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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차시 3월 22일 수요일 8시~10시
■ 출석(13명) : 정혁현. 박연옥. 정단희. 박성호. 안태형. 이샛별. 박지현. 김한숙. 서은혜. 서선미, 이미영, 강형숙, 정명수
*발제문 참고
■2장-계시의 모형들/성경의 이야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기-드러냄으로서의 계시/계시,성경, 교회
기독교인들은 계시에 민감해야 한다. 신앙은 머리나 가슴 속에서만 간직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에 자기 삶을 동참시키는 것, 하나님의 활동에 따라 내 삶을 재구성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것이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다. 삶의 매순간과 세계의 여러 변화국면 속에서 신앙인은 그렇게 움직여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민족의 일이라면 모두 옹호하고 보우해주실 것이라는 식의 사고는 신앙을 가두는 것이다.
근대 이후에 생긴 개인주의적 경향의 영향 받은 내면의 평화, 나의 안위 지키기위한 방편으로서의 신앙 역시 신앙의 전부일 수 없다. 20세기 초반 나치즘에 부역하고 협력하는 독일기독교의 행동을 개탄하며 이를 막으려 애쓴 사람들이 있었다. 본 회퍼 목사 등이다. 칼 바르트는 '대립물의 만남'으로서 변증법적 신학을 주장했다. 이때의 변증법은 정-반-합 이라는 나선형적 발전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대립되는 두 존재 , 신과 인간이 만난다는 이야기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함부로 쓰는 건 불경이라 주장하며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질적 차이를 강조했고, 하나님 말씀을 현실사회, 정치, 질서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전락하지 않도록 애썼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을 인간과 너무나 소원한, 머나먼 존재로 상정한다는 문제가 있다. 너무나 전적 타자로 하나님을 규정하는 것이다. 최근에 나타난 것은 민중신학적 경향, 해방신학, 흑인신학, 여성신학 등 소수자( 숫자가 단순히 소수라는 것이 아니고 주어진 사회 속에서 어렵고 열등한 위치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를 대변하는 신학적 입장들이다. 언뜻 이 흐름들은 너무 급진적으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하나님 말씀을 현 사회에 맞게 해석하려는 노력 자체, 철학적,학문적, 지적 노력 자체가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행위가 된다.
초대교회에서도 이단판정을 받았던 '가현설'(가짜로 나타났다. 즉 예수님은 신이시기때문에 신체적 아픔도 느끼지 않고 온갖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다)의 흐름은 지금 오늘날에도 이단교회 형태로 출몰하고 있다. 최근 넷플릭스 영화 '나는 신이다'에서 보이는 JMS 가 그러하다. 이단집회에서는 소위 기적의 치유행위가 일어난다. 그러나 기독교의 신성은 전부 그런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활동 당시 신비한 치유능력을 아무때고 사용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는 자신의 신성이 드러날 때마다 제자들에게 이 일을 알리지 말라며 입단속을 시키신다. 예수님이 아픈 자들을 고치는 치유행위를 하셨지만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의사의 의술적인 행위인 부분이 대다수였다. 예수는 신적방식으로 이 세상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인간은 타인을 자기 자신의 거울로서 , 즉 자기애에서 이해한다. 그래서 인간은 타자와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다. 타인을 너무 사랑하거나 너무 미워하는 것 모두 자기애적인 이해에서 비롯된다. 인간은 말보다 행동 속에서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행복 이데올로기를 보자. 행복에 대해 우리 사회는 다양한 것을 제시한다. 건강, 지위, 재산 등을 다 갖춰야 행복하다고 한다. 이 정도면 행복 강박증이다. 넘쳐나는 드라마의 기본 플롯은 주인공이 어려움에 빠지면 조력자가 등장하여 해결한다. 사람들은 그 조력자를 만나려고 교회에 나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 봐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민중신학적 입장에서 해석해본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도와야 한다. 강도만난 사람이 바로 예수님이라는 것은 기존의 신학적 입장에서는 충격적인 해석이었다. 이것은 '강도 만난 사람'으로부터 우리 삶의 진실을 봐야 함을 역설하는 것이다. 기존 사회, 세계의 부조리함과 모순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 발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최후의 심판' 비유가 등장한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위해서 존재한다. 십자가 예수를 가톨릭에서는 지복자- 지극한 복을 누리는 사람이라고 한다.
흔히 유기체는 긴장을 외부로 유출했을 때 쾌락을 느끼기 마련이다. 배고픔의 긴장, 외로움의 긴장을 해소하면 그 긴장은 유기체 안에 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인간이라는 존재는 이게 전부가 아니다. 인간이 마냥 편하고 즐거우면 바보같은 상태가 되어버린다. 인간은 고통과 씨름하며 진정으로 인간적인 존재가 되어간다.
행복만을 추구하는 삶에 인간들이 집중한 결과는 우울증이다. 행복만을 죽도록 추구했는데 불행에 빠진다.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80년대에 한국대학생들은 그 체제에 순응하면 다 먹고 살수 있을 만큼 안정이 보장된 존재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사회의 약자들의 고통에 연대하며 엄청난 삶의 희열을 느꼈을 것이다. 이것이 주이상스=향유이다. 인간만이 가진 독특한 것이다.
교회에서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은 것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사람들은 하나님의 부재에 절망했다. 왜 하나님이 침묵하시는지 ......그러나 하나님의 부재에서 하나님의 현존을 느끼는 역설이 존재한다.
신앙인들은 교회 공동체를 구성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 이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에 가능하다.
자기 삶으로써 말씀을 전하는 것을 끊임없이 시도하다보면 불가능함 속에서도 전달되는 무엇인가가 있다. 인간이 부족함과 죄가 있지만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강력하게 드러내는 역설이 발생한다. 우리는 한계 속에 존재한다. 나와 타자 모두 선입견에 오염되어 있지만 그럼에도 뭔가가 전달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계속 노력하고 실천하는 것이다.
여기서 교회가 그 '매개'가 된다.
사도바울의 편지글들은 2천여년 전 특정상황 속의 공동체에서 일어난 문제를 풀려 바울이 보낸 것들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지금의 특수 상황을 생각하며 새롭게 해석하는 것이 바른 길이다.
미디어의 성격에 따라 메시지는 달라지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개'를 통해 전해진다. 누군가 배고플 때, 고난받을 때,불의한 세계때문에 고통받고 울부짖는 사람이 있을 때 하나님은 자기자신을 드러내신다.
인간의 욕심과 권력욕이 우상숭배로 나타난다.
우리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길로 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끊임없이 학습하고 실천하는 노력을 해야한다. 또 예수님처럼 끊임없이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를 질문하고 탐구해야 한다. 그럼으로써 예수님도 예수님이 되신 것이다. 그의 놀라운 감수성과 상상력, 과학적 태도를 우리도 따라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인간들은 인간으로서 퇴행적 삶을 살고 있다. 어쩌면 2천년 전 그 시대의 인간들이 가진 인간적 고뇌에 한참 못 미친 퇴행적 사고를 하고 있는지 모른다. 너무 메말라 있는 삶들이다. 전태일은 평화시장에서 고통받는 어린 여공들을 보며 그들을 위한 삶을 시작했다. 전태일은 삼각산 기도원 짓는 공사장에서 노동하며 기도하고 진정으로 그 어린 생명들을 위한 길은 무엇인지 깊이 고뇌했다. 전태일이 간 길은 예수님이 간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느낀 점-
이웃교회 교인 , 비교인 모두 예수님의 길을 가고자 하는 신앙인으로서 온라인 공간이나마 얼굴 보며 함께 학습할 수 있다는 것은 큰 기쁨인 것 같다. 밤8시부터 10시까지 줌화면을 움직이지 않고 의자에 앉아 계속해서 집중해 보고 있는 것은 쉬운 일은 아니다.그래도 약속이기에 묵묵히 한다. 아이구 허리 아파 . 방바닥에 드러눕고 싶은데....끄응....그래도 듣고 질문하다보면 또 어디서 나온건지 모르겠지만 기쁨이란게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가슴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언젠가 이웃교회에서 들었던 설교 한 부분이 계속해서 머리에서 맴돈다.
어떤 인간은 뜻하지 않은 불의의 사고에 죽기도 하는데 우리는 살아 남았다. 왜 나인가? 하나님은 왜 나를 살게끔 하셨을까? 하나님은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고 계신 것일까?
나는 매일 나만의 안위, 내 내면의 평화에만 관심 기울이고 신앙,시사,정치, 사회 이야기에 관심 갖기를 그저 취미생활처럼 해왔던 건 아닐까? 괴로움과 자책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이번 성서세미나는 신학을 정식으로 다루고 있어서 처음엔 텍스트 읽기가 너무나 오글거려 괴로웠다. 하나님의 사랑이라든가 너무나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말들을 견디기 힘들었다. 그래도 발제를 하면서 텍스트를 두 세번 이상 반복해서 읽고 뜻을 헤아려보고 하다보니 그러기 전보다는 덜 오글거리는 것 같았다. 심지어 살짝 재미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음 성서세미나는 4회차. 이제 중간까지 왔다. 삶의 소중한 이 순간을 허술하게 보내지 말고 최대한 알차게 붙들어 매고 싶다. 하나님의 음성을 조금이나마 만나고 싶기때문이다.
첫댓글 질문과 예시를 통해 설명해주신 부분들이 속 귀에 들어오는 시간이었습니다. 성경의 배경과 상황을 이해하고 텍스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신앙에 대해 계속 질문하고 답을 스스로 찾아 성장하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후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