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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장
결혼과 이혼 막 10:1-9
바리새인들이 '이혼'문제로 예수를 시험하여 그를 몰락시킬 구실을 찾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처럼 그들의 시험을 지혜로운 대답으로 물리치셨습니다.
1. 이혼문제로 시험한 의도
1) 당시의 이혼제도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묻되 사람이 아내를 내어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2절). 바리새인들의 이 질문속에는 이혼제도에 대한 당시의 상황이 그 배경으로 깔려 있습니다. 당시에는 이혼에 대하여 두가지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고 있는 두 학파가 있었습니다. 두 학파간에는 이혼의 율법적 근거인 신명기 24:1,2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견해 차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이혼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에서 '수치되는 일'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샴마이 학파에서는 그것을 '간음한 일'로 보는 데 반하여, 힐렐 학파에서는 그것을 '싫증'이나 '불순종', '불화'등의 이유도 '수치되는 일'의 개념 속에 포함시켜 해석했습니다. 이와 같이 당시의 유대 사회에 있어서 '이혼증서'제도는 불경건한 남성들에 의하여 남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혼문제를 이들이 들고 나온 것은 이 두 학파중 어느 한 학파와 예수를 충돌시키기 위한 간계에 의해서였습니다.
2) 정치적 함정
바리새인들이 '이혼'문제를 '시험'으로 들고 나온 데에는 정치적으로 예수를 매장하기 위한 함정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에 헤롯이 이혼하고 동생의 아내인 헤로디아를 취한 일을 책망하다가 죽은 세례 요한과 같은 운명으로 예수를 몰아가기 위한 간계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혼과 결혼에 대한 보다 근원적이고 차원 높은 교훈으로써 그들의 시험을 물리치셨습니다.
2. 이혼증서의 의미
1) 차선책으로서의 의미
'모세는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예수게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4,5절)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하여 예수께서는 율법에 어떻게 명해져 있느냐고 물으셨습니다. (3절) 바리새인들은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어버리라고 했다고 대답했습니다. '이혼증서'만 써주면 얼마든지 이혼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에 대하여 주님은 율법이 '이혼증서'를 명한 뜻이 하나님의 근본적인 의도가 아니라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취해진 차선책이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결혼한 부부가 죽을 때까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지만 인간의 죄성은 실제 결혼생활에 있어서 그렇게만은 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이혼증서'의 제도를 마련하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이혼증서'제도가 차선책이라는 뜻으로 말씀하신 것은 어디까지나 '음행한 연고'(마5:32)가 있을 때 뿐이며 아무때나 '이혼증서'를 남발해도 좋다는 뜻은 아닙니다.
2) 여성의 보호 기능으로서의 의미
'너희 마음의 완악함을 인하여 이 명령을 기록하였거니와'(5절). '이혼증서' 제도가 인간의 완악함 때문에 생긴 것이라는 데에는 또 다른 측면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혼한 아내가 남편의 부당한 학대를 받을 경우, 아내로 하여금 남편의 학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생을 개척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24:1,2의 이혼 규정이 '이혼증서'를 가진 여인은 다른 사람과 재혼할 수 있도록 허락하고 있기 때문이며, 간음한 죄가 공개적으로 드러났을 때에는 남녀를 다 죽이도록 규정하고 있으므로(레20:10), '이혼증서'를 써서 내보낼 경우 '이혼증서'는 아내의 생명을 지키는 보호 기능도 갖게 된다는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3. 결혼의 의의
'창조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6-8절) 결혼제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축복된 신성한 제도로서 개인의 행복과 가정이라는 공동체의 평안과 공중 도덕의 순결을 증진 시키고 국민의 건강과 번영과 안정을 보존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일부 일처제를 원칙으로 하고 있으며, 이혼은 일부일처제의 파괴가 되고 결혼에 대한 근본적인 의미를 저버리는 것이 됩니다. 인간은 결혼을 통하여 사랑과 봉사의 삶을 배우고 권위와 복종에 대한 의미를 깨달으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신랑)과 교회(신부)와 구속사적 관계를 성취하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이혼에 대한 교훈 막 10:10-12
본문은 이혼에 대한 예수님의 단호한 의지와 함께 모세의 율법에서 규정한 이혼에 대한 율례를 재해석하고 있습니다. 함께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결혼은 하나님의 축복
1) 창조의 원리임
가정을 개인들의 우연한 만남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신 순간부터 가정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창2:18-25) 시대를 불문하고 가정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관으로 가정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그의 섭리를 이루어 가셨습니다. 가정은 교회와 함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거룩한 도구입니다.
2) 성경은 일부일처제를 주장함
하나님께서 처음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구분하여 지으셨다는 것은 일부일처제가 성경적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결혼은 전인격적인 만남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존재대 존재로서 한 남자와 한 여자의 전체적인 결합이 되기 위해서는 일부일처제가 마땅한 것입니다.
3) 한 몸으로 결합하는 것임
여자와 남자는 결혼을 통해서 한몸이 되는 것입니다.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영적으로도 하나로 결합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결합만을 생각함으로 많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되는 것입니다. 육체는 이기적이어서 진정한 결합을 할 수 없습니다.
4) 부부의 관계를 인간이 나누지 못함
혼인 계약은 평생동안 유효한 것이며, 부부의 관계는 사람이 나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이 제정하신 제도이므로 인간의 법으로 왈가왈부할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이혼을 허용하는 경우는 음행을 했을 때인데, 그것도 다음 3가지의 경우에만 적용됩니다. 1) 배우자가 간음을 행했을 때 2) 정혼 기간중에 간음했을 때 3) 근친간의 혼인사실이 드러났을 때 이혼이 가능했습니다. (레18장)
2. 간음에 대한 재해석
1) 남자의 간음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그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데 장가드는 자는 본처에게 간음을 행함이요'(11절)라고 하십니다. 당시의 랍비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간음을 했을 경우 여자는 남편에게 간음죄를 지은 것이 되나 남자는 자기 아내에게 간음죄로 적용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남자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동일하게 간음죄가 적용된다고 말씀하심으로 여자와 남자가 똑같은 인격체로서 동등한 권리가 있음을 강조하셨습니다. 여자에게만 도덕적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도 똑같은 도덕적 윤리적 책임이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의 힐렐 학파는 여자가 간음할 경우 이혼을 당한다고 주장했으나, 샴마이 학파는 간음은 물론이고 요리를 잘못하거나 집안에서 사소한 잘못을 일으켰을 때에도 이혼이 가능하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교훈은 이들의 교훈과는 거리가 먼 교훈이었으며 여자만 일방적으로 이혼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이혼에 관해서는 남녀 두 사람 모두 똑같은 책임이 있음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2) 여자의 간음
예수께서는 '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다른데로 시집가면 간음을 행한 것이니라'(12절)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은 병행구절인 마태복음의 내용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마19:9) 왜냐하면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해서 기록되었기 때문에 아내가 남편을 버리고 가는 예가 유대인들에게는 예외적인 일이었으나 헬라인이나 로마인들에게는 흔히 있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남편의 외도가 간음이듯이 아내의 외도도 간음입니다. 결혼생활을 깨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임을 알아야 합니다. (창1:27) 결혼이란 하나님 앞에 두 사람이 하나로 서서 엄숙한 삶을 살아가는 경건한 것이므로 인간의 법이나 규칙에 의하여 결코 깨뜨릴 수 없는 것입니다. 결혼은 남녀의 일시적 욕망을 채우려는 쾌락적 유희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목적과 계획이 실현되는 경건한 섭리입니다. 결혼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이혼은 이러한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정면도전인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혼율이 급증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결혼 후에 어떤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이혼을 통하여 해결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온당한 방법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교훈은 이러이러한 조건이 되면 이혼하라는 이혼 권장의 말씀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든지 가정을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이기에 그 죄를 범하지 말것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혼에 대한 교훈의 결론은 이혼은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며 그러므로 결혼할 때 신중을 기해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결혼한 이상 서로 봉사하고 헌신하며 끝까지 부둥켜 안고 살아야 합니다. 이 땅에서의 바른 결혼생활은 하나님 나라에서의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의 예표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천국의 주인 막10:13-16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천국의 주인은 물론 주님이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보혈로 대속함을 받은 우리 역시도 주인이 됩니다. (롬8:16-17) 그런데 우리 가운데서도 가장 확실한 천국의 주인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바로 어린 아이들입니다. 그러면 왜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을 천국의 온전한 주인으로 말씀하셨는지, 어린아이들의 특징을 생각해 보고 함께 어린아이들에 대한 부모의 신앙적 의무와 그들을 축복하시는 주님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천국의 주인인 어린아이
1) 순수함
어린아이들이 가진 첫째 특징은 악을 오래 가지고 있지를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순수합니다. 악을 계속해서 도모할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교훈할 때에도 '형제들아 지혜에는 아이가 되지 말고 악에는 어린아이가 되라'(고전 4:20)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겐 가시기 없습니다. 꾸밀 줄도 모릅니다. 약점이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부끄러워할 일을 마땅히 부끄러워하고 고쳐야 할 일을 마땅히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2) 신뢰성
또 하나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특징은 믿음입니다. 아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을 철석같이 믿습니다. 도대체 어린아이들은 의심할 줄을 모릅니다. 그런데 이러한 믿음은 강요된 믿음이 아닙니다. 믿지 못할 것을 자기 확신을 불어넣음으로써 믿는 믿음도 아닙니다. 너무도 자연스런 믿음입니다.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믿음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천국의 확실한 주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믿는 자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3) 겸손함
어린아이들에겐 악이 없을 뿐만 아니라 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남을 공격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린아이는 항상 자기를 알고 교만하지 않습니다. 어른에 대해 무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알고 어른들을 어려워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겸손한 속성을 가진 어린아이들을 가리켜 주님께서는 표현하기를 '자기를 낯추는 이'(마18:4)라고 하셨습니다.
2. 어린 아이에 대한 부모의 신앙의 의무
1) 주님께 인도해야 함
(1) 혼자 힘으로 주님을 찾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은 왜 예수님을 만나야 하는지, 또 어떻게 찾아가야 하는지를 알 수 없으므로 신앙의 부모가 마땅히 아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합니다. (2) 어린아이들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아이에게 악이 없고 악을 행할 능력이 없다 하더라도 아이들 역시 죄인입니다. 따라서 마땅히 구세주 예수님 앞으로 나아와야 합니다. (3) 선한 영향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순진합니다. 깨끗합니다. 따라서 악에 물들기가 쉽습니다. 그러므로 주님 앞에 나아와 주님께 절대적인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2) 그리스도께 대한 신실한 신앙
자녀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서는 부모 자신에게 먼저 신실한 신앙심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의 유산만큼 위대한 유산은 없습니다. 경건한 부모 밑에 악한 자녀가 없기 때문입니다.
3. 예수님의 축복
1)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심
'어린아이들이…금하지 말라'. 창녀요, 세리라 할지라도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신 주님은 어린아이들ㅇ 역시 구원에서 제외시키지 않으셨습니다. 그들도 영생의 말씀을 듣게 하셨고 구원의 기쁨을 누리게 하셨습니다.
2) 제자들을 분히 여기심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원어로 보면 여기서 '분히 여기다'라는 말은 대단히 화를 내신 모습을 묘사하신 것입니다. 성경 어디에도 이 단어가 쓰인 곳은 없습니다. 그만큼 주님께서는 크게 화를 내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당신의 뜻에 역행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십니다.
3) 천국의 속성과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가르치심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들어가지 못하리라'. 주님께서는 이 간단한 말씀을 통해서 천국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속성과 그 구성원들은 겸손하며 거짓이 없는 믿음을 가진 자들임을 가르치셨습니다. 천국은 실로 그 호화로움 때문이 아니라 천국백성의 자격이 있는 자들의 아름다운 믿음음과 성품으로 인하여 아름다울 것입니다.
4) 어린아이들을 안수하심
'그 어린 아이들을 …축복하시니라'.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꾸짖던 아이들을 안고는 욱복하셨습니다. 그리고 안수하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자기를 낮추는 자들을 높이시고 축복해 주십니다. (마18:4)
부자청년의 번민 막 10:17-22
우리 주변에는 실속없는 지식을 갖고도 모든 세상의 것들을 통달한 것 처럼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이런 자들을 위하여 '만일 누가 아무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니라'(갈6:3). '그런즉 선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제 외적인 모든 면에 있어서 거의 흠이 없는 청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족한 한 가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주님앞에 엎드린 사건을 통하여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부족함이 없는 청년
1) 그에게는 열심이 있었습니다.
그는 우연히 마주칠 수 있는 방법이나 많은 무리와 함께 주님께 나아가는 소극적인 방법을 택한 것이 아니라 밤중에 예수를 찾아갔던 니고데모와 같이 갈급한 영적인 문제를 위하여 주님께 스스로 찾아가는 적극적인 신앙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그를 찾으신 것이 아니라 청년이 주님을 찾아갔던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는 일에 열심 있는 자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알고 섬기며 믿음의 도를 지키는 일에 적극적이고 열심있는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2) 그는 겸손한 자였습니다.
예수께 나아온 그는 먼저 예수께 대한 지극한 존경심과 겸손한 태도로 그 앞에 꿇어 엎드렸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구하시는 것은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같은 기름이 아니라 오직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미6:7,8) 성경은 또 우리에게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벧전5:5,6)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순복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어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3) 그는 진실한 자였습니다.
거짓된 삶을 살아온 사람은 전능자 앞에서 자신의 떳떳함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청년은 모든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에 대하여 '내가 어려서부터 모든 계명을 지켰습니다.'라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에 대하여 진실한 사람은 하나님과 이웃에 대하여도 진실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온 청년의 모습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진실히 행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잠12:22)
4) 그는 자기 신앙에 충실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회의를 느끼거나 의심을 품거나 형식으로만 행하지 않고 매우 열성적이고 충실한 자세로 임했습니다. 그리고 보다 확실하고 온전한 신앙인이 되고자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상태는 어떻습니다. 쉽게 의심하고, 쉽게 비판하고, 쉽게 타협하는 뿌리없는 형식적인 신앙은 아닙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나, 믿음에나, 삶에 있어서 확실한 자기 고백이 있는 충실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2. 청년에게 주시는 주님의 교훈
청년은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받는 신앙인이었지만 그 내부에는 심각한 고민이 있었습니다. 즉 신앙의 핵심인 구원의 문제에 대한 확신이 없었습니다. 모든 것이 있어도 근본적인 것이 없으면 무의미합니다.
1) 적극적인 선행을 베풀라
주님은 부족함이 없는 청년에게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셨습니다. 즉 그가 영생으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는 방해물인 많은 재물에 대한 집착이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것을 제하시기 위해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21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결국 영생을 얻으려면 우리 속에 있는 우상을 버려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전심전력을 다해서 좇으라
주를 따르기에 걸림돌이 되는 장애물을 제거한 후에는 최선을 다하여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즉 자기를 부인하고 주어진 십자가를 지고서, 그분의 삶을 본받는 종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마음을 다하여 진실함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삼상12:24)는 것입니다.
3. 청년의 번민
영혼의 갈급함을 해결키 위해 열성적으로 주께 나아왔던 청년은 주님의 권면을 듣고는 슬픈 기색으로 돌아갔습니다. 자신의 삶에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물질을 포기하고 하나님을 따를만한 참된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중대한 결단의 순간에 육의 소욕을 따라 영의 소욕을 외면함으로 영생이 아닌 멸망의 길을 선택했던 것입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들까지도 하나님께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의 신앙적 결단을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재물과 하나님의 나라 막 10:23-27
하나님의 나라는 모든 인간들이 추구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간이 자신의 의지대로 조국을 선택할 수 없듯이 하나님의 나라도 인간이 선택하여 갈 수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구원받은 자만이 가는 나라이며,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한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몹시 어렵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인간 실존의 중대한 물음인 '영생'에 관한 부자 청년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럼 왜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 있는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재물의 특성
부자는 한마디로 재물을 많이 소유한 자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든 이유를 알기 위해서 먼저 재물의 특성을 알아야 합니다. 해답은 재물에 있기 때문입니다.
1) 세속적입니다.
재물은 그 자체로서 부정적으로만 볼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것만도 아닙니다.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 위하여 필요한 도구중 일부입니다.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운 이유는 부자라는 신분 때문이 아니라 그가 재물을 어떠한 시간으로 보느냐는 것입니다. 즉 재물관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엔 재물이 필요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만 필요한 것이 재물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이 재물만을 추구할 경향이 있고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러한 자세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재물을 향한 관심이 지대하다면 자연히 하나님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게 마련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주인입니다. 그러므로 재물을 주인으로 섬긴 자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부자 뿐만이 아니라 어떠한 사람이라도 하나님보다 재물을 더 사랑하는 자는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재물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딤전6:10)
2) 하나님보다 재물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재물의 힘은 막강하였습니다. 특히 산업경제가 발달한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재물을 가진 자의 세력을 대단합니다. 그것은 돈만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한 영역이 그만큼 많아진 탓이기도 하지만 재물에는 불가능이 없다는 인간의 어리석은 생각탓도 있습니다. 이렇게 재물의 위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람은 재물만 의지하게 됩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야 하는 영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재물을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호를 귀찮아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리에다 재물을 놓고 그것을 섬깁니다. 그에게 있어 재물은 삶의 수단이 아니라 목적입니다. 하나님 외의 인간의 목적은 모두가 우상입니다. 그러므로 부자가 이렇게 하나님 대신 재물을 의지하는 습성이 강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에는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
1) 그리스도를 좇아야 합니다.
부자 청년의 영생에 대한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너의 모든 소유를 가난한 자에게 베풀며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영생의 길은 참 길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소유를 버리고 예수가 되게 하셨으며, 세리직을 버린 마태를 복음서의 기자로 삼으로셨습니다. 재물을 좇느냐 예수님을 좇느냐의 문제는 인간이 선택해야 할 중요한 명제입니다. 단 한번의 선택이 생명을 좌우합니다. 재물을 좇는 자는 세상과 함께 멸망할 것이며, 예수를 좇는 자는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는 영광을 얻을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예수님 외에는 그 누구도 열 수 없습니다.
2) 우리의 재물로 구제에 힘써야 합니다.
'네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성도의 재물에 대한 소유 기준은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많이 베풀고 있느냐에 이씃ㅂ니다. 나눌수록 더 커지는 것이 사랑이듯 베풀수록 더 많이 소유하게 되는 것이 하나님 나라의 재물 법칙입니다. 재물은 본시 하나님의 것입니다. (시50:10;학2:8) 인간은 단지 그것을 맡은 자일 뿐입니다. 구제하십시요. 예수님의 명령대로 실천하십시요. 재물에 대한 가장 확실한 투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구제에 힘쓰는 일입니다. 이 일은 교회가 성도가 당연히 주도해야 할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러한 구제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 손이 모르게 은밀히 하여야 합니다. 성도의 이런 선한 행실은 은밀한 중에 보시는 하나님께서 갚아주십니다. (마6:3,4)
복음전파자가 받는 복 막 10:28-31
그리스도를 따르는 길은 축복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지 창조후 아담에게 창조물을 다스릴 축복을 주셨지만 이제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소유와 시간을 헌신한 자들에게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권한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마19:28) 그리고 구원을 선물로 주심과 동시에 그리스도를 위해 버린 소유의 백배를 보상해 주시겠다고 본문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0절) 부자 청년은 자신의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나를 좇으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근심하여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를 위시한 제자들은 비록 그들의 소유물이 적은 것이긴 하지만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 그결과 그들은 영생을 얻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영예를 얻었습니다. 본문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받는 축복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현세에서도 축복을 받습니다.
'백배나 받되'(30절)
제자들을 예수님을 좇을 때 자신의 소유를 모두 버리고 좇았습니다. 그들이 버린 소유물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라 할지라도 그들의 전재산이었기에 부자의 전재산과 동등한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나이다.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백배'의 보상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30절) 축복은 버릴 때 받게 됩니다. 자신의 소유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기에 그 소유를 포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자를 백배나 축복해 주십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업이나 구제를 위하여 물질로 봉사할 때 더욱 하나님의 축복을 받게 됩니다. 재물에의 포기는 하나님의 사랑의 적극적 표현입니다.
2. 고난을 겸하여 받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
기독교의 위대성은 고난을 축복으로 여기는데 있습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자랑으로 여겼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신이 채운다고 말하였습니다. '핍박을 겸하여 받고'라는 말씀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로마의 황제들에 의하여 환난과 핍박을 받을 것이란 사실을 미리 예언하신 말씀이었지만 교회사를 볼 때 세상과 전도자는 항상 적대적인 관계이므로 오늘날의 성도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참된 전도자는 핍박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복음 사역의 수행에 있어 핍박과 곤란은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핍박은 불씨와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로마시대 때 초대 교회의 처참한 박해를 생각해 보면 복음은 도리어 예루살렘을 떠나 인근 지방까지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잇습니다. 즉 박해를 통해 복음이 빛이 더욱 퍼져 나갔던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 사역에 있어 핍박은 필요한 과정으로서 전도자에게는 오히려 더한 사명감을 고취시켜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보훈을 말씀하실 때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5:10)하셨고 베드로는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벧전4:14)고 말하였습
니다.
3. 구원을 받습니다.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30절). 전도자들의 내세의 축복은 영생입니다. 축복중의 축복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는 이미 영생을 소유하였지만 내세에서는 영생을 실현해 나갈 것입니다. 영생은 영원토록 계속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과 함께 안식과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있어 영생에 대한 문제만큼 중요한 문제는 없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셨고 복음이 선포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 사역은 영생 문제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영생은 중요합니다. 부자 청년은 자신의 소유심 때문에 영생을 잃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세상 끝날 불타 없어질 재물 때문에 영생을 잃어서는 결코 안될 일입니다.
4. 보좌에 앉게 됩니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마19:28) 이 말씀은 본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마태복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받는 이 축복은 그리스도와 함께 보좌에 앉아 심판의 권한까지 행사한다는 말씀입니다. 보좌는 승리의 자리입니다. 박해하고 핍박한 무리들을 심판할 장소입니다.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는'(시23:5) 역사가 일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헤어졌던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나는 자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눈물을 씻어 주고 새로운 삶을 사는 자리인 것입니다.
부활의 예언 막 10:32-34
예수께서는 자신이 고난을 당하시고 다시 부활하신다는 사실을 짜들에게 세번씩이나 말씀해 주셨습니다. 첫번째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직후에 가이사랴 빌립보 근처에서 말씀하셨으며(막8:31), 두번째는 귀신들린 아이를 고쳐주시고 갈릴리를 지날 때 제자들에게 말씀하셨고(막9:31), 마직\막으로 본문에서 전보다도 더욱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본문을 살펴봄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예수님의 담대함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가고 있는 예루살렘은 그가 메시야로서 고난을 받아야 할 장소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제자들 앞에 서서'(32절) 담대히 나아가셨습니다. 진정 우리 구주 대장 되신 예수님의 당당한 모습이 우리로 하여금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과 비교되는 것이 제자들입니다. 그들은 '놀라고''두려워'하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있을 자신들의 위험을 생각하며 오금이 저렸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라가기는 가되 두려워하며 따라갔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우리 죄를 속량하기 위해서 죽음의 길일지라도 담대하게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 죄인을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수 있습니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고통의 길을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모든 탐심과 정욕을 십자가에 못박고 골고다의 길을 담대히 걸어야 할 시기가 있습니다. 그럴 때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좇았으나 성도들은 담대하게 그리스도를 좇아야 합니다. (마10:37-39) 제자들은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를 염두에 두고 두려워했습니다. 우리도 마귀의 권세를 생각하거나 세상의 권력을 을 바라본다면 두려워 떨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제자들의 곁에 계셨듯이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동행하시니 우리는 담대히 그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예언
1) 대제사장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울 것에 대해 예언하심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기우매 저희가 죽이기로 결안하고'(33절).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70명으로 구성된 산헤드린을 말합니다. 이들은 예수를 잡고자 공모하여 유다를 꾀어 은 30을 주고 예수를 체포합니다.(막14:53) 누구보다 하나님 앞에 충성된 자라 할 수 있는 이들이 하나님으로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 못하고 죽인 것입니다. 진리에 대한 무지는 죄악입니다.
2) 사형이 언도될 것에 대해 예언하심
그들은 예수님께서 죄가 있는지 없는지를 심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죽이기로 결정해 놓고 다만 죽일 증거를 찾기 위해 심문하는 것입니다. (막14:55-64). 사실 예수님에 대한 저들의 증거는 모두 위증이었으나 주님께서는 털 깍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처럼 침묵만 지키셨습니다. (사53:7) 그의 침묵은 인류를 구원할 위대한 침묵이었습니다.
3) 이방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언하심
당시 유대나라는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대제사장이라고 하여 직접 사형선고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 지도자들은 꾀를 내어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이방인, 즉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넘겨준 것입니다. (15:1) 빌라도는 그에게 부여된 권하능로 정의로운 판결을 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인 계산과 백성들의 압력에 의해 잘못된 판결을 할 수 있었으나 정치적인 계산과 백성들의 압력에 의해 잘못된 판결을 하고 맙니다. 통치자의 사소한 실수가 역사의 장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4) 능룍받을 것을 예언하심
로마 군병들은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관을 씌우고 예수께서 스스로 왕이라 한 사실에 대해서 희롱했습니다. 갈대는 왕의 권세를 상징하는데 갈대로 주님의 머리를 쳤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얼굴에 침을 뱉는 불경죄까지 서슴치 않았습니다. (막15:1) 인간은 이처럼 악해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이러한 모욕과 능욕을 당하신 것은 우리의 죄와 허물을 위함이었습니다. (마53:3-6) 하나님으로서 인간에게 수치를 당하신 것은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대가였습니다.
5) 대속의 죽음을 예언하심
예수께서는 인류의 모든 죄를 대속하시려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막15:37) 그는 우리의 허물을 위하여, 죄악을 위하여 대속의 재물로 죽으셨습니다. 성도들이여! 이렇듯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다 주셨건만 우리는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렸습니까?
6) 삼일만에 부활할 것을 예언하심
예수님은 3일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을 예언하신 대로 무덤 문을 열고 살아나셨습니다. (막16:1-18) 부활은 옛 창조의 끝인 동시에 새창조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인류에게 새로운 삶에 대한 소망과 확신을 주었으며, 하나님의 능력을 현실로 나타나는 기적을 맛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성도들의 능력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부활의 능력이 제자들에게 소망과 힘이 되어 그들은 끝까지 그들의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부활의 능력을 소유하고 소망 가운데 전진하는 성도들이 됩시다.
두 제자의 욕망 막 10:35-37
욕망은 인간 본능의 필연적 욕구이며, 인간은 그 욕망을 성취시키려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그 욕망의 형태가 무엇이든간에 인간은 삶의 현장에서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애쓰고, 또 욕망을 이룸으로 기쁨과 삶의 보람을 획득하고자 합니다. '권력에의 의지'나 혹은 '명예에의 의지' 따위가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은 야고보와 요한이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신 예수님의 말씀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지상왕국 건설시 자신들의 위치를 보좌 좌우편에 앉혀 달라고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인생의 모범이신 예수님에게서 사랑과 섬김의 교육을 철저히 받은 그들도 이러한 세속적 욕망과 명예등을 얻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음을 볼 때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누구에게나 이러한 욕망이 없다고 부인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 속에서 제자들의 욕망을 살펴봄과 아울러 욕망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신지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1. 야고보와 요한의 욕망
1) 세속적인 욕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로마의 식민 치하 밑에서도 한가지 소망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약속하신 메시야 대망이 바로 그것입니다. 메시야께서 오심으로 로마를 축출하고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고 옛 다윗의 번영을 다시 역사 속에 성취시킨다는 것을 그들은 하나의 신앙으로 믿고 있었습니다. 이 점에서는 제자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실 때 제자들은 이제야 자기들의 꿈이 이루어지고 공로가 보상받는 줄 알았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이때가 기회다 싶어 자신들 마음 속에 감추어 왔던 욕망을 예수님께 간구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 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방금 전에 십자가의 죽음을 예고한 예루살렘 방문 목적을 제자들을 잘못 이해하고 권력과 명예만을 위한 자신들의 요구를 예수님께 드렸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이러한 간구는 우리도 흔히 드리는 기도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무시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도외시한 채 나의 목적만을 위한 요구를 드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욕망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때로 욕망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욕망이 하나님의 영광보다도 우선될 때 그것은 지양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도구로 사용해 나의 세속적 욕망만을 희구할 때 그것은 정욕을 위한 이기심이 되며 예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2) 현실적 욕망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전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심입니다. 그 구원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로 완성된 것이지 정치적, 경제적 수단으로 구원을 이루신 것이 아닙니다. 즉 철저한 자기 부정을 통한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이 땅 위에 성취시켰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구원 사역을 정치적으로 완성시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다스리는 자로서의 위치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즉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자리에만 그들은 연연했습니다. 영적인 안목보다 육적인 욕망만을 키워왔습니다. 이 세상에 기초를 둔 통치자의 권력을 염두에 둔 그들의 욕망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38절) 우리의 욕망은 현실적 충족이 아닌 영적인 충족입니다. 그리고 통치자의 권좌가 아닌 섬기는 자의 자리가 되어야 합니다.
2. 제자들의 욕망을 시정해 주시는 하나님
1) 관심을 가져 주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무지에서 비롯된 논쟁을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진지하게 그들의 질못된 생각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무지함에서 비롯된 생각이나 요청이라 할지라도 진지하게 끝까지 들어주십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도록 자세하게 설명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배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2) 욕망을 포기하지 않으시곻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의 욕망을 함부로 꺽어버리거나 포기치 않게 하십니다. 오히려 욕망을 한 차원 승화시켜 주십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의 보좌 좌우편에 앉길 소망했습니다. 결국 이들의 욕망은 그들의 순교로 이루어 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야고보는 제자들 중 첫번째 순교자로, 요한은 마지막까지 생존한 살아있는 순교자로 예수님의 '고통의 잔과 죽음의 세례'에 동참하였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요구는 현실적인 욕망에서 출발했지만 하나님께서는 전도자의 위대한 삶을 살게 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에 앉히는 영적인 욕망으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세베대 아들들의 요구 막 10:38-40
사람들은 성공하기 위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수고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원하는 위치에 이르렀어도 참다운 만족을 느끼지 못하며, 더 좋은 환경을 추구하다가 결국에는 허망하게 일생을 마감하는 것이 인생입니다. 세베대의 두 아들 요한과 야고보는 세상의 가치 판단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성공하기를 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들의 요구가 성도가 바라고 소망해야 할 궁극적 인생의 목적이 아님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함께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무지한 요구
1) 그들의 요구는 무지의 산물이었습니다.
예수께서는 '너희가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38절)고 하셨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말은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의 말이었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현세에서의 출세였습니다. 간혹 우리들의 기도가 개인의 유익만을 위한 기도가 될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는 주님으로부터 '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라고 책망을 받는 간구입니다. 인간의 야망과 신념은 기도의 내용이 되지 못합니다. 야망과 신념은 자신만을 위한 것임에 반하여 신앙은 하나님을 우선에 두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한번도 자신의 영광을 구해 본 적이 없었으며,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렸습니다. 예수께서 이처럼 하나님의 영광을 최우선으로 삼고 살으셨는데 하물며 우리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창조된 인간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 다릅니다.
세상의 왕국은 물리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고 유지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맹렬하게 권력에 집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통치 질서는 권력과 공권력이 아닌 사랑과 봉사입니다. 사랑과 봉사는 자기 의지를 버리고 권력에의 기대를 포기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잔'과 '세례'를 말씀하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본질적 내용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십니다. (38절) '잔'은 괴로움이나 수난을 상징하며(시75:8) '세례' 역시 다가오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예증하는 것으로서(눅12:50)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얻기 원하는 자는 고난의 길을 통과한 자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들은 면류관은 간절히 원하지만 고난의 십자가는 사양하고, 회피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 없는 면류관은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판단은 하나님의 생각과 판단과는 다르므로 언제나 하나님의 뜻을 우선하여 그것을 분별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2. 자신만만한 요구
'저희가 말하되 할 수 있나이다'(39절)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잔'과 '세례'의 진정한 의미도 잘 모른체 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사실 요한과 야고보는 예수님의 곁을 따라다니던 가장 가까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감에 넘쳐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 앞에서 '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을 과신하는 교만한 말입니다. 젊은이들은 자신의 건강에 대해 지나친 자신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지식과 물질, 그리고 자신에 관한 모든 것을 과신한 나머지 무엇이든지 할 수 있노라고 큰 소리 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외쳐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시면 인간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3)고 하였던 것입니다. '나는 할 수 있다'는 외침은 인본주의요 인간적인 소리이지만 '주 안에서 할 수 있다'는 외침은 신본주의요, 신앙적인 소리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적극적인 사고방식과 신앙과의 관계입니다. 적극적인 사고는 자기의 의지를 강하게 발동시켜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다는 신념을 앃는 훈련인 반면에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 허락하신 신적 능력을 겸손히 받아들이고 그것을 의뢰하는 것을 말합니다. 성도는 적극적인 사고방식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사고방식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높아지려는 태도는 성도가 취할 태도가 아닙니다. 지배하고 대접받고 억압하려 하는 것은 비기독교적 성향입니다. 비록 예수님의 깊은 진리에 도달하지 못함으로 인해 현세적 성공을 추구했던 야고보와 요한은 이후 주님의 은혜로 진리를 깨닫고 하늘 나라를 위해 야고보는 순교까지 하면서 자신의 몸을 희생했고(행12:2),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하는 고난을 체험합니다. (계1:9) 이들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특권을 누리고자 했던 열정은 결국 그들의 삶을 고난의 '잔'과 '세례'를 받게 하였고 그럼으로 그들은 진정한 '특권'인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입니다. 성도는 매일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각자에게 맡겨진 사명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님을 행한 위대한 목적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이 곧 이 세상을 살면서 하나님나라에 속한 위대한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신실한 종이 됩시다. 막10:41-44
하나님의 법칙은 세상의 법칙과 정반대입니다. 살기 위하여선 죽어야 하며 받고자 원하면 먼저 주어야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세속적 명예와 권력을 요구하는 제자들에게 '높아지기 원하면 낮아질 것'을 권고하며 '큰 자는 섬기는 자'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
1. 신실한 종의 자질
1) 부지런해야 합니다.
'일하기 싫으면 먹지도 말라'는 성경의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지런히 일할 것을 권고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모습을 종으로 묘사하여 늘 부지런히 일하시는 근면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잠시도 쉴 틈이 없었던 부지런한 예수님의 모습을 기록하였던 것입니다. '곧','즉시' 한시도 지체하지 않고 주인의 명령대로 순종하는 모습이 바로 성실한 종의 모습입니다. 소처럼 부지런히 시키는 대로 일해야 합니다. 게으름을 피워서는 안됩니다. 성경은 게으름을 죄로 여기며 게으른 자를 악한 종이라 하였습니다.
2) 인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종임을 스스로 자인한 바울은 디모데에게 범사에 오래 참을 것을 권고합니다.(딤후4:2) 사랑의 특성이 언제나 오래 참는 것이듯 그리스도의 종 된 자들도 언제나 인내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미워하는 자에게도 보복의 마음을 품지 말고 어떠한 경우라도 목적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 인내입니다. 성실한 종의 목적은 주님의 명령입니다. 주인의 명령을 끝까지 인내하며 완수하는 것이 종의 본분입니다.
3)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인 아브라함은 자신의 아들까지라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바치는 순종의 자세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믿음의 조상이란 칭호를 얻었습니다. 종은 자신의 생명까지 주인의 명령 여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에 순종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가는 것이 순종입니다. 결코 핑계란 있을 수 없습니다.
4) 겸손해야 합니다.
제자들을 향한 주님의 말씀은 '낮아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하나님은 높아지게 됩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듯 성숙한 믿음을 소유한 성도는 한없이 낮아집니다. 영어로 목사를 'Minister'라고 하며, 그 뜻은 '섬기는 자'입니다. 겸손해야 섬길 수 있ㅅ브니다. 교만한 자는 지배하려 들지만 겸손한 자는 섬기려 합니다. 예수님의 일생은 섬김의 생애였습니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한 삶'을 사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2. 신실한 종이 하는 일
1) 천한 일을 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여야 합니다. 곧 무슨 일이든지 어느 일이든지 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주인의 요구대로 성실히 맡은 일을 수행해야 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만 골라해서는 안됩니다. 남이 할 수 없는 일, 그중에서도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즐겨 찾는 종이 가장 훌륭한 종입니다.
2) 의무이상의 일을 합니다.
종은 주인이 시키는 일만을 하진 않습니다. 시키기 전에 먼저 '알아서'하고 일을 '찾아서' 해야 합니다.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은 고용인의 의무입니다. 그러나 신실한 종은 의무 이상의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는 그런 일을 즐겁게 행하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칭찬한 '착하고 충성된 종'은 바로 이런 종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3. 신실한 종의 보상
1) 큰 자로 여김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심으로 섬기는 자가 곧 큰 자임을 암시하셨습니다. 세상의 이치는 낮은 자가 섬기는 데 반해 성경은 도리어 큰 자가 낮은 자를 섬긴다고 하였습니다. 슈바이처는 아프리카의 무지한 흑인을 섬기는 데 일생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를 우리는 '큰 자'로 여기기를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섬기는 종의 자세를 취한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그를 큰 자로 여겨주십니다.
2) 주인의 자리에 앉게 됩니다.
보좌 좌우편에 앉혀 주기를 소망하는 제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의 종이 되라'였습니다. 곧 하나님의 신실한 종이 되고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섬기는 자가 된다면 으뜸의 자리에 앉혀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은 여러 서신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그리스도의 종된 바울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러나 그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종의 임무를 다 마칠 때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고 말하였습니다.(딤후4:7,8) 이처럼 종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한 자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되는 영광이 임할 것입니다.
인류의 대속물로 오신 예수 막 10:45
제자들이 서로 높은 자 되기를 다투고 있는 것을 보시고 예수께서는 왜 자신이 세상에 오셨는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심으로 제자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십니다. 제자들의 행동을 통하여 명예심과 눈이 어두워진 현대의 성공지상주의자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세상이 추구하는 것과 정반대의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을 가르치십니다.
1. 섬기러 오심
예수께서는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요 도리어 섬기려 하고'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는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영광 중에 예수님의 좌우편에 앉을 것을 소망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심으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이었음을 지적해 주셨습니다.
1) 마굿간에서 태어나심
예수님의 섬기러 오신 인생은 그분의 출생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천상의 높은 보좌를 버려두고 친히 종의 모양을 취하시고 이 땅에, 그것도 마굿간에서 태어나심으로 섬김을 자세를 잘 보여 주십니다. 사실 예수께서 왕궁에서 태어나시거나, 또는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다해서 그것이 구원사역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작부터 지극히 겸손한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초라한 마구간, 냄새나는 마구간 그곳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처음 대하셨던 환경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분의 일생은 한번도 넉넉하게 사신 적이 없습니다. 목수인 아버지 요셉을 도와서 자신도 목수로서 삼십년을 가난하게 보내셨습니다. 성도가 남보기에 자랑스럽지 못한 직업을 가졌다고 낙담하거나 낙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각자의 일들을 통해서 남을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실천하는 성도들이야말로 바람직한 성도의 직업관입니다. 우리들도 주님처럼 때로는 고난을 자청하여 이웃과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2)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
예수님의 섬기심의 실제적인 교훈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행동에서도 엿볼 수 있습니다. 유대의 풍속에서는 하인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심으로 자원하여 그들의 종이 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은 우리들에게 봉사와 헌신에의 삶을 제시하여 주었습니다 .스승의 위치를 버리고 종의 위치까지 스스로 낮아지신 예수님에게서 진정한 겸손의 모습을 발견하고 우리도 그러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자신의 체면을 세우기 위해 스스로 높아지려는 행위는 참다운 신앙인의 태도가 아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발씻음을 통해서 봉사의 모범을 배우고 봉사자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주님은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도는 남을 섬기는 기쁨을 체험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접을 받기 위해 궁리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베풀고 높여주기 위해 애써야 합니다.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받들어 섬기는 제자의 길을 가야 할 것입니다.
2. 대속물로 구원하러 오심
예수께서는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대속물이란 원래 노예를 속량시켜 주기 위해 지불하는 대가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세상의 모든 금은보다 가치가 있으며(벧전1:18,19),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기에 충분한 것입니다. (출21:30), 병에서(출30:12-16), 죄에서(마26:28), 원수에게서(렘31:11) 건짐을 받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대속적인 죽음을 자원하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십자가의 수고와 고통을 스스로 선택하셨습니다. 마지못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라 기꺼이 자원하셔서 죽으신 ㄱ서입니다. 따라서 성도의 그리스도에 대한 충성도 자발적인 순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순종은 자발적일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께서 가신 고난의 길을 걸어가야 할 것입니다.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다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은 인종과 국적, 계급과 연령, 그리고 성별의 차이가 없이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관심과 사랑에서 제외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소식은 모든 민족, 모든 사람에게 전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악인을 버리심으로 기쁨을 취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악한 생활에서 돌아서서 참된 삶을 살기를 원하는 분이십니다. 성도는 이러한 사랑의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호11:8) 예수께서 목숨까지 버려가며 우리의 죄를 구원하신 것처럼, 우리의 이웃에 대한 참 사랑을 봉사로서 나타내 보여야 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친히 섬기시며, 목숨을 대속물로 주신 것처럼 성도의 세상에 대한 태도도 봉사와 섬김의 자세로 나타내야 할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로서의 행할 바를 행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간구 막10:46-52
언제나 열심히 일하셨습니다. 주님의 사역은 그 누구에 의해서도 또한 어떤 이유로도 지체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그분이 걸음을 멈추시고 머물러 서셨습니다. 이제 그를 '멈추어 서게' 했던 이유는 무엇이며, 머물러 서신 그 분은 무엇을 하셨는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바디매오
1) 그는 가난한 소경 거지였습니다.
예수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자는 바로 디매오의 아들로 소경이며 거지인 바디매오였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길에 앉아 구걸을 하는 가난한 자로서 아주 비참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비천한 자신에 대해 절망하거나 포기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환경을 원망하거나 저주하지 않았습니다. 즉 그의 삶에는 소망과 용기와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환경에 처해 있습니까? 육신적으로는 소경이 아니고, 부유하다 하더라도 영적으로는 바디매오보다 더 가난한 소경의 상태는 아닙니까? 그분은 우리의 외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가난과 병으로 애쓰며, 슬픔과 상처로 인해 고통당하는 잃어버린 양을 찾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2) 그는 절박한 소원을 가진 자였습니다.
가장 비참한 상태에 처해 있는 바디매오에게도 간절한 소원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부나 명예나 권력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는 오직 '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에 '무엇을 원하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허황된 욕심으로 잘못 구했던 요한과 야고보 (막10:37)와는 달리 가장 근본적이며 합당하고 절실한 문제를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소경이 눈을 떠 보게 되는 것이나, 죄인이 용서함을 받는 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진정한 성도가 가지기에 합당한 소원을 간직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2) 그는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문제 해결을 휘하여 긍휼을 부르짖는 그에게 (47절) 많은 사람들은 꾸짖음으로 대했습니다. 그러나 바디매오는 이에 개의치 않고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부르짖어 마침내 그 소리가 예수의 귀에 들려지게 했습니다. 주님을 향한 진실한 믿음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간절한 소망을 가진 자는 세상적인 어떤 방해나 꾸짖음에 수치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무익한 환경이나 장애에 쉽게 지배를 받는 자는 하나님께 상달되는 기도를 드릴 수가 없습니다.
4) 큰 믿음을 소유한 자였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같지 못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보는 것이 아니라 들음에서 나옵니다. (롬10:17) 바디매오는 아무것도 볼 수 없는 소경이었으나 들음으로써 큰 믿음을 소유할 수 있었습니다. 즉 주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주님이 부르실 때에 지금까지는 자신에게 꼭 필요했지만 다시넌 필요치 않는 겉옷, 즉 예수께로 가까이 접근하기에 장애가 되는 모든 요소들을 미련없이 벗어버리고 뛰어 일어나 예수께로 나아갔습니다. 이에 주님께서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52절)고 그의 믿음을 칭찬하시고 그의 감긴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요20:29)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예수께서 머물러 서신 이유
1) 부르짖는 소리를 듣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는 무리 중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기 위해 걸음을 멈추셨습니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을 위하여 회당장의 집으로 향하던 걸음을 멈추셨던 주님은 말씀듣기를 기다리는 무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디매오의 간구에 관심을 보이셨던 것입니다. 그분은 긍휼을 간구하는 자의 소원을 외면치 않으시고 귀를 기울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갈급함을 주님께 아뢰기에 주저하지 말고 귀를 기울이시는 주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2) 소원을 묻기 위해서입니다.
머물러 서신 주님은 '네게 무엇을 해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51절)그의 소원을 이미 알고 계셨지만 그의 확실한 믿음의 고백을 듣기 위해서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소원을 아십니다. 또한 그것을 이루실 충분한 능력이 있으십니다. 그러나 그분은 우리의 진실한 신앙의 고백과 간절한 부르짖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물으실 때에 대답할 합당한 소원을 간직한 신앙인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구원을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소원을 들으신 주님은 그에게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바디매오를 구원하신 주님은 우리도 능히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환란으로 인해 절망 중에 있는 우리를 구하시기 위해 오늘도 그 걸음을 멈추시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모든 짐을 주님께 맡겨드리고 기꺼이 그의 뒤를 좇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