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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화가 이중섭(1910~1956)과 천재 시인 박인환(1926~1956)의 만남
맹문재
1.
박인환은 1955년 1월 18일부터 1월 27일까지 미도파 화랑에서 열린 <이중섭 작품전>을 관람했다. 의회보사(議會報社)가 주최이고 문학예술사가 후원한 이중섭의 첫 개인전이자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전시된 작품은 45점이었다. 작품전 안내의 목록 뒤표지에는 2개의 이중섭전찬(讚)이 실려 있었는데, 김광균은 “그가 타고난 것을 잃지 않고 소중히 길러온 40년을 모두어 개전(個展)을 가지는 것은 그로 보나 우리로 보나 즐겁고 뜻깊은 일이다.”라고 썼고, 김환기는 “중섭 형의 그림을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타고난 것이 없이는 하기 힘들다는 것이 절실히 느껴진다.”라고 썼다. 이와 같은 글은 이중섭의 천재적인 화가의 면모를 여실하게 증언해준다. 그렇지만 이중섭의 천재성을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라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열중해 온 결과이다. 또한 자기 그림에 대해 엄격함을 유지해 온 산물이다. 이중섭은 작품 전시를 하면서 전시용으로 그림을 빨리 그렸다는 사실과 물감을 제대로 쓰지 않았다는 사실을 죄책감으로 가지고 “이렇게 속여먹는다”라고 주위의 지인들에게 토로했다. 그리고 그림을 구입하는 사람들에게 “앞으로 정말 좋은 작품을 만들어 선생께서 지금 계약한 것과 바꿔드리렵니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이중섭의 그림은 소, 닭, 아이들, 게 따위를 제재로 삼고 1950년대 피란민과 전쟁에 시달리는 서민들의 애환을 그렸다. 1955년 1월 『경향신문』에 이경성이 “우리 화단에서 가장 자기라는 위치를 갖고 있는 화가의 한 사람으로 씨의 예술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불모의 상식으로 미루어볼 때 확실히 과거의 미의 규구(規矩)를 벗어난 또 다른 위치에 있다. (중략) 씨의 예술의 본질은 어디까지 허무의 서자로서 그것은 현대의 불안의식과 저항 의식이 침전된 맨 아래층에 있는 침전물인 것이다.”라는 평가한 데서도 확인된다.
<이중섭 작품전>은 관람객이 몰려들어 경찰들이 도로의 정리에 나설 정도로 성황을 이루었다. 천재 화가의 그림을 갖고 싶어 26점이나 예약되었다. 그러나 그림값을 지불한 사람은 많지 않았고, 대부분 차일피일 미루거나 값을 깎거나 아예 연락을 끊었다. 이중섭은 그림값을 수금하고 관리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미술 잔치는 술 잔치로 마감되었다.
이와 같은 처지의 이중섭을 이해하려면 해방기부터 1950년대 예술인들의 문화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술가들은 명동에, 특히 한국전쟁 후에는 폐허의 명동에 모여들어 술과 예술에 취했다. <동방싸롱>, <휘가로> 등에 이중섭을 비롯한 구상, 김경린, 김광림, 김규동, 김수영, 김이석, 김종문, 김차영, 김환기, 박거영, 박고석, 박남수, 박수근, 박연희, 박인환, 박태진, 송지영, 양명문, 유정, 이봉구, 이봉래, 이중섭, 이진섭, 장욱진, 전봉건, 정규, 조영암, 차근호, 최태응, 한묵, 함윤수 황염수 등은 어울려 술을 마시는 것으로 일과를 했다. 1960년대 지식인 예술가들이 등장하기 전까지 명동의 이와 같은 문화는, 즉 예술과 문학이 분리되지 않았다. 시인이 화가가 되었고, 화가가 시인이 되는 시대였다. 이와 같은 상황은 김수영이 산문 「마리서사」에서 “그 당시만 해도 글 쓰는 사람과 그밖의 예술하는 사람들과 저널리스트들과 그밖의 레이맨들이 인간성을 중심으로 결합될 수 있는 여유 있는 시절이었다. 그 당시는 문명이 있는 소설가 아무개보다는 복쌍 같은 아웃사이더들이 더 무게를 가졌던 시절이고, 예술 청년들은 되도록 작품을 발표하지 않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던 시절이었다.”라고 회고한 데서도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박인환 역시 <이중섭 작품전>에 들러 방명록에 서명을 하고 어울려 술을 마셨다. 한국전쟁 뒤 두 예술가가 겪었던 센티멘털리즘리즘은 술을 자주 마시는 가교 역할을 했다. 화장실도 함께 사용할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다. 박인환은 『선시집』 후기에서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고 성장해온 그 어떠한 시대보다 혼란하였으며 정신적으로 고통을 준 것이었다.”라고 썼는데, 이중섭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중섭의 경우는 일본인 부인인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 1921~ 2022)가 두 아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그의 상실감과 절망감은 더욱 큰 것이었다.
박인환은 그림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가 정종여(鄭鍾汝)의 동양화 개인전을 보고 『자유신문』(1948. 12. 12)에 “동양화가 정종여는 현 우리 화단에 있어 가장 빛나는 화가의 한 사람이다. 그가 오랜 시작을 거쳐 이 황막한 토지에서 수난을 무릅써가며 그의 작품을 공개하였다는 것은 오직 그의 자랑일 뿐 아니라 또한 우리들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다.”라거나, “동양화가 정종여는 최근 보기 힘든 속도인이다. 그는 그의 독자적인 유동하는 센스를 가지고 있다.”라고 평은 쓴 데서 확인된다. 또한 그가 <마리서사>를 차릴 때 복쌍이라는 불리는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을 스승으로 삼고 서점을 꾸미는 일은 물론 모더니즘을 배운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중섭도 시를 썼다. 「소의 말」이 그의 대표작이다.
높고 뚜렷하고
참된 숨결
나려나려 이제 여기에
고웁게 나려
두북두북 쌓이고
철철 넘치소서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아름답도다 여기에
맑게 두 눈 열고
가슴 환히
헤치다
청량리에 있는 뇌병원인 베드루병원에서 세상을 뜨면서도 “세월은 우리의 연륜을/묵혀 가고/철 따라 잎새마다 꿈을 익혔다/뿌리건만/오직 너와 나와의/열매와 더불어/종신토록 이렇게/마주 서 있노라”라는 시를 썼다.
김수영은 「박인환」이란 산문에서 “인환이 죽은 뒤에 그를 무슨 천재의 요절처럼 생각하고 떠들어대던 사람 중에는 반드시 인환이와 비슷한 경박한 친구들만 끼어있었던 것이 아니다. 유정(柳呈) 같은, 시의 소양이 이는 사람도 인환을 위한 추도시를 쓴 일이 있었다.”라고 썼다. 이 글은 박인환이 재주가 없고 소양이 없고 경박하고 값싼 유행의 숭배자라고 폄하하고 있지만, 박인환이 문단에서 천재라고 평가받고 있는 사실을 확인해주고 있다. 박인환은 자신과 인연이 된 사람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단하게 시를 쓴 천재 시인이었다. 이중섭 또한 자신의 가족은 물론 소와 게와 어린아이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단하게 그림을 그린 천재 화가였다.
2. 이중섭 연보
1910년
평남 평원군 조운면 송천리 부유한 농가에서 5남매의 막내로 유복자로 태어나다. 형 중석(仲錫)은 12년 연상, 누나 6년 연상.
1924년
한문 사숙으로 논어 맹자 등을 배우다가 평양 시내 종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이문리(里門里) 외가에서 통학하다. 외조부는 농공은행 및 상공회의소 대표를 역임할 정도로 서북 경제계의 큰 인물이었다.
1928년
보통학교 4학년 때부터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다.
1931년
평북 정주 고읍의 오산중학교(5년제)에 입학해 하숙 생활하다.
1934년
미국 예일대학 출신 미술 교사 임용련(任用璉)과 백남순(白南淳) 부부의 영향을 많이 받고, 유망한 학생으로 인정받다. 후기 인상파, 야수파의 개성적인 터치를 배우다.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에 반발하여 한글 자모 그림으로 대항하다. 들에 나가 소의 스케치에 열중하다.
1936년
제25회 오산학교를 졸업하다. 졸업의 앨범란에 한반도를 그리고 현해탄 쪽에서 불덩이가 날아드는 그림을 그려 물의를 일으켰다. 졸업한 뒤 중석이 이사한 원산으로 가 소를 집중적으로 그리다.
1937년
동경제국미술학교 입학했다가 자유분방한 동경문화학원에 전학하다. 중섭은 그림에 열중해 화제의 대상이 되다. 은지화(銀紙畵)도 그리다. 동경 시내 길상사 정두공원의 아파트에 하숙하다. 프랑스 화단에 데뷔한 쓰다 세이슈(津田)에 사서하다. 동급반의 이정규와 안기풍, 상급반의 김환기, 유영국, 김병기, 문학수 등과 교유하다. 2년 후배 여학생 야마모토 마사코(山本方子)와 교제하다. 일본 미츠이(三井財團)의 한 회사인 이츠이 그룹의 일본창고주식회사 이사의 딸이었다.
1940년
동경문화학원을 졸업하다. 5월 일본 미술창작가협회전에 <소>를 출품해 협회상을 받다. 9월 미술창작협회에 참가하다.
1941년
4월 미술창작가협회 회우가 되다. 당시 한국인 회우는 김환기, 유영국, 문학수. 5월 신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서울 화신백화점 화랑에서 창립전을 가지다. 프랑스 유학을 원했으나 형의 반대로 실현되지 못하다.
1943년
미술창작가협회 제7회전에 <망월>을 출품해 재일교포가 희사한 태양상을 받다. 결혼 문제로 귀국하다. 원산에 돌아와 장촌동 집에 화실을 꾸미고 그림에 열중하다. 5월 서울에서의 제3회 신미술가회전에 참가하다.
1945년
야마모토 마사코(결혼 뒤 이남덕(李南德)으로 개명)가 중섭을 찾아 오다. 5월 결혼해 원산시 광석동에서 신혼살림을 차리다. 양계를 하며 닭을 그리다. 8월 15일 해방되다. 10월 서울에서의 해방기념미술전람회에 참가하려고 서울에 왔으나 늦어 출품하지 못하다. 미도파 지하실 벽화를 그리고 받은 화료로 서울 시내에 도처에 흩어져 있는 고미술품과 골동품을 사들여 원산으로 가지고 가다. 김일성 체제로 굳어지면서 형 중석이 부르주아계급으로 재단되어 원산 내무서에 수감되다.
1946년
북조선미술동맹에 가입하다. 원산사범학교 미술 교사로 부임했으나 창작 생활을 위해 일주일 만에 사직하다. 불우 아동의 무료 강습소에서 그림을 가르치다. 고미술품에 그려진 동자상(童子像) 구체화하다. 구상 시집 『응향』 사건에 표지화 작가로서 문초를 받다. 첫아들을 낳았으나 디프테리아로 사망하다. 첫아들을 잃은 뒤 고아원 아이들을 사랑해 군동화(群童畵)를 그리다.
1947년
평양에서의 8․15기념미술전에 출품하다. 2남 태현(泰賢) 출생하다.
1949년
3남 태성(泰成) 출생하다. 사람들을 피해 송도원 해수욕장 일대에서 창작에 몰두하다. 북한 체제와 갈등을 겪다.
1950년
10월 국군 북진 후 원산미술가협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다. 12월 국군 철수에 따라 가족과 조카 영진(英進)을 데리고 배편으로 부산으로 피란하다. 그림 일체는 두루마리로 싸서 노모에게 맡기다.
1951년
4월 김광섭이 통솔하는 문총구국대 경남지부에 가입하다. 국방부 정훈국에서 배급을 주었지만 가족을 살릴 형편이 안 되어 제주 서귀포로 옮기다. 해초와 게로 연명하는 어려운 살림을 하다. 대벽화를 구상하고 조개껍질을 수집하다. 12월 경 부산으로 다시 이주하다. 오산학교 동창 김종영(金鍾英)의 도움으로 범일동 산마루에 단칸방을 얻어 생활하다.
1952년
유엔군 부대의 부두 노동, 운수회사 인부를 하다. 2월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에 입단하다. 12월 부인이 두 아들을 데리고 일본인 수용소의 제3차 귀환선 편으로 친정으로 돌아가다. 12월 부산 르네상스 다방에서 기조선(其潮展)을 가지다. 기조 동인은 이중섭, 손응성, 한묵, 박고석, 이봉상. 조카 영진 군대 입대하다. 구상을 따라 대구로 가다. 부산을 오가다. 양담뱃갑을 모아 은지화(銀紙畵)를 제작하다.
1953년
마사코 부인이 쇠퇴한 집안에서 뜨개질과 동창생들에게 빌린 돈으로 부산에서 서점을 경영하던 마모(馬某)에게 3천만환에 해당하는 책을 사서 보내다. 책값으로 이중섭을 일본으로 오게 하려고 했으나 전달이 되지 않다. 한묵(韓黙)과 함께 부산극장 무대장치 일을 하다. 10월 통영으로 옮겨 유강렬(劉康烈)과 함께 기거하다. 박생광 등과 어울리다. 겨울 구상 시인의 도움으로 해운공사 선원증을 얻어 일본으로 건너가다. 동경의 처가까지 갔으나 장모의 멸시에 일주일만에 통영으로 돌아오다. 돈을 벌기 위해 그림에 열중하다. 다방에서 40점의 작품을 가지고 개인전을 열다. 유강렬 공예, 장욱진 그림과 3인전도 열다.
1954년
봄까지 통영에 있다가 진주를 거쳐 상경하다. 화우 박생광(朴生光)의 초대로 진주로 가서 작품을 그리다. 10점 남짓한 작품으로 다방에서 전시하다. 서울 누상동에서 거주하다. 국방부와 대한미협이 공동 주최한 대한미협전(경복궁 미술관)에서 출품하다. 이종인, 이광석 신촌 집에서 개인전 준비를 위한 작품을 3개월 그리다.
1955년
1월 18일~27일 미도파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다. 의회보사(議會報社) 주최, 문학예술사 후원으로 45점 전시하다. 미술의 잔치였지만 술 잔치였다. 팔고 남은 20여 점의 작품을 가지고 대구로 갔지만 그림을 그리지 못하다. 최태응의 칠곡 과수원과 대구 여관방에서 작품을 그리다. 정신 이상 증세가 나타나 자포자기하다. 5월 대구 미국공보원에서 개인전을 열다. 40여 점 전시. 7월 정신 질환으로 성가병원에서 1개월 입원하다. 8월 구상, 김이석이 서울로 데려다가 종군 화가 단원이라는 명목으로 수도육군병원에 입원시키다. 9월 화우와 문우들의 모금 운동하다. 성 베드루병원으로 옮기다. 병세가 호전되다. 12월 병원에서 자유 외출이 허용되자 정릉에서 한묵, 조영암과 자취 생활을 시작하다. 명동에 진출해 음식 대신 술을 마시다. 폭주와 영양실조로 건강을 유지하기 어려워지다.
1956년(40세)
불규칙한 생활로 정신병과 만성 간염 발병하다. 청량리 뇌병원 무료 환자실에 입원하다. 내과 치료를 받기 위해 적십자병원으로 옮기다. 9월 6일 11시 40분 타계하다. 무연고자로 취급되어 3일간 시체실에 있다가 김이석이 알고 장례 치르다. 홍제동 화장장을 거쳐 신촌 봉원사에서 49재를 지내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히다. 뼈 한 자루는 박고석이 정릉 산기슭에 묻고, 뼈 몇 자루는 구상이 펜 대표로 일본에 갈 때 가지고 가서 남덕에게 전하다.
1957년
조각가 차근호 제작으로 묘비를 세우다. 大鄕李重燮畫伯墓碑.
3. 박인환 연보
1926년
8월 15일 강원도 인제군 인제면 상동리 159번지에서 아버지 박광선(朴光善)과 어머니 함숙형(咸淑亨) 사이에서 2남 1녀 중 맏이로 태어나다. 강원도 간성 출신인 어머니가 1902년생으로 1904년생인 아버지보다 두 살 많음. 대대로 물려받은 토지가 있어 집안 형편은 여유로웠음. 할아버지는 박태용(朴泰容), 할머니는 이용(李容). 본관은 밀양(密陽). 어머니는 1972년, 아버지는 1984년 미국에서 작고함. 박인환의 여동생 박경환(朴京煥)은 1937년생으로 서울시립교향악단 상임 지휘자와 중앙대 음대 교수를 지낸 정재동(鄭載東)의 부인. 남동생 박신일(朴信一)은 1940년생으로 서울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해외공보관 관장과 보스톤 총영사 지냄.
1933년
인제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다.
1936년
서울로 올라오다. 서울시 종로구 내수동에서 거주하다가 종로구 원서동 134번지로 이사하다. 덕수공립보통학교 4학년에 편입하다. 아버지는 복덕방 등을 운영했고, 작은이모부 이성재(李聖宰)는 덕수공립보통학교 교사.
1939년
3월 18일 덕수공립보통학교 졸업하다. 4월 2일 5년제 경기공립중학교에 입학해 1학년 1반에 편성되다. 영화, 문학 등에 심취하다.
1940년
종로구 원서동 215번지로 이사하다. 2학년 2반에 편성되다.
1941년
2학년을 마치고 3월 31일 경기공립중학교 자퇴하다. 3월 31일 개성에 있는 송도(松都)중학교로 전학하다. 장남 세형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황해도 재령에 있는 명신중학교로 전학해 졸업하다.
1944년
관립 평양의학전문학교(3년제)에 입학하다. 일제강점기 당시 의과, 이공과, 농수산과 전공자들은 징병에서 제외되는 상황.
1945년
8․15광복으로 학교를 그만두고 상경하다. 아버지를 설득하여 3만원을, 작은이모에게 2만원을 얻어 종로3가 2번지 낙원동 입구, 작은이모부의 지물포가 있던 자리에 서점 마리서사(茉莉書舍)를 개업하다. 초현실주의 화가 박일영(朴一英)의 도움으로 세련된 분위기를 만들어 많은 문인과 교류하는 장소가 되다. 서적 총판매소로도 이용되다.
1946년
6월 20일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시부(詩部)가 주최한 ‘예술의 밤’에 참가해 시 「단층(斷層)」을 낭독하다.
1947년
5월 10일 발생한 배인철 시인 총격 사망 사건과 관련하여 중부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다. 김수영 시인 부인인 김현경 여사의 증언도 있음. 초겨울 1살 연하인(1927년 7월 31일) 이정숙(李丁淑)과 약혼하다.
1948년
입춘을 전후하여 마리서사 폐업하다. 4월 20일 김경린(金璟麟), 김경희(金景熹), 김병욱(金秉旭), 임호권(林虎權)과 동인지 신시론(新詩論)(산호장) 제1집을 발간하다. 박인환은 시 「고리키의 달밤」과 평론 「시단시평」을 발표하다. 4월 덕수궁 석조전에서 이정숙과 결혼하다. 이정숙의 아버지 이연용(李淵鎔)은 동일은행 광화문 지점장, 어머니는 윤정옥(尹貞鈺). 박인환은 결혼한 뒤 본가에서 1주일 정도 살림하다가 종로구 세종로 135번지(현 교보빌딩 뒤)의 처가로 옮기다. 가을 무렵 『자유신문』 문화부 기자로 취직하다. 11월 25일 동시 「언덕」을 『자유신문』에 발표하다. 12월 8일 장남 세형(世馨) 태어나다. 세형은 연세대 국문학과를 졸업한 뒤 현대건설 등에서 근무했고, 세 딸(미혜, 미현, 미배)을 둠.
1949년
4월 5일 김경린, 김수영(金洙暎), 양병식(梁秉植), 임호권과 동인시집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도시문화사) 발간하다. 박인환은 시 「열차」 「지하실」「인천항」「남풍」「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발표하다. 4월 26일부터 28일까지 『자유신문』에 「삼팔선 현지 시찰 보고」를 3회 게재하다. 6월 7일 제4회 전국중등학교 야구 선수권대회 임원이 되다. 7월 16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내무부 치안국에 체포되었다가 8월 4일 이후 석방되다. 여름 무렵부터 김경린, 김규동(金奎東), 김차영(金次榮), 이봉래(李奉來), 조향(趙鄕) 등과 ‘후반기(後半紀)’ 동인 결성을 논의하다. 9월 30일 임호권, 박영준(朴榮濬), 이봉구(李鳳九)와 함께 조선문학가동맹 등을 탈퇴하는 성명서를 발표하다. 11월 30일 박인환 개인 성명서를 발표하다. 12월 17일 한국문학가협회(전국문학가협회 문학부와 한국청년문학가협회를 중심으로 일반 무소속 작가와 전향 문학인 포함) 결성식에 추천위원으로 참여하다.
1950년
1월 8일부터 10일까지 보도연맹에서 주최한 ‘국민예술제전’에 참가해 시 낭독하다. 봄 무렵 자유신문사를 퇴사하고 경향신문사에 입사하다. 김경린, 김수영, 이상로(李相魯), 이한직(李漢稷), 임호권, 조향 등과 동인지 『후반기』 창간호를 5월에 간행하려고 준비하다. 6월 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나 피란을 가지 못하고 김광주, 이봉구, 김경린, 김광균 등과 만나며 숨어 지내다. 8월 말 친구 세 사람과 부산으로 피신하다가 잡혀 서울로 돌아와 9․28수복을 맞다. 9월 25일 딸 세화(世華) 태어나다. 세화는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덴마크 대사관에 근무함.
1951년
1․4후퇴로 대구로 내려가다. 2월 경향신문사 특파원으로 민재원, 박성환 등과 육군 6185부대의 서울 재탈환 작전에 종군하며 「서울 돌입!」 등 많은 기사를 쓰다. 5월 26일 대구 아담다방에서 결성된 ‘육군종군작가단’에 박영준, 정비석, 조영암, 최태응 등과 함께 참여하다. 10월 경향신문사 본사가 부산으로 내려가자 함께 이주하다. 대구를 오가며 「거창사건 수(遂) 언도!」 등의 기사를 쓰다. 부산에서는 처삼촌 이순용(李淳鎔)의 도움을 많이 받다. 이순용은 내무부 장관(1951. 5~1952. 1), 체신부 장관(1952. 1~1952. 3), 대한해운공사 사장(1952. 5~1953. 5)을 지냈고, 1953년부터 1956년까지 외자구매처장, 임시외자관리청장, 외자청장 등을 역임했다.
1952년
2월 21일 소설가 김광주가 구타당한 사건에 대한 재구(在邱) 문화인 성명서에 참여하다. 3월 5일 강세균이 엮은 『애국시 33인집』(대한군사원호문화사)에 「최후의 회화」 발표하다. 5월 15일 존 스타인벡의 기행서 『소련의 내막』(백조사)을 번역해서 간행하다. 5월 이상로가 엮은 『창궁』(공군본부정훈감실)에 시 「서부전선에서」와 「신호탄」을 발표하다. 5월 30일 일본의 시 전문지 『시학』 제7권 5호에 시「書籍と風景」을 발표하다. 이 무렵 경향신문사를 퇴사하고 대동신문사 문화부장으로 입사하다. 6월 16일 『주간국제』 제9호의 ‘후반기 동인 문예’ 특집에 평론 「현대시의 불행한 단면」을 발표하다. 6월 28일 김광섭이 주도한 자유예술인연합에 가입하다. 7월 하순 부산극장에서 열린 반공통일연맹 창립 1주년 기념대회에 참가해 시 낭송하다. 11월 5일 조향이 엮은 『현대 국문학 수(粹)』(자유장)에 시 「열차」「자본가에게」 등을 발표하다. 12월 이순용이 사장으로 있는 대한해운공사에 입사하다. 12월 31일 이한직이 엮은 『한국시집』상권(대양출판사)에 시 「세 사람의 가족」「검은 신이여」「회상의 긴 계곡」을 발표하다.
1953년
4월 15~16일 시인의 집 주최로 열린 ‘제2회 시의 밤’(부산의 이화대학교 강당)에 참가해 시 낭송하다. 5월 31일 차남 세곤(世崑) 태어나다. 세곤은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경원대 교수가 됨. 여름 무렵 ‘후반기’ 동인 해체되다. 7월 중순 무렵 서울 집으로 돌아오다. 7월 27일 한국전쟁 휴전 협정 체결하다. 11월 22일 이상의 유고시 「이유 이전(理由 以前)」을 발굴해 『서울신문』에 게재하다.
1954년
1월 31일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상임 간사를 맡다. 오종식(회장), 유두연, 이봉래, 허백년, 김소동 등이 회원. 2월 5일 김용호와 이설주가 엮은 『현대시인선집』하권(문성당)에 시 「최후의 회화」「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할 때」를 발표하다. 5월 이후 시집 『검은 준열의 시대』(동문사)를 간행하려고 시도하다. 7월 30일 고원 시인이 주재한 계간지 『시작』 제2집에 번역 시 「도시의 여자들을 위한 노래」와 평론 「현대시와 본질- 병화의 인간 고도」를 발표하다.
1955년
1월 11일 현대문학연구회 동인 및 『현대문학』 제1집 간행에 참가하다. 1월 18일부터 1월 27일까지 열린 <이중섭 작품전>(미도파화랑)을 관람하다. 3월 5일 대한해운공사의 상선 남해호를 타고 미국 여행을 하기 위해 부산항을 출발하다. 작은이모부 이성재가 여행 경비를 도와주다. 3월 5일 저녁 8시경 시모노세키, 6일 새벽 5시경 세토나이카이(賴戶內海)를 거쳐 오전 11시경 일본 고베항에 입항하다. 4일간 고베, 오사카, 교토 등을 여행하다. 3월 9일 밤 고베항을 출발해 3월 22일 오전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항에 입항하다. 상륙 수속 문제로 23일 하선하다. 올림피아, 터코마, 시애틀, 에버렛, 아나코테스, 포트엔젤레스, 포틀랜드 등을 여행하다. 4월 10일경 미국을 떠나 4월 말경 아내의 선물, 결혼 10주년 행사에 사용할 물품, 아이들 장난감 등을 들고 귀국하다. 5월 20일에 발간된 『시작』 4집부터 편집위원이 되다. 5월 13일부터 17일까지 『조선일보』에 미국 여행기 「19일간의 아메리카」를 발표하다. 이 무렵 대한해운공사 퇴사하다. 6월 20일 유치환과 이설주가 엮은『1954 연간시집』(문성당)에 시 「눈을 뜨고도」「목마와 숙녀」「센티멘털 저니」를 발표하다. 6월 25일 김종문이 엮은 『전시문학선 시편』(국방정훈국)에 시 「행복」「검은 신이여」 발표하다. 7월 16일 한국자유문학자협회 문총 중앙위원으로 선출되다. 8월 26일부터 31일까지 극단 신협 제38회 공연 작품인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번역하다. 10월 1일에 간행된 『시작』 5집에 시 「목마와 숙녀」를 발표한 뒤 10월 9일 시작사 주최 제1회 시 낭독회에 참가해 낭독하다. 10월 15일 시집 선시집(산호장)을 간행하다. 실제는 ‘시작사’에서 간행한 것으로 유추된다. 김규동 시인의 증언에 따르면 제본소의 화재로 소실되다. 11월 13일 동방문화회관 강당에서 열린 김규동의 시집 『나비와 광장』(산호장)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시 낭독하다. 12월 28일 제1회 금룡상 심사에 심사위원으로 참여하다.
1956년
1월 초 선시집(산호장)을 다시 간행하다. 1월 16일 『선시집』에 대한 부완혁의 서평 「강인성과 긍지」가 『한국일보』에 발표되다. 1월 20일 이봉래의 서평 「박인환 저 선시집」이 『동아일보』에 발표되다. 1월 22일 홍효민의 서평 「젊은 세대의 심금」이 『조선일보』에 발표되다. 1월 23일 조병화의 서평 「장미의 온도― 박인환 선시집」이 『경향신문』에 발표되다. 1월 27일 『선시집』 출판기념회를 동방문화회관에서 갖다. 1월 28일 한국자유문학자협회에서 개최한 회원 합동 출판기념회에 참석하다. 2월 6일 『선시집』에 대한 김광주의 서평 「건방진 ‘멋’― 박인환 선시집에 부치는 글」이 『주간희망』(제26호)에 발표되다. 2월 21일 제3회 자유문학상 최종 후보에 오르다. 3월 초 시 「세월이 가면」이 이진섭 작곡으로 널리 불리다. 3월 17일 ‘이상 추모의 밤’을 열고, 추모 시 「죽은 아포롱― 이상 그가 떠난 날에」를 한국일보에 발표하다. 3월 20일 아침 아픈 딸 세화를 데리고 병원에 갔다 오다. 오후 9시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타계하다. 3월 22일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다. 4월 7일 ‘해방 후 물고(物故) 작가 추념제’가 열리다. 5월 20일 조풍연이 엮은 『세계의 인상』(진문사)에 수필 「몇 가지 노트」가 수록되다. 9월 19일(추석) 문우들의 정성으로 망우리 묘소에 시비 세워지다.
맹문재
편저로 『박인환 산문 전집』『박인환 평론 전집』『박인환 영화평론 전집』 『박인환 시 전집』 『박인환 번역 전집』 『박인환 전집』『박인환 깊이 읽기』 『김명순 전집-시·희곡』 『김규동 깊이 읽기』『김남주 산문 전집』, 시론 및 비평집으로 『한국 민중시 문학사』『지식인 시의 대상애』 『현대시의 성숙과 지향』 『시학의 변주』 『만인보의 시학』 『여성시의 대문자』 『여성성의 시론』 『시와 정치』 『현대시의 가족애』 등 있음.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