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낮에는 토굴 수도, 밤에는 산상 기도
박용덕〈교무, 원광대 중앙도서관〉
무오(戊午)년 장마 통의 영광 행(行)
무오년(원기3년) 초여름, 모내기를 앞두고 못자리 피살이가 한창일 무렵
대종사는 직접 정읍 화해리에 가 송도군을 만난다.
그로부터 두 달 뒤 음력 유월, 약속한 날짜가 되었다.
김성섭(팔산)은 단장의 명을 받아 웃녘을 향하였다.
그는 정읍 연지원 주막에서 송도군을 기다리며
사람을 시켜 시오리 길인 화해리 김기부(道一)의 집에 통지하였다.
『제가 영광을 가는데 그냥 다녀오겠으니 그리 아세요.
그리고 혹시 제가 쉽게 못 오면 어머님께서 한번 오셔서 만나면 되는 것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차마 떠나보내기 서운하여 애통애통해 하며 붙잡던 한들댁(金海運)을
만국양반은 다정하게 「어머님」이라 부르며 명년 봄에 오겠다는 약속을 하고 헤어졌다.
그로부터 한들댁은 20년간 만국양반을 만나지 못하였다.
중간에 도일이 영산에 두 차례나 찾아가서야 한번 만났을 뿐이다.
떠나는 날 새벽부터 비가 쏟아져
김도일은 귀한 지우산을 준비하여 연지원 주막까지 만국양반을 바래다 주었는데,
거기 벌써 통쟁이(도꾼) 한 사람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김성섭과 송도군이 만난 연지원 주막은 현 정읍시 연지동에 있었던 역참 마을이다.
옛 기록에 보면 연지원은 연조원(連朝院), 영지원(迎支院), 연지원(延支院)이라 표기되어 있는데
현재는 연지동(蓮池洞)이라 한다.
정읍에서 영광 가는 길은
조선조 숙종-정조 연간의 학자 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여암전서(旅庵全書)』 2권
도로고(道路考)에 보면 한양에서 제주도 가는 서남행 노선으로
「태인―연조원―와석점―흥덕―무장―영광」 노선을 명시하고 있다.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터.
장광 옆에 사람하나 운신할 정도의 구덩이를 파고 거적대기를 엎어 은폐한 곳으로
낮이면 정산종사가 피신하여 수양하였다.
송도군과 김성섭은
장마 통이라 120리 길을 내를 건너기도 하고 재를 넘기도 하며 흠뻑 비에 젖어,
상평동―와룡―동계리―소성면 조동리 와석을 지나 흥덕―무장―발막을 거쳐 지아닐로 하여
고법성 입암리에서 선진포 건너 나루터에 이르렀을 때는 날이 이미 저물었다.
(신경준의 글에 보면 「연조원에서 와석점(소성면 조동리)까지 20리,
와석점에서 흥덕까지 20리, 무장 40리, 영광 40리」를 기록하고 있다;
『여암전서』 2권 662쪽, 경인문화사, 1976)
어리고 체구 적은 송도군이 갯가에 이르러 멈칫거리자
체구가 훤칠하니 우람한 장년 김성섭이 물이 불어난 뻘물에 선뜻 뛰어들었다.
도군은 그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넜다.(팔산의 장남 김홍철 구술자료)
이 무렵 경상도 성주 사가에서는
타향에 떠도는 아들을 걱정하던 이운외가 영몽을 꾸고 식구들에게 말하였다.
『간밤에 도군이가 강변을 가는데 신장이 옹호하고 가더라』(여청운 구술자료)
길룡리에 와서 도군은 내심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그것은 고향에 있을 때 가끔 눈앞에 떠오르던 산천이었고,
또 다시 만나게 된 스승의 모습도 그때 떠오르던 원만한 용모 그 어른의 풍채였다.
와서 보니 선진포 나루터 전경이 고향에서 늘 눈에 나타나던 풍경과 같음을 보고
참으로 희한하여 그 상쾌한 마음 이루 비할 데 없었다.
정산종사는 이때를 이렇게 회상하였다.
『내가 일찍 경상도에서 구도할 때에 간혹 눈을 감으면
원만하신 용모의 큰 스승님과 고요한 해변의 풍경이 눈앞에 떠오르더니,
대종사를 영산에서 만나뵈오니 그때 떠오르던 그 어른이 대종사시요, 그 강산이 영산이더라』
대종사, 송도군에게 처음엔 「樞」,다시 「圭」로 법인성사 1년 앞두고 법명 줘
옥녀봉 아래 토굴 연금은 일경의 주목과 신통묘술에 대한 자제를 당부한 것
추성(樞星)과 규성(圭星)
원기2년 7월26일(음) 대종사는 10인1단을 조직하여 스스로 단장이 되고,
그 버금 자리인 중앙위는 비워놓은 채 8인으로 첫 단을 조직하였다.
혹 일이 있을 때는 진방단원 오재겸으로 대리 업무를 보게 하였다.
대종사(단장)는 중앙위를 조실 보좌역으로 비중 있는 매김을 하였다.
그래서 그 자리를 봉도(奉道)라 하고 이는 「천상에 있는 직명」이라 하였다.
그래서 송도군이 입문하기 전에 오재겸을 좌봉도 대리, 유성국을 우봉도 대리에 임명하였다.
(이공전, 『범범록』 536쪽)
대종사는 원기1, 2년경에 벌써 송도군이 와서 중앙위를 맡을 것을 예견하였다.
『법의대전』의 한 글귀에 「완전송추허부이당래사(完全宋樞許付以當來事)」라 하였다.
송추에게 당래사를 맡겨 이 일을 완전케 한다는 뜻이다.
대종사는 천안으로 이미 송 아무개의 행장을 알아보고
호남선 철도 갈재 터널 하나 사이에 두고 만날 염두를 두다가
일진이 사나와 후일로 미루어, 아는 길 찾아가듯 직접 화해리까지 갔다.
길룡리에 와서 송규는 대종사 앞에 꿇어 엎드려
전날의 형제의 예를 고쳐 사부의 예로 해주십사 하고 고하였다.
『제가 전날에 분부를 받들어 결의 형제하였으나
스승님을 형님이라고 부르는 일이 극히 황송하오니,
지금부터는 형제의 분의(分義)는 해제하옵고 부자의 분의로 정하여 주시옵소서』
대종사 말하였다. 『네 마음 좋을 대로 하라』
대종사는 도군에게 처음에 추(樞)라는 법명을 주었다.
『너는 추(樞)이고 나는 십(十)이다』라 하였다.
도군은 이듬해 산상기도시에 자신의 명호를 「추」라 썼고,
대종사는 조부 제사 기념문에 「소자 십(十)은…」이라 스스로 칭하였다.
송도군이 영광 길룡리에서 정식으로 사부 결의를 한 날은
무오년 유월스무엿새날(1918.8.2)이다
.(『불법연구회 입회 원명부』 입문년월일(入門年月日) 일련번호 남 14번 참조)
아마도 이날 「추」라는 이름을 주었을 법하다.
어찌된 일인지 대종사는 한 달 만에
도군에게 다시 법명 「규」(奎)를 주었는데
법명증에 출명연원일(出名年月日)을 「무오 칠월이십구일」(음)을 명기하고 있다.
이는 교단 공식 기록인 기미년 법인성사시의 8인 단원의 법명 수여보다 1년 앞선
원기3년 9월4일(양)에 준 것이 된다.
추(樞)는 문지도리라는 뜻이다.
문지도리란 문짝을 문설주에 달고 돌쩌귀를 걸어 여닫는 문의 중심 역할을 한다.
또 추성(樞星)은 북두칠성의 첫번째 별로 우주의 중심(天樞)이다.
「규」도 별자리를 의미하는데 28수 중 15번째 별자리로 첫여름 남쪽 하늘 중앙에 위치하며,
이 별이 밝으면 천하가 밝아진다고 하였다.
대종사와 정산종사가 만난 계절이 첫여름이며
아명과 자가 명여(明汝), 명가(明可)였고
장차 불명도 명안(明眼)임을 볼 때 시사하는 바 있다.
규(奎)자를 파자(破字)하면 토(土)는 十一이니 대(大)인데,
대(大)에다 일(一)을 얹으면 천(天)이 된다.
땅은 11이니 크다.
큰 것은 하늘이며 하나라, 천지는 둘이 아니다.
상(上)은 단장이요 태양이며, 하(下)는 중앙이요 땅이다.
단장과 중앙, 천(天)과 지(地), 스승과 제자가 둘이 아니다.
천지여아동일체(天地與我同一體)의 자리, 천지 합일해야 위력을 발휘한다.
10은 완성, 11은 새로운 출발을 의미한다.
이제부터 송규의 인생은 대종사를 만남으로 하여 새롭게 시작된다.
옥녀봉 아래 토굴 연금
대종사는 오랜 기다림 끝에 만난 어린 제자 송규가 남에 눈에 띌까 몹시 마음을 썼다.
대종사 기뻐하며 송도군에게 말하였다.
『이 일이 어찌 우연한 일이겠느냐. 숙겁다생에 서약한 바 컸었느니라』
송규는 조합원들과 더불어 갯막이 공사에 참여하진 않았으나
그들의 식사 제공에는 조력한 것으로 보인다.
김홍철은 이렇게 증언한다.
『정산종사께서 우리 집에서 1년 지내고 굴 속에서 1년 지냈다.
밥을 하는데 손이 다 트고 그랬다』
여기서 2년이란 계산은
정산이 무오년에 와서 기미년 변산 입산 직전까지 두 해를 쳐서 말한 듯하다.
송규가 길룡리에 머문 기간은 1년 1개월 정도,
처음 와서 마땅한 주처가 없어 돛드레미 김성섭의 집에 머물면서
방언조합원들의 공양주 노릇(식사 조력)을 하였고,
그해 음력 섣달에 옥녀봉 아래 조합실을 신축하면서 그곳으로 주처를 옮기게 된다.
조합실에는 대종사의 가족, 바랭이네 가족(이원화), 그리고 송규가 살았다.
기미년 3월 전국에 만세운동이 전개되면서
영광경찰서는 방언조합 자금 출처 혐의를 빙자로 1주일간 대종사를 심문하였다.
이로부터 대종사는 가장 아끼는 제자 송규에게 은신하도록 조치하였다.
조합실 장광 옆에 사람 하나 정도 운신할 정도의 토굴을 은밀히 파게 한 다음,
송규에게 낮 동안에 그곳에 피신토록 하고
밤에는 중앙봉에 올라가 기도하고 도실에서 자도록 하였다.
송규는 방언 공사 도중에 와서 1차 산상 기도가 끝나자마자
스승의 명에 따라 변산 월명암에 입산한다.
송규를 옥녀봉 아래 토굴에 기거토록 한 것은 다음의 이유에서였다.
기미년 만세 사건 이후
남다른 사업을 전개하는 방언조합에 대해 이목이 집중됨에 따라 경찰의 취체가 심하였으며,
또 조합실 이웃에 강변나루터가 있어 노상 들고나는 배로 사람의 내왕이 많은 데다가
경상도 사투리에 해맑은 낯선 얼굴에 대해 집중되는 이목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또 하나 토굴 연금의 가장 큰 이유는
송규가 다년간 잘못된 공부로 비바람을 부르고 사람 내왕하는 것쯤은 능히 아는 신통묘술로 인해
사도에 떨어질까 하여 이를 막기 위함이었다.
실제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기미년 유월 스무닷새날이었다.(원명부 근거)
경상도 성주 송규의 부친 송벽조가 전라도에 도 공부하러 간 큰아들이 궁금하여 지내던중
큰 스승을 만났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서둘러 길룡리에 온다.
끼니때가 되어 바랭이네(이원화)가
이목을 피하여 음식이 든 소쿠리를 들고 장광 옆 토굴에 들어가자 송규가 물었다.
『우리 아부지께서 안 오셨능교?』
『야아, 오셨구만요』
바랭이네가 내심 놀라며 도실로 돌아오자 대종사 묻는다.
『그 사람이 부친 오신 줄 알제?』
『야아』
바랭이네는 두 분이 무서운 위력과 신묘한 조화를 가진 줄 알고 새삼 놀랐다.
대종사는 평소에 이런 잘못된 공부에 재미를 붙이는 제자들을 몹시 경책하였다.
정산도 이산도수하고 호풍환우하는 신통 공부에 대해 묻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 이산도수(移山渡水)하고 호풍환우(呼風喚雨)하는 것, 그 두 가지는 극히 쉬운 것이다.
앞으로 몇 달만 모든 사무를 다 놓고 조용한 곳에서 정만 익힌다면 곧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중생 제도하는 데나 인간 생활하는 데 아무 소용이 없다.
동정간 일심을 여의지 않는 것이 입정이며,
그 일심으로써 육근작용에 바른 행을 나타내는 것이 곧 신통이니
입정과 신통을 따로 구할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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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풍환우 이산도수 [ 呼風喚雨移山渡水 ] <원불교대사전,>
바람과 비를 불러오고 산을 옮기며 물을 건넨다는 뜻의 신통묘술. 화창한 날씨에 갑자기 사나운 바람을 불러 오거나,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에서 갑자기 억센 소나기가 쏟아지게 하는 행위. 또는 하룻밤 사이에 수 백리 밖에 있는 큰 산을 감쪽같이 옮겨 오거나, 강이나 바다 위를 자유자재로 걸어 다디는 기행 이적. 이는 곧 신통묘술을 마음대로 부리고 기행 이적을 자유자재로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신통이란 모든 일에 대해서 헤아릴 수 없이 신기하게 통달하는 것이다.
비 오고 바람 불 것을 미리 알거나, 사람이 살고 죽을 것을 정확하게 아는 일이나, 타심통을 얻어 다른 사람의 마음속을 환히 들여다보는 것 등을 말한다. 묘술이란 보통 사람으로서는 행하기 어려운 술법, 곧 축지법ㆍ시해법ㆍ호풍환우ㆍ이산도수ㆍ둔갑술ㆍ장신술 등을 마음대로 행하는 것을 말한다. 옛날부터 승려들이 수행을 잘 하여 도승이 되거나, 보통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깊은 산속에 들어가 오래오래 기도생활을 하면 신통 묘술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신통 묘술은 대도 정법이 아니라 하여 성현들이 꺼리는 것이다.
특히 소태산대종사는 크게 경계한 것이다. 호풍환우 이산도수 하는 신통 묘술은 옛날 지혜가 어두운 사람들이 간혹 믿기도 했으나, 사람의 지혜가 발달한 오늘날에는 미신이라 하여 오히려 경계를 받고 있다. 신통묘용이 물 긷고 나무 하고 밥 짓는 데에 있다고 한 《수심결》의 말은 가장 합리적이요 일상적인 것이야말로 가장 큰 신통묘술 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신통묘술은 호풍환우 이산도수 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중생을 두루 제도하는 부처님의 대자대비심과 무량법문의 천만방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