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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천점바구의 죽음과 동계대공세 종료
들녘의 실개울에 얼음이 풀리고 있었다. 돌돌거리는 물소리도 커져가고 있었다. 한낮이면 햇발도 햇솜이불처럼 포근했다. 보리싹들의 초록빛이 나날이 짙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산속의 밤은 여전히 겨울이었다. 일월에 비하면 추위가 한결 누그러지긴 했지만 밤 에는 불을 피우지 않으면 견디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군토벌대의 공세가 멈추어진 상태라서 빨치산들은 밤마다 마음 편하게 불을 피울 수가 있었다. 그들은 지난 공세 동안 혹한속에서 불을 못 피운 것에 앙갚음이라도 하듯 푸지게 모닥불을 피워댔다. 그러나 그들 앞에 닥친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농가에 양식이 바닥날 계절이 되어 보투에 어려움이 시작되고 있었다. 앞으로 보리를 거둘 때까지 네댓달 동안은 갈수록 식량난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그건 불가항력적인 난관이었다. 보투는 산에서 가까운 마을부터 시작해왔으므로 날이 갈수록 멀리 나갈 수밖에 없었다. 산에서 멀어질수록 위험이 따르는 것은 더 말할 것이 없었다. 멀리 나갈수록 군경과 가까워지는 것이었다. 돌아오는 길에 매복에 걸릴 위험도 그만큼 많았다. 그러나 앉아서 굶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당장 먹는 것도 문제였지만, 토벌대가 언제 또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거기에 대한 대비도 최소한이나마 갖추어야 했다.
"저분 참에 이레럴 쉬고 공격이 들어왔는디, 요분에도 또 그렇다먼 인자 사흘이 남었소. 근디 우리가 모타논 양석언 한 됫박도 웂소. 요런 빈주먹으로 공세럴 또 당혔다 허먼 옴지락딸싹 못허고 굶어죽을 판이요. 그려서 허는 말인디, 기왕지사 멀찍허니 나가야 될 판잉께 무등산얼 돌아 담양 쪽으로 팍 내질러보는 것이 워쩌겄소?" 이태식이 대원들을 둘러보았다. 무장병력 백이 넘던 그의 부대원들은 육십여 명으로 줄어 있었다. 그러나 연대가 전멸해버리거나, 삼분의 일로 줄어들어버리는 것이 예사인 형편에 그가 육십여 명을 확보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태식이 발휘해온 투쟁력과 함께 그 점은 벌써 도당의 격려를 받았던 것이다.
"좋제라. 양석만 구헐 수 있다먼야 담양 아니라 남원에넌 못 가고 목포라고 못 갈랍디여." 말을 불쑥 내놓은 것은 원종구였다. "허, 저 사람, 총질언 죽어도 안헐라고 허는 제겐이 배넌 질로 고픈갑네. 내 원 참!" 누군가가 퉁을 놓았고, 서너 사람이 쿡쿡거리며 웃었다. "와따, 무담씨 무참 주고 그러요이. 니나 나나 언권이 있는 민주주의람서." 원종구가 뚱하니 대꾸한 말이었다. "아이고메 참말로 서당개 삼 년이시. 누가 자네보고 빨치산이라고 혔어. 인심좋게 대해준께 인자 꽁짜로 묵을라고 뎀비네 이거." 상대방의 말이 매워졌고, 웃음소리들이 더 커졌다.
"와따메, 인심 쓰는 짐에 그냥 나도 빨치산으로 쳐주제 무신 웬수졌다고 말얼 그리 꽝아리 백히게 허고 그래쌓소. 집 떠나 산에서 빨치산덜허고 한솥밥 묵고 살먼 빨치산이제, 빨치산이 워디 시험치고나서 되는 것입디여?" 원종구의 느릿하면서도 할말은 다 하는 소리에 대원들은 그만 와아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되얐소, 그 이약 거기서 끊고, 다른 동무덜 의견 듣기로 허겄소." 이태식은 말씨름이 더꼬리를 무는 것을 막았다.
"지기럴, 나넌 이도저도 아니먼 글먼, 핵교 운동장에 축구뽈이여 머시여." 원종구는 입술이 부어터져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그는 유별나게 혼자서만 총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그가 빨치산에 끼여 있으면서도 빨치산 취급을 받지 못하는 이유였다. 그는 입산하게 된 연유부터가 희한하게 남달랐다. 그는 산 가까운 마을에 사는 빈농이었는데, 작년 가을어느 날 빨치산들의 보투 때 쌀짐을 지고 따라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물론 쌀짐을 진것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쌀짐을 진 네댓 사람은 으레 그렇듯 산 어느 지점에선가 돌려보내졌다. 돌려보내면서 수고했다고 쌀 몇 됫박씩을 나눠주었다. 빨치산한테 등짐질을 해주었다는 것만도 경찰에서 알면 그냥 넘어가지 않을 죄인데, 쌀까지 얻어가지고 왔다는 것은 죄도 큰 죄가 될 일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입을 봉하기로 단단히 약조를 했다. 그 일은 무사히 넘어가게 되었다. 그런데 그는 슬그머니 딴 생각이 들게 되었다. 등짐을 져주고 쌀을 얻어 온 것이 아무래도 신기하고, 그 대가가 쏠쏠해 일거리치고는 할 만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빨치산의 보투를 기다려 등짐지기를 자청하고 나서게 되었다.
그는 서너 차례나 등짐을 졌고, 그때마다 쌀됫박을 얻어 갔다. 그런데,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했던가. 그는 누구의 입놀림에 의해서 경찰의 의심을 받게 되었다. 경찰에게 잡혀다가 도망을 쳐 산으로 빨치산을 찾아들고 말았다. 경찰을 피해 빨치산한테 피신해온 그는 웃음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더 웃음거리가 된 것은, 그는 총이라면 질겁을 했다. 어찌나 겁이 많은지 총이라면 아예 만지지를 않으려고 했다. 그런 겁보가 빨치산의 등짐을 져다주고 살려고 한 똥배짱은 또 어디서 생긴 거냐며 대원들은 그를 웃음거리로 삼았다. 그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산에서 겨울을 맞았고, 총도 갖지 않은 몸으로 두 차례에 걸친 군토벌대의 그 무서운 공세 속에서도 용케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짝으로 더트먼 우리 빨치산 세력이 약헌디다가, 들판이 넓은께 개덜도 배치가 덜 되어 있을 것이고, 곡식도 여축이 있을 것 같구만이라. 일단 한 분 나서보는 것이 좋겄구만이라." 조원제는 분석적인 의견을 내놓았다. "이, 맞소. 나 생각도 그려서 그짝으로 가보잔 것이요." 이태식이 반색을 했다. 더 이상 의견이 없어서 그들은 그쪽을 보투지역으로 정했다. 그 동안 후방부는 기능이 약화되어 보투는 부대별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이태식의 부대는 산자락을 밟으며 강행군을 시작했다. 밤 사이에 일을 해내려면 왕복길이 빠듯했던 것이다. 서너 시간을 줄기차게 걸어 담양 언저리에 이르렀다. 날씨가 싸늘하게 추운데도 그들의 몸에는 땀이 끈적하게 내배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무성한 대나무숲들이 담양인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들은 퇴로확보가 용이하면서, 규모를 갖추고 있는 마을 하나를 골라냈다. 먼저 마을 양쪽으로 정찰대를 내보냈다. 규모를 어지간히 갖추고 있는 마을에서는 무장한 치안대를 두고 있는 경우가 흔했던 것이다.
"치안대도 야경꾼도 웂구만이라." 정찰대의 보고였다. "잉, 아조 잘 되얐소. 부대럴 둘로 갈라 한 부대넌 경비럴 보고, 한 부대넌 보투럴 허기로 허겄소. 보투넌 한 집에 두 사람씩 배치허고, 경비 스는 대원덜이 짊어질 것도 챙기도록 허씨요." 이태식이 신속하게 명령했다. 부대가 반으로 나눠지고, 곧 행동이 개시되었다. 둘씩 짝을 진 그들은 큰 집들부터 골라 담을 타넘었다. 조원제도 문간채가 딸린 집의 토담을 넘었다. 마당이 넓었고,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아서 그렇지 안채는 꽤 컸다. 쌀가마니깨나 쌓아놓고 사는 살림인 것을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조원제의 눈길은 안채의 끝방에 박혀 있었다. 밤이 자정을 넘었을 텐데 불이 켜져 있었던 것이다.
"장 동무, 쩌 방에 누가 안 자고 있는갑소. 안 시끄러울라먼 쩌 방부텀 더터야 쓰겄소." 조원제는 옆의 대원에게 속삭였다. "하먼이라. 쩌 주딩이부텀 막아야제라." "자아, 갑시다." 조원제는 총을 옆구리에 바짝 붙이며 발끝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당을 가로질러 곧 토방에 이르렀다. 댓돌에는 흰 고무신 한 켤레와 운동화 한 켤레가 나란히 놓여 있었다. 조원제는 운동화를 참 오랜만에 본다고 생각했다. 그때 불쑥 손이 내밀리더니 운동화를 집어들었다. 그리고 운동화가 자신의 눈앞으로 쑥 다가들었다. 조원제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옆의 장 동무는 운동화를 빨리 집어넣으라는 손짓을 했다. 조원제는 똑같은 손짓을 상대방에게 해보이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그는 운동화를 조원제의 바지주머니에다 쑤셔넣었다. 그리고, 자기는 고무신을 얼른 집어들더니 양쪽 바지주머니에 한 짝씩을 쑤셔넣었다. 조원제는 가슴이 찡 울리는 것을 느꼈다. 상대방이라고 운동화가 탐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는 서슴없이 양보를 하고 있었다. 그건 문화부중대장에 대한 대접일 것이었다. 조원제는 장문태가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빈농 출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냈다. 자신은 학교 다니면서 얼마든지 신어 본 운동화였다. 그는 이따가 운동화를 고무신과 바꾸리라고 작정했다.
조원제는 마루로 성큼 올라섰다. 장문태도 뒤따라 올라왔다. 조원제는 문고리를 슬그머니 잡아당겼다. 방문은 열리지 않았다. 총끝으로 방문을 툭툭 쳤다. "누, 누구여!" 방안에서 울린 놀란 소리였다. "소리 크게 내덜 말고 싸게 문 열어. 밤손님잉께." 조원제의 나지막한 대꾸였다. "아이고메..." 곧 숨이 막히는 듯한 소리가 들리고, 조금 있다가 문고리 벗기는 소리가 났다. 조원제는 방문을 확 열어젖혔다. 속옷바람인 한 사내가 팔을 번쩍 치켜올렸다. 조원제는 따스한 훈기를 느끼며 방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겁에 질린 사내는 총구에 밀리며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고 있었다. 방바닥에는 호롱불이 밝혀져 있었고, 그 옆에는 책이 한 권 펼쳐져 있었다. 아랫목의 이불은 방금 사람이 빠져나온 흔적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사내가 엎드려 책을 읽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심야삼경에 독서라. 태평세월이로구나. 조원제는 사내가 대학생일 거라고 짐작했다.
"학생이여?" 조원제는 불쑥 물으며 검정고무신 신은 발로 펼쳐진 책의 한쪽을 걷어올렸다. "예에..." "대학생이시여?" "예에..." 책이 덮이고, 조원제의 눈에 들어온 제목은 "괴도 루팡"이었다. 조원제는 일시에 비위가 확상하고 말았다. 밤늦게까지 책을 읽고 있는 것에 대한 호감이 정반대의 감정으로 뒤집혀졌다.
요런 반동새끼, 밥 배터지게 처묵고 뱃대지 아랫목에 깔고 탐정소설 쪼가리나 일고 자빠졌어! 조원제는 사내의 배에다 총구를 들이대며 내쏘았다. "느자구웂는 새끼, 쌀 워딨어!" "예에, 아, 아부지가 광 열쇠럴 갖고 있는디요." 질겁을 한 사내가 부들부들 떨며 대답했다. "가! 느그 아부지 방으로." 조원제는 총끝으로 사내의 배를 푹 찌르며 턱짓을 했다. "아이고메!" 사내가 엉덩이를 뒤로 쑥 빼며 또 숨막히는 듯한 소리를 토했다. "잡새끼, 엄살떨지 말엇!" 조원제는 사내의 장딴지를 걷어찼다. 사내를 앞세우고 널찍한 마루를 타고 안방 쪽으로 갔다.
"아, 아부지, 아부지, 얼렁 일어나씨요. 바, 밤손님덜이 오셨구만요. 아부지, 싸게 일어나랑께라." 사내는 방문을 마구 흔들어댔다. "엉? 머시여! 뉘기여?" 방안에서 울리는 당황한 소리였다. "아부지, 밤손님덜이 왔당께라. 싸게 광 열쇠 내노씨요. 지가 시방 잽혀 있응께요." "머시여!" "워메 내 새끼 워짤끄나!" 방안에서 거의 동시에 울리는 남녀의 목소리에는 이제 잠기운은 없었다. 방문이 금방 열렸다. 두 사람이 마루로 허둥지둥 나왔다.
"옛소, 열쇠, 여그!" 어둠 속에 쇠들 부딪치는 소리가 맑게 울렸다. "장 동무, 이 사람 델꼬 가서 쌀가마니 끌어내게 허씨요." 조원제는 열쇠꾸러미를 장문태에게 넘겼다. "싸게싸게 움직기려. 핑핑 말 안 들으먼 배꼽에 빵꾸 뚫버뿔 것잉께." 장문태가 총을 휘두르며 살벌하게 내질렀다. "야아야, 이 양반덜이 시키는 대로 싸게싸게 혀라." 목이 메인 여자의 다급한 말이었다. "잔소리 말고 자네넌 싸게 밥상이나 챙겨." 남자가 여자한테 내쏘았다.
"무신 밥상얼 챙겨라?" "아 이 양반덜 저녁밥 묵어얄 것 아니여. 요런 행차럴 혔는디 저녁밥이나 지대로 묵었겄어." 남자는 나이든 값을 하느라고 제법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으쩌제라? 묵다 냄긴 식은밥뿐인디라." "급헌디 뜨신밥 새로 허겄능가. 고것이라도 싸게 챙게 오소." "잉, 알겄소." 여자가 허둥거리며 마루를 내려섰다. 조원제는 입에 군침이 고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봇씨요, 광에 있는 곡석 다 가지가도 존께 존 일 헌다고 우리 아덜헌테넌 해꼬지허덜 마씨요. 저것이 독자요." 남자가 조원제 앞에 두 손을 모았다.
"누가 해꼬지헌답디여?" 조원제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이, 고맙고 고마우요." 남자가 허리를 굽신거렸다. "지도원 동지, 다 되얐구만이라. 근디, 광에 쌀가마니가 칠팔 개나 되는디, 아까와서 워쩌제라?" 장문태가 토방으로 올라서며 말했다. "이 사람덜도 묵고 살아야 허덜 않겄소?" 조원제는 기왕 가져가지 못하는 것 말이나 후하게 해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으쩔께라, 밥얼 딱딱 긁어도 한 그럭 택밖에 안되는디." 부엌에서 상을 가지고 나오며 여자가 볼멘소리를 했다. "집구석, 살림사는 것허고는!" 남자는 벌컥 내쏘고는, "시장허실 것인디 요것이라도 싸게드시제라. 원하시먼 뜨신 밥얼 얼렁 헐 것잉께요." 그는 목소리를 바꾸어 말했다. "와따메, 요 짐치냄새!" 장문태의 입에서 격하게 터져나온 소리였다. 조원제도 확 풍겨오는 김치냄새를 맡았고, 그 순간 이빨 사이사이에서는 군침이 지르르 흘러나왔다. 너무나 오랜만에 맡는 김치냄새였다. 조원제의 눈앞에는 문득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장 동무, 시간이 웂소. 밥언 싸들고, 짐치넌 입에다 몰아넣고 뜹시다." 조원제가 말했다. "그러제라." 장문태는 주머니에서 보자기를 꺼내 밥그릇을 엎었다. 보자기를 묶어 혁대에 찬 다음 김칫그릇을 집어들었다. "드시제라." 장문태는 입안에 고인 침을 꿀떡 삼키며 조원제 앞으로 그릇을 내밀었다. "장 동무 먼첨 드씨요." "시간 웂당께라." 장문태의 재치있는 대꾸였다. 조원제는 더 사양하지 않고 두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입에 몰아넣었다. 장문태도 거침없이 손가락으로 김치를 집어 입에 몰아넣었다. 두 사람은 으석으석 김치를 씹기 시작했다. 조원제는 김치맛에 취해 눈이 저절로 사르르 잠겼다. 설이 지나 신맛이 감도는 김치는 유난스레 입맛을 돋우었다. 소금이 유일한 반찬인 산생활에서 그들에게 김치만큼 그리운 반찬도 없었다. 갈치속젓으로 담은 잘 익은 김치를 맘껏 먹어보는 것이 모든 빨치산들의 꿈이기도 했다.
조원제와 장문태는 두번째로 볼이 미어지도록 김치를 입에 몰아넣고 그릇을 비웠다. 두사람은 김치를 씹어대며 토방을 내려섰다. 조원제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입에 가득 찬 김치 때문에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광 앞에서 쌀이 가득 찬 배낭 하나씩을 짊어졌다. 그리고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그때였다. "나가그라, 썩 나가! 우리 집서 줄 것 아무것도 웂다. 당장 나가라니께!" 뒤에서 들려온 외침이었다. 조원제와 장문태는 반사적으로 몸을 홱 돌렸다. 그러나 그 외침이 무슨 뜻인지 조원제는 금방 깨달았다.
"저 잡것얼 팡 쏴뿔께라?" 장문태가 성급하게 말했다. "아니요, 저건 우리럴 해꼬지헐라는 소리가 아닌 것이요. 경찰덜이 조사나올 때럴 생각혀서 우리헌테 아무것도 준 것이 없다는 것얼 옆에 집덜에 미리 광고허는 것이요." 조원제는 장문태를 끌어당기며 빠르게 설명했다. "고것이 그리 되는게라?" "갑시다, 싸게." 두 사람은 쌀무게에 눌리며 고샅의 어둠을 헤쳐나갔다. 집합장소인 당산나무에 거의 이르렀을 때였다.
탕! 탕!어디선가 총소리가 두 방 울려퍼졌다. 어둠 속에서 갑자기 울리는 총소리는 유별나게도 요란하고 컸다. 조원제는 머리가 심하게 울리는 충격을 받으며 그때까지 입안에 가득 차있던 김치맛이 싹 가시는 것을 느꼈다. 총을 힘껏 움켜잡으며 어둠 속을 여기저기 살폈다.
당산나무 아래에는 대원들이 반 이상 와 있었다. 그들은 쌀이 든 배낭들을 진 채 앉은 자세로 총을 들고 있었다. 그들의 놀라움과 긴장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지도원 동무, 개덜 아니겄소?" 강경애가 조원제 옆으로 다가오며 목소리가 급했다. "금메요, 총소리가 더 안 나는 것이 이상스럽소. 혹시 우리 대원이 오발했는지도 모르겄소." 조원제는 침착해지려고 애쓰며 사태파악을 하려고 했다.
"누가 오발했드라도 위험허요. 싸게 떠야제." "그렇제라. 곧 대장이 올 것이요." 두 사람은 더 말을 하지 않았다. 묵직한 배낭을 짊어진 대원들이 허둥지둥 모여들고 있었다. 조원제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서 미리 인원파악을 해나갔다. 이태식이 경비조를 이끌고 돌아왔다. "총소리가 우리쪽에서 났는디, 워쩐 일이요?" 이태식이 대원들을 향해 대뜸 내놓은 말이었다. "야아, 지가 총질얼 혔구만이라."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대답했다.
"무신 일이 났소?" "야아, 우리 몰르게 도망질헐라고 혔구만이라." "워찌 됐소, 그 사람?" "주, 죽었구만요." 잠깐 동안 침묵이 흘렀다. "싸게 떠야겄소. 대원덜 워찌 됐소?" 이태식이 물었다. "보투조는 다 왔구만요." 조원제가 대답했다. "되얐소. 짐들 갈라 지는 것은 여그부텀 뜨고나서 허겄소. 출발이요." 이태식의 부대는 예정된 퇴로를 따라서 신속하게 마을을 벗어났다. 대나무숲들이 여기저기서 그 특유의 서걱거리는 소리들을 내고 있었다.
그들은 산굽이를 두어 번 돌아 짐들을 나눠지게 되었다. "워째그나 보투에서 사람얼 죽이먼 인심이 사나와지는디..." 이태식의 침통한 말이었다. 인심을 잃게 되는 것도 그렇고, 군경의 역선전 재료로 이용되는 것도 그렇고, 좋을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의심스러운 것을 한 자를 없앤 대원을 책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조원제는 이태식의 마음을 다소나마 가볍게 해줄 무슨 말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새벽녘에 무등산의 백아산 쪽 기슭에 도착했다. 그들은 중대별로 자리를 잡고 불을 피웠다. 새벽의 추위도 매운데다가, 강행군을 멈추자 몸에 끈끈하게 밴 땀이 식으면서 추위가 엄습했던 것이다. 불은 그냥 모닥불을 피웠다. 입산 초기에 자주 피웠던 "구들불"은 상황이 불안해지면서 차츰 피울 수 없게 되었다. 구들불은 준비가 번거로웠고, 하룻밤이라도 안전하게 잘 수 있을때 피우는 것이었다. 구들불은 땅을 한 자 정도의 폭과 깊이로 길게 파내고, 그 구덩이에다 불을 피웠다. 나무들이 다 타서 불덩이만 남으면 그 구덩이를 중앙으로 잡아 천막을 쳤다.
그리고 구덩이에는 얄팍한 돌들을 걸쳤다. 그러면 불기운으로 천막 안이 훈훈해지면서, 돌들은 열기를 품어 그대로 구들장이 되었다. 대원들은 양쪽으로 갈라져 누워 발들은 모두 구들장을 따라 나란히 모았다. 그렇게 눕게 되면 발만 따뜻한 것이 아니라 땅에도 열기가 스며 장딴지까지는 따스함을 느낄 수 있었다. 구들불을 피우고 자면 잠도 달았고, 아침에 일어나면 몸도 가뿐가뿐했다. 그 구들불을 피우는 방법은 일찍이 전남의 구빨치들이 고안해서 써먹게 됨으로써 전북과 경상도로 퍼져나간 것이었다.
조원제는 모닥불이 활활 타는 것을 보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그는 잠이 좀 많은 편이었고, 짧은 시간에 깊은 잠을 자는 남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담배를 피우지 않는 그는 대원들이 담배를 피우는 동안에 코까지 골며 깊은 잠에 빠지기가 예사였다. 담배를 다 피운 대윈들이 흔들어 깨우면 그는 눈을 감은 채 "한 대씩 더 피우제" 하고는 했다. 그래서 그의 또 하나의 별명은 "한 대썩 더 피우제"였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깊이 자다가도 일단 눈을 떴다 하면 언제 잤느냐 싶게 큼직한 눈이 또릿또릿해져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 신속하게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 제일 신기해하고, 이해할 수 없어 하는 사람이 강경애였다.
그녀는, 뱃속에서부터 빨치산으로 타고난 별난 체질이라고 결론짓고 말았다. 사실 조원제 자신으로서도 속시원한 해명을 할 수 없는 처지라서 그녀의 결론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불이야, 불!" "싸게 꺼, 싸게!" "지도원 동지 아니라고!" 조원제의 솜바지에 불이 붙고 있었고, 네댓 명의 대원들이 달려들어 불을 끄느라고 소란을 일으켰다. 잠결에 다리를 잘못 뻗어 불이 옮겨붙은 모양이었다. 조원제는 그것도 모르고 잠이 들어 있었다.
불을 끄는 소란에 조원제는 부시시 눈을 떴다. "워째 요리 야단덜이여?" 조원제의 잠 덜 깬 소리였다. "지도원 동무 옷에 불이 붙었었소." "쪼깐 늦었드라먼 큰탈 날 뿐혔소." "워디 딘 디 웂소?" 대원들이 입을 모았다. "에이, 따땃허니 존디, 쫀깐 있다가 끄제." 그가 눈을 껌벅거리며 한 말이었다.
군토벌대의 제사차작전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삼차작전과 마찬가지로 전남북도당 지역과 지리산 일대에 걸친 것이었다. 그러나 도당과 지리산의 빨치산들 입장에서는 각기 세 번째 당하는 공세였다. 사차공세를 맞는 빨치산들의 기세는 삼차 때와는 달랐다. 일월의 혹한에 비하면 이월의 추위는 그들에게 별다른 위협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추위의 혹독한 속박에서 어느 정도 풀려나게 된 그들은 그만큼 기동력을 발휘해가며 토벌대에게 대응해나갔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날씨의 덕을 보게 된 것과는 반대로 새로운 어려움이 생겼다. 추위보다 더 가혹한 복병이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 뜻밖의 복병은 "보아라 부대"와 "사찰빨치산"이었다. 그 두 가지 복병은 모두 투항한 빨치산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아라 부대"는 남원 군전투사령부에 소속되어 지리산토벌대의 길잡이 노릇을 했고, "사찰빨치산"들은 각 경찰서의 사찰계에 소속되어 각 지역토벌대의 앞장을 섰다. 그들은 목숨과 지난날의 산생활과를 맞바꾼 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빨치산들의 퇴로를 미리 차단시키게 하거나 매복을 치게 했고, 비상선을 기습하게 하거나 접선장소를 포위하게 했고, 환자트나 비트를 손가락질해서 공격하게 만들었다. 이 뜻밖의 사태로 빨치산들이 입는 피해는 엄청났다.
이해룡의 부대에서 "보아라 부대"의 배신행위를 파악한 것은 군작전이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는 이월 십오일경이었다. 그때는 이미 환자트 거의가 공격을 당한 뒤였다. "어디서나 소수의 배신자들은 있게 마련이오. 그런 자들을 미리 색출, 처단하지 못한 우리의 불찰이 반성되어야 하오. 그리고, 이미 적이 되어버린 그자들을 당장 박멸할 수 없는 한 감정은 무용지물이오. 우리가 그자들에게 보복하는 길은 우리가 모든 것을 새롭게 일신시켜 그자들이 아무 쓸모가 없게 만들어버려 적들이 그자들을 없애게 하는 방법뿐이오." 김범준 소장의 침착하고 냉정한 말이었다.
그래서 첫번째 대두된 안건이 전혀 다른 골짜기로 이동을 하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건 곧 취소되었다. 다른 도당과의 관계가 무너지고, 지리가 익숙하지 못하면 오히려 예상하지 못한 피해를 입을 위험이 있었던 것이다. 두번째로 제시된 의견이 지역을 그대로 지키면서 모든 투쟁방법을 바꾸자는 것이었다. 그 의견을 채택하기로 결정하고 모든 것을 전면적으로 바꾸게 되었다. 선요원들의 비밀루트가 바뀌었고, 그에 따라 접선장소가 바뀌었으며, 부대의 이동선과 함께 비상선들도 바뀌었다. 그러자니까 그들의 고생은 갑절로 커졌다.
"시부랄눔덜, 좆대감지 단 새끼덜이 잔생이 해묵을 짓거리가 웂어서 동지덜 폴아묵고, 죽이는 짓거리로 나슬 것이여. 오살육시럴 혀서 죽일 눔덜이제." "하먼, 고것덜이 워디 인종이여. 즘생만도 못헌 개잡녀러 것덜이제. 참말로, 고것덜 잽히기만 허먼 나 손으로 기엉씨 오살육시럴 허고 말것이여." "허, 가당찮소 오살육시. 고런 인두겁얼 쓴 새끼덜언 이마빡에서부텀 발끝까지 하로에 한치썩 포럴 떠감스로 지눔덜이 진 죄럴 뼛속까지 애리고 씨리게 알게 혀서 수십 날로 죽여야 써." "이, 고것 좋으요. 고런 싹수머리웂는 새끼덜이 이름얼 붙여도 보아라 부대가 머시여, 보아라 부대. 보라니 머럴 보라는 것이여. 즈그눔덜 그 잘난 꼬라지 보고 우리보고도 그리 되라는 것인가? 호로개상녀러 새끼덜!" 그들은 몇 명씩 모여 앉으면 으레 "보아라 부대"에 대해 이렇듯 분노를 터뜨리고, 증오를 끓였다. 그러나 보아라 부대원들은 쉽게 잡히지 않았다. 그럴수록 그들의 눈은 계급없는 국방군복을 입은 보아라 부대원들을 찾아 번뜩거렸다.
지리산의 이월은 일월에 비해 맑은 날이 많았다. 햇볕이 오래 머무는 남쪽 골짜기의 양지바른 등성이의 눈은 녹아내리기도 했다. 바람이 없는 날 한낮의 햇볕은 졸음이 올 정도로 포근했고, 언뜻 봄이 아닌가 착각을 일으키게도 했다. 그러나 해가 떨어지면서부터는 어김없이 추위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낮에 녹아내린 눈은 다시 얼어 빙판이 되었다. 그러다가 날이 돌변해 앞이 막히도록 눈발을 퍼부어대기도 했다. 비행기는 날마다 쉬지 않고 삐라를 뿌려댔다. 그리고 귀순권고 방송도 계속되었다. 그 방송에서 "보아라 부대"에 대한 선전도 나왔다. 주저하지 말고 어서 귀순해 보아라 부대원들처럼 자유대한의 품에 안겨 승공전선의 일꾼으로서 충성을 다하고 새마음 새뜻으로 새인생을 설계하라는 내용이었다. 어떤 빨치산들은 그런 방송을 하는 비행기를 향해 총을 갈겨대는가 하면, 욕을 퍼부어대며 감자를 먹이기도 했다. 감자는 주먹 하나만 먹이는 것이 아니라 두 손, 두 다리를 동원해 차례로 먹이고,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머리통으로도 먹여댔다.
지리산에서와 마찬가지로 도당의 빨치산들도 "사찰빨치산"에 대한 증오와 분노가 뜨거웠다. 사찰빨치산들이 하는 일도 보아라 부대원들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어스름이 내리고 있는 속에서 하대치의 부대는 토벌대 이개 소대에게 쫓기고 있었다. 포위를 뚫고 다음 산으로 붙으려는데 갑자기 나타난 다른 부대의 공격을 받고 뒤로 밀리다보니 산줄기를 잃고 산밭이 있는 야산들 사이에 놓이게 되었다. 그것을 기회라고 생각하는 모양으로 토벌대는 세차게 추격을 가해오고 있었다. 하대치도 위기를 느꼈다. 토벌대를 따돌릴 뾰족한 방법이 없이 그대로 쫓기기만 하다가는 또 앞을 차단당하면서 포위당할 위험이 컸던 것이다.
토벌대의 통신망은 그런 의외의 상황을 곧잘 만들어내고는 했다. 그런 궁지에 몰리기 전에 무슨 방법을 써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하대치의 마음은 초조하기만 했다. 이 쪽이 쉰 한명이니까 토벌대 이 개 소대하고는 한바탕 맞붙어서 결판을 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승산있는 싸움을 벌일 만한 지형지물을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하대치는 부대원들을 이끌고 야산굽이를 돌았다. 그때 그의 눈이 커졌다.
"이, 되얐어!" 그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그의 눈에 띈 것은 초가집 두 채와 그 뒤로 펼쳐진 대밭이었다. "동무덜, 쩌그 저 대밭에서 개덜허고 한바탕 혀야겄소. 날도 침침해지고, 대밭쌈이야 개덜이 우리 당헐 수가 웂응께로. 맘덜 단단허니 묵으씨요." 하대치가 기운차게 외쳤다. 그 목소리가 나흘을 굶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었다. 하대치의 부대는 이제 쫓기는 쪽이 아니라 유인하는 쪽이 되어 있었다. 하대치의 명령에 따라 밭두렁에 의지한 그들은 토벌대를 향해 총을 쏘기 시작했다. 상황이 바뀌자 토벌대들도 신속하게 흩어지며 응사를 해왔다. 토벌대의 자동소총이 숨가쁘게 총소리를 토해내고 있었고, 그것을 엄호삼아 토벌대들은 진격을 해오고 있었다. 토벌대들은 병력과 화력의 우세를 믿는 탓으로 언제나 공격이 적극적이었다.
"동무덜, 모다 대밭으로 들어가씨요!" 마침내 하대치가 명령했다. 기다리고 있던 빨치산들은 삽시간에 대밭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그들은 발밑을 조심해가며 대밭 중간쯤까지 이동했다. 대밭을 제멋대로 걸었다가는 대를 쳐내고 남은 밑동에 발바닥을 찔리기 십상이었다. 그 끝은 대창과 똑같이 날카로워서 한번 찔렸다 하면 발바닥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상처를 냈다. 아이들이 멋도 모르고 대밭에서 뛰다가 밑동을 밟아 그 끝이 발을 뚫고 발등까지 솟기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래서 밤에 대밭에 들어가는 것은 금물이었고,도둑놈도 대밭으로는 쫓지 않는 법이었다.
대밭은 한결 더 어두웠다. 그들은 가로로 땅바닥에 다 엎드렸다. 그리고 총들을 겨누었다. 대밭에서 총격전을 하는 것은 양쪽이 서로 어려운 일이었다. 우선, 대들이 무질서하게 서 있어서 낮에도 시야의 방해가 심했다. 거기다가 촘촘하게 선 대나무들은 총알의 진로를 방해했다. 동그란 대나무에 부딪친 총알들은 제멋대로 방향을 바꾸어버렸다. 흔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떤 총알은 대나무를 빙르르 감고돌아 쏜 쪽으로 되날아오는 경우도 있었다. 재수가 없으면 자기가 쏜 총알에 자기가 맞아 죽을 수도 있는 대밭전투였다. 그래서 대나무밭에서 싸울 때는 땅바닥에 바짝 엎드려 사격은 약간 높게 가하는 것이 상책이었다. 서서 움직이다가는 어떤 총알에 맞아 죽을지 모를 일이었다. 대밭전투는 화력전이 아니라 경험전이었다.
토벌대가 총을 난사해대며 대밭으로 밀려들기 시작했다. "사겨억 개시!" 하대치가 명령했다. 대밭에는 서로 쏘아대는 총소리가 진동했다. 총알에 맞은 대나무들이 비명 비슷한 이상한 소리를 내며 떨어댔다. 그 바람에 대나뭇잎들이 서로 엇갈리며 몸을 비벼대는 소리들이 소란스럽게 일어났다. 그리고, 몸을 낮추지 않은 토벌대 쪽에서 비명들이 울렸다. 빨치산들이 쉴 새 없이 총을 갈겨대고 있는 가운데 강동기와 천점바구는 각기 열 명씩의 대원들을 데리고 왼쪽과 오른쪽으로 빠지고 있었다. 좌우협공을 가할 계획이었다. 상대방들이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치려는 것이 하대치의 생각이었다.
천점바구는 비어 있는 초가집을 등지고 토벌대에게 사격을 시작했다. 그 반대편에서는 강동기가 공격을 해대고 있었다. 토벌대는 대밭 속에 갇힌데다가 삼면공격을 당해 이중으로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토벌대 쪽에서는 비명과 아우성이 뒤엉키고 있었다. "포위다! 후퇴, 후퇴!" 이런 외침도 터지고 있었다. 토벌대들은 자동소총을 난사해대는 가운데 후퇴를 해대고 있었다. 천점바구와 강동기는 그 뒤를 따라붙고 있었다. 대열이 흩어져버린 토벌대들은 짙어진 어둠 속으로 제각기 내달리고 있었다. 하대치는 연락병을 띄워 천점바구와 강동기의 추격을 막았다.
"대밭에 죽어자빠진 개덜헌테 건빵이고 머시고 묵을 것이 있을 것인디..." 누군가가 한말이었다. "모다 가서 맻이나 죽었는디 조사허고, 무기고 묵을 것이고 챙게봇씨요." 하대치는 대원들에게 지시했다. 그리고 자신은 천점바구와 강동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토벌대 사망자는 모두 열여섯이었다. 대원들이 모아온 전리품들 중에는 과연 건빵이며 담배며 카라멜 같은 것들이 있었다.
하대치는 출발에 앞서 인원점검을 시켰다. 그런데 두 명의 결원이 생겨 있었다. 그때서야 하대치는 이대대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알았다. "싸게 유 동지럴 찾으씨요, 유 동지!" 하대치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서둘러댔다. 이대대장은 머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대밭에 죽어 있었다. 하대치는 그를 붙들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의 죽음이 너무나 허망하고 기막혔던 것이다. 그는 특이한 경력을가진 구빨치였다. 제주도 사삼투쟁에 나섰다가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목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사십 구년 구월의 대탈출사건 때 검거를 피해 입산한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 그는 그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그 동안 온갖 고난을 무릅쓰며 투쟁해온 그야말로 백절불굴의 전사였던 것이다. 그런 그가 싸움 같지도 않은 싸움에서 죽어버렸다는 것이 하대치를 못견디게 했다. 그는 곧잘 유순한 웃음을 지으며 해방이 되면 제주도로 자리회를 먹으러 가자고 말하고는 했었다.
하대치는 가슴에 구멍이 뻥 뚫린 것 같은 상실감을 안은 채 이대대장의 선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까운 사람은 가도 싸움은 계속해야 했으므로 자리를 비워둘 수는 없었다. 그는 천점바구의 강동기를 놓고 밤새껏 고심했다. 천점바구는 강동기보다 나이가 어렸고, 강동기는 천점바구보다 투쟁경력이 모자랐다. 그러나 통솔력이나 투쟁력은 두 사람이다 눈금을 읽을 수 없도록 근수가 어슷비슷했다. 하대치는 새벽녘에야 마음을 정해 먼동이 터오는 것을 보고 연락병을 지구사령부로 보냈다. 사령부도 상황에 따라 떠돌고 있는 입장이라서 이동이 있기 전에 빨리 일처리를 해야 했다.
햇발이 퍼지기 전에 연락병을 돌아왔다. 사령부에서는 하대치의 생각을 그대로 받아들여 결정을 내리고 있었다. 하대치는 곧 대원들을 집합시켰다. "동무덜, 지끔부터 당이 결정헌 이대대장얼 발표허겄소. 이대대장에 천점바구 동무, 천점바구 동무가 맡었든 중대장언 외서댁 동무로 결정되얐소." "워메! 쩌것이 무신 소리다냐!" 너무 느닷없는 발표에 놀란 외서댁의 입에서 터져나온 소리였다.
"조용히 허씨요. 발표 다 안 끝났응께." 하대치가 냉엄하게 일갈하고는, "당의 결정얼 모든 대원덜언 박수로 환영허고, 앞으로 새로 임명된 간부덜얼 중심으로 더 합심혀서 해방투쟁에 나스기럴 바래겄소." 그는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다 함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아침햇살 속에서 대원들의 박수를 받고 있는 천점바구와 외서댁의 거치고 마른 얼굴에는 더없이 밝은 웃음이 피어나고 있었다. 하대치는 천점바구와 강동기를 놓고 고심한 끝에 결국 투쟁경력 우선의 원칙을 따랐던 것이다. 그점을 이따가 따로 강동기에게 일깨우려고 그는 생각하고 있었다.
"나 겉은 눔헌티넌 택웂이 과민헌 자리제라." 천점바구가 못내 쑥스러워하고 겸손해하며 대원들에게 밝힌 소감이었다. 그러나 그는 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염상진 대장님, 지럴 잠 보시씨요. 지가 요러크름 대대장이 되얐구만이라. 앞으로 더 열렬허니 투쟁혀서 지도 기연씨 대장님맹키로 될라능마요. "나가 요런 출세 헐라는 것이 아니었는디, 우리 냄편 체면 안깎았응께 다행이구만요." 외서댁이 눈물을 찍어내며 한 말이었다.
"축하해요, 외서댁 동무. 두 분이 이렇게 된 게 정말 너무 기뻐요." 김혜자는 외서댁을 붙들고 좋아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외서댁은 그런 김혜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천점바구를 붙들고 좋아하고 싶은 김혜자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었던 것이다. 보름이 넘어도 군작전은 끝날 줄을 몰랐다. 으레 보름이면 끝나리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것이 빗나가자 빨치산들은 당황했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오래 굶으면서 싸우느라고 기진맥진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난 두 차례와는 다르게 작전이 보름을 넘기자 그들은 신체적으로 지친데다 심리적으로도 지치고 있었다.
천점바구의 대대는 기습당한 사령부를 구해내기 위해 토벌대의 측면을 치고들었다. 그러다보니 산중턱에서 토벌대와 정면으로 맞붙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토벌대의 수는 천점바구네보다 세 배 이상 많았다. 천점바구의 대대는 사령부가 위기에서 벗어날 때까지 그 병력을 상대로 싸워야 하는 일종의 결사대 임무를 띠고 있었다. 그의 대대가 한 가지 유리한 것은 너덜겅을 중심으로 해서 비탈의 윗부분에 위치해 있다는 것이었다.
토벌대들은 수적인 우세를 이용해서 밀고 올라왔다. 마침 너덜겅의 바위들은 그렇게 크지 않았다. 천점바구는 대원들에게 바위를 몇 개씩 앞에 쌓아 방어벽을 급조하게 했다. 바위들을 들어낸 자리는 자연스럽게 몸을 들어앉힐 수 있는 공간이 되었다. 토벌대들은 바위들에 몸을 감춰가며 맹렬한 기세로 총을 쏘아댔다. 총알이 충분한 천점바구네 대원들도 아래를 향해 마구 총을 갈겨대고 있었다. 총알들이 바위들에 부딪쳐 튕겨나가고, 돌조각들이 폭탄의 파편처럼 흩뿌려지고 있었다. 천점바구는 총을 쏘면서도 토벌대의 우회공격을 경계하고 있었다. 앞장섰던 토벌대 서너 명이 비명을 지르며 바위들 위를 구르기도 하고 고꾸라지기도 했다. 토벌대 쪽에서 먼저 총소리가 멎었다. 천점바구도 사격을 중지시켰다. 총소리들이 멎자 산에는 갑자기 한밤중 같은 적막이 밀려 들었다. 천점바구는 숨을 들이켰다. 그런 깊은 적막은 수없이 경험하는 것이면서도 전혀 익숙해지지 않고 언제나 괴이쩍고 생소했다. 토벌대 쪽에서 뭐라고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점바구는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새로운 작전지시겠구나 생각했다.
"동무덜, 쪼깐만 더 젼디씨요. 곧 연락병이 오먼 뒷등생이럴 빨딱 넘어갈 것잉께." 천점바구는 대원들을 향해 의식적으로 여유있게 웃어보이며 말했다. 외서댁과 눈길이 마주쳤다. 머리에 붉은 띠를 질끈 동여맨 그녀는 눈을 찡긋해보였다. 토벌대들이 다시 사격을 시작했다. 산의 적막이 산산이 깨져나가면서 산울림이 파도로 일어났다. 천점바구도 사격명령을 내렸다. 총소리들은 더욱 요란하게 뒤엉켰다. 양쪽에서 사격이 한창 불붙고 있었다.
"대대장 동무, 쩌그 봇씨요. 멫 눔이 기올라오고 있소!" 천점바구는 아래를 주시했다. 토벌대 대여섯 명이 납짝 엎드려 바위들 사이사이에 몸을 숨겨가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총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천점바구는 그들이 수류탄 공격을 하기 위한 돌격대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그리고, 정신없이 사격을 해대는 것은 그들을 엄호하는 동시에 이쪽의 눈을 속이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었다. 천점바구는 먼저 공격을 하기로 했다.
"동무덜, 동무덜 앞에 쌓인 바우뎅이덜얼 각단지게 밑으로 굴리씨요!" 그건 천점바구가 가끔 써먹는 방법이라서 대원들은 그 명령을 금방 알아듣고 사격을 중지했다. 그리고 바위들을 굴려내리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크고 작은 바위들이 바위투성이인 너덜겅 위를 굴러내리며 서로 부딪쳐 튕겨오르고, 깨지며 처박히기도 하고, 구르는 바위에 부딪쳐 엉뚱한 바위가 굴러내리기 시작하고, 삽시간에 바위사태가 일어나고 있었다.
토벌대 쪽에서 사격이 뚝 그치며 외침들이 터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비명과 아우성이 요란했다. 그때였다. 오른쪽에서 갑자기 총소리들이 터져올랐다. "기습이다!" 천점바구가 외치며 총을 들었다. 그러나 때는 너무 늦어 있었다. 토벌대 이삼십 명이 총을 갈겨대며 거기에 대응해 전열을 바꿀 여유가 없었다. 전열을 바꾸다가는 전멸할 것 같았다. 천점바구는 순간적으로 외쳤다.
"후퇴, 후퇴! 왼짝으로 후퇴!" 그의 대원들이 허둥지둥 너덜겅 위를 뛰기 시작했다. 총알들이 바위에 부딪치며 돌조각을을 튕겨올렸다. "으왁!" 대원 하나가 비명을 토하며 바위들 위에 곤두박혔다. "동무, 이 동무!" 천점바구가 달려가 그 대원을 붙들어 일으켰다. 그리고 서너 발짝 옮겼다. "동무덜!" 천점바구가 이렇게 외치며 비틀비틀하다가 총과 붙들고 있던 대원을 놓치며 푹 고꾸라졌다. "안돼요, 천 동무!" 여자가 부르짖으며 천점바구에게로 내달았다. 그 여자는 천점바구를 일으켰다. 그리고 꼭 남자들이 하듯이 상대방을 양쪽 어깨에 걸쳤다. 그러는 동안에도 너덜겅 위에는 총알들이 빗발치고 있었다. 천점바구를 어깨에 걸친 그 여자는 비척거리며 너덜겅을 벗어나고 있었다. 너덜겅을 다 벗어나 몇 걸음 옮겼을 때였다.
"엄니이-" 그 여자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천점바구와 함께 무너져내렸다. "쩌것이 누구 소리여!" 그들에 앞서 너덜겅을 벗어나 뛰고 있던 외서댁이 홱 돌아섰다. "아니, 쩌것이, 쩌것이!" 천점바구와 김혜자가 쓰러져 있는 것을 발견한 외서댁의 눈이 뒤집혀 졌다. 그녀는 그들을 향해 뛰려고 했다. "안돼요. 외서댁 동무도 죽소!" 뒤따라오던 대원이 외서댁의 팔을 낚아챘다. "요것 노씨요!" 외서댁이 팔을 뿌리쳤다.
"대장덜이 다 죽어뿔먼 우리넌 워쩔 것이요!" 그 대원이 소리쳤다. 그때 외서댁은 자신이 중대장이라는 것을 퍼뜩 떠올렸다. 그리고, 이미 토벌대들은 너덜겅 위를 밟기 시작하고 있었다. 외서댁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뛰씨요, 싸게 뛰씨요!" 외서댁은 울음 섞인 소리로 외치며 뛰기 시작했다. "천 동무우... 천점바구 동무우..." 가슴팍에서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김혜자는 간신히 천점바구를 부르며 팔을 뻗치고 있었다. "김 동무, 그냥, 그냥 가제..." 배가 피범벅인 천점바구가 김혜자 쪽으로 가까스로 기며 팔을 뻗치고 있었다. 토벌대들이 총을 난사해대며 너덜겅을 중간쯤 넘어서고 있었다. 천점바구와 김혜자의 손이 겨우겨우 맞잡혔다.
"천 동무우..." 김혜자의 일그러진 얼굴에 웃음이 피어나는 듯싶었다. "김 동무우..." 천점바구의 얼굴도 약간 웃는 것 같으면서 김혜자의 손을 잡은 팔이 부르르 떨렸다. 서로가 처음 잡은 손이었다. "인공 만세에..." 천점바구의 입에서 가늘게 흘러나온 소리였다. 그리고 그의 머리가 땅바닥으로 푹 떨어졌다. 김혜자는 천점바구를 향해 눈을 번히 뜬 채 숨이 끊어져 있었다.
외서댁은 하대치에게 천점바구의 죽음을 보고했다. "머, 머시라고, 천 동무가!" 하대치는 눈을 부릅뜨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어깨가 축 쳐져내리며 멍한 얼굴이 되었다. 그 얼굴이 점점 핏기가 가시고 있었다. 그러더니 눈 가장자리가 파르르 떨리고, 콧날이 씰룩거리고,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찼다. 그는 돌아섰다. 그의 넓고 두꺼운 어깨가 들먹거리기 시작했다. 대원들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모두 눈시울을 적시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원들은 천점바구를 새삼스럽게 떠올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대치의 눈물을 처음 보았던 것이다. 천점바구의 비중을 새롭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이틀 뒤에 군토벌대의 작전이 끝났다. 이월이 다 가고 있었다. 하대치는 외서댁을 앞세우고 천점바구가 죽은 장소를 찾아갔다. 안창민과 이지숙, 강동기도 그들을 따라나섰다. 그리고 부대원들이 뒤를 따랐다. 손을 맞잡은 천점바구와 김혜자의 시체는 너덜겅 옆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두 남녀의 그 예사롭지 않은 모습에 직감적인 반응을 나타낸건 이지숙이었다. "두 동무가 좋아하는 사이었나요?" 이지숙은 외서댁에게 낮고 빠르게 물었다. "그랬제라. 이승서 못 이룬 뜻 저승으로 감서 이룬 심이구만요." 외서댁의 목이 메었다.
이지숙은 눈물을 찍어냈다. 대원들이 안창민의 지시에 따라 시체 옆에서 대여섯 걸음 떨어져 있는 큰 소나무 아래 구덩이를 팠다. 하대치와 안창민이 천점바구의 머리 부분을 들었고, 이지숙과 외서댁이 김혜자의 머리 부분을 들었다. 그리고 다른 대원들이 두 사람의 몸을 받쳐들었다. 두 주검을 정성스럽게 받쳐들면서 그들 모두는 마른 풀들 아래서 새싹들이 파릇파릇 돋아오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두 사람의 맞잡은 손은 구덩이로 옮길 때도, 구덩이 안에 눕혀지면서도 풀어지지 않았다. 구덩이에 다시 흙이 채워지는 동안 안창민은 준비해온 한지에 붓글씨를 썼다. 천점바구, 김혜자 두 동지의 묘비 비문은 소나무의 껍질을 벗기고, 그 속살을 깎아낸 자리에 붙여졌다. 속살을 깎아낸 자리에는 송진이 내배 있어서 한지는 풀칠이라도 한 것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한지의 먹물은 소나무에 스며들게 되어 있었고, 한번 스며든 먹물은 사람의 몸에 문신을 한 것과 마찬가지로 소나무와 그 수명을 함께하는 것이었다.
평장의 묘 위에 너덜겅에서 판판한 돌들을 골라다가 옮겨놓았다. 이지숙이 어디선가 진달래가지를 꺾어다가 돌 위에 올려놓았다. 그 가지에는 열릴락말락한 꽃망울들이 몇 개 달려있었다. 백 일에 걸친 군토벌대의 동계대공세 동안 전남북과 경남, 그리고 지리산에서는 일만팔천여 명의 빨치산들이 죽어갔다.