할지 모르겠지만 완벽을 자랑하는 그것에 딱하나 없는 게 있다면, 따뜻한 심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언니는 따뜻해」시에 나오는 언니 같은 존재일 것입니다. 지금 짜증을 부리고 있다할지라도 원래부터 체온을 가진 따뜻한 누군가의 가족인 것입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응원하며 시 한 편을 선물해 드리려합니다.
올겨울 제일 추운 날
보일러가 고장났다
두툼한 이불 뒤집어쓰고도
덜덜덜
한밤중에 깨어보니
언니가 나를 꼭 껴안고 있다
건들기만 해도
짜증 부리던
언니가 따뜻하다
-「언니는 따뜻해」 전문
현경미 hkm0637@hanmail.net
2007년 《대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 2024년 《경남일보》 신춘문예 수필 당선,
동시집 『언니는 따뜻해』를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