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전은 ‘이현상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1945년 12월 ‘모스크바 미,영,소 외상회의’ 내용을 둘러싼 찬탁(먼저 하나의 임시정부 수립 후 미,중,영,소와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 협력을 논해보자는 세력)과 반탁(대부분은 일본제국주의 통치와 1945년부터 1948 남한 단독정부 수립시 까지의 미군정을 옹호하던 세력)의 관계를 보아야 하며 이에 따른 1948년, 4.3의 제주항쟁, 제주 진압군으로 배치명령을 받은 여수 14연대의 병란과 반란군의 순천 우익에 대한 잔인한 살해, 그 이후 지리산과 백운산을 중심으로 하는 빨치산의 유격투쟁과 1950년 한국전쟁 이후 전시 작전지휘권을 가진 미군과의 전쟁을 살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평전은 이현상과 그 동료들의 투쟁과 죽음을 역설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1953년 7월27일, 미국과 북한 사이의 휴전협정이 타결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 이은 한국전쟁은 세계 자본제국들로 하여금 직접적인 식민지 침략전략을 포기하는 계기가 되었다. 너무 많은 희생과 부작용이 따르는 군사정치적 침략 대신에 경제적 지배를 통해 자신의 이익을 관철시키려는 신식민지 정책을 채택하게 된 것이다.식민지 정책은 더욱 고도화된 수탈전략이었지만 국가간의 처절한 학살은 줄어들게 되었다. 비록 남북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이현상과 동료들은 자본주의 야만성을 제거하는 데 일조한 것이다.”
평전은 남부군을 통해 알려진 이현상의 인간적 면모를 재조명하고 있다는 면에서 이채롭다.
이현상은 ‘구빨치’, ‘신빨치’대원들과 여타 지대, 지구간부들에게 심지어는 민간인들에게 까지 ‘선생님’으로 존경을 받았다. 부유한 집안이면서도 사람을 아끼고 존중하는 가풍과 일제와 탐관지배계급들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의 역사가 체현되었을 것이다. 피억압 대중에 대한 애정과 반제국주의를 통한 인민해방에 대한 확신과 헌신, 강하고 불요불굴한 혁명가적 기질, 그리고 스무살도 더 어린 대원들에게 까지도 항상 존대하는 인간적인 고매함이 자연스레 흘렀기 때문일 것이다.
산중토론이나 연설, 유격대의 기관지 ‘승리의 길’등 에서도 그의 강직하고 온화한 사람됨을 들여다 볼 수 있다.
“인민을 죽이거나 함부로 괴롭혀서는 안됩니다. 설사 우리에게 반대하는 사람이라도 정당한 인민재판의 절차를 거쳐야 합니다. ... 전투중에 죽일 수는 있지만 일단 포로로 잡으면 절대 죽여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우리 인민의 군대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규율이며 이를 어기는 대원은 인민의 이름으로,혁명의 이름으로 처단될 것입니다.... 민족통일과 계급해방을 선동하는 데 있어 극좌적인 구호나 폭력, 소영웅주의적이고 모험주의적인 폭력과 살인은 반동을 이롭게 할 뿐입니다.혁명을 갉아먹는 크나큰 죄악에 불과합니다. 지나간 일은 더 거론하지 않겠지만 앞으로 똑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절대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그는 전북지구의 위원장인 방영표와는 달리 두려워하고 동요하는 부대원들에게 엄격한 통제나 강압적인 규제를 하기보다는 사상무장과 학습을 중요시하였다. 네이팜 판이 떨어지고 대원들이 숯덩이로 변하는 한겨울 대성골에서의 아비규환 속에서도 학습과 사상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평전의 인상적인 에필로그
“1953년 초가을 화개천과 섬진강이 합수되는 모래사장 저 어느 곳에서 칠불사의 스님이 장례를 진행하네.
모래사장을 밟은 장작더미 위에서 불타고 있는 주검의 이름은 로명선. 강과 산은 저토록 시리게 아름답건만 해방의 의지와 확신은 반동과 반역의 저주로 역진하였네“
그로부터 61년.. 인간해방의 물질적, 의식적 기초가 다져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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