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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
성경:느혜미아11-12장
예루살렘 성벽이 건축되어지고 그 속에 살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사실 성벽은 건축되었지만 성내는 황폐했었습니다. 전혀 살만한 환경이 안되었습니다. 그러나 성밖에는 이미 사람들이 살고 있었으므로 비교적 그곳은 살만했을것입니다. 사람은 좀더 살기좋은 곳으로 가지 황폐한 곳에 살려고 하지 않을것입니다.
건축한 예루 살렘 성이 왕성해지지 않고는 이스라엘 민족이 결코 강해질 수 없다는것을 안 느혜미아는 이 예루살렘 도시의 재건을 위해 여호와께 백성들에게 세가지 재물을 바치라고 합니다. 이 제물들은 하나님께서 오늘날도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이 세상에 세운 교회를 위하여 바치라고 하는 것들이기도 합니다. 그런면에서 오늘 이시간에 살펴볼 내용은 오늘을 사는 저와 여러분에게 중요한 메세지가 되는것입니다.
1,하나님께 자신을 바쳐야 한다고 합니다.
황폐한 ,아직은 살 수 없는 성안에 살라고 하는것은 어떤면에서보면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였습니다. 이 요구에 세부류의 사람이 선뜻 나섰습니다.
오늘본문 11장 1-2절을 보면 "백성의 두목들은 예루살렘에 머물렀고 그 남은 백성은 제비 뽑아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와서 거하게 하고 그 구분은 다른 성읍에 있게 하였으며 무릇 예루살렘에 거하기를 자원하는자는 백성들을 위하여 복을 빌었느니라" 고하였습니다.
1)백성들의 두목들 즉 지도자들이 황폐한 예루살렘에 남겠다고 하였습니다.
먼저 솔선수범을 한것입니다.. 백성들에게 희생을 요구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던졌습니다.
이것은 오늘의 크고 작은 지도자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라 생각됩니다. 우리 예수님도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말함에 있어, 먼저 주님은 자신의 목숨을 십자가에 던짐으로 사랑의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베드로전서2장 21절에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바울도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 고 하였습니다.이 말은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그 모습을 좀 본 받으라는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지도자란 입으로 되는것이 아니고 삶으로 되는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백성중 십분의 일이 남았습니다.
지도자들 뺀 남은 백성중에 제비로 뽑힌 십분의 일은 거룩한 성 예루살렘에 살아야 했습니다.그리고 십분의 구는 다른 성읍에 거하게 했습니다. 이것은 재물의 십분의 일인 십일조의 원리를 적용한것입니다. 가옥사정이 나쁜 성내에 십분의 일로 뽑힌 사람들이 자진해서 이사들어 온다는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이였습니다. 그러나 순종하는 그들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 서문교회에 다니는 성도들중의 십분의 일에게 주님의 사역을 확장하려고 하니 다른곳으로 이사하라고 할 경우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순종할까요?
이 십분의 일의 원리를 우리는 다른곳에다 적용해 볼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기도에 있어서 입니다. 재단에 서문성도의 십분일이 매일 나와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특히 새벽기도나, 특별기도회에 같은 곳에 .. 바로 내가 이 교회의 기도의 십일조가 되겠다고 하는것, 참으로 귀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3)자원한 사람들입니다.
비록 예루살렘성에 산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지만 자원해서 살겠다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너무나도 귀한 사람들입니다. 어떤면에서 보면 하나님이 제일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예물을 드림에 있어서도 자원하여 드리는 예물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출애굽기 36장 3절에 " 이스라엘 자손의 성소의 모든 것을 만들기 위하여... 백성이 아침마다 자원하는 예물을 연하여 가져 오는 고로. 성소에 모든 일을 하는 지혜로운 자들이 각기 하는 일을 정지하고 와서 모세에게 고하여 가로되 백성이 너무 많이 가져 오므로 여호와의 명하신 일에 쓰기에 남음이 있나이다"
신명기 16장 19절에 "..네 하나님이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네 힘을 헤아려 자원하는 예물을 드리"라고 합니다.
고린도 후서 8장 1-5절에 보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의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했습니다. 마게도냐 교회 성도들은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성도 섬기는 일에 있어서 (1)자신을 주님께 드리고 (2)자신들의 것을 성도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예물에서만 아니라 봉사에 있어서도 자원하는자를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고린도후서 3장 16절 이하에 보면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저가 권함을 받고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디도는 자원해서 고린도교회에로 갔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도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에 본이 되라.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베전5:2-4)고 하였습니다.
"부득히 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라" 는것입니다.그러면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자원하는 것을 기뻐하시므로 우리는 시편51:12절에 "주의 구원의 즐거움을 내게 회복시키시고 자원하는 심령을 주사 나를 붙드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특별히 자원해서 남은 사람들에게 백성들은 너무나도 고맙고 감사해서 그들에게 복을 빌어 주는 모습을 봅니다. 하여튼 자원해서 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도 축복을 하고 , 사람들도 축복을 합니다.
그 교회가 힘은?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냐?
(1)자신을 희생하는 솔선수범하는 지도자가 얼마냐 있느냐?
(2)봉사와 헌신과 충성과 기도에 있어 성도의 십일조가 있느냐?
(3)자원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느냐? 에 따라 그 교회가 힘이 있고 능력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이 다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3절-19절까지 예루 살렘으로 이사 들어온 지파들의 구체적인 수를 언급하였는데 ,유다지파 468명, 베나민 지파가 928명, 제사장이 1192명, 레위인이 284명, 그리고 문지기들이 173명 해서 총 3044명으로 집계가 됩니다.
그리고 20-36절까지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의 마을에 사는 거주민들에게 대해 죽 기록하고 있습니다.
느혜미아 12장에 들어가서 1절-26절까지 명단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명단은 당시 사람들의 명단이 아니고 조상들의 명단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의 명단을 보면서 두가지의 교훈을 받습니다.
1) 믿음의 조상들에게 대한 감사를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토록 이스라엘 민족이 믿음의 조상들의 이름을 일일이 잊지 않고 기록하고 거론 할까요? 그것은 그분들을 수고와 은혜를 결코 잊을 수 없기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들에 대해 감사한 마음때문입니다. 그래서 느혜미아 12장 1-7절가지는 1차 귀환때의 지도자인 스릅바벨 시대의 제상장의 명단을 기록하였고, 8-11절까지는 레위인의 명단이고, 12-21절까지는 여호야김 제사장 시대의 귀환한 사람들의 명단을 ,그리고 마지막 22-26절까지는 그 외의 레위인들의 명단을 기록하였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에 의해 쓰임받았던 사람들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눈물과 헌신이 없었다면 오늘의 이스라엘이 존재 할 수 없었을것입니다.
저는 오늘 우리 젊은 세대들이 교회를 유산으로 물려 받음에 있어 믿음의 선배들의 눈물과 헌신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저가 이것을 참 뼈저리게 느끼는 것은 교회없는 섬에서 교회를 건축할때 저는 몇개월을 허리가 휘청하도록 일을 했습니다. 재정이 넉넉하지 않으니 어지간 일은 다 제손으로 해야 했습니다.
화장실을 짖고, 창고를 짖고, 그리고 도로를 내고, 세면으로 미장을 하는 등등...어떤 날은 아침부터 시작해서 밤 12정도까지 삽질을 한적이 있습니다. 거기서 제가 배운것은 비록 조그마한 교회일지라도 그 교회가 교회되는데에 있어서는 개척자의 눈물의 기도와 피땀의 수고가 그 교회건물속에 얼마나 흠뻑 베여야 하는지를 피부로 체험을 했습니다.
저는 서문교회의 건물을 보며 또, 본당으로 올라 오면서 늘 생각이 됩니다. 이 교회건물을 세우기 위해서, 오늘의 서문교회를 이루기 위해서, 믿음에 선배들이 얼마나 여기에 눈물을 심었으며, 기도를 심었으며, 또 얼마나 허리를 쬐는 피땀의 수고를 여기에 담았는지, 저는 체험을 해보았기때문에 그것이 느껴집니다.
서문교회 모든 성도들은 아니였을것입니다.
그러나 펜을 들고 기록하라면 오늘의 서문교회가 있기까지, 이름을 기록할 수 있는 눈물의 사람과 자신의 것을 던져 교회를 이룬 믿음의 선배들을 기억해 기록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분명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분들의 수고와 땀과 ,신앙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여기에 있는 장년부 소속의 모든 분들도 여러분의 후손들에게 기억될 수 있는 신앙의 선배가 꼭 되시길 바랍니다.
12장에 명단을 보면서 교훈받을 수 있는?
2)하나님께서도 자녀들이 자신을 섬길때 무슨일을 하는지 보고 기록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도 기록하는데 하물면 상을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이 기록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보좌 앞에는 4종류의 책이 있다고 합니다.
1, 하나님 말씀의 책.
2, 생명책입니다.
성도들의 이름이 기록 되었고 여기에 이름이 기록 된자만이 구원을 얻습니다.(계20:15)
3,행위의 책
불신자들의 이름들만 기록 되었고 그들이 행한죄가 기록 되어 있다. 불신자들은 이 행위 록에 기록된 죄악의 행위로 인해 심판 받아서 지옥불에 들어가게 됩니다.
4,기념책(말라기 3:16-18)
성도들이 주와 복음을 위해 충성한 일을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그 업적을 기록합니 다. 그래서 그기념책에 기록 된 데로 상급을 주실것입니다.
설령 다른 사람들이 교회에서 충성하고 사역하는 나의 일을 인정해주지 않아도,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일을 알고 계시며 그에 따른 보상을 반드시 해주십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5:58절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고 하였습니다.
느혜미아는 예루살렘 도시의 재건을 위해서 배성들에게 요구한?
2, 하나님께 찬양을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것이 느혜미아 12:27-43절에 기록됩니다만, 성벽 봉헌식을 하면서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며 ,감사의 찬양을 소리 높여 했는지 43절에 보면 "멀리"까지 그 소리가 들렸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2장에 무려 찬송하는것이 8번, 감사하는 대목이 6번, 기뻐하는 대목이 7번이나 기록이 되었습니다.
시편69:30-31"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잇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여튼 감사와 찬양만큼 여호와를 기쁘시게 하는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느혜미아는 찬양을 바치라고 요구했습니다.
에베소서 1장 6, 12, 14절을 보면, 성부께서 우리를 선택하신 목적, 성자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신 공통적인 목적은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3위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유일한 목적입니다.
전도하는 긍극적인 목적은 그 사람의 영혼을 구원해서 결국은 하나님을 찬미 하는 사람만드는것이 목적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3장 15절에"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고 하였습니다.
느혜미아는 요구한
3,하나님께 물질을 바치라고 합니다.
느혜미아 12:44절을 보면, "율법에 정한데로 거제물과, 처음익은것과, 십일조를 " 드렸고, 47절에는 "노래하는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것을 주었고,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사람들은 또 구별해서 아론 자손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느혜미아는 하나님께 바치라고 한 세가지 요구?
먼저, 자신을 바치고, 둘째는 , 찬양을 바치고, 세째는 물질을 바치라는것에 모든 백성들은 순종을 했습니다. 그 결과 43절 "백성들이 크게 즐거워했는데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 하게 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기쁘셨을까요? 그 기뻐하신 하나님은 그렇게 순종하는 백성에게도 큰 즐거움을 주셨던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이 전관심을 두고 있는 이 세상에 유일한곳을 하나 선택하라면 그것은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유일한곳입니다.
이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오늘 우리에게 요구하는 3가지는
(1)너 자신을 바치라!,
(2)찬양을 바치라!
(3)물질을 드려라!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십니다. 부득히 하지 말고, 자원하는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아무쪼록 , 저와 여러분은 은혜를 입은자로서 자원하는 심령이 되어 주께 헌신 하므로 , 주님 앞에 섰을때 칭찬과 영광의 면류관을 받으시는 분들이 다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노래하며, 즐거워하며
느 12:27-47
그리스도인의 삶은 수고가 있는 생활입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 자체를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나그네의 삶이라고 했고, 사도 바울은 전투하는 생활이요, 경주장에서 경주하는 것으로, 또 하나님께 몸으로 산 제사드리는 생활이라고 했습니다.
피와 땀과 눈물의 삶이라고 할 정도의 어려움의 삶입니다. 이 처럼 세상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사는 일은 심히 어렵습니다. 이를 사도 바울은 짐 지는 것 같이 탄식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따르는 제자들에게 평온을 보장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길은 항상 고통이요, 어려움이요, 짐 진 것 같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한 싸움 끝에는 종종 쉴 수 있는 즐거운 때가 오는 것입니다. 싸운 후에는 승리를 맛보게 됩니다. 고통 한 것 보다 더 큰 즐거움과 기쁨의 때도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12장에서 크게 즐거워하는 축제의 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들에게서 이런 기쁨과 즐거움이 어디에서 나온 것입니까?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에게 있는 모든 거짓된 기쁨과 즐거움이 다 떠나고 참된 기쁨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즐거움으로 생을 즐기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율법의 말씀을 통한 회개와 순종의 부흥이 이들에게서 일어나고 난 다음에 재헌신의 각오가 있고, 그 다음에 이들에게 성벽낙성식의 이 축제가 열렸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는 그 인근 지역의 레위사람들과 노래하는 사람들을 오게하였고, 성벽을 올라서 거대한 행진을 하게 했습니다.
그 행진은 둘로 나뉘었습니다.
한 무리는 느헤미야를 따라서 성벽 위를 돌았고, 또 한 무리는 에스라를 따라서 반대방향에서 성벽 위를 돌아 행진했습니다.
여기서 이들 무리들이 행진을 하고 모인 곳이 성전이라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전을 그들의 중심에 두고서 하나님의 이름을 온 세상에 떨치고 영원히 기념하게 하려는 뜻에서 성벽을 쌓았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 무리들 앞에는 각각 노래하는 자들이 앞 장 서 가며,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이 이렇게 성벽을 한 바퀴 돈 다음에는 하나님의 전에 모여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는데 "예루살렘의 줄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봉헌이란 무엇입니까?
물질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8장에 사도바울은 마게도냐의 사람들이 실제로 환난 가운데서 극한 가난에 있으면서도 예루살렘교회를 돕는 연보를 하는데, "저희가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다"고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곽을 봉헌하는 일에서도 이들은 먼저 자신을 드리는 일부터 했습니다.
12:30에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먼저 몸을 성결케하고 또 백성과 성문과 성을 성결케 했다"고 했습니다.
이들은 우선 그들의 몸과 의복을 씻는 의식을 행하고, 금욕하고, 속죄제를 드리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먼저 사람이든지, 물질이든지 정결케해야합니다. 정결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이와 같이 오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에는 성결이 먼저 요구됩니다. 목회자나 특별히 그날 예배에 순서를 맡은 자들, 성가대원들이 다 예배에 수종드는 자들인데, 이들이 깨끗하게 자신을 준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성결이 헌신이 됩니다.
우리가 성찬예식 때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떡과 잔을 대하므로 약하고 잠자는 자들도 많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모든 예배에 다 적용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은혜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우리의 행위를 씻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가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성소에 나아갈 때에 세수통에서 그들의 손과 발을 깨끗하게 씻고야 성소에 들어간 것 같이 우리들은 말씀으로 자신을 돌아보아서 한 주간의 모든 더러운 모든 죄와 허물을 주의 보배로운 피에 씻어야합니다. 이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들이 약해지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에 힘이 없고, 우리들이 하는 일에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또 이것을 하지 않는 이유 때문에 신앙에 잠 자는 자들, 신앙이 아주 죽어버린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성결케 하는 일은 비단 목회자, 성가대원, 순서를 맡은 자들 뿐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다 그러합니다.
이렇게 자신을 먼저 깨끗하게 드리고 난 다음에 드리는 물질, 시간, 정력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다. 자신은 드리지 않고 물질만 드린 가인의 제사같은 이스라엘의 종교행위를 하나님께서는 징계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 백성들은 성벽봉헌식을 합니다.
그런데 이 봉헌 예배에서 중요한 요소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그 하나는 노래하는 것이요, 또 하나는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 백성들이 무엇을 노래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베푸신 크신 은혜를 감사하며 하나님의 성호에 찬양했을 것입니다.
이들의 찬송제목은 감사였습니다.
우리들의 생활에 있어서 노래하는 일은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가 찬양을 몸으로 생활로, 드려야합니다. 그러나 입술로 찬송노래 하는 것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노래하는 것은 신구약 성도들에게 있어서 공통된 하나님을 경배하는 방법입니다. 하나님께 이들이 합창을 하면서 함께 큰 소리로 노래하며, 여러 가지 악기를 사용하여 찬양했습니다. 우리들이 즐겨 부르는 찬송은 거의가 다 신앙의 간증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우리들은 고난 가운데도 찬송합니다. 우리들은 심지어 장례식에서도 소망 가운데 찬송합니다. 찬송을 쉬지 않아야 합니다. 이 찬송에 힘이 있습니다. 어두움이 다 사라집니다. 그 입술에 찬송이 있을 때에는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도 없어집니다. 찬송이 있을 때에는 근심도 없어집니다.
느헤미야가 낙성식에서 노래하는 일을 제일 우선 해서 준비한 것 같이 우리들의 찬양은 준비되어야합니다.
둘째로, 즐기는 것입니다.
이들은 노래하는 일과 함께 즐기는 일을 했습니다.
즐거운 노래는 즐거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43절에는 즐거움이라는 단어가 네 번이나 나옵니다.
(느12:43) 이 날에 무리가 크게 제사를 드리고 심히 즐거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음이라 부녀와 어린 아이도 즐거워 하였으므로 예루살렘의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 들렸느니라
그들은 심히 즐거워했고, 부녀들과 아이들 까지도 즐거워했고, 이 즐거워 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들렸습니다. 이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크게 즐거워하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즐거워한 것은 신령한 즐거움이지 그저 쾌락주의의 즐거움은 아닙니다.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들의 삶의 목표, 철학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기쁨이요, 즐거움입니다. 이를 얻기 위해 얼마나 인생들이 노력하고 있으며, 궁구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어디에 있습니까? 참된 안식과 평강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품을 떠나 세상에서 이것이 있습니까? 어디를 가도 위장된 기쁨과 즐거움으로 잠시 누리는 세상의 낙으로 우리를 꾀우는 마귀의 역사이지 그것이 우리 중심에서 올라오는 가치있고, 신령하고, 영원한 기쁨과 즐거움은 이 세상에서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품에 안길 때에야 인생에게 비로소 안식도, 평강도, 기쁨도 즐거움도 있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기뻐하라고 하신 기쁨을 가집니까?
하나님께서 크게 즐거워하라고 허락하신 이 즐거움으로 세상을 살아가십니까?
여전히 세상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있는 줄 알고 찾아 다니는 삶은 아닙니까?
이 세상은 억지로 즐거워하려고 애를 씁니다. 즐겁지 않기 때문에 술을 마셔서 마약으로 인위적으로 즐겁게 해 보려고 합니다. 말초신경이라도 자극해서 찰라의 쾌락을 추구해 나가는 미친 자들의 행위를 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아직도 이 세상 같이 춤으로 세속적인 노래로 술로 즐거움을 찾는 분 계시지 않습니까?
이번 추석에도 모이면 세속적인 일을 해서 기쁘게 하려고 하지 맙시다. 기독자들이 무슨 재미로 세상을 살아가는지를 보여주어야지 그들이 즐기는 것들과 같은 것으로 우리들이 웃고, 즐기면 우리들이나 그들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노래와 즐거움은 어디에서 나왔습니까?
먼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이유입니다.
이들이 성벽을 재건하는 일을 하는데도 많은 원수들의 방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도우셔서 이 성벽을 다 재건하고 나니까 이제 그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이룬 것으로 즐거움이 있게 된 것입니다. 또 그들은 성벽 쌓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슴으로 돌아가서 그들의 조상 때부터 하나님께 진노를 쌓았던 모든 죄를 찾아 즉각적으로 회개하는 일을 했습니다. 또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한 일들을 낱낱이 순종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의 심령은 하나님께로 돌아왔고,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하고 난 다음에 그 심령에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즐거움을 가졌기 때문에 노래하고 즐거워했던 것입니다.
자신을 먼저 드린 자들에게, 또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을 행하였을 때에, 오는 이 기쁨은 우리 육신의 욕심을 이루고 기뻐하는 것 보다 비교할 수 없는 기쁨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기쁨이 있습니까?
이 즐거움이 있습니까?
기독자의 삶은 고통과 근심과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 아닙니다. 실은 그 안에서 행하는 자에게는 이 노래와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것이 크기 때문에 어떤 고통도 어떤 고난도 이기는 것입니다.
이 노래와 기쁨이 우리의 삶에 가정에 교회에 충만해야합니다. 이들은 부녀들과 아이들 까지 즐거워했는데, 이 즐거워하는 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졌습니다.
기쁨 없는 세상에 소망없는 세상에 우리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노래 소리가 들려질 때에 그들에게 소망이 될 것입니다. 이 기쁨을 나누어주여야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사랑하는 형제들, 부모님, 친지들은 무엇으로 기뻐합니까?
없어질 것들로 기뻐하지 않습니까?
잠시 누리는 쾌락을 사모하여 죄를 짓고 고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불쌍하면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이번 추석에도 해야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찬송소리가 멀리 퍼져야합니다. 우리들의 기뻐하는 모습을 그들이 볼 때에 우리들의 소망에 대해서 물을 것입니다.
기뻐합시다.
인상쓰지 말고, 즐거워합시다. 하나님께서 즐거워하게 하십니다. 무엇을 고민하고, 고통합니까? 하늘에 속한 근심은 해야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까지도 다 주께 맡길 때에 주께서 주는 평강과 기쁨이 샘 솟듯 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삶에 이 노래와 즐거움이 끊이지 않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글쓴이: 옥련지침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