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총선 직후, 야당은 지역별 개헌추진본부 결성식을 통해 정국을 직선제 개헌 국면으로 몰고 갔다. 이듬해 초에는 군사 독재의 퇴진을 촉구하고 민주헌법을 쟁취하기 위한 범국민 서명 운동이 전개되었다. 1987년 12월에 시행될 대통령 선거 전에 직선제 개헌을 이루어 군사 독재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의도에서였다. 대학가에서도 연일 격렬한 민주화 시위가 벌어졌다. 집권당인 민주정의당(民主正義黨, 민정당) 당사와 연수원이 점거되고, 학생들의 분신, 투신자살이 이어졌다. 1986년 한 해 동안 시위 진압용 최루탄 구입 비용이 60억 원에 이를 정도였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14일, 서울대학교 학생이던 박종철 군의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다.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과 폭행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경찰은 사건 초기에 단순 쇼크사로 발표해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다. 이 사건은 6월 민주 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박종철 추모대회와 고문 추방 민주화 대행진에서 수만 명의 학생과 시민 들은 “직선 개헌”과 “독재 타도”를 외치며 열띤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전두환 정권은 4월 13일 민주화 진영의 개헌 논의에 제동을 걸기 위해 호헌 조치를 발표하는 한편 민정당 대통령 후보 지명 작업을 진행시켜 나갔다. 하지만 이미 불붙기 시작한 개헌 투쟁은 사그라지지 않고 오히려 전국적으로 더욱 확산되었다. 광주 민주화 운동 7주년 기념일인 5월 18일, 전국적으로 광주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가 열린 가운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된 것이라는 유인물을 발표했다. 그 직후인 27일, 야당과 재야 세력, 종교 단체 등이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민주화 요구를 결집하고 민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이하 국본)를 발족했다.
6월에는 전국적인 시위 열기를 고조시킨 또 하나의 사건이 발생했다. 연세대학교 학생 이한열이 9일 오후 교내에서 열린 ‘애국 연세인 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뒤 시위 대열의 선두에서 경찰과 대치하다 경찰이 던진 최루탄에 맞아 숨진 것이다. 다음 날인 10일에는 전두환 정권이 차기 대통령 후보를 지명하는 민정당 전당대회와 국본이 주최한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은폐 조작 규탄 및 호헌 철폐 국민대회’가 나란히 열렸다.
민정당은 전국 경찰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진 가운데 잠실 실내체육관에서 전당대회를 열어 노태우(盧泰愚)를 간선제 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6·10 국민대회는 학생과 시민들을 중심으로 서울, 광주, 부산, 대전, 인천 등 전국 22개 지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에서만 이날 하루 30여 곳에서 시위가 잇따랐고 전국적으로는 514곳에서 규탄 집회가 열렸다. 일부 시위대는 삭발과 혈서 투쟁을 벌이기도 했다.
서울 지역의 각 대학은 자체적으로 출정식을 가진 뒤 “호헌 철폐”, “직선 쟁취” 등의 구호를 외치며 도심으로 몰려들어 연좌 농성을 벌였다. 이날 오후 6시 정각 곳곳에서 차량 경적 소리와 교회 종소리, 시위대의 함성과 박수 소리가 일제히 터져 나왔다. 서울에서는 국민대회가 열린 덕수궁 옆 성공회 대성당에서 학생과 야당 의원 등이 노상 집회를 여는 도중 성공회 종탑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종이 42차례 울리는 것을 신호로 성당 구내 차량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렸다. 일반 시민들은 박수로 이에 호응했다. 이로써 6월 민주 항쟁의 본격적인 막이 올랐다.
이날 국민대회가 발표한 결의문에는 권력에 의한 고문과 테러, 불법 연행 등 인권 유린 행위의 영원한 추방과 진상 규명, 민주헌법 확립과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평화적 수단 및 방법 총동원, 4·13 호헌 성명의 무효화 선언과 정부 여당의 일방적 정치 일정 진행 철폐, 민주화 열망 거부 시 반민주적 범죄자로 단죄한다는 등의 내용이 담겨져 있었다.
경찰은 성공회 주변을 둘러싸고 일반 시민의 접근을 통제했으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시위에 강경 진압으로 일관했다. 당초 평화적으로 진행되던 시위는 갈수록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경찰은 시위 현장에서 3,800여 명을 연행했으며, 곳곳에서 시청과 파출소, 민정당 지구당사 등이 파손되었다. 서울에서는 거리시위를 벌이던 학생 1,000여 명이 명동성당에 모여 닷새 동안 농성하기도 했다. 6·10 국민대회 이후 민주화 시위는 거의 매일 전국에서 벌어졌다. 국본이 최루탄 추방의 날로 선포한 18일에는 전국 14개 도시, 247곳에서 20만 명(경찰 집계)의 사람들이 시위에 참여했다. 서울에서는 시위대에 의해 전투경찰 80여 명이 무장을 해제당하는 일도 있었다. 전국적으로 파출소 21곳과 차량 13대가 파손됐고, 경찰 621명이 부상했다고 경찰은 밝혔다.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자 노태우는 20일 “대통령 후보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하지만 민주 항쟁의 열망에 부합하는 후속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26일에 이르러 6월 항쟁은 절정에 이르렀다. 이날 ‘민주헌법쟁취 국민평화대행진’에는 전국 33개 도시와 4개 군, 읍 지역에서 모두 100만여 명이 참가했다. 1981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였다. 전국의 주요 도시에서는 시위대와 경찰이 공방전을 벌이며 일진일퇴를 거듭했다. 이날 하루 전국에서는 3,467명이 연행되고, 경찰서 2곳, 파출소 29곳, 민정당 지구당사 4곳이 투석과 화염병 투척으로 파괴되거나 불탔다.
서울에서는 늦은 밤까지 시가전을 방불케 하는 격렬한 시위와 진압이 반복되었다. 특히 이날 서울에서는 ‘넥타이 부대’라고 불린 직장인과 중산층 시민이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거나 직접 시위 대열에 참여해 전두환 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이렇게 6월 항쟁은 10일부터 28일까지 전국 30여 개 시, 군에서 연인원 400만~500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치열하고 조직적으로 진행되었다.
마침내 6월 29일, 노태우는 민정당 대표의 이름으로 기자회견을 갖고 시국 수습을 위한 8개 항의 방안을 발표했다. 여야 합의에 의한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새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거 실시, 공정 경쟁을 위한 대통령 선거법 개정과 공명정대한 선거 관리, 김대중의 사면, 복권과 시국 관련 사범의 석방, 인권 침해 사례의 즉각 시정과 제도적 개선, 언론 자유 창달, 시도 단위의 지방의회 구성, 대학의 자율화와 교육 자치의 조속한 실현, 대화와 타협의 정치 풍토 마련 등이 그것이다.
민정당은 긴급 의원총회에서 6·29 선언을 당의 공식 입장으로 추인하고, 대통령 전두환은 이틀 뒤 특별 담화 형식으로 이를 대폭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국본은 환영 성명을 냈다. 6월 항쟁이 4·13 호헌 조치를 무효화하고, 직선제 개헌안을 관철시킨 것이다.
이에 따라 1987년 12월 16일, 국민투표로 확정된 직선제 개헌안에 따라 국민의 직접선거로 13대 대선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운동의 동반자였던 통일민주당의 김영삼과 평화민주당의 김대중은 후보 단일화를 이루지 못해 각각 출마했고, 그 결과 노태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당시 득표율은 노태우 36.6퍼센트, 김영삼 28.0퍼센트, 김대중 27.0퍼센트로 집계됐고,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8.1퍼센트를 얻었다. 1992년 12월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후보가 당선되면서 5·16 쿠데타 이후 32년간 지속된 군부 세력의 통치는 비로소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