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해야 할 것과 정말 하고 싶은 것
이동하(소설가)
영화 <버킷 리스트>에는 잭 니콜슨이 괴팍한 성격을 지닌 억만장자로 나온다. 상대역은, 박학다식하고 원만한 성품의 자동차 수리공 모건 프리먼이다. 영화를 즐겨 보시는 분들이라면 이 캐스팅만으로도 내용을 대충 짐작할 수 있으리라. 과연 익살과 해학이 전편에 넘친다. 나이 지긋한 이 두 사내는 암 병동의 룸메이트로 만났다. 앞으로 길어야 일 년 더 살 수 있다는 선고를 받자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은 것들’의 리스트를 작성한다. 스카이 다이빙, 카 레이싱, 피라미드 관광, 세계 제일의 미녀와 키스하기, 눈물나게 웃어보기 등등... 암이 아니었다면 평생 만날 일이 없었을 이 두 사내는 금방 의기투합하여 실행에 나선다. 직장도 가족도 다 훌훌 벗어던지고 완전한 자유인이 되어 전혀 새로운 삶에 도전하는 것이다. 두 배우의 원숙하고 코믹한 연기가 내내 웃음을 터뜨리게 한다. 그러면서 새삼스레 우리의 갇힌 삶, 갇힌 욕망을 돌아보게 만든다.
융의 심리학 용어 중에 ‘페르소나’Persona가 있다. 고대 배우들이 쓰던 ‘가면’(라틴어)에서 온 말로, 세상(타자)에 대처하기 위해 개인이 쓰게 마련인 사회적 얼굴(가면)을 가리킨다. 사람은 일생동안 많은 페르소나들을 사용하며 때로는 여러 개를 한꺼번에 쓰기도 하는데, 융은 이를 불가피한 것으로 보았다. 이에 기대어 생각해보면, 사람이 ‘꼭 해야 할 것들’(기본적 의무)과 내가 ‘정말 하고 싶은 것들’(내밀한 욕망) 사이에는 어차피 틈이 있게 마련이라 우리는 수시로 가면을 바꾸어가며 뒤집어쓰고 살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가면 뒤에 억눌려 있던 것들이 죽음을 앞두고 한꺼번에 터져 나온 경우가 ‘버킷 리스트’라고 이해될 법도 하다.
몇 해 전 퇴직하면서 나는 정말 홀가분한 기분이었다. 퇴직소감을 물으면 흔히 ‘시원섭섭’하다고 하지만 나는 굳이 ‘시원시원’하다고 답변했다. 서운한 마음은 별로였다. 강단 생활이 그토록 지겨웠던가? 그건 아니다. 더러는 버거울 때도 있었지만 그러나 대체로 즐거웠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없이 홀가분함을 느낀 것은 자유로운 삶에 대한 섣부른 기대에서였는지도 모르겠다.
우리의 일생은 크게 보아 세 시기로 구성된다. 제1기는 태어나서 대략 서른까지로 부모슬하에서 양육 받는 기간이고, 제2기는 사회로 진출하고 결혼하여 자녀를 낳아 기르는 활동기로 대강 육십까지, 그리고 제3기는 퇴직 또는 은퇴 이후의 자유로운 노년기가 그것이다. 대체로 제2기의 삶이 ‘꼭 해야 할 것들’에 중심이 놓여 있다면 제3기의 삶은 ‘정말 하고 싶은 것들’에 있다고 할 수 있으리라. 오늘날은 평균수명이 길어지면서 인생 3기에 대한 일반적인 기대치가 높아진 게 사실이다. 그렇다고 내가 무슨 대단한 새 삶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하루아침에 생활을 확 바꾸는 일이 아무에게나 가능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마도 여전히 책을 읽고, 글을 쓰고, 틈틈이 여행을 다니고... 그러니까 날마다 출근하고 강의하는 일만 벗은 것 뿐 별로 달라질 게 없는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나름의 기대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말하자면 이런 식 기대를 나는 은연중 품고 있었던 것이다.
첫 번째는, 책을 읽되 내가 정말 읽고 싶은 것만 읽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였다. 지금까지는 그러지 못했다. 거의 매번 필요에 쫓겨서 하는 독서행위였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순수하게 읽는 즐거움 자체를 누리고 싶었고, 이를 위해 평소 꾸준히 메모해둔 책 목록만도 노트 한 권이 넘는다. 이제부터 눈에 띄는 대로 한 권씩 찾아서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리라. 아무런 목적의식이 없으므로 지겨워지면 미련 없이 접을 것이요, 끝까지 읽고 감동받은 다음에는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버릴 터. 돌이켜보면 저 소싯적의 책읽기가 그러하지 않았던가. 어디 써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즐거워서 읽었고, 읽은 다음엔 굳이 기억하려고 애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처럼 순수한 독서의 즐거움을 다시 한 번 누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글쓰기에 대한 기대였다. 그동안은 사는 일에 쫓겨서 제대로 내 글을 쓰지 못했다는 갈증이 심중에 남아 있었다. 정말 쓰고 싶은 글은 나중으로 밀어놓고 당장 사는 일에 급급했기 때문이다. 이제야말로 세상만사를 잊고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해 볼 수 있으리라 나는 기대했다.
세 번째는, 여행이다. 남들이 흔히 가는 해외여행도 나는 매번 훗날로 미뤄놓고 살았다. 퇴직하면 느긋하게 다니리라 다짐하면서. 그러면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여기저기서 한참씩 살아보고도 싶었다. 크게 보면 우리 모두 도시의 유목민 아니냐. 무시로 장막을 걷어 옮겨 다녀야 하는 삶일 진데 굳이 한곳에 주저앉아 있을 까닭이 없다고 생각했고, 그러므로 지금까지 내가 몸담고 살았던 이곳과는 다른 마을, 다른 골목들을 더 많이 기웃거리며 다니고 싶었다.
하지만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그런 기대가 무색해진다. 책읽기에서 나는 여전히 자유롭지 못했고, 글쓰기는 그다지 진척이 없었다. 여행을 나서는 일 역시 쉽지 않아서 주저하고 망설이기 일쑤였다. 노년의 자유와 여유는 환상인가? 결국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오랜 세월 길들여진 타성에 단단히 발목 잡혀 있는 자신과 매번 맞닥뜨리곤 한 삶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나의 과오는 분명하다. ‘꼭 해야 할 것’과 ‘정말 하고 싶은 것’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 내일의 삶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애초부터 틈이 없는 오늘의 삶이 이어질뿐.
다시, 영화 얘기다. <버킷 리스트>가 정말 감동적인 것은 두 사내의 생애 마지막 모험이 원점회귀로 끝나는 데 있다. 훌훌 털고 떠났던 그 자리 즉 가족이 있는 일상적 삶의 자리로 되돌아온 두 사람은 거기서 비로소 유감없이 생을 마감한다. 때늦은 깨달음 앞에서 나는 지금 단벌 인생을 아쉬워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